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겨울은 강원도 지방답게 매우 춥다. 짧은 가을을 뒤로 하고 어느새 12월.
현호는 살을 에이는 추위만큼이나 마음 속도 차갑게 식어갔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며 추위를 막아보려 옷깃을 여미고 왼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지만 오른
손에 든 봉투는 마치 얼음덩이마냥 차갑고 무겁다. 다시 한번 봉투를 쳐다본다. 본래
같았으면 행복을 가득 담은 봉투였어야 했지만 지금은 판도라의 상자 끝에 남은 처절
한 희망 한조각일뿐이다.

'이걸로 얼마나 먹고 살 수 있으려나. 알바 자리라도 구해야겠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봉투를 구겨넣는다. 오후까지만 해도 좋았다. 힘들고 지
치지만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하지만 일을 다 끝마치고서 직장의
담당 과장이 전한 말이 그의 가슴에 깊숙한 비수를 꽂았다.

'미안하지만 자넨 오늘까지만 일해줬으면 좋겠군. 아무래도...동료들과 잘 협력이 되
는거 같지 않구만.'

서른 인생에서 처음으로 얻은 정식 직장이었다. 그래서 내성적이고 어두운 성격을 벗
어던지고 어떻게든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동료들
과의 관계가 결국 일자리를 앗아갔다. 반년동안의 도전 끝에 남은 것은 이번달 열흘치
수당뿐이다.
현호의 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12월 초순에 접어든 명동의 저녁거리는 활발
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인파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일행끼리 대
화를 나눈다. 혹은 티격태격 싸우며 대화를 나눈다. 일행이 없는 사람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나는 저들과 무슨 차이가 있어서?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렇게 얼어버린 마음은 온도를 지닌 다른 마음을 질투한다. 현호는 도망치듯이 발걸
음을 빠르게 옮긴다. 그리고 구석 골목, 어두운 귀퉁이로 숨어들어갔다. 금새 사람은
없고 어두운 골목길만이 덩그러니 존재했다. 빛이 있고, 소리가 있고, 온도가 있는
세계에서 바깥으로 한걸음만 내딛자마자 정반대의 세상이 나타났다. 멀리서 왁자지껄
한 번화가의 소리가 들려오지만 정작 골목길 안에서 나는 소리는 없다. 현호는 점점
깊은 골목길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서 그의 마음은 차분히 풀려갔
다.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어둠 속에 가라앉은 고요의 세계였다.
현호는 갑자기 유쾌해졌다. 그래서 웃었다. 서글픈 미소였다.

'결국 나같은 놈은 이런 곳이 제격이구나.'

"하하."

짧게 만들어진 웃음을 터뜨리며 현호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그
의 집이 있다. 반지하 월셋방이지만 나름 괜찮은 곳이다. 아침이 되서 시끄럽게 출
근 소리를 만들어내는 인간들도 없고 눈을 시리게 하는 따가운 아침햇살도 없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가슴 속 깊히 박힌 비수
를 뽑아내고 어둠 속에서 그 마음을 치료해나갈 것이다.
그때 한 가로등 밑 쓰레기들을 모아놓은 곳에 현호의 시선이 향했다. 쓰레기 전용
봉투에 담긴 쓰레기자루 대여섯개가 둥글게 가로등을 둘러싸있는 와중, 화분 하나가
부서져 흙더미를 흩뿌린채 있었다. 그리고 꽃으로 보이는 식물이 화분에 담겨있었다.
어두운 밤길, 가로등의 노란 불빛을 맞은채 그렇게 부서진 화분이 버려져 있었다.
현호는 별 생각없이 가로등으로 가서 그 화분을 살펴보았다. 화분에 담긴 식물은 정
체를 알 수 없는 주황빛의 꽃잎에 얼룩덜룩한 검은 점박이가 박혀있는 괴상한 꽃이
었다. 사실 그렇게 이쁜 꽃은 아니다.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반인들이
선호할만한 꽃은 아녀보였다. 그래서 버려진지도 모르겠다. 현호는 그 화분을 가만
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화분조각을 치워내고 흙더미와 함께 꽃의 뿌리를 들어냈다.
그리고 버려진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꽃이나 키울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호는 갑자기 이 꽃을 살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꽃을 두
손으로 감싸서 일어났다. 축 늘어져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꽃을 손에 들고서 현호
는 집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환한 가로등 불빛을 뒤로 하고 현호의 인영은 그렇
게 사라져갔다.



