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동창회

[앞면1]
처음부터 이렇게 조촐한 건 아니었습니다. 글쎄요.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을까요. 예전에는 시끄러웠던 것 같은데, 좀 더 사람도 많았던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우리의 동창회는 이렇게 작아져버린 걸까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러니 이게 10회 동창회인 셈이죠. 1회에는 20명의 졸업생 모두가 참석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보통 한, 두 명은 빠질 법도 한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첫 번째 동창회는 성공이라 해도 되겠죠.
그게 마지막 성공입니다. 총무로서 거둔 마지막 성공. 이제는 동창회 총무로서 완전히 실패한 제10회 동창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회장이고, 이게 답니다. 단 둘만의 동창회랄까. 둘만 앉아있으니 어째 데이트 같지만 이건 엄연히 동창회입니다. 실패를 조금이나마 성공 쪽으로 돌려보고자 나머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창회장은 연신 전화를 걸어댑니다. 아무도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는 빨대로 입을 가져갑니다.
음료수가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지나, 입속을 지나, 목이 꿈틀대는 모습이 보입니다.
“안 받냐?”
“응.”
저의 물음에 그녀는 덤덤히 대답합니다. 사실 방금 전의 전화는 확인용일 뿐입니다. 죽은 예수의 시체를 창으로 찌른 것처럼. 죽었나, 안 죽었나, 만약 안 죽었다면 이걸로 죽어라하고 내지른 창처럼 혹시나 싶어 걸어봤을 뿐이죠. 이미 다른 18명에게서 모두 불참한다는 의사가 전달됐으니까요. 그들이 직접 말을 하거나 글을 보낸 건 아니지만, 연락이 끊겼으니 그건 불참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겠죠. 저야 총무니까 회장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습니다만.
그녀는 음료수를 다 빨아먹고 나서 빨대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눈 둘 곳이 마땅찮아 창문을 봅니다. 은은한 캐럴을 배경으로 그녀가 장난치는 모습이 돌연 선명해집니다. 창밖의 풍경이 흐릿해져갑니다. 눈입니다. 어디선가 탄성이 들립니다. 커플일까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맞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커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날이겠군요.
몇 달 전 나눈 통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 둘만 오는 건가?
-아마 그렇게 되겠지.
-흐응. 그렇구나.
저의 성의 없는 대꾸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 올 거야?
-가지 뭐.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그래서 언제 만날 건데?
-글쎄다. 언제가 좋을까. 너 혹시 연말에 한가하니?
-연말은 물론이고 1년 내내 한가하지.
-참 자랑스럽겠네. 어쨌든 나도 연말엔 한가하니까 그냥 그때 만나자.
-연말 언제?
-으음, 잠깐. 쉬는 날로 하는 게 좋겠지? 그래 그럼 크리스마스로 하자. 다음날이 놀토니까 부담도 없겠네.
-그래, 그럼 그때 만나자.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두 명이라고는 해도 보통 크리스마스에 동창회를 하던가요. 그것도 남녀가 둘이서, 이런 오붓한 고급 식당에서 말이죠. 별로 신경 쓰이진 않지만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요? 힐끔힐끔 그녀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입니다. 한 번, 두 번 깜박거릴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확대되는 것 같습니다.
땀이 마구 솟아납니다. 이마에서 솟구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 눈을 적십니다. 저는 그 참에 눈을 비비며 시선을 피해버립니다. 창문에 비친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갑니다. 여전히 땀이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여태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습니다. ‘고급 식당’이라는 장소가 저와는 상성이 맞질 않는 모양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견디기 힘듭니다.
“나 화장실 좀.”
“배고픈데 뭐부터 시키지?”
털썩 주저앉아 아무거나 대충 짚고는 화장실로 도망갑니다. 그제야 막혔던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합니다. 냄새는 나도 역시 화장실만큼 마음이 안정되는 곳이 없습니다.
“아 돌겠네.”
거울을 보며 매무시를 가지런히 하지만 자리로 돌아갈 맘이 들지 않습니다. 한참 동안 소변기와 세면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마음을 정합니다. 재빨리 밥만 먹고 식당을 나가는 겁니다. 평생 화장실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슬슬 발도 시립니다.
저는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 앉습니다. 때마침 식사가 나옵니다. 잘됐다 싶어 칼질에 열중합니다. 완전히 익힌 고기는 제 취향이 아니지만 참고 먹습니다. 다 먹으면 나가야지, 나가야지 곱씹으며 열심히 씹습니다.
“야.”
갑작스런 부름에 당황해버립니다.
“으, 응?”
“너 왜 그러냐?”
저는 입안에 있는 고기를 꿀꺽 삼키고는 대답합니다.
“내가 뭘?”
“흐응. 좀 이상해보여서 말이지.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고, 지금도 막 서두르고 있잖아. 무슨 일 있어? 혹시 애인이랑 약속이라도 잡아놨어?”
“애인은 무슨. 애인 있는 놈이 이 시간에 동창회나 하고 있겠냐.”
저는 진심을 담아 투덜거립니다. 문득 크리스마스에 이러고 있는 자신이 슬퍼집니다. 대체 뭐하는 걸까요. 다른 사람들은 커플끼리 와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동창회나 하고 있다니.
“그래? 하긴 나도 사귀는 사람은 없지.”
그녀는 또 한숨을 쉽니다. 이왕 말을 시작한 김에 저는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의문을 묻기로 합니다.
“왜 하필 이런 날 보자고 한 거냐?”
“왜, 떫어? 떫으면 네가 회장하든지.”
“어차피 두 명 밖에 없는데 회장은 무슨 회장. 그리고 앞으로 다시 모일 일도 없을 텐데.”
