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행사 - 판갤단편대회
글 수 206
BWV 1006 J.S 바흐 파르티타 제 3번 마장조 프렐류드 (Prelude).
한적한 주말, 오후 2시의 지하철 역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 같은 선율이 있었다. 사람들이 바이올린에 품는 느릿한 선율의 상상을 뒤흔들어 버릴정도로 정열적이며, 화려하다. 바이올린 한 대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사람의 팔로 이런 속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바흐의 프렐류드는 점심이후 느릿해진 몸을 재빠르게 만들었다.
'누가 켜고 있을까?'
이런 시골이나 다름없는 인천 촌구석 지하철 역에서 수준높은 바흐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바이올니스트를 찾기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나의 다리가 천천히 멈춰섰을 때에, 연주자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을 듯 법한 익숙한 선율의 가보트 엔 론도를 연주하고 있었다.
악보를 뚫어지게 쳐다봐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단순한 지하철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는 보면대 조차 피지 않는다. 커다란 눈을 다소곳이 감은 그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팔이 천근과 같이 느껴지는듯 이마에 땀이 가득하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연한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질끈 깨물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비될 것 같은 왼손을 이리저리 놀리는 모습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에 가까운 존경을 만들어낸다. 어디선가 따뜻한 곳에 누워서 DMB 방송을 봐야할 공익이나 차가운 겨울 바람을 피해 지하철 역으로 들어온 노숙자나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본다.
가보트 엔 론도가 아름답게 끝이 났을 때 그는 천천히 눈을 떳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바이올린 케이스에 꼬깃한 천원짜리 한 장을 넣었다. 여기저기서 구경하던 행인들이 나의 행동을 보고는 서로 눈치를 보더니 곧 흩어지고 만다. 이로서 그 멋졌던 바흐의 파르티타 제 3번은 천원에 팔리는 셈이 되었다.
"저.. 저기 고마운데, 돈은 안받아요."
연주자는 죄송하다는 듯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으며 꺼낸 천원짜리 지폐를 내 손에 건내주었다. 나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연주 실력으로 보나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바이올린으로 보나 분명히 바이올린 전공자임이 분명했는데, 어째서 동네 거지에게 동냥 주듯 천원짜리를 건냈던 것일까?
"하지만, 이걸로 커피 한잔 하는건 어때요?"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그의 손에서 천원짜리를 집어들어 보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들쳐메었다. 남들보다 조금 커보이는 눈은 깜빡일때면 얇은 쌍커풀이 곱게 수놓여 매우 아름다웠다. 옅은 화장 속에도 마치 같은 색깔이 숨어 있을 법한 투명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윤기있는 검은 생머리. 그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어디서든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예, 얼마전에 졸업해서 지금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어요."
바이올린을 전공하냐는 말에 멋쩍게 웃으며 역 앞 카페 문을 연 그는 언제 꼈는지 모르는 검은 털장갑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문도 안열어주고, 자리도 안내해주지도 않고 저 완전 매너 꽝이죠?"
퉁명스럽게 내뱉은 나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그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괜찮아요.' 라며 허둥대었다. 그러나 곧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고는 카운터에서 라떼와 아메리칸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근데, 커피 한잔 하자며 돈은 안내는 건 매너 꽝이네요."
그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의 앞에 따뜻한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앗. 그럼 매너를 회복할 겸. 이따 저녁은 어때요?"
그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혹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또 매너 꽝이 되버렸네요."
나는 여자답지 않게 행동이 굉장히 민첩한 그를 보며 실소를 짓다가,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어? 진짜 이름이 하이든? 이거 장난하는거죠?"
그는 내 명함을 받아들고는 한참동안 나와 명함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에요. 성이 하고 이름이 이든이에요."
이든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는지 그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 이든이 순 우리말이에요. 바르다라는 뜻이랄까?"
그는 손뼉을 딱 치고는 '아 그렇구나'라고 웃고는 나에게 명함 한장을 건냈다. 거기에는 인천시립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이수진이라고 써 있었다.
"이수진씨?"
"네. 흔하죠?"
피식 웃었다. 10년전 쯤이었나? 중학교 1학년 초기에 나를 꽤 따라주었던 친구와 이름이 같았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며 나는 이작 펄만 (Itzhak Pealman) 같은 장애를 극복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며 웃던 녀석. 혹시나하고 그와 녀석의 얼굴을 대조해봤지만 전혀 같아보이지가 않았다. 최소한 그 녀석은 여중생 답지 않게 머리도 짧고 콧물도 질질 흘렸었으니까.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악기를 팔러 가던 참이었거든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은 사각 케이스를 흔든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카페문을 열었다.
"이따 저녁에 봐요."
