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단편 게시판
구구절절(區區折節)
나는 당최 사랑이라는 것과 인연이 없다. 이 여자다 싶어 시간을 보내노라면 떠나있거나 떠나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뱉어보았지만, 절정이 빚어낸 탄식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너는 나의 첫사랑이고, 또 언제나 다음의 너는 나의 첫사랑이다. 같이 지나왔었던 길에 가슴을 쥐어본 일이 없으며, 함께 머물렀던 공간에 눈물을 적신 일도 없다. 내가 문제인지 생각하여 바꾸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이 내가 있던 자리에는 말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근본적이요 이상적인 감정에 데어본 적도 없다. 그것은 내게서 사랑을 구하려는 여인들의 잘못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옷섶을 풀어헤치기도 옷깃을 여미기도 애매한 계절에, 나는 외로움이라는 밑 없는 한파로 몸을 떨며 발길을 헤매었다. 그 즈음에 노상의 점집 앞에 걸음을 멈추어, 눈을 껌뻑이다가 ‘애정운’이라는 글씨에 고개를 갸웃거려보였다. 생전 점을 본 일이 없는데 점집에서 걸음을 멈춘 까닭은 알 바가 없으나, 걸음이 닿아 그것을 이유로 점집에 들어섰다. 외형은 젊되 얼굴에 쌓인 그늘로써 나이를 맞출 수 없는 점쟁이와 말을 섞던 중에 그가 방도를 내었다.
“멀리서 사랑을 찾으시오.”
무어? 뜻 알 길 없는 말만 툭 내뱉어놓은 주제에 내 지갑의 종잇조각을 취하겠다? 현문에는 우답이 제일이라, 나는 그 괘씸함에 반하여 방법을 물었다. 멀리서, 어떻게? 그게 누군가? 이에 외려 꾸중이 돌아왔다.
“이 사람아. 연분이라면 어디든 만날 것이며 그 즈음에 눈에 뵐 것이 아닌가?”
그 혀가 참으로 미꾸라지라 다시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볼 장 다 봤으면 돈을 내놓고 사라져달라는 낯의 점쟁이에게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제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중매쟁이나 하겠지, 점쟁이나 할까. 그러는 나는 가진 재주 하나 없어 무엇인들 쟁이도 못 되니 당신 팔자가 나보다야 낫다.
다시 또 정한 곳이 없는 걸음이 한 걸음, 두 걸음. 그것이 다섯 걸음 째에 점쟁이의 목소리가 환청마냥 들린 듯하다. 멀리서 사랑을. 그 ‘멀리’라는 것이 대체 어떤 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허망스러움을 친구들에게 풀고자 여럿 친구를 불러내었다. 그 중 한 달하고 보름쯤 연애를 하는 친구가 말하기를, 지금의 연인이 자기의 꼭 맞는 사랑이라더라. 마음을 풀기는커녕 짐만 더 늘어난 기분이다. 내 기분이야 알 길 없는 친구는 연하여 짐을 얹어놓았다.
“정말 신기하지? 꼭 맞는 사람이 사랑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이.”
돈도 넉넉지 않고 엉덩이를 들기마저 귀찮아 1차, 2차, 3차를 죄 한 집에서 해결하였다. 취기에 정신은 혼미해져, 무슨 담소를 나눈 것도 같고, 세상에 둘도 없을 진지한 이야기가 오간 것도 같은데 기억은 사라져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웃음소리들과 허물없는 욕질들과 잘 적에 꿈을 꿨다하는 사실? 그렇지,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면서 집에 들어와 쓰러진 통에 꿈을 꾼 것은 같은데, 그마저도 취중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 연애를 시작한 마냥의 두근거림과 애석하게도 알싸한 두통만 남았다.
