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일생동안 주어지는 삶에도 분명히 삶과 끝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사람도 존재한다. 내 삶이 그러하다. 분명 명확한 시작지점은 있지만 언제부턴가 그 과정이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서로 엉켜 꼬였다. 지금의 상황은 정말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나조차 궁금할 지경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각자가 지고 갈 삶의 무게가 있듯 내게 주어진 무게가 이만큼이면 나는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이 걷잡을 수 없는 삶이라도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나는 반드시 풀어내고 말테다.

시작은 간단했다. 3월 10일의 그날로부터.

하지만 늘 예측할 수 없는 게 인생이기에 사는 건 늘 힘겹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이미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기점을 넘어선지 오래다.

이 일은 보다 예상을 뒤엎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누구야, 당신.”

어스름 짙은 저녁볕이 눈자욱에 어른댈 무렵. 엷은 어둠 속에서 사람 형체를 띤 실루엣만이 선 채, 미동조차 없었다.

“아 진짜 한참 기다렸네. 거 얼굴 보기 더럽게 힘드네요.”

윤곽 한쪽이 이지러지며 꿈틀댔다. 어깨 죽지가 곧 희미한 빛무리에 드러났다. G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그 어깨를 주시했다.

“그러니까 누구냐고.”

암갈색 코튼 재질의 외투. 색감이 흐릿해 정확한지 G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이윽고, 대답 대신 남자는 들고 있던 보스턴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단지 짧은 행동변화를 보인 것 뿐 이지만 그 모습조차 어딘지 굉장히 신중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가방의 지퍼를 열어 무엇인가 꺼냈다.

“아니 뭐, 거기도 대강 짐작 할 거 아닙니까. 내가 누군지는.”

일순 사위가 환해진다 싶더니 다시 잔잔해졌다. 이어 케미라이트 수준의 발광 빛이 은은히 떠올라 암갈색 코트를 물들였다. G는 그제 서야 이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 눈치챘다.

“관리국에서 나왔나 보군.”

“잘 아네요. 필요하다면 관리국 행정부로부터 이임 받은 공무수탁사인 관련 서류도 첨부해 줄 수 있는데, 필요해요?”

“필요 없어요.”

이죽대듯 내뱉은 희소[戱笑]가 방안을 맴돌았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G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그러든 가시각 속에서도 눈길은 매섭게 발광물체를 노렸다.

“사실 나도 많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천부적인 재능들이, 전 인류의 0.1%도 안될 이런 재능들조차 관료조직 매여 있다는 것 자체가 슬프거든요.”

남자는 적잖게 토로하며 또 뭔가를 가방에서 꺼내 놓는다. 바닥에 놓인 물건은 곧 규칙적인 소음을 일으키며 팽팽한 정적을 깨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죄 행위자체가 용납되는 건 아니잖아요. 어쨌든 법에 어긋나니까. 그렇죠?”

손에 들린 발광물체를 따라 어두운 빛들이 산란했다. 언뜻 언뜻 비치는 물체의 윤곽이 시야에 잡히자 G는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메트로놈이었다.

“뭐,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사실 나는 당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때에 따라서는 당장 집행권을 쓸 수도 있어요. 이능력자 처벌에 관해서 아직 법적 기준이 미약하다는 거 아시죠? 위험하다고 판단 시에는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이 가능하다는 거. 이게 웃긴 게 순전히 자의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되뇌며 코트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G는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좀 감이 좀 잡힙니까?”

남자의 손에 무광검정 처리된 피스톨이 들려 있었다. 작지만 위협적이었다. 실수라도 총이 발사될 것 같은 거리끼는 감정을 G는 끝내 지울 수 없었다. 그가 한말 물러섰다.

“알았어요. 제발 그 총 치워요. 순순히 잡혀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흠 협조적인 태도가 마음에 듭니다. 무척이나.”

남자는 나지막히 말했다.

“사실 이건 테스트해본 거요. 당신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건데. 본론으로 들어 갑시다. 관리국에서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소. 이런 식으로 당신 같은 인재를 썩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한겁니다. 얼마나 좋아요? 이참에 그동안 저질렀던 위법 행위를 청산 하는거요.”

G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 말 뒤편에 감춰진 진실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회라니요?”

“말 그대로. 새로 시작하려는 기회를 준다는 거요. 지금의 삶은 잊고 이제 다시 착실히 살아가는 거죠. 정직하게 돈 벌며, 가정을 꾸리고.. 뭐 그런 평범한 생활.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G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계속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거, 누구보다 당신이 뼈저리게 잘 알거 아니요.”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느낌에 G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이 능력을 이런 식으로 썩히길 바라는 사람은 없어요. 단지 여지껏 악용을 목적으로 이용해오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고치면 되는 겁니다. 당신이 저지른 위법적 소급 행위부터 사촉 수탁 까지. 대부분의 전과(前過)를 탕감해 줄 것이오.”

“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그 대신에 저한테 뭘 원하는 거요?”

그제야 남자는 바리톤의 음성을 높여 말했다.

“아 이제 말 좀 통하는군. 뭐 좋아요. 제가 그 쪽한테 원하는 게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본인의사가 어떤지 부터 확실해야 될 것 같군요. 협조 할테요?”

“아니 그 전에 경위부터 듣는 게 타당한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그러나 남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한동안의 침묵이 대치상태를 좀 더 굳히는 듯 했지만 먼저 상황을 끝낸 건 남자 쪽이었다.

“하긴. 어차피 그 쪽도 곧 알아야 하는거니까.”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불쑥 구석에서 몸을 빼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사람이었다. 코트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지나 칠 정도로 컸다.

“좀 일이 골치 아픈건데. 관리국에서 굳이 이런 식으로 일처리 하는 거 잘 없어요. 어떤 사태인지 짐작이 안가요?”

“전혀 짐작이 안됩니다만.”

힐난하듯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간단하게 말하십시다. 사람을 죽이는 거요.”

G는 흠칫 숨을 들이켰다.

“죄질이 좀 극악한 놈이지. 단지 이 경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크게 놀랄 건 없어요. 이런 조직 체계가 만들어진 건 비교적 최근이고, 전반적으로 제정 정비가 미흡한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이능력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일반적인 사법처리 과정을 거칠 수 없어요. 당연하죠, 위험하니까. 기존 사회에서는 감당이 안되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죄질이 극악한 놈들은 특히 더. 그런 상황에서 관리국이 할 수 있는 게 뭐겠습니까. 이런 예외적인 조치들 뿐이에요. 이놈은 범국가적인 테러리스트로 규정 되어있소.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할 수 있는거요.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대꾸조차 잊은 채 G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단순히 희생양을 찾고 있음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냥 국가를 대신해 집행한다 생각해요.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함으로써 영웅이 되는거요.

어차피 그 놈은 암묵적으로 판결이 내려진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남자의 웃는 낯마다 깊은 주름이 팼다. 고랑마다 어둠이 넘치도록 들어차 출렁인다.

“사형으로 말이지.”

G는 땀이 번지는 손을 애써 소매자락에 비비며 침묵했다.

이미 희미한 햇빛조차 지워지고 없었다.

“할거요, 말거요? 사실 별 선택권도 없을텐데.”

남자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 이미 꿰뚫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 말이 나오지 않자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의 웃음도 차츰 사라지고 조금 씩 불쾌감이 표정에 드러날 때 쯤 G가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단지...”

“단지 뭐요?”

“이걸로 제가 불합리하게 겪을 일은 없겠죠?”

남자는 그 말에 다시 만족에 겨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건 없소.”

짤막히 답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G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메트로놈. 적정 간격으로 좌우 정확히 떠밀리는 모습이 산란한 빛 가운데 얼보였다.

어느 순간, 무정적한 소음이 이명을 울린다. G가 세차게 귀를 쓸어내리는 동안 남자가 들고 있던 물체를 보였다.

“이게 뭔지는 알죠?”

“신나잇 페블.

여전히 물체에 시선을 붙박아두며 G는 말했다.

“이제 당신 시간을 내가 묶을 겁니다. 확실히 할 건 해야되지 않겠소?”