그는 케이스를 등에 메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딸깍거리는 힐의 굽소리가 재미있는 엇박자를 만들어낸다.
그를 다시 본 것은 처음 만났던 11월 29일의 저녁이 아닌 12월 18일의 아침이었다. 꼿꼿히 고개를 들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주하는 BWV 1004 바흐 파르티타 2번 샤콘느는 역을 해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비장히 울려퍼졌다. 철저히 정해진 기교, 흐트러짐 없는 박자 고집스럽게 반복되는 주제. 그러나 그가 연주하는 샤콘느는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못한다. 아니 사람들은 고작 몇초간 그를 보더니 다시금 갈길을 재촉한다. 비장히 연주하던 그는 연주를 채 끝내지 못한체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담는다.
"또 보네요."
나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기전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캔커피 하나를 건냈다. 그녀는 캔커피를 받지도 않고 나를 멍하니 올려봤다.
"하이든씨?"
"그때는 미안했어요. 이건 곡에 대한 답례고요."
그는 풋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바람맞힌 걸 사과하는게 아니라 곡에 대한 답례라고요? 하이든씨는 참 재미있어요."
"그럼요."
나는 다시 캔커피를 내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에 바뀐 전화번호를 올려두지 않은게 실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명함에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시립 오케스트라에 전화를 해봐도 아무도 받지 않고, 홈페이지를 뒤적거려도 늙그막지한 단장의 전화번호 밖에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힐끔 그의 바이올린을 보았다. 그 전의 고풍스러운 오래된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색이 다 바래버린 싸구려 국산 바이올린이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연습용 바이올린이네요?"
나는 쭈그려 앉아 캔커피를 홀짝거리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시무룩하게 바이올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활이나 케이스를 보면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연습용 답지 않게 고급스러운 사각활을 가르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헤 하고 웃더니 바이올린을 케이스에서 꺼냈다.
"이건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선물한 바이올린이에요. 에.. 브랜드나 생산년도는 저도 몰라요. 그냥 가지고 있는거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받침을 손질하고 활을 잡는다. 눈을 곱게 감은 그는 활을 몇 번 조이고는 다소곳이 일어섰다.
"그리고 이 곡은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고요."
그는 천천히 활을 들어서 느릿하게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G선상의 아리아가 울려퍼진다. 그는 처음 몇 소절만을 연주하더니 곧 그만둔다.
"이건 제 변명인데요. 빠른 곡이 아니면 이 아이가 못따라가요."
그녀는 잡고있던 바이올린을 살짝 흔들고는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빨간색 트렌치 코트에서 그때 그 검은 털장갑을 꺼낸 그는 서둘러 손에 끼었다.
"그런데 왜 역에서 연주하는 거에요. 설마 오늘은 그걸 팔려고요?"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머리위에 올려졌던 작은 검은색 빵모자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냥 기분 삼아에요."
"그럼 딱히 바쁜일 없죠? 아침 안드셨으면 같이 어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서둘러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대신 들었다. 가벼워보이던 케이스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러고보니 하이든씨는 진짜 이름이 하이든인거 맞아요?"
나는 어느새 핫케잌을 다 먹고는 커피를 홀짝이는 그를 이상하다는듯 바라봤다.
"그건 전에..."
"아니, 전화번호도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사무실엔 전혀 안계시더라고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무실까지 가보셨다고요?"
"네, 전화도 걸어보고..."
"그럼 서기장님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게..."
그는 양손을 깍지낀체 꼼지락거렸다. 아마 문을 두들기지도 못했나보다.
"아, 그냥 핸드폰을 줘보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내주었다. 그는 이리저리 조작거리더니 나에게 돌려주었다. 이수진이라는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써져있었다. 나는 이름을 길거리연주로 바꾼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는 이만 오케스트라 연습하러 가볼게요."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자기 몸만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등에 메고는 카페 문을 나섰다. 10만원도 안되는 연습용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케스트라 연습에 간다니 나는 피식 웃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그에게 문자를 받은 것은 크리스마스를 2일 앞둔 수요일이었다. 갑자기 생각나 휘날려 쓴듯한 느낌이 풀풀나는 문자는 보는 나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했다. 문자를 받은 뒤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괜찮아요"라고 답장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과연 잘 대답한 걸까 고민했다.
-그러면 내일 저녁 7시에 제가 사무실로 갈게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돌아오는 문자를 본 나는 근처의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너랑 뭔가 통하는게 있다고?"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이름 모를 독한 위스키 한잔을 원샷한다.
"야. 음악하는 애들은 진짜 상대하면 안돼."
"돈 때문에?"
"아니, 성격이 대부분 까칠해서. 에휴... 전에 작곡하는 애를 만났었는데 지옥이었어."
