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포스트 크리스마스 上
'이 크리스마스가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게 해줘.'
남자는 봄의 한 가운데서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팠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시멘트 바닥과 영겨붙은 굳은 피에 머리카락 한 웅큼이 뜯겼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은 보다 안쪽에서 왔다. 두피가 아니라 두개골, 두개골이 아니라 뇌막, 뇌막이 아니라 뇌에 가까웠다. 기실 고통은 뇌 보다 더 안 쪽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할지 몰라, 그냥 머리가 아프다 생각했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따뜻한 공기가 폐를 드나들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고통이 더 선명해졌다. 남자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를 더듬자 굳은 피가 머리카락에 뒤엉켜 있었다. 쓸어내리자 머리카락 몇 개가 뽑히고 굳은 피가 부서졌다. 두피 안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그는 움찔하고 놀랐다. 아팠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주위를 더듬었다. 커다란 딱지가 앉은 것 같았다. 큰 상처였다. 머리가 아픈 것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듯 했다.
남자는 이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는 크게 휘청거렸다가 바닥을 손으로 짚은 뒤에 곧추 설 수 있었다. 남자가 있는 곳은 넓지 않은 골목이었다. 남자는 그림자에 덮인 골목길을 벽을 짚어가며 걸었다.
골목에서 벗어나자 오렌지 빛으로 가득찬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넓은 도로는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키 높은 아파트가, 그 사이엔 태양이 떠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인지 지고있는 태양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도로 한 가운데의 노란선을 따라 걸었다. 따스한 햇살이 찬바닥에 누워있었던 그의 몸을 데웠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남자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남자는 멈춰섰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주위를 돌아봤다. 건물, 도로, 인도, 간판, 신호등, 자동차.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허전함을 느꼈다. 뒷통수를 잡아끄는 불안 같은 것이기도 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주위를 다시 자세히 살폈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잡초가 눈에 띄였다. 건물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 덩쿨도 보였다. 성한 창문 보다 깨진 창문이 많다. 신호등엔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분명 이것들이 잘못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고심했다.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기억을 잃었다.
멍청하게 서 있던 남자를 움직인 것은 허기였다. 그는 가까운 상가로 들어가 가판대를 뒤적였다.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남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지금의 남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이런 식으로 먹을 것을 찾는게 익숙했다.
다음 가게로 움직였다. 비어있었다. 그 다음 가게로. 비었다. 그 다음. 아무 것도 없다. 그다음으로.
남자는 음식점 카운터를 뒤적이며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꼭 마트나 수퍼마켓, 편의점이 아니라도 음식은 있을 수 있어. 되려 마트나 편의점 같은 곳은 사람들이 몽땅 털어가버리니까, 그런데서 음식을 찾는게 더 바보같은 짓이지.'
'그렇다고 철물점에 음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또 모르지. 내가 말했잖아. 마트 같은 곳은 사람들이 몽땅 털어갔다고. 여기서 중요한건 털린 마트가 아냐. 사람들이 음식을 털어갔다는 거라고. 한 보따리 씩 훔쳐가서 그걸 앉은 자리서 다 먹었을까? 아니란 말이야. 음식 구하기가 힘들어질걸 아니까 어디 꿍쳐놓았을 거란 말이야. 알겠어? ……아, 봐. 여기 있잖아.'
남자는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가 떠올린 것은 과거였다. 남자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굴까?
그는 끙끙대면서 기억하려고 했지만 결국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곤 카운터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박하사탕이 두 봉지 있었다. 그는 한 봉지를 뜯고 끈적한 박하사탕을 두 세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식점의 깨어진 전면창으로 아까보다 어두워진 햇빛이 비추어들어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해가 지면 움직이지 않는게 좋다. 음식점에서 잠을 자는건 좋지 않다.
남자는 해가 지기전에 잠을 잘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여관방 정도라면 적당하다. 가정집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주위엔 보이지 않았다. 멀리 선 아파트들이 눈에 띄였지만 닿기 전에 해가 질 것 같았다. 죄다 상가 건물이다.
남자는 조급해 하지 않고 골목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당구장 2P' 그는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그건 기억을 떠올렸다기 보다 몸에 익은 습관에 가까웠다). 깨진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구장으로 들어갔다.
당구대가 여덟개였다. 그는 소파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가 소파가 뭐였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푹신하고 누울 수 있는 긴 의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왔다.
남자는 열린 창문 하나를 닫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당구대에 누웠다. 목 아래가 영 허전했다. 외투를 벗어 둘둘말아 베개로 삼았다. 등이 베겼다. 등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니 둥그런 것이 잡혔다. 당구공이었다.
'당구 잘 쳐? 아니지. 쳐본적은 있나?'
'오빠 따라 서너번 갔었는데. 칠 줄은 알아. 근데 당구대를 침대 삼는건 좀 신선하네. 누가 알려준거야?'
'누가 알려주긴. 아무데나 누워자다보니까 좀 나은데 찾은거지. 해 지려면 시간도 남았는데 당구나 칠까?'
'나쁠 거 없지.'
'뭐 칠까? 포켓볼? 사구? 삼구?'
'사구.'
남자는 피식 웃었다. 순 거짓말쟁이 같으니. 마쎄이로 쓰리쿠션 넣으면서 어떻게 치는 법만 안다는거야. 암만 못해도 오백은 치겠다.
남자의 표정은 금새 굳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는 기억이 낯설었고, 기억하며 미소짓는 얼굴도 낯설었다.
이러다가 얼굴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어떻게하지? 남자는 얼굴을 더듬거리면서 입을 비죽 내밀거나, 볼을 부풀리거나, "이" 하거나, "오" 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남자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안심했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잠들기 전까지 뒤척거리면서 기억 속에 나왔던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려 했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악몽을 꿨다.
새우잠을 자던 그는 베개 삼은 외투가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훔치자 물이 베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바지에 슥 닦고는 당구대에서 내려섰다. 약간의 현기증 때문에 그는 주저 앉았다. 이내 일어서 기지개를 폈다. 머리가 아팠다. 배가 고팠다. 소변도 마려웠다. 남자는 외투를 두르며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어떤 가로등도 불을 밝히지 않았다. 하늘에 수높인 별빛들 조차 떠오르는 옅은 태양빛이 덮어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였다. 어렴풋한 실루엣만이 사물을 구분케했다. 남자는 볼일을 해결하곤 다시 들어갈까 망설였다. 추웠다.
그때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짧게 한번.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적막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소리를 잘못들었나 했다. 다시 들려왔다. 짧게 한번. 멀지 않은 곳이었고, 남자는 홀린듯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먼지 내려앉은 자동차 사이에 아스팔트 길. 떠오르는 태양빛에 푸르스름한 안개가 더해진 창백함. 어두움 때문에 보는 것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희미했다. 그리고 그 길 한 가운데 리어카가 있었다. 정확히는 리어카와 한 청년.
청년은 인기척에 돌아봤다가 남자를 발견했다. 청년은 깜짝 놀라서 뭔가를 들고 외쳤다.
"잠깐! 스톱! 거기서 정지!"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었다.
"서라니까! 멈춰!"
남자는 기억을 잃기 전에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아이, 진짜!"
그리고 탕 하는 소리. 청년이 들고 있던건 총이었다. 총구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멈춰섰지만, 사실 총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청년의 총이 남자를 향했다.
"야, 너 뭐야? 하이에나냐?"
