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사랑 할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독하리만큼 독했던 몇 번의 좌절들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젠 그 상처는 사랑이란 존재의 두려움이 되어 다른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랑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공포가 되었다. 이젠 사랑이 시작된다는 기대 여린 설렘보다 시작하기 전에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 버렸다. 그렇게 내게 사랑은 끝났다.
이런 내게 너는 구원이 아닌 절망이었다.
널 간절히 원하면서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한다. 몇 번의 좌절처럼 너에게 사랑을 말해버리면 내 곁을 떠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드리운다. 그렇게 남겨진다면 내 마음 속 너의 빈자리에는 또 다른 두려움이 남을 것만 같다. 그렇게 되면 난 영원히 사랑을 못 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난 사랑하기 보다 상처 받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허나 후회한다. 애매모호한 너와 애매모호한 나의 도화선 같은 만남은 폭발하기 직전인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차라리 널 향한 마음이 싹트기 전에 물러 났다면 어땠을까? 그 시기를 놓치고 길들여진 지금 보다 앞선 상황에서 거절 당했더라면 차라리 좋았으리라.
그렇게 끝났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내게 무슨 사랑이냐며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겠지. 허나 그것도 나쁘지 않다. 되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 보았다며 바닥에 침이라도 탁 뱉어버리는 일도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까? 나는 정말 그 결과를 후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난 이대로가 좋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우린 친구는 될 수 있겠지만 연인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이렇게 나는 너의 곁에서 너는 나의 곁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 좋다. 너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좋다. 나는 네가 너무 좋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는 어떠한 충고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리지 못한 마음의 결정을 부탁해보았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서로 길들여지다 보면 언젠가 우리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할 수도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런 그도 이젠 이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장이 그렇게 좋아? 이 붕어새끼야.’
그래 붕어새끼.
“자꾸 네 생각이 나서 좋게 보지는 못했어.”
영화관을 빠져 나와 나란히 거닐던 그 아이와 나. 허나 친구가 말한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그 아이의 말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생각?”
그제야 우리가 같이 보았던 영화재목이 떠올랐다.
‘태극기 휘날리며…….’
군대 가는 사람을 붙잡고 전쟁 영화를 보자고 하던 그 아이의 괴악스러움에 놀랐고 이젠 그 안에서 날 대입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동건은 아닐 테고. 총 맞는 병사 A?”
침묵은 긍정이라.
“아, 진짜! 적어도 원빈 정도는 해줘야지.”
기분 나쁘다는 것을 격한 어투에 담아 말했다. 허나 그 아이는 정색하며 대꾸했다.
“전혀 다르잖아.”
정색하는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
그 아이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말했다.
“중요하거든요?”
“적어도 원빈은 마지막까지 살아 남잖아. 그 점이 중요한 거야.”
“원빈은 다리 다치잖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총 맞는 일반 병사 A는 괜찮고 살아 돌아오지만 다리 다친 원빈은 아니다? 생김새를 떠나서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 살고 죽고의 차이라고. 이래도 중요해?”
“중요해.”
“징집되어 병사 A가 되는 어느 청년 A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남자가 군대 가는 것은 당연하지.”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들었다. 생리니 임신이니 들먹이며 국민의 의무를 남자만의 의무로 생각하는 다른 여자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었다. 내가 아는 그 아이는 적어도 개념 하나는 알아주는 아이이기에 그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던 내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너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생각에 빠지면 미간을 찌푸리는 내 버릇은 때때로 내 의중을 간파 당하는 약점으로 쓰이곤 했다.
“나는 적어도 군인 아저씨들 덕분에 밥 잘 먹고 잘자고 잘산다고 생각해.”
“어떻게 아저씨냐. 다 우리 또래인데.”
“말 돌리지마. 내 말 맞지? 그런 쪽으로 생각한 거지?”
“아냐.”
“진짜?”
“아니라니까!”
그 아이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가끔 내가 아는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적응 못했는데 이건 좀 귀엽다.”
“무슨 소리야.”
그 아이는 내가 아직도 삐친 줄 알았나 보다.
“대신! 영화에 이어서 저녁도 사주도록 하지.”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날 인천까지 오게 하는 대가로 영화와 저녁을 사주기로 약속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 짜식. 이럴 때는 머리가 좋아.”
“이건 머리 좋은 것이 아냐.”
“치.”
이 아이는 평상시에 나를 멍청하게 보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메뉴는 내가 고르는 거야?”
내 물음에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동네니까 내 마음대로.”
-
그 아이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도 케이크 좋아해! 서울역 근처에 치즈 케이크 잘하는 곳이 있어.’
