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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35
우주 속에서 별은 빛난다. 공허한 우주 아래 빛나는 별들만큼이나 많은 외계인들이 있다. 어느 날, 인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화성으로부터 온 화성인들은 인간들을 지배하고 노예로 삼았다.
인류의 문명들이 모두 사라지고, 삶들은 죽음을 향유하는 시절이 찾아왔다. 한 때 부유했던 세계는 파괴되고, 작아진 생존자들은 선조의 위업에 기대 헛된 꿈을 쫓는다.
펼쳐진 황야에 그 생존자들이 있다.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 집들에 깃대어 농작물을 기르고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 젊은 사람들은 드물었다. 모두 도시로 갔다. 한 때 찬란했던 도시가 아니다. 그들의 문명을 파괴한 이들이 새로 세운 도시다.
남은 것은 나이 든 이들과 어린이들 뿐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죽지 않았다.
따뜻한 공기가 지어져가는 건물들 사이를 누빈다. 한 소녀가 그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다리를 들었다. 구멍난 양말과 신발을 벗은 채로 바람을 쐰다. 발가락 사이에 낀 흙알갱이들이 전부 씻겨져 나가는 듯하다. 소녀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평야. 그 너머로 아득히 먼 지평선과 산이 보인다. 나래는 손을 불끈 쥐었다.
목표는 바로 그 사람을 따라잡는 것.
나래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나래야! 내려와!"
나래의 언니인 라실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래는 멀리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날고 싶었다. 새처럼, 전설 속의 용처럼 날고 싶다.
"나래!"
라실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녀는 '헷'하고 혀를 찼다. 고개를 젓다가는 훌쩍 뛰어 라실의 옆에 섰다.
"매일 하늘만 보구 말야."
나래는 머리를 찧는 라실에게 대들었다.
"난 용이 될 거야!"
"또 애처럼 말한다."
"언니는 용이 못 될 걸?"
나래는 몸을 빙글 돌렸다. 혀를 내밀어 라실을 놀린 뒤 그녀의 주먹을 피해 마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녀와 소녀의 언니. 그리고 아이들은 마을에 살았다. 마을은 보통 우난다라라고 불렸다. 비단이 나는 고장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지 않았다. 이젠 황야로 가득한 우난다라에선 이제 비단이 산출되지 않았다.
우난다라의 공식적인 이름은 456구역이었다. 먼 우주로부터 온 외계인들이 그렇게 이름 붙였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우리는 형제이며,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서로 떨어진 것이 수천 년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외계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래된 문명을 파괴하고 세금을 걷었다. 황금 시대는 가고, 한 때 당당했던 인간들은 외계인들에게 짓밟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었다. 옛 문명은 이미 사라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인간들은 외계인들의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고어를 섞은 말을 사용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강해졌다. 우난다라의 아이들은 심지어 고어조차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은 도시로부터 찾아와 토산품과 농작물을 실어가는 상인들이며, 무시무시한 그 금속 무기를 옆에 낀 외계인들을 동경했다.
그들은 기회가 된다면 곧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고,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외계인들의 입바른 소리를 믿었던 시골치기들은 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그 입바른 소리는 계속되었다. 고아원에 사는 나래는 그것을 자주 보았다. 입바른 소리는 하는 것은 주로 뚱뚱한 남자였다. 이름은 김민욱이라고 했다. 그는 자주 고아원에 찾아와 고아들을 골랐다. 원장을 윽박지르고 라실에게 음흉한 시선을 보내기 일쑤였다.
"잘 생각해보라니까."
그는 라실의 허리를 눈으로 흘기며 은밀히 속삭였다. 라실은 그럴 때마다 몸을 빼지도 못한 채 고개를 내리곤 했다. 나래는 그것이 싫었다. 남자와 남자가 데리고다니는 덩치들, 모두들 끔찍했다.
나래는 알 수 있었다. 도시는 끔찍한 곳이다.
그래도 우난다라의 아이들은 도시를 꿈꾼다. 열예닐곱이 된 나이의, 거의 다 자란 소녀와 자라지 않은 소년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도시의 이야기를 했다.
"어제 경기 봤어?"
열 살 남짓한 우구추가 손을 훌쩍 들며 말했다. 그는 외계인들의 '레슬링'이며 가면을 쓴 그들의 영웅을 말했다. 아이들은 깔깔대고 신이 나서 레슬링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많은 라실은 전통적으로 여성스럽다고 말해지는 방법으로 웃었다. 대다수가 남자인 아이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라실에게 레슬링 이야기를 했고, 그 때마다 라실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화를 내야했다.
"누나! 이거 봐! 이거 봐!"
우구추에 질새라 가가반이 일어났다. 어린 나이에도 새치가 있는 소년. 그는 볼록한 배를 내밀고 그가 가졌던 나무가면 마스크를 썼다. 소년들은 깔깔댔고, 둘 가량 되는 작은 소녀도 웃었다.
"얘들아, 조금만 조용히 하자."
가가반은 라실의 새침떠는 말에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망토처럼 이불을 두르고 새가 나는 것처럼 팔을 벌렸다. 아이들은 그의 활주에 깔깔댔다. 라실은 다시 그들을 책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래는 라실과 아이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그녀 역시 레슬링의 팬인 바. 이 상황에서는 질 수 없었다. 마스크는 없었지만 분연히 일어났다. 그녀는 작은 어깨를 당당히 펴고 거대한 외계인 레슬러를 흉내냈다. 입술을 실룩이며 손을 들어 모닥불을 갈랐다.
