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마당 - 콘라드의 영화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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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라는 SF의 하위장르가 있다. 예를 들어 만약 히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총에 죽지 않았다면, 하는 식으로 역사가 현실과는 다른 쪽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바로 대체역사다. 영화 [왓치맨]의 세계는 원작자 앨런 무어가 만들어낸 미국의 대체역사 이야기다. 슈퍼 히어로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또다른 평행우주가 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슈퍼히어로 '코미디언'이 암살했다. 신적인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 '닥터 맨해튼' 덕택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다. 닉슨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으며 소련과는 아직도 불안한 냉전 상태다. [왓치맨]의 상상은 "현실의 슈퍼히어로"에서 시작한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많은 만화책 속의 슈퍼히어로들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선망의 존재였다. 그러나 [왓치맨]은 인정사정없이 슈퍼히어로의 영웅성을 해체한다. 사회를 감시하는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이 계속되자 이에 반발하는 군중의 시위가 일어나고 벽에는 이러한 구호가 붙는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
결국 킨 법령이 선포된 이후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공식적' 슈퍼히어로는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 둘 뿐이다. 어떤 슈퍼히어로는 정신병원에 갇혔고 다른 히어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고다이로 사는 '로어셰크' 외의 나머지 슈퍼히어로들은 모두 은퇴하여 일상 영역에 숨어들었다. '오지맨디아스'는 자신을 상품화시켜 거대 재벌이 되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만화와 영화와 소설에서 슈퍼히어로는 시대와 체제를 뛰어넘는 영웅으로 대접받아 왔다. 그러나 [왓치맨]이 현실로 끌어내린 슈퍼히어로는 시대와 체제의 질곡에 고통받아 우울한 사람들이다. 앨런 무어가 이야기를 쓰고, 데이브 기븐스가 그림을 그린 만화책 [왓치맨]은 지극히 현실적인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로 전설적 걸작이 되었다. 앨런 무어는 흔히 프랭크 밀러와 함께 미국 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지존'으로 칭해진다. [왓치맨]이 세상에 나왔을 때가 1986년이니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미국 만화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옛날부터 [왓치맨]의 영화화 소문은 무성했다. 그러나 감히 끝까지 해낸 이는 없었다. 마침내 테리 길리엄 감독까지 포기했을 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소리가 나왔다. 테리 길리엄은 물러나며 "텔레비전 시리즈로나 겨우 만들겠다"고 변명하듯 투덜거렸다. 실상 옳은 말씀이다. 일찍이 앨런 무어는 자기 만화는 영화로 만드는 게 절대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했다. 병렬 이야기 구조나, 말풍선 속에 빡빡한 정보량은 오직 만화라는 매체만이 가능하도록 앨런 무어가 일부러 구사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앨런 무어의 만화는 영화로 많이도 만들어졌지만, 정작 그이는 영화들을 비웃으며 인정하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원작자 이름을 빼 달라고 할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왓치맨]의 감독이 된 잭 스나이더는 꽤 교활한 방법을 택했다. 재해석 없이 원작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단 감독 스스로가 팬이라고 밝히며 감히 원작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161분짜리 영화라도 만화의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온전히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잭 스나이더는 만화의 몸통만 남기고 뚝뚝 잘라냈다. 슈퍼히어로들의 개인사는 대폭 줄어들었고, 메타픽션의 역할을 하는 [검은 화물선 이야기]나, 중간중간 삽입된 신문 기사들도 몽땅 사라져 버렸다.
결국 영화 [왓치맨]은 감독이 나름대로 원작 만화의 '엑기스'만을 뽑아 편집한 모양새다. 그러나 적어도 추려낸 이야기만큼은 원작에 충실하게 스크린에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아마 이게 영화의 허점이자 동시에 미덕이 되겠지만, 심지어 가게 간판처럼 소소한 부분까지 죄다 살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래서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은 얼마나 제대로 '복사'했느냐로 지분거려야 한다. 러닝타임 배분상 막바지의 '문어 괴물'을 없애고 약간 각색했지만 역시 주제의식 자체는 변치 않았다. 엄연히 블록버스터인데 폭넓은 연령층을 포기하고 과감히 18세 딱지를 붙인 선택도 감독의 의리가 엿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야 원작의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각적, 청각적 충격은 만화보다 영화가 더욱 효과적이다. 컷 속에서 동작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만화에 비하여 영화는 무척 다양한 방법을 써서 즐거움을 준다. 훨씬 빠르고, 잔인하고, 시끄럽다.
슈퍼히어로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괴한에게 '코미디언'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막을 올리는 [왓치맨]은 참으로 관객의 골치를 아프게 한다. 냉전 시대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바둥거리고 복닥거리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는 비참하다. 그들은 영웅성이 거세되었다. 옛날 슈퍼히어로의 주먹은 무조건 정의로웠다.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정의였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 다 갔다. [왓치맨] 이야기의 슈퍼히어로가 세우는 정의는 어쩌면 자폐적인 광기다. 물론 슈퍼히어로는 세상을 구하려 하겠지만, 때문에 무진장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우리네 역사는 도도한 세월의 강물을 타고 서로 지겹게 싸우던 일기장이다. 과연 투쟁의 역사를 영웅이 바로잡아 평화의 승리를 고할까? 역사를 살피면 어느 시대에나 승리가 있었고 영웅이 있었다. 그때마다 마치 역사는 완성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정말이지 역사는 가만히 멈추는 법이 없다. 가끔은 아주 조그만 일이 세상을 뒤바꾸기도 한다. 로어세크의 일기장처럼 말이다. 진실이 승리하고 혹은 거짓이 패하고, 오늘도 역사는 진보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 위에서 평범한 인간들이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하며 오늘을 살아갈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