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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월루 내원의 담을 넘어서 소로 쪽으로 나온 현원은 익숙한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시태상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에 처음 발 딛었다는 태무산이 있는 방향이다. 그 태무산의 청류대간으로부터 정남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는 세 개의 명산을 낳아놓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사달의 진산이 되는 유수산이었다. 아사달은 북의 유수산 서의 영기산 동의 제곡산이 이루는 삼각형 안에 절반이 걸쳐 있었고 한님이 거하시는 거대한 태궁제궐은 유수산의 중턱부터 기슭의 평지까지 부채꼴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하 거리에서 올려다 보면 제궐은 빼곡히 들어선 화려한 전각과 날아갈 듯 뻗어오른 수십개의 누각들이 산자락에 걸쳐 층층이 쌓인 푸른 구름인 양 보인다.
그러한 제궐과 그에 인접한 구역을 성내(城內), 그 아래 구획을 흔히 성하(城下)라고들 부르지만 제궐 둘레로 특별히 내성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사람 키의 두배 가량 되는 석조 담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딱히 제궐 경비의 취약점이 되지는 않는다. 이 담은 불경한 자가 넘을 수 없도록 강력한 주력(呪力)에 의하여 수호되기 때문이다. 석담에 불과한 이것이 사람들에게 견고한 성곽처럼 인식되는 것은 이러한 연유였다.
아사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로의 끝은 어느 것이나 이 담과 마주치게 되고 거기에는 높다란 석축과 이층 누루로 이루어진 문이 있다. 성하에서 성내로 통하는 문은 총 셋으로 모두 감문위 병사들에 의해 경비되며 성내를 출입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이 문들 중 하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진월루가 위치한 곳은 아사달을 세로로 양분하는 가장 큰 길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지점의 한 구획 전부였기 때문에 성내로 들어가려고 하면 정문이 가장 가깝다. 그러나 현원은 정문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정문과 서문 사이의 담벽에서 적당한 위치에 선 현원은 ‘예의상’ 주위를 대충 둘러보았다. 사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있건 말건 신경쓸 생각은 아니다. 그는 당연히 이곳을 넘어서 들어갈테니까.
대천명국 수밀의 성내로 침입하려던 타국 첩자나 자객이 이 담에 닿자마자 온 몸이 으스러졌다거나 혹은 넘자마자 고꾸라져 온 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던가 하는 일은 물론 단순한 전설이나 뜬소문이 아니고, 이곳 아사달의 백성들은 물론 온세상 사람 누구나 그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월담을 현원은 시도했고 성공했으며 이후 성내 출입에 그 편리한 방법만을 사용하고 있다.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원은 간단하게 주를 외어 무형의 결계를 조금 밀어냈다. 그 다음은 가볍게 바람을 딛고 뛰어넘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궁내에서는 결계를 유지하는데 책임이 있는 천의청의 고관 몇몇이 대경실색을 하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현원은 그런 데에 신경쓰며 천의청 관리들을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하튼 그렇게 도달한 성내가 바로 제궐은 아니다. 성내에는 성하의 번화가보다는 고상하지만 궁궐이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란 듯한 거리와 기와지붕들이 뒤덮고 있었다. 이것은 명가나 고위관리의 가택들이다. 외곽은 주로 명가의 사저였고 중앙 북쪽의 제궐에 인접할수록 관청가에 가까워진다. 이 성내와 제궐 사이에는 또 담과 문이 있고 감문위가 더욱 엄중히 경비하고 있지만 현원은 그쪽 문으로도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대충 골목을 걷고 적절히 월담을 해서 목적지를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천위군 청사로 갈지 동궁으로 갈지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현원은 최근들어 천위대장군보다는 태자와 승주(丞主- 태상제의 성년이 되지 않은 직계 자식)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승주 청경서란이 올 봄에 태자위를 받은 다음 넘치는 애정으로 태자보위가 된 천위대장군은 태자의 검술 교육을 실전 위주로 시키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천위대장군 본인이 직접 상대했다가는 애를 죽여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꼭 지인들 중에 적당한 칼잡이를 물색해서 태자 앞에 들이대곤 하는데 현원은 그중 만만한 상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원은 이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매일 할 일도 없이 진월루에 숨어 뒹구는 것 보다는 칼장난 쪽이 재미있고, 아무래도 정말로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되는 대장군 상대보다는 애들 상대가 더 쉽다. 그러나 태자의 칼끝도 그 스승을 닮아 날로 매서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소한 평온이 언제 깨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뭐어- 그러다가 진짜로 언젠가 칼 맞고 죽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상식에 좀 어긋난 생각을 하며 현원은 동궁 후원의 담 위로 올라섰다.
