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크리스마스하면 커플.
커플 브레이커
#0
36년간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남자가 있다. 그는 커플들을 싫어했으며 화이트 데이, 크리스마스 같은 소위 특별한 날을 저주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 생각 없이 외출했다 분을 삭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세상엔 왜 그리 커플들이 많은지, 그렇게 좋으면 집에서나 뒹굴 것이지 왜 죄다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홀로 남겨진 방 안에 앉아 빌었다. 커플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커플들이 모두 깨져버렸으면 좋겠다.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남자의 앞에 수상한 인물이 나타났다. 분명히 문단속을 다 했었는데. 수상한 자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난 솔로의 신이다. 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왔다.”
“정말입니까?”
남자는 믿지 않았지만 끝까지 들어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단순한 미치광이라면 나중에라도 쫓아내면 된다. 집안에 몽둥이는 충분하다.
“그렇다. 네 마음이 간절하여 특별히 소원을 이뤄주겠다.”
신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남자의 몸이 가벼워졌다. 남자는 뭔가가 달라진 걸 느꼈다.
“너는 어떤 커플이든 헤어지게 할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힘이든 쓸 수 있지. 허나 사리사욕을 위해서 힘을 써선 안 된다. 명심해라.”
신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 집안에 잠시라도 있었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힘이 생기긴 생겼나? 생겼다면 어떻게 쓰지? 고민하다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갔다.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힘을 얻은 건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서로 팔짱을 꼭 끼고 걸어오는 커플이 하나 보였다. 남자는 당장 헤어졌으면 좋겠다 빌었다. 그러자 뜨겁게 애정을 나누던 남녀가 갑자기 싸우기 시작했고 몇 분 후엔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날 남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1
“하. 정말 여자들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야.”
사소한 말다툼이 원인이었다. 오늘 주형은 여자 친구와 대판 싸웠다. 주형이 볼 땐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번 그녀가 먼저 시비를 걸고 주형은 영문도 모른 채 싹싹 빌었다. 주형은 그녀를 사랑했기에 자존심을 굽히곤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었다. 사귀는 내내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니 주형은 지치고 피곤했다.
짜증이 치민 주형은 성질내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까페를 나와 버렸다. 그녀가 주형의 뒤에서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형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가끔은 이런 적도 있어야지 하고 자신을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었다. 정말로 그녀가 헤어지자 하면 어쩌지? 이번 일로 버릇을 고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녀를 볼 수 없다면 미쳐버릴 텐데.
골목길을 걷는 내내 주형은 핸드폰을 접었다 폈다 했다.
“학생, 표정이 말이 아닐세.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주형은 깜짝 놀랐다. 골목길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주형은 고개를 돌렸다. 4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전에 병이라도 앓았는지 쪽 마른 모습이었다.
“고민이 있으면 얘기해 보게나. 어려워하지 말고.”
듣는 것만으로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도움이 될지 누가 또 알겠나.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보게. 어려워 보이는 일이여도 막상 털어놓고 보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다네.”
남자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마침 주형은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주형은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 문제에요. 항상 시작은 여자 친구가 하는데 사과는 제가 해야 되요. 처음엔 참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형은 찬찬히 전후 사정을 말았다. 간간이 남자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주형이 말에 몰입하도록 했다.
“자네, 정말 골치 아픈 고민을 하고 있구만. 여자는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른 생물 같지.”
“맞아요.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요. 그 반대일 줄 알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으니 알려주지. 인생 선배로서의 교훈이랄까.”
주형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다. 분명 실질적이고 쓸 만한 조언이겠지.
“누가 들으면 안 되니 가까이서 얘기해야겠네.”
남자는 주형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면 여자를 안 사귀면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주형의 뒤로 돌아가 바지를 벗겼다. 갑작스런 일이라 주형은 반응도 못했다. 남자는 팬티를 벗으며 말했다.
“잠시 후면 여자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거야.”
주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힘은 보기와는 달리 대단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주형 위에 남자가 올라탔다.
“탐스러운 엉덩이군. 좋아.”
“변태자식. 가만 안 두겠어!”
“협박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남자의 거대한 봉이 보이자 주형은 기겁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제발 그것만은!”
“필요 없어!”
주형은 이물질이 몸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굴욕적이었지만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으......”
남자는 본격적으로 몸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주형은 고통스러웠다.
“악!”
“잠시만 참아.”
남자는 더욱 더 강렬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져갔다. 오히려 주형은 얼마쯤은 쾌감을 느꼈다.
“난 게이가 아냐.”
주형이 넋두리 했지만 몸은 이미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들 처음엔 그리 말하지.”
몸이 달아올랐다. 한 겨울이었지만 주형은 전혀 춥지 않았다.
“아!”
주형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자신은 게이가 아닌데 박히는 걸 좋아하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주형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게 남자를 흥분시켰는지 남자는 한결 세차게 춤을 추었다. 불현듯 주형의 머릿속에 노래가 흘렀다. 분명 어디 음악이 나올만한 데도 없는데 선명한 노래가 들려왔다.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니가 날 떠날 줄은 몰랐어.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언제나 숨겨왔던 진실은.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시야가 흐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어느새 주형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찍!
마침내 남자가 힘을 다 썼다. 주형은 기운이 빠져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주형의 몸을 휘감았다. 문득 주형은 여자 친구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바람피우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2
“일어났니?”
부드럽게 묻는 엄마의 말에 동석은 깜짝 놀랐다. 분명 어제 술이 떡이 돼서 들어와 아침이면 혼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정 반대의 반응이었다.
“콩나물 국 끊여놨단다. 좀 먹으렴.”
숟가락을 들면서도 동석은 의심스러웠다. 저 사람이 내 엄마가 맞긴 맞는 걸까. 이러다 더 크게 화내는 건 아닐까. 불안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괜히 먼저 얘기를 꺼내서 좋을 건 없었다.
“네가 떠난다고 하니 슬프구나. 매일 같이 봐왔던 아들인데.”
“네? 제가요? 가긴 어딜 가요?”
갑작스런 엄마의 말에 동석은 의아했다.
“가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다 알아. 엄마도 널 보내고 싶지 않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니.”
얘기를 하면 할수록 동석은 이해가 안 됐다. 답답한 나머지 소리쳤다.
“엄마, 무슨 소리야?”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구나. 네가 이러니 엄마는 가슴 아프구나. 연기 좀 그만하렴.”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
동석은 답답한 나머지 소리쳤다. 엄마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너 오늘 군대 가잖니.”
“내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군대라니.
“증거를 보여줘야 인정하겠구나.”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를 하나 들고 왔다.
“보렴.”
그건 입영통지서였다. 정확히 오늘이 입영날짜로 되어 있는.
동석은 믿을 수 없었지만 명백한 증거가 있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지? 장난치려고 만들어낸 거 아니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 휴.”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오늘 군대를 가다니. 동석은 내후년에나 군대에 갈 계획이었다. 그랬기에 군대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근데 그게 착각이었던 걸까. 기억은 그리 했지만 현실은 달랐던 걸까. 군대야 가야한다 생각하니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 군대에 간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었던 걸까. 어떻게 된 일인지 동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석은 여자 친구인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한 얘기가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 오늘 군대 가.”
