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님의 고등어를 읽었다. 나온 지 상당히 오래된 책이고, 또한 유명한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것은 다시 읽은 것이 아니라 완전 처음 읽은 것이니까, 참 부끄러운 일이지 싶다. 뭐, 변명을 하자면 나는 원래 이런 유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와 함께 투쟁했던 우리는 이제 어쩌고저쩌고…….’ 여기서 ‘어쩌고저쩌고’란 대개 과거와 현재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갈등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겐 겪어본 적도 없는 일들에 대해 이렇다 할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평가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법 곤란한 문제이기도 하고, 또 영 재미없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안다. 물론 소설이란 독자가 경험한 사건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향수’나 ‘트와일라잇 시리즈’같은 작품들이 잘 읽히는 일이 없어야 될 테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결국 사랑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런 최후를 맞이하였고, 이사벨라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소녀적 상상의 결정체다. 이것들은 우리가 늘 대면하는 일들을 색다르게 포장한 것들이다. 그러나 운동이니, 데모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다르다. 뭐라고 해도 ‘운동권’과 ‘문청’과……그런 낯선 단어들은 달나라의 어느 크레이터만큼이나 까마득하다. 다소 염세적이기 마련인 이러한 글들은, 아무리 자조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들 그들 자신이 겪었던 격동기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그 험로를 헤쳐 나간 일들에 대한 은근한 과시와 자부심이 녹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온실 속의 화초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 한들 소위 말하는 ‘데모’를 했을지 안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좀 쓸쓸해진다. 과거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그 스물의 외침은, 이제는 88만원에 자조하며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성공을 위한 발버둥으로 바뀐 지 오래다. 배부른 투정이다. 물고기를 직접 낚지 않아도 먹을 물고기가 많은 게으른 자의 투정이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으니, 더욱 샘이 날 뿐인 거다.

 

물론 요즘도 ‘운동권’이 없지는 않다.  UR이고 FTA고, 최루탄에 대한 내성을 기르기 위해 담배를 배웠다는 그런 전설처럼 황당한 이야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겪었던 시위, 데모, 운동이란 한결같이, 너무도 한결같이 ‘이익’과 관련된 문제들뿐이었다. 아니라면, 뭐 기껏해야 ‘효순이, 미순이 사건’정도?

 

이데올로기는 죽었다, 고들 말한다. 이제 세계를 양분했던 체제나 리즘의 빈자리는 화려하고 즉각적인 이미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최윤 님의 글을 읽는다. ‘회색 눈사람.’ 같은 글이다. 작가가 다르고 주인공이 다르지만, 결국 내게는 같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푸른  기차’를 떠올린다. 90년대에 대한 글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위하고, 어찌되었건 문민정부가 시작한 무렵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희구는 표면적으로나마 보상받았다.(어떤 이들은 정말 ‘깊숙이’ 보상 받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하지만, 정열을 잃는다. 공통된 적이 없으니 사분오열 흩어져 제각기 방향을 상실하고(‘노르웨이의 숲’은 ‘노르웨이의 숲’으로 발간되었다가, 이후 ‘상실의 시대’로 이름을 바꿔 발간되었다. 제각기 잃어버린 것들은 다르겠지만, 결국 잃었다는 것 자체는 동일하다.) 시기적절하게 경기는 호황이고, 돈 벌리는 재미는 쏠쏠하고, 그러다 에코코, IMF가 터졌다. ‘돈’은 강해진다. 한때 등이 푸르렀던 그들은 결국, 소금에 절여지고 죽은 눈을 한 채로 돈이 오가는 시장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이천 년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무엇인가 하기는 해야겠는데, 싶다. 그런데 한번 당한 적은 있으니 위험한 건 못해먹겠고, 어쨌건 ‘철밥통’이 최고라. 군인과 공무원이 되기는 점점 더  요원해져만 간다. 이 모든 것들을 소설은 모사해낸다. 그리고 잠재적 독자들이 원하는 건 즉각적인 카타르시스라는 것을,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 무렵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대박이 났다. 나는 영화는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책만 놓고 보면 ‘우행시’와 ‘고등어’가 제법 닮았다.  주제도 다르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다르지만, 전반적인 이야기가 닮았다. 물론 이 두 작품은 모두 공지영 님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고등어’와 ‘우행시’는 다르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황석영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많은 새로운 독자’들이 생겼으니까.

 

소설은 결국 흥미를 끌어야 하고, 흥미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당연한 사실인데, 버라이어티 쇼에서 추억을 떨이로 팔아치우는 것 같은 예전 연예인들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