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cerator - The Beginning

When a man lies,
He murders some part of the world.
These are the pale deaths,
which men miscall their lives.
-All this I cannot bear to witness any longer-
Cannot the kingdom of salvation
Take me home.

-클리프 버튼, 'To Live Is To Die'


S#1

독일, 베를린 교외의 어딘가 - 1504HRS

'라셀레이터' 라스 에머리히는 교회 안에 들어섰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낡아가다 언젠간 잡초더미로 사라질 오래된 교회였다. 튀지 않고 고해성사를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담의 자손이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늙은 신부는 라스를 덤덤히 맞이했다.

"저는 사람이 죽게 놔두었습니다." 라스는 갈색 선글라스를 벗고 그의 검은 단발머리를 쓸어넘겼다. "여러 사람을요."

"살인을 했군요."

"비겁자들의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서 도움을 구걸하며 죽어가는 것을 모두 무시했습니다. 비겁을 빙자한 평화를 믿고 따랐습니다. 살인자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이 큰 죄 이외의 어느 죄도 짓지 않았다고, 제 심장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대의 죄를 사하겠습니다. 형제여,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십시오."

라스는 잠시 벗어 의자에 걸어두었던 가죽 자켓을 걸치고, 고해실을 빠져나왔다.

라스는 무신론자였다. 도킨스의 책을 성경보다 좋아하고, 하늘 위의 수염달린 노인을 믿느니 날아다니는 스파게티를 믿고 말겠다고 생각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꼬박꼬박 고해성사를 하는 버릇을 갖게 된 것은 대략 1년 전, 방랑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도망 중인 능력자인 그에게, 고해는 매일같이 살인을 하면서도 제정신으로 버티게 해 준 유용한 도구였다.

1년 전- 그가 범아시아 능력자 학원의 학생, MA2011LE  라스 에머리히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S#2

1년 전, 범아시아 능력자 학원, 남쪽 항구

<라스 에머리히, 당장 투항하라! 너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학원섬 헬기의 확성기가 내는 소리는, 엄청난 바람 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때는 7월, 태평양 한 가운데 자리잡은 학원섬 전체가 폭풍에 휩싸이는 때였다. 탈출하기엔 최악의 계절대였지만 라스는 역발상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었다.

"에취, 에에취!"

멈추지 않는 기침 끝에, 라스는 이번 역발상이 그의 인생의 역발상 중 최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달리 치안위원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폭풍 속에서 추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시 반복한다,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헬기 스포트라이트가 그가 숨은 버스 정류장 옆을 비스듬히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곳에 숨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라스는 두 손으로 판초 우의를 잡고, 정류장을 뛰쳐나가 앞에 보이는 주차장 건물로 향했다.

"라스, 멈춰!"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자리에 멈춰선 라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브."

"능력 장학생의 퇴학은 범죄 행위야." '스트라이커' 이브 라브리에는 그의 파란 눈으로 라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사회에 있어선, 커다란 배신이지. 이러지 마, 라스.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도망치지 마."

"이젠 모든게 지긋지긋해." 라스는 소리쳤다. "전부 다! 그 지긋지긋한 뇌파 체크도, 아무 의미없는 오컬트 사냥도, 멍청한 WEL도!"

"이해해," 이브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더러운 독재자들이나 정치인들은 놔두고, 마법사들이나 사냥하러 다니고 있다니... 웃긴 짓이지."

"웃긴 짓이라고? 천만에," 라스는 이브의 손을 쳐냈다. "미친 짓이지! 콩고 일 기억해? 마을 사람들이 죄다 반군에게 처형당하게 생겼는데, 우린 부두교 샤먼을 찾는게 급하다고 무시했었지. 그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냔 말이야! 학원이고, 샤낭이고 뭐고 다 미친 짓이야!"

"하지만, 일단 우리가 견디고 나중에-"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바꾸느니 하는 말 따윈 집어치워." 라스는 이브에게 비아냥댔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믿는 거야? 혹 모르지, 지금 WEL에서 코스튬을 입고 설쳐대는 광대들 중에 너처럼 '견뎌서' 거기까지 올라온 사람이 있을지. 그래서 그 인간들이 뭔가 바꿔 보려고 노력을 해? 아니, 아아니! 다들 그 광대놀음에 빠져서 자기가 영웅인 줄 알고 있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못된 믿음과 가식으로 썩어 문드러져서 말이야."

"라스..."

"난 여길 떠나겠어." 라스는 이브를 밀쳐냈다. "내가 여길 떠나서 뭘 할 수 있을지, 뭘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떠나겠어. 오컬트 사냥꾼이나 코스튬 영웅 따윈 되지 않을 거야. 안녀- 아악!"

등 뒤를 습격당한 라스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내 능력을 잊지는 않았겠지," 이브는 왼손에 낀 증폭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전기 충격'- B급 능력이야. 네가 가진 A급 능력에 비하면 조금 약한 능력이지만... 이렇게 습기가 좀 높은 날은 얘기가 다르지."