"하이에나?"
상처가 근질근질 해졌다.
"음. 아닌데. 하이에나떼는 다 갔는데. 그럼 넌 뭐야? 왜 왔어?"
"호루라기."
"뭐야? 손님이야? 근데 왜 안 섰어? 쏠뻔 했잖아."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너 진짜 하이에나 아냐? 뭐 바꾸러 온거야? 가지고 있는 거 있어?"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냈다. 남자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청년에게 건냈다.
"박하사탕."
"어? 박하사탕? ……아, 그거 바꿀꺼야? 좋아."
청년은 총을 내려두곤 남자를 힐끗 거리더니 리어카 안을 뒤적이다가 캔 하나를 꺼냈다. 야채참치다.
"그거 줘."
남자는 박하사탕을 내밀었고, 청년은 야채참치를 건냈다. 남자는 이 행동에서 상가를 들락거리며 서랍을 열어볼때와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렇게 많이 했었다.
청년이 말했다.
"이제 가."
"어딜?"
"어디로든."
남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때문에 서 있었다. 청년은 남자와 눈싸움을 하다가 말했다.
"뭐 찾는거라도 있어?"
"글쎄."
"와서 볼래?"
남자는 리어카로 다가갔다. 청년은 총 위로 손을 얹었지만 남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리어카엔 참치캔, 모자, 과도, 볼펜, 옥수수캔, 꽁치캔, 성냥, 알루미늄 야구배트, 비누, 손전등, 장갑, 신발, 건빵, 망치, 면도칼, 연고, 목도리, 달력, 치마, 바지, 파인애플캔, 마스크, 벽걸이시계, 소독약, 해열제, 라이터, 두통약, A4용지, 전투식량, 술, 건전지, 담배, 가위, 와이셔츠, 안경, 방독면, 코트, 티셔츠, 사탕, 장도리, 편지봉투, 기름, 휴지, 양초, 식칼, 책, 막대사탕, 초콜렛…… 이것저것 많이 있었다.
남자의 눈길을 끈 것은 달력이었다. 남자는 팔락이면서 지난 달력을 넘겼다. 떠오르는 이유는 없었지만 넘기다 보면 뭔가를 본다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처가 근질거렸다.
그때 청년이 놀란 얼굴로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야, 너 괜찮아?"
"뭐가?"
"머리에 그거. 다친거잖아?"
"맞아."
그러면서 손을 상처로 가져갔다. 여전히 따끔거린다. 간지럽다. 남자는 무시하면서 달력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갑자기 토악질이 밀려왔다. 입을 막았다가, 리어카 옆으로 구토했다. 먹은 것이 없어서 투명한 위액만 나왔다. 비틀거렸다.
"어이, 괜찮아?"
남자는 눈꺼풀이 무거워진다고 생각하다가 쓰러졌다. 12월이 펼쳐진 달력을 들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까지의 잠깐의 순간 동안 남자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여자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고, 오후 부터는 히히덕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갔느냐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게 뭐 어쨌는데?'
남자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즐길 사람은 없다. 근데, 날짜를 세고 있었던건가?
'크리스마스는 세계에서 안 즐기는 곳이 없잖아. 북반구 남반구 안 가리고 모두 즐기는게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이 양반이 뭘 좀 모르는구만.'
최후의 보루라니. 그게 뭐야. 인간은 끝장 났잖아. 그런 말들이 남자의 입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정작 뱉은건 다른 말이었다.
'그래서 뭐할건데? 선물이라도 주고 받을까?'
'당연히 그래야지.'
'뭘 당연히 그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관둬라. 사치다. 다른 사람들이 막 욕할걸.'
'그래도 선물 줄거지? 나도 챙겨둘테니까.'
'생각해보고.'
남자는 악몽을 꿨다.
눈을 뜨기전에 남자는 깼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빠. 이 아저씨 누구야?"
"나도 모르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해?"
"아픈 사람이야."
"뭐 바꿔온건 없어?"
옷 스치는 소리.
"이 아저씨? 이 아저씬 먹는게 아니잖아."
"캔 남은거 많잖아. 그거 먹어."
"비린내나."
"옥수수 먹어. 복숭아나."
"아니. 쇠비린내."
"오래되서 그런가. 요릴 해야되나."
"내가 할까?"
"냄비가 어디 구석에 있을텐데."
"근데 참치캔이랑 꽁치캔으로 뭘 해먹는데?"
남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웠다.
눈에 보이는건 가정집이다. 거실 너머 창문에 아파트가 보인다. 여기도 아파트인 모양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 아저씨 깼다."
돌아보니 소파 위에 여자 아이가 있다. 그 옆엔 청년이 있다.
청년이 말했다.
"깼네?"
목이 잠겨있어 남자는 "으흠." 하고 가다듬었다.
"여기 어디야?"
청년이 대답했다.
"우리집."
"집?"
여자 아이가 물었다.
"아저씬 누구야?"
"잘 모르겠는데."
청년이 말했다.
"좀더 누워있어도 되. 넉넉하다곤 못해도 한 사람 정도는 몇 일 데리고 있을 수 있거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떻게 사람 몸에 살이 없어. 얼마나 굶은거야? 머리에 상처는 하이에나한테 당한건가?"
"……글쎄. 근데 너 몇 년생?"
"어?"
"몇 년생이냐고."
"88인데."
"나 86."
"말 높이라고?"
"응."
청년은 꿈뻑거렸다. 여자 아이가 제 오빠 대신 항변했다.
"우와, 2년 가지고 째째하게."
"넌 몇 년생인데?"
"94."
"넌 꼭해라."
분위기가 떨떠름해졌다. 청년은 방 구석으로 냄비를 찾으러갔고, 여자 아이는 옆 자리에서 캔을 땄다. 남자는 앉아 있었다. 청년이 방에서 캔 몇 개를 가지고 오며 말했다.
"어, 그거 머리 상처 있잖아요."
남자는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붕대가 감겨져 있음을 깨닫는다.
"지저분해서 머리카락도 자르고 소독하고 연고도 바르고 했어요. 좀 심한거 같은데 어디서 그렇게 다친거에요? 이 근처엔 하이에나도 없는데."
"몰라. 음. 하이에나가 뭐지?"
"하이에나 몰라요?"
청년과 여자 아이는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깡패나 양아치 같은 놈들. 하이에나라고 부르잖아요. 막 물건 뺐고 사람 죽이고. 다른데서 온 사람들도 다 하이에나라고 부르던데. 그래도 이 동네선 싹 사라졌어요. 여긴 사람도 많이 없고 하니까. 끝에 남은 몇 놈도 작년 겨울쯤에 제가 쫒아 버렸고."
상처가 다시 간질간질 해졌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선 현관문으로 향했다.
청년이 말했다.
"어? 가게요? 좀더 있다가도 되는데. 가려면 밥이라도 좀 먹고 가요."
"오줌 누러가."
남자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뒤에서 여자 아이가 "나 저 아저씨 싫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높았다. 남자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서 층 수를 세곤 11층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리어카에 물건도 많고 한걸 보면 그거 들고 계단 들락날락 하기는 어려울텐데.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살까. 여동생 때문인가?
아파트 아래론 정오의 도시가 보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남자는 풍경을 내려다봤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머리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잃어버렸던 기억들도 천천히 제 자릴 찾아갔다.
