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장르 리뷰

웬만한 호러팬이라면 모두 클라이브 바커란 이름이 귀에 익을 것이다. 무수한 피투성이 이야기 중에서도 일류의 칼질이 있고 삼류의 칼질이 있는 법이다. 클라이브 바커는 거장이다. 검객도 보통 검객이 아니라 무림공적의 자리를 꿰찰 만한 절대고수다. 흉악하고 잔인하기가 비길 데 없는 살인귀다. 베기 한방으로 충분히 쓰러뜨릴 만하건만 클라이브 바커 아저씨를 말하자면 칼이 아니라 톱으로 베는 놈이다. 톱날에 살점이 뚝뚝 끊어져 묻어난다. 바커 아저씨는 잠시 흐흐 웃다가 시체까지 쓱싹쓱싹 토막낸다. 남은 살점을 짓이기고 뭉갠다. 어처구니가 없는 핏빛 상상력에 숨이 막힌다. 이렇듯 클라이브 바커는 비범하다. 바커가 손대는 분야는 비단 소설뿐이 아니라 영화와 게임까지 주물럭대고 있다. 그러나 메가톤급 초신성의 옹골찬 기개를 강호에 떨친 작품은 단연 [피의 책]이다. 삼십줄에 접어든 청년이 호기있게 던진 여섯 권의 책은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검을 놓고 싸우던 스티븐 킹과 램지 캠벨의 다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오호라! 이거 엄청난 놈이 나타났구나!" 그들의 경악과 걱정은 과연 이유가 있었다. 클라이브 바커는 피의 책 시리즈로 단숨에 공포소설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보통 세계 최고의 (대중)공포소설가로 꼽히는 스티븐 킹이 소설의 세계에서 지존의 자리를 얻었다면, 클라이브 바커는 타고난 재능을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 손을 대자 캔디맨과 헬레이져가 나왔고 게임에 손을 대자 제리코가 나왔다. 그렇다고 클라이브 바커가 글쟁이로서 소홀했던 것도 아니다. [피의 책]을 펼치면 어릴적 공포특급을 읽지 않고 전설의 고향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거장의 진가를 목도할 수 있다. 이 미치광이 거장이 만들어낸 악몽의 세계는 쩝쩝대지 않을 수 없이 매혹적이다. 바커의 책에는 쭉쭉빵빵 미인과 거대 괴물과 좀비와 살인귀가 나온다. 섹스와 살인과 폭력이 마치 당연한 법칙처럼 천연덕스레 존재한다. 신체 훼손과 희생제의와 괴물 숭배가 외부의 통념과는 상관없이 내부의 광기로 인하여 충분한 논리와 이치가 된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의 어두컴컴한 지하 경이로운 신세계를 보라. <섹스, 죽음 그리고 별빛>에서는 피칠갑 카니발이 별안간 블랙 코메디로 분한다. 그리고 <언덕에, 두 도시>에서 삼만 팔천 칠백 육십오 명을 한순간에 학살하는 배짱, 친근한 재료로 낯선 괴물을 만드는 기막힌 상상력이 보인다. 이것은 아예 상상의 수준을 훌쩍 초월하는 지옥도다. 단지 글자로 이런 지옥도를 만들다니 어이가 없다. 들판에 널려 으깨진 시체 바다가 너무 끔찍해 고개를 돌릴라치면 바커 아저씨가 머리터럭을 잡아채며 똑똑히 보라고 윽박지른다.
마치 모든 신체 부위를 종합선물세트로 하고 거기에 피와 정액을 듬뿍 쳐서 손으로 주물럭 버무린 비빔밥이다. 소름이 돋도록 혐오스러우나 이상하다. 곤죽이 된 시체와 코를 맹맹하게 하는 피냄새에 고개를 돌리다가도 어느새 코를 킁킁대고 입을 쩝쩝대다가 끝내 손이 간질간질한 자신을 보고 대경실색, 이러면 안 된다. 이러면 안 돼. 싶다가도 이거 손가락을 잘라 버리던가 해야지 손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움직여 제멋대로 숟가락을 잡는다. 혹여 엄마가 본다면 그 자리에서 졸도할 글자들을 맛있게 읽는 나는 어느새 살인귀가 되었단 말인가. 에이 어쩐지 그런 거 같더라. 나는 낄낄 웃다가 빨간 침 범벅인 숟가락을 내려놓고 오랜 세월 몰래 가슴에 품고 있었던 칼을 꺼낸다. 새것처럼 멋있게 번쩍번쩍하다. 여기에 피가 방울져 뚝뚝 떨어진다면 더욱 근사하겠다. 문득 밥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올려다보니 클라이브 바커 아저씨가 순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하고서는 손을 내밀었다. "오늘 우리는 짝패가 되는 거야." 벌써 한 건 하셨는지 다른 손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망치를 들고 계신다. 살해의 글자들이 머리를 맴돌아다닌다. 나는 마주보고 웃는다. "오케이. 갑시다." 손에 든 [피의 책]은 나도 함께 신나게 죽이는 책이다. 오늘밤 희대의 살인귀가 된다.
* 콘라드 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 원문: http://riverrun88.egloos.com/2026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