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재건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째서 봉일은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을까. 재건이 분석하기에 봉일은 상당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경찰의 추격을 피하려고 택시 채 지하로 들어갔다고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재건은 곧바로 이 생각을 폐기처분했다. 달리는 차에서. 지하도 입구를 본다. 차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경찰이 뒤따라 들어올지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돌발적인 생각을 한다 해도 그 짧은 시간에 그런 비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보통은, 그리고 특히나 봉일 같이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은 생각이 겹쳐 판단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건은 봉일이 일부러 그 안으로 들어갔다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재건은 지하철역에서 사람이 몰려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봉일의 위협 때문에 경찰이 지하철을 통제하는 것이다. 통제가 심해질 것은 예상했을 텐데 어째서 동영상을 올린 것일까? 아니, 그 점을 주목해야 한다. 봉일은 분명 경찰이 지하철을 수색할 것임을 예상했을 것이다. 거기에 가연 빈틈이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강남 지역에 경보가 발령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제 시민들은 바이러스를 피해 숨어사는 데 익숙하다. 그저 식량을 비축해놓고 문을 닫고 이웃의 노크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되었다. 아나운서는 정부의 노력도 소개해준다. 모든 공공시설의 소독과 검문을 강화하고 상수도나 물류업체, 대중교통 등 바이러스가 전파될 위험이 있는 시설 경비를 강화 하겠다 한다. 시민에게 당부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몰린 공연장이나 야구장, 집회장 따위로의 출입은 삼가고 상태 이상한 사람은 바로 신고해 주십시오. 곧이어 정부 담화문이 방송되었다. 대통령은 시민 여러분이 잘 따라줬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문을 읽었다. 앞으로도 시민 의식을 잃지 않고 질서를 준수하여 이 나라를 지켜주십시오.

  재건은 비로소 생각의 구멍을 찾아냈다. 재건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기욱을 찾아보았다. 기욱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국정원 요원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놈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노기욱 요원을 불러주세요.”

  요원은 장난하지 말라고 말하며 재건을 무시했다. 마곤도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재건은 설명하려 했지만 요원은 자리를 옮겨 버렸다.

  “이것 참 야단났네. 마곤아. 기욱 씨한테 전화 해봐라.”

  마곤에게 휴대폰을 던져준다. 마곤은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건은 차를 출발시켰다.

  “통화중인데요.”

  마곤은 종료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재건은 대답했다.

  “한강.”

  도로가 붐벼서 재건은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때때로 중앙선까지 무시하며 달렸지만 얼마 가지 못해 재건의 차는 완전히 멈춰서고 말았다.

  인도 역시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건은 내려서 달릴까 생각해 봤지만 삼성역 부근에서 한강까지 뛰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라도 있으면 뺏어 탈 생각도 했으나 오토바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뭔 생각이에요? 한강은 왜 가려는 거예요?”

통화를 다시 시도해본 마곤이 말했다.

  “난 경찰과 군인이 지하철을 빠짐없이 수색할 것이라 믿었어. 그럼 봉일도 숨어있지 못해.”

  “그래서 한강으로 도망간다고요? 어떻게? ……앗?”

  마곤도 방법이 없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결론부터 들으니 바로 알겠지? 놈이 동영상을 올린 건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빼내기 위해서야. 또 그렇게 해서 주변을 혼잡하고 무질서하게 만든 거지. 놈은 기관실을 납치해서 지상으로 나갈 거야. 거기까진 경찰도 손을 못 쓸 것이고.”

  “강북의 경계가 덜한 역에서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경계가 어떨지는 파악할 수 없으니 그럴 순 없지. 아무도 지키지 않은 한강 다리 위가 답이야. 아마 배라든가를 미리 준비해 놨겠지.”

  “그런데 도로 꼴이 이렇군요.”

  넘쳐난 사람들은 이제 차도 위로도 돌아다녔다. 헬기 소리가 들렸다. 마곤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방송용 헬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헬기에 연락할 방법이라도 있음 좋을 텐데요.”

  “무슨 소리 안 들리니?”

  재건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헬기 소리잖아요. 방송용 헬기예요.”

  “아니, 그 소리 말고. 비명 소리 말야.”

  마곤은 귀를 기울여 보았다. 경적 소리에 섞여서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절규에 찬 비명소리가. 지옥 같은 현장을 여러 번 겪어본 마곤은 그것이 몹시 위험한 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앞쪽에서 달려온다. 뭉크의 그림이 떠오르는 얼굴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본능에 맡긴 달리기를 한다. 멀찍이 봉우리처럼 오른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사람들이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황급히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 무작정 페달을 밟아본다. 좁은 길에서 차끼리 부딪히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한다. 좀 더 현명한 사람은 차를 버리고 도망친다. 그 사람들 탓에 다른 운전자들도 차를 버린다. 뒤로 도망가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던 봉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와 함께 비명소리도 점점 커져 간다. 차가 마구 밟히고 사람 역시 밟히고 겁에 질려 서로 부둥켜안거나 서로를 밀쳐낸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좀비 수십 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멀대와는 다르게 이성이 전혀 없는 좀비였다. 좀비들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사람을 찢고 차를 부쉈다.

  “결국 이렇게 터트리는군.”

  재건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기욱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기욱은 전화를 받았다.

  “봉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놓쳤습니다. 지하철을 납치해서 한강까지 간 뒤 미리 준비해 둔 보트로 도망갔습니다.

  재건은 역시 그렇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심문 결과는 나왔나요? 건달들한테요.”

  -그것도 꽝이었어요. 이 동네에서 고용한 자들인 것 같아요. 하지만 단서가 곧 나올지도 모릅니다.

  “어디서요?”

  -인터넷 동영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재건의 입에서 아차,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얗게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기욱이 인터넷 추적에 관한 기술적 경위를 설명하는 동안 재건은 생각에 빈틈을 둔 채 방치해둔 것을 곱씹으며 반성했다.

