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환상 독회
서언
이번의 환상독회에서는 테드 창의 세 작품을 그 감상과 비평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텍스트의 물리적 분량으로만 본다면 지금까지의 환상독회의 다른 대상 텍스트에 비해 적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본격적인 감상과 비평을 준비하면서 물리적 분량과는 별개의 난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가장 큰 난점은 테드 창이라는 이름의 무거움이다. 단적으로 말해 테드 창은 현재의 가장 유명한 SF작가 중 한명이다. 그만큼 작가와 텍스트에 대한 권위는 높고 기존의 비평으로 잡힌 틀은 견고하다.(비록 그 비평이나 권위가 얼마나 대중적인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결기에 가까운 무모함으로 나름의 감상과 비평을 해보았다.
본인이 사용한 텍스트는 테드 창 著, 김상훈 易, 행복한책읽기 刊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초판 4쇄(06.08.12)이다.
바빌론의 탑(p.13 ~ p.51)
바빌론의 탑은 기독신화 속의 유명한 사건인 바벨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화 속에서는 이전의 사건인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탑을 높이 쌓아 다시 홍수로 인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에 신이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언어와 말이 하나여서 쉽게 힘을 모아 이 같은 일을 벌인다고 하여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한다. 서로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힘을 모으지 못하고 온 땅에 흩어졌다고 합니다.(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절~9절 요약)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은 비록 신화 속의 사건에서 따왔지만 구약성경의 내용과는 다소의 차이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세밀한 고증 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성경보다 사실적인 느낌으로 서술되어있다.
이야기는 엘람의 광부인 주인공 힐라룸이 바빌론의 탑으로 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빌론에는 하늘을 넘어 신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수세기 동안 쌓아온 탑이 있었던 것이다. 힐라룸은 동료인 광부들과 함께 수레꾼들의 안내에 따라 수개월 동안 탑을 오르고 탑 꼭대기에서 하늘의 천장을 뚫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집트에서 온 채굴 기술자들과의 협력으로 마침내 천장을 뚫지만 염려하던 침수가 벌어지고 힐라룸은 물길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힐라룸은 천장 위의 물을 지나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곳은 기대하던 신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이었다. 그러나 힐라룸은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세계가 원통형으로 생겼다는 경이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서 힐라룸이 도달하는 경이를 생각해보자. 이야기 속에서 힐라룸은 지상에서 하늘(대기권)로 해와 달과 별의 우주로 또 그 너머의 천장으로 탑을 오르며 내적인 긴장을 겪고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사실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을 바탕으로 마침내 천장을 넘어서 경이로운 깨달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이로운 깨달음은 단적으로 말해 작품집의 말미에 있는 테드 창의 인터뷰에도 나오는 것처럼 ‘과학적 발견이 야기하는 경이감(sense of wonder)과 종교적 경외심(sense of reverance)’의 일치인 것이다. 즉 신의 뜻을 더 잘 알기 위해 과학을 한다는 말과도 비슷하게 과학적 탐구가 종교적 영성만큼이나 거룩하고 그것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바빌론의 탑이 구약성경의 바벨탑처럼 인간이 신의 벌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위업을 보기를 열망하고 또 신이 내려와 인간을 볼 것을 기원하며 쌓아올렸다는 내용과도 일치한다.(p.20) 즉 인간과 신이 소통하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 경이와 경외가 소통하고 일치하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종교를 믿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시대가 변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근에는 종교가 과학의 발목을 잡는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육체와 영혼, 정신과 물질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테드 창은 SF작가로서 또 유물론적 사고의 소유자로서 이와 같은 양분된 시선을 비록 한쪽에서나마 화합시키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재밌는 점이 있다. 힐라룸이 천장을 통해 지상으로 온다는 텍스트의 말미는 이른바 워프(WARP)인데 텐스트의 서두가 수직인 탑을 수평으로 눕히고 그 길이를 날짜로 생각하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즉 서두에서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고 있고 말미에서는 시공도약인 워프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은 탑에 오른 광부들 중 결혼하여 자식까지 갖는 광부들도 생긴다는 것이다.(p.43) 광부들은 대체 누구와 결혼한 것일까? 지상 혹은 탑의 중간부에서 올라온 여인들일까? 아니면 광부들 중에 여자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옥은 신의 부재(p.295 ~ p. 336)
신과 신에 대한 종교는 인과나 논리를 초월한다고 한다. 즉 신앙이란 어떤 목적을 위한 방법이 아니며 어떤 과정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 역시 이와 같은 관점을 기반으로 세 인물에게 벌어진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다.
