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SF대회
글 수 47
차가운 공기가 부숴진 건물들 사이를 누빈다. 한 소년이 그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다리를 들었다. 구멍난 양말과 신발을 벗은 채로 바람을 쐰다. 발가락 사이에 낀 흙알갱이들이 전부 씻겨져 나가는 듯하다. 소년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고고한 허공 사이로 벌레들이 난다. 소년은 벌레들을 올려다보았다가는 곧 고개를 내렸다. 빈 통조림과 깡통들 사이에 공터가 보인다. 그곳에는 조악한 감자밭이 있다.
옛 문명의 잔해들 사이에 천국처럼 자리잡은 감자밭. 소년은 그로부터 조금 더 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곧 신발을 신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벽을 뛰어 내려가는 그에게 언덕 아래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주림아."
주림은 언덕 아래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의 소년은 키가 작았다. 기밈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기밈은 곧 손을 들어 목을 그어 보였다. 주림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야?"
"두더지가 왔어."
"이맘 때면 늘 오잖아. 또 시시한 옥수수나 늘어놓겠지."
"아냐, 달라. 재밌는게 있어!"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쉰 다음 뒤로 돌아 뛰었다. 주림은 그의 유쾌한 행동에 호기심을 느꼈다. 바로 뛴다. 뜀박질하며 기반이 무너진 빌딩을 지났다. 언덕 위로부터 교묘하게 감추어진 비닐 움막들을 지났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기묘한 생물의 그림이 그려진 문명의 잔해 밑에 그들의 집이 있었다. 빌딩의 지하와 자연의 공터가 만들어낸 거대한 동굴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주림은 곧 문 바깥이 소년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 사이로 척추가 구부러졌지만 키가 큰 남자가 빼곡 모습을 드러냈다. 둘러싼 소년들은 탄성을 지르며 그가 내민 것을 관찰하고 있다.
주림은 소년들 사이를 파고들어갔다. 얼굴을 내밀자 척추가 구부러진 두더지의 모습이 보였다. 상기된 표정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림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더지가 손으로 안은 생물이 보였다. 평생 처음 보는 모습에 주림은 그만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더지는 그 소리에 더욱 놀라 생물을 조금 내렸다가는 다시 들어올렸다.
주림은 그것을 기묘한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온 몸에는 하얀 털이 나 있었고, 주둥아리는 돼지처럼, 그러나 조금 더 날렵하게 튀어나왔다. 눈은 온통 까만 눈동자로 뒤덮여 있어 기묘했다. 쫑긋 솟았다가 내려온 귀가 신기했다. 작은 몸에는 꼬리까지 나온 생물이었다.
"이게 뭔가요?"
앞니가 모두 빠진 아주 어린 아이가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두더지는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답 이전에 낮고 굵은 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동굴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것은 개라고 한단다. 어가문아."
모두가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새치가 돋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개인가요?"
"그래, 그 새끼는 강아지라고 하지. 생긴 것을 보니 아직 강아지구나."
노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 생물은 동굴의 언어로 '강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노인이 바로 이 마을의 유일한 어른이며, 모두를 이끄는 사람이고. 그의 지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쓰다듬어 주기를 좋아하니. 쓰다듬어 주렴."
어가문은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야. 강아지야."
그는 그 소리만을 내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기분 좋은 듯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이내 혀를 내밀어 어가문의 손을 핥았는데. 어린 어가문은 그만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어가문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두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우림과 키는 작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둠밈이었다. 그들은 어가문이 하는 것처럼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그들의 손바닥을 핥자 피식 웃음도 지었다. 주림은 자기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림과 둠밈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둠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헤 벌린 어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노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 개인가 강아지인가 하는 건 어디에 쓸모 있죠?"
"쓸모 없단다."
노인은 그렇게 단언했다.
"아무데도요?"
"아주 옛날에는 달랐지. 도둑을 지키거나 못된 놈들을 쫓아내는데 쓸 수 있었어. 그래, 못된 놈들 말이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둠밈을 쏘아보았다. 주림은 둠밈이 입을 씰룩이는 것을 보았다. 눈치가 그렇게 좋지 않은 주림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둠밈과 우림이 몰래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림이 동생을 대신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그럼 먹어보죠? 맛있어 보이는데."
"안 돼!"
어가문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잠자코 있던 다른 소년들은 어가문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둠밈은 웃지 않았다. 사태를 관망하던 주림과 기밈도 웃지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형."
둠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두더지를 향해 턱을 치들었다.
"얼마야?"
두더지는 늘 그러는 것처럼 말을 심하게 절었다.
"두, 두……."
소년들은 다시 웃었다. 주림 역시 이번에는 재밌어서 웃었다. 그러나 기밈은 웃지 않았다. 노인이 늘 옛 전쟁 때문에 두더지가 그렇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두더지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잠시 얼굴을 붉힌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두, 두 개."
"감자 두 개?"
"느을 하, 하, 하던, 거, 걸로……."
"늘 하던 거라면 감자 두 개인데?"
두밈의 비웃음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높아만 갔다. 결국 노인이 끼어들었다.
"금괴 두 개. 맞소?"
"맞, 맞아요."
두더지는 등에 맨 포대기가 흔들거리도록 환히 웃었다. 아이들은 그 가격에 놀랐다. 그들은 저 금괴라는 것이 정확히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노인이 두더지와 거래를 하는 것을 보아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너무 비싸군."
노인은 눈쌀을 찌푸렸다.
"우린 당장 그게 필요 없소."
"모, 모, 모르, 는, 소, 소리."
두더지는 강아지의 가치를 입증했다. 지구상에 남은 이 생물의 동족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했다. 참다 못해 노인이 물었다.
"그럼 누가 이걸 사기라도 한단 말이오?"
"부, 부자들."
"바다 건너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구만."
"그, 그……."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팔지 않소?"
"바, 바다. 건, 건너기 시, 시, 시간."
"그들까지 가는데에 시간이 걸린다?"
두더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거래를 하는 동안 소년들은 강아지를 가지고 놀았다. 어가문은 제일 어린만큼 제일 신이 났다. 그러나 그는 강아지를 만지지 못했다. 강아지는 우림과 둠밈의 손에 들어갔다.
"강아지라고?"
우림이 코웃음쳤다. 둠밈은 강아지를 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강아지를 어르는 듯이 하늘로 번쩍 들었다. 강아지는 바들바들 떨었다. 소년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흥정을 하던 노인은 문득 둠밈과 우밈이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소년들을 보았다. 잠깐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금괴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사겠소."
노인의 말에 소년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두더지는 말을 더듬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 포대기를 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오토바이의 등자에 걸치고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져갔다.
두더지가 사라진 뒤, 소년들은 노인이 먼 대지를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날카로운 눈은 허공을 쏜다. 아무튼 소년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강아지를 높이 들고 서로 만지려들며 장난을 쳤다.
가장 강아지를 원하던 것은 어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소년들에 밀려 강아지를 만지지 못했다. 소년들은 강아지를 점차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강아지가 울음 비슷한 신음을 냈다. 우림은 소년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강아지를 높이 치들었다.
"돌려줘!"
어린 어가문이 낑낑거리며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나 우림은 꿈쩍하지 않았다. 둠밈은 그를 향해 약을 올리는 말을 몇 번 했다. 소년들은 이내 강아지에서 시선을 돌리고 어가문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어가문은 화가 나서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우림의 팔 끝까지는 닿지 않았다. 어가문은 엉겁결에 우림을 조금 밀치고 말았다. 우림은 아무 말 없이 어가문을 내려다 보았다. 어가문은 화를 내던 것을 그만두고 무서워서 조금 떨었다.
우림이 손을 들었다. 어가문의 뺨이 조금 돌아갔다. 그 타격으로 주저앉은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만 두어라."
생각에 잠겼던 노인은 화를 내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기밈은 곧 얼굴을 돌렸다. 그는 노인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왜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셨어요? 고기라면 말린 거 많잖아요."
"고기로 쓰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요?"
"곧 알게 되겠지."
그는 중얼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강아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누가 돌볼 거냐."
"뭘 돌봐요?"
둠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인은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다들 일이 있으니, 이거 큰일이로군. 누가 자원할 사람 없나?"
소년들은 망설였다. 어가문만이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다른 소년이었다. 그리고 곧 많은 소년들이 손을 들었다. 기밈과 주림 역시 어가문이 손을 드는 것을 보고 같이 손을 들었다.
"그래, 모두 강아지를 돌보길 원한단 말이지. 그런데 주림, 너는 감자밭 위에서 망을 봐야 할 텐데."
"망을 보면서 기를게요."
노인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림과 둠밈이 짜증이 난다는 눈으로 주림을 바라보았다.
"어가문이랑 기밈이 남는군. 그런데 기밈, 넌 공부를 해야지 않나?"
"하루종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하지만 다른 일에 집중할 시간은 없을 거야."
노인은 소년들을 바라본 뒤 말했다.
"어가문이 하는 것이 낫겠군. 슬슬 일을 배워볼 때이기도 하니."
"이건 불공평해요."
손을 들지 않았던 둠밈이 불평했다.
"저 애새끼에게 놀잇감을 던져주면서, 그걸 일이라고요?"
"그렇지 않다. 둠밈."
노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둠밈은 그의 예언하는 듯한 목소리가 싫었다. 몸을 돌리고 눈을 홉뜨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더지가 데려온, 강아지라는 생물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는 그 생물이 바닥에 배설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 큰 웃음이 터졌다. 소년들은 웃고 떠들며 강아지를 괴롭혔다.
"일이 생겼구나 어가문. 그것이 적어도 화장실을 분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노인은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어가문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로 돌아가라."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곧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신들의 자리로 향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어가문은 간단한 청소도구를 가져왔다. 배설물을 치운 뒤 번갈아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강아지야."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은 뒤, 곧 혀로 손바닥을 핥았다. 어가문은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아직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한숨을 쉬고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어가문은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강아지를 꼭 붙들었다.
"강아지야."
그는 앳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계속 강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강아지는 까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황혼이 다가왔다. 소년들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동굴에 모였다. 옛 책들을 뒤적이던 기밈이며, 망을 보던 주림과 감자밭 근처에서 소년들을 감독하던 우림과 둠밈, 그리고 강아지를 돌보던 어린 어가문, 모두가 노인의 앞에 모였다.
"오늘은 토요일이란다. 토요일이 뭔지 아니?"
기밈은 우림과 둠밈의 눈치를 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어가문이 대신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예화를 찬양하는 날이요."
"그래, 위대한 예화의 이름이 빛나는 날이지. 그리고 우림과 둠밈. 다시 한번 내 앞에서 그딴 짓을 했다가는 뼈를 분지르겠다."
"내가 뭘요?"
덩치 큰 우림이 큰 소리를 냈다. 노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애들을 감독하라고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어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
"안 했어요."
"방금 넌 기밈에게 눈짓을 했지."
"그게 뭐 어때서요?"
"잘 들어라. 기밈은 학자가 될 거야. 학자가 뭔지 빈약한 네 뇌로 이해는 할 수 있나?"
소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가 둠밈의 싸늘한 반응에 곧 소리를 죽였다. 우림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바라본 다음 말했다.
"멍청이잖아요."
노인은 지팡이를 들었다. 강한 팔로 우림의 머리를 내려쳤다. 우림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아이들은 우림을 겁내지 않고 웃었다.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팔을 들어라. 우림."
우림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팔을 들었다. 얌전히 벌을 받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아이들이 웃었다. 둠밈은 싸늘한 눈빛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노인은 그를 유심히 보았다가는 곧 시선을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 예화가 세상을 멸할 때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예, 저번에 해주셨어요."
주림은 둠밈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 너희들도 알다시피, 인간들은 예화의 말을 듣지 않았어. 그래서 벌이 내린 거란다."
"벌이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어가문이 눈을 빛냈다. 노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 어느 날인가, 예화께서는 무척 화를 냈다. 인간들의 재악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불이 칠 일간 쏟아져 세상이 불태워졌다. 예화를 믿는 신실한 이들은 하늘로 올라가 그의 우편에 앉았다. 그러나 예화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은 이 땅에 앉아 죽음과 악마들로부터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죄인인 우리들은 그를 경배하고, 그가 주는 형벌을 감내해야 한다."
"헛소리지."
둠밈이 혀를 찼다. 노인은 지팡이로 그의 머리 역시 쳤다. 둠밈은 반항을 하려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은 그가 삐딱한 웃음을 주고 남을 비웃을 때는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그가 비웃음거리가 된 다음부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저런 불경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는 안 돼.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라. 그렇다면 너희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곳은 남녀가 하나가 되며, 모든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우림에게 그만 팔을 내리라고 말했다. 그는 투덜거리며 팔을 내렸다. 동굴 안은 점차 어두워지고, 신이 내리는 불빛. 동굴 안의 하얀 빛은 단숨에 꺼져 곧 사방이 어두워졌다. 잠을 잘 시간이라는 증거였다. 소년들은 곧 흩어져 자기 침소로 향했다.
주림은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가문이 데리고 있을 생물에 마음이 미쳤다. 한참을 뒤척였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곧 마음을 정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 뒤 털신을 신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는 어가문의 침대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다른 인영 둘을 발견했다. 키가 작은 기밈과 아직 어려서 그보다도 작은 어가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뭉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밈은 크게 놀라 몸을 움찔했다. 주림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 낮춰."