그녀가 의아한 시선으로 저를 봅니다. 속으로 괜히 말했다 싶어 고기를 먹습니다. 포크로 찍고 나이프로 썰어버립니다. 스테이크는 이제 완전히 조각조각 분해되어버렸습니다. 마치 토막살인 당한 시체 같습니다. 꺼림칙한 상상을 하면서 고기를 입안에 넣습니다. 육즙이 빠져서 그런지 맛이 없네요.
“모일 일이 없다고?”
“음.”
“왜 모일 일이 없어? 너 이제 동창회 안 할 거야?”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에 걸쳐놓고 그녀를 봅니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습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아니 내가 하고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어차피 우리 두 명밖에 없잖아. 스무 명 중에 두 명만 모이는 게 무슨 동창회냐? 그냥 모임이지.”
“그, 그럼 모임은?”
“뭐라고?”
그녀는 제 물음에 입을 다뭅니다. 갑자기 고기를 맹렬한 기세로 먹어치웁니다. 스트레스라도 쌓인 걸까요. 폭식으로 해결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은데요. 몸무게로 따지나 돈으로 따지나 어느 쪽으로든.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죠. 저는 잘됐다 싶어 고기를 먹습니다. 두 조각이 남았습니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습니다. 삼키고서 마지막 고기 조각을 찍으려는데 문득 땀이 멈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작처럼 끝도 느닷없군요. 저는 덩달아 땀이 난 이유도 깨달아버립니다.
“마지막이겠네.”
“응?”
그녀가 고개를 듭니다. 볼을 부풀린 모습이 꼭 쥐과 동물 같네요. 어쩐지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거 말야. 하긴 졸업하고 10년이면 꽤 오래 버텼지. 요즘 중학교는 졸업하면 바로 남남되고 그러는데. 누가 중학교 동창을 이렇게 오래 만나겠냐.”
“응······.”
“너도 오늘 무슨 일 있냐? 기껏 고기 먹어 놓고 왜 얼굴색이 푸르스름하냐.”
“아니 그냥.”
그녀는 식사를 뒤적이더니 이내 그만둡니다. 깨작거리는 걸 보니 입맛이 없는 모양입니다. 우물우물 음식을 넘기고 물을 한잔 깨끗이 비워버립니다. 심호흡. 잠시 벙긋거리고는 입을 엽니다.
“저기 있잖아. 이게 마지막이고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마지막이고 하니 특별히 공짜로 대답해주지. 뭔데.”
“넌 왜 총무를 맡게 된 거야?”
이건 또 뭘까요. 마지막 날에 이런 질문이 날아오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설명을 해야 하나요? 아니, 저는 만화 속 악당처럼 적을 잡아놓고 주절주절 계획을 늘어놓다가 파멸하기는 싫습니다. 전 바보가 아니니까요.
다시 창문을 봅니다. 하얗게 김이 서렸습니다. 밖이 보이지 않아 핑계가 될 수 없겠네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봅니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가 뜨는 그 짧은 시간이 이렇게나 길었군요.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처음이 아닙니다. 학창시절에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쨌든 무슨 상관입니까. 대충 둘러대야겠습니다.
“빨리 대답해. 속 터지게 하지 말고.”
“어. 성격 참 급하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사회생활을 원만히 하겠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고?”
“그냥 뭐 기억이 안 나서.”
“뭐라고?”
기억이 안 난다? 저는 그만 어이가 없어집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알겠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벌리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에게만은 설명해야겠죠. 마지막이니까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요. 적어도 그녀에게는 말해야겠죠.
저는 물을 한잔 마시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합니다.

[뒷면1]
오늘도 맞았습니다. 저희 학교는 아주 작아서 학생 수도 한 반에 스무 명 남짓이지만, 그런 작은 학교에도 눈에 띄지 않는 곳, 음습한 곳,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은 많습니다. 이를테면 화장실이나 교장실 같은 곳. 교장실이야 말만 교장실이지 사실은 귀빈 접대실이거든요. 손님이 없을 때는 먼지만 잔뜩 쌓여있어서, 평소에는 제가 얻어맞는 장소로 애용됩니다. 이제는 익숙합니다. 이곳의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도.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익숙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건 저 자신입니다.
몸도 마음도 구타에는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웃기는 일이죠. 거의 3년 내내 이런 생활을 했는데도 저는 여기에 적응되지 않습니다. 맞을수록 몸은 아프고, 욕을 들을수록 마음은 터지려고 합니다. 언젠가 마음이 꿍하고 터져버려서, 제 몸까지 한꺼번에 산산조각 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차라리 그렇게 죽었으면 합니다. 고통도 없겠죠. 손목에 흉터가 남지도 않을 거고, 괜히 병원에 실려 가서 살아나지도 않을 겁니다.
한순간에, 가는 겁니다.
빙빙 돌던 머리가 진정되자 몸을 일으킵니다. 코피는 이미 멎었습니다.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자 저는 멀쩡해집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짱해 보입니다.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흔적은 없습니다. 솜씨가 좋아지네요. 예전에는 멍도 들고 뼈에 금도 가서 난리가 났는데요. 어떻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선생님들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을 겁니다. 눈치를 챘건 말건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요. 게다가 그 후 따돌림은 더욱 은밀해졌습니다.
저는 더 괴로워졌지요. 은밀하다고 해서 대놓고 하는 것보다 못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심하죠. 여러 가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눈물을 닦아내며 화장실로 향합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답답합니다. 세수를 합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핏물은 벌겋게 흘러내리지만 머릿속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 광경. 교장실의 풍경. 낄낄거리는 아이들과 홀로 지르는 비명. 주먹과 발. 그 모두가 아주 느리게,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영상처럼 선명하게 찍혀있습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마도 평생, 10년이 지난다 해도.