잃어버렸던 기억이 되찾아온다고 그것이 남자의 머리에 떠오르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남자의 기억은 하나의 창고였다. 서류철로 정리된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여져 서랍에 넣어져 정리되었다. 기억을 잃는 일은 그런 서랍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고, 기억을 되찾는 것은 잃은 서랍을 제 자리에 꽂아넣는 것이었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선 남자는 서랍을 열고 서류철을 뒤적거려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하이에나에 대한 기억을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남자가 조급해하며 'ㅎ' 분류 서랍 앞에서 '하이에나'에 대한 기억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었다.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에나때가 도시에 들어왔다더라. 전부 조심하래. 도시 남은 사람들끼리 뭉치자는 이야기도 있고. 또 가야돼. 해지기 전에 사람들이랑 한번 더 이야기 해보기로 했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묻는다.
'진짜? 근데 너무 호들갑 떠는거 아냐?'
'뭐가 호들갑이야. 소문 못들었어?'
'암만 그래도 그런 소문을 어떻게 믿어. 부풀려진거겠지.'
'부풀려졌다고 해도 조심 할건 조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듯 손뼉을 치곤 말했다.
'아, 맞다. 내일 크리스마스인거 알지? 선물 꼭 챙겨. 나도 챙겨둘테니까.'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나 몰라.'
'한 해의 끄트머리에 있잖아.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작년에도 말한거 같은데.'
'그랬던가.'
그리고 또 다른 기억.
눈이 오고 있었다. 하이에나때가 눈 앞에 서있다. 남자는 그제야 '하이에나' 라는 은어가 그 특성 보다는 생김새 때문에 붙었다는걸 알게된다. 얼룩덜룩 대충 기워 입은 옷가지가 진짜 하이에나 처럼 보인다. 모두 칼이나 몽둥이 같은걸 들고 있다. 하이에나들은 남자를 비웃고 있고, 남자는 슬픔에 벅차 눈에선 눈물이. 차가운 들숨을 뜨겁게 내뱉는다.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깜짝 놀란 남자는 눈물을 닦아내고 멍하게 도시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기억창고 앞에서 기억들을 좀더 기다렸다. '크리스마스'나 '인류 최후의 보루' 따위 앞에서였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올 것이다. 남자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여자 아이가 나왔다.
"오빠가 밥먹으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여자는 집안에 있었다. 겨울이었고, 밖에 나돌아 다니다가 잠들기엔 너무 추운 계절이었다. 적당한 집을 찾아서 그동안 모아둔 음식 따위들로 겨울을 나는 편이 현명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오자 여자는 슬쩍 확인하곤 "왔어?" 하고 말했다.
남자는 목되를 풀어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에나때가 도시에 들어왔다더라. 전부 조심하래. 도시 남은 사람들끼리 뭉치자는 이야기도 있고. 또 가야돼. 해지기 전에 사람들이랑 한번 더 이야기 해보기로 했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묻는다.
"진짜? 근데 너무 호들갑 떠는거 아냐?"
"뭐가 호들갑이야. 소문 못들었어?"
"암만 그래도 그런 소문을 어떻게 믿어. 부풀려진거겠지."
"부풀려졌다고 해도 조심 할건 조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듯 손뼉을 치곤 말했다.
"아, 맞다. 내일 크리스마스인거 알지? 선물 꼭 챙겨. 나도 챙겨둘테니까."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나 몰라."
"한 해의 끄트머리에 있잖아.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작년에도 말한거 같은데."
"그랬던가."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보기에 여자는 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여자는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망했고, 이제 남자가 수염을 기르든 말든 신경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자의 수염이 조금이라도 길어질라치면 어디서 구했는지 면도칼을 가져와서는 깎으라고, 아니면 깎아주겠다고 보챘다. 비슷한 것으로 손톱이나 머리카락도 있었다.
또 여자는 '세는 사람' 이었다. 종말 이후 사람들은 바빴고, 날짜 같은것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노트에 달력까지 빈 도화지에 그려가면서 날짜를 셌다. 남자가 보기에 그리 쓸모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주, 아주 가끔씩 사람들은 날짜를 물어왔고 여자가 그걸 답해주긴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탕 같은걸 쥐어주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 정도의 쓸모였다.
여자는 '읽는 사람' 이기도 했다. 책이란건 구겨서 옷 사이에 집어넣어 보온을 하거나, 땔감 삼아 태우는게 보통이다. 그치만 여자는 읽기 위해서 책을 들었다.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한번은 남자가 물었다.
"무슨 책 읽어?"
여자가 책을 들어 표지를 보였다. '조류대도감' 이었다.
"그걸 왜 봐? 머리 써도 배고파진다."
"예전에는 책 읽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거든. 근데 이제 시간 많잖아."
여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뭣보다 여자는 '헤아리는 사람' 이었다. 이 땅에 빛들이 사라지고, 공기가 맑아지면서 밤 하늘은 별들로 채워졌다. 여름밤이면 남자는 꼼짝없이 건물 옥상에서 잠을 자야했다. 여자가 별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옥상 위에 누우면 가려지는 시야없이 탁 트인 밤하늘이 보였다. 그럼 여자는 별들을 짚어가며 별과 별자리의 이름을 불렀고, 남자는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멸종해가는 마당에 별자리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먹고 살기 힘들때 이게 무슨 짓인지. 간혹 남자가 투덜거릴때 쯤이면 여자가 말하곤 했다. "우리가 저 이름을 안 불러주면 또 누가 불러주냐, 이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해도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건지 몰랐다.
여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있을까 싶은데도.
남자는 손목시계를 봤다. 다시 가봐야할 시간이었다.
"다시 가볼께."
여자는 책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는 안으로 느슨한 망을 두고 있다. 정보를 나누고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는데, 함께 생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임 장소가 공터라는 점에서 불신을 크게 느꼈다. 열 댓명 되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서라곤 했지만 모두 넓게 떨어진 모습을, 여자는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말했다.
"파란 모자가 안보이는데."
파란 모자는 스무 살도 안된 꼬맹이었다.
또 누가 말했다.
"좀 늦나보지."
"걔 지하철역 근처 살지 않아? 하이에나떼가 그리로 왔담서?"
"그랬던가?"
남자가 말했다.
"찾으러 가볼껍니까?"
"됐어, 뭐하러."
"늦는다 생각하는게 낫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하이에나떼가 어디로 들어왔다 그랬지?"
"말 들어보면 지하철역 있는대로 왔다든데요."
"백화점 있고, 거기?"
"아 나도 거기 알아."
"일단 끼리끼리 숨는게 낫겠지?"
"사람 숫자는 우리가 더 많은데……."
"그럼 싸우자고? 뭐하러 피 볼려구."
남자가 말했다.
"어차피 숨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요. 이 중에 한명도 안걸리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그건 요행이고."
"그렇다고 싸우면? 이 도시에 총이 몇 자루 있지?"
누가 손을 꼽더니 말했다. "두 자루요. 하나는 권총."
"그런데 싸우자고? 하이에나 놈들은 적어도 몇 자루는 있을걸."
"그리고 걔네들 여기는 그냥 지나친다는 소문도 있어. 더 큰 도시로 간다고."
"그럼 싸우는게 손해네."
"걸리면 운수 나쁜거지. 뭐."
이야기는 좀더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이미 난 상황이었다. 이 도시는 조용히 쭈그리고 하이에나 때가 지나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였다. 해가 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제 흩어지자고, 다음에 또 볼 수 있길 바란다며 헤어지려던 참이었다.