"으... 더러운 자식." 라스는 일어나기 위해 바둥대며 소리쳤다. "등 뒤를 쳐!?"

"입 닥쳐!" 이브가 소리쳤다. "내가 A급 능력자인 너를 이기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그게 더러워? 이 세상은 그것보다 더 더러워!"

"뭐가, 뭐가 더럽단 거지?"

"평등하지 못하니까 더럽단 거지." 라스는 운동화 끈을 묶으며 말했다. "난 너희 상급 능력자 패거리가 의무감, 사명감이니 하는 높고 거창한 것들을 생각할 때, 진급학점 채우려고 온갖 책들을 외워야 했어! 나만 그랬는 줄 알아? A급 아래 모든 능력자들이 그 지랄을 해야 했다고!"

"자랑이야?"

이브는 쓰러진 라스를 운동화로 걷어찼다.

"난 오늘 너를 죽일 거야." 이브는 양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일단- 내가, 너를 죽이고- 나면, 내 능력이 A급에 필적한다는 게 증명되겠지? 어쩌면 A급 능력자로 승급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나는 가만히 구경만 할 것 같아?"

"뭐?"

라스는 누운 채로 이브의 오른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브가 비틀대는 동안 일어선 라스는 그의 배에 주먹을 날리고, 면상을 걷어찼다. "나를 죽여? 할 수 있으면 한번 죽여 봐라!"

나가떨어진 이브는 민첩하게 자세를 회복했다. "물주먹에 물발이잖아, 조용히 죽어, 그냥!" 그는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 라스의 아래쪽으로 기어들어가, 증폭 장갑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온몸에 전기 쇼크를 받은 라스는 바들대며 땅 위에 쓰러졌다.

"내가 내 능력을..." 라스는 이를 갈았다. "쓰게 하지 마."

"써 봐, 써 봐!" 이브는 쓰러진 라스를 다시 걷어찼다. "그 잘난 능력으로 어떻게 이걸 빠져나가나 보자!"

라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후회하지 마." 그의 손은 비 속에서 이상한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어, 고작 그거야?" 이브는 비웃었다. "난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소문이 틀린 거였군..."

"소문은 맞아. 틀린 건 너야." 라스는 땅을 박차고 일어나 이브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품 속에서 스위치블레이드를 꺼내 이브의 치안위원 방어복을 가로로 베었다.

"흡-" 이브는 뒷걸음치며 말했다. "칼로는 어림도 없어!"

"천만에," 라스는 스위치블레이드를 도로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베인 곳이 곧 더럽게 뜨거워질 거다."

"그건- 흡-" 이브는 녹아내린 방어복 일부가 살갗을 태우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열화 우라늄탄과 같은 원리지." 라스는 말했다. "칼이 닿는 순간 원자를 분해시켜서, 어떤 물질이든 찢어발기는 거야."

"그래서 '라셀레이터' 였나? 궁금증을 하나 풀었군." 이브가 말했다.

두 사람은 몇분을 계속 맞붙었다. 싸움 끝에 이브의 증폭 장갑은 찢어졌고, 라스의 스위치블레이드는 부러져 버렸다. 이제 둘에게 남은 것은 피칠갑이 된 몸뚱이 뿐이었다.

"흐아압!"

"으아아아!"

두 사람은 달라붙어 서로의 얼굴을 붙잡았다. 라스의 얼굴은 검게 타들어갔고, 이브의 얼굴은 젤리처럼 녹아내렸다.

진 쪽은 이브였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녹아내리는 자기 얼굴을 잡아뜯었다. "얼굴, 내 얼구울-" 그의 손이 가는 곳곳마다, 살점과 털이 잡혀 떨어져내렸다. 떨어진 살점들은 내리는 비에 녹아 하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헉, 헉..."

이브가 쓰러져 기절한 뒤 깨어난 라스는, 죽은 이브의 시체를 뒤로 하고 허겁지겁 항구로 뛰어갔다. 이브가 라스를 찾았다는 보고 없이 단독행동을 한 덕분에 치안위원들은 다른 장소를 수색하는데 바빴다.

<무인 항해 시스템, 작동 중입니다.>

"가까운 곳... 아무데나." 간신히 페리 함교까지 올라온 라스가, 쓰러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즐거운 항해 되십시오.>



S#3

"...난 이런 환자는 처음 봐."

"일단 응급처치는 했지만, 외과로 넘겨야 할지 성형외과로 넘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스는 어느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가운을 입은 의사 둘이 영어로 떠들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웬지모르게 겁먹은 눈빛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홍콩. 나머지는 그냥 병원이라고 해 두지." 백인 의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굉장히... 그,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자네 얼굴이... 좀 많이 손상되었네."

"손상이라구요?"

"그래." 의사는 다른 중국인 의사와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하나를 집어들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걸 회복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말이야, 충격이 클 수도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게."

라스는 의사가 준 거울을 받아들었다. 비친 얼굴에 충격받은 그는 거울을 내던져 버렸다.

"으악, 으아악, 으아아악!!!"

