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덥지 않다. 그렇다고 시원하다든지, 춥다든지 하는 상태는 아니다. 바깥이 끔찍하게 덥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섭씨 몇 도쯤 떨어진 실내를 시원하다거나 춥다는 말로 형용한다면 그것은 겨울을 꿈꾸는 늦가을과 매서운 겨울과 겨울을 그리워하는 이른 봄을 무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땀이 안 나서 기분이 좋긴 하다. 대구의 미칠 듯한 여름기온은, 마치 갓 아프리카에서 이민을 온 툴랑카 씨가 고향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나 같은 황인종에겐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짜증나게 더운 날씨다. 뭐, 아무튼 지금 이 방의 날씨는 쾌청함이다. 날씨는 쾌청하지만 내 팔다리는 전혀 쾌청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렇지. 묶여있나?
근처엔 아무 기척도 없다. 나는 끝없이 침착한 나 자신에 대해 칭찬하며 슬며시 눈을 뜬다. 당장에 보이는 건, 허공에서 흘레붙은 암, 수모기 한 쌍. 나는 멍하니 보다가 팔을 휘둘러 발칙한 두 연놈을 제거하려 하지만, 뒤로 포박된 두 팔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다. 다행히도 모기들은 저들끼리 바빠서 나를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슬프게도 수모기는 죽어버리고 암모기는 어슬렁어슬렁 내게 날아오겠지. 경계를 풀면 안 된다.
초점을 돌린다. 뭐……생각보다 좋은 환경은 아니다. 세 평? 네 평, 쯤 되는 작은 방에 벽장, 이부자리, 책상 겸 밥상인 듯한 앉은뱅이 책상과 나를 제외하면 있어야 할 것도 없어 뵈는 곳이다. 냉방 되었다고 느낀 것은 단순히 지형 탓에 바람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거나 산 중턱에 있는 집이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충분히 쉴 산소가 부족한 것 같기도. 이런 곳에 날 가두고 뭘 하려는 거지, 나는 가진 게 쥐뿔도 없고 내장도 건강치 않고 강제 노역할 힘도 없는데. 굳게 닫힌 문 너머로도, 높이서 곱게 햇빛 한 줄기 받아들이고 있는 창문으로도, 매미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르르……. 탈출할 수 있을까. 칼도 없는데. 아, 챙겨올걸 그랬어.
갑자기 문이 열린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아이의 목소리다.
"깼어요?"
나는 급히 그 쪽을 본다.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역시나 라고 할까, 요즘 아이답게 다리부터 하얗고 자잘한 흉터 하나 없다. 작고 얇고 귀여운 다리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본다.
"으구어."
젠장. 입에 재갈이 물려있다. 왜 몰랐지?
"아, 미안해요. 풀어드릴게요."
라면서, 아이는 나에게 달려온다. 아, 위험한데. 아이는 허공에 검은 실개천을 풀어놓으며 발랄하게도 달린다. 검은색 아래로는 흰 색만 있으니 꼭 머리카락만 날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내게로 와 재갈을 풀며 창에서 날아들어오는 빛처럼 밝게 웃는다.
"오자마자 풀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눈을 감는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눈 앞에 가슴팍을 들이민다면 눈을 감는 게 예의일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감각 정보의 70%를 담당하는 시각을 닫으니 다른 곳으로 여력이 쏠린다. 이를테면 아주 작은 아이의 숨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귀가 움직인다거나, 땀이 나는 지 약간 상큼한 아이의 향기를 맡느라 코가 바쁘다거나……이미 아이의 그림자는 내게서 벗어났고, 내 입술과 이는 이미 자유로워져 있다. 팔다리는 풀지 않는다. 왜지? 풀어준다며.
"자요?"
아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목소리가 떨린다는 것은 화가 났거나 슬프거나 성대의 떨림이 평소보다 강할 때인데, '자'와 '요' 사이의 음 간격이 넓으니 슬픈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람이 깨어나서 사람을 보고 다시 잠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린다고 벌써 자냐는 이야기지? ― 나는 아이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오른쪽 눈만 살짝 든다.
"어."
아이가 없다. 두 눈을 다 뜨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는 벌써 등을 돌리고 자기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머리칼이 부드러운 빗자루처럼 찰랑거린다. 아이가 등을 돌린 채로 내게 소리친다.
"일어나면 불러요."
나는 다급하게 아이를 불러 세우려 소리친다.
"자, 잠깐만!"