“응, 알아.”
미영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너 울었어?”
미영은 말이 없었다. 동석은 미영이 이미 알고 있었단 사실에 놀랐다.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 뒤에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따라갈게. 너는 됐다고 했지만 한 번 더 네 얼굴을 보고 싶어.”
“엉. 알았어.”
대충 대답한 뒤 동석은 전화를 끊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동석은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대답은 똑같았다. 짜식 잘 갔다 와라. 불쌍한 놈. 건강해라 등등. 믿을 수 없지만 동석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도 미영도 주변 친구들도 다 아는 사실을 자기 혼자만 부정한다는 건 이상했다.
결국 훈련소엔 미영과 엄마 두 사람이 다 따라왔다. 미영과 엄마는 처음 보는 사이라 어색했는지 동석을 보낸다는 생각에 우울했는지 별 말이 없었다. 동석은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자신은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 달려와 뻥이야! 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동석을 고개를 돌렸다.
“형? 여긴 어쩐 일이야.”
동석과 같은 과 선배로 2학년 위였다. 3살 차이가 났음에도 둘은 죽이 잘 맞아 평소에도 줄곧 붙어 다녔다.
“네가 간다는데 내가 안 올 수 있냐. 마침 여기서 볼 일도 있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동석을 보기 왔단 건 자명했다. 훈련소 주변은 황량해서 갈만한 데가 없다. 덕분에 동석은 제법 감동을 받았다. 가슴 한 구석이 뭉클했다.
“아참, 인사를 안 했구나.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쁜 여자 친구도 안녕.”
가끔 선배와 동석이 술을 마실 때 미영이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선배도 미영을 잘 알았다.
“안녕하세요.”
미영이 수줍게 인사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훈련소로 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동석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미영이 붙잡았다.
“정말 가는 거야? 안 가면 안 돼?”
울먹이는 미영을 보자 동석도 가슴이 아팠다.
“어쩔 수 없잖아. 남자라면 다 가는 곳인데.”
별로 위로가 안 됐는지 미영은 눈물을 흘렸다.
“너 없이 난 어떡해.”
동석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도움을 주려는 건지 놀리려는 건지 선배가 한마디 했다.
“너무 많이 울면 금방 깨진데. 사랑을 전부 쏟아내서 그렇다지.”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미영이 울음을 멈췄다. 시계를 보니 채 5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동석은 제대로 작별도 못하고 뛰어 들어갔다. 슬쩍 뒤돌아보니 선배가 미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마도 위로를 해주려는 거겠지. 허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손을 내리지 않았다. 순간 동석은 선배가 말했던 볼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3
지혜가 전화를 받은 건 새벽 1시였다. 이미 잠들어 있었기에 무시하려 했지만 집요하게 이어진 벨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목소리를 듣자 대번에 누군지 알았다. 세미였다. 둘은 절친한 사이로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나 일찍 자는 거 알잖아.”
지혜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려는 찰나, 세미가 끼어들었다.
“지금 잘 때가 아냐. 큰 일 났어. 정태가 말이야.”
정태란 단어를 듣자 지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태는 지혜의 남자친구였다.
“무슨 일인데?”
“나 약속 땜에 잠깐 홍대에 나왔거든. 거기서 정태를 봤어. 웬 여자랑 단 둘이서 술 마시고 있더라고.”
“정말?”
정태는 피곤하다며 오늘은 일찍 잘 거니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어제까지 시험 기간이었기에 지혜는 의심하지 않았다.
“으응. 진짜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세미는 정태를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지혜는 믿고 싶지 않았다.
“친구일 수도 있잖아. 자다가 전화가 와서 갑자기 나갔을 수도 있고.”
“넌 친구랑 단 둘이 앉아서 러브 샷도 하니? 둘이 아주 꼭 달라붙어 있더라.”
“거기 어디야? 당장 갈게.”
지혜는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정태의 행동이 수상했다. 전화를 뚝뚝 끊질 않나. 갑자기 안 가던 동창회 모임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질 않나. 걸핏하면 전화기가 꺼져 있질 않나. 지혜는 오늘에야말로 진상을 파악하고 말리라 결심했다.
“4번 출구 쪽으로 나와서 신호등 하나 건넌 뒤 옆에 있는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작은 술집이 하나 나와. 이름은 xx 고, 간판이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내가 금방 갈 테니 좀만 기다려.”
지혜를 전화를 끊고 옷도 대충 입은 뒤 달려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내내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되지?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속인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다니 괘씸하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줘야 하나? 막상 무릎 꿇고 애원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도 같은데. 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간단히 넘어가진 않겠어.
술집이 가까워졌다 싶자 지혜는 택시에서 내렸다. 웬 여자와 앉아 헤헤거리는 정태를 발견하곤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너 다 왔을 거 같으니 먼저 갈게. 난 껴들고 싶지 않아. 연인들 간의 문제는 서로가 해결하는 게 좋아.”
지혜는 살짝 서운했지만 지금 해결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혜를 정태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태는 갑작스런 습격에 놀랐는지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이게 집에서 자는 거야? 피곤하다며?”
“미안, 사정이 있었어. 내가 다 설명할게.”
“사정은 무슨. 이 년은 또 누구야?”
옆에 있던 여자는 지혜보다 키는 작았지만 이쁘고 귀여웠다. 미모만 따진다면 조금 더 나았다.
“오빠, 후배예요.”
후배는 애교가 함뿍 담긴 목소리로 오빠를 발음했다. 순간 지영은 부아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언제부터 얘랑 오빠~~~ 하는 사이가 된 거야?”
“잠깐 만난 거야. 시험 공부하면서 얘가 나한테 도움 받은 거도 많고, 나도 도움 받은 거 많고. 정말이니 오해 하지 마.”
“야! 박정태 너! 내가 다 알고 왔어. 시치미 떼지 마.”
지혜의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는지 정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이때 갑자기 여자 후배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꾸 소리 지르고, 오빠 기 죽이니까 오빠가 힘들어 하잖아요.”
“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 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맘 같아선 지혜는 버릇없이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년을 한 대 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오빠가 왜 절 만나는지 모르겠어요? 언니는 오빠를 힘들게 해요. 같이 있을 때도 신경 쓰이고 긴장 돼서 편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데요. 헤어지고 싶어도 언니가 무서워 말도 못 꺼내겠고.”
지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둘이 있을 때면 행복하다 생각했는데 속으로 정태는 딴 맘을 품고 있었다니.
“정말? 얘가 하는 말이 진짜야?”
정태는 시선을 피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려주었다. 그는 지혜를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았어. 정 그러면 헤어지자.”