저 골목 너머에서 누가 나타났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도시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파란 모자와 함께 사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사람 몇몇이 다가가자 아이는 풀썩 쓰러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흘렀다. 옷이 피범벅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아이가 울면서 대답했다.
"하이에나가 왔어요. 식구를 다 데려갔어요. 파란 모자가 죽었어요." 그리곤 파란 모자가 자신을 감싸준 이야기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한 이야기도 했다.
"운도 더럽게 없네."
"하필이면 파란 모자냐."
어떤 사람은 외면하고, 어떤 사람은 혀를 찼다. 걸음을 빨리해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몇 명은 해지기 전에 가보자며 아이를 데리고 파란 모자가 죽은곳으로 갔다. 남자도 그 중에 있었다.
파란 모자는 여관을 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곤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목도를 들고 쓰러져 있는 파란 모자가 있었다. 맞아죽은 것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왜 데려간거지?"
"소문 못들었냐. 잡아먹는데잖아."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은 사람들은 웅성거리곤 해가 지고 있다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좀더 여유 있는 사람이 데려갔다. 남자도 길을 되걷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는 위험한 것 같아. 이제 도시에서 음식 찾기도 힘들어지고. 산골로 들어갈까. 산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살까. 그게 더 낫겠지. 가서 이야기해봐야겠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엔 여자가 없었다. 남자는 어리벙벙해졌다. 이런때 얘는 어딜 간거야. 해가져서 어둑어둑했다. 별이라도 보고 있나 싶어 옥상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남자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 쪽지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살폈지만 읽을 수 있는건 자신의 이름 뿐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았다. 하지만 가스가 없는 라이터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방 구석에 있을 건전지와 손전등이 기억났다. 쓸 일이 없어서 장식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라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는 더듬으며 손전등을 찾았다. 없었다. 손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남은 라이터가 있다는걸 기억해내곤 이것저것 넣어둔 골판지 박스를 뒤적였다. 겨우 찾아낸 라이터로 남자는 종이 쪽지로 읽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가지러 백화점에 가. 손전등 가져갈께.'
남자는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빛도 없이 걷기엔 도시의 밤길은 너무 어두웠다. 달도 뜨지 않는 밤. 남자는 헐떡거리면서 뛰었다. 도대체 그놈의 크리스마스가 뭐길래.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눈 앞에 백화점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누가 없나 살폈다. 하지만 도로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깨진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 여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화점엔 창문이 없어 코 앞도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손끝을 깨물다가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하이에나 비슷한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급히 백화점 안으로 숨어들었다. 남자가 알기에 이렇게 떼지어 다니는건 하이에나 밖에 없었다. 그는 하이에나들이 지나가길 기다렸으나, 예상밖으로 하이에나들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구석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여자가 들어가는거 봤냐?"
"봤다니까."
"한 밤중에 여길 왜 들어와? 구라같은데. 돼지들은 밤 되면 안 움직인다고."
"근데 봤는데 어쩔꺼야. 못믿겠음 가던가."
"여기서 언제 찾아.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되냐?"
"아, 그럴까?"
서 넛 되는 하이에나들이었다. 남자는 침을 삼켰다. 하이에나들은 백화점 로비에서 웅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어디론가 가버린건 아닐테였다. 여자를 찾아야했다. 남자는 더듬거리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켜고 다닐테니 생각보단 찾기 수월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분간만 숨어 있으면 따돌릴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다. 백화점은 남자의 생각보다 넓었고 층 수도 높았다. 남자는 진땀을 빼면서 백화점의 전층을 돌아봤지만, 여자는 없었다. 남자는 불안감에 휩쓸려 급하게 내려왔다. 로비에 도착 했을때 구석진 벽면에 붙어 걸었다. 밖은 인기척이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물었다가 주변에 집히는 물건을 밖으로 던져 보았다. 뭔가 구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남자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오싹해졌다. 여자의 이름을 외치면서 골목을 뛰었다. 어둠이 목소리를 삼켰다. 욕도 외쳤다.
누가 손전등으로 빛을 비추었다, 말았다, 했다.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떠드냐?"
남자가 말했다.
"나야."
"네가 누군데?"
남자는 으쓱하면서 천천히 걸어가서 사내를 야구배트로 후려쳤다. 사내는 컥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남자는 발로 배를 차곤 말했다.
"딴 놈들 어디있어?"
사내는 칼을 들고 있었다. 남자는 칼을 발로 차서 빼앗곤 목으로 가져갔다.
"네놈들 지금 어디있냐고 묻잖아."
사내는 가까운 곳에 있는 주유소 이름을 말했고 남자는 사내를 한번 더 걷어찬 뒤 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에나들은 주유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휴대용 버너 몇 개로 뭔가를 끓이고 있고 그 주위로 십 수명이 웅성거리며 있었다. 가운데엔 가구들을 장작삼아 태우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유소 건물 안쪽으로 불이 환했다. 남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대로 건물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행운을 걸고 시험했다. 남자가 보기에 자신은 하이에나와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얼굴만 보이지 않도록 불 쪽으로 가까이 가지만 않았다.
누군가 힐끗 거렸지만 건물로 향하는 남자를 아무도 잡지 않았다.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몇 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내들이 입을 열기 전에 배트를 휘두렀다.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도 가슴을 맞았지만 견딜만 했다. 남자는 좀더 안쪽으로 향했다. 손발이 묶인 여자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빼앗은 칼로 끈을 풀었다. 그때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끝났구나. 남자가 생각했다. 여자가 책상을 문으로 가져갔다.
여자가 말했다.
"지금 몇 시야?"
"뭐?"
"지금 몇 시냐고."
남자는 당황스러워 하다가 재빨리 시계를 살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 붙었다.
"이제 크리스마스네."
남자는 그 크리스마스란걸 그만 좀 말했으면 했다. 진짜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까? 남자가 두리번 거리는데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켰다. 남자는 여자가 문을 막는 사이 아이들을 창문너머로 넘겼다. 문을 부수려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이 부서지고 밖이 들여다 보였다. 하이에나들이 욕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니 차례야."
"아냐 난 안가는게 나."
여자는 책상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남자는 책상 틈에 배트를 끼우곤 서둘러 여자를 안아 창틀로 넘겼다. 그리곤 자신도 넘어왔다. 그때 문 밖으로 창문으로 도망친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서둘러 뛰었다. 멀리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저기 까지만 가면 훤한 길목이었다. 쉽게 쫒아오지 못할터였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이상했다. 너 왜그래, 하고 묻자 여자가 주저 앉았다. 남자가 등을 바치자 축축한 뜨거움이 만져졌다. 피였다. 서둘러 등을 보니 여자 등에 찔리고 베인 상처가 있었다. 아마 등으로 책상을 막고 있을때였나 보다.
여자가 말했다.
"이 크리스마스가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게 해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잘못이해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말했다. 여자가 남자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남자는 눈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며 여자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포스트 크리스마스 下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왔을때 여자 아이는 선물을 하나 받게 되었다.
'이 크리스마스가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게 해줘.'
남자는 봄의 한 가운데서 눈을 떴다. 머리가 아팠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시멘트 바닥과 영겨붙은 굳은 피에 머리카락 한 웅큼이 뜯겼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은 보다 안쪽에서 왔다. 두피가 아니라 두개골, 두개골이 아니라 뇌막, 뇌막이 아니라 뇌에 가까웠다. 기실 고통은 뇌 보다 더 안 쪽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할지 몰라, 그냥 머리가 아프다 생각했다.