  “잡을 수 있을 것 같나요?”

  -기술 팀에 달린 거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저도 데려가 주는 거죠?”

  기욱은 잠시 말이 없었다.

  -좀비 A는 지난 사건의 연장이라 할 수 있으니, 이번만 허락하겠습니다.

  “사랑해요.”

  -전 안 사랑합니다. 카페로 돌아오세요. 위치를 알아내는 대로 바로 출동합니다.

  “네. 아, 그런데 여기 진압 부대는 언제 보내줄 거죠? 좀비가 좀 많은데요.”

  -……아, 거기 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인력이 모두 지하 수색과 보안 검색에 몰려 있어서요. 곧, 타격대가 도착할겁니다.

  전화를 끊고 재건은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가요!”

  마곤은 언덕처럼 몰려오는 좀비 떼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재건은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이걸 입어.”

  재건은 마곤에게 옷 한 벌을 던져주었다.

  “이, 이것은!”

  그 옷은 과거 마곤이 입었던, K로 사건의 주역 텔미녀의 옷이었다. 스웨터와 리본, 짧은 치마, 니삭스까지 그때 그 옷 그대로였다. 마곤은 입을 벌린 채 차 바깥의 재건을 쳐다봤다.

  “그 너덜너덜한 옷으로 다닐 순 없잖아. 갈아입어.”

  “아, 아, 아니, 잠, 잠깐만. 내가 왜 이 옷을 입어야 되죠? 아니, 그 전에 아저씨가 왜 이 옷을 갖고 다니는 거예요?”

  “글세. 이것 참 기막힌 우연이네.”

  “이 옷을 입힐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거지?”

  “자. 시간이 없어. 그리고 이걸 받아.”

  재건은 바닥에서 허리춤까지 오는 막대를 들어보였다. 끝에는 아령만한 망치가 달려 있었다. 커다란 슬래지 해머였다.

  “뭐예요, 그건?”

  “요술 봉.”

  “아니 뭔진 알겠는데, 그걸 왜 나한테 주냐고요.”

  “이걸 들고, 좀비를 잡아라.”

  “내, 내가요? 내가 어떻게요! 아저씨는 어쩌고?”

  “난 기욱 씨를 찾아서 봉일을 추적할게. 넌 여기서 군인이 올 때까지 최대한 좀비를 진압해라.”

  좀비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곤은 좀비와 망치를 번갈아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좀비와의 전투라면 확실히 마곤이 유리했다.

  “옷은 갈아입는 게 좋을 걸? 방송국이 보고 있다고. 신원이 전국에 공개되느니 차라리 텔미녀로 싸우는 게 낫지 않아?”

  “……정말. 나중에 가만 안 둬.”

  마곤은 옷을 갈아입었다. 작년 6월 이후 처음 입는 옷이었다. 그때만큼 수치스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명감이 덧붙어서일까. 마곤은 차 밖으로 나와 재건에게 요술 봉이라고 불린 망치를 들었다.

  “능력을 너무 믿지 마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도 의미 없이 휘두르는 팔에 맞을 수도 있으니.”

  “알았다구요.”

  마곤은 치맛자락과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막 먹잇감을 붙잡은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좀비는 너무나 크고 강했고 많았다. 감염이 문제가 아니었다. 팔에 스치기만 해도 사람들은 나가 떨어졌고, 좀비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채 감염되기도 전에 찢겨 죽게 되었다.

  마곤은 먼저 가장 앞에 보이는 녀석에게 해머를 내려쳤다. 좀비는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았고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크더라도 뇌를 크게 다치면 좀비는 죽는다. 마곤은 해머가 무겁긴 하지만 적절한 무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곤에 한해서만 이었다. 해머를 들고 커다란 좀비와 마주친다면 누구든 휘두르기도 전에 물어뜯길 것이다. 마곤은 상대가 누구든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좀비의 뒤로 접근하여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 가능했다. 마곤은 사람을 공격하는 좀비를 우선 표적으로 삼았다. 한 방. 혹은 두 방에 거대 좀비는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좀비는 무척 컸고 마곤은 키가 작았다. 그래서 마곤은 다리를 쳐 무너트리거나 뛰어오르거나 차에 올라서 공격을 해야 했다. 어느 쪽이나 무서운 해머를 휘두르는데 체력적으로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연약한 마곤은 몇 기 잡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대체 경찰은 어디 있는 거야!”

  마곤은 제대로 맞추지 못해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좀비의 머리통을 마저 박살내며 말했다. 열댓 기의 좀비가 쓰러졌지만 좀비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뒤에서 목이 심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곤은 흠칫 놀라 능력을 발동했다. 뒤를 돌아보니 평범한 크기의 좀비가 멀뚱히 서 있었다. 도로에서 좀비가 된 자였다. 마곤은 가볍게 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이거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한데.”

  마곤은 능력을 쓴다면 쉴 수 있었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물리는 꼴을 구경해야 했다. 마곤은 잠시 쉬다가도 미쳐 도망가지 못한 사람이 보이면 재빨리 달려갔다.

  좀비는 넓게 퍼져 있었다. 마곤도 좀비를 따라다니느라 처음 있던 곳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마곤 혼자로써는 한 도로를 막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길로, 혹은 골목으로 들어간 좀비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머리 위로 헬기가 맴돌았다. 역시 마곤은 카메라가 달라붙기 좋은 소재였다. 마곤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면서도 텔미녀 옷을 입은 것이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시작한지 30분정도 지났다. 그제야 총을 든 특수부대가 등장했다. 마곤은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 했다. 망치를 내려놓고 벽에 기대 미끄러졌다.

  휴대폰이 울고 있었다. 꺼내보니 신호가 끊겼다. 부재중 통화가 열 건이나 있었다. 전부 선예에게서 온 것이었다. 마곤은 선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안 받고 뭐하는 거야! 벌써 좀비가 된 줄 알았잖아!