「여어―!」
담 위에 선 현원에게 바로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는 상대가 있었다. 지금 아사달에 있을 리 없는, 외방 순시 나가있을 22군 좌장 무영이었다. 그게 상당히 의외였기 때문에 좀 얼빠진 목소리로 답하려던 현원은 급격하게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너 언제 여기……야!」
무영의 등 뒤로 검을 든 형체가 달려들고 있었다. 작았지만 매우 빨랐다. 현원이 말 끝에 소리를 질렀을 즈음에는 이미 그 그림자가 무영에게 닿을 듯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태연히 대답하며 무영은 몸을 숙였다. 동시에 손에 쥔 검을 뒤로 빼고 한 발을 뻗어 낮게 돌려찬다.「-와서 잠도 못 자고,」막 달려들던 상대가 거기에 뒷무릎을 채이고 고꾸라지자 무영은 검날을 눕혀 상대의 목덜미를 한번 툭 건드렸다. 승리.「 ―끌려나왔지.」
그렇게 이승주와의 대련을 싱겁게 마무리한 무영은 말을 맺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장군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한창 태자에게 자세를 지도하던 중이라 대장군은 돌아보지도 않았고 무영은 한눈을 판 대가로 곧이은 상대의 반격에 대비할 수 없었다.
「목 베지도 않고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정려는 기세좋게 외치며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무영을 떠밀었다. 이승주 정려 나이 열 넷. 사실 그 나이대의 소년 치고도 작은 몸집이었지만 온 몸으로 부딪혀 오는 데에는 어른인 무영이라도 휘청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곧 균형을 잡은 무영은 바로 들어오는 칼날을 쳐내며 외쳤다.
「당연히 봐 준 거지! 승주마마 목을 베고 나면 내 목인들 붙어있을 줄 압니까!」
「나는 네 목 따위 베어버려도 끄떡없지! 그러니까 진짜로 이길거다-!」
신분의 고하 관계를 아주 당연하게 인식하고 누리겠다는 면에서 어린애 농담 치고 전혀 귀엽지 않은 소리를 뱉으며 제법 날카로운 기세로 찔러들어간다. 무영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그 공격을 받아넘겼다.
「백 년은 먼 소릴! 키나 좀 커서 오시든가!」
「그 주둥이부터 찢어주마!」
「아니 진짜로 격검은 체격인데! 안 본 동안 전혀 안 자랐어!」
「너 진짜 죽여버린다!」
칼날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고 패악스러운 대화 소리는 더 요란했다. 그렇게 두사람은 여전히 담 위에 서있는 현원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대련인지 개싸움인지 모를 격검을 계속하고 있었다. 꽤 살벌해 보이는 광경이지만 어쨌거나 서로 반가워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원래 이승주 정려를 상대해서 가장 잘 놀아주는 사람은 무영이었기 때문이다. 감문위를 제외한 천위군이 군단별로 순번 돌아가며 대략 서너 달 씩 돌고 오는 외방 순시 때문에 22군의 좌장인 무영도 지난 석달 정도는 아사달을 비워야 했다. 오늘 새벽에 도착했다고 해도 원래 일정을 생각해보면 무려 보름 이상 일찍 돌아온 것인데 끔찍스럽게 귀여운 이승주마마 때문에 무영이 휘하 군단을 닦달했다고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담에서 내려서서 다가오는 현원을 향해 천위대장군 렴호군 하연이 뒤늦게 알은척을 했다.