"짜잔! 빅-마스크 촙이야!"
'오오'하는 외침소리, 소녀들은 깔깔대고 소년들은 나래를 따라했다. 모닥불 아래로 신나게 외침이 울렸다.
"여자애가 점잖치 못하게!"
라실의 소리는 환호성에 묻혔다.
"나는 밤하늘을 가를 거야!"
늘 하던 말이었다. 우구추는 싱글대며 다시 물었다.
"왜요? 나래 대장!"
"당연한 소리를 하다니! 나는 우만 오빠를 따라잡을 거야!"
늘 이 모닥불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낄낄대었다. 우난다라 고아원에 이제 막 도착한 어린아이들은 사정을 모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우만 오빠가 누구야?"
작은 소녀의 말에 나래는 팔을 걷어붙였다. 고아원의 마당을 쓰는 중년 남자처럼 짐짓 짙은 목소리를 깔았다.
"오, 요녀석. 좋은 걸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군. 우만 오빠에 대해 못 들어본 사람?"
"저요!"
작은 소년이 손을 번쩍 치들었다. 수줍은 소년이 옆에서 그 소년을 쿡쿡 찔렀다. 나래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녀의 웃음 때문에 웃었다. 소년의 빨간 얼굴은 더욱 새빨갛게 되었다.
"부끄러워 하지 마! 그래서야 우만 오빠를 따라잡을 수 없어!"
다시 키득거림. 나래는 손을 번쩍 치들어 별을 가르켰다.
"자아, 모두들 저 별을 봐. 반짝반짝하지?"
"네에!"
"우만 오빠는 말야. 저기로 떠났어! 용을 탈 거라고 말야."
"거짓말."
쑥쓰럼을 타던 소년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래는 고개를 돌렸다.
"뭐라 했니?"
"거짓말이잖아요. 누나."
이번에 나선 것은 쑥쓰럼을 타던 소년이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던 소년이었다.
"거짓말?"
"봐요. 난 애지만 그래도 알아요. 우린 외계인들이 다스리고 있어요. 그리고 외계인은 우리가 마을을 떠나는 걸 금지했어요. 허락을 받아 도시로 가는 것 빼고요."
나래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이 당황할 때까지 빛나는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마침내는 자신에게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맞죠?"
"반만 맞아."
나래는 손을 올렸다. 머나먼 별을 가르켰다.
"저 별들을 가로지르는 게 뭔지 아니?"
"은하수요."
"그래. 그리고 저 은하수를 건너면 뭐가 나오는 지는 알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나래는 빙긋 웃고 소년의 손을 들어 별을 가르키게 해주었다.
"은하수를 건너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나와. 외계인들이나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 말야. 우만 오빠는 그곳으로 간 거야. 자유를 찾기 위해서!"
"자유?"
"그래, 자유!"
나래는 힘있게 손을 치들었다.
"저 먼 바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거지. 외계인들은 그게 무서운 거야. 그래서 우리를 붙잡아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거야."
소년들과 소녀들은 조금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는 작은 고개를 힘차게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만 오빠는 저기로 향했단 말야! 나도 언젠가 저리로 갈 거야!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모두가 용을 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나래의 힘찬 말에 소년들은 꿈꾸는 표정을 지었고 소녀들은 킥킥거렸다. 그러나 누군가는 혀를 찼다.
"거짓말. 은하수까지 대체 어떻게 가요?"
"용을 타야지!"
"용?"
나래는 다시 하늘을 가르켰다. 그리고 그 순간 기가 막히게도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용은 검은빛을 하고 있었다. 검은 밤하늘을 가르는 유려한 몸. 그렇기에 그것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연한 몸을 비틀었다가는 공기를 떨게 하며 사방으로 빛을 튀겼다.
빛이 아이들의 얼굴을 가득 비추었다. 용은 그것들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회색 철골에 몸을 기댔다가는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것은 곧 다른 용의 습격을 받았다. 나래는 곧 비상등이 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아원으로부터의 등이었다.
"얘들아!"
늙은 원장이 크게 소리치며 아이들을 불렀다. 넋을 잃고 있었던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라실 역시 긴 치마자락을 올리고 풀밭을 내달렸다. 그럼에도 나래는 가만히 섰다. 큰 눈을 들어 용을 바라보았다.
"나래야!"
그 번쩍번쩍한 빛. 무한한 힘으로 사방을 향해 쏟아지는 빛과 강철 포탄.
용들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나래는 알 수 있었다. 외계인들과, 또다른 외계인. 아마도 영리했던 우만이 말한 '우호적인 존재들'의 싸움일 것이다.
용들은 그들이 우주를 비행하는 방식대로 순간이동을 했다. 다만 이것은 여행이 아닌 전투에 쓰여졌다. 포탄을 뿌리다가는, 그들의 몸으로 적을 들이받고 강판을 사방으로 뿌렸다.
나래는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머리카락이 가린 가는 목을 쓰다듬었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라실은 계속 나래를 바라보며 무어라 외쳤다.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고아원의 지하로, 방공호로 향했다.
그들은 방공호에서 웅크렸다. 그러나 불안은 길지 않았다.
소리와 빛. 침묵이 메꾼 자리를 하나둘 라디오의 치직거리는 소리가 차지해나갔다. 방공호에서 죽은 듯 웅크렸던 아이들은 곧 밤하늘의 번개와도 같은 소음이 사라졌다는 것과 라디오 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 둘 기어나와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은 언제는 어지로웠냐는 듯 맑고 깨끗했다. 어떠한 소음도 없었다. 한참 뒤에 작은 소녀가 나래에게 물었다.