반지하라곤 하지만 사실상 지하나 다름없다. 전등을 켜지 않으면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공간이니까. 아침이 한참 지났는데도 집안은 컴컴하다. 오직 컴퓨터
모니터의 불빛만이 네모낳게 발하고 있다. 그 앞에 앉은 현호는 수염이 덕지덕지
자라나있고 한껏 뻗쳐있는 머리를 내버려둔채 키보드 위의 손을 놀렸다.
무언가 하고 있는 척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냥 무의미한 인
터넷 서핑, 그리고 자주 가는 사이트 몇 곳을 끊임없이 들락날락할 뿐이다. 쾡하니
죽은 눈은 아무 빛을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절망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체념의 눈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후 벼룩시장과 교차로 신문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했지만 서른
먹은 남자를 받아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몸이라도 튼실하면 막노동을 뛰겠지만
하루에 한끼, 그것도 컵라면 하나로 떼운 현호의 건강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어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육체가 죽어가고 있다
는 느낌을 알게 된 자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이 세상에 김현호라는 남자를 이해
해 줄 자는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 현호가 만나
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육체의 괴로움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현호의 가장
큰 괴로움은 마음의 아픔이다.

'죽으면 편안해질 수 있을까?'

어느새 키보드에서도 손을 뗀 채 의자에 기대어 현호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 희미한 모니터 빛에 반사된 어둠은 안개처럼 천장에 껴있다. 숨
이 막힐듯이 그것은 그를 감싸고 있다. 분명 자신의 구성요소라 생각했던 어둠
이 지금은 그를 질식시키려는 무한한 공포가 되었다. 애써 외면하려 고개를 돌
리자 보인 것은 유일하게 색을 지닌 한 생명체였다. 얼마전 길가에 버려져있던
주황색 꽃잎을 가진 꽃이다. 집에 가져왔지만 딱히 어디에 심을 화분이 없어서
큰 컵에 흙을 담고 꽃을 심었다. 어떤 꽃인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봤지만 이런저
런 꽃들을 살펴봐도 비슷한 꽃이 없어서 포기했다. 백수가 된 현호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꽃을 가꾸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몇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물을 주었다. 그리고 햇빛을 쬐여주기 위해 점심나절엔 몇시간동안 바깥에 꽃
을 옮겨놓고 옆에 가만히 앉아 지키기도 했다. 누군가가 훔쳐갈 일은 없겠지만,
집에 들어가봤자 그도 무언가 할 게 없기 때문에 꽃과 함께 햇빛을 쬐었다. 한
사람과 한 식물은 그렇게 하루에 한번씩 어느 빌라 문 귀퉁이에 앉아 같이 빛
을 받았다.
현호가 흘깃 컴퓨터 화면의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꽃이 담긴 컵을 들
고 문을 열었다. 인공적인 빛과 다른 자연의 빛이 계단 위쪽에서 어렴풋이 비
쳐왔다. 계단을 올라 1층 현관을 나서자 약간의 쌀쌀한 기운과 함께 눈부신
바깥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봤자 투박한 골목 배경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낡은집, 빌라, 주택들 몇 채가 보이는 정도다. 꽃병이 되어버린 컵을 현관 옆
에 두고 현호는 쭈구리고 앉았다.
현호가 처음 발견했을때의 축 처져 시들어가던 꽃은 이제 꼿꼿이 서서 그 생
명력을 만개하고 있었다. 햇살을 만나자 검은점박이의 주황색 꽃잎이 빛을 머
금었다. 찬란히 자신을 뽐내는 꽃을 바라보며 현호는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아무 사심없이 순수하게 짓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냥 바라만봐도 너처럼 통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기에, 처음으로 자신이
마음을 기울인 한 꽃에게 전하는 그의 고백이었다.
턱하니 현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버렸다. 지저분하든 어떻든 그냥 무시하
고 벽에 등을 기댔다. 해가 더 높이 솟을수록 겨울답지 않게 따뜻해졌다. 추
위가 없는 밝은 낮에 현호는 졸음이 쏟아져왔다. 그리고 다른 생각할 것 없이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무려 이틀만의 수면이었다. 해고와 함께 찾아든 불
면증은 그에게 빛을 전해준 꽃의 향기 속에 사라져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곤히 잠든 현호는 번쩍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콰앙!