  선예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마곤은 전화기를 살짝 귀에서 떼었다.

  “귀 아파요 누나. 뭔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니. 탐정님한테 들었어. 혼자 좀비랑 싸우고 있다며!

  “아, 이제 경찰들 왔으니 괜찮아요.”

  -다친 데 없는 거야? 물리진 않았고? 난 마곤이 나보다 키가 커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단 말야.

  뭘 그런 걸 걱정하나요. 하고 마곤은 말했다.

  -지금 어디야? 그쪽으로 갈게.

  마곤은 황급히 말했다.

  “아, 아, 안 돼요! 오지 마요!”

  -이미 현장에 왔어. 아, 왜 그래요? 지나가야 돼요! 안에 헤어진 동생이 있단 말예요.

  검문에 걸린 모양이었다. 마곤에게도 경찰이 다가왔다.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주십시오.”

  마곤은 대답하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옮겼다. 망치는 무겁게 질질 끌렸다. 이제 필요는 없으니 버리고 가기로 했다. 멀지 않은 곳에 바리케이트가 있었고 선예는 거기서 경찰과 실랑이 중이었다. 마곤은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마곤은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마곤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기자들이었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사방에서 만장일치로 마곤을 겨누었다.

  질문이 쏟아지고 셔터 누르는 소리가 타자기 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마곤은 잠시 넋을 놓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기자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능력을 썼다. 기자들은 마곤을 놓치고 말았다. 그저 자기들 틈에 들어와 놓치고 말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발밑을 보지 않았고 마곤은 무사히 기자의 숲을 빠져나갈 수 있다.

  간신히 빠져나온 마곤의 앞에는 에이프런 차림의 선예가 서 있었다. 양손을 허리에 짚고 기어 나오는 마곤을 향해 허리를 조금 숙인다. 얼어 있는 마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곤은 일단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뛰자!”

  선예는 마곤의 손을 붙들고 달렸다.

  “너인 줄 알았어. 망치를 들고 좀비를 잡은 미소녀가 있다고 들었거든.”

  마곤은 말을 더듬으며 변명하려 한다.

  “저, 누, 누나. 이, 이 옷은, 그러니까 그게…….”

  “쉿.”

  선예는 윙크 하며 말했다.

  “누난 다 이해해요. 일단 조용한 데로 가자.”

  “그게 아니라요오……. 으앙.”

  기자들이 달려온다. 한 마디만 해달라고 정체가 뭐냐고 외치며 끈질기게도 달려온다.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쏟아지는 질문과 셔터 소리에 마곤과 선예는 떠밀리듯이 달렸다.

  선예는 갑자기 멈춰 섰다. 마곤은 잔발을 디디며 따라 멈췄다.

  선예는 기자들에게 등을 보인 채 외쳤다.

  “나는 사랑과 정의의 마법 소녀. 텔미걸이다!”

  마곤은 턱을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선예를 돌아보았다.

  머릿속이 표백되는 듯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예는 다시 마곤을 잡아끌었다. 마곤은 연체동물처럼 선예에게 끌려갔다. 마곤은 언제쯤이면 여장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선예는 골목으로, 골목으로 달렸다. 기자를 거의 따돌렸을 무렵, 선예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잘못 말한 것 같아.”

  “잘못 말했어요. 잘못 말해도 한참 잘못 말했어요!”

  “그냥 텔미녀라고 할걸 그랬어. 아님 텔미우먼이나. 음. 뭐라 하든 어색한데? 에라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마곤이었다.



  기욱과 재건은 철교 위에 있었다. 인터넷 추적 결과가 나오기 전에 최대한 봉일의 흔적을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철교 위에서 발자국은 끊겼고, 봉일의 짓으로 추정되는 시신 한 구만 건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현재로서는 인터넷 추적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한강변 전역을 수색하는 수밖에 남지 않는다.

  다행히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기욱은 위치 추적에 성공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인터넷에 영상을 올린 자는 노트북 무선 인터넷을 사용했다. 정보팀은 그 노트북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제 차로 뒤 따라갈게요.”

  이동하며 재건은 말했다.

  “아뇨. 저와 같이 가도록 해요.”

  “오, 까만 차 태워주시는 거예요?”

  재건은 아이처럼 말했다.

  “아뇨.”

  기욱은 말했다.

  “더 멋진 걸 타고 갑니다.”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헬기 한 대가 그들은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재건은 활짝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도착할 쯤, 작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뒤에 착륙합니다.”





11.



  봉일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주고 보트를 타고 다리 밑으로 마중 나왔다가 죽임을 당한 부하가 준비해 놓은 차를 타고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지는 구리시 근방 한적한 곳에 있는 2층짜리 벽돌 집 지하에 있었다. ‘그들’이 준비해준 집이었다.

  봉일은 적들이 집을 완전히 포위할 때까지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봉일은 지하 기지에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포탈의 메인을 가득 채운 기사는 텔미녀의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다. 망치를 들고 좀비들과 홀로 맞서 싸운 수수께끼의 미소녀에 밀려 강남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테러리스트는 관계 기사 한 토막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심지어 K로 사건과 그 이후의 열풍까지 소개되면서 인터넷은 텔미녀로 텔미녀로 넘쳐나게 되었다. 좀비 동영상이 이야기되지 않은 커뮤니티는 있어도 텔미녀를 논하지 않는 커뮤니티는 없었다.