"언니, 저게 용이야?"
"그래."
나래는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떨리는 어깨와 가슴을 자기 손으로 부둥켜 안았다. 두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이 불탔다. 언젠가 저 용을 타고 말 것이다. 우만을 따라잡아야 한다. 소녀는 그 생각으로 몸이 다시금 떨려왔다.
나래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너무나 먼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용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원장의 부름에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설레는 마음을 묻은 채 잠이 들었다.
나래 역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떨림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우만을 생각하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손을 펼쳐 밝은 등 위를 가렸다. 그 빛 아래서 그녀는 용을 생각했다.
용을 생각하다가 그녀는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라실이 혀를 차며 그녀의 발바닥을 때리고 나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오늘은 빨래를 해야 해. 얘."
"헹, 계집애들 일은 안 할 거야!"
라실은 허리를 짚었다. 위험한 의미였다. 나래는 라실의 발바닥 때리기를 피해 일어섰다.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언니! 농담이야!"
"농담 한번만 더 하면 사람 잡을 수도 있겠다. 얘."
라실은 정말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래는 식은땀을 흘리며 라실을 따라나섰다. 꽃병이 놓인 낡은 나무 서랍과 나무문, 온통 나무로 된 물건들만 있었다.
그녀는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빨래줄에 걸린 빨랫감들을 걷었다. 세탁기에서 끝도 없이 많은 세탁물들을 꺼내었다. 그녀는 즐겁다는 듯 콧노래를 불렀다. 나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니, 왜 그렇게 즐거워?"
"응?"
"지금 우리 일하잖아. 근데 매일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일하는 거 좋아해?"
라실은 빙긋 웃었다. 나래의 코를 슬쩍 어루만지며 놀리듯 말했다.
"요 꼬마녀석."
"관둬!"
나래는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늘 그러던 것처럼 여우눈을 한 채 불평을 투덜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래는 라실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그 그늘에 당황했을 때 이미 라실은 고개를 돌린 뒤였다. 나래는 그 그늘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아이들이 오고, 라실은 웃으며 떠드는 그들에게 옷을 나누어주었다. 그래도 나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라실이 무엇이 슬픈 것인지 생각했다.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래는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꼬았다가는 샌달의 끈을 다시 매었다.
"오늘도 용을 찾으러 가는 거야?"
가가반이 물었다.
"응."
늘 하던 일이었다. 나래는 바깥 평야를 산책하는 것이 꿈이었다.
용을 탈 거다.
나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고 용을 다시 분류했다. 용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나래가 아는 것은 세 가지였다. 하늘을 나는 외계인들의 용. 그 외계인들을 적대하는 외계인들의 용, 그리고
달리는 용.
나래는 그 이름을 마음 속에 새기며 미소지었다. 그 용은 무척 드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오랜 옛날 나래의 선조들이 타고 다녔던 용이라고 했다.
"누나! 용 찾길 바랄게!"
"응!"
나래는 손을 흔들어 가가번의 인사에 답했다. 다시 미소지으며 몸을 돌렸다. 용을 찾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그녀는 용을 찾으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꿍꿍이를 가진 채 길을 떠났다.
차가운 평야. 오래 전 전쟁으로 멸망해 부수어진 가도를 지났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원장은 나래가 어릴적 평야에는 귀신들과 강도가 나온다며 겁을 준 일이 있다. 그러나 나래는 알았다. 평야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야는 오히려 안전했다.
나래는 계속 걸었다. 외계인들의 기준으로 한 시간이 걸렸다. 길지는 않으나 결코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나래는 숨이 차올랐다. 땀도 흘렸다. 그러나 나래는 평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나래는 옛날 길들을 따랐다. 사다리꼴 모양으로 무한히 늘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덤불을 지나 축축한 동굴로 들어섰다. 으스스하고 어쩐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동굴. 석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웅덩이에 떨어져 소리를 냈다.
소녀는 그곳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아, 있다."
나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사리손으로 덤불을 헤쳤다.
드러난 것은 하얀 몸체였다. 나래는 그것을 다시 분류했다.
하얀, 달리는 용.
그녀는 용의 아가미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지팡이에 힘을 주었다. 가는 팔목이지만 지팡이가 지렛대 역할을 하여 문을 열 수 있었다. 먼지는 많지 않았다. 기묘한 금속음이 그녀를 반겼다. 용은 아가미를 열어 그의 머리에 그녀가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나래는 아가미 안을 엿보았다. 의자가 하나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버튼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포장을 벗겼다. 그대로였다. 그녀가 한달 전 이것을 발견할 때와 똑같았다.
나래는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용의 뿔을 쥐었다. 그녀는 용을 타는 것을 생각했다. 옛날 가도를 따라 마구 달리다가는, 훌쩍 뛰어서 은하수를 향하는 것이다. 그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우만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래는 하염없이 꿈을 꾸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했다.
좋은 시간은 금새 가는 법이다. 나래는 지긋이 눈을 떴다. 용의 아가미에서 빠져나와 동굴 바깥을 보았다. 빛이 나오질 않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다.
"잘 자."
그녀는 용의 머리를 두드리고 아가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노래를 부르고,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짚으며 흥겹게 어깨를 떨었다. 한 시간 가량 걸리는 귀가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 자유 시간을 생각했다. 아마도 다음주일 것이다. 기다림이 너무 지루했다.