무언가 크게 터지는 소리가 현호의 고막을 때렸다. 정신이 든 현호는 고개
를 기웃기웃 돌리며 무슨 일인지 둘러보았다. 하늘을 보니 무언가 흰 연기와
함께 색색의 화려한 분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낮부터 행사라도 하나?'

태양을 보니 어느새 날은 저녁에 가까워져 있었다. 현호가 옆자리를 보니
꽃은 황혼녘 때문인지 주홍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
보다가 이내 꽃병을 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걱정이 된다.
혹시라도 여기 빌라에 살고 있던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서 자고 있는 자신
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민망해진다. 머리를 북북 긁
으면서 현호는 다시 어두운 반지하 안으로 들어갔다.
전등을 키고 꽃병을 제자리에 갖다놓은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단골
사이트에서 새로온 글을 검색해보니 역시 크리스마스 관련글들이 대부분
이었다. 오늘은 12월 24일이다. 다른 이들에겐 큰 의미가 있는 날. 하지만
현호에겐 어릴 적부터 크게 관련이 없던 날이다. 그저 크리스마스 전날.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봤기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엇인가 해 본일이 없
었다. 아무 관련도 없기에 그는 방관자가 되어 즐거워할 수 있다. 마치
처음 가본 나라에서 열린 그 곳 사람들만의 축제를 바라보는 관광객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현호의 방관은 내일도 이어질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아본 적이...있긴 있었나?'

결국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만다. 남들이 경험해 본 모든 것들이 그의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는 그런 불행에 고통스러워 했지만 이젠 괜찮
다. 무덤덤해졌다. 더 이상 아프지 않다. 그저 이 이상 아프지 않기만 하
면 된다.

'오늘과 같은 날이, 내일도 계속 되기를.'

왜냐하면 오늘 이상으로 아파야 한다면 더 견딜 수 없을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현호는 컴퓨터를 종료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시간
은 자정을 넘어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는 1시간이 1분같고 하루가 1시간
같다. 얼마간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잘 시간이 되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제발, 나를 사랑해 줘. 나의 마음을 나누게 해 줘.'

그러나 이 방안에서 그를 생각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책상 위
에 놓인 주황점박이 꽃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떠도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순 없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지하
의 공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어기적거리며 기어가 전등을 켰다. 잠시의 깜
빡임 후 하얗게 세상을 물들였다가 이내 본래의 색을 되찾는 현호의 집이었
다. 눈을 비비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밤인지 낮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낮이리라. 하루 종일 잘만큼 피
곤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책상을 보니 일어나기 전과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주황점박이
꽃의 상태가 이상했다. 꽃은 거의 말라비틀어 물기 한점 없어보였다. 인간으
로 치면 뼈만 남은 해골과도 같은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현호는 꽃에게 다
가갔다. 건드리면 금새 부스러질꺼 같아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다. 죽은 것일
테다.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난듯 공허해졌다. 현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꽃잎을 손으로 건드리려다 다시 한번 놀라고 만다. 자신의 손도 앞의
꽃처럼 바짝 말라붙어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등 뒤로 돋는 소름
에 황급히 뒤돌아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엔 왠 빼빼마른 해골이 가죽
을 뒤집어쓰고 퀭하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악!"

