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마당 -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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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나 12살을 지나온다. 나라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식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미국 식으로 치더라도 주니어 하이스쿨에 들어가기 직전일 나이이다. 어쨌든 어린이의 끄트머리에 있으면서 인생의 첫 번째 변화, 청소년기를 앞둔 나이가 12살이다.
청소년기와 유년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는 세계관이라고 말하겠다. 청소년기는 성인으로 도약하는 시기이다. 청소년기의 세계관은 성인의 것을 모방한다. 이성교제가 유년기에는 얼레리꼴레리였던 반면, 청소년기에는 적극적인 희망사항이 된다. 술담배를 배우는 시기도 대개 청소년기이고 자아를 구체적으로 확립하려 하는 것도 청소년기이다. 피상적이나마 현실적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청소년기이고 일부나마 뉴스에 관심을 갖거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것도 청소년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세계관의 이해하는 점에서 유년기와 확연히 구분된다. 유년기의 세계관은 매우 유연하다. 어린이들에게 세계란 체험하는 모든 것이다.어린의 모든 체험은 구체적으로 그의 세계에 개입한다.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만화영화의 로봇을 보며 자신이 로봇 파일럿이 되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청소년기부터는 로봇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필름의 연속으로 인한 동화의 잔상이나 혹은 창작자가 제시한 이미지 등으로 구체적인 실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어린이는 로봇 그 자체를 지칭한다. 어린이는 '어떻게 그림과 그림이 이어져 저런 섬세한 움직임이 표현됐을까'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세계에서 로봇은 실존한다. 하지만 이 말을 어린이가 실제로 그러한 로봇이 있다고 믿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자.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로봇이 TV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로봇이 어린이에게는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어린이만큼의 생생함을 어른들은 따를 수 없다. 모든 이야기매체는 가상의 체험이지만, 어른은 그것이 가상이라는 점을 딱잘라 구분해해는 반면 어린이는 오로지 체험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비어있는 세계와 미약한 이해력으로 인한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바이고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어린이에게 모든 체험은 신선하고 새롭고 신비로운 것이다. 어린이는 체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이 말을 듣고 유년시절의 뭔가 쓰잘데기 없는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불우한 시절을 보낸 사람이리라. 지나치게 일찍 현실적 문제에 맞부닥쳐 그 활기차고 신비에 둘러싸인 체험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일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12살의 그러한 체험으로 가득차 있다. 책표지에도 단편선이라고 나와 있고 작중 챕터들은 별 연관성 없이 병렬되어 있긴하지만 이 작품을 단편집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하다. 이 책은 챕터별로 뚜렷한 단편적 이야기구조로 완결되고 나뉘지 않았다. 이 책의 챕터 구분은 그저 단편'적'인 1928년 여름을 나열하기 위해 있을 뿐이다. 이 편린이 모여 12살의 한 여름이 완성되기 때문에 단편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서사적 혹은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년기가 겪는 아마 다른 시절의 누구도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스펙타클한 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심심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벅차오르는 감성과 추억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인이 달 분화구에 이 책을 딴 이름을 붙였겠는가.