  사실 그것은 정부의 언론 통제 탓이기도 했다. 정보원에서는 각 언론사에 텔미녀를 부각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언론으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지침이었다. 봉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저 박탈감만을 느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그여야만 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는 있을지라도 두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좀비에 대항해서 그들이 승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어떻게 고작 한 여자가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처음 연구소에서 좀비를 가지고 나온 것은 그였다. 여기저기에서 좀비 사건을 일으킨 것도 그였다. 하지만 좀비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지금은 엉뚱한 자가 나타나 공을 가로채 갔다.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임을 포기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어째서 나에게는 미움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다시, 바이러스를 개발해야 한다. 이제는 바이러스도 예전 같지 않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이러스는 점점 죽어갔다. 게다가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 나는 버림받기까지 한 것일까?

  봉일은 넘쳐흐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저 이름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저, 살아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작은 소원을 어째서 이룰 수 없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봉일은 노트북을 집어던지고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상 집은 가구도 있고 TV도 부엌도 있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지하 연구실에 들어박혀 있느라 거의 쓰지 않는 집이지만 일단 겉보기로는 자녀가 딸린 가족이 살법한 집이다. 봉일은 누군지도 모르는 가족사진을 벽에서 떼어내 집어던졌다. 뻐꾸기시계도 떼 버렸다. TV는 엎어버렸다. 소파를 걷어차다가 화분을 쓰러트렸다. 부엌으로 가 식기며 그릇을 싱크대에 있는 대로 처박아 버렸다. 두리번거리며 뭐든 부숴버릴 것을 찾았다. 안방으로 갔다. 안방에는 책꽂이가 있다. 책장을 통째로 뒤엎으려는 차, 봉일은 창밖을 보았다. 금세 사라졌지만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옷차림은 진압용 부대의 차림이었다. 봉일은 일단 책꽂이부터 쓰러트렸다. 적들이 벌써 나를 찾아냈구나.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봉일은 가스튜브를 가위로 잘랐다. 함정을 팠다. 쓰러진 TV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바닥의 비밀기지 입구를 열어 두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봉일은 그 탐정이라는 녀석이 오지 않았기를 바랐다. 녀석이라면 비밀 통로 입구를 열어둔 것을 보고 함정임을 눈치 챌 것이다. 봉일은 놈들이 들어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잡은 순간 들어올 것이 뻔했다. 봉일은 함정이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좀비는 이제 단 한 기밖에 없었다. 봉일은 쇠사슬을 차고 입마개를 한 그 좀비를 입구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몇 개 남지 않은 자신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위층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린다. 지체할 수 없었다. 봉일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고 또 다른 통로로 빠져나갔다.

  통로는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연결돼 있었다. 봉일이 바깥으로 나오자 집에서 불길이 일었다.



  기욱과 재건이 헬기에서 내리자 집이 폭발했다. 그들은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여러 대원이 죽거나 다쳤다. 그중에 봉일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또 당했군요.”

  재건이 말했다. 기욱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매번…….”

  “비밀 통로가 있었군요. 아마 바깥까지 통해 있나 봅니다.”

  재건은 지하로 난 문을 보며 말했다. 부상자와 사망자를 위로 올리자 재건은 밑으로 내려가 보았다. 기욱도 바로 뒤따랐다.

  “꽤 넓은 벙커네요. 아니, 그보단 연구실이라 해야 할까요?”

  재건은 전등이 나가 어두컴컴한 연구실 안을 둘러보았다. 특공대원에게서 손전등을 빌려 곳곳을 비추어 보았다. 좀비가 수용됐을법한 철창이 있었고 한 구석에 책상이 있었다. 재건과 기욱은 책상 쪽으로 가보았다.

  “이런 시설은 그 수상한 단체에서 제공해준 것이겠죠? 그런데 왜 이런 곳을 혼자 쓰고 있었을까요. 정말로 버림받은 걸까요? 어쩌면 이미 봉일은 신뢰를 잃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나를 유인해서 탈출한 좀비를 잡는다는 것부터가 저는 독자적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은 책상을 조사했다. 옆의 책장에는 지난 사건 때의 연구소처럼 이것저것 용기가 놓여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정식 실험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현미경이나 알코올램프, 저울, 증류기 등도 있는 것이 꽤나 그럴싸한 실험실 같았다.

  “물론 실험을 좀비 A 혼자에게 맡기진 않았겠죠?”

  기욱이 말했다.

  그들은 책상을 계속 조사했다. 책상 위에는 실험 도구 말고도 자질구레한 물건이 많았다. 달력이나 시계, 필기구, 머리띠, 서랍에는 책이나 공CD, 문서조각 등이 있었다. 재건은 서랍에서 꺼낸 노트를 훑어보았다. 말에 비해 꽤나 유려한 문체로 며칠 걸러서 일기가 쓰여 있었다. 재건은 일기장을 내려놓고 다른 노트를 집어보았다. 표지에 ‘1학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노트를 살펴보던 재건은 말했다.

  “이걸 보세요.”

  기욱은 달력을 살펴보다 말고 재건이 내민 노트를 보았다. 거기에는 사진이 오려 붙여져 있었다. 졸업사진에서 오린 듯한 얼굴과 이름이 나온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는 봉일의 글씨로 깨알 같이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4월 30일. 급우들 앞에서 내가 싫다고 말함.’

  ‘5월 2일. 내가 앉으려던 의자를 잡아 빼 넘어지게 함. 웃음거리.’

  ‘5월 3일. 내 실내화를 숨긴. 다음날 밝혀짐.’

  ‘5월 4일. 급식 줄설 때 나를 밀쳐 넘어트림. 새치기.’

  ……

  ‘6월 21일. 빵을 내 돈으로 사다 줌. 마음에 들지 않는 빵이라며 발로 참.’

  ‘6월 22일. 체육 시간. 축구공으로 고의로 나를 맞춤.’

  ‘6월 24일. 내 필통에 물풀을 풀어놓음. 필통은 버림.’

  ……

  “이건…….”

  기욱이 짧게 말했다.

  “말하자면 왕따 일기 같은 거군요.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을 그 행동까지 잊지 않고 있어요. 고등학교 때 같은데 1학년 때 이미 이런 자세한 기록을 했다는 걸 보면 중학교 때부터 괴롭힘을 받았던 것 같네요.”

