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환상회랑 작품
글 수 59
(1)네라드 하릴 vs 타라른 라그사군드
대륙력 159년 3월 42일. 게소드 남부 인스라힘 근처, 흰잔디 벌판.
우기를 지나 건기에 들어선 태양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오후. 따가운 햇살에도 벌판은 그리 덥지 않았다. 물기 한점없는 싸늘한 바람이 벌판을 뒤덮은 흰잔디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건기의 하늘은 우기보다 맑은 날이 많지만 오늘은 특히 청명했다. 이 대륙에서 이런 날씨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우중충한 하늘에 색이 바래있던 흰잔디는 오랜만에 색을 되찾았다. 발목 근처도 오지 않는 하얀 잔디들이 언덕 하나없는 평야에 융단처럼 깔려있다. 평화로운 세계였다면 감탄하며 풍경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륙, 갈마내리 테는 순결한 백의 대지에서도 죽고 죽이는 싸움을 강요한다. 벌판 한가운데, 서로를 응시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말이다.
심연에서 출발하여 게소드를 떠도는 얼어붙은 바람이 왼편에 서 있는 자의 회색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한 번도 손질한 적 없어 보이는 지저분한 더벅머리를 한 남자였다. 어린 나이인지 아직 소년의 모습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그러나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적갈색 눈동자에 소년다운 치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듯한, 혹은 그냥 멍해보이는 표정. 그리고 들리지도 않게 달싹거리는 입술은 보는 이에게 신비함과 공포를 동시에 준다. 평범한 인상과 달리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남자를 휘감고 있었다. 구인간치고 꽤 큰 키와 마른 몸은 고정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른 손에 쥔 창은 남자의 키에 반은 더 커보였다. 손목을 뒤로 젖혀 등쪽에 갖다댄 모습이 싸울 태세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눈깜빡할 사이에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다. 여러 가나안 비술의 원형인 가나안 류의 정통 후계자이며, 스승마저 두려워 도망칠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가 바로 이 남자다. '흉사' 네라드 하릴. 어린 나이임에도 강력한 비술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창을 피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와 마주보고 있는 이는 흰 터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펑퍼짐한 옷을 입은 자였다. 터번과 폭이 넓은 의상은 게소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이다. 얼핏 보면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로 곱상한 외모에, 구인간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가 귀부인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네라드보다 더 큰 키와 굴곡이 없는 몸매는 여성으로 보기엔 힘들었다. 중성적인 느낌이 강해 착각하기 쉽지만 남성 의복을 입었으므로 남자가 분명하다. 남성 의복에 맞지 않게 하늘하늘거리는 여성복 재질인 것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유로운 표정과 네라드와 같은 적갈색 눈동자엔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는다. 허리에 찬 곡도는 손질을 잘해놔서 빛을 받아 번뜩였다. 곳곳에 생채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장식용은 절대 아니다. 도시 바깥을 홀로 돌아다니는 사람치고 무장이 빈약해 보이지만, 남자의 정체를 아는 이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한바탕 크게 웃을 것이다. 거울 뒷편에 있는 자를 누가 죽일 수 있겠냐고 말이다. 공해(空海)의 문이라 불리는 능력 할 그레이. 그 능력을 가진 자가 바로 이 사람, '거울의 뒷편' 타라른 라그사군드다. 게소드 제국의 현 황제 멜키아르 라그사 델 에쉴란의 총애를 받는 심복. 황제직속 특무대 에인쟈사드의 서열 3위에 위치한 강자다. 그는 할 그레이로 최고의 방어를 보여준다. 적의 공격이 할 그레이로 향하는 한 어떤 것도 그를 상처입힐 수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네라드?"
타라른이 길 잃은 아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아저씨 마냥 상냥하게 말을 건냈다. 네라드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먼산보듯 멍하니 흰잔디의 지평선에 시선이 가 있었다. 그래도 타라른의 말을 듣긴 들었나보다.
"당신 목에 헤니를 어떻게 쑤셔박아볼까...라고."
중얼거리듯 말해 잘 들리지도 않았을텐데 타라른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라, 그 창 이름이 헤니로구나. 그렇네. 사실 나도 흉사의 길을 가로막는 건 하기 싫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타라른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인스라힘에서 아잘할 누미드 오플세이를 안 죽였다면 이런 짓 절대로 안해. 내가 미쳤게?"