어쩌면 사흘 뒤에 시간이 날 지도 모른다. 원장 아주머니가 바느질이 필요없다고 하시면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용의 뿔을 다시 잡을 수 있다. 나래는 들떴다. 용의 뿔이 사실은 용의 머리 속에 나있다는 것. 용의 아가미를 통해 들어가면 방 같은 것이 나온다는 것을 세상 누가 알겠는가. 고아원의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소녀다운 명랑함에 들떠 고아원으로 향했다. 즐거운 일.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착하였을 때, 그녀는 뜻하지 아니한 것을 보게 되었다.
"왜 이러시요!"
"좀 놔! 이 할망구가!"
원장 선생의 머리를 덩치가 때렸다. 늙은 원장은 힘없이 무너졌다. 나래는 상황을 보았다. 모두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몇몇 소녀들만 창가에 기대서 어쩔 줄을 몰랐다.
김민욱과 두 명의 덩치였다. 외계, 그들이 지구라고 부르는 곳부터 온 멋진 차를 마당에 세운 채 남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울고, 소리를 죽였다. 나래는 악연하여 몸을 숨겼다. 고양감은 사라지고 단지 몸이 떨렸다.
숨을 죽이고 소리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방공호에서 용들의 싸움을 기다리던 것처럼. 나래는 그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기다렸다.
소리가 다 끝나고, 차가 떠나는 묘한 금속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머리를 내밀 수 있었다. 분했다. 또한 머리가 아팠다.
"들어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무력하게 앉았던 원장 할머니는 부끄러움을 잊으려는 듯 화를 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래는 살그머니 걸어들어와 자기 방으로 향했다.
"언니, 무슨 일이야?"
라실은 말이 없었다. 나래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가 정말로 우는 모습을 보았다.
"언니?"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이 오갔다. 나래는 눈물을 글썽이며 라실의 어깨를 붙잡았다. 라실은 그에 허물어졌다. 나래를 감싸고 앉았다.
한참 동안 라실은 울었다. 처음에는 라실을 달래던 나래도, 어쩐지 슬퍼져서 엄마를 따라 우는 아이처럼 울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울음이 잦아들었다. 나래는 겨우 물을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라실은 주저했다. 그러나 결심을 굳히고는 말문을 열었다.
"나, 떠나."
그 말에 나래는 그저 멍청히 앉았다. 이유를 묻자 라실은 대답했다. 김민욱의 명령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사는 우난다라는 외계인들에 의해 지배된다. 외계인들은 모든 외계인들이 다 그들이 지구라 부르는 고향 행성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난다라의 아이들을 도시로 내몰고, 많은 일에 이용했다.
우난다라를 지배하는 외계인. 겉으로 봐서는 별다를 것 없는 남자 역시 그러했다. 나래는 그자가 앞서 고아원을 방문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자는 라실의 허리나 가슴팍,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곤 했다. 나래는 그 의미를 알 정도로 컸다.
그리고, 라실은 그 의미를 말했다.
"내일 정오에 그 사람 집으로 가."
나래는 욕을 하지는 않았다. 라실은 늘 그저 그것을 여자답지 못한 행위라고 했다. 그녀는 대신 주먹을 꾹 쥐었다. 라실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럼?"
"지구야. 거기로 가게 된대."
나래는 무어라 말을 하려 해보았다. 그러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온 말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게 빨리? 무슨 일인데?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소리없는 추궁. 라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떠나자."
"응?"
"떠나버리자. 언니. 이런 데서 뭘 해?"
"하지만 어디로 떠난단 말야?"
"어디든! 그놈들이 없는 데면 다 돼!"
라실은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나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녀가 어리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나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언니, 따라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얘, 무슨 짓이니."
"잔말 말고 따라와!"
"잠깐! 옷도 안 입었는데!"
"잠옷 입었잖아. 속옷도 아닌 걸 뭐."
나래는 얼굴을 붉히는 라실을 이끌었다. 넋이 나간 듯이 보이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신발을 신겼다.
"뭘 하려는 거야?"
"그런 데로 보낼 수는 없어."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실을 옛 문명의 잔해. 사다리꼴 모양의 길로 안내했다.
라실은 샌달을 점검하더니 몸을 떨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래는 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당황하는 라실의 손을 잡고 길의 끝. 오직 그녀만이 아는 장소로 향했다.
그들은 곧 동굴에 도착했다. 석주에서 물이 떨어졌다. 귀신이 나올 것처럼 으스스한 장소였다. 라실은 그것을 말했다.
"귀신은 안 나와. 언니. 더 대단한게 있으니까."
"대단한 것?"
나래는 '대단한 것'을 보여주었다.
라실은 처음에는 그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컸고, 그녀의 인지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래는 라실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라실은 빤히 나래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용을 가르켰다.
"요, 요, 용……."
"괜찮아. 잠들었어."
나래는 지팡이로 용의 아가미를 열었다. 라실에게 내부를 보여주었다. 라실은 너무나 당황했다. 그러나 곧 얼굴에는 희망이 솟았다. 그녀 역시 아직은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거, 이런 대단한 걸 왜 말 안했니?"
"쑥쓰러워서."
나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라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대단한 걸."
"진짜?"
"응, 나래가 최고야."
라실은 나래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래는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헤헤."
라실은 곧 아가미 안을 살폈다.
"이 분, 이 용님은 어떻게 깨우는 거니?"
나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
그 말은 가는 라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직이라고?"
