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건 3부작 대망의 완결편입니다. 전편을 먼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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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이 밝는다. 소희는 알람 소리도 없이 일어나 커튼을 걷는다. 창문을 열면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제멋대로 떠드는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배경으로 커피 혹은 코코아를 준비한다. 오늘은 커피이다. 정수기 물에 인스턴트커피를 탄다. 잠깐의 티타임으로 잠을 깨우고 아침의 여유를 만끽한다.

  소희는 그날의 스케줄을 점검했다. 스케줄이라 봐야 병원의 재활 프로그램이나 문화센터 강좌나 적십자원에서의 봉사활동 정도였지만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생활비는 연구소에서 주는 사례비로 충족 가능했다. 그 돈이 끊긴다면 일자리를 찾아볼 계획이었다. 아직은 휴식이 필요했다. 지난 사건 이후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사건이 없을 때는 언제나 빈둥거리는 재건이 보기에는 지금도 바빠 보였지만.

  오늘은 봉사활동을 나간다. 적십자 봉사원에서는 주로 지역의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을 돕는다. 정기적으로 쌀이나 먹을거리, 의복 등을 갖다 주며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다. 오전 중에 봉사원 회의가 있다. 소희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그날 회의 안건을 검토하며 시간을 보냈다. 출발하기 적당한 시각이 되자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언니! 뉴스 봤어? 괴물이 나타났대!

  선예였다. 선예는 빨리 TV를 켜보라고 말했다. 소희는 약속 시간을 걱정하며 TV를 틀었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연쇄살인범 강 씨가 범행을 전적으로 자백한 가운데, 정확한 희생자 파악이 늦어지고 있어 수사가 다시 난항에 빠졌습니다. 강 씨는 몇몇 희생자에 대한 범행은 인정했지만 정확히 몇 명을 해쳤는지에 대해서는 진술이 번복되고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시신을 처리하는 데에도 체포 초기에는 유기했다고 진술한 반면 해방했다거나 심지어 먹었다고까지 진술하여 수사에 혼선을 주고 있습니다. 경찰은……’

  소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괴물이라니, 저 살인범 말하는 거니?”

  -아니, 아니, 지금 몇 번 튼 거야? 6번 틀어봐 봐. 괴물이 나왔대. 이런, 이제 다 지나갔다.

  소희는 채널을 돌렸다. 역시 뉴스를 하고 있었으나 괴물도 살인범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괴물인데 그래? 천지에 내시라도 또 나타났대?”

  -내가 어제 말한 괴몰 있잖아! 밤에 이상한 그림자를 봤다고 한 거.

  소희는 TV를 끄고 신을 신었다.

  “그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그 괴물 말이지?”

  -응. 팔다리가 지나치게 긴 괴물 말야. 근데 이번에 뉴스에 나온 괴물도 비슷한 괴물이야. 팔다리가 무지 길고 키가 2미터는 넘는다고!

  “음, 탐정님처럼 말한다면.”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문을 잠갔다. 현관에서 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흙길이었다. 재건이 발자국을 쉽게 남기겠다며 타일을 걷어냈기 때문이었다. 소희는 흙길을 폴짝폴짝 뛰어 넘은 뒤, 대문을 지켜보는 카메라에 손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서며 마저 말했다.

  “말단 비대증이 있는 치한이 아닐까?”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거인도 거인 나름이지. 보통 거인은 최홍만 같은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잖아. 아니야. 언니가 TV를 봤어야 하는데. 지금 밖에 나가고 있지?

  “응. 봉사대 회의가 있어서. 있다가 얘기하자. 괴물이라면 TV에 또 나오겠지.”

  -알았어요. 괴물이 나 잡아가도 모른다.

  “그땐 이 언니가 구해줄게. 걱정 마세요.”

  -알았어요. 너무 듬직해서 밤거리가 하나도 안 무서운데?

  통화는 거기에서 끝났고 소희는 서둘러 약속장소로 걸어갔다.



  그 시각, 재건도 TV를 보고 있었다. 마곤은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 재건은 마곤을 깨웠다.

  “일어나. 사건이다.”

  “으음, 벌써 그 때 보상금 다 떨어졌어요?”

  “우리가 언제 생계형 탐정이었나? 의뢰비가 있든 없든 미제 사건이 있는 한 무조건 달려가는 사람이 바로 이 탐정 김재건님이시지.”

  “지금 아무도 듣는 사람 없으니 무슨 꿍꿍이인지 말해 봐요. 요샌 의뢰도 안 들어왔잖아요.”

  재건은 소희가 카메라를 향해 인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대문의 CCTV는 소희의 동의하에 설치하여 재건의 사무실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었다.

  “내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어. 난 좀비가 발생했을 때부터 한 가지를 걱정하고 있었지.”

  “소라 아오이나 히라노 아야가 좀비에 감염된다든지요?”

  “넌 자꾸 이 훌륭한 탐정님을 음해하려는데 그건 말이지, 아, 음……. 에, 몹시 잘못된 거야.”

