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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약간 떨어져 있는 미래. 인류의 기술은 그 어느때보다도 인류에 대한 강화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계를 인지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예컨대 통상 스포츠카 속도의 세배 속도를 내는 차를 발명했다고 해도, 인간의 반응속도와 동체시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누가 조종할 것인가. 그런 문제로부터 시작한 기술로 인해 인간은 지금까지 이룬적이 없는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장기를 좀 더 튼튼한 것으로 교환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의수로 대체하거나 하는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고. 점점 수준이 높아져, 인간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말그대로 '이능력자'인 뮤턴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대해 불만을 가지는 무리도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순수인간주의자'라고 불리는 무리들은 무분별한 인체개조를 반대하고, 특히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뮤턴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체 강화라는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한 각 국가들은 이 순수인간주의자들을 각국의 국익과, 인류의 발전에 저해되는 존재라고 판단하고, 강력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순수인간주의자들의 반항은 끝이나질 않았고, 뿔뿔히 흩어져 활동하던 뮤턴트들도 '사이코 셔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순수인간주의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 사이코 셔플,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삼파전이 된 가운데, 한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퍼엉!
도시에서 가장 큰 은행의 벽이 터져나가는건 흔히 보이는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 짓의 원인인 로스는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것이 백주대낮에 은행을 털고 돌아오는 길인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이 한명도 죽지 않았다는것이 그의 기분을 더 좋게 했다.
자신의 리미터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강한 자신이 괴롭힐 이유가 없는 생물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죽이는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수준급의 염동력을 가지고 있었고, 본디 그의 능력인 화염을 다루는 능력은 동급의 원 페어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다.
그라면 날아오는 총탄을 염동력으로 멈추고, 화염으로 녹여버리는것은 일도 아닌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는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갑자기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네개의 단검을 날리는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큭!"
로스는 황급히 불의 장막을 펼쳐서 공격을 막았지만, 당황한 탓인지 허벅지에 단검이 박히는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눈을 하며 자신에게 단검을 던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둔감한 뮤턴트라고 해도 상대방이 순수한 인간인지 뮤턴트인지 알아 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보건데 자신 앞의 남자는 기초적인 인체 개조도 하지않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저럴정도로 깨끗한 인간이라면 지나치게 돈이 없는 인간이거나 혹은 순수인간주의자일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설득력있는 경우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남자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천을 벗어던졌을리 없으니까.
그가 천을 벗어던지자. 일단 등 뒤에 차고 있는 거대한 양손검이 눈이 띄었다.
생각보다 작은 키의 남자와 비교해볼때 거의 비슷할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허리에는 도를 차고 있었고,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겨드랑이에는 자동권총으로 보이는 권총을 찼을 뿐만 아니라 허리춤에는 수류탄마저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무장이 제멋대로였지만 그렇다고 근처 편의점에 담배사러 가는 폼은 아니었다.
남자, 아니 얼굴로 보건데 소년이라는 말이 어올릴 그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은행은 출금하는 손님을 별로 안 좋아하지. 안 그래? 그래서 내가 적금 해주러 왔어."
다분히 비꼬는 말이었다. 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줌도 안되는 순수 인간. 그것도 혼자인 주제에 자신을 얕보고 있다.
"너 이자식.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물론, 덜떨어진 병신이지. 계집애처럼 떽떽거리지 말고 덤벼."
소년은 순식간에 손에서 도를 뽑아 로스에게 찔러들어왔다. 평범한 인간의 반응속도라면 피할 수 없을정도로 빠른 공격이었지만, 뮤턴트에게는 소용없는 공격이었다.
로스는 간단히 염력으로 도의 방향을 틀고, 화염으로 감싼 손으로 도신을 쥐었다. 불타는 손에 잡힌 도신은 이내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애초에 인간을 공격할 용도로 개조된것이 아닌 뮤턴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목표로 해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리미터가 장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를 공격하거나 염력으로 물건을 들어올려 던지거나 하는등의 공격은 여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로스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 큼은 그에대해 불만을 가져야 했다.
염력으로 저 소년을 매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소년이 든 도를 염력으로 들어 멀리 날려 버리는 행동은 가능했다.