「네놈은 왜 또 거기서 나타나는거냐.」
첫 마디부터 반가운 기색이 아닌 건 당연하다. 현원은 서신과 함께 받았던 청석 패수를 품에서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지요?」
「그래 이 자식아! 담 좀 넘지 말라니까.」
여섯자가 훌쩍 넘어가는 장신에 그 키가 전혀 호리호리해 보이지 않을 탄탄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현원은 전혀 개의치않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하연형님께서 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천위대장군의 패수를 갖고있다고 해도 저같이 수상한 놈이 중문을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현원의 차림새는 확실히 수상한 편이었다. 저잣거리의 거렁뱅이도 머리만은 길러서 묶는 것이 수밀의 풍습이건만 머리칼은 대충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로 흐트려져 있고 옷차림도 범상하지는 않다. 괘자 없이 짧은 포만 두어겹 겹쳐입은 위에 깃이 아래로 곧게 떨어지는 예복 겉옷 형식의 장포를 걸친 것이다. 장포는 몸판도 깃도 그냥 검은색이었고 거기에는 가문을 나타내는 색이나 자수도 없었다. 현원으로서는 때타지 않는 검은 색 고집에 어디서나 누운 자리에서 이불 삼기 위해서 걸치고 다니는 옷이었지만 형태가 고위 명가의 예복 겉옷에 가까웠기 때문에 궐내에서 그런식으로 입고 다니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당연히 통과시키면 안될 일이지. 청석 패를 내보이는 괴이한 녀석이 있거든 당장 포박해서 내 앞으로 끌고 오라고 말해뒀었다.」
「안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하던대로 담 넘어 들어왔다고 하면 팰겁니까?」
「글쎄 나야 뭐 그러려니 하고 싶다만 청란이 네놈을 베어버리겠다고 하던데.」
그제야 돌아보니 과연 태자는 냉랭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현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수려한 이목구비, 조금 찌푸린 단정한 눈썹 아래로 또렷한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담았다. 버럭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호통을 치는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고요히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이답지 않아서 무섭다. 현원은 난처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노력했다.
「아하하… 태자전하, 제가 비록 담을 넘어다니긴 하지만 뭐 딱히 성내에서 나쁜 짓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요……」
「네 행실은 내성을 침입하여 어떠한 해가 되었느냐를 따지기 전에 월담을 한 데서부터 이미 죄가 되는 것이다. 법도는 지키라고 있는 것. 단 한 명이라도 어기는 이가 있으면 기강이 흐트러진다.」
태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현원은 그럼 죄인을 태자가 직접 칼로 베어죽이는 건 법도에 맞는 일이냐고 따져물을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무영과 이승주 정려가 구경거리 났다는 듯 대련을 그만두고 관전하기 적절한 거리에서 야유인지 응원인지를 날려대다가 또 말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야― 너 이제 죽었다. 오랜만에 봤더니 태자전하 검이 대장군을 따라가고 있더라고?」
「현원! 나도 너한테 빚 있으니까 죽지마라. 나중에 내 손에 죽어야지.」
「아아- 승주마마. 그건 좀 어려운 명령이야. 저는 저자식 오늘 죽는다에 다 걸겁니다.」
「뭐? 그건 내 패니까 넌 반대로 걸어.」
두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청란은 표정변화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눈빛이나 기세가 오늘따라 더더욱 심상치 않다. 현원은 진심으로 조금 불안해지고 말았다.