  마곤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이 농담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알았으니까 계속 해봐요.”

  재건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좀비는, 너도 알다시피 자제력이 없어서 인간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어. 그래서 느리더라도 무서운 거고.”

  “그렇죠.”

  “그런데 일반 사람이 좀비화 돼도 그렇게 무서운데 원래 강했던 인간이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최홍만이나 효도르같은 사람 말야.”

  “최홍만이라도 별 수 있겠어요? 머리를 날려버리면 그만이겠죠.”

  “잘 훈련 받은 군인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물론, 그 전이 문제지. 좀비 A처럼 테러를 목적으로 하는 자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최홍만같은 거인을 납치하고 감염시킨 뒤 도시 한복판에 떨어트려놓는 거야.”

  마곤은 곧바로 대답했다.

  “충격과 공포겠죠.”

  “그렇지. 무척 무서울 거야.”

  마곤은 몸을 일으켜 앉아 말했다.

  “왜요? 최홍만이라도 납치당했대요?”

  “그런 기사는 없지만, 괴물이 떴대.”

  재건은 들여다보고 있던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었다. 마곤은 기사 부분 부분을 소리 내 읽었다.

  “키 250센치 정도. 으르렁거렸다. 한밤중 목격자 다수. 좀비가 아닐까. 날이 밝고는 사라져. 아하, 이놈이 뉴 타입 좀비가 아닐까 걱정하는 거군요.”

  “응. 그렇다면 봉일이랑 연관 돼있을 수도 있겠고.”

  “좋군요. 그럼 조사 나가죠. 여기가…… 삼성동이군요. 여기라면 선예 누나 가게 근처 아닌가요?”

  “그래. 선예 씨도 봤을지 모르겠다. 지금 나가보자.”

  오랜만의 사건이었다. 재건은 기지개를 부들부들 떨며 늘여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곤은 끝자락이 여전히 하얗게 치렁거리는 재건의 머리카락을 보며 사람들 이목을 걱정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마곤의 휴대폰이 울렸다. 선예였다.

  “선예 누나! 어떻게 바로 전화가 온담. 마침 누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선예는 까르르 웃더니 말했다.

  -정말? 이 누나가 그렇게 보고 싶었구나! 누나도 우리 마곤이가 보고 싶었어.

  “하하. 사실 뉴스 보고 생각난 거지만요.”

  -응. 나도 사건 때문에 전화 한 거야.

  “하하하…….”

  선예는 괴물을 봤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재건이 관심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해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마곤은 선예와 약속을 잡았다. 자세한 것은 선예가 일하는 카페로 오면 이야기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마곤한테 전화한 거야? 나한테 직접 하지 않고.”

  마곤은 선예와 조금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수염 난 아저씨보다 내가 더 좋다는데요?”

  재건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마곤아. 사람 말은 정확히 전해줘야지.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한 거 아니야?”

  “아뇨. 원어민 발음으로 아, 저, 씨라고 분명히 말했는데요?”

  “자. 빨리 준비하자. 이러는 동안에 좀비 녀석들이 어떤 음흉한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구!”

  재건은 옷장에 대충 접어서 넣어뒀던 검은 양복을 꺼냈다. 마곤은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길어졌다. 회계 문제로 봉사원간의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돈 계산이 맞지 않았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자 대화는 감정적으로 흘렀고 그러다보니 연배나 경력 문제까지 언급되어 좀처럼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희는 곧 병원에도 가봐야 했다. 어떻게든 격양된 대화를 누그러트리고 말을 꺼내야 했지만 소희는 그중에서 가장 어렸고 중재는커녕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소희는 시계를 자꾸 쳐다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행히 말다툼은 마냥 계속되지는 않았다. 지루하고 갈피를 못 잡는 대화 끝에 모두들 조금씩 불만족스러웠지만 수습하는 쪽으로 가닥 잡혔다. 그쯤이 소희가 가봐야 하는 시각이었다. 소희는 사정을 말할 기회를 노렸다. 회의 진행자는 다음 안건을 꺼내 들었다.

  “이야기가 너무 늦어졌지만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 보기로 하죠. 이전에 얘기한 여자애 있죠? 그 애 일이예요.”

  “회장님이 맡아주신다는 애 말이죠?”

  다른 누가 질문했다.

  “네. 상태가 많이 불안정한 애지요. 저도 한 번 만나 봤는데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소희는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했다. 진행자는 계속 말했다.

  “정신적으로 많이 불안정한 애 같아요. 사람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그, 국제유대자본인가를 자꾸 중얼거리면서 두려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들 말로는 음모론인가 뭔가 하는 것 같은데 나오는 조직이라고 하더라고요.”

  소희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재건이 소희에게 정황을 물을 때 나온 단어였다. 소희가 감금됐을 때의 상황을 요령 있게 설명하지 못하자, 재건이 사실을 하나하나 물으며 소희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당시의 정황을 꽤나 자세하게 끌어낼 수 있었다. 재건은 그때 국제유태자본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느냐고 물었었다. 소희는 처음 듣는 소리라고 했다. 재건이 간단하게 설명해주기는 했다.