오늘은 하루를 열심으로 허비하겠노라 누워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는 중에 조만간 만나려고 마음먹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내용이 내 하루 계획을 완전히 깨어버리는 술 약속이라. 어제의 취기에서 맞은 고통은 다른 취기로 잊는 것이 제일이매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는 나를 부른 형과, 함께 아는 다른 형이요 누이요 동생들이 섞였다. 헌데 나와 가장 가까이 앉은 여인은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아는 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조목조목 따져보면 미인으로 치건대 전체적으로 보자면 퍽 어색했다. 잔을 세던 술자리가 병을 세도록 변해가는 와중에, 취기로써 그녀는 아주 완벽한 미인으로 변모한 데에 이어, 마침 나와도 이야기가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점쟁이가 말했던 것이 딱 들어맞는구나. 점쟁이의 한 이야기에 홀린 나는 꿈속에서 내가 설렌 이가 그녀라는 확신까지 가지기에 이르렀다. 하여 술자리가 파하고 우리는 거취를 함께 정하게 되어, 또 사랑한다는 실언인지를 내뱉은 그 다음 날에야 나는 내게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뭐가 딱 들어맞으며 뭐가 꿈속의 그녀인가! 침대만 뜨거웠지 이 여인에 대한 마음은 맨바닥보다 차가워져있다. 고맙게도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우리는 어색하게 헤어진 이후로 다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꿈을 꾸었는데 먼젓번보다는 조금은 생생하다. 그토록 텔레비전에 박혔을 때처럼 아리따운 연예인이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모르는 얼굴임에도 설렘이 느껴졌다. 얼굴의 형체는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따름이라. 분명한 다짐이라면 그 여인을 어디든지 만나게 된다면 꼭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점쟁이의 말한 대로 멀리서 만나게 될 내 연분이 가당하다. 아니라면 연예인도 아닌 것이 꿈에 나와서는 연애의 설렘을 심어줄 연유가 없지 않은가?
‘멀리’의 뜻을 찾아내겠다던 것으로 마침내 깊이 없는 지인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다. 그가 나를 피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노릇이니 약속은 쉽게 잡히었다. 다른 장소에서 만나면 필히 어색하므로 약속 장소는 술집으로 쉽게 되었다. 외국의 여인과 동석한 그는 난데없이 러시아에 다녀온 자랑을 해대었다. 가만 듣고 있자니 좀이 쑤시면서 약도 오르고, 일변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가겠노라 하다가도 부러움에 탄식으로 치장하였다. 그 중에 으뜸은 함께 온 여인에 대한 자랑이라. 러시아에서 만난 그녀와 사랑이 아주 뜨겁다하고 그가 말하였다.
“첫 눈으로 그녀가 바로 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사랑에는 국경이 무색하다는 그 말이 남의 것 아니더군요.”
이에 나는 속내로 경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아아, 왜 그 생각이 없었나! ‘멀리’가 물리적일 리를 젖혀두었다니! 그 이후로부터 나는 오로지 외국에 나갈 생각에 몰두하였다. 저금해둔 돈이 없다는 사실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돈을 벌기로 작정하였다. 목표할 것이 생기니 스스로 감탄할 만치 술술 잘 해내었다. 커다란 마트에서 시급제 일을 시작한 것이 잘 하여 월급제로 나아지니 모이는 자금 역시 적지 않았다. 외국에 나갈 일이 차차로 가까이 다가오게 되어 내게 뿌듯함까지 느끼었다.
다만 걸림돌은 의외의 곳에서 불쑥 드러났다. 공부가 이유로 그만둔 직원의 후임에 들어온 여인이 문제였다. 처음으로 그 여인을 본 순간이 계기로 나는 그녀에게 반하였다. 그녀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우스운 확신도 들었다. 그녀가 마트의 물건들을 정리하노라면 괜스레 그녀를 돕는 일이 자주 있게 되어 꾸중과 시샘을 못내 받는 일이 늘었지만, 그 덕으로 일터 외의 장소에서 그녀와 만나기까지 이르렀다.
잦은 만남이 있은 후에, 한강의 둔치에 놓인 벤치에 그녀와 나란히 앉아있을 때의 일이다. 벚꽃이 수를 놓은 한강변은 사람들로 무척이나 왁자하였다. 우중충한 색을 버리지 못하는 강 위에서는 흰 듯도 한 오리배 여러 척이 떠다녔다. 나는 강을 보는 척 시침을 떼며, 뒤로 동여맨 그녀의 짤따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고운 목선의 생김새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가 강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물 위로 오리배들이 참 예쁘게도 흐르네요.”
무슨 말인가 싶어 퍼뜩 시선을 돌려 둘로 곱게 겹이 진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두 숨 정도를 쉰 후로 이어서 말을 붙였다.