‘우리 동네 닭강정이 정말 맛있거든? 맛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 말들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웃음이 이상했는지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나를 보는 그 아이가 물었다.
“왜 싫어?”
두툼하게 만들어진 닭강정은 붉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싫기는.”
닭강정을 한입 베어 물고 입에서 오물거렸다. 달고 매운 느낌이 혀를 감돌기 시작하더니 입안 전체를 채워갔다. 이 시장의 명물이라던 그 아이의 말들에서 상상하던 그 이상의 맛이었다.
“맛있다.
“응. 맛있어.”
맛 집으로 소개된 이 곳을 TV 너머로 보았을 때는 그 곳의 닭들과 주인의 후덕한 웃음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었다. 눈은 분명 브라운관을 보고 있건만 내 머릿속에 채워지는 것은 그 아이의 모습이었다. 행여 그 곳에 그 아이가 있을까 두 눈을 크게 뜨던 내가 떠올랐다.
“TV에 나오면 죄다 맛이 안 맞던데 이건 내 입맛이네.”
“그럴 줄 알았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아니, 내가 아닌 그 아이가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최근에 재미있던 이야기들이 많았는지 그 아이는 쉬지 않고 말했다.
“그게 상상이 돼?”
“전혀. 그 상황에서 누가 그래.”
“그렇지? 나도 그래서 웃겼다니까.”
누군가의 전설적인 영웅담인 것처럼 웃고 놀래고 안심하며 다시 웃는 그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도 마냥 즐거웠다. 사소한 일상들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다. 무기력한 내 삶은 재미도 없는데. 그 사실에 닿고 보니 우리가 만나고 이렇게 인연이 이어진 것도 기적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여주었으면 좋겠어.”
저녁을 먹고 그 곳을 나와 지하철 역 앞에선 그 아이가 말했다. 겨울날의 해는 너무나 빠르게 졌고 이는 우리의 시간도 줄어버렸다. 내심 아쉬운 나와는 달리 그 아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응.”
이번 만남의 거래로 다음 영화와 식사는 내가 사기로 했다. 비록 거래라는 표현을 쓴 저 아이지만 나에게는 거래와 만남이라는 단어들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약속이었다.
“잘 가.”
“너도.”
나는 돌아서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행여 그 자리 그대로 그 아이가 서있을 것만 같았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없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 만약 그대로 서있다면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느낌이 행복일까?’
집으로 가는 내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다림을 끝내고 만나 다시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약속을 하는 이 순간 그 것이 행복임을 느꼈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며 너의 안부를 묻고 너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들이 덧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너라는 사람이 만든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내 삶의 연속이자 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워가고 있었다.
허나 이런 만남을 지속할수록 욕망은 꿈틀거린다. 나는 너를 원하기에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너를 갈구하면서도 마음을 표할 수 없어 욕망을 억누르며 너를 만난다. 너 또한 나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여 모를 이해의 차이와 생각들 그리고 관념이 우리들을 가르지 않을까? 어쩌면 너 또한 나를 버렸던 그들처럼 떠나갈지도 모른다. 행복할 수 있는 확률과 불행할 수 있는 반반의 확률이 가진 이면은 또 다시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
결국 난 이 인연이 소중하다고 자각했던 그 수간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진동이 울리는 바지 속의 핸드폰을 꺼내 본능적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무 감정 없는 내 목소리 너머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그래 너.”
그 말에 그 아이는 또 웃는다.
“난 집인데 어디야?”
지하철 노선도가 보이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은 어느 아주머니가 내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에 씁쓸하기만 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신도림.”
“우와 아직도 멀었네.”
난 너에게 사랑한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라그를 켰는데 재미가 없어.”
그러니까.
“어서 집에 가라고.”
그러니까 만약에 너도 나와 같다면.
“어이.”
너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듣고 있어?”
나를 사랑한다 말해 줘.

02.
“대부분 그 전 이나 그 후에 송년회를 한다고 생각해.”
달력을 보며 붉은 숫자 하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수화기 너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게 왜 이상한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송년회를 하지 않는다고.”
“어차피 할 짓 없잖아?”
“다른 애들은 할 짓 없어? 형석이는 지 여친이랑 모텔 안 간데?”
“형석이 커플이랑 재우 커플은 나오기로 했어.”
“여친이 퍽도 좋아하겠다.”
“거참 말 많네. 그래서 안 나올 거야? 전역 후에 맞는 첫 크리스마스 날을 케빈이랑 일촌 맺을래?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 속에서 사람답게 술을 마실래?”
“케빈이랑은 일촌 이상이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불알친구라고. 아니지 케빈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아는 동네 형이라 해야 하나?”