지혜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 지금 와서라도 치맛자락을 붙잡는다면 용서해주리라. 허나 정태는 남의 일 마냥 모른 척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혜가 나가려해도 붙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혜는 우울했다. 바람핀 남친을 혼내주러 갔다가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정태의 탓이지만 후배 년이 했던 말과 정태가 한 행동이 잊히지 않았다. 정말 내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걸까. 단지 조금 급할 뿐인데. 지혜는 스스로에 대해 회의감마저 느꼈다.
지혜는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문득 세미 생각이 났다. 결과야 어쨌든 도와주려고 했던 친구에게 결과정도는 알려주는 게 예의였다. 여러 차례 신호가 갔건만 세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벌써 잠들었나 싶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라도 하소연 하고픈 맘에 지혜는 계속 걸었다. 마침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미야, 자고 있었니?”
“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짜증 섞인 음색이었다.
“무슨 일은, 얘는. 너도 궁금할 거 아냐.”
“뭘? 뭘 말이야?”
처음 듣는 듯한 말투였다.
“모르는 척 하기는. 네가 말한 대로 가봤더니 정태가 있더라고. 그래서.”
지혜가 본격적으로 얘기하려는 찰나 세미가 껴들었다.
“네가 뭔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응?”
지혜는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나 장난할 기분 아냐. 아까 니가 전화해서 xx로 가보라 했잖아.”
“아까? 언제?”
“1시에.”
“난 그때 너한테 전화한 적 없어.”
지혜는 시치미 뚝 떼는 모습에 화가나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오늘 따라 얘까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지혜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확인했다. 통화 목록은 깨끗했다. 오늘 새벽 걸려온 전화는 하나도 없었다.
#4
요즘 들어 수진은 멍하니 있는 때가 많아졌다. 정철은 무슨 생각 하냐며 묻곤 했지만 수진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처음엔 정철도 별 일 아니겠거니 했지만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서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수진은 여전히 밝고 명랑했지만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3년 간 사귀어 보면서 수진이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철은 불안해졌다.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걸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거듭된 정철의 물음에도 수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수진과 정철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다. 마침 관심사도 비슷한데다 같은 학교라 둘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딱히 사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깨닫고 보니 공공연한 연인이 돼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둘은 지냈다. 특별히 가슴 떨리는 일은 없었지만 같이 있음으로서 서로가 편안해졌고 서로를 기분 좋게 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관계가 3년 동안 계속 됐다. 말은 안했지만 정철도, 수진도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나면 결혼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둘 중 누구도 이런 관계가 깨지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정철은 그리 생각했다.
“일어날까?”
수진이 창밖만 무심히 보자 지루해진 정철이 물었다.
“그래.”
수진이 대답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음색이었다.
“아우, 춥네. 괜히 나왔나.”
정철이 벌벌 떨었다.
“우리 좀 걸을까?”
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탓인지 거리엔 사람이 적어 한산했다. 둘은 목적지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사거리 앞 신호등에 다다랐을 무렵, 수진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넌 졸업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한 얘기를 물으니 정철은 난감했지만 곧 평소 생각해오던 대로 말했다.
“취직해야지.”
“어디에 취업하게?”
“어디라니? 내가 따질 형편이 아니잖아. 요새 취업하기 좀 어려워야지. 일만 구해도 다행 아니겠어?”
“그렇구나.”
남들 다 아는 사실을 왜 묻는지 정철은 의아했다. 문득 의문이 생긴 정철이 물었다.
“너는 어쩔 거야? 취직할 거 아니었어?”
“모르겠어.”
의외의 대답에 정철은 놀랐다. 분명 수진은 전에 밝은 얼굴로 좋은 직장 들어가서 월급 많이 타서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여행도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수진이 다니는 사회학과는 취업이 매우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중간 정도는 됐다. 노력하면 취업을 못할 것도 없다. 혹시 다른 문제인가.
“결혼이라도 하자는 거야?”
여러 번 상상을 하긴 했지만 막상 얘기하려니 쑥스러웠다. 정철은 수진과 눈을 못 마주쳤다.
“아니, 결혼은 안 해.”
“그럼?”
“모르겠어. 정말.”
정철은 답답했다. 결혼도 취업도 아니라면 대체 뭔가. 집안 문제? 아니면 계절이 바뀌면서 우울증이라도 걸린 걸까.
“뭐든 좋으니 일단 얘기라도 해 봐. 들어는 봐야 도와주든지 말든지 하지.”
“얘기해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배부른 고민이라 하겠지.”
어느 새 둘은 역에 와 있었다. 중간에 수진이 먼저 내릴 때까지도 둘은 별 다른 얘기를 안했다. 정철은 대체 무슨 일로 저러는 걸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그 후 한동안 수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도 나오지 않았다. 정철은 하루에도 열 차례씩 전화를 했지만 받질 않았고 일주일 쯤 지나자 포기해버렸다. 연락할 때가 되면 연락하겠지 뭐. 정철은 두어 차례 수진의 자취방을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갈 때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한 달 뒤 수진이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깡마른 그녀를 보자 정철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누그러졌다.
“생각할 게 있어서 여행을 갔다 왔어. 연락하지 않은 건 미안해.”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돈을 아끼다보니 식사를 제대로 못했어.”
“배고프겠네.”
“익숙해져서 괜찮아.”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여기요!”
정철이 종업원을 부르러하자 수진이 말렸다.
“아니, 됐어. 지금 밥 먹을 상황이 아냐. 할 얘기가 있어.”
“뭔데?”
마침 정철도 그간 수진이 무슨 생각을 했고, 뭣 때문에 여행을 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언제쯤 물어보는 게 좋을까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수진이 먼저 얘기하겠다니 잘 됐다.
“아무래도 평상시처럼 있다간 결론이 안 날 것 같아서 떠났어. 처음 가보는 데서, 지금 있는 데와 전혀 다른 데 있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잖아. 난 주로 걸었어. 가끔 차를 타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할 거라곤 생각 밖에 없더라고.”
“뭘 생각했는데?”
수진이 자꾸 변죽만 올리자 정철은 답답해서 껴들었다.
“내 미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지? 난 좋아서 사회학과에 온 게 아니라고.”
“응. 들었어.”
“점수에 맞춰서 나중에 취업하기 괜찮은 과를 고른 거지. 사실 내 적성에는 전혀 맞지 않았어.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했지.”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도 좋아서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진 않아. 다들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거지.”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무는 가 싶더니 이내 정적을 깨뜨렸다.
“사실 누구한테 얘기한 적은 없지만 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
“몰랐네. 의외인걸.”
“난 예전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 그림 그리는 거도 좋아했고. 한때 예술 쪽으로 나가보려 했던 적도 있고.”
“왜 관뒀어?”
“힘드니깐. 디자인을 하든 미술을 하든 먹고 살기 어렵거든.”
“그럼 예전에 포기하기로 결정한 거 아니었어? 왜 이제와 고민하는 건데?”
“그래서 모르겠다고 한 거였어. 내가 정말로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건지, 단지 무미건조한 일상이 지겨워 일탈을 꿈꾸는 건지. 하지만 이젠 확신이 섰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가 가야할 길이 뚜렷해지더라고. 난 결심했어. 이제라도 디자인을 공부할 거야. 늦었을지 모르지만 도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건 싫어.”