"아잘할."
타라른이 아잘할을 언급하자 네라드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유리알같은 눈이다. 어떤 감정도 없는 무기질의 느낌.
"그래, 칠색가(七色家)의 점쟁이 말야. 그때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어. 네가 죽여준 덕분에 깔끔하게 임무 실패. 그리고 난 멜한테 상쾌하게 박살날 지경이고."
고개를 도리치며 손으로 머리를 짚은 타라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멜은 그의 주인이자 연인, 게소드 황제 멜키아르의 애칭이었다. 게소드는 동성애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곳이다.
"스승은 종종 그를 찾았지."
"에드가 레드...역시 그가 목적이었나. 아잘할은 최근 일년간 레드를 만난 적이 없어."
타라른의 말에 네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더군."
"그런데 왜 죽였지?"
"스승의 흔적을 먹어치우면 게헤나가 더 강해져."
타라른은 어이없다는듯이 반문했다.
"그건 또 무슨 미신이야. 가나안이 미신 천국인건 알고 있었지만."
"미신이 아니야."
네라드의 대꾸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이지만 그 소리로 마치 감정표현을 한 것 같았다.
"가나안 류는 스승의 모든 것을 먹음으로써 완성된다. 친구도 스승의 일부분."
"그쪽 동네는 이해를 못하겠네."
분명 가나안 류의 정통방식은 네라드의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통방식대로 가나안 류를 계승한 것은 손에 꼽힌다. 어떤 제자가 스승과 그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을까.
"못하겠지."
거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 네라드의 말은 타라른에게 들리지 않았다.
"여튼 조금만 시간을 끌면 내 부하들이 올텐데,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겠지? 나도 녀석들 만나는게 무섭긴 한데. 자기들 따돌리고 혼자 딴 계획 세워놨다고 얼마나 뭐라할지."
그렇게 말하는 타라른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걸렸다. 네라드는 언제부터인지 천천히 그를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네라드의 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등 뒤에 있었다. 타라른은 가만히 서서 네라드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그럼 어디 한번 가나안의 흉사를 맛봐볼까. 네라드, 내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어?"
타라른이 팔짱을 끼고 이전과 달리 도발적인 언행을 보이지만,
"모른다. 나는 너를 꿰뚫을뿐."
란 말과 함께 순간 네라드의 몸이 움츠려 들었다 앞으로 튀어나갔다. 스무걸음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고 용수철이 튕겨나가듯한 모습. 그 광경을 본 타라른은 이상할 정도로 여유만만했다.
"급해."
그가 취한 행동은 팔짱을 풀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전투자세라고는 볼 수 없는 행동이다. 이미 네라드는 그 짧은 시간에 그의 애창이 닿는 범위까지 접근했다. 등 뒤로 젖힌 창이 동시에 원을 그리며 움직임을 보였다. 손가락만으로 창을 회전시켜 정면으로 방향을 잡는 네라드. 그리고 마치 고개를 치켜든 뱀과 같은 자세로 타라른을 강습했다. 이 과정은 가속을 멈추지 않고 찰나의 순간에 모두 이루어졌다. 제아무리 반응속도가 빨라도 피할 수 없는 상황. 네라드의 흉사가 타라른의 미간을 꿰뚫었다. 그 순간 네라드는 의문과 위험을 동시에 느꼈다. 감촉이 없었다. 네라드의 창이 급히 회수되고, 가속을 이용해 튀어올라 타라른을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착지 후 자세를 낮추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누가 봐도 네라드의 창이 타라른의 미간을 꿰뚫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빠르네."
하지만 타라른은 뒤를 돌아 네라드를 여유롭게 응시했다. 그의 미간은 멀쩡했다. 다만 창이 찔러온 부분에 변화가 있었다. 타라른의 이마 부분에 있는 원형의 일렁이는 기이한 공간. 주변 환경과 달리 유백색으로 흔들거리는 그 공간은 마치 거울과 같았다. 네라드의 시선이 타라른이 만들어 낸 공간에 집중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네라드는 저런 종류의 힘을 한 번 겪어보았다.
"초위능력."
어느새 공간은 조금씩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네라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타라른이 싱긋 웃었다.
"간을 본거구나."
