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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1670년경에 그려진 그림으로 아일랜드 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버들가지로 만든 배이다. 이 배는 운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케임브리지의 Pepysian 도서관에서 나온 것이며 항해하는 보트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이 건조되는 과정도 함께 담겨있다. 그 과정으로 보아 이 배는 시저의 병사에 의해 제작된 보트와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용골과 늑재, 고리버들로 짠 측면에 가죽을 씌워 만든 배라는 것이다.
이 것은 원시적이긴 해도 항해가 가능한 물건이다. 돛은 돛대에 쓰인 목재의 자연적으로 갈라진 부분을 이용해 용층줄(halliard)을 사용할 수 있었고, 나뭇가지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꼭대기에 장식물로 남겨져 있다. 소의 머리가 선수재로 사용되었는가 하면 돌과 목재로 만든 닻이 측면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17세기의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부분들이다.
한편, 여기에 사용된 돌닻은 수 세기 전에도 사용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발견되곤 한다. 아래는 미국의 케이프 코드(Cape Cod 메사추세스주의 반도)에서 비교적 최근까지 사용된 돌 닻의 그림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브리튼 사람들은 실제 나무 판자 배를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로이어(Loire)산의 서부, 브리타니의 남쪽의 베네티(veneti)에서 사용된 배들은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 시저는 기원전 56년 경에 그들과 해전을 벌였는데, 그들의 배에 대해 설명하기를 배가 생각한 것보다 더 발달된 것이었다 말하고 있다.
"그들의 배는 선체가 우리들의 배보다 다소 평평했다, 그래서 그들은 물이 얕은 곳에 보다 적합했고 썰물에 유리했다. 뱃머리는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었는데 선미의 경우에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의 규모에 걸맞는 것이었다. 배는 모두가 떡갈나무로 지어져있어 어떤 충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가로재는 갑판보로 1인치 두께의 쇠못으로 깊이 고정시켰다. 닻은 밧줄 대신 쇠로 된 체인으로 맞춰져 있었다. 돛은 얇게 무두질한 가죽이었는데, 아마포가 부족했거나 이런 무거운 배에 추력을 줄 강한 바람을 받기에 아마포가 부적절했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저는 위 그림의 로마 상선만큼이나 발달된 배들을 매우 가까이에서 봤을 것이고 적잖은 인상을 받은 듯 하다. 해군에는 영국의 서부에서 온 배들도 있었고, 그 것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배들을 갖고 있었다면 시저는 두 유형의 배를 언급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체인 케이블들의 경우에는 특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 것들은 완전히 사라졌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난 까닭이다.
잠시 곁다리를 치고 범선의 역사와는 그닥 상관이 없지만, 로마의 브리튼 침공기를 한번 살펴보자.
시저는 기원전 55년 즈음하여 영국을 방문하고 보고하기를, 그곳은 토양이 훌륭하고 노예로 부리기 좋은 사람들과 식량이 풍부하다라고 보고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 사실 로마는 영국을 침략하여 정복할 충분한 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격적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시작한 것은 기원후 43년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였다. 클라디우스는 황제 후계자들이 제거되는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템스 강 도강작전과 카물로두눔(콜체스터) 점령을 진두지휘하는 등 의욕적인 정복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물론, 진두지휘는 포퓰리즘적 행동에 가까운 사건이다.)

황실에서 골칫거리로 여기던 이 남자를 병약한 인물로 보고
황제로 등극시켰지만, 겉보기와 달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방탕함과 잔인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정복을 위해 몇 개의 군단을 파병했다.
로마군은 볼로뉴의 해협을 건너 켄트의 리치버러에 군영을 차렸다. (이후 리치버러에는 로마의 항구 루투피이가 건설된다.) 다른 군단들이 남부 영국의 다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파병되었는데, 제 2군단은 서식스의 치치스터에 인접한 피쉬번에 첫 병영을 차렸다. 이들의 주병영은 현재 데본샤이어의 주도(州都)인 엑서터로 옮겨 설치된다. 로마의 제 20군단은 콜체스터에, 14군단은 레스터에, 9군단은 피터버러 부근 롱소프에 주둔했다.
트리노반테스의 왕 카라타쿠스가 20군단에 의해 패배하여 웨일즈로 달아났고, 열한 명 브리튼의 왕들(부족의 왕들)은 항복을 해왔다.
47년에 이르면 브리타니아 땅의 반이 정복되지만, 카라타쿠스 같은 몇몇 왕들의 저항이 계속된다. 카라타쿠스는 51년 잉글랜드 남서부의 세번 강에서 다시한번 패배를 하는데 이번에도 도주에 성공. 브리간테스 부족에게로 달아나지만, 결국 브리간테스의 여왕이 로마군에게 밀고. 노예로서 로마로 압송된다.