둘이 검으로 승부를 한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전적은 통상 무승부였다. 수개월 전의 첫 대결에서는 진지하게 상대할 생각이 없었던 현원이 청란을 대충 놀려먹으려 하다가 조금 데일 뻔 하고 물러서는 정도였다. 그 다음에는 현원의 성격이나 동작을 약간 간파한 청란이 제법 날카로운 공격을 했지만 그때 즈음에는 조심스러워진 현원이 번번히 회피를 해서 칼은 부딪치지도 않는 대검같지 않은 대검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이레 쯤 전에는 드디어 청란의 검이 현원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줄곧 피하기만 하던 현원도 두 번 정도는 검을 받아넘겨야 했던 것이다.
천위대장군이자 태자보위인 하연은 <지랄맞도록 변칙적이고 재빠르기만 한 네놈 덕분에 청란의 대처력이 많이 늘었다.>고 좋아했지만 현원은 슬슬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즈음이었다. 원래 술사집안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가 탈선한 축에 속하는 현원과 천족의 일승주로서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검을 배우며 몸을 다져온 청란은 체격조건 부터가 다르다. 열 여섯의 창해태자 청경서란은 또래에 비해서 키가 크고 몸의 균형이 잘 잡힌 편이었다. 또한 연습용 검이 아니라 날이 살아있는 묵직한 장검을 사용한 지도 꽤 되었다. 이미 성인 못지 않은 검사인 것이다. 하연에게 듣기로는 벌써 천위군 부장급 몇을 누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현원이 청란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오로지 속도밖에 없다고 봐도 옳다. 그 말은 청란의 공격이 제대로 한번 들어가는 순간 현원의 패배라는 소리였다.
현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춤 뒤의 짧은 목검을 뽑아들었다.
「제 무기가 이런 장난감 칼 밖에 없어서 진짜 목숨 걸고 칼싸움 하기에는 좀……」
그 말에 하연은 <평소에 잘도 그 장난감 칼로 대검하더니 무슨 헛소리냐>고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면 이거 써라.」
바로 자기 허리춤에 달려있던 칼을 쑥 뽑더니 가볍게 검날 끝쪽을 잡아 손잡이가 현원을 향하도록 내민다. 그 길이의 장검을, 그것도 손바닥이 칼날에 닿지 않도록 손끝으로만 살짝 잡아 드는 것은 오로지 천위대장군 하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름 무골로 젊은나이에 장군직을 꿰어차고 있는 무영더러 해보라고 해도 못할 짓이다. 당연히 현원의 경우에는,
「한번 휘두르고 팔 빠져 죽으라고요?」
라는 항변이 나올 만 한 것이다.
「이래 죽건 저래 죽건 그거야 네놈 마음이지. 잘 해봐라.」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하고 착검한 다음 뒤로 물러나버렸다.
사실 그런 우는 소리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현원이 가지고 다니는 <장난감 칼>이 그 견고성에 있어서 단순히 장난감 칼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현원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항상 올바른데다가 고지식하기까지 한 청란은 상대가 아직 자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눈빛만이 이글거린다. 막상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진지해서 이대로 도망 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청란 입장에서는 현원의 월담이 언짢은 것도 언짢은 것이지만 이제껏 대검하면서 한번도 승부가 나질 않아 쌓인 감정도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존심 높은 한 나라의 태자였고 걸음마 할 시절부터 문무겸비의 천재 소리를 들어 온 어린 소년이 아닌가. 현원은 그러니까 이번에 적당히 맞아주고 <내가 졌습니다.> 해주면 될 것이다. 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원이 빠져나갈 생각을 접은 듯 검을 추스르자 나머지 셋은 멀찍이 물러나서 아주 넓은 장소를 만들어주었다. 청란과 현원의 대결이라는 것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치고받기 보다는 한쪽이 마구 도망가고 그걸 쫒아가서 후려치는 듯한 양상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있는 것이다. 검술훈련 치고는 한심한 광경이지만 나름 독특한 긴박감은 있기 때문에 구경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무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드물지만 청란이 몰리는 듯 하면 이승주가 버럭 화를 내며 끼어들고, 그렇게 되면 자신도 끼어들고, 그 결과 한바탕 난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어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구경꾼들이 멀찍이 떨어져 선 다음 현원은 온전치 못한 몸으로 역시 온전치 못한 자신의 칼을 들고 천천히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중단겨누기에 가까운 자세였다. 공격과 방어의 전환이 쉬운 기본 중의 기본 자세이고 그만큼 견실할 수도 있지만 현원의 중단겨누기는 공격의사는 전혀 없이 단지 몸을 빼내기 쉬운 자세로 보인다. 그에 대해서 하연이 간단한 평가를 내렸다.