첫 찌르기 공격이 실패하자 소년은 바로 후속타를 준비했다. 등 뒤에 장비한 양손검을 뽑아들면서 바로 횡으로 한바퀴 강하게 베어버린것이다.
워낙 군더더기없고 빠른 공격인지라 가까스로 몸을 숙여 피한 로스마저도 감탄하게 만드는 공격이었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 끌어가도 재미 없겠군.'
경찰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한참동안 머무는건 곤란했다. 애초에 사이코 셔플은 명령이 아닌 돌출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년을 빨리 처리할 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람 죽이는걸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자신의 허벅지에 칼을 꽂고 공격을 가한 인간을 용서해줄 만큼 로스는 착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소년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수류탄이 눈에 띄었다. 저걸 염력으로 쥐어 짜면 쉽게 소년을 죽일 수 있을것이다.
물론 자신에게까지 파편이 날라오겠지만 그것은 불의 장막으로 쉽게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로스는 망설이지 않고 수류탄을 염력으로 폭발시켰다.
그런 순간 순식간에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사방의 시야가 막혀버렸다.
"젠장! 연막수류탄이었나!"
당황해서 소리친 로스는 곧 자신이 위치를 알려버렸다는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로스의 등뒤에는 소년의 양손검이 날아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스는 이미 불의 장막을 쳐둔 상태, 양손검은 그의 주위에 진입하자마자 급속도로 불타올라 녹아버렸다.
"하하, 그깟 무기로 나를 이기려고 했느냐!"
로스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자 불의 장막 안으로 하나의 소년의 손이 나타났다.
하지만 검과 달리 소년의 손은 가루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소년이 특별한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인간임을 인식한 로스의 뇌가 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능력의 힘을 대폭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손이 아무렇지 않을리는 없었다. 소년의 손은 살이 타올라 근육이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손을 빼기는 커녕 더욱 깊숙히 집어 넣었다.
결국 소년의 손은 불의 장막을 통과해 로스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로스는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손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겠는가. 결국 불이 번져서 저 소년은 타 죽게 될것이다. 그때.
"이봐, 진짜 치 떨리게 공포스러운게 뭔지 알아?"
불길과 연기속에서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려왔다.
"그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고 무서워도 무섭지 않은거야."
그리고 소년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너도 곧 그렇게 해주지..."
-파앙!
소년의 손등위로 날카롭고 짧은 칼날이 튕겨져 나가듯 발사되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로스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서 정수리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뮤턴트라고 해도 그 본질은 인간이다. 물론 능력을 통해 그것을 극복한 뮤턴트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로스의 능력은 그를 극복하기는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던것이다.
인체와 밀착되어있었기 때문에 도나 양손검처럼 녹아내리지 않았던 손등위의 칼날은 손등을 벗어나자마자 급속도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로스의 육체도 같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에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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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간주의자들은 그 목적이 국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받아왔고, 결국 일상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그들은 과거 시도되었다가 좌절된 지하도시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공기 정화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공기는 항상 탁했고, 전기도 부족한, 그야말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몸이 약한 '순수인간'이 산다는것 자체가 아이러니컬 한 일인데. 그 때문에 의사의 존재는 신과도 같았다.
이 의사라는 직업은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었다. 그 누가 병을 앓으면 그 부분을 교체하면 되는 간단한 방식을 놔두고 병을 치료하려 들겠는가.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은 순수인간주의자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있는 유일한 의사 또한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으며(안경은 순수주의자들의 상징이나 다름 없다.)머리와 같이 검은 눈은 한쪽 팔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의 부상이라면 아예 팔을 바꿔다는게 나을거야. 아니면 재생능력을 키워서 이런 상처라도 한번에 낫게 하던지"
"잔말말고 치료나 해줘."
의사는 소년을 지긋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애새끼 말투 진짜 아름답네. 넌 순수인간 주의자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인체강화를 싫어하지?"
"그러는 넌 왜 순수인간주의자를 치료해주는거지? 답 없는 쇠고집들이라고 생각하잖아."
"...질문을 질문으로 답변하는건 어느나라 예절이냐."
"그러니까 묻지 마. 알아서 좋을것도 없잖아."
의사는 그도 그럴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지하에까지 와서 의사의 도움을 바랄 정도라면 보통 사연이 아닐것이다.