“자꾸 개소리 할래? 너 솔직히 까놓고 모임에 몇 번이나 나왔어? 전역하고 2번이 다지?”
추운 겨울, 그 것도 연인들이 활보할 신촌거리를 노닐 자신이 없다.
“몇 시.”
그렇다고 친구를 잃을 수도 없다.
“7시. 멋지게 차려 입고 나와.”
갑자기 화가 났다.
“무슨 형석이랑 재우 여친들에게 잘 보이려고?”
“먼 개소리야. 커플은 커플이고. 우리도 적당한 사업을 해야 추운 연말이 좀 따뜻해지지.”
“우린 안 될 거야.”
“닥쳐!”
“알았다 알았어 임마.”
“늘 만나던 그 장소로 나와. 또 늦지 말고.”
“너나 늦지마. 나는 언제나 정시를 맞추는데 네 놈은…….”
끊었다. 한숨을 내뱉은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짜증나.”
여전히 달력을 응시하며 붉은 숫자를 바라본다. 입대로부터 2년이 조금 넘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일수로 따지면 950일 정도 되었다. 그 많은 나날 동안 내 삶은 달라진 것 하나 없다. 무의미하게 소모하던 하루들의 연속들일 뿐이다.
“취직을 해야 해.”
수척해진 몰골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2년 전 난 메신저의 보라색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너도 날 좋아한다면 이상했을 거야.’
그 말이 왜 나왔는지 기억은 안 난다. 허나 그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아이의 친구를 좋아했다 거절당하자 그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한 어느 오빠. 나에게는 나의 영역을 침범한 개처럼 느껴진 그 대상을 혐오하고 무시했었다.
‘왜.’
내 푸른 글씨가 그 이유를 물어 본다.
‘친구를 잃기 싫어.’
사형선고였다. 그리고 그 아이와 연락을 끊고 한 달 뒤 군대를 갔다.
그 아이에게 가끔 편지가 왔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답장을 해주었다. 허나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너라는 인간의 노예로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신 답장을 하지 않았다.
허나 나는 그 아이의 편지를 버리지 못했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다. 내 생일을 축하한다며 순수 만든 그림편지들과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고 군대에서의 편지들.
‘약속 꼭 지켜.’
그 아이는 크리스마스 카드 역시 직접 만들었다. 그 정성들이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 아직 그 사람을 만나고 있을까?

03.
난 겨울이 좋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더위보다 추위가 참기 편할 뿐이며 봄과 가을의 애매함은 내게 맞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눈이라는 특정 부류에 대한 한 없는 짝사랑이기도 하다. 간절히 원하지만 그 소망을 외면하는 하늘의 여인. 허나 기대하지 않던 축복의 낙하에 좋아라 하는 나. 이래서 겨울이 싫지 않다. 헌데 추위는 여전히 달갑지가 않다.
“아.”
그제야 자각했다. 머릿속으로는 겨울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내 두 눈은 사람들을 흩어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것일까?
군대를 전역하고 우리가 함께 거닐던 그 길 위에서 너를 찾았다. 네가 거닐었던 그 길을 거닐 때에도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를 찾았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거니는 그 길 위에서도 너를 찾았고 우리 서로 거닐지 않았던 이 길 위에서도 너를 찾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를 찾는 일들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길 위에서만 너를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하철 안에 네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저 건물 안에 네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행여 저 길로 이어지는 골목을 들어가 돌면 네가 있을 거라 헤맨 적도 있다. 그렇게 이 길의 하늘 아래 나처럼 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불과 반년을 그랬을 뿐인데…….
이젠 다른 생각을 해도 내 몸은 버릇이 들어 무의식에도 너를 찾는 것 같다.
인연은 반드시 닿는다는데. 너와 나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렇게 다짐 한 것이 너를 찾은 반년을 넘는데. 난 왜이리 멍청한 지 모르겠다. 이런 미련들이 부질 없다는 것을 머리는 잘 알고 있는데 가슴이 그러질 못하다는 사실이 화가 나고 짜증난다.
내 자신이 한심해서 약이 오른다.
“짜증나.”
담배에 불을 붙인 나는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뿌렸다. 이게 다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짜증난다고.”
길을 걸어가는 내내 연인들은 나를 스쳐 지나간다. 이 좁은 길 위에서 나란히 그리고 느리게 걸어가는 그들의 행보는 절대 민패였다.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태양절이 어느 신의 탄생일로 둔갑하여 벌어지는 이런 참상은 이 나라에선 극성이다.
