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8월 무렵이었던 것 같다. TV나 신문에서 ‘사상 최대 입자가속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중학생인 나에게도 그 이야기는 충분히 관심가는 것이었다.

  “빅뱅을 재현하는 실험을 한다지? 그 과정에서 블랙홀이 생길 지도 모르고……. 그리고 블랙홀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 이해를 친구인 성호에게 확인했다. 성호는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이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았고, 이번 실험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사실이야. 그렇지만 블랙홀 이야기는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어.

  “뭐? 빅뱅? 그게 뭐야?”

  옆에 앉아있던 지연이가 물어왔다. 그녀는 반에서 공부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활발한 캐릭터로 인기가 많았다. 나도 그녀의 털털함을 좋아했다.

  “우주가 처음 탄생할 때, 있었던 대폭발, 그게 빅뱅이지.”

  성호의 설명에 나는 꽃미남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고 첨언했다.

  “근데 거기에서 블랙홀이 탄생한다고? 어째서?”

  지연이가 물었다. 사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기에 성호의 설명을 기다렸다.

  “LHC는 제네바와 프랑스 국경지대에 지하 100m, 깊이 27km에 설치된 사상 최대의 입자가속기야. 독일 에버하르트 칼스대의 화학자 오토 로슬러 교수 등 일부 과학자들은 LHC 실험으로 미니블랙홀이 생성되고 이 블랙홀이 지구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며 유럽인권재판소에 가동중지 소송을 제기했어. 물론 이 실험을 주최하고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즉 CERN은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하고 있어. 미니 블랙홀이 만들어 져도 이내 사라질 거라는 거지.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정말 세계가 멸망해 버릴 지도 모르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성호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이해했는 지는 미지수다.

  “그러니까,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거네.”

  지연이 요점을 콱 집어 말했다. 이럴 때 보면 머리가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래. 결코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려 했던 과학자들의 바벨탑에 의해서 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야. 그렇지 않아?”

  성호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렇네.”

  새로운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나였다. 그녀는 우리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신비스러운 캐릭터로 통하는데, 인형같은 얼굴과, 귀족집 아가씨같은 복장,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는 표정이 그 원인이었다.

  “진짜로 멸망한다면 좋겠는데…….”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일순 분위기가 썰렁해 졌다.

  “그래. 우리 세계멸망 파티를 벌이는 거야. 어때?”

  지연이가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말했다.

  “좋네.”

  미나가 말했다. 그러자 우리로서는 ‘감히’ 미나의 말에는 거부하기 힘들어졌다.

  “그, 그래. 실험이 언제였지? 성호야. 9월…….”

  내가 성호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나 냉철한 성호가 ‘그런 바보같은!’이라고 브레이크를 걸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한국시각으로 9월10일 오후 4시 30분. 좋아. 그날 뒷산에서 모이자.”

  어?! 성호가 그렇게 쉽게 납득해 버리다니. 내가 보기에는 성호도 이번만큼은 미나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 넷의 ‘세계멸망기념카운트다운파티’는 계획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중학생또래들의 다른 시답잖은 화제처럼 ‘세계멸망기념카운트다운파티’에 대한 얘기도 잊혀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때는 냉철하던 성호가 이번에는 꽤 진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나가 관심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결국 나와 지연이도 그들 둘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동안 별 문제없이 지냈다. 연속해서 출현하는 숙제와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듯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내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고 있었다. 내가 ‘세계멸망기념카운트다운파티’라는 바보같은 소동에 딱히 반대를 표하지 않은 이유역시 거기서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

  어쨌든 9월10일이 왔다.

  예년에 배해 아직 더위가 그 기세를 누그러 뜨리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함께 집을 나서는 신혼부부를 봤다.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학교로 가는 골목길에 빨간 색 자동차가 내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치일 뻔 했다. 내 대신 길잃은 까마귀가 시체가 되었다.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몇 점 걸려 있었다. 평소엔 민들레인가 하는 들꽃에 길에 피어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상적인 풍경들을 내일부터는 볼 수 없는 걸까?

  학교에 가니 성호와 지연이는 꽤 흥분된 상태였다. 미나야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다른 학생들은 오늘 있을 실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했다. 교실은 무척이나 후덥지근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지겨운 수업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날보다 더더욱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과연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일상은 오늘로 끝나는 것일까?

  그 답은 오늘 방과 후 4시 30분 밝혀질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어쩌면 우리 생에서, 혹은 지구에서 마지막 수업이 될 것이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 넷은 모였다.

  “준비는 되었겠지?”

  성호는 과장스럽게 말했다.

  “준비는 무슨 준비? 마음의 준비?”

  성호는 내 왼 손목을 쳐다보며 물었다.

  “시계는?”

