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장르 리뷰

사실 다크나이트를 보고도 감상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칭찬 가득한 감상을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한 처음에 썼다면 모르지만, 난 근래 우당탕퉁탕 이리저리 정신없다가 어젯밤에서야 간신히 보았기에, 새삼 내가 한 마디 더 보탤 필요는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냥 넘기기엔 상당히 재미있었다. 아마 올해에 본 영화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고, 편집이 속도감이 있으면서도 안정감이 있다는 것이었다.
난 소설이든, 영화든, 만화든 이야기를 가장 먼저 보는 편이다. 이야기가 앞 뒤가 안 맞으면 아무리 멋진 특수효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더라도 좀 짜증이 난다. (그래서 난 트랜스포머를 무척 재미없게 보았다.) 물론 B급 영화처럼 관람자가 장르의 규칙을 염두에 둔 채 관대하게 즐겨야 하는 유형에 있어서는 조금 다르겠지만, 최소한 블록버스터는 그렇게 관객의 너그러움에만 기대어 영화를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돈을 들인다.
이러한 규칙을 오히려 거꾸로 생각하는 블록버스터들이 있다. 화려한 볼거리가 있으니, 이야기는 대충 만들자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런 영화들은 흥행에 실패하거나, 간혹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돈 못지않게 욕까지 벌어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다크나이트는 그러한 점에서 영리하게 굴었다. 이야기의 밀도가 매우 촘촘하였으며, 볼거리를 위한 이야기 전개가 아닌 이야기를 받침하기 위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다양한 볼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얼핏 보기에도 시나리오에 많은 공을 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성공하는 영화의 첫 번째 조건이란, 감독이나 배우, 제작비가 아니라, 잘 만든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공공의 적 후속편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1편 만한 시나리오를 써내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크나이트를 보며 전편인 ‘배트맨 비긴즈’와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에 조금 놀랐다. 감독도 그대로고 주요배우들도 그대로 인데,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케이트 홈즈는 바뀌었지만, 그다지 중요한 변인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마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적인 느낌의 배트맨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전편이 전형적인 수퍼히어로물이라면 다크나이트는 오히려 스릴러물에 가까웠다. 때로는 스파이더맨보다 미션임파서블(1탄 말이다.)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영웅물 특유의 간지 추출은 군데군데 남아있지만, 조커의 음모를 주축으로 나름 각 단계의 아귀를 맞추려고 했던 것이 주가 된 만큼 이 영화는 영웅물로는 매우 색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 다음 상황을 추측하게 만들어서, 꽤 많은 이야기와 2시간 30분 가까운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한 배트맨보다 조커가 더 두드러진다는 평이 더러 나오는 것은 오직 히스레저의 좋은 연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 전개의 특징도 있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난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야기적인 측면 말고 연출 능력에 있어서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편집은 대체로 속도감이 있으며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모두 생략하였다. 인물이 사색에 잠겨 길을 걷는다던가, 달을 보며 회한에 잠기는 질질 끄는 장면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야기와 감정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놀라운 감각을 보인다.
화면구도도 대체로 좋게 보고 싶다. 영화는 대체로 원근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러한 구도는 규모를 한층 더 웅장하게 느끼게 해준다. 큼직큼직한 화면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트럭이 곤두섰다가 넘어지는 장면은 적절한 음향효과가 바탕이 된 명장면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세부적인 구도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자동차 추격신이나, 일부 격투 장면에서 화면 정리가 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신출귀몰하는 배트맨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은데,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영화 속 범죄자들이어야지,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히 좋았다. 최소한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창피해한다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극찬을 하듯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는 훌륭했는데, 나 같은 사람마저도 ‘아, 저 사람 참 귀엽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볼이 부은 채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약간 혀짧은 소리를 내는 모습이 귀여웠다. 솔직히 나는 조커가 소름끼치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기를. 전 성 정체성이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람입니다.)
아, 칭찬 참 많이 했다. 이제 아쉬운 점을 말할 차례가 되었다.
난 이야기적인 부분이 아쉬웠다. 위에서 이야기를 잘 만들었다고 그렇게 칭찬하더니 무슨소리냐 할지 몰라도, 난 이야기가 훌륭하다고 칭찬한 일은 없다. 이야기의 밀도가 높고, 장면과 장면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고 하였을 뿐이다. 무엇보다 조커의 음모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좀 엉성했다. (난 이 영화를 영웅물이라기 보다 스릴러물에 더 가깝게 보았다.)