  사진은 한 페이지, 글자가 많아지면 두 페이지에 한 장씩 붙어 있었다. 그렇게 노트 한 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건이 한 해 동안 다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노트는 3학년까지 있었다. 재건은 그 글씨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일기장에서의 글씨는 마구 흘려 쓴 듯한 글씨였지만 이 노트에서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마치 한 글자 한 글자를 가슴에 새기듯 정성 들인, 그리고 분노에 차 몇 번이고 곱씹는 듯한 그런 글씨였다.

  “이런 왕따 경험이 지금 같은 해괴한 범죄자가 된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군요.”

  기욱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 조금 다르게 봐요.”

  재건은 노트를 내려놓았다.

  “이 노트는 고등학생 때부터 하나하나 만든 것 같아 보이진 않죠? 예전에 메모해놓은 걸 옮겨 적은 거예요. 놈은 지금의 자신을 만든 원인을 찾고 있어요. 왕따의 기억은 그저 소급해 올라간 것뿐이죠. 그렇게, 놈은 스스로 좀비여야 할 근거가 필요한 것뿐이에요. 어째서 좀비가 되려 하는 진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사건을 일으키는 거고요.”

  기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비밀통로부터 찾아보죠. 이미 추적을 하고 있겠지만요.”

  재건은 말없이 책상을 뒤졌다. 서랍이며 책꽂이며 책상 밑까지 불빛을 비춰가며 무언가를 찾았다. 기욱은 이제 봉일의 뒤를 쫓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재건은 엎드려 있다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이제 쫓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기욱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게 없어요. 반드시 있어야 할 그것이 말이에요. 아무래도 가지고 갔나 봐요.”

  “뭐가 말인데요.”

  “졸업앨범이요. 노트에 붙은 사진과 종잇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봐선 여기서 만든 게 확실하네요.”

  재건은 바닥에서 주은 종잇조각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없단 말이죠. 왜 노트도 아니고 앨범을 하필이면 가져갔을까요?”

  재건은 의견을 묻는 게 아닌, 문제를 내는 것처럼 말했다.

  “모르겠으니까 답부터 빨리 들읍시다.”

  기욱은 탐정이란 종족의 습성을 깨우쳐가고 있었다.

  “적어도 학창 시절을 추억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놈은 극심한 패배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난 사건부터, 저한테 정체를 간파 당하고 놈은 저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기껏 준비한 쇼가 텔미녀 때문에 엉망이 됐지요. 또 친구들한테 버림받은 데다 은신처도 들키고 말았죠. 이전에 좀비 연구도 맘대로 안 됐을 겁니다. 우인혈의 장치 때문에요.”

  재건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노트북을 전등으로 비추었다.

  “그렇다면 놈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죠. 그렇다면,”

  “복수군요.”

  기욱은 말했다.

  “네. 놈은 자기 존재의 마지막 근거로 바로 이 왕따 노트를 만들고 있던 겁니다. 놈이 좀비로 남아 있으려면 남들에게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게 안 된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기원을 밝혀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조차 자신의 존재를 납득하지 못하니까요.”

  “왕따 가해자들에게 직접 복수를 하려는 겁니다. 앨범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서요.”

  “그래요. 이 노트에 적힌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보호해야 돼요.”

  그들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기욱은 봉일이 다녔던 학교를 수소문하라고 지시했다. 비밀 통로로 봉일을 추적했던 수색대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완전히 놓쳤다고 했다.

  “물론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저는 봉일이 이제 완전한 불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재건은 말했다.

  “무슨 뜻이죠?”

  재건은 입을 다물었다.

  해는 기울기 시작했다. 길기만 한 이틀이었다. 재건은 이것으로 사건은 완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과거로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현재를 지탱할만한 무언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봉일은 이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전 같은 계획적인 테러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고 얼굴과 존재까지 노출한 이상 제대로 숨어있지도 못할 것이다.

  재건은 마지막으로 소희의 일을 생각했다.



  봉일은 번화한 곳에 다다랐다.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마스크와 장갑을 끼었다. 모자는 챙겨 나오지 못해서 길거리에서 적당한 비니를 샀다. 여전히 불안해서 선글라스를 샀다. 싸구려라서 길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심하고 다니는 편이 나았다. 이제 사람이 많은 곳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떠돌았다.

  봉일의 손에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들려 있었다. 내가 이것을 왜 가지고 나왔지? 봉일은 스치듯 생각했던 앨범의 용도를 떠올렸다.

  봉일은 공중전화를 찾았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뒤로 공중전화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봉일은 공중전화를 찾으러 한참을 걸었다. 공중전화는 한적한 버스 정류장 옆에 있었다. 봉일은 문도 달리지 않은 상자 하나에 들어가 동전을 몇 개 집어넣었다.

  졸업앨범의 주소록과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몇 번이고 읽었던 원수의 이름을 찾아내 그 전화번호를 눌렀다. 결번을 알리는 멘트가 들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봉일은 다음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엉뚱한 사람이었다. 봉일은 참을성 있게 다음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거기 한기수 집입니까?”

  -예, 그런데요. 누구시죠?

  “기수 동창인데 받는 분은 누구십니까.”

  -동생이에요.

  봉일의 톤 없는 목소리에 그는 조금 겁먹은 듯 했다.

  “오빠를 바꿔주십시오.”

  동생은 예. 하고는 오빠를 부르러 갔다. 잠시 뒤 한기수가 전화를 받았다.

  -한기순데 누구시죠?

  봉일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당신이 괴롭힌 안봉일입니다.”

  -네? 누구시라고요?

  봉일은 마스크를 내리고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냐고 묻잖아 씹새끼야. 네가 짓밟은 안봉일이라고!”