거울에 비친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 끝부터 목덜미까지 숯덩이가 되어 버린 불쌍한 존재일 뿐이었다.

"진정해, 진정해-" 의사는 몸부림치는 라스를 붙잡았다. "여기 구속 끈 좀 가져와!"

라스는 의사를 걷어차고, 환자복 차림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저 사람 잡아!" 의사가 소리쳤다. "기도가 숯덩이가 됐단 말이야, 저렇게 놔뒀다간 죽어!"

라스는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환자들과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해주는 덕분에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타난 경비원이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그런 몸으론 못 나갑니다."

"네가 알 바 아니야!" 라스는 경비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탄 라스는 1층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제발, 제발, 제발제발제발..." 순간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그의 얼굴이 비치자, 그는 욕지거리를 하며 거울을 때려부셨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전 직원에게 알립니다.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은 환자가 병원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방치하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어서...>

라스는 비가 내리고 있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맨발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론가 질주해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끔찍한 몰골로 계속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상에, 이봐요, 그 얼굴은..."

"닥치고 내려!"

"아빠, 나 저 사람 무서워!"

"시끄러워! 입 닥쳐!"

라스는 일가족이 타고 있던 차를 빼앗아, 악셀을 밟았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달리고 싶을 뿐이었다. 달리다 어딘가에 부딪힌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쪽이 더 좋았다. 그저 한방에 끝낼 수 있도록 전속력으로 부딪혀 준다면.

"저런 미친 놈을 봤나!"

"여보, 걱정 마요. 경찰이 알아서 해 줄 거에요."

"그래, 그러겠지. 잠깐- 안 돼- 내 차, 내 차!"

라스의 차는 무리하게 코너를 돌다 가드레일을 부수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사고에 놀란 사람들은 자리에 차를 세우고 내려, 끔찍한 사고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천장 쪽으로 떨어진 차는 강변의 바위 위에 납작히 찌그러져 있었다.

1시간 후 도착한 경찰들은, 가드레일이 남은 절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죽었겠군요. 분명히."

"아니, 모르는 일이야. 헬기 요청해. 저길 내려갈 방법은 그것뿐이야."

"하지만 헬기는 본토에나 있는데... 어느 세월에..."

"어서 부르기나 해!"



S#4

헬기는 본토에서 늑장을 부리며 오지 않았다. 라스의 사고현장은 다음 날 아침까지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채로 방치되었다. 한 요트가 그 옆을 지나가기 전까진.

요트의 뱃머리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하얀 요트의 색과 맞지 않게 고스족들이나 입을만한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붉은 눈으로 계곡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매서운 붉은 눈초리는 다른 사람이 보면 혹 OCD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라스의 사고현장을 몇 초간 유심히 주시한 소녀는, 키를 잡은 노인에게 외쳤다. "슬렛지, 배를 멈춰. 여기 '능력자'가 있어. 냄새가 나."

요트는 차가 추락한 바위 바로 옆에 멈추었다. 소녀는 인간의 행위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높은 점프로, 단숨에 뱃머리에서 차 옆으로 뛰어들었다.

"이능자라고?" 옷만 평상복으로 입었지 나머지는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장신의 노인이, 갑판 위에 서서 말했다. "살아 있나, 죽어 있나, 레일라 양? 그것도 파악 가능한가?"

"뱀파이어에겐 쉬운 일이지. 이 능력자는 살아 있어, 맥슨. 적어도 지금은." 레일라가 차 앞에서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지금만 말이야. 생명이 몸을 떠나가고 있어. 아주 빨리."

"어떻게 할 생각이지?"

"..." 레일라라 불린 뱀파이어 소녀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일단 살려야겠어."

두 사람은 죽어가는 라스를 요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세상에, 내가 능력자를 살려주게 되다니." 맥슨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얼굴이 완전히 불타버렸군. 조직이 벌써 괴사해가고 있어. 어허..."

"그게 무슨 말이지?" 레일라가 물었다.

"이미 송장이 되어가고 있단 말이지." 맥슨이 대답했다. "이 능력자를 살리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란 말이고. 잠깐, 레일-"

맥슨은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레일라는 이미 라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맙소사, 레일라 양- 꼭 이런 상황에 피를 빨아야겠나?" 맥슨은 투덜댔다. "지금 남의 보트에 피를 흘리게 생겼잖나?"

목덜미에서 입을 뗀 레일라가 말했다. "피 때문에 문 게 아니야."

"그렇다면..."

"그래." 레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의 힘을 나누어 준 거야."

순간 쓰러진 라스의 몸에 빠른 변화가 나타났다. "으- 으윽-" 검게 탄 얼굴에 새 살이 돋기 시작했고, 부러진 팔과 다리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회복되었지만, 빠진 머리카락은 그대로였다.

"여기, 여기는... 어디지?" 다시 깨어난 라스는 중얼거렸다. "이봐, 이봐-"

"조용히 해라, '능력자'." 레일라는 라스의 목에 체인소드를 들이댔다. "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한다. 지금,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