  “음모론 같은 건데요, 유태인 금융 재벌은 실제로 존재해요. 록펠러나 로스차일드 같은 유명 자본가가 유태인 소유죠. 그런데 좀 더 나아가서 그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려 한다는 게 국제유태자본론에서 말하는 거예요. 심하게는 일본의 조선 침략마저도 유태인의 음모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죠.”

  “터무니 없는 소리 아닌가요?”

  “터무니 없다기 보다는, 증거가 없죠. 논리나 이론이야 사실 클로즈드 돼 있으니까 뭐라고 말을 지어내든 맞아 떨어질 수야 있지만 증거가 없다면야 쓸 데 없는 가설이 되는 거죠. 저야 모든 가설을 인정하므로 진위 여부에는 관심 없습니다만.”

  “그럼 그 자본가들이 이번 사건과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한국에서 헬기 타고 나타나 총을 갈겨댈 만한 단체를 지금 정보원이 찾고 있는데요, 저는 혹시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자, 제가 말하는 그 단체가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알겠죠? 소희 씨가 갇혀있는 동안 그것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정체 모를 외국 이름이라든지요.”

  그때 소희는 아무것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소희는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그저 우연일 뿐일까? 우연일 것이다. 소희가 그 단어를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재건밖에는 없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보다 먼저 소희는 회의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회장이 아이를 만나게 된 경위나 지금까지의 조치 등을 설명해주느라 시간을 계속 잡아끌고 있었다.

  “병원엔 데리고 가봤어요?”

  “……그 애는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요. 데리고 나갈라치면 울고불고 떼쓰며 붙잡고 늘어져서 나갈 수 없다하네요. 집안에서도 구석이나 책상 밑에서만 웅크리고 있고요.”

  “치료를 받아야 할 애 같네. 그런데 신원 확인이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네. 애라서 신분증도 없고 이름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말하지 못하니까.”

  “애가 몇 살 정도죠?”

  “여서 일곱 살 정도 돼 보여요.”

  소희는 말을 꺼내 보았다.

  “저, 제가 한번 의사 선생님께 여쭤볼까요?”

  소희에게로 이목이 모였다. 소희는 해야 할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천천히 말했다.

  “죄송한 일이지만, 제가 병원 예약한 시간이 다 돼서 가봐야 하는데요, 가는 김에 그 아이 상태를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아, 동생 병원 다닌다 했지? 그럼 되겠네. 애 상태를 좀 알게 되면 우린 애를 시설에 보내든가 할 수 있을 테니.”

  회장이 말했다.

  소희는 회장으로부터 아이의 상태를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회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소희의 정신과 담당의는 그 아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라고 판단했다. 상태를 직접 봐야만 정확히 진단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학대라든가 그에 필적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런 경우 대개 트라우마가 되는 대상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애는 좀 특이하네요. 공포 장애증 증세야 그렇다 쳐도, 국제유태자본이라면 음모론 같은 것 아닙니까. 어린 아이가 음모론에 심취하다가 너무 빠져들어 보더 장애가 왔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그럼 혹시 직접 만나주실 수 있나요?”

  “그건 좀 힘들겠네요. 저는 개인의도 아니니 왕진 같은 걸 할 수 없거든요.”

  소희는 병원을 나서며 의사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증세는 전문의가 직접 진단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왕진 의를 부르려면 회의를 통해 예산 승인을 받아야 한다.

  소희는 봉사대가 아이 건을 소희만 믿고 그대로 통과시키지는 않았을까 걱정했고 전화로 확인해보니 걱정대로였다.

  소희는 책임감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자신 때문에 그 소녀의 처리가 늦어진 것이었다. 선약이 잡혀 있었고 회의가 예상외의 사건으로 늦어졌다는 사실은 그리 위안이 되지 않았다. 소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중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일을 생각했다. 재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국제유태자본인가 뭔가를 제보하기 위해서라도 재건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소희는 계속 신세지고 있다는 생각에 선뜻 연락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희는 집에 도착하여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세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울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네. 소희 씨. 안녕하세요.

  재건은 여전히 시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는 한 아이를 도와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재건은 곤란한 듯 말을 질질 끌며 말했다.

  -에, 지금 우리는 그러니까,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소희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린 지금 납치, 감금당했어요. 아, 납치는 아닌가? 아니, 말로 표현하기 조금 장황한 상황이긴 하지만 납치도 적절하겠군요. 네. 암튼 그래요.





2.



  재건은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그 때문에 선예에게 여러 번 전화하여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선예야 저녁까지 카페에서 일을 하므로 언제 도착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종업원으로서 손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니 점장에게 말해 휴식 시간을 미리 얻어야 했다. 그래서 세시쯤 재건이 도착하자 선예는 토라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가게 매출을 올려주기를 요구했다.

  이런 연유로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푸짐한 케익과 복잡한 이름의 커피가 놓였다.