G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 일주일을 묶어 둡니다. 당신 임의대로 해제할 수는 없소. 어디까지나 내 동의하에서만 가능해요. 이 일주일의 시간 내에서, 저는 당신에게 구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해야될 게 뭡니까.”

“저걸 보시죠.”

남자는 몸을 돌려세워 메트로놈을 가리켰다.

“대략 1분마다 엇박자가 날겁니다. 그럼 소리가 나고요, 그때마다 도약 하세요. 정확히 엇박나기 1분전으로. 그리고 그것을 7번 울리는 동안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긴 되긴 뭘 어떻게 되요. 당신 시간 도약 능력을 내 통제 하에 두게 되는거지.”

내키지 않는 일임에도 G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만한 방법도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혹시 노심 초사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남자는 손에 쥔 물체를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제가 허용한 가용 범위 내 이상을 도약 할 시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 압니까?”

“모릅니다.”

“목숨이 날라 가요. 아무쪼록 현명한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커피 태운 냄새가 천장 패널까지 지펴 스민다. 블랙시트의 대리석 선반 위로 손을 포개둔 남자는 음미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 인근의 카페테리아에서 남자와 G는 만났다. 거기서 남자는 자신을 K라고 이름을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일주일 이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도약능력에 관한한 제가 모든 걸 관장하겠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테이블 위, 그 의 손 끝에서 흘러 내렸다.

“아 실례.”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사진에는 인상착의가 또렷이 보였다. G는 사진을 눈 여겨 보다가 곧 k가 사진을 회수하는 모습에 시선을 돌렸다. 계속 뭔가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자가.”

k는 사진을 다시 테이블 위에 펼치며 말했다.

“우리 목표요.”

잠시 입을 다문 K가 마저 덧붙였다.

“이름은, B. 나이는 대략 서른 중반. 극비리에 존재하는 관리국 존재 살포로 사회 혼란과 불안을 가증시키는 것도 모자라 얼마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관리국 산하 건물을 날려버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최근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S시 신청사 건물 폭발 사건이 G의 뇌리를 스쳤다. 단순 화재 사고로 일단락 지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자가 시간 도약으로 자신의 모든 신상기록을 지워버렸소.”

“잠깐만요.”

G가 중간에 제지했다.

“모든 기록을 지워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는 그가 훨씬 먼 과거로 도약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도 그만큼은 못합니다.”

K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는 했소. 그리고 자신을 입증할만한 털끝만큼의 증거도 남기지 않았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이름도 진짜도 아니며 유용한 정보도 아닙니다. 그가 조직한 결사집단 내의 가명 일뿐이오.”

“결사집단이오?”

“관리국 쪽에서 추측하기로는 대 넷 정도의 구성원이 있는 것 같소. 짐작키로는 그들 모두 관리국 와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요.”

G는 이번 일의 규모조차 가늠 할 수 없었다. 과거에 그는 사촉 수탁으로 위법적인 도약행위를 몇 번 했었지만 어디까지나 대개가 사적인 업무였다. 본질자체는 크게 다를 바 없다고는 해도 이미 그 중압감에, G는 진작에 내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까?”

“그걸 관리국에서도 제일 알고 싶은 부분이기도 해요. 따로 그들이 구체적이고 분명한 목적을 가진 성명 따위를 알린 적이 없었다고 하니까. 지금으로서는 그저 궤멸 한단어로 축약할 수 밖 에 없어요.”

K는 거기까지 말하고 커피를 단숨에 비웠다. 점차 그의 얼굴로 쓴 맛이 감돌았다.

“자, 이제 쓸데없는 얘기는 집어치우고 일 얘기를 합시다.”

K는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자료를 펼쳐 보였다. 그가 가리킨 스크랩 한 부분에는 그날의 폭발 사건에 대한 자세한 개요와 발생 시각 등이 실려 있었다.

“모든 일은 가장 원점부터 접근 하는 거 아니겠소?”

짐짓 그 위악스런 미소에 눈을 지릅뜬 G는 그가 손짓한 구간을 되짚어 보았다.

기사 내용은 간단했다. 협소한 장소에서의 인화성 유기용제 장시간 방치로 기화된 가스가 인부들의 부주의로 인한 담배, 성냥 등 발화물질로 산화한 것으로 판단. 근처의 가스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발생한 시각은 3월 4일 23시 30분.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에 대해 성토하며 기사는 끝을 맺었다.

“어때 할 수 있습니까?”

“예 충분히.”

카페테리아 유리벽 너머로 따사로운 햇살이 비춰 들었다. 그러나 곧 햇빛은 잦아들고 시커먼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는다.

“그런데 왜 접니까?”

“무슨 말입니까?”

“왜 하필 제가 선택됐는지 궁금해서요.”

K는 얼핏 실소 비슷한 웃음을 내뱉다 이내 지워버렸다.

“아니, 꼭 G 씨 당신일 필요는 없었어요. 하지만 훨씬 제게 협력하기 수월해 보이는 상대를 고르기는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당신이구요. 별 뜻은 없습니다.”

G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진실을 가늠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나 행동을 포착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꾸며낸 것을 아니라고 확신하며 G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착수 하죠.”

“그럼 이제 시작합시다. 설계자 권한으로 도약 시간은 내가 설정하겠습니다. 현재 시각 3월 10일 13시. 정확히 일주일 전으로 돌아갈 겁니다. 시각은 3월 4일 13시 10분. 상주시간은 최대 24시간. 하루가 지나면 다시 귀환합니다. 내가 연락 하면 바로 받을 수 있도록 하세요.”

G는 있는 힘껏 숨을 몰아 쉬었다.

“준비 됐습니까?”

“갑시다 빨리.”

그 말과 동시에 G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 있지 않아 몸이 분리되는 듯 한 이질적인 감각이 손끝부터 시작되었다.

“아 잠깐만.”

태평스런 K의 목소리가 뒤틀리는 시간 사이로 수십 명의 목소리로 갈라져 웅웅 거렸다.

“도약자들 사이에서 일컫는 기도문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미신이긴 하나 하지 않으면 불행하 일이 닥친ㄷ ㅏ ㄱ…….”

수백 명이 내지르는 듯한 K의 음성이 폭발하듯 커졌다 작아지며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질풍신뢰 (疾風迅雷)와 같이 휘몰아드는 수백편의 과거의 편린들. 번쩍이는 섬광 아래 점증으로 번지는 이근과 비근이 고역이었다.

거친 파도처럼 뒤덮고 엎기를 갈마들며 켜켜이 채워온 지난 일주일의 과거를 다시 되새길 무렵. 조금씩 오감이 제 기능을 찾아 갈 때 쯤 그도 스스로를 추스릴 정도의 여력을 갖었다.

과거 기억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손끝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그가 본건 이제는 희미해졌을 일주인 전의 과거였다. G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미세한 현기증을 느끼며 주위를 살피자, 바로 정면으로 tv가 켜진 것이 보였다. 뉴스 채널

이었다. 화면 그래프에 뜬 날짜는 3월4일. 무미한 침 맛을 다시며 귓속에 사무치는 시침 소리가 멎을 무렵. 13시를 알리는 비프음이 들린다.

수면에 잠긴 기분을 벗어나 비로소 그의 오감이 살아났다. 홍채가 수축하며 동공이 확대됐다. 눈 앞 상황이 어느 정도 현실적 감각을 띄고 살갗에 닿는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뒤이어, N국에서 적대적 상황으로 돌아섰다는 뉴스가 긴급 타진되었다. 보도 기자의 태도에서 현 상황의 긴박감을 짐작케 했다.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이 TV볼륨에 묻혀 울렸다. G는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댄 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아 접니다.

K였다. 꾸민듯, 쾌활한 어조가 못내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할 게 많으니 서두릅시다. 지금 당장 신청사 앞으로 나와요. 자세한 얘기는 거기가서 해주겠습니다. 늦어도 15시까지 나와야 되요. 그럼.”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너무 일방적인 대화 방식에 순간 욕지거리가 치미는 걸 억누르며 G는 거칠게 폴더를 닫았다.