“넌 24살이야. 웬만한 디자이너들은 충분히 공부해서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걸. 아무리 봐도 현명한 짓이 아냐. 더 늦기 전에 관둬.”
“괜찮아. 다 생각했던 거니까. 오히려 너무 어려서부터 디자인을 배운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틀에 갇히기 쉽데. 실제로 외국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다른 일 하다 진로를 바꾸는 경우도 많고.”
“뜬금없는 얘기를 들으니 당황스럽네.”
“이해해 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단지 오래 사귄 남친에게는 알려주는 게 예의니까 말한 것뿐이야.”
“쳇.”
정철이 투덜거렸다. 수진은 개의치 않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 유학 가.”
놀랍긴 했지만 납득은 갔다. 뒤쳐진 만큼 보충하려면 특별한 수를 써야했다.
“돈 많이 들 텐데.”
수진의 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괜찮아. 돈이 좀 생겼거든. 먼 친척 분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안에 유산을 일부 떼어주셨어. 게다가.”
“?”
“디자인 스쿨 장학생으로 뽑히게 됐거든. 아는 사람한테 추천 받긴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어.”
“잘 됐네. 근데 아는 사람이라니?”
“있어.”
“그래,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여하튼 잘해 봐.”
“고마워.”
이미 다 결정 난 마당에 말려봐야 소용없었다. 안 좋은 기억을 남길 바엔 축복이라도 해주는 게 낫지. 문득 정태는 앞에 있는 여자가 자기가 알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처럼 시시덕거릴 기분이 아니었기에 둘은 금방 헤어졌다. 홀로 걷는 내내 정철은 울적했다. 정열적이진 않았지만 사랑하기는 했었는데. 이제 수진이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돌아왔을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이 달라졌을 거고. 그는 수진과의 사이가 끝났단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수진이 조금만 운이 없었다면 현실적 여건 때문이라도 유학을 포기했을 텐데, 참 기가 막힌 우연도 다 있었다.
#5
“자기 나 사랑해?”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글쎄.”
“피~”
여자는 심통이 났는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사랑해.”
남자는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 해본 적이 없다보니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성껏 해야지. 성의가 없어.”
“미안 다시 할게. 유리야. 사랑해.”
뒤늦은 대답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는 만족스러웠는지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오늘은 어디 갈까?”
“글쎄. 날도 좋은데 도시락 싸서 소풍이라도 갈까.”
“좋아. 응. 응.”
유리는 팔짝 팔짝 뛰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남자는 못 당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원래 남자는 유리와 오래 사귈 생각이 아니었다. 이는 유리에게 힘을 썼을 때는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웬만한 연인은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헤어지게 할 수 있지만 단단히 결속된 연인이 간혹 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반하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혹은 남자는, 옛 연인을 바로 걷어차 버린다. 그들에게 남자외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강력한 힘이다 보니 달라붙는 사람들을 떼놓기 힘들뿐더러,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었기에 별 흥이 안 났다. 치밀하게 짜인 계획에 따라 서서히 커플들을 헤어지게 하는 쪽이 훨씬 더 흥미진진했으며 성공했을 때의 쾌감도 컸다. 그랬기에 남자가 힘을 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리와의 하룻밤을 보낸 뒤 남자는 지쳐 잠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정사를 치르고 바로 빠져나왔겠지만 간만에 힘을 쓰다 보니 긴장이 풀렸다.
곤히 잠들었다 깨어난 남자의 눈앞엔 환하게 웃는 여자가 있었다.
“자기야, 일어났어?”
“어.”
남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얼른 나가야 했다. 허나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오늘 우리 어디 갈까?”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애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가 보였다. 기대와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따스했다.
“응? 어디 갈 거야?”
여자는 연신 재촉했다. 순간 남자는 하루쯤은 같이 있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하루인데 별 문제 있겠나 싶었다. 허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삼일 사일이 되어 결국은 두 달이 지나버렸다.
남자는 매번 여자를 볼 때마다 헤어져야지, 헤어져야지 하면서도 말을 못 꺼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기에 애정에 약했다. 조작된 사랑이지만 벗어나긴 힘들었다. 꾸며진 거면 어때 좋지만 한 걸. 결국 남자는 그런 생각까지 해버렸다.
자신이 연인이 되자 연인을 증오하던 남자의 마음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세상이 밝게만 보였고 연인을 헤어지게 하는 일도 재미없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일을 하기는 했지만 횟수는 팍 줄어버렸다. 세달 전 남자는 하루에도 열 쌍씩 헤어지게 했으나 이젠 일주일에 한 두 쌍 헤어지게 할까 말까였다.
전에는 커플이 깨지더라도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기쁘기만 했는데 요즘 들어선 그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행복해 하던 이들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다니 난 얼마나 악랄했던가. 남자는 자기 비하까지 했다. 때론 남자는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무의식중에 힘을 써서 행복한 이들을 갈라놓지는 않을까. 더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남자는 힘을 반환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정말 신이긴 신이었을까. 남자는 신을 떠올릴 때면 불안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남자는 신을 배반한 셈이었다. 여자와 즐거운 나날을 보낼 때도 남자는 신이 떠올랐다.
여자와 헤어져 돌아오던 길이었다. 남자는 자꾸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지만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남자는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참다못한 남자는 달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가면 따라오진 못하겠지. 남자가 속도를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휙 소리가 났다.
깨닫고 보니 복면을 쓴 괴한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달아나봐야 소용없으리란 걸 직감했다. 괴한은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는 신이 준 힘을 써서 저항하려 했지만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커플이 되었기에 힘을 잃은 것이다. 괴한은 순식간에 남자의 바지를 벗겼다.
“안 돼!”
남자는 곧 일어날 일을 직감하고 비명을 질렀다. 허나 괴한은 무시하고 자기 할 일만 했다.
“으윽.”
거대한 이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고통스러웠지만 이어진 쾌감에 남자는 자신을 잃었다.
“아!”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흑.”
부정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제발, 그만 둬. 이대로라면 돌아오지 못해.”
괴한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푹찹푹찹 푹푹틴.”
격렬한 마찰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점차 남자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절정에 다다르기 전 남자는 허리를 틀곤 팔을 뻗었다.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봐야 해. 남자는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다행히 괴한은 엉덩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남자의 손이 복면에 닿았다. 괴한이 깨닫고 방해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괴한의 맨얼굴을 본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괴한은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플 브레이커
#0
36년간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남자가 있다. 그는 커플들을 싫어했으며 화이트 데이, 크리스마스 같은 소위 특별한 날을 저주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 생각 없이 외출했다 분을 삭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세상엔 왜 그리 커플들이 많은지, 그렇게 좋으면 집에서나 뒹굴 것이지 왜 죄다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홀로 남겨진 방 안에 앉아 빌었다. 커플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커플들이 모두 깨져버렸으면 좋겠다.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남자의 앞에 수상한 인물이 나타났다. 분명히 문단속을 다 했었는데. 수상한 자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난 솔로의 신이다. 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왔다.”