"그 여자는 성격이 괜찮은 것 같더라고."
"다 내숭이다. 너 혹시 명함 보여줬냐? 내가 만났던 애는 명함 보여줄 때와 지갑 꺼낼대 이외에는 전부 다 지옥이었어."
3시간 동안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술을 들이키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귓속에 어렴풋이 그가 키던 바흐의 프렐류드가 울리는듯 했다.
"오래 기다렸죠?"
사무실에 비치되어있는 쇼파에서 멍하니 커피를 홀짝이던 그는 내 물음에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게 미안해요. 우리도 오늘부터 휴가니 연말 전에 정리할게 많거든요."
나는 그녀의 컵에 약간의 커피를 더 따라주고는 서둘러 가방을 꾸렸다. 직원들 대부분이 퇴근해 한적하기 그지 없는 작은 사무실은 평소의 종이냄새보다 은은한 커피냄새가 풍겼다.
"저기 피곤한데, 멋진곡 하나만 부탁드려도 돼요?"
나는 화일을 정리하며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툭툭쳤다. 그는 마침 심심했는지 케이스에서 예의 그 연습용 바이올린을 꺼내고는 멋지게 자세를 잡았다. 잠시 조율을 하던 그는 바흐 파르티타 2번의 지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후 8시에 울려퍼지는 귀로 따라가기조차 힘든 빠른 선율은 어느새 커피향이 풍기던 사무실에 짙은 송진향을 뿌리고 있었다.
"저기 바흐를 진짜 좋아하나봐요?"
그녀가 연주를 끝내기전 서둘러 서류정리를 끝낸 나는 연주가 끝나자 크게 박수를 치며 물었다.
"바흐 곡들은 뒤가 빤히 보인달까요? 혼자서 연주하기 편하고 듣기에도 편해요."
나는 옷걸이에서 그의 빨간색 코트를 꺼내와 그에게 건내주었다. 얼굴을 붉히며 감사하다고 대답한 그는 코트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어디로 갈꺼죠?"
"어, 그쪽이 먼저 예약한 줄 알았는데요?"
주머니에서 검은 베레모를 꺼내다가 깜짝 놀란듯 눈을 크게 뜬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보죠'라고 쿨하게 대답한다.
"잠깐만요. 근처 파스타집에 연락해볼게요."
아는 레스토랑이란 레스토랑은 총동원 해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휴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라 어디서든 자리가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전부 문닫을 때까지 자리가 없을거라고 하네요.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후.."
나와 같이 전화기를 이리저리 놀리던 그는 곧 포기하고는 한숨을 쉰다.
"저 스파게티 잘 만드는데 저희 집은 어때요?"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나에게 그렇게 묻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여도 마트는 열겠죠?"
나는 가방을 챙기고는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나서며 물었다.
그는 근처 꽤 깨끗한 원룸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좁아보이지만 깔끔한 주방이나 인테리어등 한 눈의 그의 성격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약간 작은 장롱 위에는 바이올린 여러대가 케이스에 담겨있었고, 곳곳엔 비올라나 기타로 보이는 큰 케이스들도 있었다.
"악기점이라도 하세요?"
"아 그.. 악기 모으는게 취미에요."
거실을 보자마자 물은 내 말에 그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코트를 벗고 가벼운 스웨터 차림으로 요리를 시작하는 그를 멍하니 보던 나는 그의 다리 한쪽이 약간씩 떨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혹시 다리에 무슨 문제 있어요?"
"아, 아뇨. 약간 쥐같은게 나서..."
"주무를까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곧 열심히 물의 양을 재고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닌가 싶어 이러저리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이상하다는 눈빛만 돌려받고는 멍하니 식탁에 기대어 누웠다.
"피곤해요?"
"아뇨,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는 식탁냄새를 맡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아까 사온 재료 봉지를 이리저리 뒤적인다. 소스로 보이는 냄비에 이것저것을 썰어넣은 그는 곧 작은 와인잔을 세팅하고는, 냉장고에서 갈릭브레드를 꺼내 먹기좋은 크기로 자른다. 면을 꺼내서 행구고, 작은 오븐그릇에 담은 다음 위를 막 끓인 소스와 얇은 치즈로 덮는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파슬리 가루를 뿌린 뒤 나온 스파게티는 요리사가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했다.
"잘 먹을게요."
가볍게 와인잔을 부딫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원룸의 작은 식탁, 쨍그링 거리는 식기들... 무언가가 계속 상기되고 있었다.
"아참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작은 바이올린 모양 목걸이를 꺼냈다. 얼마전 백화점에서 눈에 들어왔던 목걸이는 목에 걸면 알러지가 날지도 모르는 중국제 싸구려지만 그는 기쁘게 목에 건다. 그의 희고 긴 목만큼이나 큰 목걸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말 예뻐요. 근데 저는..."
