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예니체리

가끔 이런 농담을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판타지소설은 성경이라고.

물론 이 농담은 성경의 황당무계함을 비꼬는 것이지만, 실제로 성경이 영향을 끼친 글들중에는 나니아연대기등을 비롯한 판타지소설들도 있다. 그 소설의 작가가 의식하지 않고 있을 지 모르지만.

판타지소설들이 알게 모르게 성경에게 영향을 받은 것들중에는 천사와 악마(혹은 천족과 마족)에 대한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판타지소설에 나오는 악마, 혹은 마족의 이미지중에는 기독교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상당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악마에 대한 이미지, 즉 신에게 반항한 반역자천사,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얼굴과 신사적인 모습,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한 유혹 등은 성경에서 시작되어, 중세의 전승을 거쳐 <실낙원>에 완성된다.

실낙원은 청교도신자였던 존 밀턴 (1608-1674)의 서사시로 세계3대서사시의 하나로 꼽힌다. 물론 실낙원에는 뛰어난 문학적 의미가 있고 그런 점에 대해서는 ‘문학연구가’들에게 연구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판타지소설에 드러나는 악마에 대한 실낙원의 모티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실낙원은 성경의 창세기전을 모티브로 쓰여져 있다. 창세기전3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담과 이브가 뱀(실낙원에서는 사탄의 현신)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되었다는 내용이 주요한 스토리의 축이다.

판타지소설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실낙원에 나오는 천사들과 악마들의 전쟁이 매력적이다. 실낙원의 중반에 미카엘은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천사들과 악마들의 전쟁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판타지소설에 자주 나오는 소재 중 하나는 천사와 악마(천족과 마족)사이에 일어난 ‘신마전쟁’이다. 이 실낙원에 나오는 천사와 악마사이의 전쟁이야말로 내가 본 제일 박진감있는 전쟁스토리중 하나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악마들의 캐릭터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등의 천사들도 매력적이고 멋있지만,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악마들의 캐릭터다. 패배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탄, 사탄의 옆에서 지혜로 그를 보좌하는 벨제붑, 뛰어난 용모와 언변으로 매력을 발산하는 베리얼, 비열하고 재물에만 집착하는 마몬, 만마전의 악마들은 판타지소설에도 자주 나온다. 판타지소설의 자료를 모아놓은 것으로 이 업계에서는 유명한, 판타지라이브러리시리즈의 <타락천사>편에 나오는 악마들의 정보중 다수는 이 실낙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면 실낙원이 판타지소설의 악마들의 이미지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밀턴의 실수중 하나는 악마들에게 너무나 많은 매력을 부여해버린 게 아닐까? 청교도신자인 밀턴의 의도는 신앙을 잃지 않고, 시련을 견뎌내는 독실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매력이 너무 컸다. 어쨌든 사탄은 신의 적으로 세상을 위협할 만큼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킬 만큼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신에게 당당히 저항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실낙원의 진정한 주인공은 고독하게 신과 천사들에 맞서싸우는 사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최근의 판타지소설에는 악마(마족)이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이러한 현상은 비단 판타지소설의 마족뿐만 아니라 무협소설의 사파나 마교에도 통용된다.) 이러한 판타지소설의 악마(마족)의 이미지에는 실낙원의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