"왜 그래?"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살폈다. 그들은 강아지가 자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기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걸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뭐라고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지칭?"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부르냐는 거야."
"나는 모르지. 우리중 글자를 아는 건 할아버지랑 너 뿐이잖아."
주림은 그렇게 속삭이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그 가운데 앉은 흰 생명을 바라보았다. 숨을 쌕쌕거리며 코를 고는 모습. 너무나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이 뛰어놀며 입을 벌릴 것이며, 그 입에서 숨결이 튀어나올 것을 생각하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렇네."
주림은 그렇게 말했다. 한참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주림은 가슴이 일렁인다고 느꼈다. 손을 들어 강아지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잠을 깨우고 말 것이었다.
어가문 역시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제하지 못했다. 그가 단숨에 손을 내미려는 것을 기밈이 제지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주림은 손을 들어 강아지를 쓰다드는 척만 했다. 그는 조금 기다리다가 말 없이 침대로 돌아왔고, 어가문과 기밈 역시 그렇게 했다.
침대에 누운 주림은 그가 느낀 감정을 생각했다. 그렇게 즐겁고 빠질 것 같은 감정이라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강아지라니. 두더지의 말이 옳았다. 금괴 두 개가 아깝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는 잠에서 깼다. 어젯밤 잠을 늦게 자서 그런지 조금 졸렸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오늘도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그는 하고싶은 일을 해야했다.
그는 어가문의 침대로 향했다. 강아지를 쓰다듬고 그 감정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 소망대로 그는 곧 강아지를 만났다. 어가문의 침대 옆에 얌전히 누워 팔로 턱을 괸 강아지를 보았다.
주림은 손을 들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혀를 내밀어 주림의 손을 핥았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소년들과 함께 남들을 놀릴 때 하는 비웃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으로 정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달랐다. 조금 더 고상하고 중요한 무언가였다.
그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도 잊고 강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직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아, 주림."
키가 작은 기밈은 눈을 비볐다.
"잘 안보여서 너인줄 몰랐어. 뭐하는 거야?"
"강아지 쓰다듬어."
주림은 그렇게 말했다. 기밈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주림은 그 웃음이 기꺼웠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기밈은 곧 같이 쭈그리고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둘은 곧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 주림과 기밈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나 시간은 점차 흘렀다. 일을 해야할 시간이다. 노인이나 우림과 둠밈이 일어나게 된다면 큰 곤경에 빠질 것이 틀림 없었다.
"이제 가야지."
주림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못내 마음이 쓸렸다. 다시 가서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털이며 촉감을 기억하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하루종일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남쪽 방향에서 행상인이 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이 사는 다른 곳에서 전령이 오는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마침 그날 아무도 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왔다면,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노인이 안다면 크게 혼을 낼 일이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졌다. 감자밭에서 일을 하는 소년들이 호미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동굴로 돌아가며 장난을 치고, 우림과 둠밈은 그들 뒤에서 이야기를 했다. 주림은 돌아갈 시간임을 알았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그는 소년들이 막 사라진 동굴의 그늘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주림은 어가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기쁜 소리였다.
"여길 봐!"
어가문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강아지가 그의 뒤를 따라 혀를 내밀었다. 소년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 웃었다. 심지어는 덩치 큰 우림마저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둠밈은 못마땅해 하는 기색으로 얼굴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 날밤 주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아지의 빛나는 털이며 그의 사랑스러운 모양새가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걸어서 어가문의 침대로 가려다가 문득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노인의 목소리였다. 누구에게 그렇게 말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주림은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동굴의 구석, 노인의 개인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예화가 내린 성스러운 검은 돌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림은 조금 떨어지며 그가 말하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주림의 침대가 노인의 방에 가까웠고, 주림의 청력이 남달리 좋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그 소리들을 들었다.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조금 벌렸다. 그의 귀에 연결된 검은 돌의 촉수에서 더더욱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주림은 들을 수가 없었다.
"예.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복종하고, 당신들의 명령을 따릅니다."
노인은 침묵한 뒤 말을 이었다.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기술수준은 아직 초기 철기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내리신 죽음과, 당신들이 내리신 천사에게 복종합니다. 진짜 신은 예화이며, 그 외의 참된 신은 없습니다."
주림은 그가 허공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본 적이 없던 노인의 모습이 기괴하고 두려웠다. 마을마다 하나씩 있다는 제사장, 학자들이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신내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검은 돌의 촉수를 귀에서 빼내었다. 깊은 한숨을 쉰 뒤 뒤척였다.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주림은 빠져나왔다. 강아지를 보고 싶은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노인의 알 수 없는 대화에 대해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상념들이 회오리치듯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갔다.
다음 날 그는 일찍 일어났다. 감시탑으로 가기 전, 노인과의 독대를 위해 펜과 종이를 준비하던 기밈에게 가서 물었다.
"기밈, 시간 있어?"
"응,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궁금한게 있어서 그래."
"대체 뭔데? 강아지 이야기야?"
"더 중요한 이야기야."
주림은 눈을 비비는 기밈의 손을 잡았다. 동굴 밖으로 나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혹시 너 신내림에 대해 알아?"
"신내림? 알지. 나는 겪어본 적이 없지만, 생각처럼 무서운 건 아니라고 그랬어. 예화와 대화하는 것이래. 그를 위해 예화는 문자를 일부 사람들에게 허용했고."
주림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어제 말야. 난 할아버지가 신내림에 드는 것을 봤어."
기밈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도 가끔 그가 그러는 것을 봐. 언젠가 어른이 되면 나도 해야 할 일이라고 했어."
"그에 대해 뭐 좀 알아?"
"잘은 몰라. 우리는 예화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하니까. 예화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고하는 거야. 물론 예화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충실한 종과의 대화를 즐기시닌까 말야."
"그래, 복종 말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게 그거야."
주림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자라면 도시로 가게될 거라고 하잖아. 거기서 예화가 정해준 짝을 만나고, 예화의 일꾼으로 거듭난다고 말야. 물론 지금도 우리는 예화의 일꾼이지만. 그리고 물론, 너는 여기 계속 남아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거지만 말야."
"그래. 그게 뭐."
"만약 예화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
"별로, 별 거 없어. 아주 심하면 지옥에 빠트려지겠지. 그러나 적당하면 약간의 교정을 받을 뿐이야. 우림이나 둠밈을 보면 알잖아. 걔들은 매일 노는 걸 좋아하고, 저번에는 여자들 공동체에 갔는데. 그저 이야기만 좀 듣고 말았지."
"그래. 그렇겠지."
주림은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늘 말하는 것처럼 예화가 정말로 참된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비롭고, 모든 것은 올바르다. 어떠한 문제도 없다. 그가 느낀 불안감은 단순한 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소용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으나 아직 껄끄러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
"나도 알고싶어."
주림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하늘 위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우리가 왜 예화를 따라야 하는지도."
기밈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넌 허락받지 않았어."
"그렇지."
주림은 불만어린 표정을 지르려다가는 어가문과 놀고 있는 강아지를 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밈은 그를 향해 미소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림은 곧 감시탑으로 향했다. 먼 평원과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문명이 건재했던 시절, 소돔과 고모라의 시절이라 불리던 때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강아지가 그 때도 사람들에게 그가 알 수 없는 감정을 주었는지 궁금했다.
감시탑에서의 임무는 여전히 평온했다. 행상인은 물론이거니와 접근하는 늑대나 맹수 무리도 없었다. 사실 주림은 태어난 이후 한번도 그러한 것들을 보지 못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기묘한 임무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감시하라니.
황혼이 찾아왔다. 주림은 고독한 임무에서 해방되어 사다리를 탔다. 감시탑 아래로 내려와 동굴로 향했다. 어가문이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고, 아직 흥미를 느끼는 소년 몇몇이 다가와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어가문."
주림이 막 자신도 강아지와 놀려고 했을 때,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강아지가 또 동굴 안에다 배설을 했더구나. 어떻게 된 거냐."
어가문은 어쩔 줄을 몰라 주춤거렸다.
"아직 버릇이 들지 않았으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넌 하루종일 강아지를 돌보잖니. 적어도 노력은 하란 말이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소년들은 어가문을 동정하듯이 감쌌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우림과 둠밈은 배설물을 주제로 농담을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웃으며 강아지를 괴롭혔다.
강아지는 이제 끙끙대고만 있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며 적대감을 표시했다. 둠밈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욕설을 퍼부으며 나섰다. 그러나 어가문이 소리치며 강아지를 감쌌고, 또한 소년들 사이에서도 심하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그날 그는 그냥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의 농담에 감명을 받은 소년들 몇몇이 그와 이야기했다.
"잔인한 새끼들."
기밈이 화를 냈다.
"내가 제사장이 되면, 저런 새끼들은 그냥 쫓아낼 거야. 할아버지가 왜 저 자식들을 그냥 두고 보는지 모르겠다니까."
주림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도 우림과 둠밈, 그리고 소년들의 행동이 지나쳤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어린 치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걔들은 그냥 어린 거야."
"그래? 넌 어떻고. 어가문을 좀 봐. 불쌍하지도 않아?"
주림은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가문이나 우림과 둠밈의 장난에 놀아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가 그랬다. 기밈처럼 생각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튼. 예화가 벌을 내릴 거야. 공정한 예화가 말야."
기밈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까지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밤이 되자 그들은 곤히 잠든 강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는 이내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 다시 강아지를 응시했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 좋았다. 강아지들을 바라볼 때면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흔히 가지기 마련인 활력도 침잠히 가라앉고, 온갖 그리움이며 따뜻한 피가 피부 속에서 꿈틀대곤 했다.
시간은 흐르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뒤척이던 주림은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소란스러운 곳을 향하니 곧 소년들이 무언가를 빙 둘러싼 것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내놔!"
어가문이 씩씩거렸다. 우림이 두 손으로 강아지를 잡고 높이 들었고, 더러워진 강아지는 낑낑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어가문이 손을 들어 강아지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못했다. 소년들은 낄낄거리며 어가문을 비웃었다.
"뭐하는 거야."
주림은 달려가서 그렇게 물었다. 우림의 옆에 섰던 둠밈이 입을 다물고 주림을 노려보았다.
"벌을 주지."
"네가 뭔데."
욱해서 그렇게 말했다가 주림은 배를 얻어맞고 말았다. 소년들은 웃고, 어가문은 울었다. 주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밈이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너무 겁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화가 났다.
다시 한번 둠밈이 배를 쳤다. 순간 주림은 눈 앞이 번쩍했다. 달려가서 다리를 걸고 쓰러졌다. 주먹을 쥐고 둠밈의 뺨을 쳤다. 둠밈과 주림은 동굴의 바닥을 뒹굴고, 아이들의 고함 속에서 치고 받았다.
아이들의 소란을 들은 노인이 달려왔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짐짓 엄한 눈을 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그 소리는 고함 소리 속에서 잔잔히 울렸다. 몇 번 울리자 아이들은 곧 그만두고 물러났고, 주림과 둠밈마저도 싸우던 것을 그만두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노인이 조금 침묵한 뒤 질문했다. 어가문이 울면서 대답했다.
"둠밈이 제 강아지를 뺐어요."
"놀고 있네. 꼬맹이가."
노인은 둠밈이 피가 섞인 침을 뱉는 것을 보고 크게 외쳤다.
"둠밈!"
"그렇게 보지 마요. 다 그 새끼가 잘못한 거니까."
"무슨 말이냐."
"저 개새끼가 내 침대에 오줌을 지렸다고요."
소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둠밈의 침대로 향했다. 둠밈의 말은 사실이었다. 냄새가 풍겼다. 노인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씩씩거리던 주림과 둠밈은 곧 가라앉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소년들은 서로 수근거리고 겁 많은 기밈은 안절부절하다가는 애써 화를 돋구어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한 뒤 말했다.
"어가문, 분명 강아지를 잘 돌보겠다고 했잖니."
"죄송해요."
어가문은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무언가를 돌보기엔 네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구나. 어가문, 앞으로는 강아지에 가까이 하지 말아라."
"네?"
"강아지는 기밈이 맡거라. 확실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것이 네가 배울 일이기도 하니까 말야. 그리고 절대로 어가문이 있는 이 방에 가게 해서는 안 돼. 네 개인실에만 두거라. 산책도 좀 시키고."
기밈은 어리둥절해 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 역시 납득했다. 그러나 어가문은 납득하지 못했다.
"불공평해요!"
"뭐가 불공평하지?"
어가문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은 어가문을 바라보다가는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표시였다. 소년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주림 역시 감시탑에서 상인과 여행자들이 오는 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어가문을 측은하다는 투로 바라본 뒤, 그를 비웃는 둠밈을 노려보았다.
소년들은 주림의 어깨를 치거나 둠밈을 어려워하며 농담을 건네고는 일터로 향했다. 대다수가 감자밭으로 향했지만, 예화에게 바칠 공예품을 깍는 아이들은 동굴에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점심이 되서야 외출을 할 것이었다.
그들은 어가문을 위로하고는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주림은 마지막으로 어가문을 바라본 뒤 일터로 향했다.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에 올라 막막히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시야는 흐려지고, 잠념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맞아서 터진 뺨이 쓰라렸다. 그는 그것을 쓰다듬으며 둠밈에 대해 화를 냈다. 기밈에게 어른인 척 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화가 나고 슬펐다.