3학년 2학기, 고등학교로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이런 때 나타난 전학생은 매우 특이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질적이죠. 밀가루 반죽에 끼어든 베이킹파우더처럼, 언젠가는 무리에서 쫓겨나며 터져버릴 겁니다. 아마 졸업하고 나서 동창회가 열린다 해도 초대받지 못하겠죠. 동창이라기엔 애매하니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저와 닮았다고 생각한 걸까요. 어쩌면 나머지 열여덟 명이 저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이유야 뭐든 좋습니다. 저는 죽고 싶었지만 그녀를 보며 희망을 얻었습니다. 비록 그게 헛된 희망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가까워질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그래도 다가갈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겐 거의 말을 붙이지 않고요. 그녀는 어딘가 겉돌고 있습니다. 저와는 다른 이유로, 저와 비슷한 궤도에서 비행을 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인공위성. 땅 아래 지구를 볼 수 있지만, 그곳에 합류할 수는 없습니다. 다가가면 불 타버릴 테니까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겠죠.
그렇지만 누가 왔건, 누가 갔건 간에 저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일과처럼 끌려가 얻어맞았고, 항상 그랬듯 화장실로 향합니다. 텅 빈 교정에 제 발소리만 울립니다. 여느 때처럼 씻고 화장실을 나오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칩니다.
쿵쿵. 제 심장이 크게 뜁니다. 저도 모르게 땀이 마구 솟아납니다.
“어라.”
그녀가 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합니다.
“너도 주번이니? 어쩐지 혼자하기엔 교실이 좀 크다 했지. 자 여기.”
저는 그녀의 손에 들린 대걸레에 시선을 돌립니다. 얼결에 받아들고 나서 다시 그녀를 봅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대고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서 교실로 향합니다.
“내가 빗자루 질은 다 해놨으니까. 걸레로 닦기만 하면 돼. 그런데 지금까지 뭐하다 온 거야? 간식이라도 사먹고 왔니? 어디 여기 주위에 맛있는 집이라도 있나? 있으면 나도 좀 알려줘. 여기는 처음이라 아무데도 모르거든. 아니다.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지 뭐. 빨리 하자.”
그녀가 이렇게나 말이 많았다니. 대체 그동안 말을 안 하고 어떻게 버틴 걸까요? 참새마냥 재잘대는 통에 정신이 없습니다. 허둥대다가 걸레질한 곳에 또 걸레질을 하고, 책상 위에 엎어놓은 의자를 넘어트려버립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의자들이 주르륵 쓰러집니다.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제가 빠지는 편이 더 빨리 끝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주번도 아니니까요. 그녀는 오늘 주번이 맞지만, 주번이 한 사람인 경우는 없습니다. 뭔가 이상하군요. 저는 그녀를 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도 따돌림 비슷한 건가 봅니다. “아.” 어쩐지 씁쓸합니다. 너무나 비틀어진 다른 열여덟 명의 학생들이 싫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기뻐하는 제 자신이 누구보다 싫습니다. 바보 같기는, 왕따끼리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가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나 봅니다. 그녀가 눈을 껌벅거리며 저를 봅니다.
“에이 참.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야. 너도 참 일거리를 늘리는구나. 영 도움이 안 되네. 도움이.”
저는 그녀의 말에 놀라 고개를 꾸벅 숙입니다.
“미, 미안.”
“응? 뭐야 그 죄송스럽다는 표정은. 이거 무서워서 장난도 못 치겠네.”
“아, 미, 미안.”
“이상한 애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됐어. 빨리 이거나 다시 올리자.”
“으, 응.”
저와 그녀는 쓰러진 의자를 일으키고 책상 줄을 정리한 후, 바닥을 깨끗이 닦습니다. 교실에서 반짝반짝 윤이 납니다.
어찌어찌 청소를 마쳤습니다. 저희 둘은 문단속을 합니다. 열쇠를 교무실에 가져다주면 끝입니다. 간신히 긴장을 풉니다. 이제야 끝이네요. 다른 사람과 같이 대화를 해본 것도 같이 일을 한 것도 오랜만입니다. 어쩐지 아쉽습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않을 텐데 저는 대체 뭘 한 걸까요. 그녀도 이제 저를 병신, 머저리로 보겠죠. 당연한 일이지만 슬퍼집니다. 이대로 멀리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허탈함에 한숨을 쉬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 괜찮아?”
“어, 뭐?”
“너 괜찮은 거냐고. 코피 나는데······.”
“어, 어, 어?”
저는 코를 틀어막습니다. 바닥에 피가 두 줄기로 흘러내립니다. 아까 맞은 곳이 다시 터졌나봅니다. 생각보다 많은 양입니다. 손이 금세 붉게 변합니다.
“어어? 뭐야 이거. 야 너 피 엄청 많이 나와!”
저는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합니다.
“괜차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되겠다. 빨리 양호실로 가자. 이러다 큰일 나겠어.”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옆에서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어 혼란스럽지만, 저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선생님에게 이걸 보여주면 안 됩니다. 이제 방학도 얼마 안 남았고, 그러고 나면 금방 졸업식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문제가 커지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쪽이든 괴로운 거라면 저만 괴로우면 되는 일입니다. 부모님을 괴롭히고 싶진 않습니다.
“돼써. 괜차아.”
“무슨 말이야. 피를 줄줄 흘리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돌연 눈앞이 하얘집니다. 뭔가가 눈을 가렸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그것을 잡아챕니다. 손수건. 하얀 손수건입니다. 어느새 그녀의 말투가 침착해졌습니다.
“양호실에 가기 싫은 거지? 일단 그거라도 써. 열쇠는 내가 갖다놓을게.”