타라른은 네라드의 행동과 판단이 주저없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이것이 계획된 움직임이란 걸 파악했다. 한 번에 죽일 생각이었으면 방금같은 공격과 이후의 회피기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력을 다한 게 아니겠지. 지나치게 여유만만한 상대에게 탐색은 훌륭한 대응이었다. 덕분에 네라드는 여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 초위능력이 할 그레이란 것도 알진 모르는 일이다. 타라른도 수확이 있었다.
'신체능력으론 상대가 안되겠군.'
네라드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움직임이었다. 타라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초위능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강하다. 그는 왠만한 싸움에선 할 그레이를 사용 안한다. 하지만 방금 네라드의 일격은 할 그레이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반사신경으론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처음부터 비장의 카드를 써야 그나마 대응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타라른도 일반인에 비하면 뛰어난 전사지만 가나안의 흉사는 그런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네라드의 움직임에서 타라른의 뇌리에 누군가가 스쳐지나갔다. 푸른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화려한 검무를 추는 여성. 바람의 엔텔레키가 있다면 그녀와 비슷할 것이다.
'실페르 님과 호각. 혹은 그 이상?'
가나안의 흉사가 얼마나 가진 힘을 발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타라른의 표정은 아직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마음 속은 긴장감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물론 현재 보여준 것이 다라면 타라른의 할 그레이를 넘을 수 없다. 방금 네라드의 속도는 인식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빠르기나 교묘한 기술이 더해진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가나안 류의 비술은 나오지도 않았다. 네라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타라른을 훑어보고 있었다. 탐색의 결과물을 정리하는듯 둘 다 움직임이 없는 상황. 그때 타라른의 양 팔이 올라갔다.
"그럼 해보자."
한숨을 내쉰 타라른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행동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양팔을 정면으로 향한 채 꼼짝도 않는 타라른. 네라드의 경계태세는 변화가 있었다. 낮춘 자세에서 꼿꼿히 서서 두 손가락만으로 창을 느리게 상하로 흔든다. 그것은 마치 창이 흐느적거리는 느낌을 줬다. 네라드는 의문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의문을 훌훌 털어버린듯 가나안의 흉사는 공격을 재개했다. 이번엔 천천히 타라른에게 걸어왔다.
'알 수 없다면 알아내면 된다.'
열걸음 거리까지 다가 온 네라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서서히 창의 상하 움직임을 빠르게 가져갔다. 순간 네라드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간발의 차이로 조그만 무언가가 지나간다. 그리고 연속해서 날아오는 투척물을 구불거리는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피하며 전진해오는 네라드. 유연함과 경쾌함을 갖춘 네라드의 기동에 불을 붙인 것은 타라른의 암기였다. 뾰족한 철심형태의 암기를 언제 꺼냈는지 양 손에서 쉴새없이 날리며 뒷걸음질쳤다. 타라른의 뒷걸음질은 일반인이 앞으로 뛰는 것만큼 빨랐지만 네라드의 전진은 그보다 더 빨랐다. 네라드의 창이 다시 한 번 타라른을 찔러왔다. 복부로 날라 온 창은 첫공격처럼 타라른을 꿰뚫는 것처럼 보였지만 역시 일렁이는 거울의 파도에 삼켜졌다. 하지만 네라드의 창을 멈추지 않았다. 회수한 창이 이번엔 가슴팍으로 날라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거울 안으로 창날은 빨려들어갔다. 타라른은 앞을 바라본 채 옆으로, 뒤로 계속 후퇴기동으로 움직이며 한 두번씩 자신을 찔러 온 창을 할 그레이로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틈날때마다 암기를 날렸다. 그것을 네라드는 창을 한번 까딱해서 막거나 유연한 몸놀림으로 가볍게 피하고 계속 공격을 이어갔다. 숨쉴 틈도 주지 않는 맹폭격이었다. 가나안 류는 오로지 공격하고 또 공격하는 무술. 가나안의 뱀은 먹이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상대가 죽을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가나안 류다. 타라른의 이마에 땀이 흐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뒤로 물러나던 타라른이 갑자기 멈춰선 순간, 타라른도 몸을 한껏 낮추고 기이한 움직임으로 오른편으로 회전했다. 팽이처럼 몸과 창이 같이 회전하더니 옆구리를 노리고 창이 회전력을 한껏 담아 찔러들어왔다. 네라드의 천재성이 그 짧은 시간동안 할 그레이의 특성을 파악하고 인식범위 바깥의 공격을 펼친 것이다. 네라드는 타라른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회전을 통한 속도의 강화는 그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적을 관통한다. 언젠가 타라른이 조금이라도 후퇴범위가 작아진 그 순간을 기다린 네라드의 노림수였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타라른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걸렸어.'