괜시리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평야 속에서 살랑이는 밀밭과, 아이들이 움직이는 감자밭을 보았다. 슬슬 수확철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호미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며 감자를 캤다.
해가 저물어가며 황혼이 대지에 드리워졌다. 주림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 날 그는 소년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노인이 싸움을 엄격히 금하고 있긴 했지만, 이 나이대의 소년들은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새끼랑 다시 붙을 거야?"
스그럼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그렇게 물었다. 주림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평소에는 주림과 그냥 인사만 나누는 정도인 그가 이렇게 오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별로.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야."
"그래도 잘 했어. 그 새낀 좀 밥맛이거든."
스그럼은 한참을 떠들었다. 주림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주림은 강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스그럼과 그에 붙은 소년들은 지쳐서 떨어져 나갔고, 주림은 그가 원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기밈의 방으로 향한 다음 강아지를 살폈다. 강아지는 주림의 손을 핥았다. 간지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기묘하게도 처음 느꼈던 신비함이나 즐거움은 사라진 채였다.
그래도 기밈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리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은 여전히 기꺼운 일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날들이 계속되었다. 잠에서 깬 둠밈은 그를 빤히 노려보더니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주림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감시탑을 올랐다. 그는 소년들과 이야기를 조금 주고받았으나, 대다수의 하루를 생각에 잠겨 보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피곤을 느끼지도 않았다.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돌고, 갖은 망상과 상상력이 되어 그의 눈을 찔렀다.
한밤중에 홀로 깨는 날이 많아지면서 그는 자신이 무언가 달라진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별 거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면서도 기밈과 이야기하고, 예화에 대한 찬양이며, 소년들과 관습에 대해 생각할 적이면 전혀 다른 감정이 내면에서 복받치곤 했다.
둠밈과 다툰 뒤로 이주일이 흘렀다. 그날도 주림은 감시탑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화의 말을 따라야 하는 진짜 이유라던지, 그가 크게 된다면, 죽게 된다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는 또한 강아지에 대한 일과 노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밈과 어가문이며 우림과 둠밈 형제에 대한 생각도 치솟았다. 생각들은 쉴 틈도 주지않고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가운데는 즐거움과 평온이 있었다. 주림은 그것이 좋았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그는 감시탑을 내려왔다. 감자밭은 텅빈 채였다. 하지만 감시탑에서 조금 떨어진 옥수수밭은 아이들로 가득했다. 감자를 다 캐낸 아이들은 이제 가을을 기다리며 옥수수밭에서 추수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수확한 뒤 곧 밀을 수확할 것이었다.
주림은 그것을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림에게는 쉬는 날이라는 것이 없었다. 겨울이 오면 이제 밭일을 하던 아이들은 쉬는 일이 많아질 테지만, 주림은 겨울에도 옷을 끌어안고 감시탑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물론 평소보다는 훨씬 적은 시간 동안 있을 테고, 공예품을 만드는 아이들 역시 그 시기에는 자신처럼 일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주림의 일은 그들과는 달리 홀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굴로 향했다. 감시탑에서의 고독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요즘에는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일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좋은 휴식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얇은 나뭇가지들을 바스라트리며 걸었다. 그처럼 감시탑에서 일하는 두 소년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앞서 감시탑에서 한 생각들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정말로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길을 걷다가 그는 문득 옥수수밭을 바라보았다. 일을 마친 아이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며 부지런히 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둠밈과 우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늘상 그렇듯이 오늘도 참다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 일이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뭐해?"
키가 작은 스두반이 물었다. 주림은 고개를 들어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는 곧 몸을 돌렸다. 묘한 불안감이 몸을 감돌았다. 그는 뛰어서 사다리를 올랐다. 그 높은 곳에서 옥수수밭과 감자밭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는 곧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왔다. 동굴 안으로 향했다. 소년들은 두더지에게서 예전에 산 카드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서로 적의 없이 씨름을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서로에게 관심 없는 아이들을 헤쳤고, 그의 얼굴을 아는 소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리나케 달려 어가문을 찾았다.
"어가문 못 봤어?"
평소에는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소년에게 말도 건네고. 대부분을 집에 있는 공예품조와도 이야기를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어가문의 행방을 몰랐다. 주림은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기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도 마찬가지였다.
"기밈이라면 강아지 산책시킨다고 나갔어."
공예품을 아직까지 만지작거리던 소년 하나가 그렇게 일러주었다. 주림은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바로 동굴 밖으로 향했다. 처음 일러준 소년이 말했다.
"나가게? 곧 통금시간인데?"
주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져가는 바깥으로 달렸다. 늦은 여름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며 으슬으슬 떨리게 만들었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뛰었다. 밀짚으로 꼬아 가죽을 덧덴 신발이 발등에 걸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밀밭과 옥수수밭, 감자밭은 이미 둘러본 참이었다. 찾아봐야 소용 없을 것이다. 그는 동굴을 빙 돌아 숲의 언저리를 향했다. 냄새를 맡고 귀를 기울이며 오감을 집중시켰다.
삼십 분 동안 그는 사방을 헤메었다. 부스럭거리며 한참을 찾다가 그는 문득 머리 위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는 빗줄기는 곧 강해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곧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주림은 비를 피해 달렸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한기가 으슬으슬 그의 몸을 파고들어왔다. 달리는 그의 눈에 큰 바위가 보였다. 그는 그 바위 틈으로 기어들어갔다. 틈 사이는 생각보다 넓었다. 집과는 다른 동굴로 이어진 틈이었다.
그는 비를 피하며 옷을 말렸다. 웃옷을 벗은 채로 비오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덩치가 큰 우림의 목소리였다. 주림은 몸을 낮추고 다가가 틈 사이를 엿보았다. 어두운 틈 가운데 불빛이 보였다. 우림과 둠밈이 불빛을 피워놓은 채였다.
"그 늙은 놈은 별 거 아냐."
둠밈은 그렇게 말하며 불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는 무언가 긴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주림은 숨을 죽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둠밈과 우림 옆에 다른 것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기밈이 보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였다. 동시에 눈물자국이 흥건한 어가문이 보였다. 여기저기를 맞아 더러워진 채였다.
주림은 순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 보지 않아도 상황이 뻔했다. 우림과 둠밈이 어가문과 대가 약한 기밈을 괴롭히는 것이다. 달려들어가서 둠밈의 얼굴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덩치가 큰 우림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빨리 돌아가 노인에게 알리는 것이 나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그는 소년들이 둘러앉은 불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비명을 들었다. 낑낑거리는 소리였다. 짧게 짖는 소리. 주림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강아지가 보였다. 둠밈이 그 여린 생명의 목을 궤뚫으려는 참이었다.
주림은 순간 달려들어 둠밈의 허리를 잡고 쓰러졌다. 어리둥절하는 그의 이마에 주먹을 내다꽂았다. 둠밈은 사정없이 내팽겨쳐지며 얼굴을 감쌌다. 주림은 계속 얼굴을 쳤다.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땅에 찧는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우림의 큼직한 주먹에 뒤통수를 맞고 고꾸라졌다. 흙을 뱉으며 일어나자 다시 우림이 다가왔다.
우림이 다시 주림의 얼굴을 쳤다. 주림은 눈이 핑 돈다고 느꼈다. 쓰러진 그에게로 우림이 다가와 발과 주먹으로 마구 쳤다. 주림은 배와 머리를 끌어안고 우림의 공격을 맞았다.
우림은 곧 공격을 그만두고 뒤로 돌았다. 대신 몸을 추스린 둠밈이 다가와 주림의 배를 발로 찼다. 그때 주림은 일어나 둠밈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둠밈은 고함을 질렀고, 곧 우림이 끼어들어 그들은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기밈은 겁에 질려 떨었고, 어가문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강아지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구석에서 떨 따름이었다. 한참동안 둠밈과 우림, 주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싸움을 멈춰야 했다. 굴 바깥에서 큰 소리가 났다. 천둥소리와 비슷하지만 다른 소리였다. 노인이었다. 그가 지팡이로 그들을 때리며 떨어트려 놓았다.
상처 입은 세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떨어져 섰다. 주림은 노인의 콧잔등을 바라보았고, 둠밈은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림은 얼굴을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노인은 찬찬히 동굴 안을 살폈다. 타오르는 불길이 겁에 질린 기밈과 어가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더 돌렸다. 강아지의 모습을 확인한 뒤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조금 기다리다가 말했다.
"돌아가자."
노인은 그들을 모두 일으켰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기밈은 친구를 보고만 있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함께 싸운 세 소년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묵묵히 길을 따랐다. 그들은 그들이 왔던 비오는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두컴컴했으나 소년들은 아직 잠을 자고있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기다리고 있다가 노인이 데려온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이죠?"
용기있는 소년 하나가 물었으나 노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두드려 대답을 대신했다. 모두들 궁금증을 묻어두고 침실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어가문의 품에서 강아지를 빼앗았다. 어가문은 주저했으나 울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침대로 가 눈을 감았다.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림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아픔과 함께 생각들이 머리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아마도 내일이면 노인에 의해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필요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한참 뒤척이다가 그는 문득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노인이 신성한 검은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기괴한 영상이 떠돌고, 뻗어나온 촉수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그는 예화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화……."
노인은 항변하듯 손을 들어올렸다. 주림은 잠시 움찔했다.
"이건 단순히 아이들의 싸움일 뿐입니다."
주림은 그가 자신들에 대한 일을 예화에게 보고한다고 생각했다.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고통 속에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새벽에 눈을 떴다. 몸이 쑤시고 온 몸이 아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걸었다. 그때 그는 문득 둠밈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이 다가와 그들의 어깨를 쥐었다.
"모두들 들어라."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잠에서 깬 소년들을 모아놓았다. 오늘 일은 조금 늦게 시작한다고 말한 뒤 주림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어젯밤, 싸움이 있었다. 주림과 둠밈, 그리고 우림이 싸웠었지. 모두 알다시피 싸움은 금지된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세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어가문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결국 기밈이 나서서 이야기를 했다.
"강아지를 산책 좀 시키려다가……."
그렇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도 오고 해서, 근처에 있는 동굴로 갔어요. 그런데 어가문이 저를 따라오고 있더군요. 강아지를 하도 보고 싶어 하기에 강아지를 가지고 같이 놀았어요. 그런데 둠밈이랑 우림이 나타나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둠밈이 욕설을 내뱉었다. 시비를 건 것은 기밈과 어가문이 먼저라고 했다. 그러나 기밈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둠밈을 무시했다. 둠밈과 우림의 잘못을 공격했다. 그들이 먼저 때렸고, 심지어는 강아지를 구워먹으려 했다고 말했다.
강아지를 먹으려 했다는 말에 어가문이 어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소리쳤다. 절대로 둠밈이나 우림에게 강아지가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곧 우림이 욕설을 내뱉었고. 소년들은 서로 소리를 쳤다. 동굴 안이 시끄러워지자 노인은 근엄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었다. 그의 지팡이가 동굴 바닥을 치자 곧 둔중한 소리가 동굴 아을 가득 울렸다. 소년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둠밈. 어째서 너는 강아지를 먹으려고 했지?"
"애새끼들이……."
거기까지 말한 둠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보고 싶다고 악을 썼다. 평소 같으면 무어라 자신있게 소리칠 우림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게 문제로구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강아지의 등을 잡아올렸다. 어가문은 돌려달라는 듯이 손을 뻗었고 둠밈은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강아지를 노려보았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구경하던 아이들 몇몇이 머리를 긁적이거나 발을 움직일 때까지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가문, 강아지에게 일주일 동안 접근하지 말아라. 큰 잘못이 아니니 큰 죄는 묻지 않겠다."
어가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는 그를 내버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둠밈과 우림, 그리고 주림은 근신이다. 너희는 내가 허락할 때까지 동굴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둠밈이 코웃음을 쳤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한 태도도 결점이 된다는 걸 명심해라."
"그럼 어쩔 건데요?"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하지만 예화가 무언가를 하겠지."
둠밈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근신은 지금부터다. 그러나 너희들을 가두지는 않겠다. 스스로 자제해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남은 소년들은 벌을 받은 소년들을 바라보더니 아침 식사를 하고는 훌쩍 자신의 일터로 떠났다. 어가문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구석으로 돌아갔고, 기밈은 자신의 공부방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둠밈과 우림, 주림은 가만히 앉았다. 서로를 노려보다가 곧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주림은 방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예화는 그것을 그르다고 한다. 하지만 대체 왜 그르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방의 옅은 흙바닥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금 기다리다가 세로로 직선을 그리고, 그 직선에 가로로 다시 직선을 쳤다. 주림은 기다리다가 입을 벌렸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린 도형, 옛날 십자가라고 불렸던 도형을 생각했다. 그는 억울하다. 궁금하다는 감정을 담아 다시 그 도형을 그렸다. 그러자 가슴 속에 남아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멋대로 손가락을 그었다. 더욱 멀리 보고 싶다. 알고 싶다. 알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하고 싶다. 안에서 타오르는 듯한 답답함을 없애고 싶었다. 평화가 안에 깃들기를 원했다. 그러한 감정을 담아 흙바닥에 미친듯이 금을 그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는 뒤로 누웠다. 말과 돼지들, 그리고 몇 개의 도형으로 된 그림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는 그것을 생각했다. 분명히 그림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랐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긴 했고, 무척 조악하긴 했지만 분명 그것은 문자였다.