“정말입니까?”
남자는 믿지 않았지만 끝까지 들어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단순한 미치광이라면 나중에라도 쫓아내면 된다. 집안에 몽둥이는 충분하다.
“그렇다. 네 마음이 간절하여 특별히 소원을 이뤄주겠다.”
신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남자의 몸이 가벼워졌다. 남자는 뭔가가 달라진 걸 느꼈다.
“너는 어떤 커플이든 헤어지게 할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힘이든 쓸 수 있지. 허나 사리사욕을 위해서 힘을 써선 안 된다. 명심해라.”
신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군가 집안에 잠시라도 있었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라 당황했다. 힘이 생기긴 생겼나? 생겼다면 어떻게 쓰지? 고민하다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갔다.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힘을 얻은 건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서로 팔짱을 꼭 끼고 걸어오는 커플이 하나 보였다. 남자는 당장 헤어졌으면 좋겠다 빌었다. 그러자 뜨겁게 애정을 나누던 남녀가 갑자기 싸우기 시작했고 몇 분 후엔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날 남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1
“하. 정말 여자들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야.”
사소한 말다툼이 원인이었다. 오늘 주형은 여자 친구와 대판 싸웠다. 주형이 볼 땐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번 그녀가 먼저 시비를 걸고 주형은 영문도 모른 채 싹싹 빌었다. 주형은 그녀를 사랑했기에 자존심을 굽히곤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었다. 사귀는 내내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니 주형은 지치고 피곤했다.
짜증이 치민 주형은 성질내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까페를 나와 버렸다. 그녀가 주형의 뒤에서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주형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가끔은 이런 적도 있어야지 하고 자신을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었다. 정말로 그녀가 헤어지자 하면 어쩌지? 이번 일로 버릇을 고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녀를 볼 수 없다면 미쳐버릴 텐데.
골목길을 걷는 내내 주형은 핸드폰을 접었다 폈다 했다.
“학생, 표정이 말이 아닐세.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주형은 깜짝 놀랐다. 골목길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주형은 고개를 돌렸다. 4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전에 병이라도 앓았는지 쪽 마른 모습이었다.
“고민이 있으면 얘기해 보게나. 어려워하지 말고.”
듣는 것만으로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도움이 될지 누가 또 알겠나.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보게. 어려워 보이는 일이여도 막상 털어놓고 보면 별 거 아닌 경우가 많다네.”
남자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마침 주형은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주형은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 문제에요. 항상 시작은 여자 친구가 하는데 사과는 제가 해야 되요. 처음엔 참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형은 찬찬히 전후 사정을 말았다. 간간이 남자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주형이 말에 몰입하도록 했다.
“자네, 정말 골치 아픈 고민을 하고 있구만. 여자는 이해하기가 어려워. 다른 생물 같지.”
“맞아요.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요. 그 반대일 줄 알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으니 알려주지. 인생 선배로서의 교훈이랄까.”
주형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다. 분명 실질적이고 쓸 만한 조언이겠지.
“누가 들으면 안 되니 가까이서 얘기해야겠네.”
남자는 주형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면 여자를 안 사귀면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주형의 뒤로 돌아가 바지를 벗겼다. 갑작스런 일이라 주형은 반응도 못했다. 남자는 팬티를 벗으며 말했다.
“잠시 후면 여자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거야.”
주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힘은 보기와는 달리 대단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주형 위에 남자가 올라탔다.
“탐스러운 엉덩이군. 좋아.”
“변태자식. 가만 안 두겠어!”
“협박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남자의 거대한 봉이 보이자 주형은 기겁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제발 그것만은!”
“필요 없어!”
주형은 이물질이 몸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굴욕적이었지만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으......”
남자는 본격적으로 몸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주형은 고통스러웠다.
“악!”
“잠시만 참아.”
남자는 더욱 더 강렬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져갔다. 오히려 주형은 얼마쯤은 쾌감을 느꼈다.
“난 게이가 아냐.”
주형이 넋두리 했지만 몸은 이미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들 처음엔 그리 말하지.”
몸이 달아올랐다. 한 겨울이었지만 주형은 전혀 춥지 않았다.
“아!”
주형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자신은 게이가 아닌데 박히는 걸 좋아하고 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주형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게 남자를 흥분시켰는지 남자는 한결 세차게 춤을 추었다. 불현듯 주형의 머릿속에 노래가 흘렀다. 분명 어디 음악이 나올만한 데도 없는데 선명한 노래가 들려왔다.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니가 날 떠날 줄은 몰랐어.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언제나 숨겨왔던 진실은.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BABY BABY RIGHT ROUND ROUND ROUND!
시야가 흐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어느새 주형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찍!
마침내 남자가 힘을 다 썼다. 주형은 기운이 빠져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주형의 몸을 휘감았다. 문득 주형은 여자 친구에게 미안한 맘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바람피우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2
“일어났니?”
부드럽게 묻는 엄마의 말에 동석은 깜짝 놀랐다. 분명 어제 술이 떡이 돼서 들어와 아침이면 혼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정 반대의 반응이었다.
“콩나물 국 끊여놨단다. 좀 먹으렴.”
숟가락을 들면서도 동석은 의심스러웠다. 저 사람이 내 엄마가 맞긴 맞는 걸까. 이러다 더 크게 화내는 건 아닐까. 불안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괜히 먼저 얘기를 꺼내서 좋을 건 없었다.
“네가 떠난다고 하니 슬프구나. 매일 같이 봐왔던 아들인데.”
“네? 제가요? 가긴 어딜 가요?”
갑작스런 엄마의 말에 동석은 의아했다.
“가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다 알아. 엄마도 널 보내고 싶지 않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니.”
얘기를 하면 할수록 동석은 이해가 안 됐다. 답답한 나머지 소리쳤다.
“엄마, 무슨 소리야?”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구나. 네가 이러니 엄마는 가슴 아프구나. 연기 좀 그만하렴.”
“알아듣게 설명 좀 해봐.”
동석은 답답한 나머지 소리쳤다. 엄마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너 오늘 군대 가잖니.”
“내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군대라니.
“증거를 보여줘야 인정하겠구나.”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를 하나 들고 왔다.
“보렴.”
그건 입영통지서였다. 정확히 오늘이 입영날짜로 되어 있는.
동석은 믿을 수 없었지만 명백한 증거가 있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지? 장난치려고 만들어낸 거 아니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 휴.”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오늘 군대를 가다니. 동석은 내후년에나 군대에 갈 계획이었다. 그랬기에 군대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근데 그게 착각이었던 걸까. 기억은 그리 했지만 현실은 달랐던 걸까. 군대야 가야한다 생각하니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 군대에 간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었던 걸까. 어떻게 된 일인지 동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석은 여자 친구인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한 얘기가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 오늘 군대 가.”
“응, 알아.”