현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 때문에 등과 책상이 부딪혀서 한순
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끙끙대며 부딪힌 부위를 만지다가 힘겹게 몸을 다시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집문을 벌컥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얼어붙는듯한
바깥의 살의어린 바람이 현호의 몸뚱이를 스쳐지나갔다. 그 바람의 냄새는 겨
울의 시린 향이 아닌 책이나 옷을 몇십년동안 묵혀놓은듯한 퀴퀴한 냄새가 풍
겨왔다. 불길한 예감에 계단을 넘어질듯 비틀거리며 올라가보니 바깥 세상은
낮임에도 빛을 가지지 못하고 회색의 안개 속에 갖혀 있었다. 바닥엔 연탄재
와 같은 가루들이 흩날리고 있었고, 주위는 적막에 쌓여 있었다. 현호가 빌라
의 문을 나서 잿가루들이 가득한 땅을 밟자 푹하고 발이 꺼져들어갔다. 발목
까지 들어갈만큼 깊었다. 잿가루는 따뜻했다. 겨울바람에도 마치 온돌처럼 열
기를 지니고 있었다.
현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온갖 상상들이 떠올랐다. 전쟁? 핵폭탄 투하?
외계인 침공? 하지만 그 무엇도 현재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전쟁이라면 이
렇게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할리가 없고, 핵폭탄이 떨어졌다면 자신이 이렇
게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외계인이 침공했다면 하늘 위에 UFO가 떠있다던가
하다못해 외계인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도시는 정체불명의 잿
가루만 가득했고,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현호는 아무런 생각도 떠
오르지 않았다. 단지 걸을뿐이다. 사람의 흔적이 나올때까지,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발견할때까지 혼란과 공포 속에 휩싸여 눈 뜬 장님처럼 더듬거
리며 재의 바다를 헤쳐나갈 뿐이다. 집 앞의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 번화가 뒷
골목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현호 이외의 그 어떤 생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걸었다. 무언가 찾아낼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
다고 현호는 되뇌었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잿가루 세상, 무인지대, 해골이 된
자신, 그리고 말라붙은 주황점박이 꽃...거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힘이 좍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 이 세상엔 그것이 없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나를 사랑해 줄 존재가 사라졌다.'

진심으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그냥 쓰러져 몸을 뉘이고 있으면
조용히 잠들고, 그 다음 영원히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직 그는 이유를 듣지 못했다.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뼈만 남아 기운이 모두 없어진 탓인지 발걸
음을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들었다. 바닥을 질질 끌며, 재의 온기를 느끼며 차
츰 힘을 얻어서 점차 넓어져가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도심(都心)에 섰다. 4차
선 도로에 큰 광장,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위한 큰 트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밝게 빛나야 할 조명과 장식들은 꺼져 있었고, 나무는 눈이 아닌 재가 가득 쌓
여 조금씩 가루를 흘려댔다. 건물의 숲 속, 그 안을 달리는 모든 차들은 정지
하였다. 그리고 소복한 재만이 차 안을 메웠다. 한창 시끄럽게 소리가 울려퍼
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려야 할 춘천의 중심은 그렇게 재의 눈만이 내리며 텅하
니 비어있었다. 비척거리며 차 사이로 걸었다. 골목길과 달리 무릎까지 차오
른 재들은 현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마치 눈 속을 헤쳐나가듯 힘겹게 도로
를 빠져나오자 광장 앞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눈 앞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
래에는 현호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무엇'이 존재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잿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깔끔한 차림새의 양복, 그리고 영국의 신사들이 쓰고다
닐법한 기다란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트리 밑에 걸쳐 앉아
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현호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중년 남자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내자 현호도 어어, 거리며 뭔가 말을 꺼내
려하다가 뭔가 잊은게 떠오른듯이 번뜩하고 고개를 휘젓더니 더듬거리며 중년
인에게 회답하였다.

"지, 지금 이게 어떻게...뭐가 된건지, 일어나니까 전부,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현호를 보고 중년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흠흠하고 헛기침을 한 후 현호를 향해 말했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침착하세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마시
구요."

"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팡질팡하던 현호는 중년인의 말에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한숨을 후하고 내쉰 다음 다시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재밌다는듯이 현
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있는거죠?"

"글쎄요. 살아있다면 살아있는거고,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고."

"예?"

왠 스님 선문답같은 말에 이해를 하지 못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호를 보고,
중년인은 이런이런 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중절모 앞부분을 잡고 실수했다는
듯 사과의 표현을 했다.

"죄송합니다. 혼란스런 상황이실텐데 복잡한 표현을 했군요. 여튼, 제가 현재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현호는 그 말을 듣고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
고 자신이 가장 궁금해하는 말을 바로 물었다.

"저기, 그러면 지금 보이는 이 상황은 대체...?"