아이들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태어났을 때부터(아이가, 그리고 할머니가) 할머니이다. 지금도, 오십 년 전에도 일흔 두 살인 할머니일 뿐이다. 나이 든 퇴역 군인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이다. 현시태에 고정된 그들에게 들려주는 수십 년 전 버팔로를 만난 이야기, 남북전쟁 시절의 이야기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체험을 대하는 태도이다. 체험은 그대로 세계관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어린이에게 주술적으로 각인된다. 더글러스에게 운동화는 여름을 담는 도구이다. 운동화는 한 해가 지나가면 죽는다. 새로운 여름에는 새로운 운동화를 신어야만 그는 달릴 수 있다. 어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이의 세계에 각인된 그러한 몹시나 중요한 규칙을 어른들은 그저 쓸데없다고만 생각한다. 분명 그들도 어린 시절엔 그랬으면서. 자갈이나 유리조각 따위를 소중한 보물인양 모으곤 하던 추억이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다. 그저 자라나면서 현실의 세계에 몸이 익숙해지면서 그것들이 현실의 세계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때는 얼마나 소중했는지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린이에게도 비극이다. 그들의 체험은 얼마 못 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은 마을은 반드시 변화를 겪는다. 전차는 운행을 멈추고 친구는 떠나가고 노인은 죽는다. 아이들은 세계가 깨지는 것 역시 체험한다. 또한 직접적인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외로운 남자'는 역시 아이들의 상징계에서 해석되는 존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엄연한 살인마이다. 그저 상상이긴 한데, 이 이야기의 배경이 1928년인 것은 12살이라는 유년기의 끝자락을 다룬다는 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세계관의 대 변혁, 대공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민들레 와인은 그 시절을 매개하는 유일한 작품 외적 장치이다. 와인은 다들 아다시피 제조년도를 구분하여 저장한다. 1928년산 민들레 와인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절 여름이 담겨 있다. 작중 보이는 수많은 도구들 중에서 가장 오래 남게 되는 것이 바로 와인이다. 모든 체험은 이 민들레 와인속에 저장된다. 마지막 챕터에서 여름은 끝나지만 민들레 와인은 그 모든 기억을 담고서 보존된다. 여름은 끝난다. 나는 일전에 누군가의 소설을 비평해주면서 성장소설을 정의내린 바 있다. 성장소설은 문자 그대로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주체가 있으면 대상이 되는 세계관의 변화가 등장한다. 그 대상에 대한 성장 주체의 반응을 다룬 이야기가 내가 정의하는 성장소설이다. 다음날 아침 9월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더글러스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될 지도 모르고 한동안은 여전히 12살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28년의 여름은, 그가 만들어낸 여름은 온전히 와인 속에 기억된다. 즉, 와인 속에는 또 하나의 우주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어른으로 지양되기 위한 유치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아니다. 또한 작품은 아이들만의 세계속에 파묻혀 어른의 세계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변화와 성장을 인정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 아프고 또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상상한 내용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 이야기도 뒷표지를 보고는 미사고의 숲 같은 내용을 기대했었다. 결과는 둘 다 아니었지만. 그리고 뒤표지에는 '서정적 판타지의 걸작'이라고 적혀 있는데 내 생각에 이 작품을 판타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오히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청소년기와 유년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는 세계관이라고 말하겠다. 청소년기는 성인으로 도약하는 시기이다. 청소년기의 세계관은 성인의 것을 모방한다. 이성교제가 유년기에는 얼레리꼴레리였던 반면, 청소년기에는 적극적인 희망사항이 된다. 술담배를 배우는 시기도 대개 청소년기이고 자아를 구체적으로 확립하려 하는 것도 청소년기이다. 피상적이나마 현실적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청소년기이고 일부나마 뉴스에 관심을 갖거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것도 청소년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세계관의 이해하는 점에서 유년기와 확연히 구분된다. 유년기의 세계관은 매우 유연하다. 어린이들에게 세계란 체험하는 모든 것이다.어린의 모든 체험은 구체적으로 그의 세계에 개입한다.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만화영화의 로봇을 보며 자신이 로봇 파일럿이 되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청소년기부터는 로봇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필름의 연속으로 인한 동화의 잔상이나 혹은 창작자가 제시한 이미지 등으로 구체적인 실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어린이는 로봇 그 자체를 지칭한다. 어린이는 '어떻게 그림과 그림이 이어져 저런 섬세한 움직임이 표현됐을까'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세계에서 로봇은 실존한다. 하지만 이 말을 어린이가 실제로 그러한 로봇이 있다고 믿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자.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로봇이 TV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로봇이 어린이에게는 체험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어린이만큼의 생생함을 어른들은 따를 수 없다. 모든 이야기매체는 가상의 체험이지만, 어른은 그것이 가상이라는 점을 딱잘라 구분해해는 반면 어린이는 오로지 체험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비어있는 세계와 미약한 이해력으로 인한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바이고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어린이에게 모든 체험은 신선하고 새롭고 신비로운 것이다. 어린이는 체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이 말을 듣고 유년시절의 뭔가 쓰잘데기 없는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불우한 시절을 보낸 사람이리라. 지나치게 일찍 현실적 문제에 맞부닥쳐 그 활기차고 신비에 둘러싸인 체험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일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12살의 그러한 체험으로 가득차 있다. 책표지에도 단편선이라고 나와 있고 작중 챕터들은 별 연관성 없이 병렬되어 있긴하지만 이 작품을 단편집이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하다. 이 책은 챕터별로 뚜렷한 단편적 이야기구조로 완결되고 나뉘지 않았다. 이 책의 챕터 구분은 그저 단편'적'인 1928년 여름을 나열하기 위해 있을 뿐이다. 이 편린이 모여 12살의 한 여름이 완성되기 때문에 단편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서사적 혹은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년기가 겪는 아마 다른 시절의 누구도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스펙타클한 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심심한 에피소드의 나열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벅차오르는 감성과 추억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인이 달 분화구에 이 책을 딴 이름을 붙였겠는가.