같은 시간, K는 G의 거주지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감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듯, 바닥에는 쓰레기들이 너저분했다. 대부분이 인스턴트 식품의 겉봉지와 생활 쓰레기였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철제 의자 외 최소한의 가구만 비치되어 있었다. 그곳에 K는 망원경과 도청장치 등을 설비 해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K는 이윽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몇 번을 해도 기분 나쁜 경험이야..”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새나가길 꺼려하듯 그는 곧 입을 틀어막았다. 들썩이는 몸 위로 날 선 태양빛이 내리 꽂혔다.


고성능 망원 렌즈너머 현관을 빠져 나오는 G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뜻 모를 불안감을 해소하려 했다.

허둥대듯 서두르는 걸음을 떼어 G는 근처 역까지 왔다. 그러다가 S시 신청사 위치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멈춰 선 채, 핸드폰을 꺼내 들어 디스플레이에 번호를 찍는다. 번호안내 서비스를 받기위해 숫자를 누르던 그는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3월 4일 13시 50분.

차를 몰아 K는 근처 공영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빈 곳 아무데나 차를 세워둔 그는 차에서 빠져나와 청사 건물 안으로 걸었다. 경비원이 일차적으로 제지 했지만 K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관리국 출입증을 보여주자 곧 물러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눈에 보아도 웅장한 로비홀이 나타났다. 대리석 복합판으로 마감한 바닥에 닿는 발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그가 찾아간 곳은 청사통합 중앙감시실.

지하 최하층에 위치한 감시실로 통하는 복도를 걸으며, k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공조기 울리는 소리만이 적막히 실내를 가르고 있었다.

중앙 감시실을 들어가기 위해 몇 가지 보안절차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방화 철제문이 열렸고 내부에서 대기 중인 상시경비원들에 의해 철저한 수색이 이뤄졌다. 자신이 외부 인력인 이상 이런 관례가 당연한거라 여기기도 하지만, 피곤한 일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좀 귀찮으시라는 거 저희도 압니다만.”

경비원 한 명이 그의 코트 주머니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희도 어쩔 수 없어서 말이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던 경비원은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얼굴을 익혔을 텐데도 이 정도로 몸수색을 하는 것은 꽤 불쾌할 정도였다. 오늘 하루동안 굉장히 신경 써서 입었던 의상이 엉망이 되어갔다. 그리고 더 이상 K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 됐습니다. 들어가시죠.”

경비원이 성큼 뒤로 물러섰고 곧 굳게 닫혔던 자동개폐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미건조한 실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문 뒤로,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규모를 짐작키 어려운 지하 시설이었다.

K는 잠시 그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다시 경비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 뭐 하나만 말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막 출입일지를 작성하려던 경비원이 그를 돌아보았다. 표정에 짜증감이 서렸다.

경비원이 K를 주시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불행한 결과는 잘 맞추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마저 입을 열었다. 마치 중요한 말을 하는 양 몹시 신중한 태도였다.

“오늘 굉장히 느낌이 안 좋아요. 나쁜 징조입니다 이거.”

“그런데요. 뭐 어쨌다는 겁니까?”

경비원은 입 꼬리를 틀어 올렸다.

“뭐 여기가 폭발이라도 한답니까?”

K는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흐트러졌던 옷을 여미며 그는 발을 뗐다. 한 걸음 옮긴 게 다였는데 문 안쪽의 공간이 거짓말처럼 확대된 채, 망막에 부닥쳤다.

“아무쪼록 몸조심 하십시오.”

빨려 들어간 듯 안쪽으로 사라진 그와 동시에 개폐문이 닫혔다. 차가운 기계음이 홀로 방 안을 떠돌며 시큰한 느낌을 자아냈다

“별 미친 새끼 다보겠네.”

경비원은 동료와 함께 시덥 잖게 웃으며 출입일지를 작성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출입인란에 미친 새끼라고 기입한 것을 알아채고는 분개해 마지않았다.

3월4일 14시 55분

G는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보며 안심했다. 그는 청사 건물 앞에 서서 층수를 헤아려 보았다. 시공 당시에도 거액의 공사비로 화제가 되었던 건물이었다. S시의 랜드 마크가 될 것이라고 방송에서 수차례 떠들어댔던 것을 G는 떠올렸다. 그런 건물이 무참히도 폭탄에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K의 목소리에 G는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좀 아슬아슬하긴 했습니다만.”

“뭐 어쨌든 이렇게 오셨고, 이제 더 지체할 필요도 없이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나 G씨나 이런 일이야 빨리 끝내고 보는 게 낫지 않습니까. 피곤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말하는 것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이제 그 폭탄테러를 저지할 것입니다. 그 전에 예행연습이 필요해요. 그 쪽은 우리가 도약했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그래서 놈들의 동선을 파악해 선수를 치는 거요. 상위도약우선형태를 적용해 그 놈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겁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CCTV에 찍힐 영상들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가지만 해줬으면 하는데.”

“그게 뭔데요.”

“여기 청사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파악해줘요. 최근 불특정 외부인의 출입이 잦았다거나. 뭐 여러 가지 있겠죠.”

K는 손가락으로 건물을 가리켰다.

“세세하게 시간을 두고 파악을 해야만 합니다.”

G는 기분이 멍해진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우리의 적들도 분명히 사전에 연습을 했겠죠. 그렇다면 그런 특정 외부인에 대한 영상 기록도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오늘 하루 종일 그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공통 분모를 찾고 오늘 영상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 나갈 겁니다. 그게 설계자인 제 일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 일을 해줘요.”

“그렇다는 말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대충은 그렇겠죠.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G는 아연해지는 기분을 간신히 붙들었다..

“다시 말해 또 도약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는?”

“그렇죠.”

“이봐요, 당신이 시간 도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고 있으리라 칩시다. 같은 이능력자니까. 그러면 도약 시 옵션으로 따라 붙는 게 뭔지도 알고 아닙니까?”

“그렇죠.”

“한 번 도약 할 때 마다 지나온 상황에 대해 불특정한 상황을 상정합니다. 일주일 정도는 어느 선까지 괜찮을 수 있지만 이것이 수없이 반복하여 어느 한계선까지 도달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른단 말입니다!”

K는 피식 웃었다.

“적어도 세계가 멸망 한다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안심이고 뭐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G는 입을 다물고 K를 보았다.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자마자 두 눈이 경악으로 번졌다. 그와 동시에 K가 입을 열었다.

“관리국이 총체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는 거 아시나요? 나 같은 설계자들은 관리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인재지만 굉장히 소수거든요. 그래서 항상 인력이 부족해요. 게다가 이런 점을 악용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사실 그쪽 소속임원으로 있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청탁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게 더 비싸게 먹히거든요. 그러니 사람이 없을 수 밖에.”

“대체 얼마를 받아 먹은 겁니까?”

“일이 생각보다 커서. 당신이 생각하는 액수를 한참 초월하거도 남을걸요? 아무튼 말씀 안드린게 있는데 사실 우리 말고도 한명을 더 같이 도약하도록 설계했었어요. 관리국 감찰임원입니다. 그날, 카페테리아 같이 있었는데 눈치 못 챘어요? 여튼 이런 사실을 숨겼던 건 말해봤자 돈 얘기가 나올 것 같고 돈 문제가 얽혀서 좋은 꼴은 못 봐서요. 이렇게 눈치 채셨으니 이제야 말씀드리긴 하는건데.”

K가 더 이어서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G가 불쑥 끼어들어 말을 끊어버렸다.

“육대 사 합시다. 그쪽이 육 내가 사.”

갑자기 튀어나온 말투치고는 차분했다. 마치 미리 생각해 놓은 것처럼. k는 그 말이 머릿 속으로는 순차적으로 이해가 되었음에도 그는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엉겁결에 되물었다. 틈을 주지 않으려고 서두FMS 게 실수했음을 스스로도 직감했다.