미영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너 울었어?”
미영은 말이 없었다. 동석은 미영이 이미 알고 있었단 사실에 놀랐다.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 뒤에 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따라갈게. 너는 됐다고 했지만 한 번 더 네 얼굴을 보고 싶어.”
“엉. 알았어.”
대충 대답한 뒤 동석은 전화를 끊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동석은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해보았다. 대답은 똑같았다. 짜식 잘 갔다 와라. 불쌍한 놈. 건강해라 등등. 믿을 수 없지만 동석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도 미영도 주변 친구들도 다 아는 사실을 자기 혼자만 부정한다는 건 이상했다.
결국 훈련소엔 미영과 엄마 두 사람이 다 따라왔다. 미영과 엄마는 처음 보는 사이라 어색했는지 동석을 보낸다는 생각에 우울했는지 별 말이 없었다. 동석은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자신은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 달려와 뻥이야! 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동석을 고개를 돌렸다.
“형? 여긴 어쩐 일이야.”
동석과 같은 과 선배로 2학년 위였다. 3살 차이가 났음에도 둘은 죽이 잘 맞아 평소에도 줄곧 붙어 다녔다.
“네가 간다는데 내가 안 올 수 있냐. 마침 여기서 볼 일도 있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동석을 보기 왔단 건 자명했다. 훈련소 주변은 황량해서 갈만한 데가 없다. 덕분에 동석은 제법 감동을 받았다. 가슴 한 구석이 뭉클했다.
“아참, 인사를 안 했구나.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쁜 여자 친구도 안녕.”
가끔 선배와 동석이 술을 마실 때 미영이 동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선배도 미영을 잘 알았다.
“안녕하세요.”
미영이 수줍게 인사했다. 그들은 식사를 하고 훈련소로 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동석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미영이 붙잡았다.
“정말 가는 거야? 안 가면 안 돼?”
울먹이는 미영을 보자 동석도 가슴이 아팠다.
“어쩔 수 없잖아. 남자라면 다 가는 곳인데.”
별로 위로가 안 됐는지 미영은 눈물을 흘렸다.
“너 없이 난 어떡해.”
동석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도움을 주려는 건지 놀리려는 건지 선배가 한마디 했다.
“너무 많이 울면 금방 깨진데. 사랑을 전부 쏟아내서 그렇다지.”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미영이 울음을 멈췄다. 시계를 보니 채 5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동석은 제대로 작별도 못하고 뛰어 들어갔다. 슬쩍 뒤돌아보니 선배가 미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마도 위로를 해주려는 거겠지. 허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오랫동안 손을 내리지 않았다. 순간 동석은 선배가 말했던 볼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3
지혜가 전화를 받은 건 새벽 1시였다. 이미 잠들어 있었기에 무시하려 했지만 집요하게 이어진 벨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목소리를 듣자 대번에 누군지 알았다. 세미였다. 둘은 절친한 사이로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나 일찍 자는 거 알잖아.”
지혜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려는 찰나, 세미가 끼어들었다.
“지금 잘 때가 아냐. 큰 일 났어. 정태가 말이야.”
정태란 단어를 듣자 지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태는 지혜의 남자친구였다.
“무슨 일인데?”
“나 약속 땜에 잠깐 홍대에 나왔거든. 거기서 정태를 봤어. 웬 여자랑 단 둘이서 술 마시고 있더라고.”
“정말?”
정태는 피곤하다며 오늘은 일찍 잘 거니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어제까지 시험 기간이었기에 지혜는 의심하지 않았다.
“으응. 진짜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세미는 정태를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지혜는 믿고 싶지 않았다.
“친구일 수도 있잖아. 자다가 전화가 와서 갑자기 나갔을 수도 있고.”
“넌 친구랑 단 둘이 앉아서 러브 샷도 하니? 둘이 아주 꼭 달라붙어 있더라.”
“거기 어디야? 당장 갈게.”
지혜는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정태의 행동이 수상했다. 전화를 뚝뚝 끊질 않나. 갑자기 안 가던 동창회 모임에 가겠다고 난리를 치질 않나. 걸핏하면 전화기가 꺼져 있질 않나. 지혜는 오늘에야말로 진상을 파악하고 말리라 결심했다.
“4번 출구 쪽으로 나와서 신호등 하나 건넌 뒤 옆에 있는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작은 술집이 하나 나와. 이름은 xx 고, 간판이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내가 금방 갈 테니 좀만 기다려.”
지혜를 전화를 끊고 옷도 대충 입은 뒤 달려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내내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되지?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속인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다니 괘씸하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줘야 하나? 막상 무릎 꿇고 애원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도 같은데. 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간단히 넘어가진 않겠어.
술집이 가까워졌다 싶자 지혜는 택시에서 내렸다. 웬 여자와 앉아 헤헤거리는 정태를 발견하곤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너 다 왔을 거 같으니 먼저 갈게. 난 껴들고 싶지 않아. 연인들 간의 문제는 서로가 해결하는 게 좋아.”
지혜는 살짝 서운했지만 지금 해결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혜를 정태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태는 갑작스런 습격에 놀랐는지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이게 집에서 자는 거야? 피곤하다며?”
“미안, 사정이 있었어. 내가 다 설명할게.”
“사정은 무슨. 이 년은 또 누구야?”
옆에 있던 여자는 지혜보다 키는 작았지만 이쁘고 귀여웠다. 미모만 따진다면 조금 더 나았다.
“오빠, 후배예요.”
후배는 애교가 함뿍 담긴 목소리로 오빠를 발음했다. 순간 지영은 부아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언제부터 얘랑 오빠~~~ 하는 사이가 된 거야?”
“잠깐 만난 거야. 시험 공부하면서 얘가 나한테 도움 받은 거도 많고, 나도 도움 받은 거 많고. 정말이니 오해 하지 마.”
“야! 박정태 너! 내가 다 알고 왔어. 시치미 떼지 마.”
지혜의 강렬한 눈빛에 주눅이 들었는지 정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이때 갑자기 여자 후배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꾸 소리 지르고, 오빠 기 죽이니까 오빠가 힘들어 하잖아요.”
“넌 임자 있는 남자한테 꼬리 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맘 같아선 지혜는 버릇없이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년을 한 대 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오빠가 왜 절 만나는지 모르겠어요? 언니는 오빠를 힘들게 해요. 같이 있을 때도 신경 쓰이고 긴장 돼서 편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데요. 헤어지고 싶어도 언니가 무서워 말도 못 꺼내겠고.”
지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둘이 있을 때면 행복하다 생각했는데 속으로 정태는 딴 맘을 품고 있었다니.
“정말? 얘가 하는 말이 진짜야?”
정태는 시선을 피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려주었다. 그는 지혜를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았어. 정 그러면 헤어지자.”
