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태경의 입장에선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 주일 째 만나주지 않았던 채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름 어려운 커피를 마셨다. 아니, 커피보다 다른 게 더 많이 들어간 걸 커피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를 일이다. 환하게 웃는 채윤의 얼굴이 어색했다. 중학교 때 부터 보아 왔던 웃음을 얼핏 닮기는 했지만 달랐다.
"가면 했네?"
"응, 요즘 다들 하잖아. 엄마가 아는 데 있다고 해서 싸게 했지."
채윤은 예뻐졌다. 사실 가면을 안 쓰고 있었을 때에도 그리 못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가면 위 곱게 화장한 채윤은 그야말로 봄날 아가씨였다. 사귄 지가 벌써 삼 년. 고 3때 여자를 사귀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 소리는 태경과 채윤이 같은 학교로 진학하면서 사라졌다. 이 년 동안 채윤이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을 좋아했었지만 그 주름은 채윤의 가면 아래로 사라졌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섬뜩한, 물론 태경만이 느끼는 기분이다. 채윤의 수다 속에서 모은 정보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잘 했다고. 이제 너도 가면 하나 쓸 때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다. 채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태경이 너도 하나 해볼래? 요즘 싸고 좋은 거 많아."
"아, 난 그냥 맨얼굴로 살래."
"요즘 누가 그러냐? 두꺼운 게 싫어서 그러면 얇은 것도 있어. 한 지 안 한 지도 모를 만큼 얇은 거."
태경은 거의 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벌컥 들이켰다. 한 지 안 한 지도 모를 만큼 얇은 가면을 쓰려면 애초에 안 쓰면 될 것 아닌가. 시럽을 치지 않아 씁쓸한 커피 콩 볶은 물은 꿀럭거리며 잘도 목을 넘어갔다. 반 남아 있는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태경은 채윤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음에 하지 뭐. 근데 정말 예뻐 보이네."
"야 언젠 안 예뻤냐?"
특이점이 존재할 리 없는 무의미한 수다를 떨며 태경은 채윤의 웃음을 긁어모았다. 잔주름 잡힌 웃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태경의 말이 채윤의 가면 옆을 타고 도는 듯 했다. 무심코 둘러본 주변 여기저기서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던 가면들이다. 마치 납부 시기를 넘겨버린 고지서가 독촉장으로 치환하듯 어제의 가면과 오늘의 가면이 달랐다. 가면들이 태경을 둘러싸고 말 없는 압박을 가했다. 그 가면들 맨 앞에 채윤의 웃는 가면이 서 있었다. 저 가면은 천오백, 이 가면은 이천. 꼬리표라도 붙어있기를 바랬지만 태경을 둘러싼 가면들은 하나같이 지독하게 자연스러웠다. 흠집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역겨웠다. 머그잔에 커피가 반이나 남아있었지만 태경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어차피 채윤과의 사이에서 계산은 태경의 몫이었다. 다음 수업시간까지 한 시간도 넘게 남아있는 것도 상관없었다. 아무 맛 없는 표정으로 카드를 내민 태경은 계산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을 흘끔 곁눈질했다. 채윤의 것보다 더 비싸 보이는 가면이 웃고 있다. 어느새 태경의 곁으로 다가온 채경이 팔짱을 낀다.
"하긴. 요즘은 다들 그러니까."
여름은 좋아할 수 없는 계절이다. 어딜 가건 끈적한 햇살과 눅눅한 땀냄새가 따라붙었다. 방학기간을 조롱하듯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도서관은 구형 에어컨의 웅웅대는 소음과 함께 교권력의 은총을 천한 학생에게 베풀었다. 머리가 핑 돌 만큼 독한 전공서적의 칵테일에서 머리를 든 태경은 도서관 입구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복잡하게 꼬인 연기타래를 보며 해방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였나 과 동기 하나가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지나가다 보면 잡담 한 마디 나눌 정도의 사이. 전형적인 동기였다.
"너 그 소식 들었냐?"
"어?"
평생 솔로로 살 게 아니라면 씨씨는 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명언이었다. 태경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음에도 동기는 제 할 말만 계속했다. 채윤의 얘기였다.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질 때 쯤 태경은 채윤의 이별 통보를 들었다. 태경은 덤덤했다. 자신의 앞에 서서 이별을 통보하는 대상이 채윤인지, 채윤이 쓴 가면인지 알 수 없었다. 채윤을 처음 알았던 고등학생 때보다 더 화사해진 얼굴은 헤어지자는 말을 할 때에도 아름다웠다. 턱의 떨림이 이별의 슬픔인지 아니면 새로 쓴 가면이 어색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두 달 전 태경은 헤어졌다.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파리떼처럼 꼬여드는 소문이 귀찮았다. 몇 달 뒤면 방학이니 은둔을 선택한 태경은 도서관의 시원한 바람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동기녀석이 또 한 번 지분거리지 않았다면. 솔직히 말해서 관심은 있었다. 자신과 사귈 때보다 더 요란하게 입고 다니는 채윤의 가면은 달마다 바뀌었다. 외면하려 애쓰는 태경조차 눈치챌 정도였다.