저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그녀는 열쇠를 짤랑거리며 복도 저편으로 걸어갑니다. 모퉁이를 돌기 직전, 저를 보더니 갑자기 크게 소리칩니다.
“힘내라!”
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사라집니다. 저는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복도 방향을 응시합니다. 오늘도 머릿속에 무언가 남았는데, 그게 평소와는 다른 광경이라 스스로도 놀랍니다.
코피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멎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뭔가 바뀐 건 아닙니다. 저와 그녀의 관계는 전과 똑같습니다. 여전히 남남.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입니다. 꽤나 자주-아마 그녀도 떠넘겨져서-주번이 겹치는 날이 있지만 그때는 오히려 처음 본 날보다 더 어색할 뿐입니다. 그 참기 힘든 분위기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야 그렇다 쳐도 그녀는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요. 곤혹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보면 한마디 말 붙이기도 힘듭니다.
결국 오늘도 손수건은 건네주지 못했습니다. 깨끗이 빨아서 새것 같은 손수건. 핏자국을 지우느라 손이 불도록 문질렀습니다.
힘내라는 소리는 그저 해본 말일까요. 아니면 제가 환청이라도 들었던 걸까요. 저는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파옵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눈을 감고 손수건을 코에 묻습니다. 세재 향기가 은은히 풍깁니다. 마음이 진정됩니다.
“하아. 이것 보게.”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뜹니다. 이 목소리, 너무나 익숙합니다. 몸이 떨립니다.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립니다. 힘들게 앞을 봅니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이 하나. 둘. 셋······. 다음 순간 저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집니다.
“너 뭐하냐? 이건 뭐야? 손수건?”
한 사람이 제 손을 벌려 손수건을 가져가려 합니다. 저로서는 용기를 쥐어짜 손아귀에 힘을 주지만, 발로 몇 대 밟히자 허망하게 펴집니다.
“뭐야 이게. 네 애인한테 받은 거냐? 아 미안. 너한테 여친이 있을 리는 없고, 그럼 네 애미한테 받은 건가 보지? 크크크. 맞고 나서 코피 닦으라고 준 건가.”
뭐라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저는 손수건만 봅니다. 제 것이 아닙니다. 저건 그녀의 손수건입니다. 그녀가 저에게 빌려준 손수건입니다. 다시 돌려줘야합니다. 손을 뻗습니다.
“아이 씨발 새끼가. 어디다 손을 대.”
누군가 저를 쳤습니다. 숨이 턱하고 막힙니다. 손을 댔다니, 손은 스치지도 않았습니다. 전 그저 손수건을 잡으려고 했던 겁니다. 억울합니다. 맞은 게 억울한 게 아닙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것도 잡지 못하는 제 자신이 억울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입니다.
“아 됐어. 일단 끌고 가자고 여기서 이러다 걸리면 안 되잖아.”
손수건을 가져간 녀석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것을 던져버립니다. 창문 밖으로, 눈부시게 새하얀 손수건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떨어집니다. 사라집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다른 녀석들을 밀치며 창문가로 달려갑니다. 다행입니다. 아직 저 아래에 있습니다. 내려가서 주워 다가 다시 빨면 됩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
“이런 씹새끼가 진짜 죽을라고!”
고함소리와 동시에 머리가 띵해집니다. 비틀비틀 주저앉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주먹이 날아옵니다. 아주, 느리게.

더러워진 손수건을 주워듭니다. 쪼그려 앉아 천을 매만집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져 털어냈는데, 결국 손수건으로 눈을 가려버립니다. 크게 흐느낍니다. 자신의 신세가 비참해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제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서 울었습니다.
어깨의 감촉을 느낀 건 한참이나 지나서였습니다. 간신히 진정되어 손수건을 떼어냈는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됐습니다. 이걸 또 어떻게 빨까 고민하는데 오른쪽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괜찮아?”
“흐악!”
입김이 귀를 스쳐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저는 후다닥 떨어집니다. 그제야 그녀가 보입니다. 어깨를 짚었던 자세 그대로 저를 보고 있습니다. 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방을 훑어봅니다. 눈 둘 곳이 마땅찮습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손수건을 만지작거립니다. 돌려준다고 했는데 이 꼴로 돌려줄 수는 없겠죠.
“그거 내 손수건이니?”
“어? 아, 으, 응. 그, 미안해.”
“뭐가?”
“그, 그냥 그, 더러워져서.”
“넌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하네.”
“우아!”
그녀가 난데없이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저는 뒤로 발라당 넘어가 누워버렸습니다. 뒤통수가 얼얼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속 다가와, 콧김이 닿을 거리에서 멈췄습니다. 그녀의 팔과 팔 사이에 머리가 끼어있어 피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어, 으으으어, 왜, 왜, 왜.”
“엇차.”
눈앞이 새하얗게 변합니다. 눈과 코가 꾹꾹 눌리고 나서 저는 간신히 그녀에게서 벗어납니다. 그대로 누워서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데, 그녀는 벌떡 일어나 말합니다.
“얼굴은 깨끗이 하고 다녀야지. 손수건 돌려줘서 고맙다.”
그녀는 손수건을 설렁설렁 접어서 주머니에 넣습니다. 저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그녀를 봅니다. “저기, 그 손수건 더러운데.” 더듬더듬 말하자 그녀가 활짝 웃습니다.
“아, 이제야 제대로 말하네. 그리고 괜찮아. 가져가서 빨면 되지 뭐.”
그녀는 손을 흔들며 멀어집니다. 저는 얼결에 마주 손을 흔들다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립니다. 방금 흔들었던 오른손을 쳐다보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봅니다.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으며 뒷걸음질 치고 있습니다. 저러다 넘어지면 큰일 나는데. 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뭔가를 발견합니다.