  잠시 서로 침묵이 오갔다.

  -무슨 소리예요? 장난 전화야?

  “발뺌하는 거냐? 설마 잊어버렸다는 건 아니겠지? 네가 침 뱉고 짓밟은 일을 난 아직도 기억하는데.”

  다시 아무 소리도 없다.

  “난 네가 괴롭힌 덕분에 이지경이 됐는데, 난 미쳐버렸다고! 이 새끼야 왜 말을 안 해!”

  전화는 끊겨버렸다. 봉일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하하하.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습니까? 하하하! 하!”

  상대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우물거렸다. 봉일은 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배를 움켜잡으며 미친 것처럼 웃는다. 소리는 점점 우는 것과 같이 변해갔다. 봉일은 전화기에 엎드려 끄윽 거리며 못 알아듣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기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염불 외는 것 같은 중얼거림도 잦아들자 기수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때 일이라면, 미안하게 생각해……. 난 그때 어렸어. 나는……

  “미안하다면 그 죄가 잊어질 것 같나? 미안하다면? 네가 망쳐버린 내 인생은 어떡하고!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는데, 너 때문에!”

  봉일은 사막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잖아. 계속 미안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용서해 달라는 거겠지? 너는 짓밟고 나서 용서해 달라고 하면 그만이지? 그러면 없었던 일이 되는 거지? 당장 쳐들어가서 죽여 버리겠어! 나를 어쩔 거야! 내 인생을!”

  기수는 또 전화를 끊어 버렸다. 봉일은 소리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다시 동전을 넣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화기 선은 뽑혀 있었다. 봉일은 수화기를 집어 던졌다.

  옆 칸으로 가보았다. 그 칸은 카드 전용이었다. 봉일은 벽을 발로 차며 고함치다 밖으로 나왔다.

  앨범을 다시 훑어봤다. 원수의 얼굴들은 모두 잘려나가 있었다. 앨범의 빈칸은 너무 많았다. 빈칸에 모두 전화해 보는 것도 의미 없었다. 봉일은 앨범을 차도로 집어던졌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봉일은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정처 없이 걸었다. 밤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쓴 봉일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고 지나간다. 그들의 경멸하는 눈빛이 봉일을 궤뚫는다. 그들 역시 모두 한 패였다. 그들은 모두 가해자였다. 괴롭다. 모두가 그를 괴롭히고 있다. 밤그늘을 어지럽히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그를 짓누른다. 어디든 숨을 곳은 없다고 말한다. 조금은 서늘한 밤바람은 그를 걷어차는 발길질이다. 이제껏 그들의 위에 섰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그들에게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봉일은 그저 힘 약한 왕따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제 망치 든 미소녀가 되어 그를 후려 갈겼다.

  봉일은 걸었다. 숨이 찰 때까지 걸었다. 그리고 도망쳤다. 숨을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계속 걸었다. 사람을 피해서 목소리를 피해서 골목길 사이를 누볐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걸었다.

  가로등만이 호젓이 불을 밝히는 막다른 골목에서야 그는 멈춰 섰다. 봉일은 자신에게 돌아갈 용기가 있을지 생각하며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을 듯한 골목이었다. 담장 너머로 꼬리를 감추는 고양이마저 보이지 않는.

  “여기까지인가?”

  그 곳에서,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봉일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가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날렵해 보이는 몸매를 지닌 사내였다. 몸에 달라붙은 듯한 검은 양복은 주황색 가로등 빛 무리에 더욱 검어 보인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모습은 비현실적이고 낯설어 보이는, 한 마디로 괴물이다.

  그는 괴물이었다. 그의 얼굴은 비틀리고 구멍 뚫리고 얼룩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눈이 빛나고 비웃는 건지 비뚤어진 건지 모를 입이 잡아먹을 듯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봉일은 생전 처음 느끼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탈을 쓴 것이었다. 달 표면 같은 그 탈은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잠시 탈을 노려보던 봉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구냐.”

  탈은 말했다.

  “보시다시피, 탈입니다. 이름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굳이 따지다면 오광대 계열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저는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았으니까요. 혹시 영노나 비비가 아닌가 걱정하셨다면 안심하셔도 좋아요. 영노는 양반만 먹으니까요. 당신은 양반이 아니지요.”

  봉일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스르르 일어섰다.

  “놈들이 보낸 거냐?”

  “네. 해고 통보를 하러 왔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위험하다는 판단에 결정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쓸모가 없어졌을 뿐이지요.”

  탈은 천천히 봉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봉일은 정체 모를 위압감에 밀려 한 발짝 물러서고 만다.

  “당신을 계속 쓸 수 있을지 어떨지는 제가 결정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관이더군요. 계속 뒤를 밟았습니다. 아쉽지만 저는 당신이 전혀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완전히 패배했고, 무너졌으며, 존재 의미가 없어진 사람은 저희는 원하지 않습니다.”

  봉일은 어느새 시야 한 가득 가까워진 탈의 양 옆 틈을 엿보았다. 그의 시선을 읽은 탈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당신은 완벽하게 무력합니다. 저는 그저 이 사실을 전해주려는 것뿐입니다.”

  “그, 그럼 이제 됐으니 빨리, 이, 꺼져버려! 이, 이, 나도 너 같은 것 필요 없어!”

  봉일은 말했다. 하지만 탈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진 않습니다. 당신은 알아야 해요. 자신이 이 과장에서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

  다시 한 발짝. 봉일 역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탈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봉일은 움찔 하며 그것을 보았다. 또 다른 탈이다. 그는 탈을 바닥에 던져 놓는다. 봉일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탈이다. 마치 그의 얼굴 같다.

  “이게 적격입니다. 오광대나 동래 야유에는 공통적으로 1과장에 문둥이 춤이 있지요. 그 지역 병신춤을 흡수한 것이라 문둥이 과장은 그쪽 지역에서만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누구든 맡을 수 있지요.”