  “탐문할 때마다 이렇게 산다면 세상에 탐정 하는 사람은 다 망할 거야.”

  재건이 한 말이었다.

  “어차피 한국에 탐정은 아저씨밖에 없잖아요.”

  선예는 포크로 케익을 자르며 말했다.

  “근데 너까지 아저씨라고 부르냐. 우린 나이 차도 별로 안 나잖아.”

  “아저씬 나랑 늦둥이로 태어난 삼촌뻘이거든요?”

  “외할머니가 장수왕이나 의자왕쯤 되는?”

  선예는 그 말뜻을 잠시 생각해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계산해야 되는 농담은 망한 농담이에요.”

  마곤이 끼어들었다.

  “그런 이렇게 하죠. 젊은 날 사고 친 아버지뻘은 어때요?”

  “그거 좋다.”

  선예는 까르르 웃었다. 재건은 코코아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

  선예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선예의 집은 카페에서 걸어서 30분정도 되는 거리의 주택가에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1시쯤에 헤어졌다. 흉흉한 뉴스가 자주 나오는 시기여서 가까운 거리지만 택시를 타라고 친구들이 권했지만 선예는 꿋꿋이 걸었다고 했다.

  “살인 사건이나 납치 사건 같은 게 뜨면 대개 조심하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건 오히려 흉악범들 아닐까요? 경찰도 긴장하고 있고 사람들도 날이 곤두서 있으니까요. 게다가 범인은 이미 유치장에 있는데 뭘 더 조심하라는 건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지요.”

  어쨌든 그런 자신감 덕분에 선예는 괴물을 볼 수 있었다. 선예는 괴물을 마치 커다란 오랑우탄 같다고 말했다.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다는 것이었다. 몸통이나 팔다리의 두께는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자벌레처럼 마냥 길쭉하기만 한 것이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고 말했다.

  “그 괴물은 심지어 날 쳐다봤어요. 난 무서워서 무작정 달려 도망갔는데 쫓아오진 않더라고요. 어제 밤까지만 해도 문자 보내고 전화해 봐도 아무도 안 믿었는데 정말 다행으로 뉴스가 바로 떴잖아요. 정말 다행이지. 혼자 헛소리 한 게 아닌 게 돼서.”

  “그렇구나. 그럼 그때의 기억을 잘 떠올려봐. 그 괴물은 소리를 냈어?”

  “좀비 같은 소리를 냈느냐고 묻는 거죠? 못 들었어요. 바로 도망갔기 때문에.”

  “그럼, 한번 괴물의 신체 비율을 그려봐. 크기가 선예에 비해서 얼마나 컸는지도.”

  재건은 종이를 내밀었다. 선예는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열심히 그렸다. 말로 설명한 그대로였다.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고 팔이 조금 더 길어 보여 비쩍 마른 오랑우탄처럼 보였다.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어깨는 구부정했어?”

  선예는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재건은 그림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이정도로는 좀비인지 뭔지 판단하기 어려워. 역시 직접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벌써 소문 다 난 것 같아서 또 올지 모르겠네.”

  그 일대에는 벌써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누가 플래시몹이라도 하는지도 모르죠.”

  마곤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직 누굴 공격했다는 말도 없으니까 좀비는 아니지 않을까요?”

  선예가 말했다. 재건은 자신 앞의 케익 접시를 긁으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진짜 좀비였을 경우야.”

  “그건 당연히 걱정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마곤이 말했다.

  “아니, 만일 그게 좀비라면 그건 날 유인하려는 미끼일 수도 있거든.”

  재건은 설명했다.

  “그 거인이 좀비라고 가정하자. 거인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소재지. 그런데 출몰 지역이 지난 사건과 연관 있는 지역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정돼 있고 그 사람들은 근거가 없더라도 뭔가 연관성을 찾게 돼. 결국 지난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을 모으는 기능을 한단 말야.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고.”

  “그럼 어쩌면 우리도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선예가 말했다.

  “그렇지. 아니, 그렇군. 사실 방금의 가설은 여기 들어와서 생각한 거야.”

  “그럼 우리는 이 가게와 선예 씨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마곤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재건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를 줄 알고 미리 근방의 경찰 아저씨의 위치를 파악해 놨지. 좀비가 출몰한다 해도 용감히 맞서 싸워 시민을 지켜줄 멋진 경찰 아저씨 말이야.”

  “갑자기 무지 불안해졌어요.”

  선예가 말했다.

  “그렇죠? 어쩐지 뻔한 소리를 하는 정치인 처럼요.”

  마곤도 거들었다.

  “그래도 경찰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아? 자, 창밖을 봐.”

  재건은 창밖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어?”

  재건은 일어나서 창밖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두셋씩 근방을 지키고 있던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재건은 밖으로 나가 보자고 했다. 선예 혼자 자리를 지켰다.

  경찰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근처 골목 입구에 한 명이 서 있었다. 재건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경찰이 여럿 있었는데 다 어디 간 겁니까?”