그녀의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습니다. 처음엔 추워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자세히 보니 손자국이 선명합니다. 어째서······. 왜, 대체 어떻게······아아. 저는 깨닫습니다. 맞은 겁니다. 그렇군요.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입니다. 저는 오른손을 꼭 쥐고 생각합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님에게 말을 해볼까요? 저는 머리를 좌우로 젓습니다. 만약 그러고 싶었다면 그녀가 스스로 말을 했겠죠.
필사적으로 생각합니다. 오른손을 초조하게 쥐락펴락하다가 간신히 묘안을 떠올립니다. 창피하지만 어떻게든 힘을 짜내 외칩니다.
“히, 힘내라!”
“엉?”
저는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뛰어갑니다. 맞은 부분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지만, 마음만은 개운합니다. 기쁩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서, 어느새 방학식입니다. 전 이제 그녀와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지금도 막 그녀와 같이 문단속을 마치고 헤어진 후입니다. 다시 이곳에 오는 건 졸업식 날이 마지막이겠죠. 어쩐지 후련합니다. 드디어 중학교를 벗어나는 겁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와는 다른 생활을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해봅니다.
거기에 하나 더 좋은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다시 말해 내일은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 방학식 와중에 그녀가 제게 만나자고 한 날이기도 하고요. 시간이 있냐고요? 물론 있지요. 그녀와 만나는 거라면 1년 내내 여유 있습니다. 게다가 모름지기 크리스마스란 사랑의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만나자는 건, 어쩌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며 싱글벙글 웃습니다. 터벅터벅 1층 복도를 걷는데 멀리에서 발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간에 누굴까요? 수위 아저씨? 안경을 추켜올리며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합니다.
모퉁이를 돌아선 사람이, 저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듭니다. 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칩니다. 제발, 오늘 정도는 넘어가도 되지 않습니까. 방학식날까지 이러는 겁니까.
제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그는 맹렬히 뛰어와 제 어깨에 팔을 걸칩니다. 전 생각합니다.
정말, 싫다고.

가면서도 얻어맞아 안경이 벗겨졌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저도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게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꼭 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적어도 그 다짐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속으로 수백 번 반복합니다. 끝이다. 이게 끝이라고.
어느새 눈에 익은 문이 나타납니다. 교장실입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저는 그 안으로 던져집니다. 오늘은 유독 심한 것 같습니다. 흉터가 몇 군데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조용히 기다립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그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이제 곧 졸업입니다. 아마 평소와 다른 분위기도 그 탓이겠죠. 이제 끝이니까요.
여느 때보다 덤덤한 기분으로 정면을 봅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대략 스무 명이 있나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훑습니다.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람, 정면으로 쏘아보는 사람, 조용히 준비하는 사람 등등 반응도 다양합니다. 묘한 일입니다. 역시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싫어서, 저를 괴롭히고 싶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난 오기 싫었는데 억지로 끌려왔다는 듯 불안해 보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저 애들은 싫은 장소에 억지로 끌려온 걸까요. 싫다면 거부를 해야 합니다. 좋으면 좋다고 승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싫으면서 거절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저 애매한 태도는 대체 뭘까요.
어쩐지 뱃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불덩어리라도 집어삼킨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어쩌면 아주 옛날에는 느껴봤던, 그런 감정이 솟아오릅니다.
저는 이를 부드득 갈며 나머지를 봅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한 명을 더 발견합니다. 구석에 숨어있어 처음엔 못 봤나 봅니다. 저는 눈을 크게 떠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합니다.
“어.”
순간, 세상이 얼어붙었습니다.
멈칫합니다. 눈을 깜박합니다. 시야가 서서히 좁아집니다. 몰랐습니다. 눈을 감고 다시 뜨는 과정이 이렇게나 길 줄이야. 그냥 눈을 세게 감아버립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갑니다. 발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곳에 있습니다. 그녀가 있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저는 입을 크게 벌려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이대로 눈도 귀도 멀어,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게.
“시끄러워 이 새끼야!”
배를 맞았습니다. 저는 컥컥거리며 잔기침을 내뱉습니다. 그렇지만 들립니다. 큭큭거리는 웃음소리도, 놀라 들이키는 숨소리도, 다 들립니다.
“야야. 적당히 해라. 오늘이 마지막인데 벌써 본격적으로 하면 어쩌자는 거야.”
누군가 제 머리털을 쥐고 잡아당겨, 저는 강제로 일으켜집니다. 반항할 맘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애들도 다 데리고 온 거잖아? 아 맞다, 참.” 저를 벽에 기대어놓고 그는 말합니다. “자 얘들아. 그동안 우리만 즐긴 게 미안해서 말이지. 오늘만큼은 다 같이 즐기려고 이렇게 부른 거야. 어때? 좋지? 재밌겠지? 그냥 머리를 텅 비우고 때리면 되는 거야. 이렇게.”
강한 충격이, 몸 전체로 번져나갑니다. 저는 허리를 굽히며 주저앉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야, 나는 별로···뭐라고···그러니까 난 이제 그만···가긴 어딜 가 새꺄너선생한테꼰지르려고그러는거아니야잠깐그만! 그만!
그만!
조용해집니다. 저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몸을 잔뜩 웅크려보지만 소용없습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더 이상 작아질 수도, 사라져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제 영영 못 보기 때문인지 참 오랫동안 때립니다. 마치 헤어짐을 아쉬워하듯이. 기나긴 이별을 안타까워하듯이. 하지만 몸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아파, 너무나 아파 차라리 몸이 아픈 것이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맞는 내내 저는 그녀의 얼굴만 생각합니다. 웃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부어오른 얼굴, 얼굴, 슬픈, 얼굴.
