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양수 냄새, 바다 냄새 위로 죽은 사람의 살타는 냄새가 흐른다. 동물 주검이 썩어가는 냄새가 두텁게 깔린다. 우는 아기의 태반 냄새를 안은 창부들, 그 위로 뱃사람들이 괴로움의 한 숨을 술기운과 같이 뿜는다. 냄새들이 뒤섞여 도시를 이루고, 행성을 이룬다. 행성은 오랜 세월이 흘러 사막으로 변했고, 여신이 지배하던 땅에는 무지한 아들들이 어머니가 남긴 유산에 기생해 살고 있었다. 그 행성의 이름은 하그무스다.
그리고 하그무스의 쇠락한 도시들 중에서, 가장 크고 부패한 항구 도시 게른에는, 모래 벽돌로 만든 건물과 길이 권태로이 웅크려 기억을 곱씹는다.
부두에는 냄새가 한층 더 심해진다. 부두에 배가 정박한다. 배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내려온다. 사내들은 나른하게 움직이며, 어깨에 나무 궤짝을 지고 원통형 창고로 들어가 궤짝을 내려놓고 다시 궤짝을 지러 배로 들어간다.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 갈색 피부 위로 땀이 흐르고, 나무 궤짝 속에는 그들의 삶이 덜그럭거린다. 비루하고 질기고 알 수 없는 냄새가 난다.
부둣가의 아이들이 뛰어 논다. 아이들은 더벅머리에 잔뜩 소금기를 머금고, 서로 뒤엉켜 싸운다. 샅 가리개 하나만 입고 있고 얼굴이며 몸 할 것 없이 지저분하다. 아이들은 웃고 떠들고 싸우고 주먹질을 하다 미안한 마음에 화해를 하고, 모든 것을 다시 잊고 뛰어 논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돌아오라고 부를 때 까지.
낮에는 잠을 자는 창부가 저녁이 되면 잠에서 깨 창 밖으로 목을 내놓는다. 뛰어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도 모른 채 태어났던 자신의 아기를 떠올린다. 아이는 숨 한번 마음껏 쉬지 못한 채 자궁 속에서 썩은 채 태어났다. 썩어버린 과거의 양수가 눈물 대신 뺨 위로 흐른다. 돌아오는 것은 없다. 아기는 죽었고 그녀의 인생도 죽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다. 태양이 피를 흘려 하늘을 축축하게 적신다. 마지막으로 붉은 한숨을 토한 뒤, 태양은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는다. 태양이 죽었다. 하늘도 죽었다.
밤이 태어난다. 웅크리고 잠을 자던 밤의 짐승들이 깨어나 눈을 뜬다. 안광이 빛난다. 안광은 경기장 입구에서 새어나오는 빛이다. 경기장 안에서는 이미 시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함성소리가 터진다.
출입구 옆에 덩치 큰 사내 둘이 서 있다. 둘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표정도 딱딱해,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똑같이 붉은 색 조끼를 입고 있었고 표정도 똑같았다. 간간히 입장객에게 눈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가장 적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반응도 없고 무관심했다.
관객들은 계단 모양의 객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객석은 위에서부터 경기장을 향해 깔때기 모양으로 좁아진다. 경기장은 모두 모래를 구운 벽돌로 지어져 있었는데 경기장을 감싸는 벽도 마찬가지였다. 원형으로 가로막힌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었다.
동쪽과 서쪽으로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맨 위에는 약간 높은 기둥이 있었다. 선수들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이나 경기 사이에 그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기둥 뒤로 입장 통로가 연결되어있다. 지금은 문이 닫혀 있다.
사람들이 늘어나 객석을 가득 메웠다. 고함소리가 터졌다. 돈을 거는 소리다. 각 구역 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서서 배율을 메모하고 판돈을 받아들었다.
뿔피리를 든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서서 침을 한번 뱉고는 입에 뿔피리를 물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볼을 부풀렸다. 풍부한 울림이 경기장을 채운다. 함성이 거들기라도 하듯 연달아 터진다.
동쪽과 서쪽 입장 통로의 문이 열리고 선수가 들어온다. 그들은 모두 샅 가리개 하나만 입고 있었다. 통로를 걸어 나온 그들을 향해 통로 쪽에 앉은 관객들이 손을 뻗는다. 그들은 무관심하게 걸어가 기둥 위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온 몸은 근육이 뒤엉켜 있었고, 흉터가 그 위를 문신처럼 덮고 있다.