“당신이야 제가 모르길 바랬겠지만 당신이 멍청하게 유선전화로 전화를 하고나서야 눈치 챘지. 지역 앞 번호 구와 동 번호가 일치 하더군. 무척 가까워서 의심스러웠는데 그 후로는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최근에 이사 온 곳을 추적해서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참 급하게 나오셨더군요. 그렇게 집을 허술하게 비워놓고. 꽤 오랫 동안 절 감시한거 같은데,”

K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요점이 뭡니까?”

“K씨도 다시 시작하기는 힘드실 거 아닙니까. 어차피 더 이상 저도 속지 않습니다. 결국은 그런 식으로 협박해서 이용하기 쉽도록 수작 부린 것 뿐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일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테니까 말이죠. 누가되었든 상관이 없다고 했죠?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제 도움이 절실한 건 그쪽 아닙니까. 이해 하시죠? 육 대 사. 어차피 이 일에 발 담근 거 목숨 걸고 해야될 판이니 피차 양보해서 그 기준에 제시한 것이니 잘 생각해보고 대답했으면 좋겠군요.

K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탄식하듯 숨을 내뱉었다. 속으로 끝났다란 말이 수차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역시 돈 얘기가 얽히면 좋은 꼴 못 본다니까. 액수가 커서 괜히 신중하게 굴려다가 피본 꼴이 됐군요.”

항복하듯, 두 손을 내젓는 K를 보며 G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동의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이번 일 확실히 처리해야 합니다.“

K는 총을 보여주었다. 일전에 꺼내보였던 피스톨이다. K는 총잡이를 반대로 돌려 G가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브라우닝 권총입니다. 당분간 당신이 가져요. 사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하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줘도 상관없게 되었군요.”

“아직 완벽히 신뢰하지 못했나 보군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거지. 아무튼 그걸로 처리하는 거요.”

G는 총을 건네 받았다. 묵직한 느낌이 손마디마다 전해졌다.

“총 15발을 장탄할 수 있습니다. 탄을 다 소모하면 저절로 슬라이드가 후퇴하며 안전장치를 걸은 상태에서 탄창을 빼줍니다. 다시 재장전을 하여 안전장치를 풀면 슬라이드가 밀려나가 다시 쏠 수 있게 되죠. 처음 써보는 거라도 집탄성이 좋으니까 사살하는데 별 문제 없을겁니다.”

“여기 실탄 들어있습니까?”

“네 15발 정확히. 조심히 다루는게 좋아요.”

K는 홀스터를 전해주며 말했다.

“총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거요. 몸에 지니면서 익혀요.

G는 홀스터를 재킷 아래 끌러 맨 후 총을 거뒀다. 그도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저기 뭐 하나만 물어 봅시다.”

“뭔데요.”

“이걸로 사람 죽여본 적 있소?”

주저하듯,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자 G는 가슴이 쿵쾅 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누군가 몸속에서 큰 북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진동이 여지없이 시야를 흐트린다.

“없습니다.”

K는 돌아 서서 걸었다.

“내가 미리 일러두었으니 지금이라도 건물 구조를 파악하는 게 좋을 겁니다.”

3월 봄바람이 그 말을 뒤덮는다. 그가 떠난 자리를 한참 지켜본 G도 뒤를 좇아 따랐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 그가 내처 걸은 자리마다 느닷없이 삽풍(颯風)이 몰아쳤다.

3월 4일 17시 20분

청사와 동떨어진 임시 가건물에서 K는 여러 대의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청사 건물내 수백대의 CCTV에서 찍혀온 영상이 모니터로 전송되고 있었다. 건물 안을 가득 채운 웹서버 장비들이 실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는 다시 DVR에 영상을 담아 저장했다. 별 특이점이 없을 때 K는 최근 2, 3일 간의 자료를 토대로 필요한 영상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나.”

조그 셔틀을 돌리며 K는 화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대체로 그가 살펴본 영상들은 어떠한 문제의 소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작업이 지난해질 때 쯤 한쪽 모니터로 G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는 차분히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개새끼.”

K는 다시 작업에 몰두해가기 시작했다.

3월 4일 18시

G는 지하층으로 걸었다. 곳곳에서 페인트 칠을 하는 인부들이 눈에 띄었다. 시큼한 신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흰 마스크를 쓴 인부가 메마른 눈빛으로 그를 돌아봤다.

인부는 다시 페인트 롤러 굴리는데 집중했다. G는 장소를 옮겼다. 좀 더 지하로 내려 가려 했으나 거기서 출입 제지를 당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건물 보안에 관련된 장소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G도 할 수 없이 물러섰다.

‘폭탄을 설치한다면 건물 하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곳 일텐데. 거기가 어디지.“

G는 계단을 오르며 안내 데스크로 방향을 잡았다.

3월 4일 20시 10분

K는 지난 영상에서 이상한 장면을 발견했다. 내부 시공설비가 끝날 무렵인 이틀 전, 청소 카트를 미는 인부 하나가 카트 캐비넷에서 비품을 꺼내 옮기고 있었다. 일정 간극, 층 마다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보통 저런 물품은 비품창고에 모아 두는 게 정상이다. 어떤 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문득 이번 폭발 사건이 하루 사이에 이루어 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관리국이 언론에 공포한 사건진상이 사실관계야 어떻든 여론이 납득한 이유가 차츰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3월 4일 20시 20분

G는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안내원이 그런 것까지 자세히 알고 있으리라 기대는 안했지만 별 성과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런 것을 캐물은 사실에 직원에게 괜한 의심만 샀을 뿐이었다. 폭발에 관련하여 일절 발설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K가 관리국과 선이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가 요청한다면 설계도면을 보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일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이니까. G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3월 4일 20시 21분


K는 벨소리에 눈을 돌렸다. 발신자 번호로 G임을 확인했다.

“무슨 일입니까?”

K는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대답했다.

“아무래도 힘든데요. 이번에 제가 협조 받은 것도 다른 일로 무마하여 얻어낸 거라서. 솔직히 그런 도면을 얻어 내려면 납득을 시켜야 하는데 그게 힘듭니다. 게다가 그 건물이 일반적인 관청이 또 아니라서, 외부인에게 보이길 극도로 꺼릴 겁니다. 그렇다면 폭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자칫 우리 일마저 그르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무식하게 건물을 다 돌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K는 담배를 꺼내 물며 모니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니면 이렇게 하시죠.”


3월 4일 20시 35분

G는 10층 끝 통로로 걸었다. 희뿌연 형광등에 눈이 부셨다. CCTV를 일일이 확인하며 걸어나가자 K가 설명했던 카메라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저기다.’


성킁 성큼 걸음을 떼어 걷자 벽 틈으로 비품 상자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교묘히 벽 사이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는 상자를 꺼내 들어 테이핑 부분을 거칠게 뜯었다. 상자 안에서 쏟아져 나온 건 위생용구와 각종 세척제 뿐. 누군가 보더라도 관리인의 실수로 떨어뜨렸을 인상이 강했을 것이다.

그는 플라스틱 병 뚜겅을 열었다. 새것인 것처럼 보이는데 비해 뚜껑을 비교적 쉽게 열렸다. 냄새를 맡자 겉에 레몬향이라고 명시된 것과는 별개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G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3월 4일 20시 36분

“없어졌다고요? 혹시나 했는데, 알겠습니다.”

K는 전화를 끊었다. 도면이 분실 당했다, 전화상으로는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도난임을 그는 확신했다. 상대는 모두 이능력자들. 어쩌면 빼돌리기는 예상보다 쉬웠을지도 몰랐다. 도면상 취약지점을 골라 폭탄을 설치하고, 최대의 효과를 도모한다. 이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음을 재차 확인한 K는 결론 내렸다. 내부 관계자가 있다는 것을.

3월 4일 21시 20분.

G는 그 후로도 몇 개의 비품 상자를 발견했다. 이런 상자가 몇 개나 있을까. 그는 도저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때마침 K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 수고하십니다. 거기 성과는 어떻습니까.”

“대단합니다. 세척제통에 폭발물질 비슷한 걸 부은 거 같더군요. 위생구 상자까지 까보니까 컴포지션4 종류 같은데, 수십개 폭약에 뇌관이 설치 되어 있어요."