나래는 아직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신이 나서 아가미 안의 버튼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용을 조금이라도 깨우는 방법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라실은 대답이 없었다.
나래는 그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렸다.
"언니? 왜 그래?"
"바보야."
라실은 고개를 돌렸다. 나래는 다급히 용의 머리 안에서 나왔다.
"언니? 어디 가!"
"고아원으로."
"여기 있어! 언니!"
"바보야!"
라실은 고개를 돌렸다. 나래는 흠칫했다. 라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니?"
"바보야! 그건 이미 죽은 거야. 움직이질 않는다구!"
"아냐!"
나래는 새빨간 얼굴로 대답했다.
"아냐! 안 죽었어! 살아있다구!"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어딜 가든 그 사람과 친한 이들 뿐야. 어차피 우린 그냥 노예인 걸."
라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황한 나래에게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동굴 바깥을 나갔다. 나래는 잡지 않았다. 용을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나래는 계속 기다렸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무어라 말하기를, 다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나래는 그녀가 남긴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용이 죽었다고 했다. 뭐가 달라지겠냐고 했다.
"용은 안 죽었단 말야. 언니."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답은 오지 않았다. 나래는 울었다. 슬프고 분했다. 이럴 땐 어찌해야할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해내야지.
우만 오빠가 하던 말이다. 라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그것을 내쳤다. 그러나 나래는 그것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손을 털고 일어났다. 문득 동굴 바깥을 보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용은 죽지 않았어.
그녀는 아가미를 통해 들어갔다. 그녀가 두려워서 이전에는 누르지 못했던 버튼들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어떠한 반응도 없고, 그저 침묵 뿐. 나래는 포기하지 않았다. 중얼거렸다.
"잠꾸러기일 뿐이야."
용은 죽지 않았어.
나래는 다시 버튼들을 눌렀다. 여러가지 난 뿔들이며, 다양한 색깔의 버튼들을 세게도, 약하게도 눌러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래는 손을 늘어트렸다.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용은 죽지 않았어.
대답은 없었다. 나래는 훌쩍거렸다. 아가미 바깥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 햇살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 라실은 떠날 것이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이 갔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라실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도 없는데 대체 정오를 어찌 안담.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앉았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버튼들을 눌렀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절망감, 태어나서 결코 겪지 못했던 절망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용은 죽지 않았어.
"움직여!"
마음 속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외쳤다. 그러나 용은 반응이 없다. 세게 내리치고. 지팡이로 버튼을 벗겨내려 해도 그러했다. 라실의 말대로 용은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부터 계속 잠을 자다가는, 지쳐버린 채 영원히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미약한 금속음을 들었다.
그녀는 눈물섞인 눈동자를 들었다. 금속음을 확인했다.
용은 죽지 않았다.
나래는 머리 안인데도 주변의 경치가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녀의 시각이 아니었다. 용의 시각이었다. 나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입을 헤 벌렸다. 용은 눈을 떴다.
"으그드르그."
예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용의 목소리였다. 나래는 중얼거렸다.
"넌 여자용이었구나."
"이기디 아문, 트르다 아실."
어쩐지 용은 미소짓는 듯 했다. 머리 안에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표정이 있는 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래는 알 수 있었다.
허겁지겁 버튼을 눌러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용이 뒤틀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주저할 틈이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글자들을 선택하는 버튼과, 취소하는 버튼, 고르는 버튼을 알게 되었다. 나래는 깨달았다. 이것은 외계인들이 말하는 컴퓨터와 비슷한 것이다.
시험을 할 틈이 없었다. 나래는 용의 뿔을 잡았다. 앞으로 내밀었다. 시선이 어지럽게 변화했다. 용은 움직였다. 약간의 진동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하자마자 시야가 앞으로 향했다. 나래는 용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세상이 움직인다. 아니, 용이 움직인다. 용이 달리는 것이다. 나래는 끌어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길을 타고 달리던 용은 곧 조금 하늘에 떴다. 용은 공기를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나래는 용의 뿔을 틀었다. 고아원으로 향했다.
걸어서는 한 시간이 걸릴 거리다. 용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수 분이 걸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용의 시야는 너무나도 빨리 바뀌었다. 나래는 슬쩍 옆을 보았다. 고아원이 보였다. 나래는 놀랐다. 수십 초 만에 고아원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 용은 시야를 확대해주었다. 나래는 마당에 세워진 외계의 차와, 라실을 호위하듯 마당 위 계단에 선 덩치들을 보았다. 기름진 배를 흔들거리는 김민욱. 늘 라실 언니를 흘기던 남자 역시 보았다.
나래는 오른쪽의 시야가 확대된 이유를 몰랐다. 용의 눈에 착오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용이 나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는 몰랐다. 확실한 것은 라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 그들이 강제로 끌고가려 한다는 것이다.
나래는 소리를 질렀다. 온 힘을 다해 조종간을 틀었다. 그들을 막아야 했다. 질주하며 차를 향했다. 멀리서 달리는 용. 곧 그 거대한 힘과 소리가 고아원에 모인 이들의 주의를 끌었다.
나래는 그들에게로 달렸다. 고아원의 마당을 질주했다.
단 한 순간. 그 한 순간에 차가 바스리자며 파편을 튀겼다. 나래는 용의 눈이 상할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하지 않았다. 나래는 그녀가 김민욱의 차를 부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대된 시야로 고아원의 아이들이 놀라하는 것이 보였다. 김민욱과 덩치들은 겁에 질리고, 라실인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재었다. 그녀는 곧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속도가 줄며 평야 쪽에서 멈춘 용을 바라보았다.