"맛있는 스파게티로 퉁치는 걸로 하죠."
"맛있어요?"
"정말요. 프로에요. 프로."
그는 헤벌레 웃고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저기 하이든씨 저 고백할게 있어요."
설겆이를 하던 그는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마치 혼자만의 독백처럼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설겆이를 계속하는 그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잇는다.
"혹시 저 몰라요?"
"네?"
나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는 끼고 있던 고무장갑으로 박수를 툭치며 홀로 웃는다.
"그... 저 진짜 기억 안나요?"
"네?"
"오늘이랑 저번에 본 바이올린 낯이 익지 않아요?"
나는 그 어디서나 볼법한 붉은 연습용 바이올린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전혀 기억나는게 없다.
"그거 옛날에 하이든씨가 나한테 준건데."
기억을 더듬지만 누군가에게 바이올린을 줘본적이 없다. 사실, 바이올린도 대학생 이후로는 잡아본 적이 드물다.
"진짜 기억안나요? 내가 미국으로 가기전에 제일 좋아했는데..."
그가 한마디씩 붙일 때 마다 나는 서서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과는 완벽히 다르지만 어쩌면 또 너무나도 비슷하다. 엉뚱한 선곡이나 음표하나 안 틀리는 철저함. 연주할때면 비장한 모습... 너무나도 친근한 음색이었기에 내 귀를 사로잡았던걸 왜 몰랐던 것일까?
"진짜 그 이수진이야? 아니 이수진이에요?"
그는 고무장갑을 벗고는 씩 웃으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모습은 십여년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지만, 눈빛은 똑같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혀졌던 기억은 댐이 허물어지듯 순식간에 밀려온다.
"찾느라고 고생했잖아. 일부러 인천으로 오고, 너 있을지도 모른다는 로펌 근처에서 연주해보고... 옛날에 말했잖아. 지하철에서 비발디 협주곡이 아닌 파르티타를 들어보고 싶다고..."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그는 목걸이에 걸린 바이올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12월 25일의 아침은 어제와는 달리 따뜻했다. 어제 내렸던 눈이 다 녹아버려 하얗지 않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햇살은 소파 위에서 자고 있던 내 눈을 세차게 때렸다.
"메리크리스마스."
언제 일어났는지 밝은 스웨터 차림의 그는 나에게 커피 한잔을 건낸다. 그리고는 장롱위에서 바이올린 케이스 하나를 꺼내고는 나에게 보여준다.
"어제 어떻게 네가 나한테 바이올린을 줬냐고 물어봤지?"
잠이 덜 깬 나는 더운 공기에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 몇개를 풀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여기 이 악보에 그렇게 써놨잖아. 이 바이올린 갖으라고."
그는 케이스에서 꼬깃꼬깃한 스즈끼 바이올린 교본 5권을 꺼내며 말했다. 그 위에는 검은 매직으로 하이든이 이수진에게 라고 크게 써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바이올린인데, 이거 너 줄게. 미국에서 잘써라."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내뱉는다.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면 협주곡 같이 해보자."
나와 그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나에게 바이올린 한 대를 건낸다.
"야... 나 바이올린 잡아본지가 벌써 5년이 넘었어."
"크리스마스엔 기적이 이루어진데잖아? 혹시 알아?너에게 하이페츠가 강림할지..."
내 제멋대로 선율에 그가 따라가는 듯한 BWV1043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중 비바체가 원룸을 크게 울린다. 박자도 제멋대로에 운지도 틀리고 활도 틀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깐깐하기 짝이 없던 바흐는 협주곡을 좋아하는 하이든에게 맞춰준다. 이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돌아옴이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사랑의 발현이다.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새로운 시작. 나는 연주를 멈추고 그를 꼬옥 끌어 안는다.
- -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랑 만난다고?"
박싱데이(12월 26일), 다시 바에서 만난 친구는 나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묻는다.
"응"
자신있는 나의 그의 얼굴에 고소함이 가득하다.
"너 이제 죽었다. 음악하는 애들이 얼마나 깐깐한데?"
"괜찮아. 걔가 바흐라면 내가 헨델이 되지, 아 내 이름은 하이든이지? 뭐 어때 걔가 고전이라면 나는 낭만.. 잠깐. 하이든도 고전이잖아? 그럼 뭐 천생연분이네."
"돌았구나."
그 녀석이 뭐라하던 간에 나는 바가 떠나가도록 크게 웃는다. 멀리서 들어오는 다른 친구들은 내 모습에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곧이어 나의 바흐가 수줍게 웃으며 나타난다.