  “좀비가 출몰했다는 보고가 있어서 인원을 급하게 그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요? 이 지역은 몇 달 전에도 좀비가 나왔었죠?”

  “네. 좀비가 확인되면 봉쇄령이 내려질 테니 빨리 집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이를테면, 민간인인 우리가 그 보고가 정말 좀비가 맞는지 확인하러 가보는 건 안 되겠네요?”

  “예. 안 됩니다.”

  재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골목 입구마다 적어도 한 명의 경찰은 배치돼 있었다. 일단 카페에 들어가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마곤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재건은 입구에 서서 마지막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재건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는 것은 눈치 채지 못했다. 누구인지 돌아보기도 전에 옆구리에 뾰족한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군가는 재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용히 들어가.”

  진한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코끝을 시큰하게 자극했다. 재건은 카페 안으로 순순히 들어갔다. 마곤은 입구에 꼼짝 않고 서 있었고 선예와 다른 손님들과 종업원들은 가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재건은 칼 혹은 총을 들고 복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 몇몇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님으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자는 재건을 밀쳐 선예와 마곤 옆에 앉혔다. 재건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벙거지 모자에 마스크, 봉일이었다. 봉일과 그의 부하들은 재건과 마곤을 바닥에 앉히고 총칼을 들이대어 통신 기기나 전자제품을 수거했다. 몇몇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역시 내 추리는 명쾌하고도…….”

  재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자뻑할 때예요?”

  마곤이 핀잔을 줬다. 봉일은 발을 굴러 소리를 냈다. 여종업원들은 짤막한 비명소리를 냈다. 봉일은 포로들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만일 허튼짓 하거나, 경찰을 부르거나, 부르지 않더라도, 이, 경찰이 이쪽을 보면, 이, 이 바이러스를 살포하겠다.”

  봉일은 캡슐 하나를 들어 보였다. 종업원 및 손님들은 공포에 떨었다.

  “원하는 게 뭐냐, 봉일아.”

  재건이 말했다. 봉일은 재건의 멱살을 쥐어 일으키고는 외쳤다.

  “내! 이름이! 아냐!”

  그리고 다시 재건을 바닥에 밀어 넘어트렸다. 봉일은 다시 말했다.

  “네가, 싫다. 넌 느닷없이 나타나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넌 뭐냐?”

  “나? 난 김재건이야. 우주에서 가장 멋있는 탐정이지.”

  “탐정? 탐정? 이, 이, 그딴 게 뭐야! 탐정이면, 그래도 되는 거야?”

  봉일은 테이블을 걷어차고 접시를 집어던졌다.

  “이봐. 말을 좀 알아듣기 쉽게 해주지 않겠어?”

  그 말에 봉일은 동작을 멈추고 재건을 돌아보았다.

  “그 놈, 아니, 그 년은 어딨지? 교복 입은 년 말이야.”

  마곤은 어깨를 움찔 했다. 봉일을 흘끗 쳐다보다가 눈을 마주치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봉일은 알아채지 못하고 말했다.

  “뭐, 어때. 그보다 용건을 말해주지 않겠어? 먼저 용건을 안 말할 거면 내가 질문 먼저 해도 되냐?”

  재건은 마곤을 돌아보고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이에 봉일은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다시 부산하게 두리번거리고는 말한다.

  “너. 할 일이 있다.”

  “뭔데 그래? 아까부터 용건을 물었잖아.”

  “멀대를 찾아라.”

  “멀대라니?”

  재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우측으로 꺾었다. 봉일은 이를 갈며 말했다.

  “좀비다. 우리가 새로 개발한 좀비다. 그런데, 이, 탈출했다. 그놈을 찾아라.”

  “그러니까, 통제를 벗어난 졸개 하나를 잡아달라는 의뢰군.”

  재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봉일을 데려간 세력이 그의 연구를 돕는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

  “탐정 님, 안 돼요!”

  선예가 말했다.

  “악인의 의뢰는 받아들이면 안 돼요!”

  재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정의의 탐정은 악인을 처단하는 데에 그 능력을 쓰는 거지……”

  봉일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만, 지금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하하.”

  봉일은 부하 하나에게 눈짓했다. 부하는 다가와서 사건의 개요를 대략 설명해 줬다. 봉일은 상처가 순식간에 재생되고 심지어 성장하기까지 하는 변이형 바이러스를 개발했다. 테스트 과정에서 키가 150cm대였던 한 남성은 한 달 만에 180cm까지 자라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는 감염자의 자아가 어느 정도 유지되는 바이러스였고 실험대상 하나는 자기 몸의 변화를 고통스러워하다가 탈출했다고 했다.

  “그럼 이 동네에서 발견된 거대 좀비도?”

  “그래. 우리 연구 재료다. 그놈들은 원래 장애인이었으니 말을 잘 들었지만.”

  재건이 묻고 봉일이 답했다.

  “그럼 우리만 있을 때 조용히 부르면 되지 왜 남의 가게에서 영업 방해를 해? 사람들은 풀어주지 그래?”