동쪽에 앉은 남자는 얼굴에 문신을 하고 있었고,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만 두개 뚫려 있다. 코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는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동쪽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뿔피리 부는 남자가 소리친다. “동쪽! ‘해골’ 도리얌!”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눈두덩이 튀어나와 눈을 묻어 버려서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흰 자위 뿐 이다. 그는 콧등이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두터웠는데 윗입술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입술이 찢어진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대머리다.
뿔피리 부는 남자가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서쪽! 까람!”
뿔피리 소리가 난다. 길게 한번.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경기 시작 신호다. 까람과 도리얌은 기둥에서 뛰어내려 바로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까람과 도리얌은 서로를 향해 걸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팔을 뻗으면 겨우 닿을 정도까지 다가와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거울처럼 똑같이 움직였다. 주먹을 쥔 두 팔을 옆으로 뻗어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가슴 앞으로 모아 가위처럼 교차시키고, 고개를 숙였다.
전사들은 준비가 되었다. 환호성은 욕심으로 번들거렸고 피에 굶주린 관객들은 술과 고기를 들어 올리며 더욱 잔인한 싸움을 기원했다.
뿔피리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까람과 도리얌 모두 무릎을 충분히 굽히고 사이를 넓게 벌리고 섰다. 허리를 약간 뒤로 젖혀 꼿꼿이 세우고 턱도 당겼다. 왼손을 몸 앞으로 뻗고, 오른손을 가슴 아래에 붙여, 양 손 모두 배와 가슴 사이 정도 되는 높이로 들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고 말도 없었다. 모래 위로 발을 끌며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두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 체중을 위로 튕겨 올렸다. 관절이 모두 원운동을 하고, 리듬을 타며 몸의 중심을 위 아래로 움직였다. 같은 리듬으로 두 전사의 주먹 네 개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서로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상대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 기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까람과 도리얌은 서로 상대의 왼쪽으로 돌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두 사람의 리듬은 고착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맴돌기만 한다.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서툰 맴돌기와 춤이 아니라, 피와 땀, 그리고 파괴다. 둘 사이의 긴장이 한 겹 씩 쌓여갔다. 관중들의 야유는 그들 사이의 공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천 만 가지 변화를 더듬으며 공격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긴장이 더 이상 쌓일 수 없을 지경까지 쌓였다.
도리얌이 무릎을 튕겨 체중을 왼손 주먹에 실어 공간을 가른다. 까람이 손을 들어 궤도를 빗겨낸다. 도리얌이 한 걸음 더 내딛으며 오른손 주먹을 뻗었다. 까람이 왼손으로 방어하고 오른손 주먹을 찔러 넣었다.
턱이 들린 도리얌이 주춤거리는 사이 까람이 오른발로 땅을 차고 튀어나가며 왼쪽 주먹을 뻗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해 세운 주먹이 체중을 실고 도리얌의 명치를 쳤다. 도리얌이 뒤로 물러섰다. 두 팔을 모두 앞으로 뻗어 흔들었다. 달려드는 주먹을 견제하고 방어에 치중하기 위해서다.
리얌이 왼손을 위로 살짝 들어올린다. 까람이 반응했다. 도리얌이 앞발을 내딛으며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이다. 까람의 왼팔과 턱 사이에 생긴 빈틈으로 왼쪽 주먹을 날린다. 공간을 찢고 찔러 들어가 힘껏 후린다. 오른쪽 주먹이 뒤이었다. 묵직한 충격의 까람의 턱이 좌우로 돌아갔다. 도리얌이 연달아 주먹을 뻗었으며 달려 나갔다. 두 주먹이 일직선으로 공간을 찢으며 교대로 까람을 밀어 쳤다.
까람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도리얌의 주먹은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방어 자세를 취한 팔 위 로도 주먹이 날아왔다. 까람이 완전히 벽에 밀렸다. 도리얌이 아까와 달리 원을 그리듯 두 팔을 크게 휘둘러 댔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자세가 무너진 것이다. 온다. 도리얌의 몸이 완전히 열려 양 팔을 날개처럼 벌리고 연타를 날렸다. 까람의 얼굴이 뭉개진다. 광대와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눈이 반쯤 감겼다. 그러나 까람의 눈은 죽지 않았다.