숨을 한껏 들이켰다. 따뜻한 공기가 폐를 드나들었다. 머리가 맑아지자 고통이 더 선명해졌다. 남자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를 더듬자 굳은 피가 머리카락에 뒤엉켜 있었다. 쓸어내리자 머리카락 몇 개가 뽑히고 굳은 피가 부서졌다. 두피 안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그는 움찔하고 놀랐다. 아팠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주위를 더듬었다. 커다란 딱지가 앉은 것 같았다. 큰 상처였다. 머리가 아픈 것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듯 했다.
남자는 이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는 크게 휘청거렸다가 바닥을 손으로 짚은 뒤에 곧추 설 수 있었다. 남자가 있는 곳은 넓지 않은 골목이었다. 남자는 그림자에 덮인 골목길을 벽을 짚어가며 걸었다.
골목에서 벗어나자 오렌지 빛으로 가득찬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넓은 도로는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키 높은 아파트가, 그 사이엔 태양이 떠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인지 지고있는 태양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도로 한 가운데의 노란선을 따라 걸었다. 따스한 햇살이 찬바닥에 누워있었던 그의 몸을 데웠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남자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남자는 멈춰섰다.
"여기가 어디지?"
남자는 주위를 돌아봤다. 건물, 도로, 인도, 간판, 신호등, 자동차.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마음 한 구석에서 허전함을 느꼈다. 뒷통수를 잡아끄는 불안 같은 것이기도 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주위를 다시 자세히 살폈다.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잡초가 눈에 띄였다. 건물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 덩쿨도 보였다. 성한 창문 보다 깨진 창문이 많다. 신호등엔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분명 이것들이 잘못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남자는 고심했다.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기억을 잃었다.
멍청하게 서 있던 남자를 움직인 것은 허기였다. 그는 가까운 상가로 들어가 가판대를 뒤적였다.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남자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지금의 남자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이런 식으로 먹을 것을 찾는게 익숙했다.
다음 가게로 움직였다. 비어있었다. 그 다음 가게로. 비었다. 그 다음. 아무 것도 없다. 그다음으로.
남자는 음식점 카운터를 뒤적이며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꼭 마트나 수퍼마켓, 편의점이 아니라도 음식은 있을 수 있어. 되려 마트나 편의점 같은 곳은 사람들이 몽땅 털어가버리니까, 그런데서 음식을 찾는게 더 바보같은 짓이지.'
'그렇다고 철물점에 음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건 또 모르지. 내가 말했잖아. 마트 같은 곳은 사람들이 몽땅 털어갔다고. 여기서 중요한건 털린 마트가 아냐. 사람들이 음식을 털어갔다는 거라고. 한 보따리 씩 훔쳐가서 그걸 앉은 자리서 다 먹었을까? 아니란 말이야. 음식 구하기가 힘들어질걸 아니까 어디 꿍쳐놓았을 거란 말이야. 알겠어? ……아, 봐. 여기 있잖아.'
남자는 눈을 깜박거렸다. 남자가 떠올린 것은 과거였다. 남자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굴까?
그는 끙끙대면서 기억하려고 했지만 결국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곤 카운터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박하사탕이 두 봉지 있었다. 그는 한 봉지를 뜯고 끈적한 박하사탕을 두 세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음식점의 깨어진 전면창으로 아까보다 어두워진 햇빛이 비추어들어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해가 지면 움직이지 않는게 좋다. 음식점에서 잠을 자는건 좋지 않다.
남자는 해가 지기전에 잠을 잘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여관방 정도라면 적당하다. 가정집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주위엔 보이지 않았다. 멀리 선 아파트들이 눈에 띄였지만 닿기 전에 해가 질 것 같았다. 죄다 상가 건물이다.
남자는 조급해 하지 않고 골목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당구장 2P' 그는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그건 기억을 떠올렸다기 보다 몸에 익은 습관에 가까웠다). 깨진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구장으로 들어갔다.
당구대가 여덟개였다. 그는 소파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가 소파가 뭐였지, 하고 생각했다가 이내 푹신하고 누울 수 있는 긴 의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왔다.
남자는 열린 창문 하나를 닫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당구대에 누웠다. 목 아래가 영 허전했다. 외투를 벗어 둘둘말아 베개로 삼았다. 등이 베겼다. 등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니 둥그런 것이 잡혔다. 당구공이었다.
'당구 잘 쳐? 아니지. 쳐본적은 있나?'
'오빠 따라 서너번 갔었는데. 칠 줄은 알아. 근데 당구대를 침대 삼는건 좀 신선하네. 누가 알려준거야?'
'누가 알려주긴. 아무데나 누워자다보니까 좀 나은데 찾은거지. 해 지려면 시간도 남았는데 당구나 칠까?'
'나쁠 거 없지.'
'뭐 칠까? 포켓볼? 사구? 삼구?'
'사구.'
남자는 피식 웃었다. 순 거짓말쟁이 같으니. 마쎄이로 쓰리쿠션 넣으면서 어떻게 치는 법만 안다는거야. 암만 못해도 오백은 치겠다.
남자의 표정은 금새 굳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는 기억이 낯설었고, 기억하며 미소짓는 얼굴도 낯설었다.
이러다가 얼굴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어떻게하지? 남자는 얼굴을 더듬거리면서 입을 비죽 내밀거나, 볼을 부풀리거나, "이" 하거나, "오" 했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남자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그제야 그는 안심했고,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잠들기 전까지 뒤척거리면서 기억 속에 나왔던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려 했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악몽을 꿨다.
새우잠을 자던 그는 베개 삼은 외투가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훔치자 물이 베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바지에 슥 닦고는 당구대에서 내려섰다. 약간의 현기증 때문에 그는 주저 앉았다. 이내 일어서 기지개를 폈다. 머리가 아팠다. 배가 고팠다. 소변도 마려웠다. 남자는 외투를 두르며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어떤 가로등도 불을 밝히지 않았다. 하늘에 수높인 별빛들 조차 떠오르는 옅은 태양빛이 덮어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였다. 어렴풋한 실루엣만이 사물을 구분케했다. 남자는 볼일을 해결하곤 다시 들어갈까 망설였다. 추웠다.
그때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짧게 한번.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적막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소리를 잘못들었나 했다. 다시 들려왔다. 짧게 한번. 멀지 않은 곳이었고, 남자는 홀린듯 소리를 향해 걸어갔다.
먼지 내려앉은 자동차 사이에 아스팔트 길. 떠오르는 태양빛에 푸르스름한 안개가 더해진 창백함. 어두움 때문에 보는 것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희미했다. 그리고 그 길 한 가운데 리어카가 있었다. 정확히는 리어카와 한 청년.
청년은 인기척에 돌아봤다가 남자를 발견했다. 청년은 깜짝 놀라서 뭔가를 들고 외쳤다.
"잠깐! 스톱! 거기서 정지!"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었다.
"서라니까! 멈춰!"
남자는 기억을 잃기 전에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아이, 진짜!"
그리고 탕 하는 소리. 청년이 들고 있던건 총이었다. 총구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멈춰섰지만, 사실 총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청년의 총이 남자를 향했다.
"야, 너 뭐야? 하이에나냐?"
"하이에나?"
상처가 근질근질 해졌다.