주림은 잠시 멍했다가 예화가 금지한 일을 했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문자를 소유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아이들끼리 싸우는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죄악. 노인의 말대로라면 악마의 수작이다.
예화는 모든 것을 지켜본다. 분명 그는 자신이 이러한 금기를 범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주림은 물러나서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동굴 위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벼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움켜잡고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가 궁금했다. 주림은 기다렸다가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세로로 긋고, 다시 가로로 그었다.
"왜?"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굴 안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예화가 정말 존재하고, 그가 진짜 신이라면 어째서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은 것인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예화는 그가 참회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은 생각에 잠길 수도. 그러나 어쩌면…… 예화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이 없거나, 예화가 진짜 신이 아니거나.
"주림아."
그는 방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하여 흙바닥을 헤쳤다. 바닥에 새겨진 기호는 모래에 덮여 사라졌다. 그는 발을 거기에 댄 채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기밈이었다.
"무슨 일 있어? 뭘 숨겨?"
"아냐. 아무 것도. 공부할 시간 아냐? 왜 왔어?"
"이것 봐."
기밈은 의문을 가지지 않고 웃었다. 가죽옷으로 가려진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림은 그제서야 기밈의 앞이 부풀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푼 품 속에서 강아지가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강아지는 기쁘다는 듯이 작게 짖었다. 기밈은 콧잔등을 살짝 쓰다듬어 짖지 못하도록 한 뒤에 그것을 주림에게 내밀었다. 주림은 얼굴에 미소를 띄며 그가 건네는 생명을 받았다.
품 안에 넣자 너무나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하고 섬세한 기분. 아까까지 생각했던 의문이며 두려움은 아직 내면에 있었지만, 강아지가 전해주는 온기가 그것들을 덮고 기쁨을 전해주었다.
"네가 심심해 할까봐."
기밈은 그렇게 말했다.
"네가 심심한게 아니고?"
주림은 그렇게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그렇게 떠들며 강아지를 가지고 놀았다. 주림은 계속 기쁘게 웃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일들에 생각이 미쳤다.
"너무 논 것 아냐? 공부방으로 돌아가야겠어."
"그래야지. 슬슬 할아버지가 산책을 돌 시간이니까."
기밈은 품 속에 강아지를 넣고 다시 가죽옷을 여몄다. 주림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어가문은? 걔도 강아지 보여줘. 걔가 제일 좋아하잖아."
"어가문은 안 돼."
"왜?"
"너무 어리잖아. 뭘 숨길 줄을 몰라. 내가 강아지를 보여줬다는 걸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주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밈은 이미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약간의 위험을 감수했다. 더한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밈은 곧 사라졌다. 주림은 그 자리에 혼자 남아 그가 생각한 것이며 문자들을 연습했다. 그러한 일들을 하며 강아지를 기억하자 외롭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들과 식사를 할 때, 공예를 만들던 아이들이 힘을 내라며 격려를 건넸다. 그는 그것에 대응하며 주위를 보았다. 어가문은 거의 울듯한 표정이 되었고, 둠밈은 입을 다문 채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림은 동생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도중에 그 때 다시 일이 일어났다. 기밈이 어가문을 보더니 슬쩍 강아지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이들중 누군가가 그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강아지들을 아이들에게 보였다. 둠밈이 불쾌한 듯이 혀를 찼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밈이 강아지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앉아."
그 말대로 강아지는 앉았다. 소년들은 탄성을 질렀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기밈은 대소변은 이미 가릴 줄 알지만 여러 가지 재주는 아직 익히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였으나 대부분 그것으로 만족했다. 앉고 일어서라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즐거워하는 아이들 중 어가문이 있었다. 기밈은 그를 보며 웃었다. 주림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식사가 끝나고, 주림은 다시 문자 연습과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신경을 쓰자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었다. 감시탑에서 혼자 있었던 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그는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하루가 흘렀다. 어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어가문은 보다 나이 많은 소년들이 버린 나무 장난감이며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혼자 놀았다. 그러다가 기밈이 식사 시간에 데리고 오는 강아지에 거의 홀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주림마저도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강아지를 쓰다듬지 못하는 어가문은 이제 강아지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대신 갈망하는 눈빛을 이글거리며 굳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점심 식사를 할 때 주림은 둠밈이 이를 갈며 책상을 치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불공평해!"
어가문이었다. 모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기밈에게로 달려들었다. 뒹굴며 묘기를 보이던 강아지를 빼앗기 위해 작은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닿지 못했다. 큰 소리가 났다. 둠밈이 어가문을 쳤다. 어가문은 떨어져 울었다. 기밈이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나 둠밈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깟 개새끼가 뭐라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어가문은 계속 울었다. 울다가 기밈이 윽박지르자 울음을 그쳤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주림은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갇혀있게 된다면 둠밈이 더는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인은 그들의 처벌이 오늘로 모두 풀렸다고 말했다. 그들은 곧 일로 복귀하고 예전과 변함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강아지의 존재뿐이었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쓰다듬게 뒨 뒤로 더욱 행복해 했다. 여전히 하루종일 데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기밈이 훈련시킨 이후로 더욱 강아지를 아꼈다.
감시탑 위에서 주림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느낀 모든 것과 강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근신을 받은 이후로 둠밈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모든 것을 비웃거나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주림은 그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강아지가 앓는 일이 생긴 것이다. 강아지는 이제 재주를 부리거나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짖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런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림 역시 그러했다. 감시탑의 임무를 일찍 끝낸 뒤 그가 동굴 안을 향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주림은 그날 문자를 연습할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빨리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연습할 공간을 찾기 위해 동굴 뒤로 향했다. 그때 그는 어떠한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바로 둠밈이었다. 그가 강아지 가까이에 붙은 것을 알았다. 우림이 불안한 표정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둠밈이 무언가 기묘한 것을 강아지에게 억지로 먹이고 있었다. 주림은 다가가 바로 둠밈의 머리를 쳤다. 우림이 둠밈과 함께 주림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서로 사정없이 때렸다. 뺨에는 상처가 나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오래 싸우지는 못했다. 어가문이 강아지를 찾으러 왔다가는 그들을 보았고, 그의 고함을 들은 노인이 금새 찾아왔다.
노인은 놀라운 힘으로 그들을 떼어놓았다. 천둥 같은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근신을 명한 뒤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주림은 너무나 분해서 소리쳤다.
"저자식들이 강아지를 괴롭혔다고요. 죽이려고 했어요."
"그냥 먹이를 준 거야. 병신아."
둠밈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노인은 그것이 근방에 나는 약한 독초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다. 그는 고함을 치고 둠밈에게 화를 쏟아내었다. 그러나 둠밈은 동요하지 않았다. 덩치가 큰 우림이 고개를 숙인 동안 당당히 말했다.
둠밈은 그를 비웃었다. 노인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둠밈의 뺨을 쳤다. 둠밈은 쓰러져 이를 갈았다.
노인은 그들을 데리고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동굴 바깥에 세운 뒤 자신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주림은 그가 검은 돌에서 신내림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나와서 엄숙히 섰다.
"예화께서는 이번 일에 무척 실망하셨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는 강아지를 들어보였다. 그 작은 생명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년들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노인은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예화는 둠밈과 우림이 이미 충분히 컸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연옥으로 가서 교화를 받은 뒤에 먼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둠밈은 반론했다. 자신은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 강아지는요?"
"어가문아."
노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강아지는 천국으로 보내질 거야.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 거란다. 이해할 수 있겠니?"
"그럼 둠밈이랑 같이 갈 거 아니에요. 강아지가 싫어할 거에요."
"천국은 넓단다."
어가문은 이해하지 못한 듯이 잠시 섰다. 순간 깨달음이 그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어린 그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빨갛게 부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들의 고함과 부정한 소리가 그를 도왔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이 모인 마당의 나무에게로 번개가 쳤다. 번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굉음. 그것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늘에 계신 신의 명령이다."
노인은 엄숙한, 그러나 침울한 태도로 말했다. 멍하니 선 아이들 속에서 주림은 몸을 돌렸다. 그는 자리를 조용히 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이들의 싸움일 뿐이다. 예화는 어째서 그러한 일들을 내린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모든 것이 금기인지. 심지어 싸움조차도, 그는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강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아이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억눌렀다. 강아지는 곁을 떠날 것이다. 너무 많은 문제를 저질렀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예화, 하늘에 있는 위대한 신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밤, 그는 처음으로 예화의 사자를 보았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었다. 은은한 달로부터 내려와 노인이 건네주는 강아지를 받아갔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별이 빛났다. 짐을 싼 우림과 둠밈은 그 별을 따라 함께 떠났다.
아이들은 강아지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처음으로 본 예화의 사자와 그 예쁜 빛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동시에 둠밈과 우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그것이 부럽다고들 했다. 주림은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방에서 그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실망한 어가문과 기밈의 표정. 날카롭게 사자를 바라보던 둠밈의 시선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리둥절해 하던 우림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들 사이에서 건네지던 강아지. 그 빛나는 생명을 생각했다. 그를 쓰다듬던 일이며 그를 옆에 두고 기밈과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의 일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무심한 추억이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손을 들었다. 낮은 흙바닥에 기호를 썼다. 논리적이지 못한 기호들이 흙에 상처를 남겼다. 문자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형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동안 자신의 기호를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홀로 주림을 바라보며 천천히 섰다. 그 주름진 눈매는 마치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왜!"
주림은 말이 막혀서 잠시 쉬었다. 그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우리에게 강아지를 주신 거에요? 처음부터 그 예화에게 바치시지 그랬어요."
그는 악에 받혀 소리쳤다.
"신은 영원하지. 우리는 영원하지 않단다."
노인은 목소리를 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주림은 그가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종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고 해서, 네가 느낀 사랑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사랑이요?"
주림은 놀라며 되물었다. 노인은 말했다.
"네가 강아지를 보면서 느낀 것 말이다. 신이 이 세상을 통치하기 전에, 세상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았단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 네가 강아지를 보면서 느낀 것. 네가 기밈이나 어가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그 종류 중 하나야. 조금 더 크게 되면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도 알게 될 거다. 나는…… 그러한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끝이 나서."
"끝이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돼."
"왜 그런데요?"
"신의 뜻이란다."
노인은 단언했다. 주림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이든 뭐라든, 와 보라죠. 때려줄 테니까."
"그래도 끝은 와."
"그렇다면 늦출 거에요. 그렇게 할 거에요."
주림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반드시 그렇게 하거라."
노인은 쓰게 웃었다. 주림은 그의 눈을 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주림은 아직 축축히 젖은 눈을 들었다.
"저도 알고 싶어요."
"무엇을 말이냐?"
"예화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말이에요."
"예화는 신이며, 인간은 그에 순종해야 한다. 복종하고 멸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어요. 전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알고 싶어요."
노인은 잠시 기다렸다. 묵묵히 주림이 그린 기호들을 바라보았다. 짧게 탄식했다.
"기밈처럼 너도 배우고 싶단 말이냐?"
그는 손을 들어보였다.
"나는 가르쳐줄 수 없다. 신이 금지했다."
주림은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실망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눈이었다. 그것은 다만 갈구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은 그의 눈과 그의 눈에 담긴 지성을 보았다.
노인은 말없이 손짓을 했다.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동굴의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주림은 그 안에서 노인이 책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표지를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책이었다. 주림은 경이 속에서 그것을 받았다.
"힘든 일일 거다. 너는 이미 나이를 먹었고, 나는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어."
"괜찮아요."
노인은 미소를 띈 채 떠났다. 주림은 그제서야 그가 지금껏 알지 못한 문자로 적힌 문법책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공터에 자리잡았다.
주림은 가만히 앉았다. 기밈과 할아버지가 읽던 책을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읽었다.
유한한 시간은 흐르고, 시간 속에서 지성이 움텄다. 그는 땅바닥에 손을 댔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톱 사이로 흙알갱이들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주림.
그는 곧 아래에 다른 문자를 썼다.
강아지.
그는 문법책을 뒤적였다. 조금 생각한 뒤. 완전한 문장을 만들었다.
주림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그는 기다린다.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강아지를, 그를 쓰다듬던 일이며, 그와 같이 뛰던 일을 기억했다. 기억 속에서 친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어린 어가문이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며 기밈이 그것을 놀리는 일들이 생생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침묵한 뒤 빛나는 눈을 떴다. 땅바닥을 응시하고 생각한 것들을 썼다.
주위는 조용하다. 멀리 벌레들이 나는 소리며, 앙상한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소리 뿐이었다. 그 정적 가운데 작은 소리가 울린다. 소년이 손을 움직이는 작은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바람에 사그라들고, 곧 사라진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고고한 허공 사이로 벌레들이 난다. 소년은 벌레들을 올려다보았다가는 곧 고개를 내렸다. 빈 통조림과 깡통들 사이에 공터가 보인다. 그곳에는 조악한 감자밭이 있다.
옛 문명의 잔해들 사이에 천국처럼 자리잡은 감자밭. 소년은 그로부터 조금 더 옆으로 시선을 돌린다. 곧 신발을 신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벽을 뛰어 내려가는 그에게 언덕 아래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주림아."