"채윤이 채간 새끼. 집안이 좀 살던데?"
태경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가면 값이 장난도 아니고. 고등학교 때부터 봐 왔 다는 것은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채윤의 집은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가면을 바꿀 만한 재력은 없다. 다시 한 대를 더 꺼내 무는 태경의 귓등으로 동기의 목소리가 기어갔다. 스포츠카 타고 데리러 오는 걸 봤다느니, 가방 사 준게 몇 백 어치니. 농담으로 취집할 거니까 공부 빡세게 하라던 채윤의 메아리가 열두 달을 넘어 들려왔다. 그 때 부터 생각하고 있던건가. 물론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채윤이 취집에 성공하기나 바래 주면 될 거라고 태경은 생각했다. 담배를 터는 손가락 끝에서 빨갛게 달아올랐던 담뱃불이 바닥에 떨어져 몇 번 깜빡였다. 깜부기불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서야 태경은 다시 도서관 속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전공서적이 괴롭히는 책상 앞에 앉아야 할 시간이었다. 탈색된 형광등 조명 아래 눈이 피곤했다. 손에 만져지는 꺼칠한 피부. 군대도 안 갔다 온 주제에 영락없는 고학번 복학생 몰골이었다.
"가면 하나 써 볼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대충 펜을 끼워 표시해 뒀던 페이지를 편 태경은 복잡한 공식과 숫자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태경은 행운과 불행은 동시에 찾아온다는 말이 어디 명언사전에라도 있나 찾아보고 싶었다. 자취방 우편함에 꽂혀 있는 두 개의 우편물을 대충 뽑아들고 온 태경은 책상 위에 대충 던져놓은 채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문짝에 꽂혀있는 생수병을 벌컥거리고, 계란 갯수를 센 뒤, 후라이팬을 버너 위에 올려놓는다. 의식과도 같은 일련의 동작이 끝난 뒤에야 태경은 집어온 우편물을 확인했다. 그저 고지서 아니면 그런 비슷한 거겠거니 했던 태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통지서와 청첩장이었다. 며칠 전 입사면접을 봤던 회사의 합격 통지서. 채윤의 결혼 청첩장이 나란히 놓였다. 다음 주 부터 출근에 다음 주 일요일 결혼식이다. 벌써 몇 년 째 잊고 살아왔던 채윤의 얼굴을 떠올리던 태경은 후라이팬에서 기름 튀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계란 두 개를 깨 지글거리는 후라이 팬 위에 올렸다. 소식이 두 개니 계란도 두 개 쯤 먹어줘도 될 것 같았다. 노른자를 터뜨릴 때까지도 채윤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태경에게 남아있는 채윤의 마지막 모습은 첫 가면을 썼을 때의 모습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도 기억은 우회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계란이 삼겹살 판에 올라간 마늘처럼 한 쪽만 타 버리기 전에 간신히 뒤집은 태경은 다시 한 번 청첩장을 들여다봤다. 다음 주 일요일. 남자의 이름은 어차피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에도 남자가 누군지는 몰랐으니까. 부유하고 능력 있는 누군가라는 사실만은 확실한 일이었다. 부유하고 능력있지 않다면 최소한 새로 나온 가면을 사 줄 정도의 남자다. 접시에 계란 후라이를 옮겨 담으며 태경은 제대하고 맞췄던 양복이 아직도 몸에 맞을까를 생각했다.
식이 시작하기까진 꽤 남아 있었다.
"어? 너 이새끼, 얼마만에 보는거냐?"
누군가가 결혼식장 로비에서 채윤의 이름을 찾으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태경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등이 뻐근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우선하는 건 과연 누구냐 하는 문제다. 짧은 머리에 그을린 얼굴. 공대 다닌 남자가 다 그렇긴 하지만 졸업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얼굴엔 날티가 남아 있었다.
"민국이 너도 청첩장 받았냐?"
"과 동기한텐 다 돌린 것 같던데? 바빠서 안 올래다가 근처에 들릴 데가 있어서. 태경이 너한테도 돌릴 줄은 몰랐네."