"나래야!"
나래는 아가미 옆의 버튼을 눌러 아가미를 열었다. 아가미 바깥으로 몸을 열고 외쳤다.
"언니!"
라실은 울었다.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정말이구나!"
"응! 정말야!"
그녀는 달렸다. 나래도 달리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차가 부수어졌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김민욱은 살찐 팔로 라실의 어깨를 잡았다.
"건방진 년!"
그는 덩치를 향해 손짓했다. 덩치들은 주저하지도 않고 나래를 향해 달려왔다. 나래는 일단 아가미의 문을 닫았다. 용은 무한한 힘을 가졌다. 그러나 너무나 힘이 컸다. 라실을 구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그녀가 다칠 수도 있었다.
나래는 용의 눈을 통해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라실을 끌고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대치하는 동안 이미 김민욱은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용을 불렀다.
그의 용은 하늘을 날고, 공간을 갈랐다. 나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용. 붉고 커다랬으며, 또한 강해보였다. 심지어 그것은 공간조차 찢었던 것이다. 나래는 자신의 용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깨달았다.
김민욱은 그녀를 마음껏 비웃었다. 덩치들을 내버려둔 채 라실을 데리고 용의 아가미를 젖혔다. 나래는 당황했다. 어찌해야할 지 두려웠다. 그때 붉은 용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어."
용의 시각을 통해 붉은 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나래는 그것에 기겁했다가는 곳 붉은 용의 머리에 있는 그녀의 언니를 보았다.
"언니!"
김민욱은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흠? 이년이 네 언니인가?"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의 볼을 붙잡았다. 입술을 깨문 라실의 얼굴을 모니터에 들이밀었다.
"더러운 손 치워!"
"싫다면?"
"내 용이 언니를 구할 거야!"
"뭐? 어떻게?"
나래는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붉은 용은 하늘을 날았다. 날개도 없이, 어떠한 빛도 없었다. 다만 기묘한 소리만이 그가 비행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래는 당황했다. 그녀의 용은 그녀가 분류한 대로라면 달리는 용이었다. 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구할 거지?"
"들이받을 거야!"
"소용없어."
김민욱은 기름진 배를 쓰다듬으며 웃음지었다.
"멍청한 꼬마야! 그건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게 아냐! 그건 날 수 없어. 뭐, '존트(Jaunt)'라면 모르겠다만."
"존트?"
나래가 그에 관심을 가지자 김민욱은 희죽 웃었다.
"그래, 존트."
"그게 뭐야?"
"멍청한 우난다라 촌년 같으니. 쉽게 말해, 순간이동 말이다."
"내 용이 그걸 할 수 있단 말야?"
"아니,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뿐이지."
"뭐?"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그는 웃었다.
"사람은 존트를 통해서 우주를 달렸고, 그 때문에 우주는 하나가 될 수 있지. 그리고 너희 선조는 그것에 제법 유능한 종족이었고."
"그럼 나도 할 거야!"
나래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녀는 김민욱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용들의 전쟁에서 이루어지던 순간이동이었다. 우주를 항해하는 방법. 그러나 김민욱은 그녀의 의지를 비웃었다.
"한다고? 네가? 존트를?"
김민욱은 기름진 배를 쳤다.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포탄을 발사하려 조종간을 붙잡았다.
"그만둬요!"
라실이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잡았다. 김민욱은 화를 내며 그녀를 쳤다. 그녀의 비명이 울렸다.
"언니를 괴롭히지 마!"
용의 눈을 통해 이 광경을 보던 나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김민욱은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존트?"
그는 웃었다.
"어디 해 봐."
나래는 포탄을 겨우 피해냈다. 그녀는 붉은 용이 그녀를 내버려둔 채 떠날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러지는 않았다. 빛을 내며 하늘을 자유롭게 운행했다.
안도한 것도 잠시, 나래는 곧 붉은 용이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곧 포탄을 쏟아내었다.
포탄은 용의 배 바로 옆에 가서야 멎었다. 나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몸을 웅크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상황이 짐작이 갔다. 용의 귀 너머로 김민욱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나래는 화면을 눌러 그의 얼굴을 구석으로 치웠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 달리는 용. 그 속도는 생각했던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녀는 평야로 향했다. 붉은 용은 그녀를 따랐다.
나래는 재빨리 전략을 세웠다. 그녀는 평야를 잘 알았다. 그녀가 나고 자랐던 평야. 인적이 드문 평야의 저편에는 절벽이 있다. 그 절벽이 바로 승부처였다.
"계속 즐겁게 해 봐!"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용의 전투는 순간에 결정된다. 그것을 노렸다. 절벽 위로 향하고, 부양한 채로 몸을 비튼다. 그리고 한 순간에 몸을 날았다.
김민욱은 그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공중에 뜬 채 어영부영 움직였다. 나래는 자신의 하얀 용이 그의 붉은 용을 물어뜯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붉은 용은 더욱 붉은 빛을 냈다. 그리고 한 순간 궤적에서 사라졌다. 하얀 용은 표적을 놓치고 평야에서 뒹굴었다.
그것이 바로 존트였다.
나래는 당황해서 몸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용이 뒤흔들렸다. 포탄이 스쳐 그녀를 계속 드러눕게 했다.
"맛이 어떠냐? 이 년아!"