주림은 언덕 아래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의 소년은 키가 작았다. 기밈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기밈은 곧 손을 들어 목을 그어 보였다. 주림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야?"
"두더지가 왔어."
"이맘 때면 늘 오잖아. 또 시시한 옥수수나 늘어놓겠지."
"아냐, 달라. 재밌는게 있어!"
그는 크게 숨을 몰아쉰 다음 뒤로 돌아 뛰었다. 주림은 그의 유쾌한 행동에 호기심을 느꼈다. 바로 뛴다. 뜀박질하며 기반이 무너진 빌딩을 지났다. 언덕 위로부터 교묘하게 감추어진 비닐 움막들을 지났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기묘한 생물의 그림이 그려진 문명의 잔해 밑에 그들의 집이 있었다. 빌딩의 지하와 자연의 공터가 만들어낸 거대한 동굴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던 주림은 곧 문 바깥이 소년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 사이로 척추가 구부러졌지만 키가 큰 남자가 빼곡 모습을 드러냈다. 둘러싼 소년들은 탄성을 지르며 그가 내민 것을 관찰하고 있다.
주림은 소년들 사이를 파고들어갔다. 얼굴을 내밀자 척추가 구부러진 두더지의 모습이 보였다. 상기된 표정으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림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더지가 손으로 안은 생물이 보였다. 평생 처음 보는 모습에 주림은 그만 놀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더지는 그 소리에 더욱 놀라 생물을 조금 내렸다가는 다시 들어올렸다.
주림은 그것을 기묘한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온 몸에는 하얀 털이 나 있었고, 주둥아리는 돼지처럼, 그러나 조금 더 날렵하게 튀어나왔다. 눈은 온통 까만 눈동자로 뒤덮여 있어 기묘했다. 쫑긋 솟았다가 내려온 귀가 신기했다. 작은 몸에는 꼬리까지 나온 생물이었다.
"이게 뭔가요?"
앞니가 모두 빠진 아주 어린 아이가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두더지는 입을 열어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답 이전에 낮고 굵은 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동굴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것은 개라고 한단다. 어가문아."
모두가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새치가 돋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개인가요?"
"그래, 그 새끼는 강아지라고 하지. 생긴 것을 보니 아직 강아지구나."
노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 생물은 동굴의 언어로 '강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노인이 바로 이 마을의 유일한 어른이며, 모두를 이끄는 사람이고. 그의 지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쓰다듬어 주기를 좋아하니. 쓰다듬어 주렴."
어가문은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야. 강아지야."
그는 그 소리만을 내며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기분 좋은 듯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이내 혀를 내밀어 어가문의 손을 핥았는데. 어린 어가문은 그만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어가문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두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우림과 키는 작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둠밈이었다. 그들은 어가문이 하는 것처럼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가 혀를 내밀어 그들의 손바닥을 핥자 피식 웃음도 지었다. 주림은 자기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림과 둠밈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둠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헤 벌린 어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노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 개인가 강아지인가 하는 건 어디에 쓸모 있죠?"
"쓸모 없단다."
노인은 그렇게 단언했다.
"아무데도요?"
"아주 옛날에는 달랐지. 도둑을 지키거나 못된 놈들을 쫓아내는데 쓸 수 있었어. 그래, 못된 놈들 말이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둠밈을 쏘아보았다. 주림은 둠밈이 입을 씰룩이는 것을 보았다. 눈치가 그렇게 좋지 않은 주림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둠밈과 우림이 몰래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림이 동생을 대신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그럼 먹어보죠? 맛있어 보이는데."
"안 돼!"
어가문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잠자코 있던 다른 소년들은 어가문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둠밈은 웃지 않았다. 사태를 관망하던 주림과 기밈도 웃지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형."
둠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두더지를 향해 턱을 치들었다.
"얼마야?"
두더지는 늘 그러는 것처럼 말을 심하게 절었다.
"두, 두……."
소년들은 다시 웃었다. 주림 역시 이번에는 재밌어서 웃었다. 그러나 기밈은 웃지 않았다. 노인이 늘 옛 전쟁 때문에 두더지가 그렇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나 두더지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잠시 얼굴을 붉힌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두, 두 개."
"감자 두 개?"
"느을 하, 하, 하던, 거, 걸로……."
"늘 하던 거라면 감자 두 개인데?"
두밈의 비웃음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높아만 갔다. 결국 노인이 끼어들었다.
"금괴 두 개. 맞소?"
"맞, 맞아요."
두더지는 등에 맨 포대기가 흔들거리도록 환히 웃었다. 아이들은 그 가격에 놀랐다. 그들은 저 금괴라는 것이 정확히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노인이 두더지와 거래를 하는 것을 보아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너무 비싸군."
노인은 눈쌀을 찌푸렸다.
"우린 당장 그게 필요 없소."
"모, 모, 모르, 는, 소, 소리."
두더지는 강아지의 가치를 입증했다. 지구상에 남은 이 생물의 동족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했다. 참다 못해 노인이 물었다.
"그럼 누가 이걸 사기라도 한단 말이오?"
"부, 부자들."
"바다 건너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구만."
"그, 그……."
"그렇다면 왜 그들에게 팔지 않소?"
"바, 바다. 건, 건너기 시, 시, 시간."
"그들까지 가는데에 시간이 걸린다?"
두더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거래를 하는 동안 소년들은 강아지를 가지고 놀았다. 어가문은 제일 어린만큼 제일 신이 났다. 그러나 그는 강아지를 만지지 못했다. 강아지는 우림과 둠밈의 손에 들어갔다.
"강아지라고?"
우림이 코웃음쳤다. 둠밈은 강아지를 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강아지를 어르는 듯이 하늘로 번쩍 들었다. 강아지는 바들바들 떨었다. 소년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흥정을 하던 노인은 문득 둠밈과 우밈이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소년들을 보았다. 잠깐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금괴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사겠소."
노인의 말에 소년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두더지는 말을 더듬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 포대기를 들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발을 오토바이의 등자에 걸치고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져갔다.
두더지가 사라진 뒤, 소년들은 노인이 먼 대지를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날카로운 눈은 허공을 쏜다. 아무튼 소년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강아지를 높이 들고 서로 만지려들며 장난을 쳤다.
가장 강아지를 원하던 것은 어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소년들에 밀려 강아지를 만지지 못했다. 소년들은 강아지를 점차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강아지가 울음 비슷한 신음을 냈다. 우림은 소년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강아지를 높이 치들었다.
"돌려줘!"
어린 어가문이 낑낑거리며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나 우림은 꿈쩍하지 않았다. 둠밈은 그를 향해 약을 올리는 말을 몇 번 했다. 소년들은 이내 강아지에서 시선을 돌리고 어가문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어가문은 화가 나서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우림의 팔 끝까지는 닿지 않았다. 어가문은 엉겁결에 우림을 조금 밀치고 말았다. 우림은 아무 말 없이 어가문을 내려다 보았다. 어가문은 화를 내던 것을 그만두고 무서워서 조금 떨었다.
우림이 손을 들었다. 어가문의 뺨이 조금 돌아갔다. 그 타격으로 주저앉은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만 두어라."
생각에 잠겼던 노인은 화를 내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기밈은 곧 얼굴을 돌렸다. 그는 노인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왜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셨어요? 고기라면 말린 거 많잖아요."
"고기로 쓰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요?"
"곧 알게 되겠지."
그는 중얼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강아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누가 돌볼 거냐."
"뭘 돌봐요?"
둠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인은 대꾸하지 않고 말했다.
"다들 일이 있으니, 이거 큰일이로군. 누가 자원할 사람 없나?"
소년들은 망설였다. 어가문만이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다른 소년이었다. 그리고 곧 많은 소년들이 손을 들었다. 기밈과 주림 역시 어가문이 손을 드는 것을 보고 같이 손을 들었다.
"그래, 모두 강아지를 돌보길 원한단 말이지. 그런데 주림, 너는 감자밭 위에서 망을 봐야 할 텐데."
"망을 보면서 기를게요."
노인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림과 둠밈이 짜증이 난다는 눈으로 주림을 바라보았다.
"어가문이랑 기밈이 남는군. 그런데 기밈, 넌 공부를 해야지 않나?"
"하루종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하지만 다른 일에 집중할 시간은 없을 거야."
노인은 소년들을 바라본 뒤 말했다.
"어가문이 하는 것이 낫겠군. 슬슬 일을 배워볼 때이기도 하니."
"이건 불공평해요."
손을 들지 않았던 둠밈이 불평했다.
"저 애새끼에게 놀잇감을 던져주면서, 그걸 일이라고요?"
"그렇지 않다. 둠밈."
노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둠밈은 그의 예언하는 듯한 목소리가 싫었다. 몸을 돌리고 눈을 홉뜨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두더지가 데려온, 강아지라는 생물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는 그 생물이 바닥에 배설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 큰 웃음이 터졌다. 소년들은 웃고 떠들며 강아지를 괴롭혔다.
"일이 생겼구나 어가문. 그것이 적어도 화장실을 분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노인은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어가문에게 그렇게 말했다.
"일로 돌아가라."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곧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신들의 자리로 향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어가문은 간단한 청소도구를 가져왔다. 배설물을 치운 뒤 번갈아 말했다.
"그러면 안 돼 강아지야."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와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은 뒤, 곧 혀로 손바닥을 핥았다. 어가문은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아직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한숨을 쉬고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어가문은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강아지를 꼭 붙들었다.
"강아지야."
그는 앳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계속 강아지의 이름을 불렀다. 강아지는 까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황혼이 다가왔다. 소년들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동굴에 모였다. 옛 책들을 뒤적이던 기밈이며, 망을 보던 주림과 감자밭 근처에서 소년들을 감독하던 우림과 둠밈, 그리고 강아지를 돌보던 어린 어가문, 모두가 노인의 앞에 모였다.
"오늘은 토요일이란다. 토요일이 뭔지 아니?"
기밈은 우림과 둠밈의 눈치를 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어가문이 대신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예화를 찬양하는 날이요."
"그래, 위대한 예화의 이름이 빛나는 날이지. 그리고 우림과 둠밈. 다시 한번 내 앞에서 그딴 짓을 했다가는 뼈를 분지르겠다."
"내가 뭘요?"
덩치 큰 우림이 큰 소리를 냈다. 노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애들을 감독하라고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어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
"안 했어요."
"방금 넌 기밈에게 눈짓을 했지."
"그게 뭐 어때서요?"
"잘 들어라. 기밈은 학자가 될 거야. 학자가 뭔지 빈약한 네 뇌로 이해는 할 수 있나?"
소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가 둠밈의 싸늘한 반응에 곧 소리를 죽였다. 우림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바라본 다음 말했다.
"멍청이잖아요."
노인은 지팡이를 들었다. 강한 팔로 우림의 머리를 내려쳤다. 우림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아이들은 우림을 겁내지 않고 웃었다.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팔을 들어라. 우림."
우림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팔을 들었다. 얌전히 벌을 받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아이들이 웃었다. 둠밈은 싸늘한 눈빛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노인은 그를 유심히 보았다가는 곧 시선을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 예화가 세상을 멸할 때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예, 저번에 해주셨어요."
주림은 둠밈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 너희들도 알다시피, 인간들은 예화의 말을 듣지 않았어. 그래서 벌이 내린 거란다."
"벌이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어가문이 눈을 빛냈다. 노인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 어느 날인가, 예화께서는 무척 화를 냈다. 인간들의 재악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불이 칠 일간 쏟아져 세상이 불태워졌다. 예화를 믿는 신실한 이들은 하늘로 올라가 그의 우편에 앉았다. 그러나 예화의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은 이 땅에 앉아 죽음과 악마들로부터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죄인인 우리들은 그를 경배하고, 그가 주는 형벌을 감내해야 한다."
"헛소리지."
둠밈이 혀를 찼다. 노인은 지팡이로 그의 머리 역시 쳤다. 둠밈은 반항을 하려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은 그가 삐딱한 웃음을 주고 남을 비웃을 때는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그가 비웃음거리가 된 다음부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저런 불경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는 안 돼.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라. 그렇다면 너희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곳은 남녀가 하나가 되며, 모든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우림에게 그만 팔을 내리라고 말했다. 그는 투덜거리며 팔을 내렸다. 동굴 안은 점차 어두워지고, 신이 내리는 불빛. 동굴 안의 하얀 빛은 단숨에 꺼져 곧 사방이 어두워졌다. 잠을 잘 시간이라는 증거였다. 소년들은 곧 흩어져 자기 침소로 향했다.
주림은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가문이 데리고 있을 생물에 마음이 미쳤다. 한참을 뒤척였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곧 마음을 정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 뒤 털신을 신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는 어가문의 침대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다른 인영 둘을 발견했다. 키가 작은 기밈과 아직 어려서 그보다도 작은 어가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뭉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밈은 크게 놀라 몸을 움찔했다. 주림의 얼굴을 본 뒤에야 그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 낮춰."
"왜 그래?"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살폈다. 그들은 강아지가 자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기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걸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뭐라고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지칭?"
"그러니까, 그것을 어떻게 부르냐는 거야."
"나는 모르지. 우리중 글자를 아는 건 할아버지랑 너 뿐이잖아."
주림은 그렇게 속삭이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그 가운데 앉은 흰 생명을 바라보았다. 숨을 쌕쌕거리며 코를 고는 모습. 너무나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생명이 뛰어놀며 입을 벌릴 것이며, 그 입에서 숨결이 튀어나올 것을 생각하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렇네."