사람의 심리 판단이란 개연성의 문제고 타당성의 문제다. 간혹 인터넷을 보면 개연성과 사실성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개연성은 그럼직하다고 생각되는 성질이다. 어찌 보면 필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생각 회로를 만들어도, A를 넣으면 반드시 B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변인을 최대한 고려하고, 실수를 적게 하려고 해도 B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뿐이지 예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커의 계획은 모두 다른 사람의 심리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돌발상황에도 쉽게 회복할 수 있을만한 굵직하고 안정적인 계획이 아니라, 하나라도 어긋나면 전체가 틀려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계획이다. 사실 이런 계획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도 현실에서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 개연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행동이야 그렇다고 쳐도, 배트맨이 머리를 싸매고 낑낑대며 뽑아낸 추측을 미리 예상하고 그에 따라 계획을 짠다는 것은 너무 말이 안 된다. 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이야기에서 가능하나 믿어지지 않는 것보다 불가능하나 있음직한 것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이후는 내용누설이 심각합니다.)--------
내가 가장 어설프다고 생각했던 조커의 계획은 경찰서 장면과, 하비 덴트와의 면담이었다. 바주카까지 쏘아대며 기를 쓰고 죽이려고 하던 것이, 결국은 그것이 일부러 경찰서에 잡히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도 납득이 안되거니와, 경찰들이 자신을 심지어 심문이 끝난 후에도 계속 취조실에 따로 둘 것을 예상하고, 감방에 있는 부하(조커는 경찰들이 부하의 배아프다는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고 결코 병원으로 보내지 않을 것, 또 라우가 폭발하는 부하의 근처에 있지 않을 것까지 모두 예상하였다!! 이 정도면 거의 천기누설 수준이다. 어쩌면 조커는 일반인이 아니라, 배트맨 시리즈에서 거의 유일하다 싶은 초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예측하는 초인 말이다.)를 폭발시켰다.
하비덴트가 투페이스로 변하게 되는 과정만 해도 그렇다. 잠깐의 대화로 자신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광기어린 투쟁가로 바꾸어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초인적인 능력이다. 최면을 써도 그렇게는 안 될 텐데. 아... 이럴 수도 있겠다. 하비는 병원의 환자를 모두 빼내면서도 조커에게 이미 당했던 환자인 자신만 홀로 남겨둔 경찰들의 무책임함과 아둔함(정황으로 미루어 보다 그들은 심지어 하비 덴트 근처에 보호 경찰들을 배치할 생각도 하지 않은 듯 하다.)에 분노하여 투페이스가 되었는지도. 결국 다크나이트의 유일한 초인은 예지 능력과 강제적 정신 감응력까지 가지고 있던 조커였던 것인가? 다크나이트는 평범한 사람도 막대한 재력과 부단한 노력을 가하면 초인을 능가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던 것인가? 내친 김에 하나만 더 아쉬운 점을 말해봐야 겠다.
마지막 두 배의 생존게임은 확실히 죄수의 딜레마를 이용한 듯 싶다. 배신,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그 게임은 너무도 유명하거니와 조커는 12시 되면 모두 폭발이라고 단서를 정해서, 상호 협력을 통한 이득의 가능성도 닫아 두었다.
난 이 죄수의 딜레마를 좋아해서 더러 이를 이용한 놀이를 사람들과 하기도 한다. 게임 횟수가 유한한 경우 각 개인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물론 배신이다. 물론 전체적인 총합을 보았을 때는 달라지지만, 영화처럼 상호 협동으로 인한 결과가 상호 배신의 결과와 똑같은 경우에는 각 개인에게는 당연히 배신이 합리적이다.(선택의 주체인 각 개인에 한정한 이야기며, 도덕적이란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인물들은 자기 희생을 택했다. 어쩌면 자포자기일지도 모르지만, 난 꼭 그렇게까지 삐딱해지고 싶지는 않다.
글쎄, 모르겠다. 아직 우리, 아니 미국시민, 특히 소돔과 고모라를 합쳤다는 고담시민에게 그렇듯 숭고한 선함의 불꽃이 남아 있는지는. 하지만 난 대체로 그런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고, 설령 없으면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 인간에 대한 신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 방법이 너무 뻔하고 무난하며 심지어는 약간 유치했다 싶을 뿐이다. 영화 내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광기에 가깝게 날뛰다가 갑자기 착해진 시민들의 모습에 조금 아연했을 뿐이다.
예지 능력과 정신 감응력을 가진 조커가 왜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였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에 대해선 너무 혹독한 말은 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이런 영화에서 그 말고는 다른 해결을 낸다는 것도 우스워 보이기 때문이다. 대중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그것 말고 무엇을 어쩔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전체적인 영화의 맥락에도 맞지 않다. 하지만 나라면, 차라리 배트맨(또는 다른 누군가)이 고민하는 두 손에서 기폭장치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 했을 것이다. 감동은 적을지 몰라도 덜 유치하지 않을까?
말미에 너무 영화를 비꼬았나?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아니 그냥 재미있던 정도가 아니다. 영웅물에 새로운 기준을 세운 영화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들인 돈과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다만 단점이 아예 없는 영화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