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대] 국제 휴대폰 자본

조회 수 1220 추천 수 0 2010.08.08 23:15:41




국제 휴대폰 자본


 민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지하철의 혼잡함 때문이기도 했고, 신발 끈이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그에게 바싹 달라붙은 뚱뚱한 여자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지간에 기분이 나빴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민호 스스로도 알다시피 불쾌함의 원인은 지금 이 장소에 있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전에 이 장소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는 한바탕 싸움을 벌였고, 그것이 불쾌함의 원인이었다. 혹자는 그것을 사춘기다운 반항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호의 친구 병훈은 스스로를 탈권위적 투사라고 부르길 즐겼다. 물론 민호는 권위나 투사에 대해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또 아무도 그들을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투사 타사춘기, 대략 그 정도의 애매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오늘 아침 일어난 그 사건은, 민호와 그의 친구가 보기엔 숭고한 싸움이었으되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버릇없는 투정으로 비춰졌을 터이다.

  허나 민호의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정을 모른 채 입만 나불대는 사람이 아닌, 즉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차차 밝혀나가기로 해보자.

 발단은 이러했다. 어느 날인가 민호는 휴대폰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휴대폰이란 것은 아시다시피 없을 땐 아무렇지도 않지만 일단 한번 생기고 나면 수족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오래 쓸수록 그 의존도는 올라가게 되고, 마침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해 휴대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민호의 휴대폰도 처음에는 시계와 받는 용도로 사용하던 것이 언제부턴가 기상을 책임지는 자명종, 일상을 책임지는 문자, 나머지를 채워주는 게임으로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것은 종내에는 병적인 수준으로 변모해버렸는데, 그 병은 대략 이러한 증상을 유발시켰다. 하루 내내 붙어사는 게 자연스러워져, 행여나 까먹고 집에 두고 오게 되면 그날은 온종일 불안하기만 하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 손에 넣게 되면 나머지 시간은 휴대폰을 바쁘게 놀리며 시간을 보낸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동안 별 의미도 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등등……. 민호는 말하자면 중증 휴대폰 의존증에 걸린 환자 중에 환자였다. 그러나 휴대폰 의존증이란 이미 인류의 13억 정도가 중증 말기, 15억 정도가 예상 징후를 보이고 있는 전 인류적 병이었기 때문에, 폭력성이나 인색함 등과 함께 별로 이상해보이지 않는 정신병 중 하나였다. 결국 민호 자신이나 민호의 부모, 친구, 친척에 이르기까지 민호의 병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각자 자신의 휴대폰을 신경 쓰느라 너무 바빴던 탓이리라.

  민호가 기묘하게 비뚤어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는 미묘하게 성급해지고, 또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건 모두가 깨달았으나, 그전까지 순둥이 막내 착한 모범생이었던 민호가 왜 급변한 것인지,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위해 한 가지 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답은 교과서에도 인터넷에도 책에도 있었다. 그야말로 온 사방에 널려있었다. 마침 적절한 시기에 분비되기 시작한 호르몬이 그 해답이었다. 그렇게 민호는 사춘기로 분류되었다.

  무엇으로 분류되거나 정의되면, 그렇게 정의된 사물은 자의건 타의건 정의된 대로 따라가데 된다. 민호 역시 사춘기로 정의되고 나서 어느 정도 그에 따라 행동한 것이 사실이다. 남들이 탈선이라 부르는 노선을 착실히 밟아나갔다. 요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저 휴대폰 충전을 깜박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금 늦게 일어났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슬아슬하게 통학버스를 놓쳤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학교로 좀 데려달라고 했다가 약간 논의가 어긋나버렸다. 대개 말싸움의 시작은 사소한 오해다. 언성이 높아지고 홧김에 문을 박차고 나오자, 해는 쨍쨍하고 시간은 너무나 늦어버렸다.

  별 수 없이 근처 역으로가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민호는 등 쪽에서 느껴지는 물컹거리는 불쾌한 감촉을, 신발이 쓸리는 짜증나는 느낌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떠나 무언가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 속에서 민호는 깨달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오늘 아침의 사건만 하더라도, 가장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정확한 이유 없이 솟구치는 반발심, 무심코 욱하는 정체불명의 감정, 가슴부터 목까지 차오른 답답한 기분.

  그것을 혹자들은 사춘기적 반항이라 부른다.

  "이런 빌어먹을!"

  민호가 소리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비비적거리던 뚱뚱한 여자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민호는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주변에 대고 마구 휘둘렀다. 사람들이 아연한 기색으로 민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한결 살 것 같았다.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분명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저게 웬 미친놈이야? 지금도 주위를 보면 자신을 폰카로 찍는 사람이나, 누구에겐가 재밌다는 듯 전화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나 민호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야 어찌됐건 민호와 그 친구 병훈만은 안다.

  민호는 휴대폰을 전철 바닥에 내리꽂았다. 최신형 기종으로 멋들어진 모습을 자랑하던 스마트폰이, 한낱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던 순간이었다.

  탈권위적 투사의 고함이었다.


<국제 휴대폰 자본 - 끝>





애플의 1984년 광고 패러디 영상을 보고 갑자기 생각난 개드립.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19금, 직접적인 성적 묘사는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추가 [3] 샤유 2012-01-15 4711
공지 공지 판갈내↗ 자치국↘ 맘대로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케세드랄헤드 2011-11-02 8629
1463 [판사대] 좋은 사람 데꼬드 2010-08-08 803
1462 [판사대] 군대, 탈출, 친구의 약. 광망 2010-08-08 842
1461 [판사대] 죽지않는 남자 코르닉스 2010-08-08 975
1460 [판사대] 오늘 하루를 마치며 산송장 2010-08-08 942
1459 [판사대] 지옥탈출 우내 2010-08-08 914
» [판사대] 국제 휴대폰 자본 쓺. 2010-08-08 1220
1457 [판사대] 거울과 여중딩과 아저씨 물논양롬 2010-08-08 1929
1456 [판사대] 이탈 디스말ㅋ 2010-08-08 984
1455 [판사대] 간단한 시험을 시작해 보자 LESS 2010-08-08 1167
1454 [판사대] 노 웨이 아웃 (수정) DOSKHARAAS 2010-08-08 812
1453 [판사대] 남자답게 탈출 collectiv 2010-08-08 937
1452 [판사대] 백신과 바이러스 k01980 2010-08-08 936
1451 [판사대] 더위로부터 탈출 Wishes 2010-08-08 932
1450 [판사대] 엄마 이스피나 2010-08-08 869
1449 [판사대] 첩보원 bikall 2010-08-08 939
1448 [판사대]탈출 kori 2010-08-08 915
1447 크리스티나의 세계(3) 위래 2010-08-06 724
1446 본격 미군이 판타지에 발리는 소설 [1] 몬지 2010-07-31 750
1445 크리스티나의 세계(2) 위래 2010-07-30 757
1444 크리스티나의 세계(1) 위래 2010-07-28 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