"음. 아닌데. 하이에나떼는 다 갔는데. 그럼 넌 뭐야? 왜 왔어?"
"호루라기."
"뭐야? 손님이야? 근데 왜 안 섰어? 쏠뻔 했잖아."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너 진짜 하이에나 아냐? 뭐 바꾸러 온거야? 가지고 있는 거 있어?"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꺼냈다. 남자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청년에게 건냈다.
"박하사탕."
"어? 박하사탕? ……아, 그거 바꿀꺼야? 좋아."
청년은 총을 내려두곤 남자를 힐끗 거리더니 리어카 안을 뒤적이다가 캔 하나를 꺼냈다. 야채참치다.
"그거 줘."
남자는 박하사탕을 내밀었고, 청년은 야채참치를 건냈다. 남자는 이 행동에서 상가를 들락거리며 서랍을 열어볼때와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렇게 많이 했었다.
청년이 말했다.
"이제 가."
"어딜?"
"어디로든."
남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때문에 서 있었다. 청년은 남자와 눈싸움을 하다가 말했다.
"뭐 찾는거라도 있어?"
"글쎄."
"와서 볼래?"
남자는 리어카로 다가갔다. 청년은 총 위로 손을 얹었지만 남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리어카엔 참치캔, 모자, 과도, 볼펜, 옥수수캔, 꽁치캔, 성냥, 알루미늄 야구배트, 비누, 손전등, 장갑, 신발, 건빵, 망치, 면도칼, 연고, 목도리, 달력, 치마, 바지, 파인애플캔, 마스크, 벽걸이시계, 소독약, 해열제, 라이터, 두통약, A4용지, 전투식량, 술, 건전지, 담배, 가위, 와이셔츠, 안경, 방독면, 코트, 티셔츠, 사탕, 장도리, 편지봉투, 기름, 휴지, 양초, 식칼, 책, 막대사탕, 초콜렛…… 이것저것 많이 있었다.
남자의 눈길을 끈 것은 달력이었다. 남자는 팔락이면서 지난 달력을 넘겼다. 떠오르는 이유는 없었지만 넘기다 보면 뭔가를 본다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처가 근질거렸다.
그때 청년이 놀란 얼굴로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야, 너 괜찮아?"
"뭐가?"
"머리에 그거. 다친거잖아?"
"맞아."
그러면서 손을 상처로 가져갔다. 여전히 따끔거린다. 간지럽다. 남자는 무시하면서 달력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갑자기 토악질이 밀려왔다. 입을 막았다가, 리어카 옆으로 구토했다. 먹은 것이 없어서 투명한 위액만 나왔다. 비틀거렸다.
"어이, 괜찮아?"
남자는 눈꺼풀이 무거워진다고 생각하다가 쓰러졌다. 12월이 펼쳐진 달력을 들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까지의 잠깐의 순간 동안 남자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여자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고, 오후 부터는 히히덕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갔느냐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게 뭐 어쨌는데?'
남자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 처럼 느껴졌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즐길 사람은 없다. 근데, 날짜를 세고 있었던건가?
'크리스마스는 세계에서 안 즐기는 곳이 없잖아. 북반구 남반구 안 가리고 모두 즐기는게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이 양반이 뭘 좀 모르는구만.'
최후의 보루라니. 그게 뭐야. 인간은 끝장 났잖아. 그런 말들이 남자의 입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정작 뱉은건 다른 말이었다.
'그래서 뭐할건데? 선물이라도 주고 받을까?'
'당연히 그래야지.'
'뭘 당연히 그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관둬라. 사치다. 다른 사람들이 막 욕할걸.'
'그래도 선물 줄거지? 나도 챙겨둘테니까.'
'생각해보고.'
남자는 악몽을 꿨다.
눈을 뜨기전에 남자는 깼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빠. 이 아저씨 누구야?"
"나도 모르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해?"
"아픈 사람이야."
"뭐 바꿔온건 없어?"
옷 스치는 소리.
"이 아저씨? 이 아저씬 먹는게 아니잖아."
"캔 남은거 많잖아. 그거 먹어."
"비린내나."
"옥수수 먹어. 복숭아나."
"아니. 쇠비린내."
"오래되서 그런가. 요릴 해야되나."
"내가 할까?"
"냄비가 어디 구석에 있을텐데."
"근데 참치캔이랑 꽁치캔으로 뭘 해먹는데?"
남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웠다.
눈에 보이는건 가정집이다. 거실 너머 창문에 아파트가 보인다. 여기도 아파트인 모양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 아저씨 깼다."
돌아보니 소파 위에 여자 아이가 있다. 그 옆엔 청년이 있다.
청년이 말했다.
"깼네?"
목이 잠겨있어 남자는 "으흠." 하고 가다듬었다.
"여기 어디야?"
청년이 대답했다.
"우리집."
"집?"
여자 아이가 물었다.
"아저씬 누구야?"
"잘 모르겠는데."
청년이 말했다.
"좀더 누워있어도 되. 넉넉하다곤 못해도 한 사람 정도는 몇 일 데리고 있을 수 있거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떻게 사람 몸에 살이 없어. 얼마나 굶은거야? 머리에 상처는 하이에나한테 당한건가?"
"……글쎄. 근데 너 몇 년생?"
"어?"
"몇 년생이냐고."
"88인데."
"나 86."
"말 높이라고?"
"응."
청년은 꿈뻑거렸다. 여자 아이가 제 오빠 대신 항변했다.
"우와, 2년 가지고 째째하게."
"넌 몇 년생인데?"
"94."
"넌 꼭해라."
분위기가 떨떠름해졌다. 청년은 방 구석으로 냄비를 찾으러갔고, 여자 아이는 옆 자리에서 캔을 땄다. 남자는 앉아 있었다. 청년이 방에서 캔 몇 개를 가지고 오며 말했다.
"어, 그거 머리 상처 있잖아요."
남자는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붕대가 감겨져 있음을 깨닫는다.
"지저분해서 머리카락도 자르고 소독하고 연고도 바르고 했어요. 좀 심한거 같은데 어디서 그렇게 다친거에요? 이 근처엔 하이에나도 없는데."
"몰라. 음. 하이에나가 뭐지?"
"하이에나 몰라요?"
청년과 여자 아이는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깡패나 양아치 같은 놈들. 하이에나라고 부르잖아요. 막 물건 뺐고 사람 죽이고. 다른데서 온 사람들도 다 하이에나라고 부르던데. 그래도 이 동네선 싹 사라졌어요. 여긴 사람도 많이 없고 하니까. 끝에 남은 몇 놈도 작년 겨울쯤에 제가 쫒아 버렸고."
상처가 다시 간질간질 해졌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선 현관문으로 향했다.
청년이 말했다.
"어? 가게요? 좀더 있다가도 되는데. 가려면 밥이라도 좀 먹고 가요."
"오줌 누러가."
남자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뒤에서 여자 아이가 "나 저 아저씨 싫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높았다. 남자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서 층 수를 세곤 11층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리어카에 물건도 많고 한걸 보면 그거 들고 계단 들락날락 하기는 어려울텐데.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살까. 여동생 때문인가?
아파트 아래론 정오의 도시가 보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남자는 풍경을 내려다봤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머리는 안정을 되찾았으며, 잃어버렸던 기억들도 천천히 제 자릴 찾아갔다.