네라드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네라드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창과 팔뚝이 하얀 빛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사람 크기만한 거대한 거울이었다. 거울은 왼손바닥을 중심으로 벌려져 있었다. 그리고 거울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느새 오른손바닥에 작은 거울이 있었다. 창이 큰 거울에 빨려드는 것과 동시에 타라른의 오른팔이 네라드를 덮쳤다.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왼편 큰 거울로 빨려들어간 네라드의 창과 팔이 오른편의 거울로 튀어나오며 네라드 자신에게 향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자해가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네라드의 왼쪽 어깨가 박살나는 광경은 없었다. 오른팔을 거울에서 빼내고 다른 손으로 한바퀴 덤블링하며 뒤로 물러난 네라드는 몇발자국 더 뒷걸음쳤다. 믿을 수 없다는듯 자신을 바라보는 타라른을 노려보며 가슴팍을 왼손으로 훑었다. 의복이 갈기갈기 찢어져 맨살이 드러난 모습. 자신의 가슴을 매만지던 네라드는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석상이 짓는듯한 만들어진 웃음이었다.
"재밌군."
네라드의 말에 타라른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방금 전에 일어난 상황을 되짚어봤다. 그 상황은 반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반응할 수 없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네라드 하릴은 상황을 인식할 수도 없었을텐데 본능적으로 창의 궤도를 바꾸고 몸을 비틀어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창은 아슬아슬하게 가슴팍을 스쳐지나갔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전에 운이 작용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꾼 것은 네라드의 힘이었다.
'가나안의 흉사...그래서 흉사였나.'
네라드 하릴은 악운을 타고났다. 태어날 때부터 이때까지 목숨을 잃을 위기를 수차례 겪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도 네라드의 악운이 발동했다. 타라른도 이제 패를 다 꺼냈다. 한가지 더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에선 사용하기 힘들다.
'기습이 아니면 힘든데.'
방어는 할 그레이의 특기이니 걱정없다. 타라른은 자신의 키만한 큰 거울로 한쪽면의 공격을 모두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공격이 문제였다. 자신의 육체에서만 할 그레이의 거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원거리 공격은 어렵다. 물론 아까처럼 상대의 공격을 되돌리는 반격기는 분명 강력한 기술이다. 다만 네라드에겐 아직 최강의 패가 남아있다.
대부분은 가나안 류의 비술이라고 알뿐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문 필살기. 가나안 류가 비술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전투기술과 별반 다를게 없다. 진정 비술로 불리우는 건 오직 하나뿐. 다른 기술이 약한 건 아니다. 그러나 기술이 어디까지나 기술로 불리는 건 그것이 현실의 기교여서 그렇다. 가나안의 창술은 훌륭하지만 직선적인 찌르기를 넘어설 수 없다. 가나안 류는 창이란 곧고 긴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화려하거나 기이해도 창은 곧게 뻗어나간다. 그러나 비술은 현실을 넘어 비현실을 실현시키는 전투기술이다. 타라른도 한 번 다른 무술의 비술을 본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술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수대에 걸쳐, 수없이 많은 시간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필살의 기술에 쏟아넣는다.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기제를 정하고 정연한 논리 끝에 탄생한 일종의 기적.
"한번 더?"
그새 네라드는 예의 흐느적거리는 창의 움직임을 다시 선보이며 접근해왔다. 타라른은 질렸다는듯 중얼거리며 오른손으로 암기를 던졌다. 그와 동시에 네라드가 뱀의 전진을 닮은 움직임으로 오른손이 던진 암기 방향 반대로 움직이는데,
챙!