화이트데이와 발렌타인데이라는 상술의 노예들이 이젠 크리스마스 마저도 지배하려 한다. 석가탄실일에는 그다지 극성이 아니라 생각되는데 왜 하필 크리스마스에는 이럴까? 다 너 연인들 때문에 솔로인 내가 홀로 길을 거닐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거다!
“퉷!”
더럽다. 더러워.
“안 늦었네.”
담배를 끄고 친구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우네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형석이네는 좋아하라 하며 서로를 끌어 안고 있다. 저 커플은 그렇게 부럽지 않다. 끼리끼리 만났으니 결혼 했으면 좋겠다.
“너야 말로 왠 일로 일찍 왔다.”
“내가 좀 칼이잖아.”
저 자식은 평소에나 잘했으면 좋겠다.
“봤냐?”
“뭐가.”
친구는 내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크리스마스 선물.”
친구가 내 어깨를 잡은 왼손에 힘을 주어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반응하여 시선을 돌린 내 앞에는 화장품 모델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권상우가 웃고 있었다.
“로션이라도 사주게?”
“그 반대 멍청아.”
난 얼어붙었다.
그 아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참에 솔로부대를 탈출하라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그러나 체감상으로는 빠르게 걸어오는 그 아이는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몰라 본 거지? 그토록 길 위에서 그 아이를 찾았는데 어째서 몰라본 것이지?
“안녕.”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가벼운 미소에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안녕.”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안녕하지 못하다.

04.
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행여 술을 먹고 실수라도 한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자꾸 그 아이가 신경 쓰여 바라보면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상상 속에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연습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허나 그 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난잡한 혼란만을 야기시킨다. 정작 이렇게 만나 한 마디도 못할 것을.
‘왜 연락을 끊었어.’
군대 가는 마당에 생각이 복잡해져서 그냥 모든 것을 놓았어.
‘왜 그 때 이후 편지를 안 했어.’
그 때 이후 편지 받은 적 없어.
‘제대하고 왜 연락 안 했어?’
너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지 않았어.
헌데 그 아이는 무엇도 물어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질문과 그 상상에 대한 대답들은 현실에선 필요 없었다. 차라리 내가 예상하지 않은 다른 이야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 아이는 그 자리 내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운지 집이 먼 그 아이를 지하철까지 바래다 주라고 했다. 그 아이의 미소가 씁쓸해 보였고 나는 애써 담담 하려고 했다. 허나 그 아이의 미소는 사라졌고 담담 하려던 나는 전혀 담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우린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면 너에게 말 하겠다. 좋아했다고.
허나 흐린 하늘은 작년처럼 하얀 축복은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안까지 대려다 줄게.”
신촌역 앞에서 멈춘 나는 그 말을 내뱉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이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로 지하철 안에도 연인들이 반을 넘었다.
“아직도 음악 해?”
갑작스러운 그 아이의 질문에 적잖이 당황되었다.
“아, 응.”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렇구나.”
그 아이는 빙긋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귀는 사람은 있고?”
“아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람과 아직도 사귀는지.
“너는?”
“없어. 지금은…….”
그 아이의 미소가 꼬리를 내렸다.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사귀던 사람은?”
“헤어졌어.”
“왜?”
그 아이가 빤히 쳐다보았다.
2년 만에 만나 한다는 소리가 신상을 캐는 질문들이라는 사실에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 아이를 놓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친구들은 더 이상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 사람을 만나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지.
“군대를 안 갔어.”
“그게 뭐야.”
나도 모르게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라도 있는지 그 아이가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귓가에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마냥 기다린다는 것이 싫어졌어. 그래서 해어졌어.”
그 아이의 대답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 아이와 헤어지기 싫다. 2년 동안 너라는 사람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허나 너와 나 사이의 170km의 거리가 생겼을 뿐이지 널 향한 내 마음은 단 1mm도 멀어지지 않았다. 가끔이라도 떠오르는 너를 생각하며 허공에 안부를 물어보던 나는 너를 놓지 않았다.
“지금은 어때?”
시계를 바라본 그 아이가 말했다.
“아슬아슬하겠는데.”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아.”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크리스마스 날에 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단지 붉은 숫자로서 노는 날일 뿐인 내게 크리스마스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우는 아이에게 선물은 안 준다던데. 친구라는 산타클로스는 내 눈물에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지금은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가자.”
“응.”
-
우리는 지하철을 빠져 나갔다. 수 많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언제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오늘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만 같다.
“무슨 말?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젠 용기가 생겼다.
“누구한테는 하기 쉬운 말. 다른 누구한테는 하기 힘든 말.”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그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했어.”
“나도.”
“그리고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