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들처럼 해를 보면 안돼.

하지만 어른들처럼 피를 먹고싶지 않아.

 

 

 

 

 

 

 

 

 

  음지식물

 

 

  창밖의 비가 느릿느릿하게 떨어졌다.

 

  먼 곳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정하을은 길 건너 상가 간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갯수까지 셀 수 있었다. 비는 뚜벅뚜벅 걸어와 쿵 하고 흩어졌다 다시 비가 되었다. 하을은 시선을 내렸다. 시선을 내리는 과정 조차도 너무 오래 걸렸다. 세상이 너무 느리다. 이런 변화가 시작 된 것은 어제 새 아빠가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부터였다. 정지된듯한 세상의 화상, 천장의 풍경, 역한 땀냄새 등은 아직도 그녀의 각막에 자리잡은 채 머물러 있었고, 아침 해가 뜬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그녀에게 놀라울 정도로 느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너무 약해져 있었다. 마치 여리고 작은 그녀를 배려하겠다는 듯이, 친절하고 가냘픈 힘에 무력한 세상이 되었다. 두 손가락으로 달걀을 집었다고 노른자까지 으깨지거나 문이 잠긴줄 모르고 열다가 철제 문의 경첩이 떨어지는 등의 일은 이제까지 없었다. 세상이 그녀를 배려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 주변의 뭔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것 따위는, 가엾은 정하을을 위한 댓가치고는 참 싸구려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렇겠지. 아빠?"

 

  하고 정하을은 목이 부러지고 척추가 뒤로 접힌 새아빠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잠겨있는, 경첩이 부서진 문을 다시 틀에 끼워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수중에 돈은 4700원. 점심 한끼를 사먹고나면 끝이다. 하지만 하반신과 상반신이 따로노는 새아빠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아직 감수성 깊은 하을에겐 별로다. 아마도 엄마가 돌아오면 다시 들어가야겠지만 그전까지는 바깥 바람을 좀 쇨 필요가 있었다. 하을은 늘 즐기던 한강으로의 산책코스 대신 집 옆 모퉁이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갔다. 비가 굉장히 많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도 별로 없어 소리조차도 단조로운 골목길이었다. 그리고 골목길 한쪽 끝에는 깨진 가로등 옆자리에 중년 남자가 앉아있었다.

 

  하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앞만 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중년 남자는 고인 물을 찰박찰박 튀기며 지나가는 하을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세상은 하을에게 너무 선명했다. TV가 잘 안보이지?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렴, 하고 스크린 코앞까지 데려가는 부모처럼 친절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조그만 픽셀들이 깜빡이는 세상. 남자의 눈에 새아빠처럼 공포나 경악 뭐 고통 따위의 것들이 떠오르기 직전에 이미 하을의 소매 끝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세상이 너무 느리다. 그리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하을은 골목 끝을 향해 걸어갔다. 일주일이 지나도 하을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척추가 꺾인 채 걸어다니는 아빠를 만났다가 물려 죽은 뒤에도, 골목길에서 여고생 무리를 습격해 잔인하게 뜯어먹은 어떤 중년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에 퍼진 뒤에도,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어 실탄이 발사되었을 때도, 후방의 예비사단 전력이 서울을 무력입성한 뒤에도, 3주후에 대한민국의 모든 전력이 끊어진 뒤에도, 18개월 뒤 다시 대한민국 전체에 야간전력이 공급되기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을은 마치 세상이 숨겨준 것 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