주림은 그렇게 말했다. 한참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주림은 가슴이 일렁인다고 느꼈다. 손을 들어 강아지를 쓰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잠을 깨우고 말 것이었다.
어가문 역시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제하지 못했다. 그가 단숨에 손을 내미려는 것을 기밈이 제지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주림은 손을 들어 강아지를 쓰다드는 척만 했다. 그는 조금 기다리다가 말 없이 침대로 돌아왔고, 어가문과 기밈 역시 그렇게 했다.
침대에 누운 주림은 그가 느낀 감정을 생각했다. 그렇게 즐겁고 빠질 것 같은 감정이라니. 정말로 믿을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강아지라니. 두더지의 말이 옳았다. 금괴 두 개가 아깝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는 잠에서 깼다. 어젯밤 잠을 늦게 자서 그런지 조금 졸렸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오늘도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그는 하고싶은 일을 해야했다.
그는 어가문의 침대로 향했다. 강아지를 쓰다듬고 그 감정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 소망대로 그는 곧 강아지를 만났다. 어가문의 침대 옆에 얌전히 누워 팔로 턱을 괸 강아지를 보았다.
주림은 손을 들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혀를 내밀어 주림의 손을 핥았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소년들과 함께 남들을 놀릴 때 하는 비웃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으로 정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달랐다. 조금 더 고상하고 중요한 무언가였다.
그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도 잊고 강아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직 아이들은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아, 주림."
키가 작은 기밈은 눈을 비볐다.
"잘 안보여서 너인줄 몰랐어. 뭐하는 거야?"
"강아지 쓰다듬어."
주림은 그렇게 말했다. 기밈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주림은 그 웃음이 기꺼웠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기밈은 곧 같이 쭈그리고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둘은 곧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 주림과 기밈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나 시간은 점차 흘렀다. 일을 해야할 시간이다. 노인이나 우림과 둠밈이 일어나게 된다면 큰 곤경에 빠질 것이 틀림 없었다.
"이제 가야지."
주림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못내 마음이 쓸렸다. 다시 가서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 부드러운 털이며 촉감을 기억하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하루종일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다. 남쪽 방향에서 행상인이 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이 사는 다른 곳에서 전령이 오는 것에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마침 그날 아무도 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왔다면,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노인이 안다면 크게 혼을 낼 일이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졌다. 감자밭에서 일을 하는 소년들이 호미를 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동굴로 돌아가며 장난을 치고, 우림과 둠밈은 그들 뒤에서 이야기를 했다. 주림은 돌아갈 시간임을 알았다. 그는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그는 소년들이 막 사라진 동굴의 그늘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주림은 어가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정말로 기쁜 소리였다.
"여길 봐!"
어가문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강아지가 그의 뒤를 따라 혀를 내밀었다. 소년들은 모두 그것을 보고 웃었다. 심지어는 덩치 큰 우림마저도 웃고 있었다. 그러나 둠밈은 못마땅해 하는 기색으로 얼굴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 날밤 주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아지의 빛나는 털이며 그의 사랑스러운 모양새가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걸어서 어가문의 침대로 가려다가 문득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습니다."
노인의 목소리였다. 누구에게 그렇게 말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주림은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다. 동굴의 구석, 노인의 개인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예화가 내린 성스러운 검은 돌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림은 조금 떨어지며 그가 말하는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주림의 침대가 노인의 방에 가까웠고, 주림의 청력이 남달리 좋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호기심에 그 소리들을 들었다.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입을 조금 벌렸다. 그의 귀에 연결된 검은 돌의 촉수에서 더더욱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주림은 들을 수가 없었다.
"예.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복종하고, 당신들의 명령을 따릅니다."
노인은 침묵한 뒤 말을 이었다.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기술수준은 아직 초기 철기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내리신 죽음과, 당신들이 내리신 천사에게 복종합니다. 진짜 신은 예화이며, 그 외의 참된 신은 없습니다."
주림은 그가 허공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본 적이 없던 노인의 모습이 기괴하고 두려웠다. 마을마다 하나씩 있다는 제사장, 학자들이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신내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검은 돌의 촉수를 귀에서 빼내었다. 깊은 한숨을 쉰 뒤 뒤척였다.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주림은 빠져나왔다. 강아지를 보고 싶은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노인의 알 수 없는 대화에 대해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상념들이 회오리치듯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갔다.
다음 날 그는 일찍 일어났다. 감시탑으로 가기 전, 노인과의 독대를 위해 펜과 종이를 준비하던 기밈에게 가서 물었다.
"기밈, 시간 있어?"
"응,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궁금한게 있어서 그래."
"대체 뭔데? 강아지 이야기야?"
"더 중요한 이야기야."
주림은 눈을 비비는 기밈의 손을 잡았다. 동굴 밖으로 나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혹시 너 신내림에 대해 알아?"
"신내림? 알지. 나는 겪어본 적이 없지만, 생각처럼 무서운 건 아니라고 그랬어. 예화와 대화하는 것이래. 그를 위해 예화는 문자를 일부 사람들에게 허용했고."
주림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어제 말야. 난 할아버지가 신내림에 드는 것을 봤어."
기밈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도 가끔 그가 그러는 것을 봐. 언젠가 어른이 되면 나도 해야 할 일이라고 했어."
"그에 대해 뭐 좀 알아?"
"잘은 몰라. 우리는 예화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하니까. 예화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고하는 거야. 물론 예화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충실한 종과의 대화를 즐기시닌까 말야."
"그래, 복종 말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게 그거야."
주림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자라면 도시로 가게될 거라고 하잖아. 거기서 예화가 정해준 짝을 만나고, 예화의 일꾼으로 거듭난다고 말야. 물론 지금도 우리는 예화의 일꾼이지만. 그리고 물론, 너는 여기 계속 남아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거지만 말야."
"그래. 그게 뭐."
"만약 예화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돼?"
"별로, 별 거 없어. 아주 심하면 지옥에 빠트려지겠지. 그러나 적당하면 약간의 교정을 받을 뿐이야. 우림이나 둠밈을 보면 알잖아. 걔들은 매일 노는 걸 좋아하고, 저번에는 여자들 공동체에 갔는데. 그저 이야기만 좀 듣고 말았지."
"그래. 그렇겠지."
주림은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늘 말하는 것처럼 예화가 정말로 참된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비롭고, 모든 것은 올바르다. 어떠한 문제도 없다. 그가 느낀 불안감은 단순한 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소용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으나 아직 껄끄러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
"나도 알고싶어."
주림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하늘 위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우리가 왜 예화를 따라야 하는지도."
기밈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하지만 넌 허락받지 않았어."
"그렇지."
주림은 불만어린 표정을 지르려다가는 어가문과 놀고 있는 강아지를 보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밈은 그를 향해 미소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주림은 곧 감시탑으로 향했다. 먼 평원과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문명이 건재했던 시절, 소돔과 고모라의 시절이라 불리던 때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강아지가 그 때도 사람들에게 그가 알 수 없는 감정을 주었는지 궁금했다.
감시탑에서의 임무는 여전히 평온했다. 행상인은 물론이거니와 접근하는 늑대나 맹수 무리도 없었다. 사실 주림은 태어난 이후 한번도 그러한 것들을 보지 못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기묘한 임무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감시하라니.
황혼이 찾아왔다. 주림은 고독한 임무에서 해방되어 사다리를 탔다. 감시탑 아래로 내려와 동굴로 향했다. 어가문이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고, 아직 흥미를 느끼는 소년 몇몇이 다가와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어가문."
주림이 막 자신도 강아지와 놀려고 했을 때,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강아지가 또 동굴 안에다 배설을 했더구나. 어떻게 된 거냐."
어가문은 어쩔 줄을 몰라 주춤거렸다.
"아직 버릇이 들지 않았으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넌 하루종일 강아지를 돌보잖니. 적어도 노력은 하란 말이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갔다. 소년들은 어가문을 동정하듯이 감쌌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우림과 둠밈은 배설물을 주제로 농담을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웃으며 강아지를 괴롭혔다.
강아지는 이제 끙끙대고만 있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며 적대감을 표시했다. 둠밈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욕설을 퍼부으며 나섰다. 그러나 어가문이 소리치며 강아지를 감쌌고, 또한 소년들 사이에서도 심하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그날 그는 그냥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의 농담에 감명을 받은 소년들 몇몇이 그와 이야기했다.
"잔인한 새끼들."
기밈이 화를 냈다.
"내가 제사장이 되면, 저런 새끼들은 그냥 쫓아낼 거야. 할아버지가 왜 저 자식들을 그냥 두고 보는지 모르겠다니까."
주림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도 우림과 둠밈, 그리고 소년들의 행동이 지나쳤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어린 치기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걔들은 그냥 어린 거야."
"그래? 넌 어떻고. 어가문을 좀 봐. 불쌍하지도 않아?"
주림은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가문이나 우림과 둠밈의 장난에 놀아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가 그랬다. 기밈처럼 생각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무튼. 예화가 벌을 내릴 거야. 공정한 예화가 말야."
기밈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까지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밤이 되자 그들은 곤히 잠든 강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는 이내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 다시 강아지를 응시했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 좋았다. 강아지들을 바라볼 때면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흔히 가지기 마련인 활력도 침잠히 가라앉고, 온갖 그리움이며 따뜻한 피가 피부 속에서 꿈틀대곤 했다.
시간은 흐르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일어났다. 침대에서 뒤척이던 주림은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는 눈을 떴다. 소란스러운 곳을 향하니 곧 소년들이 무언가를 빙 둘러싼 것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내놔!"
어가문이 씩씩거렸다. 우림이 두 손으로 강아지를 잡고 높이 들었고, 더러워진 강아지는 낑낑거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어가문이 손을 들어 강아지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못했다. 소년들은 낄낄거리며 어가문을 비웃었다.
"뭐하는 거야."
주림은 달려가서 그렇게 물었다. 우림의 옆에 섰던 둠밈이 입을 다물고 주림을 노려보았다.
"벌을 주지."
"네가 뭔데."
욱해서 그렇게 말했다가 주림은 배를 얻어맞고 말았다. 소년들은 웃고, 어가문은 울었다. 주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밈이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는 너무 겁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화가 났다.
다시 한번 둠밈이 배를 쳤다. 순간 주림은 눈 앞이 번쩍했다. 달려가서 다리를 걸고 쓰러졌다. 주먹을 쥐고 둠밈의 뺨을 쳤다. 둠밈과 주림은 동굴의 바닥을 뒹굴고, 아이들의 고함 속에서 치고 받았다.
아이들의 소란을 들은 노인이 달려왔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짐짓 엄한 눈을 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그 소리는 고함 소리 속에서 잔잔히 울렸다. 몇 번 울리자 아이들은 곧 그만두고 물러났고, 주림과 둠밈마저도 싸우던 것을 그만두고야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노인이 조금 침묵한 뒤 질문했다. 어가문이 울면서 대답했다.
"둠밈이 제 강아지를 뺐어요."
"놀고 있네. 꼬맹이가."
노인은 둠밈이 피가 섞인 침을 뱉는 것을 보고 크게 외쳤다.
"둠밈!"
"그렇게 보지 마요. 다 그 새끼가 잘못한 거니까."
"무슨 말이냐."
"저 개새끼가 내 침대에 오줌을 지렸다고요."
소년들의 시선이 일제히 둠밈의 침대로 향했다. 둠밈의 말은 사실이었다. 냄새가 풍겼다. 노인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씩씩거리던 주림과 둠밈은 곧 가라앉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소년들은 서로 수근거리고 겁 많은 기밈은 안절부절하다가는 애써 화를 돋구어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한 뒤 말했다.
"어가문, 분명 강아지를 잘 돌보겠다고 했잖니."
"죄송해요."
어가문은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무언가를 돌보기엔 네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구나. 어가문, 앞으로는 강아지에 가까이 하지 말아라."
"네?"
"강아지는 기밈이 맡거라. 확실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것이 네가 배울 일이기도 하니까 말야. 그리고 절대로 어가문이 있는 이 방에 가게 해서는 안 돼. 네 개인실에만 두거라. 산책도 좀 시키고."
기밈은 어리둥절해 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 역시 납득했다. 그러나 어가문은 납득하지 못했다.
"불공평해요!"
"뭐가 불공평하지?"
어가문은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은 어가문을 바라보다가는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표시였다. 소년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주림 역시 감시탑에서 상인과 여행자들이 오는 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어가문을 측은하다는 투로 바라본 뒤, 그를 비웃는 둠밈을 노려보았다.
소년들은 주림의 어깨를 치거나 둠밈을 어려워하며 농담을 건네고는 일터로 향했다. 대다수가 감자밭으로 향했지만, 예화에게 바칠 공예품을 깍는 아이들은 동굴에 그대로 남았다. 그들은 점심이 되서야 외출을 할 것이었다.
그들은 어가문을 위로하고는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주림은 마지막으로 어가문을 바라본 뒤 일터로 향했다. 사다리를 타고 감시탑에 올라 막막히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시야는 흐려지고, 잠념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맞아서 터진 뺨이 쓰라렸다. 그는 그것을 쓰다듬으며 둠밈에 대해 화를 냈다. 기밈에게 어른인 척 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화가 나고 슬펐다.
