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이 완성되기 직전 그녀가 죽었다. 흔하디흔한 교통사고였다. 안전벨트만 잘 맸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는 경찰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박살난 머리통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날 독하다 했지만 난 울어야 될 이유를 몰랐다. 곧 다시 살아날 사람 때문에 감정을 소비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보단 한시라도 빨리 타임머신을 완성하는 게 나았다.

3개월 뒤 과거로 갔다. 타임머신엔 약간의 오차가 있어 엉뚱한 시간대에 가기도 했으나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를 살렸다. 덕분에 생각보다 과거를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게 됐다. 뭐, 어쨌든 그녀를 살렸으니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난 쌩쌩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확인한 뒤 현재로 돌아왔다. 그녀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길 기대하면서.

타임머신을 차고에 주차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무척 쌀쌀했다. 오차 때문에 겨울로 온 모양이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얇은 긴팔만 입었기에 이대로라면 얼어 죽기 딱 좋았다. 한동안 집을 비워둔 탓인지 바닥에 먼지가 가득했다. 내가 과거로 간 시점부터 이 집을 돌볼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더러웠지만 청소할 여유가 없었기에 보일러로 달려갔다. 허나 켜지지 않았다. 그새 가스가 끊겼나 보다. 수도나 전기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는 수없이 두꺼운 옷을 아무렇게나 꺼내 입은 뒤 집을 나섰다. 밀린 요금을 내야 뭐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은행을 향해 걷는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졌다.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과거로 출발한 게 9월 달이니 대략 3개월이 지난 셈이다. 내가 사라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이 걱정했을까.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처리할 일이 많았기에 뒤로 미루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로 그녀에게 달려갈 게 뻔했다. 그럼 난 불도 들어오지 않는 추운 방에서 밤을 새야했다.

내 이름으로 된 요금들을 모두 내고 다음 달부터는 모두 자동이체로 해 달라했다. 이번 일 같은 일이 또 생기는 건 질색이다. 은행 앞 공중전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는 받지 않지만 핸드폰이 재개통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허무하게 통화음만 울렸다. 그녀는 끝내 전화를 안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이 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무엇을 해도 영 시간이 가지 않았다. 띠리링 소리와 함께 개통이 되자 재빨리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을 걸어도 신호만 갈뿐 받질 않았다. 답답했지만 그녀의 행동이 이해는 갔다. 남자친구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없어지다니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고의는 아니었지만 난 연락을 끊었고 연인 사이에 그건 헤어지자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나의 일방적인 결별 통보에 그녀는 맘이 무척 상했을 거다. 그녀의 심정에 공감이 가는 한편 오해를 일초라도 빨리 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무작정 그녀의 집에 갔다. 초인종을 눌러보았지만 ‘나갔다.’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쌀쌀했기에 시간이 더디게 갔다. 밤이 늦어서야 그녀는 나타났다. 옆구리에 다른 남자를 낀 채.

그녀는 나를 보자 눈이 커졌다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나는 놀라 제대로 말도 못했다.

“너.”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그 사이 딴 남자 생긴 거야?”
“너 참 낯짝도 두껍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너야말로! 남자친구가 좀 안 보인다고 새 남자를 만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연락도 없이 없어진 건 너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내가 다 설명할게.”
“필요 없어. 뻔한 변명이겠지.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매몰찬 태도에 화도 났지만 우선은 그녀를 설득해야했다.
“어차피 사귄지 며칠 안 됐을 테니 지금이라도 당장 헤어져. 그러면 모른 척 해줄게. 원인은 내가 제공했으니.”
“못 헤어져. 난 이 사람 사랑해.”
그녀는 옆에 있는 놈의 팔짱을 더욱 강하게 꼈다.
“끽해야 두 달 사귄 놈보다 5년 사귄 내가 못하다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얘기하지 마. 우린 사귄 지 7개월 됐어.”
다리가 휘청거렸다.
“뭐라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봐.”
“만난 지 7개월 됐다고.”
“지금이 몇 년도지?”
머리가 빠르게 움직인다.
“그건 왜 묻는데?”
“아무튼 얘기하기나 해!”
“2011년.”

젠장. 시간이 너무 많이 어긋나 버렸다. 과거로 갔을 땐 오차가 심해봐야 3,4개월 밖에 안 돼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랬을 줄 알았는데 2년이라니.