까람이 양 손을 뻗어 양 팔 사이의 빈틈으로 찔러 넣었다. 양 손목으로 도리얌의 목을 감고 두 손을 깍지 껴 꽉 잡았다.
까람이 박치기를 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까람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얌의 구멍만 남은 코에서 피가 흐르고, 눈이 부풀어 올랐다. 안와(眼窩)가 부서지고 광대가 부러졌다.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도리얌이 쓰러져 주저앉았다. 까람이 포효하며 도리얌의 얼굴을 짓밟았다. 돈을 딴 자와 잃은 자가 각각 환호성과 비명을 지른다. 경기장은 흥분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경기장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진행요원이 경기장 중앙으로 달려가 흥분한 까람을 말렸다.
모래에 파묻힌 도리얌의 얼굴을 꺼냈다.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의식도 없었다. 눈꺼풀 사이로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얼굴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진행요원들이 손을 머리 위로 교차해 흔든다. 뿔피리가 울렸다. 까람의 승리다. 까람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때리며 자신의 승리를 선언한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까람이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들것에 실린 도리얌의 손이 들것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들것을 향해 까람이 손가락질을 하며 조롱했다.
까람은 다음 시합 준비를 했다. 까람이 소속된 도장 사람들이 까람에게 다가와 그를 진정시키고 기름을 발라 마사지를 한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침착한 상태에 있는 것 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높은 단계의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연달아 시합을 했다.
그 사이 배당금을 받기 위해 까람에게 돈을 건 사람들이 붉은 조끼를 입은 진행요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진행요원들은 파피루스를 꺼내 한 명 한 명 확인하며 돈을 계산했다. 돈을 잃은 사람들은 승리자의 아귀다툼을 흘겨보았다. 도리얌의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야, 리믄. 배당금을 줘.” 몸에 살집이 두툼한 중키의 남자였다.
“오늘은 잘 골랐군, 모빰. 또 걸겠나?” 리믄이라 불린 붉은 조끼를 입은 사내가 파피루스 장부에 기록할 준비를 했다. 그는 격투기 시합과 선수 관리, 도박 등의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붉은 형제>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배당금을 관리하는 사내였다. <붉은 형제>의 일원은 모두 붉은 색 조끼를 입어 자신의 신분을 과시했다.
“다음 경기도 까람한테 걸 거야. 이 만큼이면 되겠지?” 모빰이 쩔그렁 소리가 나는 가죽부대를 던져주었다. 안을 열어 본 리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기가 좋은데. 얼마 전 까지 빚이 모래더미 같았잖아. 언제 이렇게 벌었어? 그런데 다음 시합은 하르메느가 상대하던데? 신인답지 않게 실력이 좋아.”
“아까 까람이 경기하는 거 봤지? 백전 노장 ‘해골’ 도리얌이 완전히 박살이 났어. 데뷔 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애송이가 이길 상대가 아니야. 그 덩치도 작고 여자같이 생긴 놈이 어떻게 까람을 이기겠어? 운이 좀 좋았을 뿐이야. 배당률을 두 배로 해서 걸어 줘.”
“그건 선수들 사이에 있을 때 이야기지, 하르메느가 우리 도장 소속이잖아, 내가 직접 봤는데 체격도 단단하고 키도 자네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커. 나보다 크더라니까.”
“이봐 리믄, 자네 나 망하게 해서 한 몫 벌려는 거 아냐? 잔말 말고 걸기나 해!”
“모빰, 오늘은 좀 어떤가?” 덩치 큰 남자가 말했다. 옷섶 사이로 털이 우거진 가슴팍이 두텁고 팔짱을 낀 털 난 팔뚝도 두꺼웠다. 코가 비뚤어져 있고 계단모양으로 우그러져 있었고, 연골이 내려앉아 콧등이 낮았다. 두꺼운 근육 위로 살집도 두툼하게 붙어 있는 모습과, 울퉁불퉁한 얼굴의 생김새를 보아서는 은퇴한 격투기 선수로 보였다. 그도 붉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한테 빌린 돈도 설마 다 걸은 건 아니겠지? 누구한테 걸었나, 모빰?”