지혜는 말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다. 지금 와서라도 치맛자락을 붙잡는다면 용서해주리라. 허나 정태는 남의 일 마냥 모른 척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혜가 나가려해도 붙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혜는 우울했다. 바람핀 남친을 혼내주러 갔다가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정태의 탓이지만 후배 년이 했던 말과 정태가 한 행동이 잊히지 않았다. 정말 내 성격에 큰 문제가 있는 걸까. 단지 조금 급할 뿐인데. 지혜는 스스로에 대해 회의감마저 느꼈다.
지혜는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문득 세미 생각이 났다. 결과야 어쨌든 도와주려고 했던 친구에게 결과정도는 알려주는 게 예의였다. 여러 차례 신호가 갔건만 세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벌써 잠들었나 싶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라도 하소연 하고픈 맘에 지혜는 계속 걸었다. 마침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미야, 자고 있었니?”
“한밤중에 무슨 일이야.”
짜증 섞인 음색이었다.
“무슨 일은, 얘는. 너도 궁금할 거 아냐.”
“뭘? 뭘 말이야?”
처음 듣는 듯한 말투였다.
“모르는 척 하기는. 네가 말한 대로 가봤더니 정태가 있더라고. 그래서.”
지혜가 본격적으로 얘기하려는 찰나 세미가 껴들었다.
“네가 뭔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응?”
지혜는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나 장난할 기분 아냐. 아까 니가 전화해서 xx로 가보라 했잖아.”
“아까? 언제?”
“1시에.”
“난 그때 너한테 전화한 적 없어.”
지혜는 시치미 뚝 떼는 모습에 화가나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다. 오늘 따라 얘까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때였다. 불현듯 지혜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확인했다. 통화 목록은 깨끗했다. 오늘 새벽 걸려온 전화는 하나도 없었다.
#4
요즘 들어 수진은 멍하니 있는 때가 많아졌다. 정철은 무슨 생각 하냐며 묻곤 했지만 수진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짐짓 태연한 척을 했다. 처음엔 정철도 별 일 아니겠거니 했지만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서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수진은 여전히 밝고 명랑했지만 어딘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3년 간 사귀어 보면서 수진이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철은 불안해졌다.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걸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거듭된 정철의 물음에도 수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수진과 정철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났다. 마침 관심사도 비슷한데다 같은 학교라 둘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딱히 사귀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깨닫고 보니 공공연한 연인이 돼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서로를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둘은 지냈다. 특별히 가슴 떨리는 일은 없었지만 같이 있음으로서 서로가 편안해졌고 서로를 기분 좋게 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관계가 3년 동안 계속 됐다. 말은 안했지만 정철도, 수진도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나면 결혼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둘 중 누구도 이런 관계가 깨지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정철은 그리 생각했다.
“일어날까?”
수진이 창밖만 무심히 보자 지루해진 정철이 물었다.
“그래.”
수진이 대답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음색이었다.
“아우, 춥네. 괜히 나왔나.”
정철이 벌벌 떨었다.
“우리 좀 걸을까?”
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 탓인지 거리엔 사람이 적어 한산했다. 둘은 목적지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사거리 앞 신호등에 다다랐을 무렵, 수진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넌 졸업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한 얘기를 물으니 정철은 난감했지만 곧 평소 생각해오던 대로 말했다.
“취직해야지.”
“어디에 취업하게?”
“어디라니? 내가 따질 형편이 아니잖아. 요새 취업하기 좀 어려워야지. 일만 구해도 다행 아니겠어?”
“그렇구나.”
남들 다 아는 사실을 왜 묻는지 정철은 의아했다. 문득 의문이 생긴 정철이 물었다.
“너는 어쩔 거야? 취직할 거 아니었어?”
“모르겠어.”
의외의 대답에 정철은 놀랐다. 분명 수진은 전에 밝은 얼굴로 좋은 직장 들어가서 월급 많이 타서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여행도 여기저기 다니고 싶다 하지 않았던가. 수진이 다니는 사회학과는 취업이 매우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중간 정도는 됐다. 노력하면 취업을 못할 것도 없다. 혹시 다른 문제인가.
“결혼이라도 하자는 거야?”
여러 번 상상을 하긴 했지만 막상 얘기하려니 쑥스러웠다. 정철은 수진과 눈을 못 마주쳤다.
“아니, 결혼은 안 해.”
“그럼?”
“모르겠어. 정말.”
정철은 답답했다. 결혼도 취업도 아니라면 대체 뭔가. 집안 문제? 아니면 계절이 바뀌면서 우울증이라도 걸린 걸까.
“뭐든 좋으니 일단 얘기라도 해 봐. 들어는 봐야 도와주든지 말든지 하지.”
“얘기해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배부른 고민이라 하겠지.”
어느 새 둘은 역에 와 있었다. 중간에 수진이 먼저 내릴 때까지도 둘은 별 다른 얘기를 안했다. 정철은 대체 무슨 일로 저러는 걸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그 후 한동안 수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도 나오지 않았다. 정철은 하루에도 열 차례씩 전화를 했지만 받질 않았고 일주일 쯤 지나자 포기해버렸다. 연락할 때가 되면 연락하겠지 뭐. 정철은 두어 차례 수진의 자취방을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갈 때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한 달 뒤 수진이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깡마른 그녀를 보자 정철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누그러졌다.
“생각할 게 있어서 여행을 갔다 왔어. 연락하지 않은 건 미안해.”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돈을 아끼다보니 식사를 제대로 못했어.”
“배고프겠네.”
“익숙해져서 괜찮아.”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여기요!”
정철이 종업원을 부르러하자 수진이 말렸다.
“아니, 됐어. 지금 밥 먹을 상황이 아냐. 할 얘기가 있어.”
“뭔데?”
마침 정철도 그간 수진이 무슨 생각을 했고, 뭣 때문에 여행을 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언제쯤 물어보는 게 좋을까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수진이 먼저 얘기하겠다니 잘 됐다.
“아무래도 평상시처럼 있다간 결론이 안 날 것 같아서 떠났어. 처음 가보는 데서, 지금 있는 데와 전혀 다른 데 있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잖아. 난 주로 걸었어. 가끔 차를 타기도 했지만. 걸으면서 할 거라곤 생각 밖에 없더라고.”
“뭘 생각했는데?”
수진이 자꾸 변죽만 올리자 정철은 답답해서 껴들었다.
“내 미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지? 난 좋아서 사회학과에 온 게 아니라고.”
“응. 들었어.”
“점수에 맞춰서 나중에 취업하기 괜찮은 과를 고른 거지. 사실 내 적성에는 전혀 맞지 않았어.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했지.”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도 좋아서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진 않아. 다들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거지.”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어.”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무는 가 싶더니 이내 정적을 깨뜨렸다.
“사실 누구한테 얘기한 적은 없지만 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
“몰랐네. 의외인걸.”
“난 예전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 그림 그리는 거도 좋아했고. 한때 예술 쪽으로 나가보려 했던 적도 있고.”
“왜 관뒀어?”
“힘드니깐. 디자인을 하든 미술을 하든 먹고 살기 어렵거든.”
“그럼 예전에 포기하기로 결정한 거 아니었어? 왜 이제와 고민하는 건데?”