“왜 말이 없어. 말 좀 해봐.”
“미안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내가 사라졌던 건 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었어.”
“알아듣게 좀 얘기해.”

난 그간 연구했던 게 타임머신이란 사실과 그녀를 살리기 위해 과거에 갔다가 시간 오차 땜에 미래로 왔다고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들을수록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물론 못 믿겠지. 하지만 거짓말이 아냐.”
“네가 공상적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어. 더 실망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우리 집에 가자. 타임머신을 보여줄게.”
“됐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널 따라가? 사랑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네가 이 얘기를 2년 전에 했다면 믿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은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어.”
“한 번만, 한 번만 믿어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날 만나면 될 거 아냐? 여기서 징징 짜지 말고.”

그녀는 날 놔두고 남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벌써 집을 들락날락하는 사이가 된 건가. 난 부모님을 소개받는데 2년이나 걸렸는데. 화가 났지만 참았다. 몇 달만 기다리면 된다. 타임머신 연료는 서서히 충전되는 방식이라서 한 번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1개월씩 충전을 해야 한다. 시간 오차가 생기더라도 예비분이 3~4개월 치 있다면 과거를 고치기에 충분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쓸쓸하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과거로 가면 되니까.  그녀를 만나게 되면 따끔하게 혼내줘야겠다. 다시는 바람피울 생각이 안 들도록.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그녀를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했다. 가까운 포장마차에 들러 홀로 소주를 마시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푸념을 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조심스레 불을 켜고 확인해보니 집안에 없던 발자국이 나 있었다. 쌓여있던 먼지 덕에 발자국이 뚜렷이 보였다. 발자국은 연구실을 향해 있었다. 없어진 게 뭔지 알게 된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타임머신에 관한 자료만 전부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에 당장 차고로 달려갔다. 차고 문을 열자 타임머신의 윤곽이 보였다. 다행히 타임머신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부피가 크고 열쇠도 없어 훔쳐가지 못한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며 안심이 됐다. 헌데 불을 켜고 다가간 순간 까무러칠 뻔 했다. 타임머신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난 망연자실하여 타임머신이었던 고철을 멍하니 바라봤다. 타임머신을 완벽하게 고치는 덴 적어도 2년은 걸릴 거다. 연구 자료가 없어진 이상 개발자인 나도 방법이 없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시간 오차를 줄여야한다. 얼추 기억을 하고 있으니 처음 만드는 것보다야 낫지만 오래 걸리긴 마찬가지였다. 공황상태가 지나가자 분노가 치밀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내가 타임머신을 개발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난 홀로 비밀리에 연구를 해왔다. 젊은 나이에 타임머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천재적인 머리와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연구 자료 덕분이었다. 근데 그것이 전부 사라졌다. 정부기관이나 국제적인 기업을 소행일까. 아니면 나를 시기한 어떤 정체불명의 과학자가? 순간 답이 나왔다. 오늘 나는 그녀에게 타임머신에 관해 말했다. 그녀는 타임머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녀 옆에 있던 남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난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족히 180cm는 될 키에 눈이 찢어진 험악하며 음흉한 인상. 세상의 모든 여자를 자신의 품에 안으려는 듯 한 떡 벌어진 어깨. 그 자는 분명 무수한 여자를 사귀어왔을 게 틀림없다. 연적이라서 비하하는 게 아니다. 그 자의 더러운 얼굴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어떤 인간인지 잘 안다. 그 자는 내 연인과 타임머신을 모두 빼앗았다. 내 인생의 전부라도 해도 좋을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자의 동기가 그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든, 타임머신이 탐이 나서였든 상관없다. 난 결단코 그 자를 용서하지 않겠다. 무슨 수를 써서든 철저히 파괴해 주겠다.

일단 증거를 찾아야했다. 뚜렷한 물증도 없이 엉뚱한 사람을 처단하고 싶진 않았다. 심정적으로는 그가 범인인 게 확실하지만 만에 하나란 게 있잖은가. 다음날부터 그 자를 따라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이름은 박영수, 나이는 31세, 명문대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대기업에 입사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성격이 원만하며 대인관계도 좋아 핸드폰이 쉴 틈이 없다. 요컨대 그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연구 자료를 가져갔더라도 직접 써먹지는 못할 게 틀림없다. 다른 이에게 파려고 보관 중이거나 이미 없애버렸거나 둘 중 하나다. 후자라면 희망이 없기에 전자로 가정했다.

