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6
5.
제헨멘강의 하류의 수상촌에 이르자 코가 얼얼해질 정도의 지독한 악취가 느껴졌다. 수상촌의 사람들은 배꼽거리에서도 가장 빈곤한 이들로 한 뼘의 땅조차 얻을 길이 없어, 강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수상촌의 악취에는 아이지마저 인상을 지푸렸다.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하려고? 톨페지구나 황궁은 반대편으로 가야 하잖아?”
하지만, 마로는 아무 대꾸도 없이 생명력에 대한 감지를 최대한으로 돋우고 강 어귀를 걸을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지하호수에서 두벡이 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배꼽거리에서 제헨멘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수상촌이 나오지? 거기서 굇세 랜번을 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 않아도 네가 내 능력을 가져간 뒤라면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그에게 네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너를 황궁으로 데려 달라고 말해. 그럼 그가 ……’
마로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독특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수상촌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집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아이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역시 굇세 랜번이라는 자가 불사자라는 이야기였군.’
마로는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 불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집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더욱 지독한 악취가 풍겨왔다. 물 위에 뜬 집에는 쥐가 없어서, 마로로서도 주변 환경을 알 수가 없었다. 감지력으로 누군가 앞에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로는 아이지에게 물었다.
“이봐, 여기 있는 사람 보여?”
아이지는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방 가운데에 있는 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이지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그래, 뭐가 보이긴 해.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허물어진 천장의 구멍에서 달빛이 들어와 방 가운데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 달빛 속에는 두껍고 더러운 담요더미를 두른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마로가 말했다.
“당신이 굇세 랜번이요?”
순간 악취 가득한 공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마로의 몸이 공중으로 번쩍 들려 올라갔다. 길고 검은 털로 뒤덮인 우악스러운 손이 마로의 목을 틀어쥐어서는 힘껏 들어 올린 것이었다.
‘뭐야?’
하지만, 마로에겐 상황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곧 마로의 목을 쥔 억센 손이 불끈 쥐어지며 목뼈를 으스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마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마로의 몸이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지자, 아이지는 입을 우물거리더니 둘러쓰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며 무언가를 퉤하고 뱉어내었다. 아이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외투에 닿는 순간 외투는 불길에 휩싸이더니 활활 타오르며 방안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 불길 앞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물러나더니 쉰 목소리로 나직하게 외쳤다.
“마법사로구나!”
수상촌의 가옥에는 모든 방의 바닥 마다 배설을 하기 위해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정체 불명의 검은 덩어리는 그 구멍으로 몸을 내던지더니, 제헨만 강의 더러운 물을 온 몸에 흠뻑 적시고는 다시 방으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는 구석에 몸을 도사리고는 아이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지는 나직하게 웃었다.
“헤헤, 도대체 이게 뭐야?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네.”
아이지가 보는 것은 팔이 세 개 달린 기묘한 생물이었다. 온 몸에는 검은 털이 보기 흉하게 숭숭 나 있었고, 커다란 나무통 같은 몸통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짧은 대신에 세 개의 팔은 무릎까지 내려 올 정도로 길었다. 얼굴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노란색의 작은 눈에 날카로운 덧니가 무질서하게 비어져 나온 입을 가지고 있었고, 콧마루는 아예 없어서 콧구멍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넌 누구냐?”
괴물의 입에선 듣기 거북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때 마로가 탁한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났다. 괴물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마로를 바라보더니 놀란 듯 웅얼거렸다.
“너, 넌…….”
무언가를 말할 것 같던 괴물은 입을 다물더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했다. 마로는 부러졌던 목이 제대로 회복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을 휘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이 굇세 랜번이 맞는 것 같군.”
그제야 괴물은 몸을 세우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내가 바로 굇세 랜번이야. 저 마법사 여자는 네 일행인가? 맞다면 불 좀 치우라고 해.”
마로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아이지는 불에 타던 외투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굇세 랜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인간이야, 아니야?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기형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지의 말에 랜번이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둘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진 마로가 물었다.
“인간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랜번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나, 난 어느 미친 녀석이 여러 사람들의 조각으로 만든 존재야. 내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르겠어. 난 그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곳에 묶여 있었어.”
마로가 여전히 무슨 사정인지 알아 차리지 못하자 아이지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자는 무척 인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단 말이야. 팔은 세 개인데다가, 얼굴은 일찌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해. 난 무엇보다 저 노란 색의 눈이…….”
그 때 갑자기 랜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이지에게 덤벼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아이지에게서 몇 걸음 앞에서 발이 뒤엉키며 고꾸라졌다. 아이지는 빙글빙글 웃으며 바닥에 엎어진 랜번을 향해 말했다.