“그래서 모르겠다고 한 거였어. 내가 정말로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건지, 단지 무미건조한 일상이 지겨워 일탈을 꿈꾸는 건지. 하지만 이젠 확신이 섰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가 가야할 길이 뚜렷해지더라고. 난 결심했어. 이제라도 디자인을 공부할 거야. 늦었을지 모르지만 도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건 싫어.”
“넌 24살이야. 웬만한 디자이너들은 충분히 공부해서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걸. 아무리 봐도 현명한 짓이 아냐. 더 늦기 전에 관둬.”
“괜찮아. 다 생각했던 거니까. 오히려 너무 어려서부터 디자인을 배운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틀에 갇히기 쉽데. 실제로 외국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다른 일 하다 진로를 바꾸는 경우도 많고.”
“뜬금없는 얘기를 들으니 당황스럽네.”
“이해해 줄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단지 오래 사귄 남친에게는 알려주는 게 예의니까 말한 것뿐이야.”
“쳇.”
정철이 투덜거렸다. 수진은 개의치 않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나 유학 가.”
놀랍긴 했지만 납득은 갔다. 뒤쳐진 만큼 보충하려면 특별한 수를 써야했다.
“돈 많이 들 텐데.”
수진의 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괜찮아. 돈이 좀 생겼거든. 먼 친척 분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안에 유산을 일부 떼어주셨어. 게다가.”
“?”
“디자인 스쿨 장학생으로 뽑히게 됐거든. 아는 사람한테 추천 받긴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어.”
“잘 됐네. 근데 아는 사람이라니?”
“있어.”
“그래,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여하튼 잘해 봐.”
“고마워.”
이미 다 결정 난 마당에 말려봐야 소용없었다. 안 좋은 기억을 남길 바엔 축복이라도 해주는 게 낫지. 문득 정태는 앞에 있는 여자가 자기가 알던 여자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처럼 시시덕거릴 기분이 아니었기에 둘은 금방 헤어졌다. 홀로 걷는 내내 정철은 울적했다. 정열적이진 않았지만 사랑하기는 했었는데. 이제 수진이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돌아왔을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이 달라졌을 거고. 그는 수진과의 사이가 끝났단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수진이 조금만 운이 없었다면 현실적 여건 때문이라도 유학을 포기했을 텐데, 참 기가 막힌 우연도 다 있었다.
#5
“자기 나 사랑해?”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글쎄.”
“피~”
여자는 심통이 났는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사랑해.”
남자는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 해본 적이 없다보니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성껏 해야지. 성의가 없어.”
“미안 다시 할게. 유리야. 사랑해.”
뒤늦은 대답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는 만족스러웠는지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오늘은 어디 갈까?”
“글쎄. 날도 좋은데 도시락 싸서 소풍이라도 갈까.”
“좋아. 응. 응.”
유리는 팔짝 팔짝 뛰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남자는 못 당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원래 남자는 유리와 오래 사귈 생각이 아니었다. 이는 유리에게 힘을 썼을 때는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웬만한 연인은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헤어지게 할 수 있지만 단단히 결속된 연인이 간혹 있다. 그럴 때면 남자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반하게 할 수 있는 힘이었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혹은 남자는, 옛 연인을 바로 걷어차 버린다. 그들에게 남자외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강력한 힘이다 보니 달라붙는 사람들을 떼놓기 힘들뿐더러,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이었기에 별 흥이 안 났다. 치밀하게 짜인 계획에 따라 서서히 커플들을 헤어지게 하는 쪽이 훨씬 더 흥미진진했으며 성공했을 때의 쾌감도 컸다. 그랬기에 남자가 힘을 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리와의 하룻밤을 보낸 뒤 남자는 지쳐 잠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정사를 치르고 바로 빠져나왔겠지만 간만에 힘을 쓰다 보니 긴장이 풀렸다.
곤히 잠들었다 깨어난 남자의 눈앞엔 환하게 웃는 여자가 있었다.
“자기야, 일어났어?”
“어.”
남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얼른 나가야 했다. 허나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오늘 우리 어디 갈까?”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애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가 보였다. 기대와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따스했다.
“응? 어디 갈 거야?”
여자는 연신 재촉했다. 순간 남자는 하루쯤은 같이 있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해버렸다. 하루인데 별 문제 있겠나 싶었다. 허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삼일 사일이 되어 결국은 두 달이 지나버렸다.
남자는 매번 여자를 볼 때마다 헤어져야지, 헤어져야지 하면서도 말을 못 꺼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기에 애정에 약했다. 조작된 사랑이지만 벗어나긴 힘들었다. 꾸며진 거면 어때 좋지만 한 걸. 결국 남자는 그런 생각까지 해버렸다.
자신이 연인이 되자 연인을 증오하던 남자의 마음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세상이 밝게만 보였고 연인을 헤어지게 하는 일도 재미없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일을 하기는 했지만 횟수는 팍 줄어버렸다. 세달 전 남자는 하루에도 열 쌍씩 헤어지게 했으나 이젠 일주일에 한 두 쌍 헤어지게 할까 말까였다.
전에는 커플이 깨지더라도 죄책감이 들기는커녕 기쁘기만 했는데 요즘 들어선 그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행복해 하던 이들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다니 난 얼마나 악랄했던가. 남자는 자기 비하까지 했다. 때론 남자는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무의식중에 힘을 써서 행복한 이들을 갈라놓지는 않을까. 더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남자는 힘을 반환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정말 신이긴 신이었을까. 남자는 신을 떠올릴 때면 불안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남자는 신을 배반한 셈이었다. 여자와 즐거운 나날을 보낼 때도 남자는 신이 떠올랐다.
여자와 헤어져 돌아오던 길이었다. 남자는 자꾸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지만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남자는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참다못한 남자는 달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가면 따라오진 못하겠지. 남자가 속도를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휙 소리가 났다.
깨닫고 보니 복면을 쓴 괴한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달아나봐야 소용없으리란 걸 직감했다. 괴한은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는 신이 준 힘을 써서 저항하려 했지만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커플이 되었기에 힘을 잃은 것이다. 괴한은 순식간에 남자의 바지를 벗겼다.
“안 돼!”
남자는 곧 일어날 일을 직감하고 비명을 질렀다. 허나 괴한은 무시하고 자기 할 일만 했다.
“으윽.”
거대한 이물질이 몸 안으로 들어왔다. 고통스러웠지만 이어진 쾌감에 남자는 자신을 잃었다.
“아!”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흑.”
부정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제발, 그만 둬. 이대로라면 돌아오지 못해.”
괴한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푹찹푹찹 푹푹틴.”
격렬한 마찰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점차 남자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절정에 다다르기 전 남자는 허리를 틀곤 팔을 뻗었다.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봐야 해. 남자는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다행히 괴한은 엉덩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남자의 손이 복면에 닿았다. 괴한이 깨닫고 방해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괴한의 맨얼굴을 본 남자는 정신을 잃었다. 괴한은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