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아!
낮시간 때만해도 화창했던 서울에 갑작스런 폭우가 몰려왔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쏟아진다는 얘기는 한마디
도 안 나왔지만 원래 일기예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그런 불확실한 예측에 기대를 거는 것이 바보짓이다.
하지만 정원은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 퉤! 병신같은 일기예보같으니.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욕 나오게 만드네. 씨발!"

자신의 원룸 아파트에 들어온 비에 맞아 쫄딱 젖은 코트와 옷가지들을 훌렁 벗어던진 후에 샤워실로 몸을
던졌다. 샤아아, 밖의 빗소리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샤워기의 따뜻한 물소리를 맞으며 정원은 차가운 몸
을 녹였다. 결국 오늘도 망할 비 때문에 그의 장사는 말아먹었다. 빗줄기 때문에 그가 노리던 손님들은 전
부 다 집구석으로 들어가버렸다. 다행히 운좋게도 집으로 돌아가다가 유흥가 골목 한구석에 쳐박혀 있던
술에 꼴은 중년 남자손님 하나를 건져서 허탕은 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봤자 그 중년남자의 지갑에 들어
있던건 겨우 10만원밖에 안되었더라.
샤워를 마치고 대충 집에서 입는 헐렁한 츄리닝으로 갈아입은 정원은 1인용 가죽소파 위에 털썩 앉아 티비
를 켰다. 누군가 밖에다 버리려고 내놓은걸 잽싸게 가져온 가죽소파라서 그런지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삐걱
삐걱 소리가 났다. 정원은 잠시 그 가죽소파 위에서 리모컨으로 티비 화면을 몇차례 바꿔대다가 재미가 없
었는지 그냥 전원을 꺼버렸다. 전원이 꺼진 티비는 쓰레기와 중고들의 천국인 정원의 원룸과는 전혀 어울리
지 않게 무척 큰 최신형 TV였다. 원룸 다른 부분들은 전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건드릴 생각도 안날 정도
지만 저 TV와 그 주변만큼은 매일 청소라도 하는듯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 한캔을 꺼내더니 세차게 빗줄기가 내리치는 창가로 갔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캔이 개봉된다. 한잔 쭈욱 들이키고 무의식적으로 캬아,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의
눈빛은 무심했다. 그 눈빛은 창가 밖의 어두운 먹구름과 빗방울에 향해 있었다.

"비가 오면..."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어두운 저음이 낮게 깔렸다. 그리곤 다시 맥주를 한모금 들이킨 다음 창가의
어둠을 살핀다.

'그 개자식이 생각나지.'

정원의 머릿 속에서 밖의 어두운 폭우를 배경으로 한 어떤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그 기억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는 정원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 인영에게선 아무런 소리
도 나지 않았다.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된 땅바닥을 마치 아스팔트마냥 여유롭게 걸어오는 그 인영은 웃고
있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쁜듯 웃었다. 어느새 인영은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그의 얼
굴을 훑고 내려가고, 입술에 이르자 새빨간 혓바닥이 뱀의 그것처럼 빗방울을 낚아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도 매혹적이고 관능적이었다. 하지만 정원에겐 지금까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어두운 먹구름 속에 가려진 인영이 손을 들었다. 비의 장대가 그의 손을 때렸다. 그가 말했다.

'장대비는 참 아름답지 않아? 그 모습은 마치...이 땅의 모든 것을 꿰뚫어버리는 창같지. 땅도, 건물도,
그리고 사람도.'

번쩍!
폭우에 이어 이젠 천둥번개까지 치나보다. 천둥의 짧은 산화는 정원을 상념에서 깨게 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역겨워.'

진심으로 토할꺼 같은 표정을 한 채 정원은 창밖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정말 보기 싫은 장면이다. 하
지만 봐야 한다. 보기 싫다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건 회피다. 그게 무서워서 도망쳐버리는거다. 정원은
그딴 겁쟁이같은 짓은 절대로 안한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 죽여버려야지."