오른쪽으로 날라왔어야 할 암기가 네라드가 움직인 왼쪽 방향으로 날라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네라드는 창의 움직임만으로 쉽게 막아냈다. 이번엔 왼손으로 암기를 던지는데 또 오른쪽으로 날라온다. 그리고 이것도 막아내는 네라드. 거리가 좁혀오자 입맛을 다신 타라른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방금은 할 그레이를 이용한 암기 트릭이다. 오른손으로 던지는 척하며 발등에 만들어놓은 거울로 통과시킨 것을 왼손바닥을 통해 내보낸 것이다. 왠만한 반사신경으론 반응하기 힘든 기술이지만 네라드는 이것조차 장난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타라른이 놀랄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더 빠르다!'
네라드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뱀의 움직임을 보였다. 전의 움직임은 뱀의 유연한 형상이 보였지만 지금은 감상조차 못하는 도망가기에 급급해야 할 속도였다. 몸을 숙인 채 땅을 기어가듯 움직이며 타라른을 사정거리에 둔 네라드의 창이 다시 번쩍였다. 정면찌르기. 허벅지를 노리는 창끝을 보고 타라른의 거울이 형성될려는 순간, 창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변했다. 어느새 창의 중간마디를 잡고 팽그르르 회전시켜 공격방향을 하체에서 상체로 옮긴 것이다. 네라드의 몸도 낮은 상태에서 뛰어오르며 자세를 바꿨다. 마치 코브라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과 같았다. 회전하던 창을 움켜쥐고 고공에서 흉사가 덮쳐왔다. 어디로 창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막을 수 없는 것인가. 네라드의 창이 꿰뚫었다. 거울의 공간을. 어느샌가 타라른과 창 사이를 가르며 장대하게 펼쳐진 공해의 문이 흉사의 이빨을 흘려보냈다. 어디로 날라올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허벅지에 형성한 거울을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크기로 확장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울은 타라른과 네라드 사이를 완전히 안 보이게 갈라놓을 정도로 컸다. 형세는 역전되었다. 네라드가 거울 안으로 빨려들어갈 상황이 된 것이다. 할 그레이의 거울은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 문의 반대편은 어떤 곳과 연결되어 있는지 능력자도 알지 못한다. 바다 한가운데일 수도 있고 아이사네칸의 공장 굴뚝 위일 수도 있다. 타라른은 네라드에게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몇초간 거울을 유지했다. 그리고 거울을 없앤 타라른은 헛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 참."
거울에 빨려들어간 줄 알았던 네라드가 아무 일 없다는듯이 서 있었다. 네라드의 창이 먼저 거울 안으로 들어가다 반대편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혔고,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그것을 지지대 삼아 거울 반대편으로 자신을 밀어낸 것이다.
"그 능력..."
한층 귀기가 서린 네라드의 중얼거림이었다. 타라른을 응시하던 그는 자신의 창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슥 창대를 매만지는 동작은 정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말은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명백히 타라른을 향해 말한 선포였다.
"전력을 다해야겠군."
그리고 네라드 하릴은 처음으로 양 손으로 창을 부여잡고 정면을 향했다. 타라른은 그 말이 무슨 뜻이 금새 이해했다. 네라드가 전력을 다한다면 한가지밖에 더 있겠는가.
'가나안 류의 비술. 게헤나.'
어떤 비현실적인 현상을 보여줄지 알 수 없다. 가나안 류는 전설의 괴물 대사(大蛇)를 보고 만든 무술이니 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모든 건 추측일 뿐이다. 타라른은 오랜만에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흥분에 휩싸이는 걸 느꼈다. 도련님처럼 보이지만 그도 어린 시절부터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 역전의 전사다. 그의 주인이 황제가 된 후 타라른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흰잔디가 곱게 흩날리는 이 벌판에서 가나안의 흉사가 자신의 비기를 들이대려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무조건 흘리고 반격한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대일 싸움. 타라른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할 그레이의 거울은 최고의 방패. 비술이라도 흘리면 그만이다. 한편, 네라드는 양손으로 쥔 창을 들이댄 채 다가왔다. 이번엔 타라른도 도망치지 않았다. 방금 전 싸움으로 후퇴기동을 이용한 유인책은 통하기 힘들단 걸 깨달은 것이다. 그대로 가면 체력싸움인데 저 인간같지 않은 놈을 배겨낼 자신이 없었다. 게헤나는 분명 강력할 것이다. 그러나 부담도 크기 때문에 흉사도 함부로 사용 못한 것일테지. 막아내고 반격하면 승리, 못 막으면 패배. 타라른은 마음을 굳혔다. 두 사람은 불과 세걸음 남겨두고 마주보았다. 물러나지 않은 타라른을 보자,
"도망치지 않은 보답을 하겠다."