“아까 보니까 상당히 재빠르더라고. 그래서 미리 손을 좀 써두었지.”
랜번은 흐느끼듯 소리 질렀다.
“나도 내가 원해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이 아니야! 너 같은 미친 마법사 때문에 나는 이런 모습으로 죽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아이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마법사의 마법으로는 너를 그런 모습으로 만들 수 없어. 나도 이래저래 아는 것이 많은 편인데, 사람들의 신체를 산 채로 이어붙일 수 있는 마법사는 없어.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마법이 아니라, 신의 능력이야.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조각나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힘 말이지. 아마 침묵하는 자의 왕 중 누군가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마로 한 번 말해봐. 이 자는 불사자이지?”
마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아이지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넌 여러 사람들을 불사자로 만든 후에 각각 신체의 일부를 잘라낸 후 이어붙인 생명체일거야. 하아, 그것 참 기발한 발상이로군. 여러 불사자들의 자투리를 이어 붙여 하나의 생명을 더 만들어 내다니.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걸까? 신체적 균형을 맞추거나, 치유력을 통제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나도 언제고 꼭 한 번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탐구해보고 싶을 정도야. 이런 기막힌 기획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너를 만든 자는 불멸의 권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마법과 기타 학문에도 두루 소양이 깊은 인간일텐데. 그럴만한 인간이 누가 있을까? 이정도 인물이라면 내가 알 법도 한데.”
아이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랜번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게 누구야? 누구냐고!”
아이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뭐 알았다고 해도 이제 와서는 별로 의미도 없잖아? 지금의 네게 중요한 것은 너를 만들었던 자는 이미 죽어 사라졌고, 현재의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 아까 네가 목을 부러뜨렸던 이 남자, 마로 온지라는 사실이야.”
랜번은 마로 온지를 향하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라는 것은 나도 아까 알아챘어. 너는 내 죽음을 갖고 있겠지? 자, 어서 내 비참한 삶을 끝내줘.”
마로는 랜번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러자 그와 이어진 죽음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죽음을 앗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로는 그 죽음을 다시 랜번을 향해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아차렸다.
“알았어. 네게 죽음을 되돌려 줄께. 대신…….”
“대신? 대신 뭐!”
“대신, 한 가지 일을 좀 해줘.”
“뭐야? 그게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께. 하지만, 이건 알아둬. 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난 이 근방을 떠날 수가 없어.”
마로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아이지가 재미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군. 정신 제약까지 걸어놓았단 말이야? 치밀하고 꼼꼼한 솜씨야.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을까? 뇌를 조작한 것인가? 아니 뇌 조작은 우리 가문만 아는 것인데……. 그럼 최면인가?”
마로는 손을 들어 아이지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랜번에게 말을 건넸다.
“베르가마의 지하 통로에서 나를 안내해 줘.”
지하 통로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랜번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넌 두벡이 보내서 왔구나! 그가 먼저 약속을 지켰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래 난 두벡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어. 하지만, 두벡은 죽었어. 대신 내가 두벡에게 불멸의 힘을 물려받았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 두벡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었다고?”
갑자기 랜번은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나무 조각이 부서지며 바닥에 구멍이 났다.
“이 사기꾼! 항상 침묵하는 자들의 왕을 찾아주겠다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었다니.”
랜번은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더니, 마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나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은 아니겠지? 너마저 나를 속인다면, 속인다면…….”
랜번은 협박하는 투로 말하다가 점차 처량하게 어조를 바꾸었다.
“이봐, 난 이 음울한 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는지 몰라. 도구로 살기 위한 내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하나의 열쇠일 뿐인 나로서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괴로워. 무엇보다 이 비참한 삶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계속 견뎌야 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워.”
마로는 랜번의 말에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 대강의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 마. 난 꼭 약속을 지킬 테니까.”
마로의 말투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왠지 랜번은 그 안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교한 감언이설로 자신을 꼬이던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말투였다. 랜번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 나를 따라와!”
랜번은 배설통로를 열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처럼 물에 몸을 담구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처럼 집 아래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위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
앞이 보이지 않는 마로를 대신하여 아이지가 말했다.
“이봐! 여기 이 친구는 눈이 멀었고, 나는 너처럼 두꺼운 팔뚝을 가지지 못했다고!”