  “너 혼자 간다. 나머지는 인질이다.”

  “뭐? 내 조수도 없이? 말도 안 돼. 혼자서 뭔 단서로 그 놈을 잡으라는 거야?”

  “넌, 넌, 탐정이다. 하지만 못 잡아오면 인질은, 죽는다. 또 산채로 잡아와야 한다. 중요한 연구 재료니까.”

  재건은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너 말이지. 그전에 똑바로 말하는 법이나 배우는 게 어때. 올바른 발음이나 적절한 어휘나.”

  “시끄러! 당장 나가서 찾아와! 24시간마다 인질 한 명을 죽이겠다.”

  그 말은 봉일이 즉석에서 생각한 말이었다. 재건은 그 말로 봉일의 버릇을 파악할 수 있었다. 봉일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봉일은 하려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인 뒤 내뱉었다. 그래서 책 읽는 듯한 어색한 억양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방금 한 말은 그런 어색함이 없었고 그래서 재건은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재건은 그 사실이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휴대폰이 울었다. 재건의 것이었다. 봉일은 배터리를 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재건은 발신인을 보고는 말했다.

  “네 누난데? 통화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봉일은 잠시 노려보더니 받으라고 말했다.

  “허튼 소리하면 죽는다.”

  재건은 전화를 받았다.

  “네. 소희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요.

  “무슨 부탁일까요?”

  -아, 한 아이가 있는데요, 길 잃은 아이인 것 같은데 집 밖으로 안 나오려고 해요. 좀 봐주셨음 해요.

  “에, 지금 우리는 그러니까,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소희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린 지금 납치, 감금당했어요. 아, 납치는 아닌가? 아니, 말로 표현하기 조금 장황한 상황이긴 하지만 납치도 적절하겠군요. 네. 암튼 그래요.”

  -나, 납치라뇨?

  부하 하나가 총을 겨누었다. 재건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런데 인질과 제가 위험하니 신고는 말아 주세요.”

  부하는 총을 겨누면서 봉일을 쳐다봤다. 봉일은 그대로 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재건은 수화기에 대고 잠시만요 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네 누나와 내가 같이 수사를 하는 거야. 그럼 수사력도 올라갈 테고 인질 손실도 없을 테고.”

  봉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다. 하지만 그 여자가 네 인질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이, 마라.”

  재건은 다시 수화기에 귀를 대었다.

  “소희 씨.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돼서 날 좀 봐야겠어요. 시간 되세요?”

  -저도 탐정님을 뵈려고 전화한 거예요.

  “그래요? 그럼 만나서 서로 용건을 교환하면 되겠네요.”

  재건은 전화를 끊고 멀대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총부리의 안내를 받아 카페를 나섰다. 그러면서 인질들을 돌아보았다. 재건의 대화에 다들 긴장은 많이 풀린 듯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선예는 비교적 태평해 보였다. 재건은 마곤이 제 할 일을 했는지 확인했다.

  재건은 감시가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쩔 거예요? 단서도 없는 놈을 어떻게 찾으려고.”

  뒤통수에서 들린 소리에 재건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디 있던 거야? 놀랐잖아.”

  “뭘 새삼스럽게 놀라요. 어쩔 거예요?”

  마곤은 추궁하듯 물었다.

  “어쩌긴. 소희 씨를 만나 봐야지.”

  “만나서요? 24시간이 지나면 인질을 죽일 거랬어요.”

  “그럼 소희 씨를 만나서 24시간 내에 장대인가 하는 놈을 찾아야겠네.”

  “그러니까 어떻게요. 방법이 없잖아요.”

  “음, 키가 커지면 저절로 눈에 띄지 않을까?”

  “인질이 죽잖아요! 그놈을 못 찾는다면 또 피해가 커질지도 모르고요. 피해자가 생긴다면 누가 장대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거고요.”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네. 좀비가 많아지면 역시 문제겠다. 아.”

재건은 골목길 사이사이로 가로등만한 좀비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장면을 상상했다. 마곤은 고개를 내저었다.

  “대책은 없는 거예요?”

  “없어 뭔 수로 그런 놈을 찾아. 경찰이나 방송국에나 연락 해야지. 또 줄지는 모르겠지만 지휘권을 준다면 카페를 습격해 제압할 수도 있어. 그보다 내가 궁금한 건 말야. 왜 저 고집 센 녀석이 나에게까지 직접 찾아와, 그것도 귀찮게 유인까지 해가면서 그 장대인가 하는 놈을 잡아오라고 했느냐는 거야.”

  “그거야 통제가 힘들어지니까……. 아니, 그보다 지난 사건과 같은 이유 이겠군요.”

  “그래. 대통령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악당도 그렇고. 왜 날 들볶는 거지?”

  그때 전화가 울렸다. 선예였다.

  -저기, 탐정님?

  “응, 응. 놈이 협박이라도 해?”

  -네. 탐정님께 이 말을 전해 달래요.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인질은 여기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허튼짓 했다간 어느 도시의 사람들 모두가 좀비로 변할 줄 알아라.