모빰은 아까와는 달리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하쿰 님,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까람에게 전부 걸었습니다, 두고 보세요. 그 동안 잃은 거에, 어제 빌린 돈 까지 이자 쳐서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쿰은 콧등에 난 흉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격투기 시합이라는 게, 결과는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지. 게다가 하르메느가 그리 약한 녀석은 아니거든. 안 그런가, 리믄?”
“그, 그럼요.”
리믄은 불편해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배당금을 나누어 주러 자리를 피했다. 모빰도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하쿰이 그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시 환성을 질렀다. 뿔피리를 든 남자가 다시 나타나 멋들어지게 뿔피리를 불었다.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날렵한 몸매의 남자가 가볍게 몸을 튀기며 걸어 나왔다. 고개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여자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는 관심이 없었다. 반대편 기둥에 앉아 있는 까람을 향해 서 있었다. 까람은 마사지를 받으면서도 몸을 계속 움찔거렸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경주용 라쿠툼처럼 보였다.
뿔피리를 부는 사내가 하르메느를 소개했다. 경기장 안 모래밭 위에서, 도리얌과 까람의 시합 때와 똑같은 의식이 행해졌다.
하르메느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큰 체격이지만 선수 치고는 작은 체구다. 까람 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까람은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고 하르메느는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팔을 뻗어 인사를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호흡을 고르는 데에 집중했다.
경기가 시작하자, 까람은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몸을 뒤로 약간 젖히고 두 팔을 각각 창과 방패삼아 배와 가슴의 중간 쯤 되는 높이로 들어올렸다. 앞으로 뻗은 왼손은 창, 몸에 붙인 오른손은 방패다. 두 손 모두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르메느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고 턱을 당겨 가슴에 붙이고 두 주먹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왼발을 앞으로 한 발짝 비스듬하게 내밀었고 오른발은 왼발에 평행하게 두었다. 상대를 향해 완전히 몸을 옆으로 두고 옆구리를 보이는 까람의 자세와 달리 어중간하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가볍게 몸을 위 아래로 튀겼다. 주먹은 까람과는 달리 매우 작은 원을 그리며 눈 주위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다른 선수들처럼 주먹 뼈가 상대를 향하도록 쥐고 있지 않았다. 창끝을 상대를 향해 겨누지 않고 하늘을 향해 겨눈 것처럼 보였다. 혹은 창을 버리고 방패 두개로 단단히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까람은 그의 주먹에 감겨있는 붕대를 보았다. 초보자들이나 손목을 보호하려 메는 것이다. 그것을 손등이며 손가락 사이까지 꼼꼼하게 감고 있었다. 이렇게 주먹에 붕대를 감으면 상대를 붙잡는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할 수 없다. ‘붙잡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근접전에서는 그런 기술이 필요하고, 주먹이 위력을 발휘할 만큼 충분한 거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상대의 박치기에 당하거나 던지기 기술에 당해야 한다. 까람은 아직 그런 고급 기술도 하지 못하는 풋내기와 경기를 해야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아직 열아홉 살이라, 그가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아들 뻘 이다. 그가 처음 도장에서 모래주머니를 두들 길 때가 열아홉 해 전이었다. 이런 대접을 빨리 벗어나려면 이기는 것 말고는 없다. 그는 아직 패배가 승리보다 많다.
까람은 발을 끌며 다가갔다. 모래가 밀려 그의 발등에 쌓인다. 하르메느는 고모즈 새끼처럼 계속 몸을 튀기고 있었다. 까람이 왼발을 차 올려 하르메느에게 모래를 뿌렸다. 동시에 발을 밟으며 오른쪽 주먹을 뻗었다. 주먹은 허공을 찔렀다. 하르메느는 상체를 유연하게 굽히며 옆으로 튀어 나가 공격을 피하고 뒤로 물러서 거리를 유지했다.