“헌데 우리는 어디로 흐르는가요?”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주춤했다.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만남은 있으되 정분이 멈칫거리고만 있으니 안타까울 노릇이다. 나는 강이 흐르는 끝의 수평선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지 멈추어있는지 알 길 없는 저기의 선을 넘으면 필시 바다가 드러날 일이다. 마음에서 내킴은 일지 않으나, 수평선의 너머로 넓게 너울대는 물에 나아가기 위하여 내 마음을 거두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러시아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뱉어 나오려던 말을 즉시로 멈추었다. 약간 놀란 얼굴을 내게로 돌린 그녀의 눈을 보면서, 나는 말을 삼키고 다시 준비하였다. 구태여 그녀에게 잔인해질 필요는 없는 노릇이다.
“그곳에 머물 준비는 인제 마쳤고요.”
무언가 말을 꺼낼 듯이 그녀의 입이 약간 떼어졌다가는 그대로 멈추었다. 그 한 모양새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기에 무안함이 들어, 나는 눈을 돌렸다. 강에는 듬성듬성 칠이 벗겨진 오리배 한 척이 집을 찾아 돌아가고 있었다. 그에 꼬랑지를 내며 따라오는 물길은 적적히도 갈라졌다. 물길에 따라하여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야속합니다.”
마음에 준비를 두었지만 그녀의 말은 그로써 끝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폐부에 아프게 흠을 주었다. 아까의 오리배는 제 집에 정박한 모양으로 멈추어있었다.
다음 날로 일을 그만두고 ― 그것은 비루한 배려인 셈이다 ― 출국을 준비하였다. 야속하다는 그녀의 한 마디가 못내 걸음을 잡아채었다. 그것을 나는 완강히 뿌리치며 기어코 출국하였다. 배워둔 러시아어로 친구들을 사귀기도, 여인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헌데 이상한 것이 내 눈에 뵈는 정분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 빌어먹을 점쟁이를 욕하며 일찌감치 러시아를 포기하였다. 계획을 변경하여 3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정분을 찾아다녔음에도 끝내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 꿈은 더욱 생생해져서 꾸었다. 이에 꿈에서 나온 여인의 모습 역시 차차로 선명함을 띠어갔다. 그녀는 단발에 고운 쌍꺼풀을 지닌, 목선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참으로 모를 노릇이다. 그녀가 잊어지매 그리움으로 쌓아둔 것인지. 시간이 흐르매 후회함이 넘쳐나는 것인지. 알 길 없는 도리로 한국에 돌아왔다. 꿈에는 아직도 그녀가 등장하였다. 나는 마침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바로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전화기를 던져놓았다. 3년이 지나면서 그녀가 새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 3년의 허비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꾸릴지도 모를 노릇이다. 야속했던 내가 그에 대하여 훼방할 자격이 없다. 눈가는 뜨뜻하되 마음이 시리다. 갈팡질팡하여, 왁자한 자리에서 술과 벗함은 그저 허무하였다. 그는 빈 집으로 돌아온 때의 공허함 뿐이었다. 책망한들 탓할 목적이 나오지를 않았다. 어디에 가지 않으면서 꿈만 연신 꿔대는 것에 일과를 하였다. 매일같이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쩌다가 만남직한 그녀는 고맙게도 미소로 나를 달래주었다. 하여 나는 꿈을 꾸었다. 깨었을 때는 잔인성마저 띤 지금에 마음이 놀라 더욱 꿈에 파묻었다. 지금도, 마음도, 꿈에 묻히었을 때는 차라리 설렘에 젖어들었다. 그 설렘은 무엇에 견줄 수도 맞출 수도 없다. 하여 나는 꿈을 꾼다.
나는 아마도 사랑이라는 것과 인연이 없다. 이 여자다 싶어 시간을 보내노라면 떠나있거나 떠나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뱉어보았지만, 절정이 빚어낸 탄식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너는 나의 첫사랑이고, 또 언제나 다음의 너는 나의 첫사랑이다. 같이 지나왔었던 길에 가슴을 쥐어본 일은 없으며, 함께 머물렀던 공간에 눈물을 적신 일도 없다. 내가 문제인지 생각하여 바꾸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변한 것은 하나도 없이 내가 있던 자리에는 말만 남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근본적이요 이상적인 감정에 데어본 적도 없다. 그것은 내게서 사랑을 구하려는 여인들의 잘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