  봉일은 거울을 보듯 바닥의 문둥이 탈을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탈에 겹쳐진다. 탈은 웃는다. 이제야 동족을 만났다고 바닥에 뒤통수를 대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자. 춤을 추십시오.”

  탈은 말했다.

  “가슴 속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어내는 굿을 하십시오. 팔을 벌리고 어깨를 흔드십시오. 여망 없이 마음껏 놀다 죽으십시오. 당신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저, 춤을 출 수밖에 없지요. 자!”

  봉일은 어지럼을 느꼈다. 도저히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들어보니 그는 무릎 꿇고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봉일은 외쳤다.

  “아니야!”

  봉일은 일어나 문둥이 탈을 밟아 깨트려 버렸다. 몇 번이고 다시 밟으며 그 모습을 지워 버렸다. 악을 쓰며 지워 버렸다. 하지만 탈은 싸늘하게 말한다.

  “하긴. 너한테는 탈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봉일은 울며 탈에게 달려들었다. 탈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봉일을 피했다.

  얼마 만에 눈물을 흘린 건지 알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치솟는 울음을 가로막는 것은 갓난아기 때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울며 봉일을 도망쳤다. 뒤에서 탈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귀신처럼 봉일을 따라 잡았다.

  “그래. 그렇게 춤을 추어라, 문둥아. 마음껏 놀아라. 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봉일은 그렇게 떠밀려 무턱대고 달려갔다. 맨홀을 발견했다. 봉일은 맨홀로 달려들었다. 뚜껑을 열자 얼룩 한 점 없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봉일은 어둠을 손으로 만지는 듯 하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12.



  봉일을 놓치고 난 바로 다음날, 재건은 소희를 찾았다.

  한바탕 소동이 있은 뒤라 거리는 한산했다. 당장 전국의 학교가 휴교했고 임시 휴일을 지정한 회사도 많았다. 정부는 아침에 담화문을 발표했다. 더는 좀비 테러리스트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다. 동영상은 이미 인터넷 전역에 퍼졌고 시민들은 두 번씩이나 좀비가 도시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한 해명을 원했다. 정부는 사실 그대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곧이어 방송된 아침 뉴스에서는 테러리스트보다도 해머를 든 소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뉴스뿐만이 아니라 아침 프로그램에서까지 외신의 반응까지 소개해가며 텔미녀를 다뤘다.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다.

  재건은 유령 도시 같은 골목을 걸었다. 그 뒤로 마곤과 일자리를 잃어 딱히 할 일이 없어 따라 나온 선예가 따랐다. 골목길에 사람이라고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필이면 소희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소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저건 누구죠?”

  마곤이 말했다.

  “처음 보는 놈인데? 소희 씨 집에 저런 제비 같은 녀석이 온 적은 없었지?”

재건은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집에 누가 드나드는지 탐정님이 어떻게 알아요? 남자친구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거죠?”

  선예가 말했다. 선예는 재건이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게 아니라 딱 봐도 수상해 보이잖아. 나의 정의를 보는 눈은 틀림없어. 저 놈은 수상한 놈이야.”

  재건은 말했다.

  “어휴, 그렇게 수상하면 가서 말하지 그래요? 당신 악의 조직에서 왔지? 하고요.”

  재건은 둘을 이끌고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재건이 한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정말 그가 봉일과 연루된 수상한 조직에서 나왔다면 소희와 재건이 아는 사이라는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 소희가 위험해질 수 있다.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그들은 그를 지켜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희는 세윤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갑자기 오셔서 제대로 말리지는 못했어요. 밤에 빨래를 했거든요.”

  세윤은 공손한 몸짓으로 손수건을 받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품속에 넣었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제와 그제의 작업복이 도저히 연상되지 않는 세련된 모습이다.

  “괜찮아요.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인걸요.”

  그는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

  “그런데 어디 가시나 봐요. 그렇게 빼입으시고.”

  “오늘 친구 결혼식이 있거든요. 하하. 안 어울리죠?”

  소희는 손사래를 쳤다.

  “아녜요, 아녜요. 무척 잘 어울리세요. 누군지 못 알아볼 뻔 했거든요.”

  사실 소희는 이번에도 그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제가 굳이 지금 손수건을 받으러 온 건 이 동네 올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예요. 여기서 계속 일하면 가끔 승연 씨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 멀리 가게 됐네요.”

  “그, 새로운 일을 하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전 그 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답니다.”

  세윤은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승연 씨를 만나서 좋았습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결혼식 시간 맞춰야 되는데 어렵게 들린 거라서요.”

  “네. 정말 고마웠어요. 하시는 일도 잘 되길 빌게요.”

  그는 끝까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소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세윤을 자꾸 대하기가 편치만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얼굴 때문은 아닌가, 소희는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자가 왔다.

  ‘하늘 슈퍼로 오세요 -재건’

  하늘 슈퍼는 근처 구멍가게였다. 소희는 문을 잠그고 그곳으로 갔다.



  슈퍼 안에서 재건 일행은 주인아주머니의 눈총을 받아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소희의 집 대문 앞을 가로막은 남자 얘기였다. 재건은 ‘악의 조직원 론’을 단념하지 않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침튀겨가며 늘어놓았다.

  “왜 여기서 보자고 하셨어요?”

  소희가 나타났다.

  “아가씨 친구들이야? 빨리 데리구 나가. 정신없어 죽겠어 정말.”

  주인아주머니가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잠시 대피할 곳이 필요했거든요. 지금 나갈게요.”

  그들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들고 가게 바깥으로 나갔다. 재건은 소희에게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쥐어줬다. 소희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소희 씨. 아까 그 녀석 누구예요?”

  “좀 전에 집에 왔던 분이요?”

  “네. 수상한 녀석이죠?”