김민욱의 웃음소리. 나래는 그것이 분해서 울었다. 김민욱은 그것을 즐겼다. 움직임을 멈춘 하얀 용을 향해 포탄을 쏘았다. 순간 포탄이 배를 스쳤다. 단 한번도 진동하지 않던 용이 몸을 꿈틀대며 진동을 머리에 전했다. 나래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용의 시야가 조금 붉어졌다. 용은 경고음을 냈다
"넌 존트할 수 없단다. 꼬마야."
"우리 선조들은 했어! 우만 오빠도 했을 거야!"
"우만?"
"그래!"
김민욱은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는 라실에게로 다가갔다.
"놔 줘!"
반항하는 그녀의 뺨을 치고 상자로부터 주사기를 들어 그녀로부터 피를 뽑았다. 나래는 입술을 깨물고 용을 바로했다. 그런 뒤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았다.
김민욱은 기계에 피를 넣었다. 그리고 조금 뒤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오빠가, 우만 순이냐?"
우만과 원장, 나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성이었다. 우만은 늘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자기의 등록된 성을 말하곤 했었다. 나래는 하얗게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쨌단 거야!"
"네 오빠, 죽었는데?"
"거짓말!"
김민욱은 빙글 의자를 돌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는 라실을 가르켰다.
"자아, 저 년이랑 너랑. 여기 고아원의 애들이 모두 한 유전자 풀에서 나온 거란 건 아나?"
"그게 무슨 소리야?"
"고아원의 너희들은 모두 머나먼 친척이라고."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는 아는 이야기였다. 다시 힘을 내어 소리쳤다.
"그게 어쨌단 거야!"
"너희들의 정보가 등록되고, 공유된다는 거지. 그에 따르자면, 우만이란 놈은 1년 전에 죽었어. 산업재해지."
"뭐?"
하늘이 노래지는 듯 했다. 나래는 당황해서 외쳤다.
"사실이 아냐!"
"정말이라니까?"
"오빠는 하늘로 갔어! 네가 말하는 존트도 했을 거야!"
"아암, 하늘로 갔지. 어디 보자, 제법 똑똑했나 봐. 지구에서 로봇을 고치는 엔지니어로 일했군."
나래는 우만이 작은 로봇이며 수학과 공학책을 뒤적이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늘 박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먼 하늘로 간다고, 별들의 이름을 나래에게 알려주었다.
"거짓말!"
김민욱은 웃었다. 어느새 눈물을 흘리는 나래에게 컴퓨터가 출력한 종이조각을 들이밀었다. 나래는 화면을 차지한 그 얼굴을 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빠져 할 수 없었다.
누구도 밤하늘에 닿을 수 없었다. 똑똑한 오빠마저 실패했다. 그녀 역시 사실은 아는 이야기였다. 우만은 도시로 끌려갔을 뿐이었다. 지구인들의 노예가 되어 일하고, 밥을 먹고, 일하고, 죽는다. 나래는 그것을 직시했다.
"계집애가 우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란 말야."
김민욱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소리가 나래의 귀에 너무나 거슬렸다.
절망감. 하지만 완전한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래는 표독스런 눈을 들었다.
"오빠가 안 했다면, 내가 존트하겠어."
"존트, 존트는 오직 발전된 지성만 할 수 있어. 교육받지도 않은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냐?"
"그래!"
"말이 안 통한다니까."
다시 포탄이 날아왔다. 나래의 몸이 흔들렸다. 김민욱은 비웃었고, 라실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 포탄.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거리다가 나래는 찬장 위로 머리를 부딫혔다. 가물해지는 눈. 김민욱의 비웃음.
나래는 고개를 돌렸다. 확대된 시야 너머로 고아원의 아이들이 보였다. 용의 싸움을 지켜보는 아이들, 그들은 두 손을 모았다. 그것은 우만을 바라보던 스스로를 연상시켰다.
나래는 오른쪽의 시야가 확대된 이유를 몰랐다. 용의 눈에 착오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용이 나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는 몰랐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녀를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달릴 거야."
몽롱한 상태로 그녀가 말했다. 김민욱은 포탄을 그녀의 배에 아슬하게 스치게 하며 웃다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쳤다.
"뭐라고?"
"나는 달릴 거야."
"아직도 존트하겠단 소리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붙잡았다. 우만과, 선조들. 우주를 달렸다는 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피. 희석되고 풍파된 가운데서도 흐르는 피를 생각했다.
"용아!"
그 순간, 용은 '존트(Jaunt)'했다.
지구인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그러했다. 우난다라의 말로 말하자면, 그것은 '순간이동'했다.
단숨에 존트. 붉은 용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거대한 소리가 났다. 용의 가장 큰 무기는 이빨이라고 했다. 순간의 속도, 그 이점을 살린 무기로서 가장 적합한 무기. 하얀 용의 이빨은 붉은 용에게 스스로가 지금까지 입었던 것 이상의 피해를 주었다.
김민욱은 그에 당황했다.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그 역시 존트했다. 존트. 다시 존트. 거리를 벌리는 붉은 용. 하얀 용은 그것을 맹추격했다.
존트.
시야는 만화경 안의 세계처럼 변화했다. 조금씩 늘어나는 속도. 빛이 늘어지는 듯 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붉은 용은 하얀 용의 움직임에 놀랐다. 몸을 비틀며 그 역시 존트했다. 공간축을 통해 이어지는 선.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용들은 서로의 배를 노리며 공간축을 오갔다.
"망할 년!"
김민욱은 그녀의 변화에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냉정했다. 자신은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존트는 영원할 수 없다. 그리고 수가 거듭될 수록 지친다.