한적한 주말, 오후 2시의 지하철 역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 같은 선율이 있었다. 사람들이 바이올린에 품는 느릿한 선율의 상상을 뒤흔들어 버릴정도로 정열적이며, 화려하다. 바이올린 한 대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사람의 팔로 이런 속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바흐의 프렐류드는 점심이후 느릿해진 몸을 재빠르게 만들었다.
'누가 켜고 있을까?'
이런 시골이나 다름없는 인천 촌구석 지하철 역에서 수준높은 바흐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바이올니스트를 찾기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나의 다리가 천천히 멈춰섰을 때에, 연주자는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을 듯 법한 익숙한 선율의 가보트 엔 론도를 연주하고 있었다.
악보를 뚫어지게 쳐다봐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단순한 지하철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는 보면대 조차 피지 않는다. 커다란 눈을 다소곳이 감은 그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팔이 천근과 같이 느껴지는듯 이마에 땀이 가득하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연한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질끈 깨물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비될 것 같은 왼손을 이리저리 놀리는 모습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에 가까운 존경을 만들어낸다. 어디선가 따뜻한 곳에 누워서 DMB 방송을 봐야할 공익이나 차가운 겨울 바람을 피해 지하철 역으로 들어온 노숙자나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본다.
가보트 엔 론도가 아름답게 끝이 났을 때 그는 천천히 눈을 떳다. 나는 아차 싶어 얼른 바이올린 케이스에 꼬깃한 천원짜리 한 장을 넣었다. 여기저기서 구경하던 행인들이 나의 행동을 보고는 서로 눈치를 보더니 곧 흩어지고 만다. 이로서 그 멋졌던 바흐의 파르티타 제 3번은 천원에 팔리는 셈이 되었다.
"저.. 저기 고마운데, 돈은 안받아요."
연주자는 죄송하다는 듯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으며 꺼낸 천원짜리 지폐를 내 손에 건내주었다. 나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연주 실력으로 보나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바이올린으로 보나 분명히 바이올린 전공자임이 분명했는데, 어째서 동네 거지에게 동냥 주듯 천원짜리를 건냈던 것일까?
"하지만, 이걸로 커피 한잔 하는건 어때요?"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그의 손에서 천원짜리를 집어들어 보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들쳐메었다. 남들보다 조금 커보이는 눈은 깜빡일때면 얇은 쌍커풀이 곱게 수놓여 매우 아름다웠다. 옅은 화장 속에도 마치 같은 색깔이 숨어 있을 법한 투명한 피부와 그와 대조되는 윤기있는 검은 생머리. 그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어디서든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예, 얼마전에 졸업해서 지금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고 있어요."
바이올린을 전공하냐는 말에 멋쩍게 웃으며 역 앞 카페 문을 연 그는 언제 꼈는지 모르는 검은 털장갑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문도 안열어주고, 자리도 안내해주지도 않고 저 완전 매너 꽝이죠?"
퉁명스럽게 내뱉은 나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그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괜찮아요.' 라며 허둥대었다. 그러나 곧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고는 카운터에서 라떼와 아메리칸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근데, 커피 한잔 하자며 돈은 안내는 건 매너 꽝이네요."
그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의 앞에 따뜻한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앗. 그럼 매너를 회복할 겸. 이따 저녁은 어때요?"
그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혹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또 매너 꽝이 되버렸네요."
나는 여자답지 않게 행동이 굉장히 민첩한 그를 보며 실소를 짓다가,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어? 진짜 이름이 하이든? 이거 장난하는거죠?"
그는 내 명함을 받아들고는 한참동안 나와 명함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에요. 성이 하고 이름이 이든이에요."
이든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는지 그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 이든이 순 우리말이에요. 바르다라는 뜻이랄까?"
그는 손뼉을 딱 치고는 '아 그렇구나'라고 웃고는 나에게 명함 한장을 건냈다. 거기에는 인천시립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이수진이라고 써 있었다.
"이수진씨?"
"네. 흔하죠?"
피식 웃었다. 10년전 쯤이었나? 중학교 1학년 초기에 나를 꽤 따라주었던 친구와 이름이 같았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며 나는 이작 펄만 (Itzhak Pealman) 같은 장애를 극복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며 웃던 녀석. 혹시나하고 그와 녀석의 얼굴을 대조해봤지만 전혀 같아보이지가 않았다. 최소한 그 녀석은 여중생 답지 않게 머리도 짧고 콧물도 질질 흘렸었으니까.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악기를 팔러 가던 참이었거든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은 사각 케이스를 흔든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카페문을 열었다.
"이따 저녁에 봐요."
그는 케이스를 등에 메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딸깍거리는 힐의 굽소리가 재미있는 엇박자를 만들어낸다.