랜번은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서더니 오른쪽 어깨에 돋아난 세 번째 팔로 아이지와 마로를 동시에 끌어 앉았다. 그의 길고 강력한 팔은 거뜬히 두 명을 안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팔을 이용해 집 밑에 매달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랜번은 그다지 멀리가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있던 오두막 근방의 어느 웅덩이에 내려앉아서는 마로와 아이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이 웅덩이 안에 들어서면 안 돼.”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웅덩이였지만, 랜번은 단숨에 그 안으로 몸을 웅크리고 파고 들었다. 랜번이 불사자가 아니라면 그의 생존을 걱정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자 돌연 웅덩이 속에서 무언가 쿨럭이더니 빠른 속도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몇 초 후에는 더러운 진창을 뒤집어 쓴 랜번만이 웅덩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이봐 빨리 내려와!”
랜번은 바닥에 쌓인 진흙을 손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랜번의 강력한 팔 힘에 삽시간에 진흙이 치워지고 넓적한 돌판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드러났다. 랜번은 옆으로 내려 선 마로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베르가마가 시암 제국의 수도로 다시 세워지기 전부터 있던 통로야. 나도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
뒤늦게 바닥으로 내려온 아이지가 돌판을 보며 탄성을 지르더니 랜번의 말을 받았다.
“정말 베르가마 지하에 길이 있었네? 원래 베르가마는 시암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대륙 교단과는 교리를 달리하는 이단자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어. 나도 이단자들이 박해를 피해 땅에 굴을 파고 몰래 예배를 드리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지금에 와서야 알았네?”
랜번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통로는 베르가마의 지하 곳곳에 연결되어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나며 무너진 곳도 아주 없진 않겠지만, 워낙에 튼튼하게 만들었던 통로라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베르가마를 세운 이들이 이 지하 통로의 입구들에 문을 만들어서 열쇠가 없이는 드나들 수 없게 했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랜번은 바닥에 바싹 엎드리더니 세 개의 팔을 힘껏 펼쳤다. 손가락마저 힘껏 벌리고는 돌판의 여기저기를 빠르게 만지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돌판에 세 개의 구멍이 생겼다. 랜번은 각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서 거대한 석판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하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드러났다. 랜번은 그 통로를 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그 열쇠가 바로 나니까.”
랜번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횃불이나 등은 있나?”
아이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런 것은 없어.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얘는 눈이 멀었고, 나는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아이지는 칼로 손가락 끝을 베어 피를 내더니 왼쪽 눈 주위에 어지러운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본 랜번이 혐오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법이로군.”
“그래, 마법이야.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너야 말로 어쩌려고 그래? 너도 이런 마법 하나 걸어줄까?”
“흥, 마법은 자연의 이치를 왜곡시키는 사악한 거야. 난 그 따위는 필요 없어.”
“하하, 자연의 이치를 왜곡하며 태어난 장본인이 그렇게 섭섭한 소리를.”
“그래서 내가 죽으려는 거야. 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하하, 넌 지금 네 말이 꽤나 지혜로워 보인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아무런 검토도 없이 받아들인 후, 그걸 바탕으로 세상을 착각하는 거야. 태곳적부터 있어온 도덕률이라는 것은 없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모습 따위도 없고. 그냥 모든 것들이 지금 이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살아갈 뿐이야.”
랜번은 더 이상 아이지와 말하기 싫다는 듯 뒤돌아서더니 통로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지하통로에는 쥐가 없기에 아이지가 마로의 손을 끌고 들어가야 했다. 랜번이 벽의 어딘가를 더듬자, 통로의 입구가 다시 닫혔다. 어둠 속에서 랜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벡은 이 길을 통해서 황궁에 잠입하려고 했어. 너희들은 어디로 갈거야?”
마로가 대답했다.
“두벡의 말에 따르면 이 길 중 하나가 황궁의 내전으로 통한다고 하던데 맞아?”
“내전뿐만 아니야. 지금도 온전한지는 모르겠지만 후원이나, 심지어 황제의 식당까지도 통하는 길이 있어.”
랜번의 말을 들은 아이지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황궁의 후원이라고? 하하. 이 길이 알려지면 황제의 미인들과 바람피우려는 사람들도 생기겠는데?”
아이지의 말을 듣자 마로의 머릿속에 사리사가 떠올랐다.
‘사리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혹시 그 날 이후로 나를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아닐까?’
“황궁의 후원으로 가자.”
마로의 결정에 아이지가 의외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정말 황제의 첩들과 바람이라도 피우려고?”
“아니, 말라르디가 바로 그곳에 있어. 그는 후원의 시종장이야.”
랜번이 특유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와. 이 통로는 워낙 오래 되어서 너희들이 가려는 곳까지 길이 제대로 뚫려있는지 알 수가 없어.”