괜시리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평야 속에서 살랑이는 밀밭과, 아이들이 움직이는 감자밭을 보았다. 슬슬 수확철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호미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며 감자를 캤다.
해가 저물어가며 황혼이 대지에 드리워졌다. 주림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 날 그는 소년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노인이 싸움을 엄격히 금하고 있긴 했지만, 이 나이대의 소년들은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새끼랑 다시 붙을 거야?"
스그럼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그렇게 물었다. 주림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평소에는 주림과 그냥 인사만 나누는 정도인 그가 이렇게 오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별로.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야."
"그래도 잘 했어. 그 새낀 좀 밥맛이거든."
스그럼은 한참을 떠들었다. 주림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주림은 강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스그럼과 그에 붙은 소년들은 지쳐서 떨어져 나갔고, 주림은 그가 원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기밈의 방으로 향한 다음 강아지를 살폈다. 강아지는 주림의 손을 핥았다. 간지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기묘하게도 처음 느꼈던 신비함이나 즐거움은 사라진 채였다.
그래도 기밈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리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은 여전히 기꺼운 일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날들이 계속되었다. 잠에서 깬 둠밈은 그를 빤히 노려보더니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주림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감시탑을 올랐다. 그는 소년들과 이야기를 조금 주고받았으나, 대다수의 하루를 생각에 잠겨 보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피곤을 느끼지도 않았다.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돌고, 갖은 망상과 상상력이 되어 그의 눈을 찔렀다.
한밤중에 홀로 깨는 날이 많아지면서 그는 자신이 무언가 달라진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별 거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면서도 기밈과 이야기하고, 예화에 대한 찬양이며, 소년들과 관습에 대해 생각할 적이면 전혀 다른 감정이 내면에서 복받치곤 했다.
둠밈과 다툰 뒤로 이주일이 흘렀다. 그날도 주림은 감시탑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화의 말을 따라야 하는 진짜 이유라던지, 그가 크게 된다면, 죽게 된다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는 또한 강아지에 대한 일과 노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기밈과 어가문이며 우림과 둠밈 형제에 대한 생각도 치솟았다. 생각들은 쉴 틈도 주지않고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 가운데는 즐거움과 평온이 있었다. 주림은 그것이 좋았다.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그는 감시탑을 내려왔다. 감자밭은 텅빈 채였다. 하지만 감시탑에서 조금 떨어진 옥수수밭은 아이들로 가득했다. 감자를 다 캐낸 아이들은 이제 가을을 기다리며 옥수수밭에서 추수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수확한 뒤 곧 밀을 수확할 것이었다.
주림은 그것을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림에게는 쉬는 날이라는 것이 없었다. 겨울이 오면 이제 밭일을 하던 아이들은 쉬는 일이 많아질 테지만, 주림은 겨울에도 옷을 끌어안고 감시탑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물론 평소보다는 훨씬 적은 시간 동안 있을 테고, 공예품을 만드는 아이들 역시 그 시기에는 자신처럼 일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주림의 일은 그들과는 달리 홀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굴로 향했다. 감시탑에서의 고독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요즘에는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일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좋은 휴식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얇은 나뭇가지들을 바스라트리며 걸었다. 그처럼 감시탑에서 일하는 두 소년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앞서 감시탑에서 한 생각들이 그를 휘감았다. 그는 정말로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길을 걷다가 그는 문득 옥수수밭을 바라보았다. 일을 마친 아이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며 부지런히 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둠밈과 우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늘상 그렇듯이 오늘도 참다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 일이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뭐해?"
키가 작은 스두반이 물었다. 주림은 고개를 들어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는 곧 몸을 돌렸다. 묘한 불안감이 몸을 감돌았다. 그는 뛰어서 사다리를 올랐다. 그 높은 곳에서 옥수수밭과 감자밭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는 곧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왔다. 동굴 안으로 향했다. 소년들은 두더지에게서 예전에 산 카드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서로 적의 없이 씨름을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서로에게 관심 없는 아이들을 헤쳤고, 그의 얼굴을 아는 소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리나케 달려 어가문을 찾았다.
"어가문 못 봤어?"
평소에는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소년에게 말도 건네고. 대부분을 집에 있는 공예품조와도 이야기를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어가문의 행방을 몰랐다. 주림은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 기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기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도 마찬가지였다.
"기밈이라면 강아지 산책시킨다고 나갔어."
공예품을 아직까지 만지작거리던 소년 하나가 그렇게 일러주었다. 주림은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 뒤 바로 동굴 밖으로 향했다. 처음 일러준 소년이 말했다.
"나가게? 곧 통금시간인데?"
주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해져가는 바깥으로 달렸다. 늦은 여름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며 으슬으슬 떨리게 만들었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뛰었다. 밀짚으로 꼬아 가죽을 덧덴 신발이 발등에 걸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밀밭과 옥수수밭, 감자밭은 이미 둘러본 참이었다. 찾아봐야 소용 없을 것이다. 그는 동굴을 빙 돌아 숲의 언저리를 향했다. 냄새를 맡고 귀를 기울이며 오감을 집중시켰다.
삼십 분 동안 그는 사방을 헤메었다. 부스럭거리며 한참을 찾다가 그는 문득 머리 위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는 빗줄기는 곧 강해지고, 사방이 어두워졌다. 곧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주림은 비를 피해 달렸다. 저벅거리는 발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한기가 으슬으슬 그의 몸을 파고들어왔다. 달리는 그의 눈에 큰 바위가 보였다. 그는 그 바위 틈으로 기어들어갔다. 틈 사이는 생각보다 넓었다. 집과는 다른 동굴로 이어진 틈이었다.
그는 비를 피하며 옷을 말렸다. 웃옷을 벗은 채로 비오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덩치가 큰 우림의 목소리였다. 주림은 몸을 낮추고 다가가 틈 사이를 엿보았다. 어두운 틈 가운데 불빛이 보였다. 우림과 둠밈이 불빛을 피워놓은 채였다.
"그 늙은 놈은 별 거 아냐."
둠밈은 그렇게 말하며 불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는 무언가 긴 꼬챙이를 들고 있었다. 주림은 숨을 죽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둠밈과 우림 옆에 다른 것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기밈이 보였다. 그는 숨을 죽인 채였다. 동시에 눈물자국이 흥건한 어가문이 보였다. 여기저기를 맞아 더러워진 채였다.
주림은 순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 보지 않아도 상황이 뻔했다. 우림과 둠밈이 어가문과 대가 약한 기밈을 괴롭히는 것이다. 달려들어가서 둠밈의 얼굴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덩치가 큰 우림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빨리 돌아가 노인에게 알리는 것이 나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그는 소년들이 둘러앉은 불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비명을 들었다. 낑낑거리는 소리였다. 짧게 짖는 소리. 주림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강아지가 보였다. 둠밈이 그 여린 생명의 목을 궤뚫으려는 참이었다.
주림은 순간 달려들어 둠밈의 허리를 잡고 쓰러졌다. 어리둥절하는 그의 이마에 주먹을 내다꽂았다. 둠밈은 사정없이 내팽겨쳐지며 얼굴을 감쌌다. 주림은 계속 얼굴을 쳤다.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땅에 찧는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우림의 큼직한 주먹에 뒤통수를 맞고 고꾸라졌다. 흙을 뱉으며 일어나자 다시 우림이 다가왔다.
우림이 다시 주림의 얼굴을 쳤다. 주림은 눈이 핑 돈다고 느꼈다. 쓰러진 그에게로 우림이 다가와 발과 주먹으로 마구 쳤다. 주림은 배와 머리를 끌어안고 우림의 공격을 맞았다.
우림은 곧 공격을 그만두고 뒤로 돌았다. 대신 몸을 추스린 둠밈이 다가와 주림의 배를 발로 찼다. 그때 주림은 일어나 둠밈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둠밈은 고함을 질렀고, 곧 우림이 끼어들어 그들은 엎치락뒤치락 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기밈은 겁에 질려 떨었고, 어가문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강아지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구석에서 떨 따름이었다. 한참동안 둠밈과 우림, 주림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싸움을 멈춰야 했다. 굴 바깥에서 큰 소리가 났다. 천둥소리와 비슷하지만 다른 소리였다. 노인이었다. 그가 지팡이로 그들을 때리며 떨어트려 놓았다.
상처 입은 세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떨어져 섰다. 주림은 노인의 콧잔등을 바라보았고, 둠밈은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림은 얼굴을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노인은 찬찬히 동굴 안을 살폈다. 타오르는 불길이 겁에 질린 기밈과 어가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조금 더 돌렸다. 강아지의 모습을 확인한 뒤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조금 기다리다가 말했다.
"돌아가자."
노인은 그들을 모두 일으켰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기밈은 친구를 보고만 있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함께 싸운 세 소년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묵묵히 길을 따랐다. 그들은 그들이 왔던 비오는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두컴컴했으나 소년들은 아직 잠을 자고있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기다리고 있다가 노인이 데려온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이죠?"
용기있는 소년 하나가 물었으나 노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두드려 대답을 대신했다. 모두들 궁금증을 묻어두고 침실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어가문의 품에서 강아지를 빼앗았다. 어가문은 주저했으나 울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침대로 가 눈을 감았다.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림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아픔과 함께 생각들이 머리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아마도 내일이면 노인에 의해 옳고 그름이 가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필요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한참 뒤척이다가 그는 문득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노인이 신성한 검은 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기괴한 영상이 떠돌고, 뻗어나온 촉수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그는 예화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화……."
노인은 항변하듯 손을 들어올렸다. 주림은 잠시 움찔했다.
"이건 단순히 아이들의 싸움일 뿐입니다."
주림은 그가 자신들에 대한 일을 예화에게 보고한다고 생각했다. 더 듣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고통 속에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새벽에 눈을 떴다. 몸이 쑤시고 온 몸이 아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걸었다. 그때 그는 문득 둠밈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이 다가와 그들의 어깨를 쥐었다.
"모두들 들어라."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잠에서 깬 소년들을 모아놓았다. 오늘 일은 조금 늦게 시작한다고 말한 뒤 주림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어젯밤, 싸움이 있었다. 주림과 둠밈, 그리고 우림이 싸웠었지. 모두 알다시피 싸움은 금지된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세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어가문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결국 기밈이 나서서 이야기를 했다.
"강아지를 산책 좀 시키려다가……."
그렇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도 오고 해서, 근처에 있는 동굴로 갔어요. 그런데 어가문이 저를 따라오고 있더군요. 강아지를 하도 보고 싶어 하기에 강아지를 가지고 같이 놀았어요. 그런데 둠밈이랑 우림이 나타나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둠밈이 욕설을 내뱉었다. 시비를 건 것은 기밈과 어가문이 먼저라고 했다. 그러나 기밈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둠밈을 무시했다. 둠밈과 우림의 잘못을 공격했다. 그들이 먼저 때렸고, 심지어는 강아지를 구워먹으려 했다고 말했다.
강아지를 먹으려 했다는 말에 어가문이 어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소리쳤다. 절대로 둠밈이나 우림에게 강아지가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곧 우림이 욕설을 내뱉었고. 소년들은 서로 소리를 쳤다. 동굴 안이 시끄러워지자 노인은 근엄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었다. 그의 지팡이가 동굴 바닥을 치자 곧 둔중한 소리가 동굴 아을 가득 울렸다. 소년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둠밈. 어째서 너는 강아지를 먹으려고 했지?"
"애새끼들이……."
거기까지 말한 둠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보고 싶다고 악을 썼다. 평소 같으면 무어라 자신있게 소리칠 우림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게 문제로구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강아지의 등을 잡아올렸다. 어가문은 돌려달라는 듯이 손을 뻗었고 둠밈은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강아지를 노려보았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구경하던 아이들 몇몇이 머리를 긁적이거나 발을 움직일 때까지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가문, 강아지에게 일주일 동안 접근하지 말아라. 큰 잘못이 아니니 큰 죄는 묻지 않겠다."
어가문은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는 그를 내버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둠밈과 우림, 그리고 주림은 근신이다. 너희는 내가 허락할 때까지 동굴 바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둠밈이 코웃음을 쳤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한 태도도 결점이 된다는 걸 명심해라."
"그럼 어쩔 건데요?"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하지만 예화가 무언가를 하겠지."
둠밈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근신은 지금부터다. 그러나 너희들을 가두지는 않겠다. 스스로 자제해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남은 소년들은 벌을 받은 소년들을 바라보더니 아침 식사를 하고는 훌쩍 자신의 일터로 떠났다. 어가문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구석으로 돌아갔고, 기밈은 자신의 공부방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둠밈과 우림, 주림은 가만히 앉았다. 서로를 노려보다가 곧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주림은 방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예화는 그것을 그르다고 한다. 하지만 대체 왜 그르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방의 옅은 흙바닥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금 기다리다가 세로로 직선을 그리고, 그 직선에 가로로 다시 직선을 쳤다. 주림은 기다리다가 입을 벌렸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린 도형, 옛날 십자가라고 불렸던 도형을 생각했다. 그는 억울하다. 궁금하다는 감정을 담아 다시 그 도형을 그렸다. 그러자 가슴 속에 남아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멋대로 손가락을 그었다. 더욱 멀리 보고 싶다. 알고 싶다. 알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하고 싶다. 안에서 타오르는 듯한 답답함을 없애고 싶었다. 평화가 안에 깃들기를 원했다. 그러한 감정을 담아 흙바닥에 미친듯이 금을 그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그는 뒤로 누웠다. 말과 돼지들, 그리고 몇 개의 도형으로 된 그림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는 그것을 생각했다. 분명히 그림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랐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긴 했고, 무척 조악하긴 했지만 분명 그것은 문자였다.