사람을 고용해 박영수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었다. 덕분에 그와 그녀가 어디서 뭘 하는지 까지 낱낱이 알게 됐다. 언제 키스를 했고 어디서 밥을 먹었으며 어떤 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모텔에 갔다는 등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보고를 들을 때마다 그들을 질투하고 시기했다. 동시에 그녀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가끔씩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를 볼 때 박영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가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해도 난 불안할 것이다. 언제고 그녀가 날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다면 난 다시 과거로 가 그녀를 되찾아 와야 하나, 아니면 그녀를 보내줘야 하나. 답을 낼 수 없었다.

박영수가 출근한 틈을 타 그의 집에 들어갔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건만 연구 자료를 찾을 순 없었다. 이미 파기한 걸까. 어쩌면 처음의 추리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라면 범인은 그녀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용의자에서 배제한 게 실수였다. 그녀가 날 떠나갈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녀에게 그토록 매몰찬 면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에게 내가 모르는 부분이 또 없으란 법은 없었다. 박영수에 대한 감시망을 유지한 채 그녀도 감시하기 시작했다.

둘의 행적을 쫓다보니 타임머신 수리는 자꾸만 미뤄졌고 순식간에 2달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별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와 몰래 접선을 하지도, 비밀스런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둘 중 하나가 범인인 건 분명한데 누군지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결국 계획을 바꿨다. 우선 타임머신을 수리하기로. 그 뒤 과거로 돌아가 누가 타임머신을 부쉈는지 알아내면 된다. 그 자가 범인이라면 철저히 보복하겠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하든 난 과거로 갈 테니 잡을 수 없다. 허나 그녀가 범인이라면? 날 배신한 그녀에게 보복해야 할까, 이미 맘이 떠나갔다는 걸 인정하고 용서해줘야 할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기에 전심전력을 타임머신 수리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잠시나마 잡념들이 사라졌다. 절반쯤 고쳤을 때 갑작스레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가 단숨에 알았다.
“미희구나.”
“나 결혼해.”
“누구랑?”
“그때 그 사람이랑.”
“그렇구나.”
“축하한다는 말 안 해줘?”
“미안, 그것만은 차마 못 하겠다.”
잔인한 여자.
“잘 있어. 이게 너한테 거는 마지막 전화일 거야.”
“잠깐만. 묻고 싶은 게 있어.”
“응?”
“어쩜 대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는데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말하든 난 네 결혼을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테니 부담 없이 얘기해 줘.”
“뭔데?”
“만약, 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끝까지 맺어졌을까?”
“만약이란 없어.”
“네 말이 맞아. 그래도 난 대답이 듣고 싶어.”
“글쎄. 잘 모르겠어. 그때는 너와 결혼할 거라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가정하는 건 무리야. 우린 다른 일 때문에 헤어졌을 수도 있어.”
“........”
“듣고 있어? 대답이 없네.”
“응,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럼 행복해라. 끊을게.”

수화기를 내려놨다. 젠장, 점점 더 모르겠다. 내가 원했던 대답은 달랐다.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너와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와 같은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모르겠다. 정말 과거로 돌아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걸까. 어쩜 그녀를 살렸을 때부터 나와 그녀는 헤어질 운명이었을까. 확신이 없어졌다. 술 마시고 취해 잠들기를 몇 날 며칠이고 반복했다. 깨닫고 보니 그녀의 결혼식으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타임머신 수리에 열중했다. 내게 남은 건 이것 밖에 없었다. 누가 그랬던 간에 범인을 알고 싶었다. 범인이 그라면 안심하고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다. 중간에 잘못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시도는 해봐야했다. 하지만 그녀라면? 그간 가졌던 믿음이 산산 조각나 다시는 그녀를 믿지도 사랑하지도 못할 거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겠지. 최악의 상황이 진실이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멈추진 않았다. 범인을 알아내고자 하는 집념은 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난 술에 중독되는 대신 다른 데 빠져 들었다. 이제 와서 관두는 건 무리였다.