이 소년뿐만이 아니라 이 지하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러했다. 그런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겠지.
그녀는 다시 소년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가 여기에 치료받으러 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 왔을때는 지금보다 분명히 작았었고, 눈동자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그렇게 살아남을때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남았다.
지금은 얼굴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저 나이에 맞는 몸이라는 말은 못할 것이다. 그는 마치 살을 기워서 만든 언데드 같았고. 표정이나 목소리도 도저히 살아있는것 같지 않았다.
"치료 다 했지? 난 간다."
"공짜로 치료해주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하냐."
"싫으면 치료 하지 말던가."
뭐 그럼 네가 그렇지. 의사는 피식 웃으면서 출구로 나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황급하게 뛰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기 헌터가 있나!"
그렇게 소리친 남자는 방금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은 그를 주목했다.
"내가 헌터인데 무슨 일이지?"
"젠장! 뮤턴트다! 뮤턴트가 습격해왔어!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배낭에서 직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 해. 안내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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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도착한 곳은 지하도시의 경계초소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경비대원이었을것 같은 사람들의 사지가 찢어져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런 잔인한 풍경 위에, 한 소녀는 그걸 지긋이 보고 있었다.
"늦어. 헌터는 사냥감을 쫒아다니는거 아니었어?"
소녀는 그렇게 불만을 토해냈다. 금색 머리카락에 벽안을 한 서양 소녀였다. 그녀는 언덕 밑에 잘린 사지를 놔두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너무 약해서 재미가 없었어. 너 정도면 좀 재미있겠지? 하지만 너무 자만은 하지 마. 네가 처리한 로스라는 녀석정도야 우리에겐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 것 같더군. 너 같은 녀석들은 죽여도 죽여도 나타나니까 말이야."
소녀는 소년의 말에 코웃음쳤다.
"곧 죽어도 허세는 잘 부리는군. 그럼 그 허세에 비해 실력은 어느정도인지 볼까?"
소녀는 허공에 손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듯 싶더니 순식간에 소년에게로 날아들었다. 날카롭게 압축되어 더이상 바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은 미처 준비가 되지 못했던 소년의 온 몸을 강타했다.
마치 칼날과도 같은 그 공격은 소년의 살을 난도질했다. 살은 찢겨지고 살가죽은 벗겨져 너덜더덜해졌다.
"크윽!"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다. 뮤턴트는 인간을 목표로 공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저 소녀는 소년에게 공격을 가한것이다. 또한 처음 도착했을때 본 경비대원들의 찢겨진 사지또한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생길 수 없는 상처였다.
"이 마녀가!"
소년을 안내했던 남자는 권총을 꺼내들어 소녀를 향해 사격했다. 그러나 소녀는 손을 펼쳐 한반 휘두르는 동작만으로 모든 탄환을 튕겨내었다.
"피라미는 저쪽에서 찌그러져 있어!"
그녀가 그렇게 소리치자. 남자의 두 다리는 순식간에 절단되고, 남자의 상반신은 땅에 떨어져 경련했다. 피가 튀어 사방에 흘러 내렸다.
소년의 몸에서는 방금전에 당한 상처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분명히 당하고 말 것이다.
"헤헤,드디어 둘이 되었네? 근데 살짝 공격한건데 많이 다쳤나봐?"
"너, 어떻게 인간을 목표로 공격할수 있는거지? 리미터가 있을텐데."
소녀는 씩 웃었다.
"리미터라고? 그런건 나에게 없어. 예전에 제거해 버렸거든."
소년은 자신이 들고 있는 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목적은 확실했고, 동기또한 확실하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정말 그런가?"
"뭐,뭐라고?"
"정말 인간을 공격할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나? 그럼 왜 한번에 죽이지 못하고 사지만 찢어내는거지? 그리고..."
소년은 도를 천천히 들었다. 도의 끝은 소녀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리미터를 제거한것 치고는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군."
소년은 자세를 급격하게 낮추고 앞으로 돌격했다. 위험을 느낀 소녀가 황급하게 바람을 발사했다. 하지만 바람은 소년의 등이나 허벅지 등만을 지나칠 뿐이었다.