주림은 잠시 멍했다가 예화가 금지한 일을 했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문자를 소유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아이들끼리 싸우는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죄악. 노인의 말대로라면 악마의 수작이다.
예화는 모든 것을 지켜본다. 분명 그는 자신이 이러한 금기를 범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주림은 물러나서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동굴 위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벼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움켜잡고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가 궁금했다. 주림은 기다렸다가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세로로 긋고, 다시 가로로 그었다.
"왜?"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굴 안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예화가 정말 존재하고, 그가 진짜 신이라면 어째서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은 것인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예화는 그가 참회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깊은 생각에 잠길 수도. 그러나 어쩌면…… 예화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이 없거나, 예화가 진짜 신이 아니거나.
"주림아."
그는 방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하여 흙바닥을 헤쳤다. 바닥에 새겨진 기호는 모래에 덮여 사라졌다. 그는 발을 거기에 댄 채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기밈이었다.
"무슨 일 있어? 뭘 숨겨?"
"아냐. 아무 것도. 공부할 시간 아냐? 왜 왔어?"
"이것 봐."
기밈은 의문을 가지지 않고 웃었다. 가죽옷으로 가려진 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림은 그제서야 기밈의 앞이 부풀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푼 품 속에서 강아지가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강아지는 기쁘다는 듯이 작게 짖었다. 기밈은 콧잔등을 살짝 쓰다듬어 짖지 못하도록 한 뒤에 그것을 주림에게 내밀었다. 주림은 얼굴에 미소를 띄며 그가 건네는 생명을 받았다.
품 안에 넣자 너무나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따뜻하고 섬세한 기분. 아까까지 생각했던 의문이며 두려움은 아직 내면에 있었지만, 강아지가 전해주는 온기가 그것들을 덮고 기쁨을 전해주었다.
"네가 심심해 할까봐."
기밈은 그렇게 말했다.
"네가 심심한게 아니고?"
주림은 그렇게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그렇게 떠들며 강아지를 가지고 놀았다. 주림은 계속 기쁘게 웃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일들에 생각이 미쳤다.
"너무 논 것 아냐? 공부방으로 돌아가야겠어."
"그래야지. 슬슬 할아버지가 산책을 돌 시간이니까."
기밈은 품 속에 강아지를 넣고 다시 가죽옷을 여몄다. 주림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어가문은? 걔도 강아지 보여줘. 걔가 제일 좋아하잖아."
"어가문은 안 돼."
"왜?"
"너무 어리잖아. 뭘 숨길 줄을 몰라. 내가 강아지를 보여줬다는 걸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주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밈은 이미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약간의 위험을 감수했다. 더한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밈은 곧 사라졌다. 주림은 그 자리에 혼자 남아 그가 생각한 것이며 문자들을 연습했다. 그러한 일들을 하며 강아지를 기억하자 외롭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들과 식사를 할 때, 공예를 만들던 아이들이 힘을 내라며 격려를 건넸다. 그는 그것에 대응하며 주위를 보았다. 어가문은 거의 울듯한 표정이 되었고, 둠밈은 입을 다문 채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림은 동생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도중에 그 때 다시 일이 일어났다. 기밈이 어가문을 보더니 슬쩍 강아지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이들중 누군가가 그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강아지들을 아이들에게 보였다. 둠밈이 불쾌한 듯이 혀를 찼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밈이 강아지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앉아."
그 말대로 강아지는 앉았다. 소년들은 탄성을 질렀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기밈은 대소변은 이미 가릴 줄 알지만 여러 가지 재주는 아직 익히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였으나 대부분 그것으로 만족했다. 앉고 일어서라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즐거워하는 아이들 중 어가문이 있었다. 기밈은 그를 보며 웃었다. 주림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식사가 끝나고, 주림은 다시 문자 연습과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신경을 쓰자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었다. 감시탑에서 혼자 있었던 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그는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하루가 흘렀다. 어제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어가문은 보다 나이 많은 소년들이 버린 나무 장난감이며 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혼자 놀았다. 그러다가 기밈이 식사 시간에 데리고 오는 강아지에 거의 홀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주림마저도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강아지를 쓰다듬지 못하는 어가문은 이제 강아지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았다. 대신 갈망하는 눈빛을 이글거리며 굳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점심 식사를 할 때 주림은 둠밈이 이를 갈며 책상을 치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불공평해!"
어가문이었다. 모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상관하지 않고 기밈에게로 달려들었다. 뒹굴며 묘기를 보이던 강아지를 빼앗기 위해 작은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닿지 못했다. 큰 소리가 났다. 둠밈이 어가문을 쳤다. 어가문은 떨어져 울었다. 기밈이 무어라 소리쳤다. 그러나 둠밈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깟 개새끼가 뭐라고."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어가문은 계속 울었다. 울다가 기밈이 윽박지르자 울음을 그쳤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주림은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갇혀있게 된다면 둠밈이 더는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인은 그들의 처벌이 오늘로 모두 풀렸다고 말했다. 그들은 곧 일로 복귀하고 예전과 변함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강아지의 존재뿐이었다. 어가문은 강아지를 쓰다듬게 뒨 뒤로 더욱 행복해 했다. 여전히 하루종일 데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기밈이 훈련시킨 이후로 더욱 강아지를 아꼈다.
감시탑 위에서 주림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느낀 모든 것과 강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근신을 받은 이후로 둠밈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모든 것을 비웃거나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주림은 그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강아지가 앓는 일이 생긴 것이다. 강아지는 이제 재주를 부리거나 꼬리를 흔들지 않았다. 그저 힘없이 짖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런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림 역시 그러했다. 감시탑의 임무를 일찍 끝낸 뒤 그가 동굴 안을 향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주림은 그날 문자를 연습할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빨리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연습할 공간을 찾기 위해 동굴 뒤로 향했다. 그때 그는 어떠한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바로 둠밈이었다. 그가 강아지 가까이에 붙은 것을 알았다. 우림이 불안한 표정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둠밈이 무언가 기묘한 것을 강아지에게 억지로 먹이고 있었다. 주림은 다가가 바로 둠밈의 머리를 쳤다. 우림이 둠밈과 함께 주림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서로 사정없이 때렸다. 뺨에는 상처가 나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오래 싸우지는 못했다. 어가문이 강아지를 찾으러 왔다가는 그들을 보았고, 그의 고함을 들은 노인이 금새 찾아왔다.
노인은 놀라운 힘으로 그들을 떼어놓았다. 천둥 같은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근신을 명한 뒤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주림은 너무나 분해서 소리쳤다.
"저자식들이 강아지를 괴롭혔다고요. 죽이려고 했어요."
"그냥 먹이를 준 거야. 병신아."
둠밈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노인은 그것이 근방에 나는 약한 독초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렸다. 그는 고함을 치고 둠밈에게 화를 쏟아내었다. 그러나 둠밈은 동요하지 않았다. 덩치가 큰 우림이 고개를 숙인 동안 당당히 말했다.
둠밈은 그를 비웃었다. 노인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둠밈의 뺨을 쳤다. 둠밈은 쓰러져 이를 갈았다.
노인은 그들을 데리고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동굴 바깥에 세운 뒤 자신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주림은 그가 검은 돌에서 신내림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나와서 엄숙히 섰다.
"예화께서는 이번 일에 무척 실망하셨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는 강아지를 들어보였다. 그 작은 생명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년들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노인은 듣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예화는 둠밈과 우림이 이미 충분히 컸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연옥으로 가서 교화를 받은 뒤에 먼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둠밈은 반론했다. 자신은 아직 그 나이에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 강아지는요?"
"어가문아."
노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강아지는 천국으로 보내질 거야.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 거란다. 이해할 수 있겠니?"
"그럼 둠밈이랑 같이 갈 거 아니에요. 강아지가 싫어할 거에요."
"천국은 넓단다."
어가문은 이해하지 못한 듯이 잠시 섰다. 순간 깨달음이 그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어린 그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빨갛게 부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들의 고함과 부정한 소리가 그를 도왔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이 모인 마당의 나무에게로 번개가 쳤다. 번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굉음. 그것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늘에 계신 신의 명령이다."
노인은 엄숙한, 그러나 침울한 태도로 말했다. 멍하니 선 아이들 속에서 주림은 몸을 돌렸다. 그는 자리를 조용히 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이들의 싸움일 뿐이다. 예화는 어째서 그러한 일들을 내린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모든 것이 금기인지. 심지어 싸움조차도, 그는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금지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강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아이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억눌렀다. 강아지는 곁을 떠날 것이다. 너무 많은 문제를 저질렀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예화, 하늘에 있는 위대한 신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밤, 그는 처음으로 예화의 사자를 보았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었다. 은은한 달로부터 내려와 노인이 건네주는 강아지를 받아갔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별이 빛났다. 짐을 싼 우림과 둠밈은 그 별을 따라 함께 떠났다.
아이들은 강아지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처음으로 본 예화의 사자와 그 예쁜 빛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동시에 둠밈과 우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그것이 부럽다고들 했다. 주림은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 방에서 그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실망한 어가문과 기밈의 표정. 날카롭게 사자를 바라보던 둠밈의 시선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리둥절해 하던 우림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들 사이에서 건네지던 강아지. 그 빛나는 생명을 생각했다. 그를 쓰다듬던 일이며 그를 옆에 두고 기밈과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한 순간의 일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무심한 추억이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손을 들었다. 낮은 흙바닥에 기호를 썼다. 논리적이지 못한 기호들이 흙에 상처를 남겼다. 문자라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형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동안 자신의 기호를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홀로 주림을 바라보며 천천히 섰다. 그 주름진 눈매는 마치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왜!"
주림은 말이 막혀서 잠시 쉬었다. 그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왜 우리에게 강아지를 주신 거에요? 처음부터 그 예화에게 바치시지 그랬어요."
그는 악에 받혀 소리쳤다.
"신은 영원하지. 우리는 영원하지 않단다."
노인은 목소리를 줄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주림은 그가 마치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종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고 해서, 네가 느낀 사랑이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사랑이요?"
주림은 놀라며 되물었다. 노인은 말했다.
"네가 강아지를 보면서 느낀 것 말이다. 신이 이 세상을 통치하기 전에, 세상에는 그러한 것들이 많았단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 네가 강아지를 보면서 느낀 것. 네가 기밈이나 어가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그 종류 중 하나야. 조금 더 크게 되면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도 알게 될 거다. 나는…… 그러한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끝이 나서."
"끝이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돼."
"왜 그런데요?"
"신의 뜻이란다."
노인은 단언했다. 주림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이든 뭐라든, 와 보라죠. 때려줄 테니까."
"그래도 끝은 와."
"그렇다면 늦출 거에요. 그렇게 할 거에요."
주림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반드시 그렇게 하거라."
노인은 쓰게 웃었다. 주림은 그의 눈을 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주림은 아직 축축히 젖은 눈을 들었다.
"저도 알고 싶어요."
"무엇을 말이냐?"
"예화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말이에요."
"예화는 신이며, 인간은 그에 순종해야 한다. 복종하고 멸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어요. 전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알고 싶어요."
노인은 잠시 기다렸다. 묵묵히 주림이 그린 기호들을 바라보았다. 짧게 탄식했다.
"기밈처럼 너도 배우고 싶단 말이냐?"
그는 손을 들어보였다.
"나는 가르쳐줄 수 없다. 신이 금지했다."
주림은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실망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눈이었다. 그것은 다만 갈구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은 그의 눈과 그의 눈에 담긴 지성을 보았다.
노인은 말없이 손짓을 했다.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동굴의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주림은 그 안에서 노인이 책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표지를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책이었다. 주림은 경이 속에서 그것을 받았다.
"힘든 일일 거다. 너는 이미 나이를 먹었고, 나는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어."
"괜찮아요."
노인은 미소를 띈 채 떠났다. 주림은 그제서야 그가 지금껏 알지 못한 문자로 적힌 문법책을 들었다.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이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공터에 자리잡았다.
주림은 가만히 앉았다. 기밈과 할아버지가 읽던 책을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읽었다.
유한한 시간은 흐르고, 시간 속에서 지성이 움텄다. 그는 땅바닥에 손을 댔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톱 사이로 흙알갱이들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주림.
그는 곧 아래에 다른 문자를 썼다.
강아지.
그는 문법책을 뒤적였다. 조금 생각한 뒤. 완전한 문장을 만들었다.
주림은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그는 기다린다.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강아지를, 그를 쓰다듬던 일이며, 그와 같이 뛰던 일을 기억했다. 기억 속에서 친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어린 어가문이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며 기밈이 그것을 놀리는 일들이 생생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침묵한 뒤 빛나는 눈을 떴다. 땅바닥을 응시하고 생각한 것들을 썼다.
주위는 조용하다. 멀리 벌레들이 나는 소리며, 앙상한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소리 뿐이었다. 그 정적 가운데 작은 소리가 울린다. 소년이 손을 움직이는 작은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바람에 사그라들고, 곧 사라진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