과거로 돌아와 날짜를 확인했다. 2011년 12월 22일. 오후 2시 39분. 정확히 타임머신이 박살난 그 날이었다. 차를 한 대 빌려 집에서 20m 쯤 떨어진 곳에 세운 뒤 집을 감시했다. 얼마 안 있어 다른 내가 타임머신을 차고에 놓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내가 경험한 그대로였다. 저녁이 되자 다른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를 만난 게 11시쯤이고 집으로 돌아온 게 새벽 1시쯤이니 대략 두 시간이 빈다. 아무리 빨리 와도 그녀의 집에서 내 집까지 오는 데 25분은 걸릴 테니 11시 20분부터 주의해서 지켜보면 된다. 집안으로 들어가 기다리려다 관두었다. 혹시나 범인이 누군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 달아나면 곤란했다. 한 번에 범인을 잡고 싶었다. 그간 쉬지 않고 수리 작업을 한 탓인지, 밤이 되자 피로가 몰려왔다. 잠깐만 눈을 붙이고 여유 있게 일어나잔 생각에 10시에 시계를 맞추곤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기계음에 잠을 깼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차고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난 차에서 튀어나와 차고로 뛰어갔다. 동시에 머릿속이 번뜩였다. 그간의 추리가 잘못되었다. 그나 그녀는 범인이 아니었다. 누군가 또 다른 자의 소행이었다. 두 남녀가 여유 있게 타임머신을 때려 부수고 귀가했을 수도 있지만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느껴졌다. 그보단 타임머신을 탐내는 누군가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고작해야 20m 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그 사이 범인이 달아나버릴까 두려웠다. 설령 범인을 보더라도 잡을 순 없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힘도 약하고 무기도 없는 내가 오히려 범인에게 당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차고 문을 열고 범인과 마주친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동시에 난 할 말을 잃어버리고 얼어붙어버렸다. 그 안에 있었던 건 ‘나’였다. 조금 늙고 살이 빠지긴 했지만 그건 분명히 ‘나’였다.

“대체 왜 그랬지?”

타임머신은 이미 깡그리 부서져 있었다. 미래의 나가 대답했다.

“일단 앉아. 얘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
“젠장.”
맘에 들진 않지만 뭔 소리를 하는지 들어는 봐야했다. 의자를 끌어왔다.
“결론부터 말할게. 내가 타임머신을 부순 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나 너 그리고 미래에 있을 무수한 나 자신을 위해.”
“무슨 뜻이지?”
“그녀와 헤어졌을 때 타임머신이 있었다면 뭘 했을까? 제대로 된 시간대로 왔다면 그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혼했겠지.”
대답을 하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정답이야. 그녀와 나는 결혼해. 2년 정도는 행복하게 살지만 점점 다툼이 잦아지고 시도 때도 없이 싸우지. 믿을 수 없다고? 물론 증거는 없겠지만 너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거야. 오래도록 사귄다고 꼭 잘 통하는 연인이 아니란 걸. 오히려 서로에게 서로를 맞춰가다 보니 불만족스런 점이 쌓여가지. 요컨대 맞지 않는 부품을 자꾸 끼우면 고장 나는 거와 똑같아. 몇 개정도는 적당히 끼워도 잘 굴러가지만 쌓이고 쌓이다보면 결국 망가지지. 그녀와 나 사이가 그랬어.”

“설마, 2년이나 오차가 생긴 것도 당신 짓인가?”
“맞아. 약간 조작을 했지.”
화가 치밀어 그의 멱살을 움켜줬다.

“컥, 살살해. 숨쉬기 힘들어.”

힘을 풀었다.

“왜 그랬지? 과거가 바뀌면 괴로운 건 우리들이란 걸 몰랐나?”
“알기야 알았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고통은 잠시 뿐이야. 결과적으로 우리는 훨씬 행복해지지. 미희와 지지부진하게 몇 년씩 다투는 일도 없고, 그녀를 만나자마자 결혼한 덕에 애도 둘이나 생겨.”
“그녀? 누구를 말하는 거지?”
“네가 몇 년 뒤에 만날 여자. 진정한 인연이라고만 해두지. 너무 자세한 걸 말하면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니까.”
“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미희가 놓아주질 않자 타임머신을 썼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나는 알아. 미희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건 껍질만 있는 삶이었어. 속은 텅텅 빈. 미희와 난 완전히 식어버리지만 헤어지지는 않아. 남들 앞에선 보란 듯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내가 그녀를 만나고서 이혼을 요구했을 때도 미희는 거절했어. 충분한 위자료를 보장했는데도 말이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고 난 좌절했어. 독하고 허영심만 가득한 년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칠 뻔했다구.”

한 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매도하는 그를 보자 그와 내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고, 화가 났다.

“변명하지 마.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불행하고 행복한지 알 수 있지? 너는 우리의 기회를 박탈한 뒤 듣기 좋은 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야.”