효과가 있다. 아이는 환한 얼굴로 돌아보더니 다시 내게 달려온다. 아까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는데, 저 아이의 하얀 원피스, 재질이 얇다. 게다가 날씨 탓인지 아이는 땀을 흘리고 있어 옷이 착 달라붙어 있다. 저런.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지만, 아이라지만, 최소의 부끄러움도 없는 걸까. 그게 없다기엔 나이는 퍽 있어 보인다. 열 하나, 혹은 열 둘 정도. 그 정도면 웃어도 팔자주름이나 눈가주름이 지지 않는 나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정말 순수한 녀석이거나……정말 순수한 아이다. 그래서 지금 아이의 미소는, 이런 더러운 상황에서도 나를 흐뭇하게 만든다. 아니면 내가 과하게 침착해서 허상이 보일 만큼 미친 거겠지. 내 감상과 고민과는 상관 없이 아이는 활짝 핀 미소로 말한다.
"일어났다!"
가식 없는 순수한 기쁨이 느껴져 온다. 나는 마주 웃는다.
"이름이 뭐야?"
"저……
아이는 뭔가 큰 비밀을 간직하기라도 한 듯이 수줍게 말했지만, 평범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의 껍데기 속에 진주가 알알이 박혀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아이에게 빙긋 웃어준다.
"그래, 지연아. 어른 계시니?"
아이는 찰랑찰랑 고개를 흔든다.
"으응, 나밖에 없어요."
기회다. 개자식, 열이 좀 받겠군. 자기 아이 때문에 힘껏 벌인 납치극이 끝날테니. 나는 묶인 다리를 들어 보이며 말한다.
"정말? 그럼, 지연아. 이것도 풀어줄래?"
멍청하긴! 납치자 주제에 애를 데리고 있다니! 그것도 애한테 내 존재를 들키다니! 도대체 이렇게 허술한 납치자가 어디 있을까? 나는 온몸으로, 특히 3cm는 올라갔을 법한 입 꼬리로 아이의 아버지를 비웃는다. 아마추어 같으니라고.
"싫어."
뭐지? 싫다고? 갑자기 아이는 표정에서 표정을 지운다. 나는 멍해지고 아이는 풀이 죽은 건지, 기분이 나빠진 건지 웃지 않는다. 아이의 조그마한 입술이 열린다.
"어렵게 데려왔는걸."
나는 침묵한다. 판단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판단력, 녹는다. 녹아서 투명해진다.
"무슨 소리야?"
아이는 오물조물 손을 만지며 말한다.
"어렵게 데려왔어. 나, 겨우겨우, ……찾아서, ……. 가게 안 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아이의 작고 하얀 손을 보다가, 내뱉는다.
"네가 날?"
아이는 죄를 추궁 당한 마냥 조심스럽게 끄덕인다. 빛이 바랜다.
바깥에서 매미가 더럽게도 울어댄다. 원래의 여름을 찾아달라고 신음하는 것일까, 땅 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땅으로, 굼벵이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발악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고문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심판자로서 직무를 다하는 것인가. 그 목적이 절대로 '암컷 찾기'는 아닐 처절한 울음이 세상을 관통할 듯이 쏘아진다. 관통 당한 세상은 울분에 가득 차 더욱 거센 열기를 뿜어댄다. ―결국 이 더위의 주범은 매미인 것이다. ― 그러나 매미는 나무 그늘에의 극진한 신뢰로 세상에 코웃음 친다. 흥, 해 볼테면 해보라지!
나는 매미처럼 웃는다.
"거짓말 마. 어서 풀어줘."
별안간 매미의 웃음이 그친다. 그리고 또 난데없이, 아이는 입을 비쭉 내밀고 고개를 숙이더니 나를 한 번 발로 찬다. 그리곤 미동도 않는다. 나는 물론 아프진 않지만, 그러나 다시 매미가 웃기 시작하고, 나는 매미가 웃어야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한다. 나는 아이를 노려본다. 내 시선은 아이의 길게 내려온 앞머리에 부딪히고 굴절해서, 끊어진 아이의 눈물을 떨어뜨린다. 하나……세 방울. 나는 그 세 방울뿐인 눈물을 막는 것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매미가 눈치 보듯 웃음을 그친다. 확실히 방은 덥지 않지만, 나는 폭포마냥 굽은 등줄기로 땀 한 방울을 흘린다. 식으며 열을 뺏어가며 땀은 날아가고, 나는 돋아나는 소름에 대한 핑계거리 하나를 정립한다. 이놈의 땀, 이놈의 땀이 내 열기와 열의와 열정을 납치했구나. 이놈, 이제는 눈물을 흘리는구나. 왜?
"…왜?"