그 말을 기다렸다는듯이 중년인은 아하, 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뭔가 중얼거리더
니 명쾌하게 답했다.

"일종의 실험입니다."

"네?"

중년인은 앉은 상태에 일어나 잠시 손으로 툭툭 엉덩이를 털더니 어디 있었는지
순식간에 손에 들린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땅에 툭하고 내려놓았다.

"요즘 21세기 신격언에 이런 말이 있죠. 솔로천국 커플지옥. 저는 이 여덟글자
에 큰 감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솔로는 천국에 가고 커플은 지옥에 떨어
지도록 이 도시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팡이를 휙 들어 중년인은 주위를 주욱 가리켰다. 정적에 휩싸인 재의 세계였다.
그리고 외쳤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모습이 현실로 구현한 솔로천국 커플지옥입니다. 솔로는
살아남고, 커플인 자는 모두 잿더미 지옥으로!"

두 팔을 벌려 크고 아름다운 회색빛 세계를 중년인은 감격에 차 크게 함성을 질
렀다. 두 눈엔 눈물까지 살짝 고여있었다. 진심으로 자랑스런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현호는 입이 벌어진지도 모른채 경악에 찬 얼굴로 중년인을 바라보았
다. 믿을 순 없었다. 당연하다. 어떻게 한 인간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
인가.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재가 된 공간에 자신과 이 인간만이 남아있다는 것
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믿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결말이 있을지 생각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건 말이 안되요. 도시 안의 사람들을 전부 그렇게 만든다는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요. 혹시 어제 명동에서 한 폭죽놀이 광경을 본
적이 계십니까?"

"폭죽놀이...?"

그 말을 듣고 현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어제 자신의 단잠을 깨운
커다란 굉음과 화려한 분들이 생각났다.

"설마?"

현호의 말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정답을 맞췄다는듯이 웃은 후 중년인
이 장난스레 말했다.

"그 폭죽에는 재밌는 효과를 일어나게 하는 분들이 들어있었죠. 공기를 타고 사람
들 몸 속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그 인간은 바이러스처럼 타인을 전염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전염 후 몇시간 이내에 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재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되어 사람을 전염시키는 것이죠. 이러면 하루 만에 도시 전체의 인간을 전염시키
는건 일도 아닙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느냐는듯 크게 팔을 휘두르며 눈을 반짝이는 중년인을 보고 현호
는 공포에 질렸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어째서 그런 짓을. 당신 도대체 뭐야...?"

큭큭대며 기쁨을 참지 못하던 남자가 홱하고 고개를 쳐들더니 성큼성큼 현호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남자의 얼굴이 현호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서 소곤거렸다.

"말했잖습니까. 솔로천국 커플지옥이라고. 이현호 당신도 솔로니까 알 꺼 아닙니까.
커플들을 보면 그런 생각 들지 않나요? 커플따위 모두 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그건, 그건 아냐. 분명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그건 진심이 아냐! 단지 그건 단지..."

너무나도 무섭고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남자의 말은 벗어날 수 없는 마력처럼
현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대로 반박하지 않으면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
을 것 같았다. 그건 자신의 인생 30년 솔로 생활을 걸고 외쳐야 할 진심이었다.

"너무 부러워서, 사실은 나도 사랑을 하고 싶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누군
가를 사랑하고 싶었던거란 말야!!"

눈물이 주르륵 한 줄기 흘렀다.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 있는거라곤 미치광이같은
한 남자 앞에서 현호는 외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그
렇게 마음 속을 자조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쳐다보는 중년인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그 안엔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비운 공허. 표정없이 자신을 내
려다보고 있었다. 차갑다? 남자의 눈동자는 차가운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썬
이해하지 못할, 초월적인 무엇이었다. 현호는 이가 딱딱 부딪히며 떨려오는 것도 모
른채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버렸다. 남자는 잠시 현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
고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착각을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겠군요. 좋습니다. 이 실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가르쳐드리죠.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에 진실
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무슨..."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한 현호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자 남자는 여전히
공허에 가까운 무표정을 하며 답했다.