“좋아요, 그건 그렇고 불가피하게 계획을 수정키로 했습니다. 이틀 전으로 가야 돼요. 그 상자를 갖다 놓은 놈을 잡아야 됩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갑니까.”

“아니오, 상주시간이 지나야 시간 재설정이 가능해요. 일단 오늘까지 뭔가 쓸만한 걸 더 찾아야 합니다. 그러니 좀 더 수고 하셨으면 하는데요.”

“나도 똑같은 게 몇 개나 더 있을지 알아보겠소.”

통화는 끊어졌다. K는 창문을 보며 하품이 늘어져야 했다.

3월 4일 21시 50분

여덟 개 이상을 찾아낸 G는 이후에 엇비슷한 상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좀 더 부지런히 계단과 계단을 오르내렸다.

3월 4일 22시 10분.

K도 성과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오늘 하루 동안 이상조짐을 그는 저장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분류해 나갔다.

3월 4일 22시 30분

폭발 전 한시간. G는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에 메스꺼운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일을 진행하는 건 무모하다는 판단에 그는 급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3월 4일 22시 45분.

분류작업을 끝마친 K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열리지 않도록 잠궜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는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3월 4일 23시 20분

교대근무로 청사뒷쪽 입구로 빠져나온 감시실 경비원은 차가 주차된 공영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 네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음영 짙은 그들 모습은 회화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중 한명이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열어젖힌 채, 허공을 향해 시선을 걸어두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건물을 보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시동을 걸어 차를 몰고 나갔다.

3월 4일 23시 30분

청사 건물이 폭발했다. 건물형체가 앙상히 남을 때까지 폭음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3월 2일 14시


햇살이 맑았다. 봄빛이 만연한 공영 주차장 갓길마다 심어진 수목에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자연만물이 고요했으나 봄날을 헤집는 중형차 한 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들어서면서 그 고요함도 깨졌다. 이윽고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짤막한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차는 멈춰섰다.

K와 G는 급히 차에서 나와 걷는 속도를 높였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청사 건물이었다. 그들은 곧 로비홀로 들어섰다. 표면적으로 이미 몇몇 부서의 업무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데스크에도 직원이 있었다. 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그쪽으로 향했다.

K가 의례적으로 관리국 신분증을 보였다. 데스크 직원이 약간은 놀란 눈치로 그를 돌아봤다.

“방금 청소카트 밀고 간 사람 봤습니까?”

“조금 전에 승강기 타고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이동했다.

승강기 가까이가자 층수가 10층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군.”

“올라가죠.”

K는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청소카트에서 능숙하게 비품 상자를 꺼내든 인부는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서른 중반의 나잇대로 보이는 남자는 소매로 연신 땀을 훔쳐냈다. 손을 털며 일어선 그는 뒷덜미로 전해진 서늘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일어서.”

위협적인 어투에 가슴 속까지 서느래졌다. 인부는 뒤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경직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돌아서. 허튼 짓하다간 머리가 날아갈 줄 알라고.”

인부가 천천히 뒤돌아서자 그는 눈앞에 겨눠진 총구를 보았다. 식은땀이 등부터 젖어 나가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험한 꼴 안볼거야. 이거 누가 지시한거야? 이런 게 몇 개나 되는거야?”

악다구니 쓰듯 G가 캐물었다. 그의 손에서 총이 흔들렸고 덩달아 인부가 흠칫했다. G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강박관념이 그 목을 죄었다.

“뭐, 뭐가 말입니까.”

“이 상자.”

G는 눈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인부는 곁눈질로 엿보며 답했다.

“이거는 청사 직원 한분이 지시하신 거라 그대로 했습니다. 스무 박스 정도를 주더니 지시한 위치에다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돈을 더 얹어 주면서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 직원이 누군지 기억하나? 이름은?”

“아, 그게 뭐라고 했냐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인부는 입술을 적시며 대답을 미뤘다. G는 대답을 재촉했다. 인부의 안색이 금새 납빛으로 흐려지며 몸서리를 쳤다.

“저도 확실치가 않아서……. 이런 일 맡기는데 굳이 이름까지 밝혀가며 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기억에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G는 미간을 좁히더니 K를 돌아봤다. K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K는 인부에게 다가가며 겨눠진 총을 손으로 눌러 제지 했다.

“아 이거 초면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대한 수사라서. 저희는 별건 아니고 이런 사람들인데.”

K는 가짜 수사관 신분증을 들이밀었다. 인부는 신분증의 사진과 K를 번갈아 돌아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자 놓칠 세야 그 틈에 그의 주머니로 돈 몇 푼을 쑤셔 넣었다.

“제 동료가 좀 거친 면이 있어서요. 좀 전에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받아두세요. 그 보다 혹시, 이 사람 아니었습니까? 일을 맡긴 사람이.”

K는 B의 사진을 꺼내 보내주었다. 그러자 남자에게서 탄성 섞인 신음성이 흐르더니 이내 몸을 움츠리며 그쳤다.

“모,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K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확실합니까? 자세히 좀 봐요.”

조금 더 가까이 사진을 보여주자 인부는 갑자기 완강히 의견을 굳혀 말했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이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구요.”

그이 대답에 G는 표정을 이지러트렸다.

K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차례 인부를 노려봤다. 남자는 그 눈길을 피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좋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건 증거품으로 우리가 압류해갈 테니 이만 가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일로 피차 피곤하지 않게 분란까지 안 갔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렴요. 여부가 있습니까.”

“그럼 가보십시오.”

인부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G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총을 홀스터에 집어 넣었다.

“빌어먹을 저 사람은 아무 관련도 없었군.”

“뭐 허투루 하겠습니까. 저희도 정신 차려야죠.”

K는 상자를 쳐다 보며 담뱃불을 붙였다. 그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하여 유려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보다 이거를 어떻게 하나.”

K는 상자를 하나 꺼내 뜯었다. G의 말처럼 세척제 통과 위생구 상자가 들어 있었다. 카드보드로 만들어진 상자 입구를 뜨자 그 속에는 폭약과 신관이 연결선으로 어수선히 얽혀있었다. 그 혼잡함 속에서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신관 옆에 장치한 기폭장치.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눈언저리까지 가져댔다.

"어, 잠깐 이거…….“

K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G가 그 말을 알아채고는 한 뼘 거리로 다가 들어왔다

“뭐요 그게?”

K의 치뜬 표정마다 조소가 번졌다. G는 섬찟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쩌면 일이 쉽게 끝날지도 모르겠군요.”

대답 뒤에 숨겨진 저의가 무엇인지 G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저 상자를 들어 자리를 뜨는 K를 매섭게 쏘아 볼 뿐이었다.

3월 2일 상주시간이 대략 두 시간 남아 있었다.


3월 5일 13시 30분


K의 가건물 안.

두 사람은 다시 원래의 장소로 복귀했다. G가 재차 따져 물었다.

“이제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왜 폭탄을 처리하지 않은 겁니까.”

K는 느긋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좀 천천히 합시다.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커피 드시겠소?”

“아니요 됐습니다. 그보다 끝나다뇨? 대체 뭐가 끝났단 겁니까?”

“우리 일 말이오.”

커피 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K는 인스턴트 막대 커피를 꺼내 쥐었다. 겉봉을 뜯으려 다가 너무 뜯어진 바람에 커피 가루가 반쯤 바닥에 쏟아졌다.


“이런.”

의자 틈새로 들어간 가루를 털어내며 K는 반 정도의 남은 커피 가루를 잔에 부었다. 스푼대신 막대봉지로 젓기 시작했다.

“가령 이런 경우죠. 그놈들이 실수를 했소.”

“뭔 실수가 있다는 겁니까.”

“그 놈들 폭탄 말입니다. 그거 기폭장치가 뭘로 되어 있는지 압니까? 진동 모터요. 그 왜 휴대폰 진동으로 쓰이는 거 있지 않습니까.”