모든 것이 끝나고 저는 바닥에 누워 천장을 봅니다. 숨을 헐떡입니다. 흐릿한 눈동자로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섭니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에, 저는 담겨있지 않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입은 굳게 닫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착각입니다. 모두 착각이었습니다. 망상인 게 당연하죠. 저는 왕따니까요. 애초에 무리 안에 끼어있지도 않습니다. 저와 그녀가 만날 접점 따위 처음부터 없던 겁니다. 그녀가 지구 궤도권을 돌고 있다면, 저는 태양계 저 멀리에서 명왕성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지구는 보이지도 않는 멀고, 차갑고, 어두운 우주에서.
이제 그녀는 아래로 내려갑니다. 저 위에 있는 저는 볼 수도 없는, 밝고 따뜻한 장소로. 천천히, 느릿하게, 안전하게,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문이 닫힙니다.
쾅.
마음이 터져버립니다.

[뒷면2]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몸도 멀쩡했습니다. 오히려 힘이 솟아났습니다. 박살난 마음 무더기가 다시 한데 뭉쳐졌습니다. 제 마음은 변했습니다. 이스트가 빠져나간 밀가루 반죽처럼. 지구로 추락하는 인공위성 같이 그렇게.

그날 저를 괴롭히던 사람 중 한 명이 크게 다쳤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묻혔습니다. 어느 쪽이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불명확하기도 했고, 당시 졸업을 눈앞에 둔 당사자나 학교의 마음이 일치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 부모가 사과를 했고 어느 쪽이 무릎을 꿇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아주 느린 영상 하납니다.
교장실의 풍경. 홀로 내지르는 주먹과 발, 시끄럽게 울리는 비명 소리들. 점점 저려오는 팔과 다리.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 그녀를 보던 저의 시선. 애매하기 짝이 없는 그 알량한 관계선. 그리고 비명. 벽. 바닥. 냄새.

학교는 그 후 졸업식을 올렸습니다.  어느 샌가 저는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것처럼 총무 자리는 저에게 떨어졌습니다. 또 다른 애물단지인 그녀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이젠 그 아이들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조직은 적이 있으면 단단히 결속되지요. 부하직원들이 상사를 욕하며 서로 친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상당히 지나치긴 했지만 제가 그런 적 역할을 했던 겁니다. 무리에 끼어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리의 적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죠. 그러면 동질감을 느낀 조직은 그를 포섭하게 됩니다. 같은 아군으로서.
저에겐 아군이 없었습니다. 전 오롯이 적이었습니다. 아군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은 저편으로 건너가 버렸습니다. 한때 연심을 품었던 여자가 적이 되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것도 참으로 특수한 시절을 지내던 저에게 그것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습니다. 특히 가장 큰 살의를 느낀 건 다름 아닌 그녀였습니다. 저를 매일매일 때리던 남학생이나 저에게 그토록 욕설을 퍼붓던 여학생보다도, 오히려 그녀를 저는 두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고 싶었습니다.

<앞면2>
“보이냐?”
저는 안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천 조각을 하나 꺼내 흔들어 보입니다.
“그때 마지막 날에, 네가 떨어트린 손수건이야. 실수로 떨어트렸는지 어쨌는지, 바닥에 있던 걸 주워서 아직까지 가지고 있거든.”
“···왜?”
“왜냐고?” 저는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식탁에 놓아둡니다.
“잘 모르겠는데. 너한테 돌려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네 앞에서 찢어버리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깨를 으쓱합니다. 그녀가 손수건을 집어갑니다.
“아니면 그 손수건으로 네 숨통을 틀어막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건 그다지 상관없잖아?”
“날 죽이고 싶었다고?”
“그래.”
그녀가 저를 봅니다. 저도 그녀를 봅니다. 둘만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어색합니다. 예전의 그 시절, 중학교 시절처럼. 둘 다 몸은 훌쩍 컸는데 둘 사이의 관계만 제자리걸음입니다. 아니,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저 자신일까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내려 합니다. 지긋지긋한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언제부터 우리의 동창회가 이렇게 작아졌냐고요? 어느 기점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줄어든 것입니다. 1회에 모두가 모였던 것도 저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으니까요. 2회에는 1회보다 두 명이 적게 모였죠. 총 18명.
그리고 3회에는 16명. 4회에는 14명. 5회에는 12명. 6회에는 10명. 그리고 8명. 6명. 4명.
여기서 이렇게 2명.
아마 다음은 0명. 아무도 오지 않겠죠.
“나가볼까. 밥도 다 먹었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합니다. 그녀 몫까지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섭니다. 바닥에 얇게 눈이 쌓여있습니다.
“잠깐,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딸랑. 문이 열리며 그녀의 말소리가 들립니다.
“아까부터 질문만 하는구만. 아무리 내가 공짜라고 했어도 너무 묻는 거 아니냐?”
“뭐라고?”
그녀가 울먹이며 말합니다. 왜 우는 걸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원래부터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지금부터는 나도 좀 물어보자. 괜찮지?”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젓습니다. 무시하고 말합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했었냐?”
“어떻게라니······.”
“중학교 시절에, 대체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냐 이거야. 그냥 스쳐지나갈 사람? 싫어했나? 아니면 좋아했던가?”
“그, 아니, 나는, 잘 모르겠어. 기억 안나. 대체 그게 뭐가 중요해? 응?”
“하하. 글쎄. 중요한 걸까. 적어도 나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10년 내내 하루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대체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땐 왜 그랬을까. 또 이땐 왜 저랬을까, 하고 말이지.”
“있잖아. 나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그러니까, 오늘 널 왜 불렀냐면.”
“동창회잖아.”
“응?”