아이들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태어났을 때부터(아이가, 그리고 할머니가) 할머니이다. 지금도, 오십 년 전에도 일흔 두 살인 할머니일 뿐이다. 나이 든 퇴역 군인의 이야기는 타임머신이다. 현시태에 고정된 그들에게 들려주는 수십 년 전 버팔로를 만난 이야기, 남북전쟁 시절의 이야기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체험을 대하는 태도이다. 체험은 그대로 세계관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어린이에게 주술적으로 각인된다. 더글러스에게 운동화는 여름을 담는 도구이다. 운동화는 한 해가 지나가면 죽는다. 새로운 여름에는 새로운 운동화를 신어야만 그는 달릴 수 있다. 어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이의 세계에 각인된 그러한 몹시나 중요한 규칙을 어른들은 그저 쓸데없다고만 생각한다. 분명 그들도 어린 시절엔 그랬으면서. 자갈이나 유리조각 따위를 소중한 보물인양 모으곤 하던 추억이 분명히 누구에게나 있다. 그저 자라나면서 현실의 세계에 몸이 익숙해지면서 그것들이 현실의 세계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때는 얼마나 소중했는지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린이에게도 비극이다. 그들의 체험은 얼마 못 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은 마을은 반드시 변화를 겪는다. 전차는 운행을 멈추고 친구는 떠나가고 노인은 죽는다. 아이들은 세계가 깨지는 것 역시 체험한다. 또한 직접적인 위험 역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외로운 남자'는 역시 아이들의 상징계에서 해석되는 존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엄연한 살인마이다. 그저 상상이긴 한데, 이 이야기의 배경이 1928년인 것은 12살이라는 유년기의 끝자락을 다룬다는 점에서 바로 이어지는 세계관의 대 변혁, 대공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민들레 와인은 그 시절을 매개하는 유일한 작품 외적 장치이다. 와인은 다들 아다시피 제조년도를 구분하여 저장한다. 1928년산 민들레 와인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 시절 여름이 담겨 있다. 작중 보이는 수많은 도구들 중에서 가장 오래 남게 되는 것이 바로 와인이다. 모든 체험은 이 민들레 와인속에 저장된다. 마지막 챕터에서 여름은 끝나지만 민들레 와인은 그 모든 기억을 담고서 보존된다. 여름은 끝난다. 나는 일전에 누군가의 소설을 비평해주면서 성장소설을 정의내린 바 있다. 성장소설은 문자 그대로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주체가 있으면 대상이 되는 세계관의 변화가 등장한다. 그 대상에 대한 성장 주체의 반응을 다룬 이야기가 내가 정의하는 성장소설이다. 다음날 아침 9월이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더글러스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될 지도 모르고 한동안은 여전히 12살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28년의 여름은, 그가 만들어낸 여름은 온전히 와인 속에 기억된다. 즉, 와인 속에는 또 하나의 우주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어른으로 지양되기 위한 유치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아니다. 또한 작품은 아이들만의 세계속에 파묻혀 어른의 세계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변화와 성장을 인정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 아프고 또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삶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을 읽기 전에 제목을 보고 상상한 내용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 이야기도 뒷표지를 보고는 미사고의 숲 같은 내용을 기대했었다. 결과는 둘 다 아니었지만. 그리고 뒤표지에는 '서정적 판타지의 걸작'이라고 적혀 있는데 내 생각에 이 작품을 판타지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오히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2009.12.04 10:34:14
청소년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물론 유년기와의 본질적 차이는 경험의 축적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밖에 2차 성징인가뭔가 하는 호르몬의 영향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그로인한 인식의 차이는 존재한다는 거죠. 담배 예를 들어보죠. 어린이도 담배 물어봅니다. 하지만 이는 호기심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어른들이 피우는 담배란 게 무엇인지, 일종의 체험이라는 거죠. 그래서 어린이가 애연가가 되는 경우는 드물죠.(설마 그새 시대가 바뀌진 않았겠죠?) 반면 청소년은 담배를 피우는 행위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 모방하는 것은 어른의 문화죠. 어느 누구도 담배를 피워보기 전에는 그 효과를 알지 못해요. 