그는 그 와중에도 미소지었다. 자신은 존트 교육을 받은 능력자였다. 자신의 용량을 알고, 한번에 먼 거리를 여행하는 것이 짧은 거리로 수 번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의 모든 힘을 다했다. 공간축의 뒤흔들림. 존트. 별빛만이 가득한 우주공간으로 존트.
김민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별빛뿐이었다. 그는 빈 공간에서 용을 세웠다. 아마도 행성으로부터 칠만 마일 가까이 멀어졌을 것이다. 456구역에 살던 소녀 따위는 보지도 못했던 공간.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지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고있는 라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승리를 확신하는 동안 나래는 대기층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이 존트를 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어디로 향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라실이 위험할 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나래는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당황하던 그녀는 문득 시각의 오른쪽, 확장된 시야에 생각이 미쳤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확장된 시야. 그러나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닿지 않는다. 그녀는 방향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하좌우. 할 수 있는 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발견되지 않았다.
눈물은 계속 차오른다. 울 것만 같다. 그녀는 손을 만지작거리다가는 은하수를 보았다.
찬란히 빛나는 별의 강. 우만은 그것이 사실은 강이 아니라고 했다. 강만큼이나 빛나는 것은 별들이며, 별들마다 그들만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달릴 수 있다고 했다.
그랬다. 그녀는 달릴 수 있었다.
나래는 눈물을 멈추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라실을 찾을 수 있는지 몰랐다. 다만 시야를 확장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눈 역시 그러한 법. 그녀는 공간축을 보았다. 수학적 아름다움으로 짜여진 빛의 세계.
그녀는 존트했다.
세상을 살폈다. 먼저 우난다라부터, 그의 귀환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확인했다. 세상 끝. 한적한 거리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들. 한숨을 쉬는 공장의 소년들.
그녀는 하늘로, 우주로 고개를 돌렸다. 적란운에 가려진 별빛들 사이 먼지처럼 으깨어진 별의 강들. 우주의 구름들이 빚어내는 빛의 환상곡. 구름들 사이. 암흑으로 가득한 무의 공간을 찾았다.
존트.
존트.
숨이 가빠온다. 존트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자신 역시 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다. 그녀의 힘을 빌어 용의 눈은 우주를 달렸다.
다시 존트. 존트.
존트.
그녀는 붉은 용을 발견했다. 용의 오른쪽 눈. 확장된 시야에 포착된 붉은 용의 모습.
소녀는 가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쩐지 숨이 차다고 느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붉은 용을 찾기 위해 용의 눈을 존트시켰다. 공간을 통해 이어진 수많은 탐색들. 그 짧은 시간에 소모된 체력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용의 눈은 존트하여 그녀를 발견했다. 남은 것은, 다시 달리는 일 뿐. 그녀는 확장된 시야를 다시 인지했다. 이번에는 용의 눈을 통해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축을 직시했다.
존트.
거리를 돌파한다.
존트. 존트
하늘을 가른다.
존트. 존트. 존트.
공기를 가르고, 구름과 전운을 찢고, 찌릿한 하늘 너머로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허공 위에서 허공 사만 마일을 가로질러. 우주로 향하는 용을 향해 다시 존트.
그녀가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부족했다. 갑자기 너무나 피곤하고, 코피가 치솟을 것만 같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언니!"
힘을 다해 김민욱을 밀어내던 라실은 문득 그 목소리를 들었다. 환청인 것만 같다. 그러나 분명하다.
"나래야?"
목소리는 존트한다.
다시 존트.
그리고 다시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존트.
공간축을 뒤흔들며 용은 달린다. 우주 공간 너머로 과열된 엔진을 가열시킨다. 피가 조금 묻은 용의 송곳니는 입자를 뿌리며 불을 이글거린다. 이글거리는 송곳니.
달리며 달구어진 이빨.
하얀 용은 붉은 용을 물어뜯었다.
산산히 부수어지는 붉은 용. 대기에서의 싸움과 달리 소리는 없었다. 우주는 진공이었고. 용 역시 머리와 산소탱크 이외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소리 대신 거대한 충격파가 우주를 뒤흔들었다.
금속냄새를 내는 용의 피가 우주에 뿌려졌다. 부수어지는 조종석. 튀어나오는 라실의 모습. 나래는 그것을 보았다.
존트.
나래는 공간축을 도약했다. 그녀를 하얀 용의 머리로 끌어넣었다. 라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라 나래를 바라보았다.
존트.
"언니."
그들은 우주의 저편에서 나타났다. 라실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놀란 가슴을 앉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동생을 보았다. 소녀는 웃었다.
"용은 죽지 않았어. 용은 달렸어."
"그래."
라실은 기뻐서 울었다. 동시에 미소지었다.
"계속 달릴 거야. 은하수로 향할 거야."
"그래."
나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래는 그것이 기뻤다. 웃으며 물었다.
"같이 갈래? 볼 게 많을 거야! 할 일도 많을 거구!"
라실은 나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래는 그것이 기뻤다. 그녀가 권하는 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피곤한 눈을 잠시 감았다.
용은 우주 안에서 잠들었다. 노곤한 몸을 눕히고 여행의 피로를 견뎌냈다. 그러나 잠은 길지 않았다. 한참 쉬었다가는 기지개를 펴며 별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 가운데 별의 강이 보였다. 용의 형제는 별의 강을 그만큼의 세계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용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별의 강. 그 은하수를 마시고 싶었다.
용은 별의 강을 향해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