결국 소녀의 앞까지 당도한 소년은 망설이지 핞고 소녀의 복부에 도를 찍러 넣었다.얇고 가는 도신이 소녀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소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말했다.
"이렇게 사람을 제대로 노리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죽이게 만들어있지도 않으면서. 왜 나의 어머니를 아버지를 죽였나. 왜 나의 여동생을 죽였나. 어째서!"
소년은 도신을 빼들도 다시 복부를 찔렀다. 한번 찔러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바람을 날렸다. 소년에게 비수같이 날아온 바람은 너무나도 쉽게 소년의 팔을 찢어버렸다.
"크으윽!"
동맥을 지나쳤는지 소년의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도를 잡은 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번을 찔렀을까. 이윽고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손에서 도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소년 또한 그 자리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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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눈을 떴다. 가장 처음 보인것은 의사의 얼굴이었다.
"운이 없네 이 녀석아. 아깝게 못 죽었어."
그건 정말 아깝군. 소년은 생각했다. 그는 오른쪽 팔을 움직여 보였다. 당연하지만 팔뚝 밑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쥐는데 한손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자신의 일부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어렵게 되었군.'
"하지만 아깝게 못 죽은 분이 한분 더 계시지. 누굴까?"
의사의 말을 들으며 소년은 순수인간주의자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 뮤턴트는 리미터를 한계까지 내려서 겨우 사지중 하나를 자를 정도였지 않은가. 제 때 치료를 했다면 살아남는건 물론이고 일부는 잘린 사지를 다시 붙일 수 있을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안된 모양이지만.
의사가 옆으로 비켜서자 또 다른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은...
"뮤턴트가 확실히 월등하긴 한가봐? 배에 구멍이 뚫리고도 안 죽었어."
그 뮤턴트였다. 소년은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했으나 이미 의사가 일어나지도 못하게 자신을 압박해둔 뒤였다. 이럴때만 빈틈이 없다.
"왜 살려뒀지."
"...그건 나도 궁금하군. 나를 왜 살려뒀지?"
소녀도 그렇게 말했다. 헝클어진 금발을 뒤로 틀어올린 그녀는 지난번에 봤을때 보다는 확실히 수척해보였지만 배에 칼을 몇번이나 찔린것 치곤 확실히 멀쩡해보였다. 소년은 다시 한번 잘라진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불공평하군.
"물론 다들 죽이자고 했지. 분노는 둘째치고 아가씨를 살려두면 당신이 밖으로 나가 우리의 위치를 알릴테니까 말이야."
"그런 짓은 안해."
신기하게도 소년은 소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녀라면 다시 돌아와 공격한다는 생각은 해도, 위치를 알려 몰살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뭐...다들 그렇게 생각했다는게 중요한거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을 죽인다면 당신에게 정보를 캐낼 수 없다는걸 일단 알려줬지. 그리고 당신을 죽일 권리는 저기 있는 저 위험한 소년에게 밖에 없다는점도 시사했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따위는 없어. 그러니까 누가 죽였더라도 난 불평하지 않았을거야. 말하자면. 쓸데없는 배려라고 해두고 싶군."
"거 참 도덕적인 청년이군. 가끔 칼들고 나가서 팔 떼먹히는거 말고는 말이지."
"풉"
소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소년은 누워있는 상태에서 소녀를 지긋이 노려봐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얘기야. 너는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영웅이고, 그에 대한 예우로 저 소녀를 넘긴 것이지."
"...내가 언제부터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지?"
의사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거야 뭐...쇠고집중에 최고의 쇠고집이니까가 아닐까?"
"꺄하하하!"
소년은 다시 소녀를 노려보았다. 이번엔 휘파람.
"...그에 대한 반론은 산만큼 많지만 지금은 좀 기절해야겠군. 내가 깨어났을때는 저 심란한 계집애를 죽이던지 족치던지 어쨌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줘."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말대로 기절했다.