  그 말에 나는 손목시계를 안 가져 온 것을 떠올렸다. 성호의 손목에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전자시계가 있었다. 지연이와 미나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교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만을 믿고 시계를 차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옆에 있는 성호에게 ‘이봐, 4시 30분까지 몇 분 남았지?’라고 묻고, 그가 ‘5분 전에 지나갔어’라고 대답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시계야 우리가 갖고 있잖아. 카운트다운이야 다 같이 하면 되고.”

  지연이가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그닥 위로는 되지 않았다. 지구멸망은 아마도 우리의 일생에서는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손목시계가 없다는 것은 꽤나 어이가 없는 일이다. 다시한번 생각해 봐도, 역시 손목시계를 안 찬 것은 큰 실수였다.

  “시간이 없어. 앞으로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어서 가자고.”

  내가 시계를 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동안, 성호가 말했다.

  우리가 멸망을 맞이하기로 한 곳은 동네 뒷산이었다. 어째서 산인 지 모르겠다. 외계인이 내려오는 것이어서 산에서 맞이할 것도 아니고, 블랙홀이 생기면 산이든 아니든, 상관없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블랙홀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산에서 지구멸망을 기다리는 게 더 그럴 듯 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거인 듯 하지만, 적어도 그때의 기분은 그랬다.

  학교를 벗어난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묘한 흥분상태가 우리를 휘감고 있었던 게 느껴졌다. 특히 성호는 평소의 냉철함은 어디론가 날려 버리고는 방방 뛰어다녔다. 평소에는 높게만 느껴졌던 야산도 금새 올라갔다.

  “지금 몇 시야?”

  약간 숨을 고르며 물었다. 빌어먹을, 역시 손목시계는 가져 왔어야 하는 건데…….

  “3시 54분.”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미나가 차갑게 말했다.

  “3시54분49초야.”

  성호가 전자시계를 보며 말했다.

  “근데, 그 시계 정확한 거야?”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물론이지. 오늘 아침에 테레비 시계에 맞췄다고. 그리니치 천문대와 0.1초의 오차도 없어.”

  0.1초의 오차도 없다는 것은 못 믿는다 해도, 꽤 정확한 시간이란 것은 사실인 듯 했다. 성호가 하는 일이니, 꼼꼼히 했겠지.

  그리고 우리는 기다렸다. 앞으로 35분 남았다.

  그런데 지연이가 가방 안에서 뭔가 종이 무더기 같은 걸 꺼냈다. 그리고는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샤프가 문제가 있었는지 탁탁 치기 시작했다.

  “지연아 뭐하니?”

  성호가 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다.

  “국어숙제.”

  그녀는 계속 샤프를 조작하는 데 열중하며 대답했다.

  “아이씨, 왜 이렇게 안 되지?”

  그러고 보면 국어 숙제가 있기는 했다. 내일까지. 그러나 우리 중 지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지구는 멸망할 것이기에.

  “이봐, 지연아. 만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국어숙제따위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그야 그렇지. 만약 그렇게 되면 바랄 게 없지. 다만, 정말 지구가 멸망할까?”

  문제는 그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이 지구멸망의 날로 결정되어,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되었지만, 정말 지구가 멸망할 지 어떨 지는 미지수였다. 실제로 CERN의 과학자들은 블랙홀은 금새 사라지고 말 거라고 말했다. 지구 멸망의 우려를 뿌리치고 실험을 감행할 정도라면 그 정도 자신은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야 반칙이야.”

  성호가 말했다. 거기에 지연이가 대답했다.

  “지구가 멸망했을 때, 국어숙제를 했으면 약간 억울하고 말겠지. 그렇지만, 만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국어숙제를 안 했으면? 그럼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점수가 깎일 거 아냐?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국어숙제는 지구가 멸망하든 안 하든 해 두는 게 이익이지.”

  무슨 게임이론같다. 게다가 꽤 논리적이다. 나는 지연이를 다시 봤다. 성호는 약간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흥.”

  미나는 ……. 아무런 관심없이 서쪽 하늘에 걸쳐 져 있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약간 얼이 빠진 듯한 신비스러운 무표정으로.

  “고장났나 봐. 누구, 샤프 좀 빌려 줘.”

  지연이가 말했다. 미나나 성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었기에, 결국 내가 가방에서 샤프를 꺼내 지연이에게 건네줬다. 0.5mm의 검은 색 샤프였다. 작년 봄에 2년간 써 오던 샤프를 잃어버리고 나서 애용하던 물건으로, 여태껏 별다른 말썽도 안 부리고 잘 작동해 왔다. 그 샤프가 내 손에서 지연이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마워.”

  그녀는 국어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옆눈으로 보면서 지연이가 공부는 못 해도 열심히는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도 국어숙제를 하기는 해야 할까? 일단 결과를 보고 나서 하든지 말든지 하면 되겠지. 그런데 시간은?