"뭐, 옛날 일이니까.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사는 얘기로 떠들다 둘러본 주변에는 알 법 말 법한 얼굴이 간간히 보였다. 대학생이 되자 마자 쓴 가면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다니는 녀석부터 싸구려인지 어색한 가면을 쓰고 온 녀석까지. 선남 선녀들로만 가득한 결혼식장 로비에서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은 태경을 포함해서 다섯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면 없는 맨얼굴이 어색해 보였다. 화려한 가면 위에 사치스러운 화장을 곁들인 얼굴들이 사방에서 웃고 있었다. 결혼은 행복한 일이니까. 신부 얼굴이라도 보러 가자는 민국의 손길을 애써 사양한 채 태경은 축의금 봉투에 3만원을 넣을지 5만원을 넣을지 고민했다. 골치아픈 얼굴로 방명록을 쓰는 남자는 아무래도 채윤의 친척인 듯 했다. 아니면 같은 브랜드 가면을 샀거나. 이름만 쓰여 있는 봉투와 지갑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태경은 식권을 들고 서 있는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어디선가 본 듯 했다. 아직 가면도 쓰지 않은 얼굴이 앳돼 보였다. 어디서 봤더라.
"어? 태경오빠?"
여자가 먼저 말을 걸자 태경은 바빠졌다.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여자가 누군지 생각해 내는 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채윤과 헤어진 뒤론 여자 만날 생각도 안 했던 태경의 주변에 여자가 많을 리 없었다. 그 적은 선택지에서 골라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와, 오빠 진짜루 오랜만에 보네? 몇년만이지? 7년? 8년? 오빤 하나도 안 변했네?"
숫자를 듣자 태경의 기억회로 검색에 진척이 생겼다. 그때쯤이라면 태경이 아직 고등학교에 다닐 때다.
"아, 채희구나?"
채윤의 동생이었다. 채윤과 막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치마를 줄인다 파마를 한다 하며 왈가닥 행세를 하던 중학생은 어느새 숙녀 티 물큰 풍기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직 가면을 쓰지 않은 게 어색했다.
"어머, 오빠 나 못알아본거야? 너무한다. 깨진 건 언니랑 깨진 거지 나까지 그러기냐?"
채희 말대로 그랬다면 이 장소에 올 리도 없었겠지만 태경은 장난스레 눈을 흘기는 채희가 밉지 않았다. 웃음 끝에 매달리는 눈 주름이 아리송하게 익숙했다. 지갑 속에서 세종대왕 다섯 분을 봉투로 옮겨담은 태경은 방명록이 아닌 채희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축의금을 세느라 바쁜 방명록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예의 주름 잡히는 눈웃음을 치며 채희는 태경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어이쿠, 묵직하네? 식권 두 장 줄까?"
"두 번 먹을것도 아닌데, 너 저녁값이나 해라."
"언니 보고 갈래? 아마 지금쯤 신부화장한다고 가면 벗고 있을텐데."
채희의 말에서 엷은 경멸이 묻어난다. 20대 중반일 텐데도 아직도 얇은 가면 한 장 쓰지 않은 채희의 얼굴과 경멸이 잘 어울렸다.
"됐다. 너 봤으면 됐지."
식권을 받아든 태경은 식장을 지나쳐 식당으로 향했다. 식권 뒷장에 채희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던가 하는 로맨스는 없었다. 부페는 화려했다. 계란후라이와 김치의 앙상블에 질려 있던 태경에게는 채희의 존재는 깡그리 잊혀졌다. 곧 있으면 동기 녀석들이 같이 좀 오지 먼저 오냐고 투덜거리긴 할 테지만 어쨌든 사내녀석들이 결혼식에 별 의미 가질 리가 없다. 부케를 받고 드레스에 감동받는 건 어디까지나 여자들 일이다. 태경에게는 신부화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결혼반지에 박힌 다이아가 몇 캐럿인지보다 두 번째 접시에 얼마나 먹을 걸 쌓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연어 조각을 접시에 담고 있을 때 쯤 대학 동기들이 식권을 쥐고 들어왔다.
"치사하게 먼저 먹고있냐 임마."
"너나 나나 식에 관심없는건 똑같은데 뭘. 신부는 봤냐?"
"아니, 신부실 문이 계속 잠겨있던데?"
태경은 고개를 갸웃한 채 김밥을 접시에 담았다.