정원은 웃었다. 기뻐보였지만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보이는 기쁨이었다. 마치 돼지, 닭 따위를 잡아서
잡아먹으려고 할 때의 잔인한 웃음이었다. 그 때, 정원의 근처에서 무언가 기묘한 소리가 났다. 츠즈즈
거리면서 뭔가 방전되는듯한, 바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듯한 괴이하고도 신비로운 음향이었다. 그 소리
에 정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갑자기 번쩍, 하며 그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천둥이 쳤나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몇초 후 정원은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욕
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나...진짜 오늘 좇같네. 오늘같은 날에 싸움박질까지 해야 돼?"

후, 하고 한숨을 쉬던 정원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괴이한 현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전기가 파지직거리며 방전되는 것처럼 허공에서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고, 가운데에 마치 지금 이
공간이라는 배경이 찢어진 것처럼 검은색의 텅 빈 공간이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현실이란 배경을 스파크
가 메꾸려는듯 자꾸만 공간을 좁히려고 노력하지만 그 공간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목적이 달성되지 않
으면 사라지지 않으려는듯이.
정원은 짜증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검은 공간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금새 손을 쑥 빼
내었다. 그 손 안엔 네모난 엽서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정원은 방금 전의 짜증을 냈던게 언제냐는듯 금새
모습을 바꾸어 차가운 시선으로 엽서의 내용을 훑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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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커넥터' 최정원님께.
혼 사용자 최정원님에게 알려드립니다. 09년 혼사냥 255차 대전 일시와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일시:배송일 직후 시작.
*상대
이름:김아람
나이:19세
성별:여

귀하의 무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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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는 정원의 손에 의해 꾸깃꾸깃 쓰레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무데나 그것을 던져버리자 엽서는 갑자기
공중에서 확 불타버려 재가 되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있던 정원은 갑자기 몸
을 휙 돌려 부엌으로 가면서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아오 개같아, 좇같아, 개좇같아!"

문짝이 부서지도록 세게 부엌 아래 수납장을 열어재친 정원은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더니 이내 기다란
칼 하나를 꺼냈다. 얼핏 봐도 날카롭게 생긴 그것은 회뜨는데 사용하는 사시미였다. 그것을 오른손에 쥐
고선 옷가지가 널부러져 있는 의자 위에서 까만 롱코트를 걸쳤다. 츄리닝 위에 코트를 걸치고 한 손엔
사시미를 든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음산함이 느껴졌다. 정원은 쉴새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를 지나쳐서 티비 앞으로 가다 싶더니 갑자기 휙 방향을 돌려 화장
실로 향했다.

"썬글라스! 제기랄, 까먹을 뻔했네."

화장실 세수대 위에 놓여있던 검은 선글라스를 재빨리 챙겨서 얼굴에 꽂은 그는 그제서야 준비가 다 된
건지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거실 앞에 섰다.

"정말 병신같아. 병신짓이야. 그 악마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쌍판때기도 모르는 어린 년 목 딸려고 이런
웃긴 짓 안했겠지."

이를 으드득 갈면서 정원은 고개를 위로 젖혀 잠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
시 고개를 내려 정면의 TV를 향했다.

"빨리, 끝내고 자자. 재수 없는 날은 그냥 쳐자자."

그렇게 계속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한탄을 해대던 정원 앞의 TV는 언제부터 바뀐것인지 검은색의 유리화
면에서 일렁이는 하얀 바다로 화면이 떨리고 있었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하얗게 흔들리는 TV 속 바다
를 보며 정원은 망설임없이 다리를 쑥 집어넣었다. 마치 물 속을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원의
다리는 빨려들어갔고 정원의 팔도, 그리고 허리를 굽혀 머리통을 쑥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남은 몸통
까지 다 집어넣었다. 그것은 몇초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정원은 TV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정원이 사라진 그의 원룸 안에는 원래부터 사람이 없었는듯 고요하고, TV도 어느새 그 일렁이는 바다
가 어딨냐는듯이 차갑게 검은 유리를 뽐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