  “성호야, 지금 몇 시지?”

  “4시 17분 18초.”

  역시 시계를 가져 왔어야 했다. 나는 다시한번 오늘 시계를 차고 오지 않은 데 후회했다.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지연이는 숙제하고, 미나는 져 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

  과연 지구는 멸망할까? 국어숙제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이 달린 심각한 문제다. 제발, 멸망이여. 오라.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창조하고, 통합시킬 멸망이여. 빌어먹을. 역시 손목시계는 차고 다녀야 한다.

  “성호야, 몇 시야?”

  “4시 21분 55초.”

  성호역시 초조한 듯이 손목시계를 연신 보고 있었다.

  앞으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만일 앞으로 9분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성호야, 지연아, 미나.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나는 말을 꺼냈다.

  “나는, 나는 정말이지…….”

  도대체 지구멸망 7분 전에 할 수 있는 말은 뭐가 좋을까?

  “정말이지, 너희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뻐.”

  주변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초록색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거리고, 파란색 하늘은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옆에 있던 미나가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깜짝 놀라 미나를 돌아보았다. 미나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어.”

  그녀의 왼손은 지연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인 거야.”

  미나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넷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원을 만들어, 느꼈다. 시간을. 그리고 세상을.

  “약 3분 남았어.”

  어쩌면 내 인생은 실패였는 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이루기에 14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짧았다. 난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끝난다. 그것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형태로. 블랙홀에 빨려들어 죽는 거다.

  “2분 남았어.”

  손목을 들어 확인하며 성호가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120초만 더.

  “이제, 곧, 모든, 게, 끝나.”

  “1분 30초.”

  내 손이 땀에 젖어가는 게 느껴진다. 성호나 지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만 내 왼손을 잡고 있는 미나만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마치 멸망을 태연히 받아들이려는 듯이.

  “1분 남았어.”

  지상에서 마지막 1분이다.

  “50초.”

  도대체 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40초.”

  제길.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30초.”

  빌어먹을. 세상이 보인다.

  “20초.”

  정말이다. 정말로 20초밖에 남지 않았다.

  “십!”

  우리는 종말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구!”

  모르겠다.

  “팔!”

  그렇지만,

  “칠!”

  어찌 되었든,

  “육!”

  이것으로,

  “오!”

  작별이다.

  “사!”

  안녕.

  “삼!”

  지구여,

  “이!”

  이젠,

  “일!”

  끝이다.

  “땡!”

  순간 성호의 손목시계는 16:30:00이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우리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답이 없었다.

  우리 넷은 곧이어 꽉 쥐었던 손을 풀었다.

  “시계가 늦나?”

  성호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국어숙제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멸망조차 용서받지 못 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시간이 5시쯤을 넘겼다.

  “그래, 블랙홀이 만들어진 직후에 멸망할 리가 없잖아. 블랙홀이 커질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걸 거야.”

  성호가 말했다.

  “그래, 그럴 지도. 그런데, 나 학원가야 돼.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학원엔 가야 하거든.”

  그렇게 말한 것은 지연이었다.

  “성지연, 너 진짜!”

  성호는 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조금 있어 이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끝내고 일상 속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으니까. 국어숙제를 해야했다. 다만 나는 그녀에게 빌려 준 내 물건을 되찾고 싶었다.

  “지연아, 샤프.”

  그제서야 지연이는 내가 빌려 준 샤프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았다. 종종 지연이의 주변에는 물건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야! 성지연! 내 샤프 찾아내.”

  지구가 멸망할 뻔 했던 어느 초가을의 야산이었다.








  결국 다음날 미나를 제외한 우리 셋은 국어 숙제를 해 갔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세계증시는 20년대의 대공황이래의 공황이라 한다. 미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지연이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는 듯 하다. 덤벙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챙겨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걱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진짜로, 순수하게.

  성호는 그날 있었던 일이 인생에서 부정하고 싶은 실수였다는 듯, 한동안 우리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뭐, 지금은 그 사건따위 완전히 잊고 예전처럼 지내고 있지만.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미나는 여전히 내게 수수께끼다. 그녀는 아직도 세계의 종말을 믿고 있는 걸까?

  나역시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날 이후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그저 평범하고 지긋지긋한 일상. 때로는 내 자신에 절망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절망하는 그런 갑갑한 일상.

  아직까지 빅뱅을 만드는 실험에서 블랙홀이 만들어 져 지구가 종말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입자가속기가 가동된 지 며칠 후 고장을 일으켰다 한다. 그렇게 그 실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내게는 그 실험이 틀림없이 종말의 시작이었으리라 확신한다. 우리 안에서 어떤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져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 샤프는 두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