잃어버렸던 기억이 되찾아온다고 그것이 남자의 머리에 떠오르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남자의 기억은 하나의 창고였다. 서류철로 정리된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여져 서랍에 넣어져 정리되었다. 기억을 잃는 일은 그런 서랍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고, 기억을 되찾는 것은 잃은 서랍을 제 자리에 꽂아넣는 것이었다.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선 남자는 서랍을 열고 서류철을 뒤적거려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하이에나에 대한 기억을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남자가 조급해하며 'ㅎ' 분류 서랍 앞에서 '하이에나'에 대한 기억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었다.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에나때가 도시에 들어왔다더라. 전부 조심하래. 도시 남은 사람들끼리 뭉치자는 이야기도 있고. 또 가야돼. 해지기 전에 사람들이랑 한번 더 이야기 해보기로 했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묻는다.
'진짜? 근데 너무 호들갑 떠는거 아냐?'
'뭐가 호들갑이야. 소문 못들었어?'
'암만 그래도 그런 소문을 어떻게 믿어. 부풀려진거겠지.'
'부풀려졌다고 해도 조심 할건 조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듯 손뼉을 치곤 말했다.
'아, 맞다. 내일 크리스마스인거 알지? 선물 꼭 챙겨. 나도 챙겨둘테니까.'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나 몰라.'
'한 해의 끄트머리에 있잖아.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작년에도 말한거 같은데.'
'그랬던가.'
그리고 또 다른 기억.
눈이 오고 있었다. 하이에나때가 눈 앞에 서있다. 남자는 그제야 '하이에나' 라는 은어가 그 특성 보다는 생김새 때문에 붙었다는걸 알게된다. 얼룩덜룩 대충 기워 입은 옷가지가 진짜 하이에나 처럼 보인다. 모두 칼이나 몽둥이 같은걸 들고 있다. 하이에나들은 남자를 비웃고 있고, 남자는 슬픔에 벅차 눈에선 눈물이. 차가운 들숨을 뜨겁게 내뱉는다.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깜짝 놀란 남자는 눈물을 닦아내고 멍하게 도시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기억창고 앞에서 기억들을 좀더 기다렸다. '크리스마스'나 '인류 최후의 보루' 따위 앞에서였다.
어떤 기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올 것이다. 남자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여자 아이가 나왔다.
"오빠가 밥먹으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여자는 집안에 있었다. 겨울이었고, 밖에 나돌아 다니다가 잠들기엔 너무 추운 계절이었다. 적당한 집을 찾아서 그동안 모아둔 음식 따위들로 겨울을 나는 편이 현명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오자 여자는 슬쩍 확인하곤 "왔어?" 하고 말했다.
남자는 목되를 풀어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에나때가 도시에 들어왔다더라. 전부 조심하래. 도시 남은 사람들끼리 뭉치자는 이야기도 있고. 또 가야돼. 해지기 전에 사람들이랑 한번 더 이야기 해보기로 했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묻는다.
"진짜? 근데 너무 호들갑 떠는거 아냐?"
"뭐가 호들갑이야. 소문 못들었어?"
"암만 그래도 그런 소문을 어떻게 믿어. 부풀려진거겠지."
"부풀려졌다고 해도 조심 할건 조심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듯 손뼉을 치곤 말했다.
"아, 맞다. 내일 크리스마스인거 알지? 선물 꼭 챙겨. 나도 챙겨둘테니까."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나 몰라."
"한 해의 끄트머리에 있잖아.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작년에도 말한거 같은데."
"그랬던가."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보기에 여자는 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여자는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을 싫어했다. 물론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망했고, 이제 남자가 수염을 기르든 말든 신경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자의 수염이 조금이라도 길어질라치면 어디서 구했는지 면도칼을 가져와서는 깎으라고, 아니면 깎아주겠다고 보챘다. 비슷한 것으로 손톱이나 머리카락도 있었다.
또 여자는 '세는 사람' 이었다. 종말 이후 사람들은 바빴고, 날짜 같은것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노트에 달력까지 빈 도화지에 그려가면서 날짜를 셌다. 남자가 보기에 그리 쓸모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아주, 아주 가끔씩 사람들은 날짜를 물어왔고 여자가 그걸 답해주긴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탕 같은걸 쥐어주면서 고맙다고 했다. 그 정도의 쓸모였다.
여자는 '읽는 사람' 이기도 했다. 책이란건 구겨서 옷 사이에 집어넣어 보온을 하거나, 땔감 삼아 태우는게 보통이다. 그치만 여자는 읽기 위해서 책을 들었다.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한번은 남자가 물었다.
"무슨 책 읽어?"
여자가 책을 들어 표지를 보였다. '조류대도감' 이었다.
"그걸 왜 봐? 머리 써도 배고파진다."
"예전에는 책 읽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거든. 근데 이제 시간 많잖아."
여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뭣보다 여자는 '헤아리는 사람' 이었다. 이 땅에 빛들이 사라지고, 공기가 맑아지면서 밤 하늘은 별들로 채워졌다. 여름밤이면 남자는 꼼짝없이 건물 옥상에서 잠을 자야했다. 여자가 별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옥상 위에 누우면 가려지는 시야없이 탁 트인 밤하늘이 보였다. 그럼 여자는 별들을 짚어가며 별과 별자리의 이름을 불렀고, 남자는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멸종해가는 마당에 별자리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먹고 살기 힘들때 이게 무슨 짓인지. 간혹 남자가 투덜거릴때 쯤이면 여자가 말하곤 했다. "우리가 저 이름을 안 불러주면 또 누가 불러주냐, 이거야." 남자는 그렇게 말해도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건지 몰랐다.
여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있을까 싶은데도.
남자는 손목시계를 봤다. 다시 가봐야할 시간이었다.
"다시 가볼께."
여자는 책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는 안으로 느슨한 망을 두고 있다. 정보를 나누고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는데, 함께 생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모임 장소가 공터라는 점에서 불신을 크게 느꼈다. 열 댓명 되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서라곤 했지만 모두 넓게 떨어진 모습을, 여자는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말했다.
"파란 모자가 안보이는데."
파란 모자는 스무 살도 안된 꼬맹이었다.
또 누가 말했다.
"좀 늦나보지."
"걔 지하철역 근처 살지 않아? 하이에나떼가 그리로 왔담서?"
"그랬던가?"
남자가 말했다.
"찾으러 가볼껍니까?"
"됐어, 뭐하러."
"늦는다 생각하는게 낫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하이에나떼가 어디로 들어왔다 그랬지?"
"말 들어보면 지하철역 있는대로 왔다든데요."
"백화점 있고, 거기?"
"아 나도 거기 알아."
"일단 끼리끼리 숨는게 낫겠지?"
"사람 숫자는 우리가 더 많은데……."
"그럼 싸우자고? 뭐하러 피 볼려구."
남자가 말했다.
"어차피 숨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요. 이 중에 한명도 안걸리고 넘어갈거라 생각하면 그건 요행이고."
"그렇다고 싸우면? 이 도시에 총이 몇 자루 있지?"
누가 손을 꼽더니 말했다. "두 자루요. 하나는 권총."
"그런데 싸우자고? 하이에나 놈들은 적어도 몇 자루는 있을걸."
"그리고 걔네들 여기는 그냥 지나친다는 소문도 있어. 더 큰 도시로 간다고."
"그럼 싸우는게 손해네."
"걸리면 운수 나쁜거지. 뭐."