그를 다시 본 것은 처음 만났던 11월 29일의 저녁이 아닌 12월 18일의 아침이었다. 꼿꼿히 고개를 들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주하는 BWV 1004 바흐 파르티타 2번 샤콘느는 역을 해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비장히 울려퍼졌다. 철저히 정해진 기교, 흐트러짐 없는 박자 고집스럽게 반복되는 주제. 그러나 그가 연주하는 샤콘느는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지 못한다. 아니 사람들은 고작 몇초간 그를 보더니 다시금 갈길을 재촉한다. 비장히 연주하던 그는 연주를 채 끝내지 못한체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담는다.
"또 보네요."
나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기전에 주머니에 넣어뒀던 캔커피 하나를 건냈다. 그녀는 캔커피를 받지도 않고 나를 멍하니 올려봤다.
"하이든씨?"
"그때는 미안했어요. 이건 곡에 대한 답례고요."
그는 풋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바람맞힌 걸 사과하는게 아니라 곡에 대한 답례라고요? 하이든씨는 참 재미있어요."
"그럼요."
나는 다시 캔커피를 내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에 바뀐 전화번호를 올려두지 않은게 실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명함에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시립 오케스트라에 전화를 해봐도 아무도 받지 않고, 홈페이지를 뒤적거려도 늙그막지한 단장의 전화번호 밖에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힐끔 그의 바이올린을 보았다. 그 전의 고풍스러운 오래된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색이 다 바래버린 싸구려 국산 바이올린이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연습용 바이올린이네요?"
나는 쭈그려 앉아 캔커피를 홀짝거리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시무룩하게 바이올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활이나 케이스를 보면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연습용 답지 않게 고급스러운 사각활을 가르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헤 하고 웃더니 바이올린을 케이스에서 꺼냈다.
"이건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선물한 바이올린이에요. 에.. 브랜드나 생산년도는 저도 몰라요. 그냥 가지고 있는거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받침을 손질하고 활을 잡는다. 눈을 곱게 감은 그는 활을 몇 번 조이고는 다소곳이 일어섰다.
"그리고 이 곡은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고요."
그는 천천히 활을 들어서 느릿하게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G선상의 아리아가 울려퍼진다. 그는 처음 몇 소절만을 연주하더니 곧 그만둔다.
"이건 제 변명인데요. 빠른 곡이 아니면 이 아이가 못따라가요."
그녀는 잡고있던 바이올린을 살짝 흔들고는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빨간색 트렌치 코트에서 그때 그 검은 털장갑을 꺼낸 그는 서둘러 손에 끼었다.
"그런데 왜 역에서 연주하는 거에요. 설마 오늘은 그걸 팔려고요?"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머리위에 올려졌던 작은 검은색 빵모자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그냥 기분 삼아에요."
"그럼 딱히 바쁜일 없죠? 아침 안드셨으면 같이 어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서둘러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대신 들었다. 가벼워보이던 케이스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러고보니 하이든씨는 진짜 이름이 하이든인거 맞아요?"
나는 어느새 핫케잌을 다 먹고는 커피를 홀짝이는 그를 이상하다는듯 바라봤다.
"그건 전에..."
"아니, 전화번호도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사무실엔 전혀 안계시더라고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무실까지 가보셨다고요?"
"네, 전화도 걸어보고..."
"그럼 서기장님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게..."
그는 양손을 깍지낀체 꼼지락거렸다. 아마 문을 두들기지도 못했나보다.
"아, 그냥 핸드폰을 줘보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내주었다. 그는 이리저리 조작거리더니 나에게 돌려주었다. 이수진이라는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써져있었다. 나는 이름을 길거리연주로 바꾼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는 이만 오케스트라 연습하러 가볼게요."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자기 몸만한 바이올린 케이스를 등에 메고는 카페 문을 나섰다. 10만원도 안되는 연습용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케스트라 연습에 간다니 나는 피식 웃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
그에게 문자를 받은 것은 크리스마스를 2일 앞둔 수요일이었다. 갑자기 생각나 휘날려 쓴듯한 느낌이 풀풀나는 문자는 보는 나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했다. 문자를 받은 뒤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괜찮아요"라고 답장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과연 잘 대답한 걸까 고민했다.
-그러면 내일 저녁 7시에 제가 사무실로 갈게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돌아오는 문자를 본 나는 근처의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너랑 뭔가 통하는게 있다고?"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이름 모를 독한 위스키 한잔을 원샷한다.
"야. 음악하는 애들은 진짜 상대하면 안돼."
"돈 때문에?"
"아니, 성격이 대부분 까칠해서. 에휴... 전에 작곡하는 애를 만났었는데 지옥이었어."
"그 여자는 성격이 괜찮은 것 같더라고."