아이는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끊어 툭툭 흘리기만 한다. 이래서야, 나는 그 눈물을 닦든지 먹든지 간에 뭐라도 할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다. 아이의 말문이 트이게 하는 주술 같은 것은 없는 걸까, 글쎄, 있어봐야 저 투명하고 맑은 두 눈물에 녹아버리고 말걸? 매미가 웃는다.
"오빠."
아이가 다가온다. 스르륵, 검은 빛 머리칼로 내 시야를 매혹하며, 내 안에 작은 등을 누이곤
"가지 마세요”
나의 탈출을 저지한다.
"따뜻해요."
아이가 잠꼬대처럼 흐릿하게 말한다. 그새 잠든 건가. 나는 나의 품에 다소곳이 앉아 잠든 아이의 정수리를 본다. 좋은 냄새가 나는 듯하지만, 차마 코를 갖다 박지 못한다. 그러면 아이가 깰 것이다. 대신 나는 눈을 천장에 고정하고 생각에 잠기기로 한다. 내가 이런 애한테 납치를 당했다고? 나 참.
비가 온다. 그래서 매미는 웃기를 그쳤다. 더 이상 비웃을 만 한 태양이 없다. 비웃지 못하게 된 매미는 슬퍼 울지 못한다.
비가 와서일까, 등이 춥다고 징징거린다. 그렇다고 얘를 등에 업을 순 없잖아. 순간 옷안으로 수줍게 들어오는 작은 입김. 어느 샌가 나를 안은 듯이 안긴 아이는 내게 따스함을 내어주고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아이의 동동, 거리는 깜찍한 고동을 느낀다. 그것은 전염성이 있어서, 나까지도 둥둥, 아이와 이 벽에 나의 살아있음을 역설하게 만든다. 나의 생명력을 느끼기라도 한 듯 아이는 몽롱한 목소리로 나를 덥힌다.
"오빠."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말한다.
"어."
그러고는 혼자 말하는 듯 조곤조곤, 입맞춤이라도 하듯 달라붙어 부드러운 입술로 거품 같은 숨을 내쉰다. 나야, 따뜻하긴 하지만, 이러다간 온몸이 축축하게 젖겠는걸. 나는 어깨를 조금 흔들어 아이를 떼어낸다. 아이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 숙여 웃어준다. 오늘따라 많이 웃는 것 같은데. 그러나 아이는 다시 얼굴을 묻는다.
"오빠는, 무서워요?"
"뭐가?"
입술이 살갗 바로 위 얇은 옷에 닿아서, 생각보다 간지럽다. 무섭다면, 혹시나 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말하는 건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아이가 말한 것의 의미도, 선을 넘는다는 것도.
"납치…당했잖아."
"글쎄, 납치한 사람이 애라서. 어른 계신 건 아니지?"
아이가 입술을 비쭉거리는 게 느껴진다. 간지럽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다시 어깨를 흔들어 아이를 떼어내고 말한다.
"연아."
"응?"
아이가 날 올려다본다. 나는 진지하고 느릿하게 말한다.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왜 날 납치했어?"
아이는 고개를 숙인다. 꼭 고개를 숙여야 대답을 하겠다는, 하지만 고개를 숙이면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처럼. 아이는 침묵하고, 나도 침묵한다. 아이는 아까처럼 울진 않는다. 하지만 벌을 받는 마냥 아무 말도 않는다.
빗방울이 거세어진다. 아마 그도 답답한 것일까. 우주를 아우르는 그가 과연 우리의 꼴을 보고 있을까. 관심은 갖고 있을까. 관심이 있다면 내게 이런 시련을 주었을까.
"그래, 이렇게 말해봐야 말……." 한숨
"혼자였어요."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약간 울먹거리며 말한다.
"무슨 말이야."
그리고 아이는, 약간의 침묵 후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떨리고 있다.
"전에 나, 어떤 아저씨한테, …그래서 배운 대로 안돼요, 싫어요 했는데…TV에서는 그러면, 아저씨 아줌마들도 나오고, 경찰아저씨도 왔었는데, 나는, …싫어요, 해도 아무도 안 오구요, 아저씨는 나보고 조용히 하라면, 서 막 때리구요, 그래서 아저씨네 집에 갔는데…아저씨네 집에서 아이스크림 먹구, 먹었는데, ……."
아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진다. 나는, 눈물을 쏟으며 내게 안겨 들어오는 아이를 멍하니 볼 수 밖에 없다. 납치를 당했었군. 그런데 아이는 그것을 배웠어. 납치를 배운 아이. 아이는 나를 꽉 껴안는다. 나는 잠자코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아이를 더 따뜻하게 해 준다. 팔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나는 아이를 안아주었을 것이다. 제길,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이는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다가 말한다.
