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들은 벌써 보고 또 봤다는 [아바타(Avatar, 2009)]를 이제야 봤다.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는 아니고 시간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 설 연휴를 기해서 심야로 보았다. 드라마 등으로 외도를 탔던 제임스 카메론의 귀환이다. 나는 제임스 카메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실은 그의 기량이 [터미네이터2(Terminator 2, 1991)]에서 만개하고 [타이타닉(Titanic, 1997)]때 반짝 회광반조하여 결국에는 비실비실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3D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위풍당당 돌아온 제임스 카메론의 위엄은 당혹스럽다. 이미 영화는 대단한 흥행몰이를 했으니 그 실체를 제 눈으로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안경 위에 입체안경을 또 쓰자니 적잖이 불편해 짜증이 났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막을 올리고 허공에 둥둥 뜬 물방울을 보여줄 때도 좀 신기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는 서울대공원인지 어디인지 10분짜리 3D영화 체험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바타 3D의 충격은 판도라 행성에 접어들었을 때 닥쳤다.

영화의 힘이 간접 체험과 몰입 수준에 있다면 [아바타]는 아마도 역사상 최고 수준의 괴력을 발휘하는 영화일 테다. 제이크 설리가 이크란을 타고 날아가는 발 밑으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밀림이 펼쳐질 때 나는 아찔했다. 저기 [클로버필드(Cloverfield, 2008)] 따위의 핸드헬드 기법 영화가 카메라라는 어떤 매개를 통해 현장감을 전달하려고 한다면, 카메론의 [아바타]는 관객이 직접 영화 현장에서 활동한다는 무서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영화가 같은 표현을 하더라도 기술에 따라 피부에 닿는 실감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딥 포커스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관객의 초점을 세심하게 계산한다. 따로 초점을 두지 않고 전화면적 초점이 가능한 딥 포커스 장면은 3D의 힘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판도라 행성의 나무들과 씨앗들이 마치 손을 뻗으면 뿌듯하게 잡힐 모양으로 싱싱하다. 화면 뒤에 머무르지 않고 화면 앞으로 돌진해오는 원근감은 판도라 행성을 거의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당긴다. 첨단 기술을 향한 제임스 카메론의 집착-집념에 전율하지 않을 도리 없다. 18년 전 [터미네이터2]에서 액체로 변해 쇠창살을 통과하는 터미네이터의 그래픽 표현이 첨단 기술의 충격을 안겨주었듯이 [아바타] 또한 마치 큐브릭적인 기술 진보를 온몸으로 증명한다.

판도라 행성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인 것이다. 오늘 [아바타]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아름다운 3D 체험이 아니었다. 그 체험을 만든 영화의 진보가 뇌를 광우병 뇌로 만든 양 멍청하게 했다. 싫으나 좋으나 [아바타]는 영화가 또 한 계단을 올라 밟았다는, 진보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 진보에 전율하며 나는 영화가 30년 후에도, 아니 10년만 지나도 지금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미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키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향기를 흘리는 등 (좀 우습다고 생각하지만)4D라는 이름의 초보적인 후각 촉각 표현이 나왔다. 10년 미래의 영화는 현재의 영화의 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상현실 체험에 가까운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좀 복잡하고 싱숭생숭하고 멜랑꼴리하기도 한 기이한 기분이었다. 십중팔구 지금과는 다른 형태일 영화를 잘 상상할 수 없다. 그걸 영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건 어쩌면 영화의 종말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진화가 영화의 종말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때도 나는 (이 '영화'든, 그 '영화'든)영화를 사랑할 수 있을까? 조금 무섭다.

2.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를 통해 판도라 행성이라는 또 다른 현실에 뛰어든다. 영화 중반에 그는 가상과 현실이 뒤바뀐 것 같다고 고백한다. 마찬가지다. 제이크 설리는 관객의 '아바타'다. 관객은 제이크 설리를 통해서 판도라 행성을 모험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입체안경을 벗었을 때 관객은 현실이 가상처럼 느껴지는, 현실-가상 사이 잔인한 낙차를 경험한다. 제이크 설리는 끝내 '가상'을 '현실'로 전이시켜 나비족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관객은 그럴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는 얄밉다. 제임스 카메론은 162분 동안 관객이 '내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걸 냉큼 빼앗아 버린다. 영화의 화두인 가상-현실을 고민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영화 바깥까지 미쳐 있다.

3. [아바타]의 정치의식은 미국이라면 걸프전을, 한국이라면 용산을 떠올릴 법하다. 1킬로그램당 2천만 달러짜리 자원을 구하러 나비족을 몰아낸다는 영화의 기본 뼈대는 제임스 카메론이 의식적으로 미국의 전쟁장사를 비판하려는 의도다. 허나 영화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카메론의 무의식이 일견 유아적일 정도로 순진하다는 점에서 한계도 명확하다. 편안한 이야기 끝에 나비족을 구원하는 영웅은 역시나 백인이다. 그 백인은 3개월만에 부족 최강의 전사라는 쯔테이를 주먹으로 제압할 만큼 영웅의 혈통을 타고난 모양이다. 예상했던 대로 토루크 막토라는 전설적 존재로 화한다. 영화 초반에 강렬한 매력을 발산했던 네이티리도 위대한 '토루크 막토' 앞에서는 무지한 여인으로 순식간에 격하된다. 무수한 할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듯이 제임스 카메론도 미국의, 백인의, 남성의 영웅주의를 떨치지 못했다. 이는 타자의 의식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고 타자 간의 갈등을 한 영웅을 통해 억지로 봉합하려고 들었던 카메론의 무리수가 만든 혈종들이다. 물론 제이크 설리의 갈등은 편안하게 봉합되었고 관객들도 편안한 결말에 즐거워하지만, 동시에 정작 현실의 갈등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를테면 [아바타] 가상-현실의 막강한 실감은 [아바타]라는 가상의 갈등 봉합이 현실의 갈등까지 봉합했다는 착각을 부른다. 결국 제이크의 편안함에 편안해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제임스 카메론이 조금만 더 영리하고 예민한 의식을 가졌더라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4. 또 [아바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걸 똑바로 인정해야 한다. 지구인들이 거대 군사력을 앞세워 나비족을 폭격한 것처럼 카메론은 거대 자본력을 앞세워 세계를 폭격하고 있다. 영화의 이율배반적인 성격은 [아바타]를 마냥 긍정하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