이야기는 좀더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이미 난 상황이었다. 이 도시는 조용히 쭈그리고 하이에나 때가 지나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였다. 해가 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제 흩어지자고, 다음에 또 볼 수 있길 바란다며 헤어지려던 참이었다.
저 골목 너머에서 누가 나타났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도시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파란 모자와 함께 사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였다. 사람 몇몇이 다가가자 아이는 풀썩 쓰러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흘렀다. 옷이 피범벅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아이가 울면서 대답했다.
"하이에나가 왔어요. 식구를 다 데려갔어요. 파란 모자가 죽었어요." 그리곤 파란 모자가 자신을 감싸준 이야기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한 이야기도 했다.
"운도 더럽게 없네."
"하필이면 파란 모자냐."
어떤 사람은 외면하고, 어떤 사람은 혀를 찼다. 걸음을 빨리해 사라지는 사람도 있었다. 몇 명은 해지기 전에 가보자며 아이를 데리고 파란 모자가 죽은곳으로 갔다. 남자도 그 중에 있었다.
파란 모자는 여관을 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곤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목도를 들고 쓰러져 있는 파란 모자가 있었다. 맞아죽은 것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왜 데려간거지?"
"소문 못들었냐. 잡아먹는데잖아."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은 사람들은 웅성거리곤 해가 지고 있다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좀더 여유 있는 사람이 데려갔다. 남자도 길을 되걷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는 위험한 것 같아. 이제 도시에서 음식 찾기도 힘들어지고. 산골로 들어갈까. 산골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고 살까. 그게 더 낫겠지. 가서 이야기해봐야겠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엔 여자가 없었다. 남자는 어리벙벙해졌다. 이런때 얘는 어딜 간거야. 해가져서 어둑어둑했다. 별이라도 보고 있나 싶어 옥상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남자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 쪽지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살폈지만 읽을 수 있는건 자신의 이름 뿐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았다. 하지만 가스가 없는 라이터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방 구석에 있을 건전지와 손전등이 기억났다. 쓸 일이 없어서 장식 비슷하게 되어버린 것이라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는 더듬으며 손전등을 찾았다. 없었다. 손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남은 라이터가 있다는걸 기억해내곤 이것저것 넣어둔 골판지 박스를 뒤적였다. 겨우 찾아낸 라이터로 남자는 종이 쪽지로 읽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가지러 백화점에 가. 손전등 가져갈께.'
남자는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빛도 없이 걷기엔 도시의 밤길은 너무 어두웠다. 달도 뜨지 않는 밤. 남자는 헐떡거리면서 뛰었다. 도대체 그놈의 크리스마스가 뭐길래.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눈 앞에 백화점이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누가 없나 살폈다. 하지만 도로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깨진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 여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화점엔 창문이 없어 코 앞도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손끝을 깨물다가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직 하이에나 비슷한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급히 백화점 안으로 숨어들었다. 남자가 알기에 이렇게 떼지어 다니는건 하이에나 밖에 없었다. 그는 하이에나들이 지나가길 기다렸으나, 예상밖으로 하이에나들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구석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여자가 들어가는거 봤냐?"
"봤다니까."
"한 밤중에 여길 왜 들어와? 구라같은데. 돼지들은 밤 되면 안 움직인다고."
"근데 봤는데 어쩔꺼야. 못믿겠음 가던가."
"여기서 언제 찾아.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안되냐?"
"아, 그럴까?"
서 넛 되는 하이에나들이었다. 남자는 침을 삼켰다. 하이에나들은 백화점 로비에서 웅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어디론가 가버린건 아닐테였다. 여자를 찾아야했다. 남자는 더듬거리면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손전등을 켜고 다닐테니 생각보단 찾기 수월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분간만 숨어 있으면 따돌릴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다. 백화점은 남자의 생각보다 넓었고 층 수도 높았다. 남자는 진땀을 빼면서 백화점의 전층을 돌아봤지만, 여자는 없었다. 남자는 불안감에 휩쓸려 급하게 내려왔다. 로비에 도착 했을때 구석진 벽면에 붙어 걸었다. 밖은 인기척이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물었다가 주변에 집히는 물건을 밖으로 던져 보았다. 뭔가 구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남자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오싹해졌다. 여자의 이름을 외치면서 골목을 뛰었다. 어둠이 목소리를 삼켰다. 욕도 외쳤다.
누가 손전등으로 빛을 비추었다, 말았다, 했다.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떠드냐?"
남자가 말했다.
"나야."
"네가 누군데?"
남자는 으쓱하면서 천천히 걸어가서 사내를 야구배트로 후려쳤다. 사내는 컥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남자는 발로 배를 차곤 말했다.
"딴 놈들 어디있어?"
사내는 칼을 들고 있었다. 남자는 칼을 발로 차서 빼앗곤 목으로 가져갔다.
"네놈들 지금 어디있냐고 묻잖아."
사내는 가까운 곳에 있는 주유소 이름을 말했고 남자는 사내를 한번 더 걷어찬 뒤 달리기 시작했다.
하이에나들은 주유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휴대용 버너 몇 개로 뭔가를 끓이고 있고 그 주위로 십 수명이 웅성거리며 있었다. 가운데엔 가구들을 장작삼아 태우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유소 건물 안쪽으로 불이 환했다. 남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대로 건물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행운을 걸고 시험했다. 남자가 보기에 자신은 하이에나와 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얼굴만 보이지 않도록 불 쪽으로 가까이 가지만 않았다.
누군가 힐끗 거렸지만 건물로 향하는 남자를 아무도 잡지 않았다.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몇 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사내들이 입을 열기 전에 배트를 휘두렀다.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도 가슴을 맞았지만 견딜만 했다. 남자는 좀더 안쪽으로 향했다. 손발이 묶인 여자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빼앗은 칼로 끈을 풀었다. 그때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끝났구나. 남자가 생각했다. 여자가 책상을 문으로 가져갔다.
여자가 말했다.
"지금 몇 시야?"
"뭐?"
"지금 몇 시냐고."
남자는 당황스러워 하다가 재빨리 시계를 살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여자가 피식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 붙었다.
"이제 크리스마스네."
남자는 그 크리스마스란걸 그만 좀 말했으면 했다. 진짜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까? 남자가 두리번 거리는데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켰다. 남자는 여자가 문을 막는 사이 아이들을 창문너머로 넘겼다. 문을 부수려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문이 부서지고 밖이 들여다 보였다. 하이에나들이 욕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니 차례야."
"아냐 난 안가는게 나."
여자는 책상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남자는 책상 틈에 배트를 끼우곤 서둘러 여자를 안아 창틀로 넘겼다. 그리곤 자신도 넘어왔다. 그때 문 밖으로 창문으로 도망친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서둘러 뛰었다. 멀리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저기 까지만 가면 훤한 길목이었다. 쉽게 쫒아오지 못할터였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쌕쌕 거리는 숨소리가 이상했다. 너 왜그래, 하고 묻자 여자가 주저 앉았다. 남자가 등을 바치자 축축한 뜨거움이 만져졌다. 피였다. 서둘러 등을 보니 여자 등에 찔리고 베인 상처가 있었다. 아마 등으로 책상을 막고 있을때였나 보다.
여자가 말했다.
"이 크리스마스가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게 해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잘못이해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등을 내밀며 업히라고 말했다. 여자가 남자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남자는 눈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며 여자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포스트 크리스마스 下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왔을때 여자 아이는 선물을 하나 받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