"그때 아저씨가, 사람이 혼자가 되면 이, 렇게 한단다, 라고……."
그렇게 배웠나. 나는 답을 찾았지만 기뻐할 수 없다. 그런 걸 가르쳤다고. 나는 어느 샌가 납치당한 자의 타이틀을 잃고는, 상처를 가져 아파 우는 아이 앞에 있는 오빠로서, 아이를 더욱 따스하게 해주기 위해 머리에 입을 맞춘다. 비는 계속해서 창문을 때린다.
"미안해. 물어봐서."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도무지 단수를 모른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저 떨어지는 것만 알고, 자기 말고 수백만 개의 또 다른 자기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 흘러가는 빗방울들은 저 흐르는 것만 알고 자기가 어디로 흐르는지 모른다. 땅을 적신 빗방울은, 하늘이 슬프다는 것은 알지만 다른 것은 알 바가 없다. 그리고 땅은 슬픈 빗방울을 안아주는 것 밖엔 모른다. 그 외의 것은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들은 묵묵히 자기가 아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뜨거운 땅은 천천히 식어가고,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땅은 더 이상 물을 받지 못한다. 물은 쌓인다. 장마의 시작인가. 웃지 않는 매미는 슬퍼 울 것이다. 그러나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땅은 비를 알기 위해 스스로 물을 뿜는다. 아이가 훌쩍이며 말한다.
"…비 새요?"
"아니."
"머리가 축축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아이는 말없이 내 옷에 눈을 닦는다. 이미 젖은 옷은 더 이상 젖지 않고 아이의 눈가를 더 촉촉하게 만들겠지만, 아이는 아랑곳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아이를 혼자로 만들었는가. 혼자여서 상처를 입은 아이를, 누가 혼자로 내버려두었는가. 나는 부드럽게 말한다.
"연아, 친구는? 친구랑은 안 놀아?"
"없어요." 뭐?
"왜?"
"몰라요."
나는 왠지 알 것 같은데. 아니, 나는 알고 있다. 아이가 친구가 없는 이유를. 분명히 그 영악한 녀석들, 아이를 놀렸겠지. 납치 당한 아이라고.
"하."
아이는 나를 올려다본다.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도 남아 있는 얼굴로, 아이는 친구 따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갈색 빛이 은은하게 보이는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것은, 고독의 해결책을 발견한 외로운 자. 나는 묻는다.
"부모님은?"
"아빠는 회사. 엄마는, 안 와요." 난장판이군. 나는 다시 묻는다.
"왜…안 오시는데?"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몰라요."
물론 이런 케이스에 있어서의 인과관계는 비교적 간단하다. 누구나 단번에 파악할 수 있고, 조금 모르더라도 상황을 유추해 본다면 쉽게 나오는 인과다. 그 인과는 다음과 같다.
납치 사건이 일어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녀에의 감독 의무의 소홀을 꾸짖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상황의 판단을 요구하고, 그 불가피성과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질 것을 역설함. 언쟁 후 도주, 혹은 이혼. 간단하다. 이…젠장.
"으아!"
갑자기 소리지르자, 아이가 나를 껴안는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따스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안의 열기를 뽑아내기로 한다. 나는 다시 소리지른다.
"으아아! 제기랄!"
소리는 방안을 범람할 듯 넘쳐흐르고, 나에게 놀라버린 아이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다. 느껴지는 심박은 미미하지만 그 두근거림의 빨라짐이 느껴진다. 두렵나? 무서워? 이 정도로 무서워한다면, 너를 납치한 개자식과 있을 땐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아이의 두려움마저도 뽑아내기 위해 아이의 머리에 연신 입을 맞추고, 얼굴을 들게 해 이마, 코, 볼에도 입을 맞춘다. 입술에서, 아이의 눈물 맛이 난다. 내가 화를 내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떨고 있는 아이를 눈으로 보듬고 볼로 쓰다듬으며 다독인다.
"……괜찮아. 조금 화가 났을 뿐이야."
"나, 한테요?"
나는 아이의 볼에 볼을 댄 채 고개를 흔든다. 절대 아냐. 봐, 너도 고개를 흔들었잖아. 아이는 조금 안심한 듯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떨림을 잡아먹기 위해 아이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그 나쁜 아저씨는 잡혔어?"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범인은 잡혔다. 하지만…고통은 잡히지 않은 아이. 그게 엄청난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상황은 아이를 돕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가두고 감금해, 아이조차도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모든 것을 완화시키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타인'이기 때문에. 지인과 타인 사이의 그 한계는 생각보다 거대해서, 감히 타인은 지인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물론…지인이 되어도 아이의 아픔은 쉽사리 진압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과연 타인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연아, 우리 과자 사러 갈까?"