네라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흉사의 이빨이, 애창 헤니가 울부짖었다.
-키기기기긱!
타라른의 눈이 크게 떠지고 모든 힘을 다해 할 그레이의 거울을 펼쳤다. 거울이 펼쳐지기 직전 본 것은 분명 뱀이다. 창의 색깔과 같이 묵빛의 뱀이었다. 이미지가 아니라 분명 창이 뱀이 되어 꿈틀거렸다. 무엇을 보았든 거울을 펼쳤으니 안전할텐데, 타라른은 소름이 돋으며 불길한 느낌이 오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비술을 발동했음에도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정적이 기분나빴다. 식은땀이 흐르는 걸 닦아내며 거울을 유지한 채 뒤로 슬슬 물러나는데, 그의 앞 지면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땅을 갈아엎는 소리, 그리고 화산이 폭발하듯 솟아나는 흙더미. 타라른의 뒷걸음질하며 도망칠려고 할때 일은 일어났다.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묵빛선이 나선형태로 튀어올랐다. 타라른에게 그것은 전설 속의 대사처럼 보였다. 쏜살같이 찔러오는 그것을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연하게 휘어지며 계속 타라른을 추적했다. 결국 심장을 향해 찔러오는 그것을 할 그레이의 거울로 흘려보내려 했다. 거울이 형성되고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방향을 휙 틀어 그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타라른의 신음성이 짧게 터져나왔다. 흰 벌판을 뒹굴뒹굴 구르며 도망친 타라른은 더 이상 그것이 쫓아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엎어진 자신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도망쳤다면 네가 이겼다."
타라른 앞에 선 네라드의 상태는 안 좋았다. 이제까지 땀 한방울 안 흘리던 그는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무표정하던 얼굴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완전하지 않은 게헤나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게 완전하지 않아?"
체념한듯 허탈한 미소를 짓고선 널부러져 있는 타라른이 반문했다. 도망치다가 터번이 풀어져 한갈래로 땋은 흑청색 댕기머리가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서 있었다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칼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비단결같은 머리칼이 여자의 머리칼보다 아름다웠다. 게소드에선 남자도 길게 머리를 길러 땋는다. 타라른은 이 때문에 더욱 여자로 착각을 많이 받았었다.
"그래서 나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
"지금도 말이 안되는 건데 완전해지면 얼마나 강해질지 궁금하네. 뭐, 볼 일은 없겠지만."
"...아니, 볼 일이 있을지도."
"응?"
죽을 상황인데도 여유를 잃지 않는 타라른이 네라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 오는군."
네라드의 시선이 벌판 저멀리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내 부하들인가 본데."
네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데나툰이군."
이제 타라른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저멀리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데나툰 종족이 저정도 거리까지 왔다면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델 노르그야. 살아난다면 욕 한번 진창 먹겠네."
타라른의 말에 그를 쳐다보던 네라드가 겨누던 창을 거두었다.
"거래를 하자. 너를 살려주겠다. 대신 나를 추격하지 마라."
"거절하면 노르그가 오기 전에 죽이겠지?"
네라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내가 추격 안 한다는거 믿어?"
"안 믿는다."
"그럼?"
네라드는 이번에도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창이 타라른의 복부를 쑤셨다.
"크으!?"
"널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안되니 저 데나툰은 날 추격하지 않겠지."
"과, 과연..."
창에 찔린 복부를 감싸쥐며 타라른은 부들부들 입가를 떨며 계속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급소는 피했으니 제때 치료하면 죽지 않을거다. 거래는 지켰다."
"하하..."
"다음에 만나자. 너는 재밌는 상대였다."
타라른을 보고 고개를 한번 까닥이더니 네라드는 흙먼지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네라드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보던 타라른은 억지로 일으켜 세우던 상체를 조심스레 흰잔디 위에 뉘이고는 힘겹게 중얼거렸다.
"제발 안 만나자. 망할 놈."
-Fin.

야, 이거 지역마다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가 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