천사 나다나엘의 강림 이전, 강림 이후, 천사 바라키엘의 강림을 기점으로 바라본 인물들의 변화는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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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장애 (육체적) |
비가시적 장애 (심리적, 사회적) |
신앙 |
확신 |
결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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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휘스크 |
○→○→○ |
△→○→○ |
×→×→○ |
×→×→○ |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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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 레일리 |
○→×→△ |
×→○→△ |
○→○→○ |
○→×→○ |
쇠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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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미드 |
×→×→× |
△→△→△ |
△→△→○ |
×→×→○ |
변화 |
즉 닐 휘스크의 장애(관위 대퇴골 결함)는 천사의 강림과 무관하게 지속되었으며 오히려 나다나엘의 강림이후 아내인 사라를 잃음으로 인해 정신적, 사회적인 장애가 깊어졌다. 그러나 비록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바라키엘의 강림을 통해 신앙과 확신을 얻는다.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지닌 채 신이 부재하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제니스 레일리는 나다나엘 강림의 훨씬 이전에 바르디엘의 강림에 의해 어머니의 태내에서 두 다리를 잃고 태어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장애를 통해 주변에 신앙과 확신을 전파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의 강림에 의해 자신의 장애가 치유되자 오히려 확신을 잃게 된다. 때문에 주기적으로 천사가 강림하는 성지를 찾게 되고 바라키엘의 강림 때 실명과 화상을 통해 확신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사회적 위치와 주변에의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쇠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선 미드는 육체적인 변화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확신이 없는 미약한 신앙을 지니고 자신의 사명에 대해 방황하던 그는 나다나엘과 바라키엘의 강림, 닐과 제니스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확신을 얻게 되고 전도의 길에 나선다. 그러나 그 결과로 가정을 잃게 된다.
종교인이 아닌 본인이 종교에 깊이 얽힌 텍스트의 내부를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작가가 무엇을 역설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풍자적인 느낌이 들뿐이다. 작가자신이 창작노트(p.399~p.400)에서 욥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도 그렇지 않은가.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종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천사강림이라는 소재이다. 어딘가 재패니메이션에서 많이 사용되는 소재와 닮아있지 않은가.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p.337 ~ p.401)
칼리라 불리는 칼리그노시아 조치는 한 인간이 타인의 얼굴에서 느끼는 미적 자극을 억제하는 종류의 것이다. 즉 타인의 외모에서 특별한 매력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어려서 부모님에 의해 이러한 칼리 조치를 받았던 타메라 라이언스는 펨블턴 대학에 입학하고, 성년이 되면서 칼리를 제거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대학에서는 칼리 의무화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게 된다. 칼리를 제거한 타메라와 칼리 찬반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 뉴스에 대한 기록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사실 이처럼 일반적인 소설의 양식을 벗어난 실험적인 글들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이 텍스트에서도 다양한 사건들이 비록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상에 있더라도, 인과의 모호성과 다양한 견해 등의 이유로 독자에게는 병렬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칼리라는 소제와 타메라 라이언스라는 한 인물이 이런 병렬적인 배치 속에서 나름의 중심축으로 작용하여 어느 정도 독자에게 통일감을 주고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하고 안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는데, 마치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서술양식에 불구하고 과연 이 글이 객관적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대개의 창작 작품은 의도하건 하지않건 주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특히 반(反)칼리 집단을 자본주의와 외모지상주의에 과도하게 결부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외모와 미의식, 예술 등에 관한 문제는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결언
부족하나마 상기와 같이 세 작품에 대한 감평을 마칠까 한다. 테드 창의 작품 전반에 대해서는, 대상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접근과 단편치고는 큰 스케일의 서사가 인상 깊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유물론적 사고관이나 과학적 접근방식, 그 밖의 글에 단긴 시선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아 아쉽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