"다 내숭이다. 너 혹시 명함 보여줬냐? 내가 만났던 애는 명함 보여줄 때와 지갑 꺼낼대 이외에는 전부 다 지옥이었어."
3시간 동안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술을 들이키던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귓속에 어렴풋이 그가 키던 바흐의 프렐류드가 울리는듯 했다.
"오래 기다렸죠?"
사무실에 비치되어있는 쇼파에서 멍하니 커피를 홀짝이던 그는 내 물음에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게 미안해요. 우리도 오늘부터 휴가니 연말 전에 정리할게 많거든요."
나는 그녀의 컵에 약간의 커피를 더 따라주고는 서둘러 가방을 꾸렸다. 직원들 대부분이 퇴근해 한적하기 그지 없는 작은 사무실은 평소의 종이냄새보다 은은한 커피냄새가 풍겼다.
"저기 피곤한데, 멋진곡 하나만 부탁드려도 돼요?"
나는 화일을 정리하며 그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툭툭쳤다. 그는 마침 심심했는지 케이스에서 예의 그 연습용 바이올린을 꺼내고는 멋지게 자세를 잡았다. 잠시 조율을 하던 그는 바흐 파르티타 2번의 지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후 8시에 울려퍼지는 귀로 따라가기조차 힘든 빠른 선율은 어느새 커피향이 풍기던 사무실에 짙은 송진향을 뿌리고 있었다.
"저기 바흐를 진짜 좋아하나봐요?"
그녀가 연주를 끝내기전 서둘러 서류정리를 끝낸 나는 연주가 끝나자 크게 박수를 치며 물었다.
"바흐 곡들은 뒤가 빤히 보인달까요? 혼자서 연주하기 편하고 듣기에도 편해요."
나는 옷걸이에서 그의 빨간색 코트를 꺼내와 그에게 건내주었다. 얼굴을 붉히며 감사하다고 대답한 그는 코트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어디로 갈꺼죠?"
"어, 그쪽이 먼저 예약한 줄 알았는데요?"
주머니에서 검은 베레모를 꺼내다가 깜짝 놀란듯 눈을 크게 뜬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그럼 '지금이라도 알아보죠'라고 쿨하게 대답한다.
"잠깐만요. 근처 파스타집에 연락해볼게요."
아는 레스토랑이란 레스토랑은 총동원 해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휴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라 어디서든 자리가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전부 문닫을 때까지 자리가 없을거라고 하네요.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후.."
나와 같이 전화기를 이리저리 놀리던 그는 곧 포기하고는 한숨을 쉰다.
"저 스파게티 잘 만드는데 저희 집은 어때요?"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나에게 그렇게 묻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크리스마스 이브여도 마트는 열겠죠?"
나는 가방을 챙기고는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나서며 물었다.
그는 근처 꽤 깨끗한 원룸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좁아보이지만 깔끔한 주방이나 인테리어등 한 눈의 그의 성격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약간 작은 장롱 위에는 바이올린 여러대가 케이스에 담겨있었고, 곳곳엔 비올라나 기타로 보이는 큰 케이스들도 있었다.
"악기점이라도 하세요?"
"아 그.. 악기 모으는게 취미에요."
거실을 보자마자 물은 내 말에 그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코트를 벗고 가벼운 스웨터 차림으로 요리를 시작하는 그를 멍하니 보던 나는 그의 다리 한쪽이 약간씩 떨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혹시 다리에 무슨 문제 있어요?"
"아, 아뇨. 약간 쥐같은게 나서..."
"주무를까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곧 열심히 물의 양을 재고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닌가 싶어 이러저리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이상하다는 눈빛만 돌려받고는 멍하니 식탁에 기대어 누웠다.
"피곤해요?"
"아뇨,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는 식탁냄새를 맡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아까 사온 재료 봉지를 이리저리 뒤적인다. 소스로 보이는 냄비에 이것저것을 썰어넣은 그는 곧 작은 와인잔을 세팅하고는, 냉장고에서 갈릭브레드를 꺼내 먹기좋은 크기로 자른다. 면을 꺼내서 행구고, 작은 오븐그릇에 담은 다음 위를 막 끓인 소스와 얇은 치즈로 덮는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파슬리 가루를 뿌린 뒤 나온 스파게티는 요리사가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했다.
"잘 먹을게요."
가볍게 와인잔을 부딫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원룸의 작은 식탁, 쨍그링 거리는 식기들... 무언가가 계속 상기되고 있었다.
"아참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작은 바이올린 모양 목걸이를 꺼냈다. 얼마전 백화점에서 눈에 들어왔던 목걸이는 목에 걸면 알러지가 날지도 모르는 중국제 싸구려지만 그는 기쁘게 목에 건다. 그의 희고 긴 목만큼이나 큰 목걸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말 예뻐요. 근데 저는..."