하지만 미디어라든가 주변 어른들이라든가에게서 담배 피우는 멋이라든지 담배가 신경을 안정시켜준다든지 무슨 힘드니까 담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둥, 구체적인 담배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피우는 것이죠. 좀더 직접적인 이유로는 담배가 또래 집단에서의 통과의례 역할을 미약하게나마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담배 피우던 친구들에게 너 담배 왜 피우냐라고 물어봤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은, '그냥', '피우니까 피지 왜 피우냐'하는 뜬구름잡는 대답이었습니다. TV같으데서 보기에, 무슨무슨 기관에서 설문조사한 바로는 호기심 때문에 피우기 시작했다라는 응답이 상당부분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실질적으로 호기심은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청소년들이 딱히 이유를 댈 수 없거나 이유를 숨기느라 청소년기가 정당화해주는 호기심을 골랐을 거라는 거죠. 근본적인 이유는 담배피우는 문화를 모방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밖에 위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한 예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상식선에서 말하더라도 모든 시기는 그 다음 시기를 위한 준비 혹은 선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어른의 전 단계에 있는 청소년기는 어른의 예비 단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시기의 구분을 그렇게 딱잘라 말할 수 없기 않겠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각 시기를 말할 수 있는 특징적인 면을 꼽아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무슨무슨기가 칼로 자르듯 나눠지는 게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시기의 특징적인 면이 다 섞여 있고 또 이러한 특징이 때로는 지나치게 일찍 혹은 지나치게 늦게 나타나기도 해요. 하지만 그러한 특징화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간단한 속언으로 '청소년기는 반항의 시기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순종적인 청소년도 상당히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진 않잖습니까.
그밖에 위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한 예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상식선에서 말하더라도 모든 시기는 그 다음 시기를 위한 준비 혹은 선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어른의 전 단계에 있는 청소년기는 어른의 예비 단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시기의 구분을 그렇게 딱잘라 말할 수 없기 않겠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각 시기를 말할 수 있는 특징적인 면을 꼽아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무슨무슨기가 칼로 자르듯 나눠지는 게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시기의 특징적인 면이 다 섞여 있고 또 이러한 특징이 때로는 지나치게 일찍 혹은 지나치게 늦게 나타나기도 해요. 하지만 그러한 특징화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간단한 속언으로 '청소년기는 반항의 시기이며 질풍노도의 시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순종적인 청소년도 상당히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진 않잖습니까.

어린이의 경우, 본 작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어린이 성장물이나 어린이 모험물을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허클배리핀, 톰소여, 톰터보, 가깝게는 해리포터도 그렇지요.제가 어린이물을 본 게 한참 전이라 또 뭐가 있었는지는 기억 안 나네요. 아무튼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보면 공통된 테마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경한 세계와의 조우라는 것이죠. 그것이 어른이 보기에는 일상적이고 당연하고도 사소한 세계인데도 말이죠.
나의라임오렌지나무에서 밍기뉴였던가 하는 나무가 어째서 말을 하는 걸까요? 그 작품이 만일 환상소설이라면 그 나무는 실제로 말을 하는 것(혹은 심증만 있고 실제로 말을 한다는 물증은 찾을 수 없는 것)이었을 테지요. 어른들의 소설이라면 제제가 그저 헛것을 보는 것이라든가 아님 등장인물도 알지 못하는 오묘한 외적 상징물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본 작품은 제제의 시각에서 쓰인 동화입니다. 제제의 세계에서는 나무는 말을 합니다. 그건 절대 착각이나 환각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세계를 스스로 베어버림으로써 작품은 끝나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