아이는 한참을 침묵한다. 가만히, 여전히 떨며, 작고 좁은 숨을 쌕쌕 쉬고 있다. 너무 작아서 느끼기 힘든 숨. 나는 아이가 가까스로 그 숨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가쁠 리가 없다. 아이의 숨은 미약하고, 어떤 두려움이 아이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그 작은 가슴이 작은 숨을 쉬는데, 이렇게도 거대한 공포가, 마치 자신은 미약하다는 듯 숨과 함께 새어 나온다.
"가요?"
나는 응, 이라고 반문하거나 응, 이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이내 깨달아버린다. 아이는 외출이 아닌 탈출, 혹은 작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웃는다.
"아냐, 잠깐 나가는 거잖아."
"다시 와요?"
"물론."
아이는 기어코 귀환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배시시 웃으며 나갈 채비를 한다. 우산 하나. 나는 다리를 들어 보인다.
"연아. 이거 풀어줘야지?"
"맞다!"
다리가 풀리고, 팔이 풀려 나는 자유로워진다. 묶여있는 건 너무도 답답한 일이다. 뭘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얘는 어떻게 날 끌고 와서 이렇게 세심하게 뒤처리까지 했는지. 여자아이라서 인가.
나는 어서 가자는 아이의 재촉에 빙긋 웃으며 일어선다. 그리고 몰래 칼을 챙겨 숨기고, 아이의 손을 내리 잡는다.
나와 아이는 손을 잡고 천천히 문으로 걸어간다. 스위치를 누르자 흥겨운 멜로디에 맞춰 문의 잠금 장치가 열린다. 나는 문을 열고, 구속된 자아는 퇴실하고 그 대신 자유의 기운이 집으로 들어가도록 잠시 있는다. 그리고 나는 수 개월, 혹은 수 년간 아이를 가두고 있던 집의 문을 닫는다. 흥겨운 멜로디가 문을 잠근다. 우리는 집을 나선다.
바깥은 빗발이 강력하다. 골목을 잠시 걸었을 뿐인데, 우산으로도 감히 막을 수 없는 떨어지는 방울방울들은 나와 아이의 신발, 발목, 내 바지와 아이의 드레스 밑단을 젖게 만든다. 신발 밑창은 흐르는 물길의 걸림이 되어, 물이 좌우로 흐르게 하여 신발 뒤쪽으로 걸음마다 흔적을 만들 듯, 한두 뼘 정도 바닥을 드러낸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이 정도면 조금 으슬으슬할 법도 한데, 대구는 그런 것 모른단다.
나는 잡은 아이의 손에 약간 더 힘을 준다. 내 키 때문에 더 많은 비를 맞아야 하는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즐거운 표정이다. 분명 아이도 이 길이 동네 슈퍼로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텐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나와 아이는, 주택의 매매자가 매매 당시 '5분 거리!'라고 말했을 법한 지하철 역을 향하고 있다. 이미 15분을 걸어온 이상 그 말은 거짓이 된다. 어쩌면 매매자의 성이 볼트고 이름이 우사인 일지도 모르지. 아이처럼, 신경 쓸 것은 아니다.
대명역 1번 출구, 혹은 입구에 도달하자 이제서야 아이는 조금 불안해진 듯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우산을 접느라 잠시 놓은 작은 손은 바로 내 셔츠로 향한다. 괜히 이리저리 둘러보고, 정체불명의 신음을 내기도 한다. 우산의 똑딱이 단추도 잠근 후에 아이의 손을 잡아주자, 아이는 나에게 꼭 달라 붙는다.
"어디 가요?"
"우리 지하철 탈거야."
"왜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웃어준다. 웃음이 답이 되어 아이를 만족시켜주면 좋으련만, 아이는 자꾸 내 팔을 당긴다. 나는 돌아보지 않는다. 곧 당김이 멈춘다.
원래 대명역은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지만, 비 때문에 더욱 적막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 한 명도 없는 이곳은 더욱 아이를 불안케 하나보다. 목적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아이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려면 사람이 있는 차량에 올라야 할 것이다. 나는 가진 돈으로 아이와 나의 토큰을 구매하고,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계단 중간인데, 바람이 불어 올라온다. 아이는 황급히 손을 아래로 내려 치마를 누른다. 검은 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휩쓸려 찰랑거린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계단을 내려가자 대곡행 열차가 서 있고, 안심행 열차는 들어오는 중이다. 우리는 조금 기다렸다가 안심 행 열차에 오른다.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앉을 자리가 없어 반대쪽 문에 선다. 아이는 좀 안심한 것 같다. 칙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한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있지만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조금 휘청거린다. 나는 팔에 힘을 줘 아이를 끌어당긴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르자, 나는 꼭 고목나무 같은 모습이 된다. 기차 안에서 솟은 고목나무라. 보통은 고목나무에 안긴 아이를 보면 마음에 평화가 드는데, 이 지하철 승객들은 대개가 보통이 아닌가 보다. 아니면 내가 고목나무가 아니거나.
