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로(回路, 2001)] 디비디 주문하기 전에 포스터를 살펴보니까 모니터가 덩그러니 높인 품새가 어쩐지 [피어닷컴(FearDotCom, 2002)]의 냄새가 났다. 그게 하도 희대의 졸작이라 순간 몹시 꺼림칙해졌지만 그래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이름빨을 믿었으며, 앞서 보고 싶었던 [큐어(Cure, 1997)]가 다 팔렸길래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추운 가을밤, 맥주와 함께 일본 공포영화와 오랜만에 만나고 싶었다. 일본공포의 본좌! 결정판! [링(リング, 1998)]이 마지막이었다. 사다코가 우물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텔레비전 화면을 빠져나오려 낑낑댈 때 무서워 오들오들 떨면서도 한편으로는 중풍 걸렸냐 이년아 싶었다. 그렇게 나랑 일본 공포영화는 무언가 죽이 좀 안 맞는다. 아무래도 이제 머리칼 추욱 늘어뜨려서 눈알 치뜨고 있는 여인네보다는 다른 감성을 가진 공포가 더 끌리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회로]에 가득 들어찬 것은 마치 진폐증에라도 걸릴 듯한 더러운 공기다. 영화 속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영화 밖 사람인 내가 그렇게 느낀다. 황폐한 도시 풍경을 느릿느릿 쓰다듬는 화면은 시종 거무죽죽하고 침침하다. 옥상의 난초 화분들과 시멘트빛 건물들, 비닐 커튼, 난잡하게 어지러운 방구석이 그렇다. 심지어 공장이 원래 폐공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꾸역꾸역 나왔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다. 연기가 있든 없든 하늘은 더러웠다. 그냥 화면만 멍 때리며 바라보고 있어도 저절로 기분이 나빠질 것 같다. 더러운 공기는 세기말적 내용과 찰떡궁합이 된다. 단순한 유령 이히히히 영화가 아니다. 사다코는 비디오에만 짱박혀 있었지 싸돌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회로]의 유령들은 세계 구석구석 연결된 인터넷 회로를 타고 마구 달린다. 그러니까 인터넷을 타고 퍼진 유령에 씌어서 세상이 멸망한다는 고쓰 아포칼립스 영화다. 보여주는 데는 겨우 일본 구석탱이면서 세계 전부를 때려잡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허세와 배짱이다. 다만 범세계적 대참사가 벌어지는 게 테크놀로지 때문이라는 부분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은 고립되고 있다. 사람들이 외로워 떠난 자리에는 시커먼 그을음만 남는다.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에 피와 살점 따위가 없다. [회로]는 그런 난도질 영화가 아니다. 대신 독하게 쓸쓸하다. 저승이 포화 상태라 이승으로 삐져나온 유령들이란 그냥 허투루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불안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인이 높이 우러러보는 문명 세계란 얼마나 허약한 거인이냐.

인터넷 네트워크는 서울 사람과 산골 벽지 사람을 회로로 연결시켜 주었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그게 진짜 연결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있다고 소곤소곤 귓가에 이야기를 속삭인다. 아, 소름이 끼쳐. 히키코모리 외톨이 방구석 폐인이란 인터넷의 발달이 남긴 상처가 곪아 질질 흘러나온 고름이다.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냥 모니터가 편하고 키보드가 편한 우리 시대의 초상을 구로사와 기요시는 막장까지 그대로 밀고 달린다. 영화 막바지 쯤에 빨강 테이프를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는지(꼭 호기심이 화를 부른다) 료스케가 괜히 들어갔다가 유령과 딱 마주쳐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유령과 사람의 경계가 지워지고 몸서리쳐지는 불안만 남는 곳이다. 사실 전체에 걸쳐 별로 명확한 부분이 없다. 유령조차 똑똑한 모습이 아니라 어렴풋한 그림자로 맴돌다가 수줍게 나타난다. 이런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공포에 시달리는 게 [회로]의 맛이다. 무서운 분위기로 몰아가는 솜씨 하나는 죽여주니까 더러운 공기 흠뻑 들이마시고 축축한 지하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면 딱이다. 덧붙여, 결말 이후에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할 법하다. 과연 골골대는 료스케는 죽을까 살까 지금껏 유령과 마주친 이들은 죄다 죽었는데 말야. 하지만 료스케가 컴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겠다. 역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원래 희망이란 그런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