K는 커피를 마시며 담배필터를 씹었다. 폐부 깊숙이 연기를 가두며 그는 기계 부품 하나를 손바닥에 놓았다.

“딱 보니까 휴대폰 발신으로 기폭장치를 작동해 폭발하도록 설치 해놓은 거 였소. 도합 스무 상자의 폭탄의 기폭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그 편이 나았을테니까. 휴대폰이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고 한 해 평균 버려지는 양도 어마 어마하니까요. 당신 휴대폰 도청 때문에 휴대폰 기판을 뜯어 본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 몰랐습니다. 이제 걸려오는 번호만 역추적하면 됩니다. 번호는 이거 하나겠죠.”

“그럼 폭탄은…….”

“괜한 의심 살 필요 있습니까. 그들도 이능력자라는 거 잊으면 안되요. 지금은 저쪽에서 우리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니까 우리보다 상위 도약이 불가능하지만 만에 하나 폭탄을 처리해서 발각이라도 된다면 저쪽이 훨씬 유리한 입장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K는 담배를 비벼 껐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폭발이 있던 날로 다시 돌아갑시다. 마저 일을 끝내야죠.”


G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3월 4일 20시

가건물 구석에 있는 캐비넷을 열자 찌릿한 화약 냄새가 풍겼다. K는 똑같은 브라우닝 모델의 총에 열 다섯발의 탄약을 재었다. 관리국에 요청한 마지막 지원품목이었다. 끝으로 벨루어 천으로 감싼 신나잇 페블을 조심스레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했다.

G는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요.”

K가 천 뭉치를 집어 던졌다. G는 손을 뻗어 잡은 후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요동쳤다.

“이거는…….”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면 필요할겁니다. 여유분이니까 가지고 있어요.”

G는 재킷 안감 주머니에 그것을 포개 넣었다.

그들은 공터 한쪽에 주차된 K의 차를 탔다. 어둠 속을 헤가르듯 공터를 빠져나와 곧장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가로등 빛이 눈을 찌른다.

“놈들이 전화를 거는 순간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죽이는 거요. 발신자 위치 표시는 그 단말기에 뜰 겁니다.”

G가 대시보드 위에 놓인 휴대용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버튼을 누르자 흑백의 지도표시가 떴다.

“마지막입니다. 흩어져 있다가 위치가 뜨면 곧장 집결하는 거요. 섣불리 행동하지 마세요.”

K는 핸들을 꺾었다. 여기서부터 청사 공영주차장으로 들어서게 돼있었다. 점점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G는 조금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억대의 돈이 걸린 문제였다.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이런 긴장감 따위는 내던져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대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긴장감을 잊고 본 목적을 다시 새기기 위해 G는 억지로라도 지난 추억들을 떠올려야 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들.

시간 도약을 하고부터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 갔다. 도약 후 한정지을 수 없는 상황 중 언제나 최악의 가정만이 G에게 주어졌다. 아내와 아이의 불의의 사고, 죽은 자를 살려내기 위해 수십 수백 번의 도약은 허사로 돌아갔고 우연이라도 살려낸 가족들은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부모의 죽음 혹은 지인의 죽음. 끊임없는 불행의 연속. 이어질 듯 끊어져 버리는 모든 관계 속에 G는 좌절하고 점점 미쳐갔다. 단지 돈을 위해 저지른 일들이 그에게서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결심한 무렵, 스스로의 죽음조차 선택하지 못한 그는 그러한 돈거래에서 종내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기업총수부터 관리국 일선 간부까지. 그의 고객들은 사회의 정점에 위치한 최상류층의 사람들이었다. 그 불행이 휩쓸고 간 뒤 전처럼 닥치는 대로 일을 수주 받지 않았다. 미미한 파급효과만 있을 것 같은 일만을 선별해서 처리했다. 그런 후에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지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K가 처음 나타났을 때 G는 또 다른 어떠한 불행의 종류가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그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만한 기회였다.

‘돈을 받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더 이상 도약 따위 하지 말고 평범한 생활을 하자.“

스쳐 지나는 풍경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았다. 시간은 어느새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3월 4일 20시 23분

“당신은 왜 이런 일 하는 겁니까? 역시 돈 때문에?”

G는 차문을 닫으면서 K에게 물었다. K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겁니까?”

“동기가 궁금해서요. 저야 당신이 더 잘아실 것 같고.”

“아니, G씨 뒷조사는 확실히 했지만 이것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당신이야 말로 단지 돈 때문에 하는 겁니까? 죄질 탕감 어쩌고 한건 다 거짓인데도 말이죠?”

“예, 저는 정말 돈 때문에. 거액이잖아요.”

“그렇다면 저도 별로 할 말은 없네요. 당신보다 더 거액이니까 이 일을 하는 것 뿐이지.”

G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말 나온김에 묻는건데 대체 그 돈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한 몇 십억 정도?”

“몇 백이오. 이정도로 ‘역사’에 영향을 줄만한 일치고는 껌 값이죠 뭐. 뒤로 헤처먹는 것도 많을텐데.”

심드렁한 말투에 놀라며 G는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얼만데요?”

“150억. 이제 만족합니까? 어서 갑시다.”

세상에는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그래서 이런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뒤에 일은 생각지 못한 채. G는 이 이상 자신에게 미칠 영향들이 무엇인지 곱씹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이 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들이 촉발 될 것인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청사 앞은 조용했다. K는 건물 양방향으로 흩어지자고 종용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들이 여기 근처에 있을거라고 판단 합니까?”

“간단한 거 아닙니까. 어쨌든 놈들도 이정도 수준의 테러는 처음이고 미숙할거요. 아무리 그전에 연습을 했다 치더라도 자기 눈으로 볼 때까지는 성공했는지조차 분간하기 힘들걸요. 그리고 만에 하나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안되죠. 우리는 위치만 파악하면 되고. 그걸로 된거니까. 실패할 일은 절대 없습니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요. 그리고 확신하건 대, 분명 근방에 있을 겁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G는 K와 반대편으로 돌아 나오며 의심갈만 한 곳은 샅샅이 뒤졌다. 문득 시간을 확인 하자 어느덧 5분 안팎으로 줄어 있었다. 조만간 단말기에 위치표시가 나타날 것이다.

G는 건물과 더 거리를 두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 청사 뒤쪽 입구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가리며 그 사람을 주시했다. 그 사람은 주차장으로 바삐 이동했다. 이윽고 자신의 차인 듯 한 곳에서 멈춰서더니 주머니를 뒤지는데 여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를 찾고 있는 행동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였다.

같은 한 패는 아니다, G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탈감을 느끼려던 찰나 남자의 행동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쪽, 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한층 어둠이 짙은 저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지 뭘 보고 있는 건지? 그러나 G가 있는 방향에서는 그 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옮겼다. 남자의 차가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그에 맞춰 G는 방금 남자가 섰던 자리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도 볼 수 있었다. 아니 보였다. 네 명의 남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서 있는 것을. 그 중 한명은 슬라이더 폰의 덮개를 열어둔 채 서 있었다. 찾았다, 가슴 속 깊이 떨려오는 흥분감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는 총을 빼들었다. 단말기의 위치 신호를 k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 곳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을 감안하여 G는 그전에 어떤 식으로든 놈들을 지연시켜야만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는 속으로 되뇌며 방아쇠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친다. 시간은 20시 28분.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그는 이내 뛰쳐 나갔다.

3월 4일 20시 29분

K의 단말기로 신호음이 울렸다. 급히 단말기를 확인한 K는 주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G가 보내온 위치신호. 지체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달렸다.


3월 4일 20시 28분

모든 게 이상했다. 기억이 끊어진 기분. G는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인 채, 지금 자신이 왜 달려가고 있는지 생각했다. 분명히 그 네 무리의 남자에게 달려간 후 위협적으로 총을 겨눴다. 그리고는 멈춰, 라고 소리 지른 후 정확히 10초 후. 다시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1분 전의 상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 퍼억!