  “아니, 너는 경험해보지 못 했으니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지. 상상으로는 무슨 일이든 못 하겠어? 때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야.”

“난 이 길로 과거로 가겠어. 노력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긴 싫어.”

내가 차고를 빠져나가려하자 그가 날 붙들었다.

“잠깐! 여기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젠장.”

그는 눈썹을 찡그리곤 주저하는 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난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몇 번씩이고 충고했어. 이렇게 하면 미희와 너의 사이는 좋아질 거다. 저렇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로 돌아와도 달라지는 건 없더군. 매번 헛수고였어.”

그의 말투와 몸짓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을지 짐작이 갔다. 그는 무수한 노력 끝에 포기한 것뿐이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만약 내가 바꾸지 않았다면 네가 바꾸었을 거야.”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눈치 챈 이상 내가 여기 있든 없든 무의미했다.

“미래로 돌아가겠어.”

그는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활짝 웃었다.
“역시 너는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너는 내 자신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더 좋은 인연이 나타날 테니 상심하지 마. 내가 맘에 들어 했으니 분명 너도 맘에 들 거야.”

대답하지 않고 미래로 돌아왔다. 그에게 설득당한 건 아니었다. 내가 아니면 네가 했을 거라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어떤 일을 해도 미희와의 결혼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누군가의 조작은 아닐까. 누군가 미희와 헤어지도록 간섭한 걸 아닐까. 마치 그가 내 타임머신이 2년 뒤로 도착하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어쩌면 새로 만나게 된다는 여자도 누군가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 건지도 모른다. 또 다른 내 자신이든, 다른 시간 여행자이든.

점차 확신이 사라졌다. 무엇이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고, 무엇이 진실일까. 지금 하고 있는 이 생각조차 누군가가 조작한 결과는 아닐까. 나는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모르게 돼버렸다. 머리가 아파 술을 퍼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불현듯 이 모든 게 타임머신 탓이라 생각됐다. 애초에 그딴 걸 만든 게 실수였다. 그것만 없었다면 밤새도록 번민할 이유가 없었다. 차고로 가 타임머신을 노려봤다. 울화가 치밀어 분쇄기를 켰다. 저것을 갈기갈기 부숴버려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분쇄기를 끌고 막 타임머신을 박살내려는 순간 또 다른 타임머신이 나타났다. 내 것보다 작고 날렵한 외양이었다. 적어도 같은 모델은 아니었다. 그걸 보자 바짝 긴장됐다. 안에 타고 있는 건 누구지? 저 작자가 온갖 시간대를 돌아다니며 내 인생을 간섭했나? 허나 나타난 인물을 보자 안도되면서도 아쉬웠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80은 족히 먹었을 법한 나 자신이었는데 슬쩍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한데다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했다. 볼은 쏙 들어갔고 팔다리는 뼈만 남았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어 한걸음 한걸음도 간신히 뗐다.

그는 간신히 입을 떼더니 들릭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 술을 끊어.”

그 말을 듣자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술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까?”

그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내 말을 무시했다.

“타임머신을 부수지 마. 꼭, 꼭 필요할 때가 올 거야.”

그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곤 타임머신에 올라탔다. 병든 몸으로 간신히 타임머신을 만든 게 틀림없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를 써도 병을 낫게 할 수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타임머신을 택했다. 쇠약해진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맘이 불쑥 생기는 한편, 마음 한구석에선 그를 멸시했다. 나는 타임머신을 증오하면서도 결국 타임머신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타임머신을 환멸 했으면서 끝내 타임머신을 다시 만들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술을 끊을 것을 강조한 뒤 떠났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차고는 폐허처럼 황량했다. 단지 원래 없었던 물건이 도로 사라진 것뿐인데 씁쓸하기만 했다. 난 분쇄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만들어낼 거라면 지금 부숴봐야 아무 소용없다. 괜히 헛고생만 더하게 될 뿐이지. 기분이 울적하여 술병을 땄다. 술만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해줄 것 같았다. 술병을 들어 올리려다 불현듯 미래의 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술을 끊어라. 그의 말라빠진 몰골이 떠올랐다. 죽은 자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난 그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술병을 가만히 내려놨다. 젠장, 이젠 술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다.

찬 바닥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끝내주는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내가 술을 끊겠지. 그 누군가가 꼭 내가 될 필요는 없었다. 난 안심하고 술을 마셨다. 속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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