소년에게로 다가온 의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앞으로는 더욱 잔인한 인생이 되겠지만. 일단은 푹 쉬시길. 영웅님."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계를 인지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예컨대 통상 스포츠카 속도의 세배 속도를 내는 차를 발명했다고 해도, 인간의 반응속도와 동체시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누가 조종할 것인가. 그런 문제로부터 시작한 기술로 인해 인간은 지금까지 이룬적이 없는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장기를 좀 더 튼튼한 것으로 교환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의수로 대체하거나 하는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고. 점점 수준이 높아져, 인간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말그대로 '이능력자'인 뮤턴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대해 불만을 가지는 무리도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순수인간주의자'라고 불리는 무리들은 무분별한 인체개조를 반대하고, 특히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뮤턴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체 강화라는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한 각 국가들은 이 순수인간주의자들을 각국의 국익과, 인류의 발전에 저해되는 존재라고 판단하고, 강력하게 억압했다.
하지만 순수인간주의자들의 반항은 끝이나질 않았고, 뿔뿔히 흩어져 활동하던 뮤턴트들도 '사이코 셔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순수인간주의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 사이코 셔플,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삼파전이 된 가운데, 한 소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퍼엉!
도시에서 가장 큰 은행의 벽이 터져나가는건 흔히 보이는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 짓의 원인인 로스는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것이 백주대낮에 은행을 털고 돌아오는 길인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이 한명도 죽지 않았다는것이 그의 기분을 더 좋게 했다.
자신의 리미터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강한 자신이 괴롭힐 이유가 없는 생물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죽이는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수준급의 염동력을 가지고 있었고, 본디 그의 능력인 화염을 다루는 능력은 동급의 원 페어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다.
그라면 날아오는 총탄을 염동력으로 멈추고, 화염으로 녹여버리는것은 일도 아닌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는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갑자기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네개의 단검을 날리는걸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큭!"
로스는 황급히 불의 장막을 펼쳐서 공격을 막았지만, 당황한 탓인지 허벅지에 단검이 박히는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눈을 하며 자신에게 단검을 던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둔감한 뮤턴트라고 해도 상대방이 순수한 인간인지 뮤턴트인지 알아 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보건데 자신 앞의 남자는 기초적인 인체 개조도 하지않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저럴정도로 깨끗한 인간이라면 지나치게 돈이 없는 인간이거나 혹은 순수인간주의자일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설득력있는 경우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남자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천을 벗어던졌을리 없으니까.
그가 천을 벗어던지자. 일단 등 뒤에 차고 있는 거대한 양손검이 눈이 띄었다.
생각보다 작은 키의 남자와 비교해볼때 거의 비슷할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허리에는 도를 차고 있었고,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겨드랑이에는 자동권총으로 보이는 권총을 찼을 뿐만 아니라 허리춤에는 수류탄마저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무장이 제멋대로였지만 그렇다고 근처 편의점에 담배사러 가는 폼은 아니었다.
남자, 아니 얼굴로 보건데 소년이라는 말이 어올릴 그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은행은 출금하는 손님을 별로 안 좋아하지. 안 그래? 그래서 내가 적금 해주러 왔어."
다분히 비꼬는 말이었다. 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줌도 안되는 순수 인간. 그것도 혼자인 주제에 자신을 얕보고 있다.
"너 이자식.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물론, 덜떨어진 병신이지. 계집애처럼 떽떽거리지 말고 덤벼."
소년은 순식간에 손에서 도를 뽑아 로스에게 찔러들어왔다. 평범한 인간의 반응속도라면 피할 수 없을정도로 빠른 공격이었지만, 뮤턴트에게는 소용없는 공격이었다.
로스는 간단히 염력으로 도의 방향을 틀고, 화염으로 감싼 손으로 도신을 쥐었다. 불타는 손에 잡힌 도신은 이내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애초에 인간을 공격할 용도로 개조된것이 아닌 뮤턴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목표로 해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리미터가 장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주위를 공격하거나 염력으로 물건을 들어올려 던지거나 하는등의 공격은 여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로스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 큼은 그에대해 불만을 가져야 했다.
염력으로 저 소년을 매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소년이 든 도를 염력으로 들어 멀리 날려 버리는 행동은 가능했다.
첫 찌르기 공격이 실패하자 소년은 바로 후속타를 준비했다. 등 뒤에 장비한 양손검을 뽑아들면서 바로 횡으로 한바퀴 강하게 베어버린것이다.