허를 찌르려다 도리어 허를 찔린 까람이 주춤한 사이에 하르메느가 몸을 튀기며 다가와 왼손으로 주먹질을 하고 다시 물러섰다. 까람이나 도리얌과는 달리 수평으로 쥔 주먹이었다. 까람이나 도리얌을 비롯한 대부분의 격투기 선수들은 모두 엄지를 위로해서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리듯 주먹을 지른다. 그러나 하르메느는 손목을 회전시켜 수평으로 주먹을 뻗었다. 게다가 다른 선수와 달리 펀치가 시작되는 위치도 배와 가슴 중간의 명치가 아닌, 눈높이에서 어깨를 튕기듯 바로 주먹을 뻗었다.
까람은 금새 자세를 갖추었다. 그는 노련했고 하르메느의 처음 보는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해진 충격이 얼마 없다는 점도 그를 안심시켰다. 까람은 달려 나가며 교대로 주먹을 뻗었다. 하르매느는 웅크린 자세로 상체를 유연히 움직여 까람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까람이 뻗는 주먹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치 주먹이 어디로 날아올지 미리 보이는 사람 같았다. 계속해서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선 까닭에 하르메느는 벽에 몰렸다. 까람은 팔을 살짝 들어올려 속임수를 쓰고 곧바로 하르메느의 목덜미를 잡았다. 까람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까람의 턱이 위로 들렸다. 하르메느의 주먹이 아래에서 위로, 짧고 예리하게 쳐 올린 것이다.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른에서 벌어지는 격투기 시합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까람의 다리가 흔들렸다. 하르메느의 양 주먹이 수평으로 예각을 그리며 좌우에서 번갈아 쏟아졌다. 까람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까람은 부러질 듯 왕복운동을 하던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무릎도 숙이며 엎드리듯 앞으로 쓰러졌고, 이를 피해 하르메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시합은 순식간에 끝났다. 어리둥절한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쿰도, 리믄도 마찬가지였다. 하쿰은 뭉개지고 일그러진 코를 움켜잡았다. 콧등 위에 난 흉터가 욱신거리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하르메느를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목을 조르려는 사람 같았다.
붉은 조끼를 입은 남자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직업의식이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이다. 돈을 잃은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통로를 막아섰다.
“잡아!”
고함소리가 들렸다. 하쿰의 목소리였다. 그는 코를 양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는데 주먹을 쥔 틈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빰이 돈을 잃자마자, 정신을 놓고 있는 하쿰을 향해 팔꿈치를 날린 것이다. 뚱뚱한 몸을 흔들며 통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붉은 조끼를 입은 사나이들이 달려들었다. 그 틈에 돈을 잃은 자들이 도망쳤다. 난장판이었다.
하르메느는 통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자들이 함성을 지르고 노골적으로 유혹을 해 왔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통로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 * *
길바닥에 마른 갈대와 나무 조각이 굴러다녔다. 그 주위로 잡상인이나 거지가 고함을 질러댔다. 터번을 쓰고 ‘짬’을 입은 사람들이 대화를 하기도 하고 상인들과 흥정을 하기도 한다. 짬은 남자들이 입는 옷이다. 긴 천으로 된 샅 가리개를 한 뒤, 허벅지 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입고 허리에 가죽으로 된 넓은 벨트를 맨다. 다리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앞 쪽에 트임이 조금 나 있다. 신발은 보통 샌들을 신거나 맨발이다. 거기에 더해 성인 남자들은 터번을 맨다. 터번 모자를 먼저 써 머리를 정리하고 고정한 뒤, 길고 신축성 있는 천을 머리에 감는다. 태양의 직사광선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천으로 된 긴 두건을 쓰고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가죽 띠를 머리 둘레에 끼워 넣기도 한다. 태양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골목길을 따라 늙은 게모즈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다. 