"맛있는 스파게티로 퉁치는 걸로 하죠."
"맛있어요?"
"정말요. 프로에요. 프로."
그는 헤벌레 웃고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저기 하이든씨 저 고백할게 있어요."
설겆이를 하던 그는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마치 혼자만의 독백처럼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설겆이를 계속하는 그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잇는다.
"혹시 저 몰라요?"
"네?"
나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그는 끼고 있던 고무장갑으로 박수를 툭치며 홀로 웃는다.
"그... 저 진짜 기억 안나요?"
"네?"
"오늘이랑 저번에 본 바이올린 낯이 익지 않아요?"
나는 그 어디서나 볼법한 붉은 연습용 바이올린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전혀 기억나는게 없다.
"그거 옛날에 하이든씨가 나한테 준건데."
기억을 더듬지만 누군가에게 바이올린을 줘본적이 없다. 사실, 바이올린도 대학생 이후로는 잡아본 적이 드물다.
"진짜 기억안나요? 내가 미국으로 가기전에 제일 좋아했는데..."
그가 한마디씩 붙일 때 마다 나는 서서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과는 완벽히 다르지만 어쩌면 또 너무나도 비슷하다. 엉뚱한 선곡이나 음표하나 안 틀리는 철저함. 연주할때면 비장한 모습... 너무나도 친근한 음색이었기에 내 귀를 사로잡았던걸 왜 몰랐던 것일까?
"진짜 그 이수진이야? 아니 이수진이에요?"
그는 고무장갑을 벗고는 씩 웃으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모습은 십여년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지만, 눈빛은 똑같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혀졌던 기억은 댐이 허물어지듯 순식간에 밀려온다.
"찾느라고 고생했잖아. 일부러 인천으로 오고, 너 있을지도 모른다는 로펌 근처에서 연주해보고... 옛날에 말했잖아. 지하철에서 비발디 협주곡이 아닌 파르티타를 들어보고 싶다고..."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그는 목걸이에 걸린 바이올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12월 25일의 아침은 어제와는 달리 따뜻했다. 어제 내렸던 눈이 다 녹아버려 하얗지 않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햇살은 소파 위에서 자고 있던 내 눈을 세차게 때렸다.
"메리크리스마스."
언제 일어났는지 밝은 스웨터 차림의 그는 나에게 커피 한잔을 건낸다. 그리고는 장롱위에서 바이올린 케이스 하나를 꺼내고는 나에게 보여준다.
"어제 어떻게 네가 나한테 바이올린을 줬냐고 물어봤지?"
잠이 덜 깬 나는 더운 공기에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 몇개를 풀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여기 이 악보에 그렇게 써놨잖아. 이 바이올린 갖으라고."
그는 케이스에서 꼬깃꼬깃한 스즈끼 바이올린 교본 5권을 꺼내며 말했다. 그 위에는 검은 매직으로 하이든이 이수진에게 라고 크게 써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바이올린인데, 이거 너 줄게. 미국에서 잘써라."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내뱉는다.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면 협주곡 같이 해보자."
나와 그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나에게 바이올린 한 대를 건낸다.
"야... 나 바이올린 잡아본지가 벌써 5년이 넘었어."
"크리스마스엔 기적이 이루어진데잖아? 혹시 알아?너에게 하이페츠가 강림할지..."
내 제멋대로 선율에 그가 따라가는 듯한 BWV1043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중 비바체가 원룸을 크게 울린다. 박자도 제멋대로에 운지도 틀리고 활도 틀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깐깐하기 짝이 없던 바흐는 협주곡을 좋아하는 하이든에게 맞춰준다. 이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잃어버렸던 기억의 돌아옴이며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사랑의 발현이다.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새로운 시작. 나는 연주를 멈추고 그를 꼬옥 끌어 안는다.
- -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랑 만난다고?"
박싱데이(12월 26일), 다시 바에서 만난 친구는 나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묻는다.
"응"
자신있는 나의 그의 얼굴에 고소함이 가득하다.
"너 이제 죽었다. 음악하는 애들이 얼마나 깐깐한데?"
"괜찮아. 걔가 바흐라면 내가 헨델이 되지, 아 내 이름은 하이든이지? 뭐 어때 걔가 고전이라면 나는 낭만.. 잠깐. 하이든도 고전이잖아? 그럼 뭐 천생연분이네."
"돌았구나."
그 녀석이 뭐라하던 간에 나는 바가 떠나가도록 크게 웃는다. 멀리서 들어오는 다른 친구들은 내 모습에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곧이어 나의 바흐가 수줍게 웃으며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