사람들은 힐끗, 안 보는 척하며 나와 아이를 훔쳐보느라 애를 쓴다. 나는 일부러 못 본 척 하지만, 못 보이지도 안 보이지도 않으니 나도 고생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동남쪽에서 이질적인 기운이라도 느낀 듯 돌아보고, 사람들은 안 본 척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인다. 내가 다시 정면을 주시하자, 그들은 다시 나를 본다. 척 보기에 스물 조금 넘어 보이고 실제로 그런 청년에게 열 살쯤 된 애가 안겨있으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생각이 바른 것들은 남매나 친한 사촌지간 쯤으로 보겠지만, 아닌 것들은 분명히 원조교제쯤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저런 음탕한 것이 다 있나' 하는 듯, 징그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겠지. 물론 어느 것도 사실은 아니다. 사실은, 이 안에는 생각이 바르지 않은 것들뿐인 것. 나는 또 무슨 오기인지, 아이의 손을 놓고 그 가녀린 어깨에 손을 올린다. 그러자 아이는 내게 더 파고든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초리가 예리해진다. 우습다. 더욱 오기를 부려보려는 마음이 굴뚝 같지만, 조금만 움직였다간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지팡이가 가차없이 내게 날아들 것 같아 그만둔다. 대치상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중앙로 역에 도착해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내 예상대로, 비가 그쳐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나온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아이의 손을 꽉 잡고 목적지로 인도한다. 곧 진입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거리의 특성상, 차도 지나다니고 사람도 지나다녀 무척 시끄러운 곳이라 놓치기 쉽다. 그걸 아는 듯, 아이는 묵묵히 순순히 따라온다. 지금…준비한대로
나는 아이를 잡아당겨 귀에 속삭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침착하게, 겁 먹은 것처럼 행동해. 소리 질러도 좋아. 아니, 열 발자국 더 가서 비명 지르고 사람들한테 납치 당했다고 소리쳐. 알았어?"
아이는 당황한 건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조용히 말한다.
"왜, 왜요?"
"지금부터 시작이야. 하나, 둘, ……."
"왜 그래요?"
"여덟, 아홉, 열. 빨리 소리질러."
하지만 아이는 소리지르지 않는다. 아파 늘어진 작은 강아지마냥 끙 하는 소리만 낼 뿐, 시선을 끌만 한 비명은 없다. 나는 다시 속삭인다.
"다시 시작한다. 제대로 해."
"…이유를 말해줘요."
나는 한숨 쉬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속삭인 후에, 아이는 아무 말도 않는다. 내가 아이에게 속삭이는 걸 본 시민들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지만, 이내 신경을 꺼버린다. 셋. 대부분이 비 때문에 조금씩 젖어있다. 넷. 예쁜 옷을 입은 사람도,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도 모두 젖어있다. 여섯. 어깨며, 방금 했다는 머리며 물기가 없는 곳이 없다. 일곱. 모두들 갑작스럽게 내린 시원한 비에 감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늘에 대고 욕지거리다. 여덟. 젖는 게 그렇게도 싫은가. 아홉. 이제 곧, 아이의 아픔에 젖어버리면, 나에게 대고 욕지거리를 할까. 열. 아이가 숨을 들이쉰다.
"꺄악! 이 오빠가 절 납치했어요!"
그래, 아이의 신고는 조금 어설펐다. 그냥 살려달라고 하지. 하지만 이 사람들아, 그렇게 대놓고 비웃을 필요는 없잖아? 지금은 납치 실제상황이라고.
내가 품에 감춰두었던 식칼을 꺼내자, 그들의 입에서 조소가 멎어간다. 나는 아이의 가슴에 팔을 두르고 들어올린 후 소리지른다.
"씨**끼들아 다 비켜!"