60년 경에는 이세니 부족의 왕 프라스타그스가 죽으며, 또하나의 역사적 일화가 탄생한다. (이 이야기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기록이 전한다.) 프라스타그스는 로마인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는데, 그의 사후 아내 보디카가 여왕 자리에 올라 로마와의 평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로마는 프라스타그스의 모든 권리가 로마에게로 넘어왔다 선언한 것이다. 지배자 행세를 하는 로마인들에게 혹독하게 노예취급를 받던 이세니 부족은 보디카를 영수로 삼아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 로마군에게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로마군이 원군을 기다려 전열을 재정비한 뒤 벌인 마지막 대전투에서 보디카 여왕은 패배하고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결전이 벌어진 지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역사가들은 영국의 중서부 즈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날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에는 보디카 여왕의 조각상이 있다.)
한편, 베네티의 영역은 페네키아인들이 주석을 위해 오곤하던 장소중의 하나였고 콘월 또한 그 중의 하나였다. 베네티와 브리튼인들 모두에게 페네키아 배를 시험할 기회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이 단단한 나무배의 원리를 한번 알아낸 후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사라진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배를 건조 할 수 있었다. 성(聖) 아이아(Ia)가 나뭇잎을 타고 아일랜드로부터 건너왔다는 콘월의 전설은 녹색 나무로 지어진 코러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이 단단하고 견고한 나무배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았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그림은 배라기보다는 차라리 썰매처럼 보이기도 하며, 물고기보다는 개들이 자주 등장해 그런 의심을 뒷받침하곤 한다. 어쨌든 그 그림들은 일반적으로 배로 인정된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그 위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건 썰매보다는 배에 더 어울리는 부분이 아닌가?
뱃머리로 추정되는 끝부분은 일부 중앙 아프리카의 카누들이 갖고 있는 이중 뱃머리와 유사한 한편, 다른 쪽 끝은 선미로 보기에는 무척 독특하고 어찌보면 충각처럼 보인다.
다음의 그림들을 보자.


돌에 새겨진 조각 그림인 2번 3번의 그림 및 덴마크 동제 칼에 새겨진 가장 아래쪽의 그림을 1번의 그리스 꽃병에 새겨진 배와 비교해보면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충각처럼 보이는 북유럽의 형태가 실제 충각이건, 배를 건조하는 방식에 따라 충각을 모방한 하나의 디자인에 불과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어찌되었든 아마 이 배는 통나무의 홈을 파내는 덕아웃 방식이라기보다는 배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듯 보인다.
보다 복잡한 조각들은 배의 뼈대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덴마크 배들의 경우에는 널빤지를 대어 만든 것 같아 보인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배는 북미의 카누처럼 자작나무껍질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선수의 형태를 보자면 전쟁을 위한 디자인이라기보다는 그저 모조적인 형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스웨덴의 한 작가는 최근에 이 조각들이 '아우트리거 카누'로서 덕아웃방식으로 제작되었고, 둘 혹은 그 이상의 가로재로 본체에 길다란 통나무를 결합시켜 전복의 위험성을 줄이려 한 것이 아닌가 말하기도 하였다. (덕아웃 방식에 대해서는 앞서 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렇게 옆으로 통나무를 옆으로 덧댄 아우트리거 카누는
부력을 높여주는 한편, 전복의 위험성을 감소시켜준다.)
이런 카누는 동인도와 태평양에서야 대단히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유럽에서도 그와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어린 아이들이 아우트리거 카누의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들과 놀랄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북해 해안의 사람들 중 일부는 로마의 브리튼 정복 이전에 실제 널빤지로 만든 배들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분명,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간의 교류는 있었고, 이런 교류는 덕아웃 카누나 나무껍질로 만든 카누로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피테아스의 여행을 살펴보면 보다 후대의 작가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그가 극북(thule)이라 표현한 것은 노르웨이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마르세유 출신의 그리스 천문학자 피테아스는 그리스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럽의 대서양 해안과 영국의 섬들을 둘러본 모험자이며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On the Ocean'의 저자로서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를 통해 현대에까지 그 모험담이 전해진다. 그는 벌리리엄 즉, 콘월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최북단에서 thule이라 불리우는 거주지까지 갔다고 한다.
그 곳은 낮이 대단히 길어 21~22시간이나 되며 자정에도 해가 떠있는 곳이라 설명한다. 사실, 노르웨이를 제외하고 이같은 설명을 충족 할만한 곳은 없다. 피테아스는 사고로 우연히 표류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와 같이 당시에 그같은 항로가 존재했고 노르웨이 인들이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배들이 북해를 이전에도 여러차례 오갔음은 분명한 셈이다.

실제로는 그린랜드 혹은 아이슬랜드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북유럽인들은 아마도 로마의 문명을 접하기 전까지는 여러모로 야만인들이나 다름이 없었겠지만, 북해를 항해하거나 로마인들과 전투에서 만들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건조술과 항해술이 로마인들에 비해 그리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