끊는다, 끊는다 하지만 담배를 끊은 놈은 둘 뿐이었다. 그마저도 하나는 동기가 피면 펴야지 라는 논리를 대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내심 피고 싶었던 모양이다. 직장 상사 얘기, 여자 얘기가 차례로 흘러나온다. 그다지 좋은 직장이 아닌 놈, 아직 여자가 없는 놈이 차례로 입을 다문다. 태경은 모든 주제에 미온적으로만 끼어들었다. 담배 한 대가 다 타 들어갈 때 즈음. 태경은 커피잔을 우겨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넣었다. 아직 식이 시작하려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이 중에서 식을 보고 돌아갈 만큼 한가해 보이는 녀석은 없어 보였다. 기껏 해야 신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돌아갈 일이다. 아직까지 신부실 문이 닫혀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3만 원, 혹은 5만 원 짜리 점심을 먹으러 온 건 아니었기에 태경의 동기들은 신부실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동기들 얼굴을 훑어본 태경은 결혼식장 문을 나서려 옷매무새를 만졌다. 결혼식장의 커다란 문으로 들이치는 햇빛에 구두 앞굽이 닿기 직전이었다. 뒤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태경은 발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뒤로 돌았다.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살인사건 따위, 그것도 결혼식장에서의 치정살인 따위는 드라마 작가도 안 쓸 내용이다. 수군대는 소리와 함께 신부실 문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신랑이 애타게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문을 열리지 않는다. 빽 하고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부실 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 걸음씩 멀어진다. 문이 살짝 열리는가 싶더니 다시 닫힌다. 웅성거림이 갑자기 터져나왔다. 가 볼까 했지만 채윤과의 거리가 태경의 발걸음을 막아세웠다. 돌아서는 태경의 옆눈에 하객의 스크럼을 뚫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여자가 보였다. 채희였다. 태경의 구두 뒷굽이 떨어지기 무섭게 결혼식장의 자동 유리문이 닫혔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달려가던 채희의 모습도. 채윤에 대한 기억도 유리문 너머에 남겨둔 채 태경은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든다. 채희의 손에 피가 묻어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이미 유리문 너머의 일이다.
"노원역이요."
택시가 출발했다.
채희의 연락이 온 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일주일이었나, 이주일이었나. 파지를 한아름 세절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세절기 진동에 묻혀 못 들을 뻔 한 진동음을 간신히 잡아낸 태경은 모르는 번호에 고개를 갸웃했다. 피싱 전화가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가 반가웠다. 혹시 친구녀석이 번호 바꿨다고 연락한 걸까. 세절기에 종이를 계속해서 집어넣으며 태경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태경씨 전화 맞죠?"
여자였다. 지난 번에 소개팅한 여자는 가망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태경은 세절기 정지 스위치를 눌렀다. 소음 덕에 목소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맞는데요. 누구시죠?"
"저 채희에요 오빠."
"어? 채희? 무슨일이야?"
"그날 오빠 언제 가신거에요?"
채윤의 결혼식 날이 떠올랐다. 그 날 마지막 기억은 달려가던 채희였다.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본 태경은 조용히 흡연실로 몸을 빼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 주제에 사무실에서 통화하는 건 무리였다. 채희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날에 대해 얘기했다.
"글쎄, 가면이 안 떨어질 줄은 몰랐지 뭐에요. 그걸 벗어보겠다고 처음엔 클렌징 오일이고 뭐고 다 써 보다가 안 되니까 결국엔 제조사에 전화하고. 결혼식날 대체 무슨 난리래요?"
결국 결혼식은 파행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가면이 조성한 공포감. 안절부절 못하던 채윤은 결국 억지로 가면을 잡아뜯었다. 점점 두꺼워져 가던 가면은 이미 찢어질 수 있는 두께가 아니었단다. 곱게 화장되어 있던 가면은 홀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붙어 있던 채윤의 얼굴 가죽이 함께 떨어져나갔다. 겉에는 아이라인과 볼 터치가 되어있는 꽃다운 화장을. 속에는 생짜로 뜯겨나간 유혈이 낭자한 가죽. 채희의 수다는 계속됐다.
"어머니는 쓰러지셨지. 신랑은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소리나 질러대고. 어휴, 무슨 남자가 그런대요?"
태경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면이 떨어져나가는 해방감과 함께 얼굴이 찢어지는 고통. 하이 소프라노 위로 두어 계단쯤 올라간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불안정하게 돌아가는 안구 아래에서 눈물이 비친다. 뜯겨나간 혈관에서 쏟아진 핏방울이 턱선을 타고 맺혀 아래로 떨어졌다. 새하얀 드레스 위로 빨간 피가 번진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갈수록 얼룩은 진하고 넓어진다. 태경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흡연실 문이 열렸다. 담배를 문 채 들어온 선배에게 가볍게 목례한 태경은 선배의 등 뒤로 지나가는 여사원들을 흘끗 바라봤다. 아름다운, 그러나 어딘가 하나같이 비슷해 보이는 가면들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채희의 얘기를 듣는 태경의 가슴에서 아쉬움이 솟았다. 가면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피에 젖었지만 채윤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가면을 쓴 채윤이 아닌, 가면 없이도 아름다웠던 채윤의 얼굴.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채윤의 첫 번 째 가면이 채윤을 대신했으니까.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 눈가에 맺히던 주름 뿐이었다.
"채희야, 저녁에 시간 있니?"
태경은 담배를 비벼 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