「저 소심한 놈.」
「오늘 태자전하 기백도 장난이 아닌데 목숨 아껴야지요. 마구 덤벼댈 줄 밖에 모르는 누구보다는 낫습니다만?」
이 대답은 현원이 아니라 무영이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려는 바로 무영과 악다구니를 시작했다.
여하튼 현원과 달리 기울인 상단자세를 잡은 청란은 바로 짓쳐들어갔다.
한번 도약하며 사선으로 내리긋는 검격은 거리를 단숨에 지운다. 현원은 즉시 자세를 풀며 뒤로 물러나 그 첫 일격을 피해냈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청란은 착지와 동시에 굽혔던 오른쪽 무릎을 펴며 그 탄력으로 바로 쳐 올리는 공격을 이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동작이 소름끼칠 정도다. 그 유연한 흐름은 보기와는 달리 장검의 무게와 체중 그리고 휘두르는 원심력까지 더하여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담고있을 것이다.
청란의 검은 평소보다 약간 더 기세가 있었고 현원은 평소보다 조금 몸이 불편했을 뿐이다. 단지 그정도의 차이가 대검 양상에서는 현격한 격차를 불러왔다. 겨우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의 공격을 피해냈을 때 현원은 버겁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공격을 피하는 현원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미처 거리를 벌리지 못 해서 아슬하게 스치는 칼날을 무리하게 몸을 틀어 흘려보낸다. 동시에 왼쪽 옆구리가 뜨뜻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거칠게 내쉬는 숨결에 묻혀 신음은 터져나오지도 못했다. 아직 청란의 칼이 몸에 닿지는 않았으니 지난 밤의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잘 싸매두긴 했으니 바로 겉옷까지 피가 배어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현원은 어떻게든 잠시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통증 때문에 몸은 점점 더 무거웠다. 그 와중에 적당히 스치듯이 한 대 맞아주고 드러누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검격 하나하나가 어느것도 적당히 맞아 줄 만큼 만만하지를 않았다. 한 발을 뒤로 빼기도 전에 정면으로 검날이 치고 들어왔을 때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사적으로 목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희고 시린 빛이 찰나에 검날을 따라 흐르는 듯 했다. 순간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현원의 칼은 두토막이 났지만 그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손안에서 재로 화한 목검이 바람에 스러졌다. 눈앞이 희고 검게 명멸하고 있었다. 최악이다. 애초에 술력의 집중점으로 삼는 물건을 대검 용도로 써온 게 미친 짓이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충격을 받은 힘이 몸안에서 요동을 친다.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을 치받아 오르는 것을 느끼며 현원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의도치 않았으나 그것은 내어뻗은 상대의 검을 향해 몸을 던지는 꼴이었다.
도저히 검과 목검이 부딪힌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쇳소리에 굳어버렸던 청란은 미처 칼을 치우지 못 했다. 피가 튀었다. 현원은 검에 꿰뚫린 채 청란의 어깨에 기대듯이 무너졌다. 지근거리에서 뿜어진 선혈이 소년의 뺨과 어깨를 적셨다. 짧은 순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현원은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청란의 낯빛이 자신보다 배는 더 창백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렷하던 동공이 크게 벌어져 흐릿하다. 반신을 적신 피가 하얗게 질린 뺨을 따라 흐르고 핏방울이 맺힌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젠장 그렇게 얼어붙지 말란 말입니다. 그거 다 내 피라고요.
말 대신 핏덩이가 터져나왔다. 귓가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 앞이 온통 붉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