다양한 얼굴들은 제각각 표현해낼 수 있는 최대한도로 당혹을 담아낸다. 그 당혹을 토대로 일어나는 일은, 조금의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모두 내게서 서너 발자국씩 물러나는 것. 나는 짐짓 만족한 얼굴로, 멀리 보이는 중앙 무대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인형처럼 매달린 아이는 스스로의 역량을 발휘해 완벽한 연기를 하는 중인지, 정말 겁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떠는 목소리로 계속 살려달라고 중얼거린다. 그래. 문득 떠오르는 충동으로, 나는 멈춰 서서 아이를 잡은 팔을 격하게 흔들곤 칼을 아이의 목에 갖다 댄다. 동시에, 아이의 것이 포함된, 숨 들이키는 소리. 원의 넓이가 조금 더 넓어지는 듯하더니, 원 이외의 공간이 서서히 빽빽해진다.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대개는 연예인이라도 있는 줄 알고 왔을 것이다.
그보다도, 상황이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건 꽤 놀라운 일이다. 왠 남정네가 애를 잡고 칼을 들고 있으면 말리기 위해서라도 다가올 것 같은데.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것은, 군중 심리인가? 물론 다가오면 찔러버리겠지만. 나는 칼을 내리고 뚜벅뚜벅 걷는다.
"오지 마라."
나는 그렇게 윽박지르고 중앙 광장의 무대에 올라선다. 마치 콘서트라도 구경하는 듯, 원은 무대를 먹어 치우듯 둘러싼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그 중 한 남자를 가리키고 말한다.
"너, 짭새한테 전화해."
"예?"
"전화 하라고 씨**아, 찔러버리기 전에."
멍청히 서있던 남자는, 내가 칼을 그에게 들이미는 게 아니라 아이게 들이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야 황급히 휴대전화기를 연다. 그리고 주위에, 짭새가 누구냐 물어본다. 저런 멍청한 놈이 다 있나. 어디선가 소리.
"내가 벌써 신고했다, 이 새*야!"
멀리서 한 여자의 괄괄한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이 한 군데로 모이고, 시선의 중심이 된 여자는 잠시 당황한 듯 둘러보지만 꿋꿋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경찰 오기 전에 빨리 애 놓고 꺼지라고!"
직후 이어진 그 여자의 걸쭉한 육두문자. 그리고 손가락을 따라 나에게 움직인 시선들은 서서히 여론을 몰기 시작한다. 그래, 나쁜 놈아,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배운 놈 같은데 배워 봐야 소용이 없네, 쓰레기, 개*끼, 소*끼, 인간아, 병* 같은 놈, 고자……. 이제 와서?
나는 소리친다.
"입 닥쳐 이 새*들아!" 싸해지는 분위기. "요구 사항이 있다! 너희들도 기다려!"
그리고 이윽고, 뭔가 조금 급하지만 경찰이 닥친다. 경찰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흔쾌히 자리를 벌려준다. 차가 멈추고, 경찰들이 내린다. '들'이래 봐야 둘 뿐이지만, 그 중 하나는 권총을 들고 있다. 나머지 하나는 차와 연결된 확성기인 듯, 선이 달린 네모난 것을 손에 쥐고 입에 갖다 댄다.
《쿠륵, 애를 놔 줘라. 너는 포위되어 있다. 도망칠 길은 없다.》
나는 푹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아이에게 조용히 말한다.
"아버지한테 전화해."
“아빠요? 갑자기 왜요.”
“나 대신 널 구해주실 거야. 난 널 구할 수 없어.”
“네?”
그리고 머리를 쳐들어 경찰에게 소리친다. 시선.
"요구 사항이 있다!"
갑자기 천둥이 구르릉 울린다. 소나기인지, 당초부터 까맣던 하늘에서 오늘의 두 번째 비가 주룩주룩 떨어지기 시작한다. 몰려있던 시민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소리지르며 처마 밑, 가게 안으로 옹기종기 들어간다. 나와 아이와 경찰은 대치. 나는 아이를 두른 팔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펼친다. 곧 엄청나게 비가 쏟아진다. 아이는 통화에 성공한 듯 속삭인다. 억지로 확대된 갈라지는 소리.
《말해라.》
그리고 나는, 칼을 버리고 빙긋 웃는다. 소리친다.
"이 애는 한 번 납치를 겪었다! 납치자에게서 살아 돌아온 애다!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축복이고, 기적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 본다. 처마 아래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원래 인질극이 저렇게 시작하냐는 듯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드는지, 눈빛을 밝히고 있다. 저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런 애한테 세상이 얼마나, 엿 같은 대접을 했는지! 친구는 떠나고 부모는 이혼하고, 결국 이 아이는 납치를 했다! 혼자가 되기 싫어서! 무슨 말인지 듣고 있나!"
《거짓말 마라. 애가 무슨 납치를.》
"간단하지! 벽돌, 밧줄이 있는데 왜 못해! 그리고 내가 납치당했다!" 웃음. 웃어도 좋다.