그녀가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몸을 떱니다. 저는 손을 비비며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동창회니까, 그래서 우리 둘이 오늘 만난 거잖아.”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두 줄기로 흘러내립니다. 많이도 흘러내립니다. 저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너 그거 아냐? 동창회장이니까 벌써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뭘.”
“애들이 말이야. 회가 지날수록 두 명씩 줄어들었잖아. 신기하지 않냐? 그렇게 규칙적으로 줄어드는 게 말이지. 넌 왜 그런지 알고 있어? 난 알고 있는데.”
그녀가 세차게 도리질 칩니다. 눈물이 흩날립니다.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은은한 캐럴송을 배경으로 눈이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저는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갑니다.
“가끔씩 사람은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다니까.”
품속에 집어넣은 손으로 준비해온 물건을 매만집니다. 여기서? 저는 잠시 망설입니다. 사람도 많고, 보는 눈도 많아서 필시 들킬 겁니다.
아니죠. 어차피 모든 게 끝입니다. 모든 걸 묻어놓고 저만 잘 살려고 이런 일을 계획한 것도 아니고요. 저는 손에 힘을 줍니다. 이대로 휘두르면 모든 게 끝납니다.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허망하게도, 슬프게도.
“아하하.”
하얗게 입김이 솟아납니다.
“아 드디어. 드디어 끝이네. 두 명씩 줄어들었잖아. 이게 열 번째고, 이번에는 우리 둘뿐이잖아? 그러니 이걸로 마지막인 거지. 또 두 명의 연락이 두절되는 거니까. 그렇지 회장? 안 그래? 안 그러냐고. 이제 동창회는 없다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저는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쥡니다. 잔뜩 긴장된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아,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그냥 그대로 손을 꺼내면 되는데,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녀는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있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엽니다.
“널, 좋아해.”
왼손에서 힘이 빠집니다. 어깨를 놓칩니다. 그대로 흘러내려 허공을 붙잡습니다.
“···뭐?”
“나, 기억은 안 나지만, 예전부터, 좋아했어. 너를. 정말로 그랬어. 오늘은 나, 이걸 말하려고.”
“아, 그래. 그랬지. 그래서, 그런가.”
저는 오른손마저 품에서 꺼내 힘없이 늘어트립니다.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살아날 수도 있고요.
“안녕.”
저는 뒤돌아 달립니다. 그녀를 뒤에 두고 달립니다. 세찬 눈발을 뚫고, 뜁니다.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뒷면3]
하지만 달라지고 싶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이 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왕따가 아니었고, 둥그런 지구 위에 발을 딛고 행복했습니다. 때로 힘든 일도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1년이 지나자, 딱히 신경 쓰고 있던 건 아니지만 기왕에 동창회 총무를 맡은 김에 잘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때려눕힌 아이에게 사과도 하고 싶었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저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용서해주고도 싶었습니다. 그만큼은 성숙해졌고, 제가 큰 만큼 다른 아이들도 컸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첫 번째 동창회는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각각 번호 1번과 2번이던 두 사람. 저를 유독 괴롭히던 애들이었고, 한 명은 제가 때려눕혔던 아이였죠. 저는 먼저 용서를 빌었고 곧이어 그들도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도, 그들도, 모두 과거의 상처를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눈가에 아른거리는 둘의 얼굴을, 저는 아마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이상함을 느낀 건 5회쯤 지나서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모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고 그들도 흔쾌히 수락했죠. 그런데 점점 연락이 닿는 아이들이 줄어들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두 명씩.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뭔가 수상쩍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비밀스러운 회담이라도 이뤄진 걸까요?
그러고 보니 언젠가 회장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지요. 그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지. 동창회는 어차피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이잖아? 아마 어른이 될수록 동창회 인원은 적어질 거야. 한 10회쯤 되면 너랑 나만 남을 수도 있겠네.”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한 것처럼 그녀는 키득키득 웃어댔습니다. 저는 별로 웃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동창회라는 건 다 그렇기 마련이고 특히나 중학교 동창회라면 더욱 그렇겠지만, 저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던 탓일까요.

단서를 잡은 건 8회였습니다. 식당에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6명이 된 동창생들이 모여앉아 있었습니다. 한명이 목소리를 낮춰 수근 거렸습니다. “어쩐지 이상하지.” 그러자 회장이 물었습니다. “뭐가?” 의아하다는 말투였습니다.
“동창회 말이야. 지금까지는 신경을 안 써서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두 사람씩 줄어들었잖아.”
“그런가?”
회장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반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습니다.
“너는 회장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 뭐 좋아. 그럼 이것도 모르겠네.”
딴청을 피우던 저도 그의 은근한 말투에 끌려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때 흘낏 본 회장의 얼굴은 태평하기 그지없었죠. 다음에 나온 충격적인 말에도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정훈이가 말이지. 실종됐데.”
“실종?”
저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단어에 당황했습니다. 실종. 정훈이가. 그러니까 정훈이가 실종됐다고?
“정훈이가 실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언성을 높였습니다. 동시에 다른 동창생들도 떠들어대 식당은 일순 요란해졌습니다. 먼저 말을 꺼낸 녀석은 술을 연거푸 마시며 설명을 이었습니다.