워낙 군더더기없고 빠른 공격인지라 가까스로 몸을 숙여 피한 로스마저도 감탄하게 만드는 공격이었다.
'이대로 싸움을 계속 끌어가도 재미 없겠군.'
경찰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한참동안 머무는건 곤란했다. 애초에 사이코 셔플은 명령이 아닌 돌출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년을 빨리 처리할 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람 죽이는걸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자신의 허벅지에 칼을 꽂고 공격을 가한 인간을 용서해줄 만큼 로스는 착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소년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수류탄이 눈에 띄었다. 저걸 염력으로 쥐어 짜면 쉽게 소년을 죽일 수 있을것이다.
물론 자신에게까지 파편이 날라오겠지만 그것은 불의 장막으로 쉽게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로스는 망설이지 않고 수류탄을 염력으로 폭발시켰다.
그런 순간 순식간에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사방의 시야가 막혀버렸다.
"젠장! 연막수류탄이었나!"
당황해서 소리친 로스는 곧 자신이 위치를 알려버렸다는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로스의 등뒤에는 소년의 양손검이 날아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스는 이미 불의 장막을 쳐둔 상태, 양손검은 그의 주위에 진입하자마자 급속도로 불타올라 녹아버렸다.
"하하, 그깟 무기로 나를 이기려고 했느냐!"
로스가 기세등등하게 소리치자 불의 장막 안으로 하나의 소년의 손이 나타났다.
하지만 검과 달리 소년의 손은 가루가 되지 않았는데, 이는 소년이 특별한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인간임을 인식한 로스의 뇌가 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능력의 힘을 대폭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손이 아무렇지 않을리는 없었다. 소년의 손은 살이 타올라 근육이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손을 빼기는 커녕 더욱 깊숙히 집어 넣었다.
결국 소년의 손은 불의 장막을 통과해 로스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로스는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손하나가 자신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겠는가. 결국 불이 번져서 저 소년은 타 죽게 될것이다. 그때.
"이봐, 진짜 치 떨리게 공포스러운게 뭔지 알아?"
불길과 연기속에서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려왔다.
"그건 아파도 아프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고 무서워도 무섭지 않은거야."
그리고 소년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너도 곧 그렇게 해주지..."
-파앙!
소년의 손등위로 날카롭고 짧은 칼날이 튕겨져 나가듯 발사되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로스의 목을 꿰뚫고 지나가서 정수리로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뮤턴트라고 해도 그 본질은 인간이다. 물론 능력을 통해 그것을 극복한 뮤턴트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로스의 능력은 그를 극복하기는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던것이다.
인체와 밀착되어있었기 때문에 도나 양손검처럼 녹아내리지 않았던 손등위의 칼날은 손등을 벗어나자마자 급속도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로스의 육체도 같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에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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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간주의자들은 그 목적이 국익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받아왔고, 결국 일상에서 살아갈 수 없었던 그들은 과거 시도되었다가 좌절된 지하도시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공기 정화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공기는 항상 탁했고, 전기도 부족한, 그야말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몸이 약한 '순수인간'이 산다는것 자체가 아이러니컬 한 일인데. 그 때문에 의사의 존재는 신과도 같았다.
이 의사라는 직업은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었다. 그 누가 병을 앓으면 그 부분을 교체하면 되는 간단한 방식을 놔두고 병을 치료하려 들겠는가. 그래서 의사라는 직업은 순수인간주의자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있는 유일한 의사 또한 그런 경우였다. 그녀는 검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으며(안경은 순수주의자들의 상징이나 다름 없다.)머리와 같이 검은 눈은 한쪽 팔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의 부상이라면 아예 팔을 바꿔다는게 나을거야. 아니면 재생능력을 키워서 이런 상처라도 한번에 낫게 하던지"
"잔말말고 치료나 해줘."
의사는 소년을 지긋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애새끼 말투 진짜 아름답네. 넌 순수인간 주의자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인체강화를 싫어하지?"
"그러는 넌 왜 순수인간주의자를 치료해주는거지? 답 없는 쇠고집들이라고 생각하잖아."
"...질문을 질문으로 답변하는건 어느나라 예절이냐."
"그러니까 묻지 마. 알아서 좋을것도 없잖아."