꼬리를 느긋하게 출렁거리며, 옛 조상들이 물속에서 그랬듯 여덟 개의 발로 바닥을 긁으며 헤엄치듯 다가온다. 안장 위에 남자가 앉아있다. 발달된 등의 광배근과 어깨 위로 솟은 승모근, 그리고 어깨에 삼각근이 둥글게 붙어 잇다. 허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두꺼운 근육 때문에 더욱 둥글게 보인다. ‘짬’을 입고 있지 않아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등에는 무수히 많은 흉터가 있다. 미친 푸주한이 칼을 휘두른 것처럼 흉터는 여러 갈래로 겹쳐 있다. 구레나룻과 수염이 풍부하게 나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길고 풍부했다. 약간 곱실거렸다. 눈두덩 안으로 눈이 깊게 들어가 있었고 뼈대가 각이 지고 드러난 다부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빛이 없어 죽은 동물처럼 깊고 고요했다. 짙은 눈썹을 따라 땀이 흘러 들어가 눈을 찡그렸다. 땀은 두꺼운 목 아래로 흘러내려 가슴으로 내려갔다. 양쪽 가슴에 붙은 두꺼운 대흉근 사이로 날카롭게 파인 경계를 따라 땀이 흘러내려 배에 떨어졌다. 배는 약간 나와 있었는데, 쓸데없는 지방 때문이 아니라 두터운 복직근 때문이었다. 두툼한 양손이 안장 앞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있다. 팔에는 채찍을 꼬아놓은 것 같은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혈액 대신 권태가 흐르는 듯 했다. 이 갈색 피부의 체구가 큰 남자는 거대한 근육에도 불구하고 빈껍데기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가 있는 공간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게모즈는 그에게 관심이 없는 듯 반쯤 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게모즈의 뒤에는 낡고 빈 수레가 터덜거리고 있었다. 도룡뇽과 개구리의 중간처럼 생긴 이 거대한 동물은 본래 모래 속에서 살던 양서류로, 다리가 여덟 개로 크기는 코끼리만 하고 몸길이는 악어 세 마리보다 길다. 지능이 매우 높은 편이다. 게모즈와 똑같이 생겼지만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사촌을 고모즈라 부른다.
이들은 태고의 시절, 하그무스를 다스리던 여신들의 선택을 받았다. 높은 지능과 순종하는 마음, 그리고 충성 을 높이 산 여신들은 그들의 진화를 도왔고, 품종을 개량했다. 그들은 여신을 위해, 짐을 나르고, 사람들이 안락하게 앉을 수 있도록 돕고, 물건을 보관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봉사했다. 하그무스에서 여신들이 떠나고, 여신이 남긴 아들과 딸들이 기생하는 지금의 하그무스에도,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게모즈나 고모즈에게 일을 시킬 때는 그들이 이해는 특정한 음절의 조합인 만트라(Mantra)를 이용해야 한다. 이 만트라는 입으로만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게모즈의 의식이 나타내는 파동에 맞추어 마음 속 으로도 발음해야 한다. 누구나 간단한 훈련만 하면 다룰 수 있다. 가정용 고모즈의 경우, 특정한 반사 작용을 이용해 특정 부위를 눌러 더 쉽게 일을 시킬 수 있다.
거대한 남자가 만트라를 외우자, 게모즈가 다리를 멈추었다. 게모즈는 사무실 건물에 도착했다. 남자는 수레를 보관하는 창고로 게모즈를 몰아 창고 앞에 세워두었다. 남자는 안장에서 내려 수레와 게모즈를 분리했다.
남자의 앞머리가 이마를 타고 눈을 가리고 있었다. 터번을 벗었다. 삐뚤어진 터번 모자를 벗어 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퍼지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물이 몸에 뭍은 물을 털어내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터번을 겨드랑이에 끼고 머리를 뒤로 넘긴 뒤 터번 모자를 썼다. 그의 이마가 드러났다. 흉터가 있었다. 터번의 끝을 조금 남긴 채 머리 옆에 대고, 손으로 누른 다음 손 위로 터번을 감았다. 아래에서 위로 터번을 돌려 머리를 감쌌다. 터번에 묻힌 손을 빼내고 전체를 조금씩 흔들어 고정시켰다.
흉터 있는 남자는 수레의 뒤로 돌아가 몸을 풀었다. 어깨를 움츠려 승모근에 목이 완전히 파묻힐 정도로 힘을 주었다 뺐다. 몸을 풀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양 손을 수레 뒤꽁무니에 댔다.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등에 난 흉터가 붉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대로 수레를 밀었다. 수레가 움직인다. 남자는 수레를 밀며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걸음을 옮겼다. 수레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성인 남자 셋이서 밧줄로 밀어야 할 수레를 혼자서 밀었다. 그는 다시 생기를 잃었다.