  그 말에 소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스 점검하러 오셨던 분이세요. 그런데 도움을 받은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던 것이고요.”

  “수, 수상해요! 가스 점검원이 옷을 그렇게 입을 리가 없잖아요!”

  재건은 외쳤다. 마곤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직업 차별적 발언이에요. 오늘은 점검하러 다니는 게 아닌가보죠. 결혼식이라도 간다든가.”

  “네. 결혼식 가신다고 하셨어요.”

  소희는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껍질은 잘 접어 주머니 속에 넣는다.

  “결혼식? 역시 수상해요. 옷을 빼입으면 쉽게 하는 말이 결혼식 간단 소리죠. 너무 평범한 말이라는 점에서 조작의 냄새가 나요.”

  “저기, 아무 일 없는데도 정장 입고 다니는 탐정님이 더 수상한데요.”

  마곤이 말했다.

  “맞아요. 탐정님은 왜 만날 정장만 입고 다녀요?”

  선예가 물었다.

  “만날 이라니. 더울 땐 티만 입고 다닌다고……. 그보다 뭘 도와줬는데 점검원이 다시 방문한 거예요?”

  소희는 대답했다.

  “그 아이 다시 돌아왔다고 했잖아요.”

  소희가 전날에 간단히 설명해준 바 있다.

  “그 분이 길에서 떠돌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해서 수소문해서 직접 봉사원에 데리고 와 주셨어요. 전 그때…… 울고 있었는데 그때 손수건을 빌렸었거든요.”

  “나쁜 놈이잖아요!”

  재건은 소리쳤다.

  “우는 여성에게 손수건을 주다니, 그런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은 나쁜 녀석이 틀림없어요!”

  “대체 무슨 근거로…….”

  마곤이 말했다.

  “손수건을 준다는 건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하는 행동이잖아요. 그런 짓을 뻔뻔하게 저질렀다는 것은 역시 뭔가가 수상해요. 그런 녀석은 찻집에서 누구랑 싸운 다음에 얼굴에 물을 끼얹는 짓을 할 게 틀림없어.”

  “…….”

  마곤과 선예는 재건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소희는 웃기만 했다.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곤이 말했다. 재건이 소희를 찾은 이유는 아이의 상태를 봐주기 위해서였다. 이틀 전 소희가 재건에게 의뢰하려던 일이었다.

  “그게, 한 장애아동 시설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이들 봄 야외 활동 나왔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돌려주기로 했나요?”

  재건은 물었다.

  “당연하지요. 연락이 안 왔으면 다른 시설로 보내려고 했었어요. 다행이지 뭐예요. 잘못했으면 찾을 수 없는 실종아동이 하나 생길 뻔 했으니까요.”

  재건의 얼굴에서 좀 전의 장난스런 표정이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이 사건을 나름 정리해보려 했다. 사건은 논리적으로 완결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재건의 직감이 무언가가 미심쩍다고 외치고 있었다.

  “아이를 한번 만나볼까요? 원래 그러려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게, 아이가 한 번 더 길을 잃은 뒤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아이를 엄중 보호하고 있어요. 또 다시 집 나가버리는 일이 없게요. 의사를 만날 때까지는 못 만날 것 같아요. 시설로 이송도 그쪽에서 직접 오기로 했어요.”

  “흠, 그럼 할 수 없죠. 우린 그냥 놀다 가죠. 그럼 나중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던 시설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나중에라도 조사해보도록 할게요.”

  소희는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 그럼 뭐하고 놀죠?”

  선예가 말했다.

  “글세. 뭐하고 놀까?”

  재건은 일행을 동네 놀이터로 이끌었다. 놀이터 역시 텅 비어있었다. 선예는 그네로 달려갔다. 재건도 뒤질세라 달려가 나머지 한 그네를 잡아탔다.

  마곤은 미끄럼 계단에 걸터앉았다. 소희는 그 옆에 서서 재건과 선예가 그네 타는 것을 구경했다. 재건은 일어서서 그네를 탔다. 키가 커서 머리가 봉에 닿으려 했다.

  “좀 어른답게 놀아요!”

  마곤이 소리쳤다. 재건 같은 몸집의 어른이 그네를 사정없이 흔드니까 삐그덕 하는 쇳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재건은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그네를 몰았다.

  재건은 반동을 타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재건은 안전선을 훌쩍 넘어서 착지했다. 선예는 소리 지르고 환호했다. 소희는 조용하게 박수를 쳤다. 재건은 뒤로 돌아 소희에게 말했다.

  “소희 씨도 같이 타요.”

  재건은 소희의 등을 떠밀어 그네로 데리고 갔다. 선예도 일어나 소희의 그네 줄을 붙잡았다.

  “아, 저는…… 괜찮아요.”

  “내 명쾌한 추리로는, 소희 씨는 그네를 시원하게 타본 적이 별로 없어요. 밀어줄 테니 타 봐요.”

  “그래. 언니. 나도 밀어줄게.”

  소희는 머뭇거리다 그네에 앉았다. 재건과 선예는 그네를 밀기 시작했다.

  “처, 천천히…… 꺄아!”

  재건과 선예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소희의 등을 주욱 밀었다. 진자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둘의 힘으로 소희의 그네는 앞뒤로 오갔다. 소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웃었다.

  “꺄! 살살, 살살 해요!”

  “에잇, 에잇. 언니 그네도 못 타는 거야?”

  “왜 탐정님이 언니라고 불러요?”

  선예는 그네를 밀며 재건을 질책했다. 양 줄은 마구 비틀렸고 소희는 그만 모래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희는 배를 붙잡고 웃었다. 터져버린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선예는 왜 그러는지 몰라 재건을 올려봤다. 재건은 말없이 소희의 등에 손은 얹었다. 소희는 등을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선예는 고개 숙인 소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웃음은 어느새 울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희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 울었다.

  하늘은 청명했고, 조용했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