둔팍한 소음과 함께 각목이 등 위로 내려쳐졌다. G는 피할 겨를도 없이 의식이 아뜩해져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곁따라 쉬지 않고 한 번, 두 번 끝도 없이 각목이 휘둘러졌다. 마치 뜨거운 불기가 육신에 내려앉는 듯, 욱신대는 통증에 G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손수건이 자신의 G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은 잦아들었고 그대로 두 명의 남자에게 덤불 뒤로 개처럼 끌려갔다. G는 반항을 해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옆구리가 걷어차이고 깊은 신음만을 흘리는 게 다 였다. 맞은 자리마다 시큰했으나 죽음의 공포가 압도하여 그런 고통조차 그에게는 얕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덤불 뒤에 오자마자 G는 내팽겨 쳐졌다. 구르듯 집어던져지고 나서 한참을 굴러서야 움직임이 멈췄다.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짙은 그림자가 자신을 덮는 것을 먼저 인지했다. 발이 머리를 뭉갰다.

“관리국의 끄나풀이신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G는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남자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럴때 마다 발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증가했다. 숨 쉴 틈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자 그는 포기하며 두 손을 내렸다.

“그런 의미 없는 저항은 하지 않는게 좋아. 어, 알아 들어? 나는 네가 뭐가 됐든 간에 어쨌든 죽일거니까.”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흡사 어린아이 같았다. G는 이명을 울려대는 고막을 뽑아 버리고는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넌 우리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냥 심심해서 이런 무자비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살인마들 쯤으로 보이나? 야 H 우리가 뭐냐?”

“혁명 단체.”

미친 듯이 울리는 파안대소. G는 귀를 박살내고 싶었다.

“그래 그렇지. 혁명 단체. 센데로 루미노소 같은 집단이지.”

그제서야 슬며시 발이 떼졌다. B는 몸을 낮춘 채 G의 얼굴을 들어 올려 눈 앞으로 가져왔다.

“난 B라고 한다. 넌 누구냐.”


그때 G의 손 끝에 무언가 닿은 느낌이 들었다. 권총이었다. 어떻게 그 와중에 이걸 쥐고 있었던가. 그는 그것을 힘껏 끌어와 손에 감쌌다.

“몰라 개새끼야.”

그는 총을 잡아 겨눴다.

3월 4일 29분

K는 주차장의 흐릿한 광경을 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말기 신호가 잡힌 곳은 이곳 이었다. 그는 다시 역주 했다. 전력질주 한다면 1분 내로 주차장 까지 닿을 성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놈들을 사살하고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그의 본능적인 감각들이 위험을 알리고 붙잡아 세우려 했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이런 이질적인 감정 형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그는 당혹스러웠다. 실수한 건 없다. 무엇이 이토록 자신을 주저하도록 만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K는 달리면서 총을 한차례 점검했다. 주차장의 풍광이 조금 씩 그의 시계(視界)를 가득 채워 나갔다.

3월 4일 29분

“끄아아!”

G의 손이 구둣발에 밝혀 으스러졌다.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손수건에 틀어 막혀졌다.

“이런 걸로 장난치면 안되지.”

G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총을 들고 B의 머리로 겨눴는데 펼쳐진 현실은 끔찍했다. 착각도 꿈도 아니다. 분명 B는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신나잇 페블의 효과가 전연 없었다.

“어, 어더 게…….”

틀어막은 손수건을 뚫고 G가 소리쳤다.

“아 왜 이렇게 되었나 혼란스럽나 보지?”

B는 총구를 어깨에 가져댄다. 그리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겨 G의 견갑골이 박살냈다. 그가 바라던 귀가 아니라 어깨가 무참히 부서졌다. 입을 막은 손에 힘이 더해진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줄까. 난 말이야, 관리국이 도출해낸 가장 최악의 존재 중 하나다. 그 놈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알아?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로 이 국가를 재편하려 들고 있다고. 다시 말해, 그 놈들 지배하에 두기 위해 멋대로 시간능력을 쓰고 있는거야. 그 결과가 나다. 도약 시 불특정 상황을 상정한다, 도약자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그 규칙을 어기고 도출해낸 존재가 나고 따라서 나는 관리국의 위협이 되는! 씨발, 이거 굉장히 운명론적인 거 같은데. 어쨌든 그럼으로 인해 나는 상상도 못할 힘을 얻었다. 설계자들이 지랄해대는 그 돌조각조차 나를 위협하지 못하지. 아 그래서 총을 줬나 보군.”

G는 불규칙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었다. B의 손이 박살난 어깨를 짓물렀다.

“흐읍-”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그놈들 말이야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이능력자 전체를 관리하고 가둬두려는 법안을 세우고 있더라고. 그게 뭔지 알아? 쉽게 말해 연좌제 같은 거야. 이능력자 가족들과 그 자식들을 자유를 구속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거. 마트에 가면 물건이 쫙 늘어서 있잖아. 그것처럼 처음부터 능력분류를 시켜서 유전적인 함의를 찾는 거지. 아버지가 이 능력이면 자식의 능력도 똑같을까, 어떻지? 그럼 다음엔? 이제 입맛대로 골라 쓰는 거야. 왜 우리 같은 능력자들 범죄에 대한 사법안이 미뤄지고 있는지 아나. 간단해, 이용해 먹어야 하기 때문이지. 공무원들 입장에서 보면 우린 사람이 아니야, 거의 뭐 자원이야, 자원. 그리고 그걸 토대로 최대 목표는 최대 이익을 이끌어 내는거. 공무원 이 씹새끼들은 온통 머릿 속에 생각하는 게 돈이야, 돈. 개새끼들. 이정도로 비인간인적이니까 드러내질 못하는거야. 그게 제일 좆같은 거지. 알면서 저지르는 거.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우리 권리를 위해 단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디 우리끼리 소통이 되어야 말이지. 이 소통불능의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찾아보기 쉬운데가 여기더군. 관리국 내부 말이야. 그래서 저기 동료 세 명을 끌어 모아다가 이런 조직을 만들었지. 나머지는 다 거부를 하는 바람에. 그 새끼들도 언젠가 죽일거야. 아무튼 이렇게 결성한 다음에 말이지, 처음엔 우리도 대화를 하려 했는데 근데 이게 씨발 뭔 대화가 되야 말이지. 개랑 비둘기가 대화를 해도 이보다는 나을 성 싶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대화가 안되면 결국은 뭐냐, 나오는 건 폭력 뿐 이지. 남은 건 폭력 뿐이라고. 그 새끼들이 우리 가족들을 몰살시켰어. 우릴 죽이지 못하자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고 우리 모든 신상 기록들에 대해 지워나갔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믿지마. 모든 그 놈들 짓이니까. 원천적으로 사회생활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결국 우리 손에 남은 건 이 피끓는 분노와 적개감 뿐이지.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하기로 했다. 그게 첫 번째로 놈들 근거지고.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거, 저거.

그전에 먼저 네놈을 죽여 본보기로 삼고 일절 방해를 못하도록 해야겠지. 그럼 당분간 우릴 족치려고 관리국에서 멍청한 놈들을 보내진 않을거 아냐. 알아 듣나? 다음은 저 건물을 박살내는거고.”

B는 어깨에서 손을 뗐다. 동료에게서 건네 받은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을 닦으며 총을 고쳐 잡았다. 총은 정확히 G의 심장부근을 겨냥 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만나지만 않았어도 동료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렇게 죽이는 게 안타깝긴 한데 어쩔 수 없구만. 희생양은 필요하니까.”

B가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입가에 내걸린 피묻은 미소. 어섯눈을 뜨며 G는 총구를 들여다 본다. 이윽고, 방아쇠가 끼익하며 뒤로 당겨졌다.

3월 4일 30분

총성이 퍼졌다. 그 뒤, 섬광이 번쩍였다. K는 그쪽으로 총을 조준했다. 목표물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서 봤던 그 남자. 거리는 충분했다.

3월 4일 30분

탄환이 G의 가슴팍에 박힌 동시에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B를 비롯한 3명은 팔을 들어 얼비치는 눈을 가렸고 뒤따라 그 틈에 울러 퍼진 총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못했다.