"요구 사항을 말하겠다!"
《말해라.》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 본다. 사람들은 여전히 눈을 빛내고 있다.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돈? 탈출 루트? 영화 같은 전개를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이의 극적인 구출이라던가. 물론 아이는 구출된다. 나에 의해서. 나는 소리지른다.
"이 애를 돌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경찰은 쿠륵, 하는 스피커 소리와 함께 말한다.
《우린 이미 납치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다. 최우선적으로 그…….》
"보호로 되는 게 아니라고!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애를 외롭게……."
"아빠!"
아이가 갑자기 소리친다. 오빠, 라고 외치려던 거 아냐? 아니면. 나는 뒤로 돌아본―던진다. 쾅!
나는 날아간다. 나의 얼굴, 팔, 다리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들이 모두 느리다. 그리고 3m 위에서 맞는 비는 시원하고, 3m 위에서 보는 시민들의 얼굴은 우습다. 모두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을 기억할까. 나는 경찰에게 말한 게 아닌데. 아이는 옆에 안전이 쓰러져있다. 저 미친 놈, 애가 있는데 차를 몰고 들어온다니. 애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가 애를 안 밀었으면 애까지 치고 갈 작정이었나. 애가 아빠, 라고 한 걸 보니 연이의 아버지인가 본데. 저 미친놈. 저러니까 애가…
쿠직.
나는 한 아이를 바라본다. 곱슬곱슬한 황갈색 머리칼의 귀여운 여자아이다. 멀리서 바라보기는 너무도 안타까운, 꼭 내 손에 넣어야 할, 나의 아이다. 나는 버틸 수가 없다.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미 나는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몸을 적시고 있다. 꿀꺽.
가슴이 빡빡하게 조여온다. 자꾸만 벅찬 숨이 튀어나오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욕망, 그 이름이 나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얼굴을 만져보고, 어깨를 보듬어보고, 껴안아보고, 손가락, 발가락도 주물러보고 싶다. 다섯 개의 끝에서부터 훑어가 아이의 작은 몸에, 내 얼굴을 묻고 싶다. 따뜻하겠지……. 아이는 내게 웃어줄까? 따뜻하다며, 나의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어줄까? 웃어줄거야. 착한 아이일 테니까. 착하지, 착하고말고. 어른의 부탁은 함부로 거절하지 못하는 그런……착한 아이니까.
행동에 옮긴다. 나는 놀이터의 미끄럼틀에서, 환하게 웃으며 작은 엉덩이를 땅에 부딪은 아이에게로 걸어…콱.
나는 정신을 잃었다.
평화롭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평화가 정의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질적인 약 냄새를 맡으며, 담요와, 산소가 들어오는 인공 호흡기를 가지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 평화라면, 무한한 평화를 나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병원에 드러누워있는 게 평화라는 게 말이나 되냐고. 물론. 그 누구와의 차이는, 자신이나 혹은 지인이 아파서 병원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평화로울 수밖에. 아, 이대로 5년만 더 누워있으면 안될까. 안되겠지. 많은 사람들에게 폐가 될지도.
나는 힘겹게 눈을 뜬다. 무슨 일인지, 눈 뜨는 일이 낯설다. 시야가 확보되지도 않는다. 빛은 없지만, 눈이 부신 듯, 은은한 빛조차 낯설다. 말 해본다.
"…어."
말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어릴 적부터, 당장 말 하지 않으면 당신의 성검으로 나의 종아리에 평행한 수십 개의 선분을 그려주시겠다던 어머니께 경의를. 어머니덕분에, 이곳에 드러누워있기 전까지 나는 그 힘든 ‘말하는 일’을 손쉽게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귀는 트여있는 듯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그리고 누군가 와락, 나에게 안기는데, 보드랍다. 의사 가운인가. 어, 오빠라니.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 난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는 다 큰 여자는 모른다고. 게다가 여의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데, 이 목소리는, 낯익지도 않…으면 안되겠지.
"연아."
나는 아직도 상처를 가진 아이를 양 팔로 꼭 끌어안는다. 평화롭다, 나의 일탈을 파괴해준 아이를 꼭 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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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텔릭 되어있는 부분과 맨 아랫줄 '평화롭다' 이후 부분은 원본엔 없는 것이고, 이건 수정본이죠.
사실 원본에 있어야되는데 깜빡하고 뺐더니, 주인공이 왠지 착해진 'ㅂ'...
최종 퇴고입니다. 이제 절대 손 안 댈 거에요.
그나저나 들여쓰기한 게 그대로 오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