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차였다. 보기좋게, 그리고 타이밍 좋게. 일반적으로는 가슴아파야 할 세 글자가 덩그러니 떠 있는 핸드폰 액정 너머로 그녀의 의아한 얼굴이 보였다.
"짤렸대."
그녀의 얼굴빛이 흔들렸다. 반쯤은 걱정을 담아, 반쯤은 미안함을 담아.
"그거...나 때문이야?"
"물론"
쾌활한 내 대답에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정말로 미안해......"
잔뜩 울상인 그대로 그녀는 내게로 안겨왔다. 목 옆에서 그녀의 숨결과 훌쩍임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있잖아. 훌쩍. 무슨 해고 통지를 문자로 한대? 무슨 비정규직도 아니고."
음. 이런.
"원래 이런 해고는 문자로 하는 법이야."
내게서 떨어진 그녀가 아직도 눈물이 그렁진 눈에 의심을 가득 담아 찡그렸다.
"잠깐. 핸드폰좀 줘 봐."
내가 순순히 핸드폰을 넘기고, 그녀가 문자메세지를 확인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내 맹금에게 쫒기는 토끼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야! 너 이리 와!"
구두를 신고 있는 주제에 타박타박 달리며 나는 오랜 그리움이 내 안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두들겨 맞는다던가, 맹렬하게 쫒기는 일상일 테지만. 결국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내가 차인게 그렇게 기분좋아?"
"그래! 이 바보야!"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와 그녀는 재회했다.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끝.]


나는 조용히 프린트를 덮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수십번 우려먹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들이 계속 나와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조카 녀석이 쓴 이 소설에 완벽히 녹아있었다. 완전히 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는 심장에 맞춰 살짝 뜨거워진 눈도 퉁퉁거리며 커지는 것 같았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마련해 준 검은 은막에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구두를 타박거리며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남자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그 남자의 얼굴은 나와 닮아있었다.

조카의 나름대로의 정성이 어린 종이뭉치를 방 안의 다른 쓰레기들 사이에 안치해 두고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자판에 손목을 얹었다. 그렇지만 노트북 화면에 펼쳐진 워드 프로그램에는 채워진 글자가 한 글자도 없었다. 그것은 추위 때문도 아니고 조카의 연애소설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들이 완전히 결백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결국 나 자신에게 대면 그들은 면죄부를 받아 마땅한 것들이었다. 동생에게 빌린 돈으로 산 밀가루로 마지막 수제비를 해 먹고 난 뒤 종일을 노트북만 붙들고 앉아 있었지만 손가락은 한 번도 자판에 닿지 않았다. 그런 날이 이 반지하에 살게 된 이후로 항상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부유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가지로 묶인 적은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완전히 고갈되어버리고 말았다. 텅 빈 채로 그 새하얀 위용을 뽐내는 화면이 자꾸만 위압적으로 보였다. 나는 텅 빈 담뱃갑을 집어 올려 입에 물었다. 두 달도 더된 그 빈 담뱃갑엔 이미 내 이빨자국이 이리저리 나 있었다. 조카는 내가 작가랍시고 글을 들이밀어 주었지만 실상 나는 그 글을 읽을 자격이 없었다. 지방 문예지로 등단도 했고, 중단편 소설도 한 편 출판했지만 나는 결국 질릴 정도로 널린 무명작가중 하나였다. 아무런 의지도 없는 지금의 나는 작가로 따지자면 조카인 지상이만큼도 못 한 존재였다.