의사는 그도 그럴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지하에까지 와서 의사의 도움을 바랄 정도라면 보통 사연이 아닐것이다.
이 소년뿐만이 아니라 이 지하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러했다. 그런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겠지.
그녀는 다시 소년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가 여기에 치료받으러 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 왔을때는 지금보다 분명히 작았었고, 눈동자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그렇게 살아남을때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남았다.
지금은 얼굴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저 나이에 맞는 몸이라는 말은 못할 것이다. 그는 마치 살을 기워서 만든 언데드 같았고. 표정이나 목소리도 도저히 살아있는것 같지 않았다.
"치료 다 했지? 난 간다."
"공짜로 치료해주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하냐."
"싫으면 치료 하지 말던가."
뭐 그럼 네가 그렇지. 의사는 피식 웃으면서 출구로 나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황급하게 뛰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기 헌터가 있나!"
그렇게 소리친 남자는 방금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년은 그를 주목했다.
"내가 헌터인데 무슨 일이지?"
"젠장! 뮤턴트다! 뮤턴트가 습격해왔어!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배낭에서 직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서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뭐 해. 안내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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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도착한 곳은 지하도시의 경계초소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경비대원이었을것 같은 사람들의 사지가 찢어져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런 잔인한 풍경 위에, 한 소녀는 그걸 지긋이 보고 있었다.
"늦어. 헌터는 사냥감을 쫒아다니는거 아니었어?"
소녀는 그렇게 불만을 토해냈다. 금색 머리카락에 벽안을 한 서양 소녀였다. 그녀는 언덕 밑에 잘린 사지를 놔두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너무 약해서 재미가 없었어. 너 정도면 좀 재미있겠지? 하지만 너무 자만은 하지 마. 네가 처리한 로스라는 녀석정도야 우리에겐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 것 같더군. 너 같은 녀석들은 죽여도 죽여도 나타나니까 말이야."
소녀는 소년의 말에 코웃음쳤다.
"곧 죽어도 허세는 잘 부리는군. 그럼 그 허세에 비해 실력은 어느정도인지 볼까?"
소녀는 허공에 손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듯 싶더니 순식간에 소년에게로 날아들었다. 날카롭게 압축되어 더이상 바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은 미처 준비가 되지 못했던 소년의 온 몸을 강타했다.
마치 칼날과도 같은 그 공격은 소년의 살을 난도질했다. 살은 찢겨지고 살가죽은 벗겨져 너덜더덜해졌다.
"크윽!"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다. 뮤턴트는 인간을 목표로 공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저 소녀는 소년에게 공격을 가한것이다. 또한 처음 도착했을때 본 경비대원들의 찢겨진 사지또한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았더라면 생길 수 없는 상처였다.
"이 마녀가!"
소년을 안내했던 남자는 권총을 꺼내들어 소녀를 향해 사격했다. 그러나 소녀는 손을 펼쳐 한반 휘두르는 동작만으로 모든 탄환을 튕겨내었다.
"피라미는 저쪽에서 찌그러져 있어!"
그녀가 그렇게 소리치자. 남자의 두 다리는 순식간에 절단되고, 남자의 상반신은 땅에 떨어져 경련했다. 피가 튀어 사방에 흘러 내렸다.
소년의 몸에서는 방금전에 당한 상처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분명히 당하고 말 것이다.
"헤헤,드디어 둘이 되었네? 근데 살짝 공격한건데 많이 다쳤나봐?"
"너, 어떻게 인간을 목표로 공격할수 있는거지? 리미터가 있을텐데."
소녀는 씩 웃었다.
"리미터라고? 그런건 나에게 없어. 예전에 제거해 버렸거든."
소년은 자신이 들고 있는 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목적은 확실했고, 동기또한 확실하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정말 그런가?"
"뭐,뭐라고?"
"정말 인간을 공격할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나? 그럼 왜 한번에 죽이지 못하고 사지만 찢어내는거지? 그리고..."
소년은 도를 천천히 들었다. 도의 끝은 소녀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리미터를 제거한것 치고는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군."
소년은 자세를 급격하게 낮추고 앞으로 돌격했다. 위험을 느낀 소녀가 황급하게 바람을 발사했다. 하지만 바람은 소년의 등이나 허벅지 등만을 지나칠 뿐이었다.