  선예는 종이에 적힌 문장을 읽는 듯했다.

  “응. 알았다고 전해줘.”

  전화를 끊었다. 재건은 마곤에게 전달 사항을 알려 주었다.

  “더 골치 아프게 됐네요. 그럼 구출 작전도 못 하잖아요.”

  “근데 이게 허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협박은 얼굴 맞대고 직접 해야 효과적이지. 뒤늦게 우리가 강제 진압을 못 하도록 머리 짜낸 게 아닐까 하는데.”

  “모르는 일이죠. 소희 씨는 일단 만나야죠?”

  “그래야지. 본의 아니게 소희 씨를 끌어들이고 말았으니.”

  그들은 주차해둔 곳에 도착했다. 지난 사건으로 걸레짝이 됐지만 기적적으로 굴러가는 차였다. 왜 안 바꾸느냐는 마곤의 물음에 재건은 “나름 그로데스크해 보이고 멋있잖아.”라고 대답한 바 있다.

  재건은 소희에게 다시 전화해서 버스를 타고 선예의 카페로 오라고 말했다. 재건은 버스 노선을 따라 마주 가겠다고 했다. 적당한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재건이 운전하는 동안 마곤은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좀비 관련 뉴스는 카페 근처에서의 것이 전부였다. 이제 좀비 출현에는 어느 정도 담담한 반응이다. 세상은 그보다 대통령의 훈화나 연예인의 자살 따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재건은 소희와 만나려면 30분정도 걸리리라 예상했다.





3.



  소희는 재건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재건이 뭔가 사건에 휘말렸음은 분명했다. 납치당했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의문은 접어 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김재건이 하는 일이었으니까. 소희는 재건에게서 라면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희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예감 이상의 것이었다.

  대문을 나선 소희는 한 얼굴과 마주치고 놀라 멈춰서고 말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음기가 베여 있는 얼굴이었다. 얼굴의 주인인 사내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이런, 놀라셨나 보군요. 마침 벨을 누르려던 차였습니다.”

  소희는 엉겁결에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모자를 쓰고 작업복으로 보이는 조끼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단말기를 들고 있었다.

  “가스 점검 나왔습니다. 나가시려던 차이신 것 같은데 잠시 시간되시죠?”

  소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놀랍도록 부드러운 웃음을 유지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 부엌이 어디죠?”

  소희는 손가락으로 알려줬다. 사내는 가스 밸브와 관 이곳저곳을 만졌다. 소희는 빨리 나가봐야 했기에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검사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다 이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건 가스 점검 안내서예요.”

  사내는 종이 한 장과 단말기를 내밀었다. 소희는 터치 스크린에 스크린 펜으로 이름을 적었다.

  “한승연 씨?”

  사내는 거기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소희는 재건의 조언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가명을 쓰고 있었다. 소희는 네 하고 대답했다.

  “혹시 댁에 10살 이하의 아동이 있으신가요? 아동이 있는 가정에는 구청에서 안전 가이드북을 나눠주고 있거든요.”

  “없어요. 저 혼자 살아요.”

  “그래요? 음, 의외네요. 이런 집에서 혼자 사시다니.”

  “부모님은 시골에 계세요.”

  “대단하시네요. 대학생쯤 됐으면 독립할 나이가 된 거죠. 아, 학생이시죠?”

  “아, 아뇨. 대학도 졸업한지 한참 됐어요.”

  “그래요? 이거 죄송해요. 너무 동안이시라.”

  소희는 사내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 역시 재건이 미리 주의를 준 것이었다. 어떤 누가 찾아오더라도 이름을 받고 기억해둬야 한다고 했다. 사내는 구세윤이라고 이름을 밝혔다.

  몹시 기묘한 사내였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꾸밈이 없어 듣기 좋았다. 몸짓 하나하나에 예의가 스며들은 듯했고 그 움직임이 몹시 부드러웠다. 향수를 뿌리는지 은은한 향까지 남은 듯했다. 그리고 그 얼굴. 단 한 번도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에서 소희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세윤이 돌아가고 소희는 문단속을 하고 다시 출발했다. 재건에게는 가스 점검 때문에 지금 출발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소희와 재건은 틈틈이 위치를 확인하며 서로 접근했고 적당한 길가에서 만났다.

  자리를 옮기거나 할 것 없이 재건의 차 안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희는 재건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었다. 재건은 소희를 데리러 오면서 사실을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숨겨봐야 도움 될 것 없다는 생각에 봉일의 일을 알려줬다.

  “제가 설득할게요.”

  소희는 말했다. 재건은 만류했다.

  “괜히 화만 돋울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제 걔는 혼자가 아니에요. 수상한 조직과 함께란 말이에요. 위험해요.”

  소희는 굳센 어조로 다시 말했다.

  “봉일이는 돌아올 수 있어요. 저번에 잡혔을 때, 그리고 예전에도 전 알았어요. 걘 비뚤어졌다 뿐이지 나쁜 애가 아니에요.”