퍽-

총탄은 정확히 B의 머리를 꿰뚫었다. 즉사였다. 옆으로 쓰러지며 떨어뜨린 총이 흙바닥을 튕겨 구른다.

“이런 씨발.”

뒤이어 다른 동료 한명이 쓰러졌다. 총성이 보다 가깝게 들려 왔다.

“구성원 전원이 도약자라는 거 거짓 정보였나. 스퍼트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가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속도로 K에게 접근했다. 이미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속도를 넘어선 그였지만 총보다는 빠르지는 못했다. 세 번째 총성이 울리고 k의 한 뼘 거리에서 스퍼트가 나가 떨어졌다. 가슴을 뚫고 절명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주위를 살피다 떨어진 총을 주웠다. 조준할 것도 없이 곧바로 총을 쏘아 K의 팔부분에 빗맞힌다. 조준점을 크게 벗어난 K의 총이 의미 없이 흔들리며 난사되다 뒤이은 총격에 쓰러진다. K는 관자놀이 부근으로 울컥 피를 쏟고 있었다.

화약 냄새가 자욱이 피는 총구를 든 채 남자는 간헐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H라고 불렸던 남자였다. 그는 불현듯 G의 존재가 떠올랐다. 확실히 죽였던가? 총구를 돌려 G가 있던 자리를 확인하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고회로가 정지한다. 굳어버린 채 서 있는 발목으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끄아아악!”

G는 부서진 신나잇 페블의 파편을 발목에 찔러 넣고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 토홀드 (toe hold) 공격으로 이었다.

으드득 관절 꺾이는 소리가 들리며 H는 힘없이 쓰러져갔다. 넘어지는 와중에 몇 번의 총격이 있었지만 그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그가 쓰러지자, G는 필사적으로 그의 몸에 달라 붙었다. 그리고는 죽어라 비명을 질러대는 H의 얼굴을 흙더미에 처박았다. 비명이 그칠 때 까지 파묻힌 H는 흙을 잔뜩 입에 물고 끌려 나왔다.

“이 씨발 새끼야 시끄럽잖아.”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린 G는 파편조각을 손에 꽉 쥐며 얼굴을 가격했다. 피가 튀어 오르며 얼굴로 끼얹는다. 걸쭉한 피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H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꽉 쥔 채,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격발.

탕 -

그러나 G를 스치지도 못한 탄이 나무에 처박혔다. 총소리에 기겁하며 G는 총을 쥔 그의 왼손을 덮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벌리려 했지만 악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한참을 사투하는 동안, H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G의 얼굴을 스쳐 긴 핏자국을 남겼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공격이었는지 이후 손에서 힘이 빠지며 총을 놓쳤다. G는 황급히 그것을 주워 H의 미간에 겨눴다. 불과 손가락 마디 정도의 거리.

“죽어라.”

탕 - 몇 발째인지 모를 탄이 발사되고 남은 한명의 생명을 마저 앗아 갔다. 이제 끝이다. 그만 최후로 남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G는 황망히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들려온 총성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길가 쪽으로 잠시 눈을 돌렸다가 H의 시체를 본 G는 그 자리에서 숨이 멎을 뻔 했다. 자신이 깔고 있는 남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의 시체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 이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아 이 새끼…….”

얼마 전에 보았던 청소 카트의 인부. 서른 중반의 초췌한 남자처럼 보이던 이 자 또한 결국은 이 조직의 한패거리였다. 언뜻 시간을 적용해 젊은 모습이나 늙은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한 이능력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간의 속도를 조정할 수 있었던 사람처럼. 그런 사람이 실재했었나.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그는 입술 근육을 실그러뜨렸다.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갔다. 그들이 어떻게 미리 선수를 쳐서 공격을 했는지, B가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쉽사리 알아챘는지 왜 그런 장황한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 놓았었는지. 자신들은 최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참사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경찰이 몰려와 현장을 장악할 때까지도 꼼짝 않은 채, 씨물거렸다.

3월 5일 13시

K가 설정한 상주 시간을 훨씬 상회하였지만 그는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구속하던 설계자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G는 취조형사를 흐리마리한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흐슬부슬한 얼굴에 극심한 피로가 묻어났다.

“흠 그러니까..”

진술서를 툭툭 치며 형사가 이어 말했다.

“이걸 믿으라는 겁니까, 지금?”

“저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골치 아프군.”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형사는 눈을 감았다 뗐다.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뒷목에 손을 얹고 주물렀다.

“하지만 이런 걸 진술서라고 보고 할 순 없습니다. 좀 이야기를 하시더라도, 뭐 최소한 지어서 말씀을 하시더라도 좀 그럴듯하게, 납득할만한 뭐 그런 걸로 해주면 안됩니까? 이거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예?”

그러나 G는 묵묵부답했다. 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형사는 책상에 바싹 밀어젖혔던 몸을 다시 의자에 묻었다. G의 말문이 터진 건 그때였다.

“제가 장난치는 걸로 보입니까?”

형사는 팔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거죠. 장난친다는 게 아니라.”

G는 정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 형사는 순간 이 자가 혹시 미친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곧 이어진 차분한 말투는 단숨에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어떻게요.”

“제가 이 자리에서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반쯤 감겨있던 형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뭘요?”

“시간도약.”

입도 점차적으로 벌어져 갔다.

“그러면 믿으시 겠습니까?

벌려진 입은 그대로 비웃음으로 변해갔다. 입술 주위의 실근육이 씰룩이며 웃음을 토했다.

“뭐 정 그러시다면야. 근데 이거 참 곤란합니다 허허, 허허허.”

G도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우리 도약자 사이에 이런 기도문이 있어요. 만에 하나 잘못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자의 도리로서, 용서를 구하는 거지요. 그래서 큰 탈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문구에요.”

형사는 웃음을 그치며 약간은 흥미 있는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팔을 책상에 괴며 G를 주시하자 이윽고 그의 입에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감은 두 눈과 함께.”

천장에 매달린 갓등이 부챗살 빛을 뿌려댔다. G는 두 눈 가득 그 빛을 받아 들였다.

“세상도 감길 것이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3월 4일 13시 10분

수백편의 과거의 편린들. 현요한 섬광 아래 점증으로 번지는 이근과 비근이 고역이었다.

거친 파도처럼 뒤덮고 엎기를 갈마들며 켜켜이 채워온 지난 과거를 다시 되새길 즈음, 조금씩 오감이 제 기능을 찾아 갈 때 쯤 그도 스스로를 추스릴 정도의 여력이 생겼다.

과거 기억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손끝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그가 본건 이제는 희미해졌을 과거의 모습이었다. G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미세한 현기증을 느끼며 주위를 살피자, 바로 정면으로 tv가 켜진 것이 보였다. 뉴스 채널

이었다. 화면 그래프에 뜬 날짜는 3월4일. 무미한 침 맛을 다시며 귓속에 사무치는 시침 소리가 멎을 무렵. 13시를 알리는 비프음이 들린다.

수면에 잠긴 기분을 벗어나 비로소 그의 오감이 살아났다. 홍채가 수축하며 동공이 확대된다. 눈 앞 상황이 어느 정도 현실적 감각을 띄고 살갗에 닿는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긴급 속보. N국이 전면전태세로 접어들었다는 뉴스였다. 기자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절망감이 묻어났다. 13시 10분 부로 전국적으로 계엄령 선포가 들어간다고 전했다.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때 TV볼륨 소리에 묻혀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K의 전화였다.

“아 접니…….”

“아 전화 잘하셨소. 할 말이 있으니 거기 계십시오.”

“잠깐만, 여긴 어떻게 안다고…….”

“이만 끊습니다.”

폴더를 닫고 G는 급히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머리 속이 복잡했지만 하나의 생각만이 일관되게 마음을 붙잡았다.

“씨발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지.”

G는 문을 쾅 닫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스스로도 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K를 살려내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자신이 지고 갈 무게였다.

바로 잡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을까, G는 그렇게 자문해보았지만 들려오는 대답따위는 없었다.

햇살이 맑은 날이었다. 현관문을 나서며 G는 또다시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