결국 소녀의 앞까지 당도한 소년은 망설이지 핞고 소녀의 복부에 도를 찍러 넣었다.얇고 가는 도신이 소녀의 배를 뚫고 지나갔다.
소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말했다.
"이렇게 사람을 제대로 노리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죽이게 만들어있지도 않으면서. 왜 나의 어머니를 아버지를 죽였나. 왜 나의 여동생을 죽였나. 어째서!"
소년은 도신을 빼들도 다시 복부를 찔렀다. 한번 찔러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때 소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바람을 날렸다. 소년에게 비수같이 날아온 바람은 너무나도 쉽게 소년의 팔을 찢어버렸다.
"크으윽!"
동맥을 지나쳤는지 소년의 팔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도를 잡은 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번을 찔렀을까. 이윽고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손에서 도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소년 또한 그 자리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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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눈을 떴다. 가장 처음 보인것은 의사의 얼굴이었다.
"운이 없네 이 녀석아. 아깝게 못 죽었어."
그건 정말 아깝군. 소년은 생각했다. 그는 오른쪽 팔을 움직여 보였다. 당연하지만 팔뚝 밑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쥐는데 한손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자신의 일부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간단하게 생각했다.
'어렵게 되었군.'
"하지만 아깝게 못 죽은 분이 한분 더 계시지. 누굴까?"
의사의 말을 들으며 소년은 순수인간주의자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 뮤턴트는 리미터를 한계까지 내려서 겨우 사지중 하나를 자를 정도였지 않은가. 제 때 치료를 했다면 살아남는건 물론이고 일부는 잘린 사지를 다시 붙일 수 있을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안된 모양이지만.
의사가 옆으로 비켜서자 또 다른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은...
"뮤턴트가 확실히 월등하긴 한가봐? 배에 구멍이 뚫리고도 안 죽었어."
그 뮤턴트였다. 소년은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했으나 이미 의사가 일어나지도 못하게 자신을 압박해둔 뒤였다. 이럴때만 빈틈이 없다.
"왜 살려뒀지."
"...그건 나도 궁금하군. 나를 왜 살려뒀지?"
소녀도 그렇게 말했다. 헝클어진 금발을 뒤로 틀어올린 그녀는 지난번에 봤을때 보다는 확실히 수척해보였지만 배에 칼을 몇번이나 찔린것 치곤 확실히 멀쩡해보였다. 소년은 다시 한번 잘라진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불공평하군.
"물론 다들 죽이자고 했지. 분노는 둘째치고 아가씨를 살려두면 당신이 밖으로 나가 우리의 위치를 알릴테니까 말이야."
"그런 짓은 안해."
신기하게도 소년은 소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녀라면 다시 돌아와 공격한다는 생각은 해도, 위치를 알려 몰살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뭐...다들 그렇게 생각했다는게 중요한거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을 죽인다면 당신에게 정보를 캐낼 수 없다는걸 일단 알려줬지. 그리고 당신을 죽일 권리는 저기 있는 저 위험한 소년에게 밖에 없다는점도 시사했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따위는 없어. 그러니까 누가 죽였더라도 난 불평하지 않았을거야. 말하자면. 쓸데없는 배려라고 해두고 싶군."
"거 참 도덕적인 청년이군. 가끔 칼들고 나가서 팔 떼먹히는거 말고는 말이지."
"풉"
소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소년은 누워있는 상태에서 소녀를 지긋이 노려봐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런 얘기야. 너는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영웅이고, 그에 대한 예우로 저 소녀를 넘긴 것이지."
"...내가 언제부터 순수인간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지?"
의사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거야 뭐...쇠고집중에 최고의 쇠고집이니까가 아닐까?"
"꺄하하하!"
소년은 다시 소녀를 노려보았다. 이번엔 휘파람.
"...그에 대한 반론은 산만큼 많지만 지금은 좀 기절해야겠군. 내가 깨어났을때는 저 심란한 계집애를 죽이던지 족치던지 어쨌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줘."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말대로 기절했다.
소년에게로 다가온 의사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앞으로는 더욱 잔인한 인생이 되겠지만. 일단은 푹 쉬시길. 영웅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