  “물론 그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설득한다 해도 그 수상한 녀석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소희는 입을 닫았다. 소희 역시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저 누나로서 동생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칠 뿐이었다.

  재건은 말했다.

  “일단 요구대로 장대를 잡읍시다. 그래야 협상이든 설득이든 수월히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좀비는 어떻게 잡죠?”

  “여기 사진 있으니까 방송국에 연락해서 긴급 수배를 해야죠. 다만 우리가 이 자의 신병을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요.”

  얼굴을 공개한다면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 등에게서 금세 제보가 들어올 것이다. 문제는 멀대를 데려가지 않는다면 인질들이 위험해진다는 것. 경찰에게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재건이 바라는 만큼 경찰이 일을 해줄 리가 없다. 여러 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 그럼 소희 씨 문제는 뭐죠?”

  재건은 물었다.

  “네, 저, 생각해보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 수야 없죠. 분명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니 제게 물어보려던 것 아니에요. 어차피 이쪽 일은 막혔으니 다른 일부터 돌아가며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소희는 그 아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국제유태자본 운운 하는 것까지도. 재건은 눈을 빛내며 소희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재건은 말했다.

  “설마 봉일의 뒤에 있는 단체가 국제 자본이고 한국을 집어삼킬 음모를 꾸미는 와중에 한 아이가 그 비밀을 알아채고 도망 왔다는 식의 전개는 아니겠지요?”

  “너무 무책임한 전개잖아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죠.”

  마곤이 곁들였다.

  그때, 마곤은 기사 하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기사예요! 또 길쭉한 좀비가 떴대요! 사람을 물고 도망갔다는데요.”

  “위치는?”

  “구리시예요.”

  재건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아이가 사건과 관련 있다고 보기엔 불확실하니 좀비 출현지역으로 가보도록 하죠.”

  소희도 그러자고 말했다. 재건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구세윤은 걱정했다. 이 동네에는 집이 빈 곳이 많았고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또 빈 집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번 오가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저 운이 좋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이유는 동네 꼬마로부터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증언이었지만 사진을 보여주고 암시를 줘서 알아낸 결과 확실한 듯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말을 분석해보기로는 선량한 의도로 아이를 데리고 간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세윤은 가장 먼저 근처 경찰서와 봉사 단체부터 조사했다. 하지만 적십자 봉사원에서는 그날에야 공식 업무 중에 아이를 포함했다. 그래서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일일이 제보가 있던 근방의 집들을 조사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웃음기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었으니까. 그에게 얼굴이란 무기였다. 서로가 총칼을 들지 않는 한 가장 유용한 무기는 얼굴이었다. 공손한 태도와 말투는 무기의 위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다만 세윤이 걱정하는 것은 그때까지 만난 사람의 얼굴을 모두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윤의 얼굴이 무기인 것처럼 그들 모두의 얼굴 역시 무기였으니까.

  세윤은 다음 집 벨을 눌렀다.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가스 점검 나왔습니다. 시간되시지요?”

  “네. 들어오세요.”

  세윤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꽤나 넓은 집이었다.

  “부엌이 어디 있죠?”

  여자는 세윤을 부엌으로 안내했다. 세윤은 규정에 따라 점검을 했다. 검사는 역시 금방 끝났고 세윤은 가스 안전 안내서를 내밀었다.

  “검사 받지 않으실 때에도 이걸 보고 틈틈이 점검해 주세요. 벨브에 이상은 없네요.”

  그리고 단말기를 내밀었다. 여자는 스크린에 이름을 적었다.

  “몇 가지 더 조사할 것이 있는데요, 집에 혹시 어린 아이가 있나요?”

  “자식들은 다 대학 갔어요. 한 놈은 군대 가 있고요.”

  “그렇군요. 아동이 있으면 교육 자료를 또 받아야 하거든요. 자식이 아니더라도 친척이나 맡아뒀었던 아이도 없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여자는 말했다.

  “잠간이지만 맡아둔 애는 있어요.”

  “잠깐이라면 얼마나 맡아두시는 거죠?”

  “며칠 안 됐어요. 곧 보호소 같은데 갈 애라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세윤은 음, 하고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몇 살 정도 되죠?”

  “유치원생쯤 돼요.”

  “곧 떠날 거면 안 받아도 되겠네요. 이게 또 수량을 세고 있어서 번거롭거든요.”

  세윤은 단말기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기다 이름을 적어주세요.”

  최희자.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세윤은 단말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신발을 신었다.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세윤은 집 주위를 돌며 창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팍을 종합하여 집의 도면을 머릿속에서 그려 보았다. 직접 다녀온 거실, 부엌에 아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느 방에 있을까? 방문이 전부 닫혀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안방과 자식 방은 구분할 수 있다. 거실의 가족사진에서 아들이 둘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불쌍해 보이는 아이를 빈방에 혼자 두지는 않을 것이다. 세윤은 문의 잠금 방식이나 창문을 보아 방범이 철저하지 않은 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윤은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