"정답은, 있다 입니다. 사람의 마음엔 사랑이 있습니다. 아니 있어야만 합니다. 그
게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겐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현호는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이 중년인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 세상의 인간들 중 사랑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 그들은
지금 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솔로, 그 누구와도 마음을 잇지 못한 진정
한 솔로뿐입니다. 자, 뒤를 보십시오. 당신과 같은 존재들이 몰려옵니다."

현호는 중년인의 인형이 된 것처럼 기계적으로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현호
의 눈엔 어떤 광경이 비쳐왔다. 수십개의 그림자가 재의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
다. 그들은 천천히 광장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인가? 살아남은 자? 모두 다 죽
은게 아니었다. 자기처럼 살아남은 인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 반가워야 할 것이다.
자기만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행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 모습
이...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고개를 푹 숙여 보지 않으려는 현호를 보며 중년인이
다가와 그의 귀에 자그맣게 속삭여줬다.

"보이십니까? 당신과 같은...괴물들이 오는 것을."

그의 귓 속에서 킥킥대는 중년인의 말도, 눈 앞에서 흐늘거리는 수십의 그림자도 지금
현호에겐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중년인은 처연히 눈을 내리깔은 현호의 옆에 서서 말했다.

"제 이름은 마몬. 나름 지상에서도 유명한 지옥의 악마입니다. 오늘 이 실험은 사실
당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을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신과 같은
존재들이 생겨난 건 얼마 안되거든요. 근대 이전만 해도 사랑이 없는 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당신같은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했죠. 만마전에
선 이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당신들을 데려가 연
구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괴물이 사람과 어울려 살 순
없으니까요."

부정해야만 한다. 현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지옥에 끌려가는
건 둘째치더라도, 인간이 아닌 괴물로 낙인찍혀 살아가야 한다. 사랑이 없다니, 그건
아니다. 사랑이 없는게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존재를 못 만났을 뿐이다. 부들
부들 떨리는 입술을 달싹여 겨우 마몬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몇분새 늙어버린듯
쇠되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나에겐, 내 마음엔...사랑이 있어."

"그렇다면 증명해보십시오. 당신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정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
다면 재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으로써 죽고 싶습니까? 기회를 드리지요."

현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누굴
사랑하지. 부모님? 그 분들을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존경이었
지 사랑이 아니었다. 중2때 첫사랑? 아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그럼 하
다못해 책에 대한, 티비에 대한, 컴퓨터에 대한, 그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도 좋다.
나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적이 있었나?
그렇게 마음 속에 의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없는 것이다.

"나는 서른 평생...뭘 했던거지."

체념어린 현호의 중얼거림에 마몬은 위로라도 해준다는듯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건 당신의 탓이 아니에요. 그저, 이 세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도
태어났을때부터 이렇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가 부조리한 것이지요. 본래 사
랑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무엇에 사랑을 느끼기도 하지만, 보잘것
없는 존재에게도 진실된 사랑을 느끼기도 합니다. 정말 사랑따윈 별 것 아닌..."

'보잘 것 없는 것?'

마몬의 떠벌거림이 귀에서 멀어지고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내 구체화되더니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현호는 그 자그맣고
별 것 아닌 것에 미소지었다. 생각해보면 만난 기간도 짧았다.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상대의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답받을 수 없는 짝
사랑만이 가능한 존재였다. 하지만 서른 평생을 통틀어...

"그보다 마음을 주었던 존재는 없었어."

갑작스런 현호의 말에 마몬의 장광설이 멈췄다. 그리고 기묘한 얼굴로 현호를 보았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재로 부서져가는 상대를 향해 따스하게 말을 건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실수로군요."

현호는 마몬의 말에 웃었다. 그리고 이내 바람을 타고 재로 흩날려갔다. 마몬은 중절
모를 벗어서 탁탁 털며 하늘을 향해 한마디 한 후 그림자들이 어기적거리며 있는 재
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지옥이라도 커플이 더 좋은건가요? 하늘의 아버지시여."



잿바람 사이로 화원에 붙은 종이 한장이 팔락인다. A4용지엔 네모난 그림 안에 주홍색
의 점박이 꽃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꽃에 대한 설명이 나열되어 있었다.
-학명 : 타이거 플라워(호랑이 꽃)
-꽃말 : 나를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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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