게모즈는 세워둔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목 뒤를 두들겨 보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게모즈의 꼬리를 잡고 당긴다. 게모즈는 귀찮은 듯 눈을 반쯤 뜬다. 남자가 만트라를 외웠다. 늘어진 배를 끌면서 축사로 기어가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는 게모즈를 축사 건물 가운데에 세워진 기둥에 묶어둔다. 기둥 옆에 높인 건초를 집어 들고 게모즈에게 덮어 주었다. 건초는 강가에서 자라는 갈대를 말린 것이다. 건초는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오른손 검지로 뺨을 긁었다. 구레나룻에서 긁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명이 들렸다. 남자는 축사를 빠져나와 사무실 입구를 향해 달렸다. 계단을 올랐다. 계단 위에서 다시 비명이 들렸다. 계단을 서너 단 씩 뛰어 올랐다. 그의 앞을 붉은 조끼를 입은 남자 둘이 가로막았다. 한 명은 키가 컸고 또 다른 남자는 키가 작았다.
키가 작은 남자가 말했다.
“뭐야?”
흉터 있는 남자가 대답했다. “난 이 화물조합 회사의 사장입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 키 큰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정말 사장인지를 확인했고, 키 작은 남자가 흉터 있는 남자의 뒤로 움직였다. 흉터 있는 남자는 뒤를 돌아봤다. 키 작은 남자가 무기를 휘둘렀다. 흉터 있는 남자는 오른팔로 얼굴을 막았다. ‘검은 손’이 남자의 팔을 때렸다. 남자는 왼손을 들어 반격하려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키 큰 남자가 뒤에서 흉터 있는 남자의 겨드랑이에 양 팔을 찔러 넣고, 양손을 뒤통수로 돌려 맞잡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흉터 있는 남자는 고개를 눌려 움직일 수 없다. 작은 남자가 겨드랑이를 노려 검은 손을 휘두르고 연달아 복부를 쳤다. 무릎차기로 배를 쳐올렸다.
키 큰 남자가 손을 풀고 그를 밀었다. 그는 쓰러졌다. 키 큰 남자가 쓰러진 그의 뒷목을 눌러 제압한 사이, 작은 남자가 검은 손을 흉터 난 등을 향해 내리쳤다. 그가 저항하려 하자 키 큰 남자는 그의 양 팔을 뒤로 꺾어 올리고 손목을 겹치게 해 찍어 눌렀다. 그의 터번을 벗겨 단단히 묶고, 남은 부분으로 목을 감아 묶어 섣불리 움직이면 목이 졸리게 했다.
“끌고 들어가.” 작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짬 안으로 검은 손을 집어넣었다. 검은 손은 가죽 주머니에 모래나 자갈 등을 채워 넣어 만든 무기로, 아무리 때려도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대신 신체 내부를 손상시킨다. 내장이나 신경계, 근육조직에 충격을 주고, 뒤통수에 있는 연수를 노리면 단번에 죽일 수 도 있다.
크고 작은 두 남자는 흉터 있는 남자를 붙잡고 모래부대를 끌듯 사무실로 데려갔다. 사무실 안은 엉망이었다. 안락의자 용 고모즈는 내장이 튀어나와 아직 숨이 꺼지지 않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는 투명 막은 찢겨나가 바람이 새 들어왔다. 벽과 바닥에는 피가 묻어있다. 테이블도 부서져 있다. 부서진 테이블 주위에 붉은 조끼를 입고 체구가 큰 사내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붉은 형제의 폭력단원들이다. 바닥에는 이 화물조합 회사 소속 기사들이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죽어가는 고모즈 위에 한 남자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납작한 코가 휘고 구부러진 남자였다. 체구가 크고 험악한 인상에 역시 붉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는 터번도 붉은 색이었다.
“하쿰 님. 사장이라는 작자가 나타나 확보했습니다.” 키 작은 남자가 말했다.
“사장은 모빰인 줄 알았는데?” 하쿰이 고개를 돌려 화물조합 소속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들도 양 손목이 등 뒤에 묶여 있었다. 끈은 각각 목과 양 발목으로 연결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은 이마와 등에 흉터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었다.
크고 작은 2인조가 흉터 있는 남자의 등을 걷어찼다. 남자는 쓰러졌다. 그는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린 채로, 오른쪽 무릎을 세워 발로 땅을 디디고, 왼쪽 무릎을 바닥에 대, 오른발과 왼 무릎을 동시에 밀면서 허리를 일으켰다. 일어난 뒤에도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세워둔 오른쪽 무릎으로 몸을 받쳐 지탱하고, 왼쪽 무릎을 바닥에 댔다. 무릎을 세워 꿇은 상태가 되었다.