말인즉슨 평소 정훈과 절친했던 그가 작년 동창회가 끝나고 얼마 후, 정훈의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거기서 정훈이 아닌 정훈의 가족들을 만났고, 정훈이가 여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훈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고,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모두 목이 타는지 술만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저도 연신 술잔을 기울였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어찌어찌 8회가 끝나 각자 헤어질 때에 저는 보았습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혼미한 정신이었지만 확실했습니다. 저와 같이 진탕취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회장은 그날 취하지 않았습니다. 눈길에 반듯이 난 발자국을 저는 멍하니 바라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로 그녀를 의심하게된 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까 싶었고, 그녀는 그럴만한 사람도 아니었죠. 이게 범죄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저는 그런 안이한 생각을 품고 제9회 동창회를 가졌고, 정말로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저는 어딘지도 모를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동창회는 끝났고 저희 네 사람은 각자의 집에 돌아가기로 했죠. 눈앞이 흐릿했습니다. 안경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사회인이 되고나서 잃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피식 웃고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이 뿌옇게 번져보였습니다. 한참을 목적도 없이 골목길을 헤매는데 문득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몸이 굳었지만 이윽고 달렸습니다. 얼마 전 본 뉴스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들에 관한 특집을 했던 겁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지러웠지만 몇 번 넘어지면서도 달렸습니다. 구두가 벗겨지고 양복바지가 찢어졌지만 그래도 달렸습니다. 왼쪽, 오른쪽, 다시 오른쪽을 도니 막다른길이 나왔습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온통 피범벅이 된 골목 끝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습니다. 눈이 아플 만큼 붉은, 코가 아릴만큼 짙은.
달빛을 받은 원피스가 서늘하게 빛났습니다. 기묘하게도 그녀의 원피스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발아래서 뒹굴고 있는 시체 두 구만이, 붉게 물들어있었습니다. 저의 흐릿한 눈동자는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서있는 여자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안녕. 지원아.” 그녀는 제 이름을 부르고는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달빛이 참 좋네.”
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저에게 날아와 박혔습니다. 귀가 찢어질듯 아팠습니다. 다리에서 스멀스멀 냉기가 올라와 가슴 부근에서 맴돌았습니다. 눈도 멀고, 귀도 멀고, 코도 망가져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있잖아. 얘들이 학교에서 날 괴롭혔었거든. 그래서 내가 똑같이 되갚아줬어. 헤헤. 속 시원하다.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기 있잖아. 나 진짜 그때는 죽는 줄 알았어. 네가 맞는 거 보기 싫었는데, 보지 않을 용기가 없었어. 미안해. 아팠거든. 그렇지? 이해하지?”
그녀가 점점 다가와 이제는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토가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엎드렸습니다.
회장은, 배시시 웃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너도 얘들한테 괴롭힘 당했으니까. 너는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으아아아아!”
전 목이 터지도록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도망갔습니다. 등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저를 쫓아와, 죽기 살기로 다리를 움직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술에서 깨어나, 저는 제가 본 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아리송했습니다. 112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그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또 무슨 일이냐며 물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
저는 그만 전화를 끊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옷의 이곳저곳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것이 보였습니다. 대체 어젯밤에 난 무엇을 했나? 무엇을 보았나? 세상이 빙그르르 돌았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들어 저와 회장을 제외한 18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모두 불통이었습니다. 끔찍한 예감이 저를 덮쳤습니다. 예감, 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쩌면 여태껏 피하던 진실과 드디어 마주쳤다고 해야겠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몰랐습니다. 그녀가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 줄은. 죽은 동창들도, 죽인 그녀도 다 안타까워 저는 하루 종일 집에서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지쳐 쓰러진 채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음 동창회에서 모든 걸 끝내겠노라고.
제 손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 그녀와 아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의무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어쩌면 제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의 마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동전 던지기>
발길을 멈춥니다. 저 멀리에서는 전과 달리 웃음소리가 아닌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품에 안은 칼을 만지작거립니다. 체온이 옮아가 뜨뜻합니다. 품에서 칼을 꺼내 바닥에 내던지자 주위의 눈이 녹아사라집니다.
입김을 내뿜자 안경에 김이 서립니다. 쏟아지던 함박눈도 저를 스쳐가는 사람들도 그 너머로 사라집니다. 소리만 두런두런 들려옵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커플입니다. 시끄럽게 울리는 캐럴송, 기부를 재촉하는 종소리.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저는 귀를 틀어막고 길 구석으로 물러납니다. 숨이 가빠집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익숙한, 익숙한 느낌.
저는 벌떡 일어나 칼을 잡습니다. 어느새 차갑고 축축하게 변해 손바닥에 달라붙습니다. 뜁니다. 말해야 합니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그녀와 저 사이엔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관계가 있습니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끝내야할 때가 왔습니다. 이게 마지막 동창회니까요. 이제는 보지 못할 마지막 순간이니까요.
서서히 그녀가 보입니다. 점에서, 선으로. 면에서, 사람으로.
칼을 꼭 쥡니다.
입을 크게 벌립니다.

그녀에게 다가간 저는······.

피가 터져 나옵니다. 배에서 고통이 밀려와 머리에서 터지고, 다시 배에서 폭발합니다. 저는 쓰러집니다. 바닥에 누워, 뒤통수가 얼얼합니다. 그래도 그녀는 제게 얼굴을 가까이 붙여, 이윽고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그녀가 제 안경을 벗기는 순간 입술이 따뜻하게 달아오릅니다.
제 얼굴은 피에 젖어, 날씨가 추워, 머리가 빙글빙글 날아갈 것 같아서, 붉게붉게 물들어버립니다.
저는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습니다. 힘겹게 입을 열어 대답합니다.
“나도.”
“응.”
그녀는 방울방울 울음을 터트리며 제 오른손을 꼭 쥡니다. 저와 그녀의 손이 칼을 쥐고 올라가고, 흐릿한 눈동자는 그것을 지켜봅니다. 손에서 뻗어나간 쇠붙이가 그녀의 가슴을 뚫고, 저와 그녀는 한데 누워 쓰러집니다.
겹침.
그리고 마침.

세상 모든 것이, 흐릿하게, 사라집니다.

<그와 그녀의 동창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