목을 소리가 날 때 까지 뒤로 젖혔다. 목에서는 시원한 느낌이 났지만 뱃속에서부터는 무기력감이 만연했다. 전업작가의 길은 수라의 길이라더니 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내 몸의 관절 마디마디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슬어버린 기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고철을 이끌고 전기장판 위로 가 쓰러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켜놓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식은 장판이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껴입은 점퍼를 넘고 한기를 전해 주었다. 의욕도 영감도 없는 머릿속이 혼잡해지더니 흐릿해지고, 시야는 기이하게 울렁거렸다. 마치 물 밑으로 가라앉으며 수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눈을 떴을 때는 즐거운 성탄절 오후였다. 번잡스럽고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길거리는 가쁜 숨을 내쉬어야 할 것 같지만 주거지구의 성탄절은 고요하고 거룩하기만 하다. 문틀에 기름칠을 제대로 하지 않아 나게 된 쇳조각들이 서로 긁히는 그 찢어지는 소리가 신성한 적막을 깰 때 나는 조금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 죄책감은 누구에게 바쳐 용서를 구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일단은 주 예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지금 나는 교회로 뭐라도 얻어먹으려 가는 길이니까 그 정도는 바쳐도 아깝지 않을 테지.
다들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널려있는 곳의 교회이니만큼 동해교회 역시 자그마한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도들 수에 비해 건물이 너무 비좁아 예배를 여러 차례에 걸쳐 지내야 하지만 목사도 신도들도 불평하지 않는 점이 맘에 들어 이 소교회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곤 했다. 오늘도 없는 사람들이 더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작정이었다. 다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는 못한 까닭에 특별히 맛있고 양도 많은 음식을 먹을 순 없었지만, 그게 또 내 주제에 맞는 것 같아 속이 편하다.
간밤에 쌓인 눈 덮인 길을 종종 걸어 교회에 도달하자 마침 1부예배를 마친 사람들이 2부예배를 위해 들어가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엇갈리며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넉살좋게 사이에 끼일 작정으로 인파를 이곳저곳 뜯어보던 내 눈에 가시가 하나 걸렸다. 그 가시는 자원봉사자 조끼를 입고 긴 생머리를 가볍게 묶고 있었다. 남자 눈이라 정확하지 않겠지만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임에도 빛깔은 밝고 화사했고, 투명했다. 본디 연분홍빛이었을 입술은 사람들을 줄곧 한 줄로 세우려 쉴새없이 놀린 끝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가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진짜 아름다운 건 그녀의 눈이었다. 어떤 어둠도 덮어놓고 있지 못할것 같은 그 결연한 눈빛이었다. 내가 그 가시에게 빠졌던 이유는 바로 그 눈이었다.
그 가시의 이름은 진아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에게도 꿈같은 대학시절은 있었다. 꿈속에서나 가능할 만큼 타올랐고, 꿈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진아와는 문예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고. 상대방의 글을 읽고 비평하는 시간을 통해서 싸웠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또 싸웠고, 그렇게 만날 때 마다 싸우다가 나중엔 좀 더 편하게 싸우기 위해 사귀기로 했다. 그 때만 해도 우리에겐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서로의 글을 보고 웃다가, 이번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다가. 둘 다 미숙했던지라 청춘소설같은 풋풋함이 묻어나오는 추억을 쌓아갔었다. 그녀가 정말로 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 속에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먼저 꿈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용기가 없었던 터라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스러뜨리지는 못했고, 꿈을 꿀 때와 같이 조금씩 깨어 나갔다. 그녀가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도 나처럼 꿈을 깼는지도.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다른 사람을 찾았고, 들려오는 말을 잡아보니 그는 상당히 좋은 남자인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캐보기는 싫었기에 거기서 그만 두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수 없는 놈이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싸구려 반지하방에서 굉장한 열을 내고 있는 구형 노트북을 끌어안은 채 홀로인 나를 발견하고 별반 놀라지 않은 것은 내가 그런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좁은 문으로 꾸역꾸역 몰려가는 행렬과 그 행렬의 흐름에 역행하는 또 하나의 행렬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보며 소리치는 그녀의 고개가 금방이라도 내 쪽을 향햘것만 같았기에 황급히 돌아섰다. 크고 뚜렷하지만 결코 날카롭거나 거센 기운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았다. 등가죽이 뒤로 당겨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저항하며 문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그녀는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어쩌면 그 무지가 아직 그녀를 꿈꾸게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기만 하면, 어쩌면 그 간단한 동작 하나로 나는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글이 두어개 있긴 했다. 아직 나에게 작가로써의 잔여물이 남아있던 시절 쓴 글이었다. 그 엉망진창인 글을 읽으면 분명 그녀는 큰 소리로 나를 비웃으며 즐거워 할 텐데. 어쩌면, 내가 뒤를 돌아보기만 한다면.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나는 똑같은 무늬의 타일이 새겨진 교회 바닥에서 발을 떼었다. 다리가 영 무거운 것이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을 잔뜩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공기의 저항이 내 다리에서만 수백배로 불어난 것 같은 느낌을 이겨내며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 행위를 했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왜 벌써 가? 밥 먹고 가지."
"아우, 먹었어요. 예배 끝나기 전에 나와서."
"또 그랬어? 예배는 똑바로 드리라니깐."
대충 손을 내저어 교회 권사님과 작별했다. 그녀는 자그마한 몸뚱이를 이끌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안전장치에 걸린 교회 유리문이 서서히 닫히는 모습을 끝까지 보다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춥기는 밖이나 안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적어도 집 안에서는 바람을 맞을 일이 없기에 나는 떠난 지 30분만에 다시 을씨년스럽게 나를 맞아주는 방 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장이 안으로 꼬여 들어가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과 함께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억지잠을 청했지만 불행하게도 내 정신은 말짱했다. 그렇게 하릴없이 칙칙한 어둠이 발린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니 방안의 텅 빈 공간에서부터 누군가가 왕왕 외쳐대기라도 하는 것 마냥 머리가 퉁퉁 울리며 커지는 느낌이 났다. 눈을 감고 누운 채로 목을 들어 우두둑 소리가 나게 했다. 얼어붙은 손을 조금이라도 녹이기 위해 점퍼 주머니로 손을 넣자 무언가 차가운 플라스틱제의 물건이 만져졌다.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거기에 연결된 길고 가느다란 고무재질의 선줄 때문에 그게 휴대용 라디오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분명 조카 녀석이 프린트와 함께 건네준 물건이었다. '손지상표 특제 광대역개조'가 되어있다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전원을 키자 미리 맞춰져있던 방송이 흘러나왔다. 스팅의 『angel eyes』가 한창 방송중이었다.

이런 기분 든 적 있나요
'have you ever had a feeling that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
you're close to losing your mind?
당신은 구석구석 둘러보며
you look around each corner
그녀가 거기 있길 바라지요
hopiing that she is there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you try to play it cool
그리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척 하지만
perhaps pretend that you don't care
그래봐야 부질없는 짓이지
but it doesn't do a bit of good .
당신은 그녀를 찾을 때 까지는
you've got to seek till you find
절대 마음이 편치 못할 거야
or you're never unwind'
사랑은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try to think love is not around
실은 불편할 정도로 가까이 있지요
still it's uncomfortably near


차가운 매트에 부벼진 뒤통수가 어쩐지 아릿한 게 꼭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에라도 찔린 것만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