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이 상황이 싫었다. "헤어지자." 하긴 누가 이별의 순간이 좋으냐고 하겠느냐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약간의 눈물과 동정과 경멸이 느껴진다. 여자들이 좀 더 창의력이 있었다면, 나도 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여자들은 언제나 같았다. 언제나 어색한 잔혹함을 시작으로 약간의 눈물과 동정과 경멸만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문밖을 나갔다. 왜 붙잡지 않느냐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냐고? 아니,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럴 수록 현실은 더욱 잔인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내 몸에 달린 전선을 바라보았다.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괴하면서 세련된 전선은, 내 연수부터 아킬레스건까지 근육과 뼈가 작용하는 모든 곳에 박혀있었다. 특히 척추에 박힌 굵은 전선은, 이 그로테스크한 작품의 정점이었다. 너무도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소름 돋았지만 그것들은 나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선과 이어진 건물 전체라고 지칭해야겠지만. 치익-. 부우우웅-. 저 멀리 냉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몸'은 언제나 열이 많이 난다. 지하에 연결된 호수로 열기를 발산시키지만 그럼에도 방 안은 꽤 후덥지근하다. 몇 번의 소음이 더 들리고 냉각기가 정지하자 사위는 고요해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의사가운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가 들어온다. 짙은 회색빛 단발머리와 불투명한 눈이 인상적인 여자는 주변의 전선을 체크하다 갑자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러다 또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는 뚜벅뚜벅 다가와선 내 몸에 달라붙은 전선을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까이 올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그녀에게선 사람에게서 나야하는 아무런 체취가 나지 않는다. 마치 그림 속의 꽃처럼. "네 번째 팬이 떠나가는 기분이 어때?" "슬프군. 눈물이 다 날 지경이야." 딱딱한 내 기계음에 소름이 끼친다. "이런-. 슬픔은 몸에 나쁘다고. 주치의로서 경고하지." 그녀의 손길은 팔을 지나 척추에 박힌 굵은 전선으로 향한다. 그녀의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몸은 온갖 신호를 내보낸다. 고통, 기쁨, 쾌락, 증오, 욕망, 절망, 사랑, 온갖 감정이 진실성 없이 스치고 사라져간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 온몸의 세포가 제멋대로 튀는 느낌을 억누르며 신음을 참으면서 나는 말한다. "슬퍼도 울지도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지." 그녀의 손길이 멈춘다. 긴장한 정신이 숨을 내쉰다. 사실 숨이야말로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아니, 슬픔만으로 인간은 죽을 수 있지. 그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해." 그녀는 앞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곤 묘기를 부리듯이 손가락 안에서 몇 바퀴 휙휙 돌리고는 그대로 내 심장에 꽂았다. 기분 나쁜 이물감이 느껴지지만 그뿐이었다. 고통도, 뜨거운 피도, 영화에서 나올법한 차가운 부동액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그러할 뿐이다. 내 심장에서 만년필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우아하게 만년필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패여 있던 가슴은 곧 꿈틀거리더니 바로 메워졌다. 끔찍하다. 그녀도 나도. "넌 육체적으로 죽을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 네 유언이 그랬듯이 말이야. 유언에 따라 난 네가 생존할 수 있는 만큼의 것만 제한할 생각이야.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다르지. 네가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으로 죽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없잖아?" "그래서겠지. 네가 예전의 팬들과 나를 접촉시키는 건."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자그마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다. 그리고 손에 천천히 힘을 준다. 금속으로 이어진 얼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우그러진다. 뼈가 비틀리고 뜯기고 어긋나기 시작한다. 결국, 안구가 터지더니 시야가 흐려진다. 어차피 몇 분 있으면 시스템이 다시 복구가 시키겠지만. 잔뜩 뒤틀린 입안에 혀가 들어와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다. 나는 무덤덤히 그 혀를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몇 번이고 입안을 맴돌던 혀는 결국 빠져나온다. 이미 얼굴은 복구되어 있었다. 그녀는 옷 소매로 입술을 훔치더니-다만 무미무취의 끈적한 액체 같은 그녀의 타액뿐이다.- 마지막으로 내 연수에 달린 전선을 만지고는 방 안에 있는 유일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그녀들을 이용하려는 사실은 다 알고있어. 이번 여자도 널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망쳤지." "알고 있었군." "당연하지. 그걸 막은 것도 나거든. 절망한 여자들에게 이별 방법을 일러준 것도 나고. 굳이 말릴 생각은 없어. 그렇게 하면 할 수록 정신에는 생동감이 넘치니까." 갑작스런 고백에도 이제는 화조차 나지도 않는다. 아니면, 그녀가 화내는 것조차 막아둔 걸까? "다섯 번째 여자는 내일 도착할 거야." 그녀는 문을 열고 나를 돌아보곤 말한다. "죽지 마. 영원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