“이름이 뭔가?” 하쿰이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 작은 남자가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 작은 남자는 주먹으로 뺨을 때렸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 작은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주먹질을 했다. 몇 번이고 주먹질을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해. 무시당하는 게 싫어도 내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거야? 실례를 용서해 주겠나, 나는 하쿰이라고 하네. ‘<붉은 형제>’의 간부지. 내 소개를 했는데, 이젠 이름을 말해주겠나?”
남자는 바닥에 붉은 기가 도는 침을 뱉었다. 저항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키오입니다.”
“미안하군. 갑자기 찾아와서 결례를 범했어. 내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빰 때문이네. 도박 빚을 안 갚고 도망을 가려고 했지. 못 믿겠다는 얼굴인데? 그가 도박 중독인 걸 몰랐나보군. 이걸 좀 보겠나? 모빰이 회사 이름으로 돈을 빌렸다고 되어 있지? 여기를 봐. 회사법인 도장이 찍혀있는 게 보이지. 이게 제일 중요한 거지. 쉽게 말하면,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은 이 회사의 주인에게 있어. 그 외에도 말이야.” 하쿰은 부하에게 손짓했다. 부하는 파피루스 조각을 잔뜩 바닥에 뿌렸다. “이게 다 뭔지 아나? 전부 도박 빚 전표야. 변제 책임은 ‘모빰’ 개인이 아니라 회사 전체를 포함한 회사 소유주에게.”
직원들이 꿈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입이 막혀 있어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지만 화가 난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생계를 저당 잡힌 것이다.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러나 그것은 키오도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모빰이랑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진 빚을 갚아줘야겠다는 것뿐이지. 그런 이유로 회사를 차압하러 왔고, 자네 부하들이 게모즈를 넘기지 못하겠다고 버텨서 좀 거친 짓을 했지. 사장인 자네 명령이라면 듣겠지?”
“게모즈는 모두 개인 소유입니다. 우린 조합 회사입니다. 나 또한 법인을 공동 명의로 들면 법인세를 적게 낸다는 이유로 사장으로 등록돼 있을 뿐, 내가 가진 지분은 거의 없습니다. 모빰에게 물어보십시오.”
“자네 말은 사원들의 게모즈는 못 내놓겠다는 말이군.”
“내 게모즈라면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물은 임대한 것이니 내 맘대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내 개인 소유는 게모즈가 전부입니다. 난 가족도 없고, 집도 없습니다. 이 건물 다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아무 잘못도 책임도 없습니다. 아무리 명목상이라지만, 나 또한 이 회사의 사장이니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 주십시오. 나와 모빰하고만 이야기 합시다.”
“안타깝지만 말이야. 모빰과는 이야기 할 수 가 없네.”
“도망갔습니까?”
“잡긴 잡았는데. 죽여 버리고 말았지. 실수로 말이야.” 하쿰이 웃었다.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조금 때린다는 게 너무 때려버렸지. 오랜만에 주먹을 쓰니 도저히 힘 조절이 안되서 말이야. 물론 모빰의 집을 알아내서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뜯어냈지만, 그래도 부족하더군. 건물은 할 수 없군. 자네 게모즈라도 받아야겠어.”
“좋습니다. 이제 직원들을 풀어주십시오.”
“풀어줘.”
붉은 조끼를 입은 사내들은 품에서 석단도(石短刀)를 꺼내 직원들의 재갈, 목, 손목, 그리고 발목을 묶은 끈 뒤로 날을 밀어 넣고 끊었다. 직원들은 혈액순환을 회복하기 위해 손목과 발목을 흔들었다. 온전치 못한 신음과 피 냄새나는 욕설이 흘러나왔다. 키오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닥친 불행에 책임은 키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키오 또한 피해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키오 또한 직장을 잃었으며, 거기에 더해 게모즈와 잘 곳까지 잃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들에게 알바가 아니었다.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망쳤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욕지기가 섞여있다. 조용해진 방 안은 고모즈의 비린 피 냄새만 붉게 떠다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