베르가마의 지하 통로는 미로와도 같았다. 랜번이 없었다면 이곳에 들어섰다고 해도, 길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간혹 무너진 곳이 있기도 했지만, 랜번은 모든 길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기에, 우회하여 통과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갑자기 아이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봐, 좀 쉬었다 가자. 너무 힘들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은 회복력이 뛰어나서 상처를 입더라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찰과상이나 절상 같은 경우 즉각적으로 치료되었고, 뼈가 부서지거나 신체가 절단된 경우에나 조금 시간이 걸렸다. 독의 경우에도 지속력이 있는 독이 아니고서야, 즉시 해독할 수 있었다. 이런 막강한 항상성은 체력에도 영향을 미쳐 피로조차 즉시 해소하였다.
하지만, 침묵하는 자들의 왕에게 죽음으로써 종속된 불사자는 그와는 달랐다. 그들의 회복력은 훨씬 약해서 상처의 치료도 더딜 뿐 아니라, 격렬한 활동을 하게 되면 체력이 소진되기도 하였다. 원래 아이지는 가냘픈 체격에 체력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므로, 랜번의 빠른 걸음을 따라 앞을 못 보는 마로까지 끌고 다니려니 금방 지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지의 말에 랜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 왔는데 쉬긴 뭘 쉬어. 바로 앞이 황궁이야.”
정말 그러했다. 몇 걸음 더 걷자 어둠 속을 보던 아이지의 눈 앞이 깜깜해 졌다. 황궁의 마법 해제 결계 때문에 눈에 걸어 놓았던 마법이 소멸된 것이었다. 아이지는 발을 구르며 나직하게 욕을 했다.
“이런, 젠장. 두고 봐. 내가 언제고 마법 해제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낼 테니까. 이봐! 괴물, 그렇게 막무가내로 내달리지 말고 좀 멈춰봐. 이젠 나도 앞을 볼 수 없다고.”
랜번이 비웃으며 뒤돌아보았다.
“흥, 아까는 마법이 만능인 것처럼 우쭐대지 않았나?”
아이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하하, 나에겐 이 결계조차 어쩔 수 없는 한 수가 남아 있다고. 네가 내 얼굴을 본 다음에도 그렇게 빈정댈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 때 마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해. 랜번, 그냥 조금만 천천히 가면 돼. 내 감지력으로 너를 따라 갈 수 있으니까.”
랜번은 아이지가 들으라는 듯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지친 아이지가 다시 쉬자는 말을 하려는데, 랜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왔어. 바로 우리 머리 위가 황궁의 후원이야.”
랜번은 입구를 열려는지, 훌쩍 뛰어오르더니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 때 마로가 나직하게 외쳤다.
“잠깐, 기다려봐. 위에 사람이 있어.”
어두운 통로 안에서 마로는 랜번을 따라잡기 위해서 생명력에 대한 감지를 최대한으로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랜번이 열려는 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랜번은 마로의 말을 무시하고는 몸을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했다. 천장과 벽을 딛고 뛰면서 세 개의 팔을 재빠르게 놀리는 모습은 날렵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랜번이 마로의 앞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모든 입구는 외부의 시선으로 부터 가려져 있어. 주변에 사람이 있더라도 입구를 볼 수는 없을 거야. 입구가 있는 곳에서 나갈 때만 조심하면 돼. 그건 네가 할 일이야. 난 이 통로에서 나갈 수 없어. 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이제 내 죽음을 돌려줘.”
마로가 말했다.
“아니, 우린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해. 우리가 황궁의 정문을 걸어서 나올 수는 없을 거 아냐? 여기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줘.”
갑자기 랜번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뭐야? 약속했잖아! 결국 너도 똑같은 녀석이구나!.”
“이봐, 진정해! 난 널 속일 마음은 없어. 아까 난 분명히 너에게 지하통로의 안내를 부탁했어. 황궁까지만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이야. 난 그저 내 볼일이 끝날 때 까지 이 통로가 필요하고. 황궁은 내가 가야할 곳 중에 한 곳일 뿐이야. 정치가나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이 통로와 너는 긴요하겠지만,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 없어. 내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너에게 죽음을 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마로의 말을 들은 랜번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계속되는 랜번의 의심에 마로 역시 짜증이 나고 말았다.
“이봐! 난 두벡에게 너를 조종할 수 있는 단어를 들었던 말이야!”
마로의 말을 들은 랜번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이지가 통쾌하다는 듯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 말이 있었어? 그거 재미있겠는데? 마로 한 번 그 말을 말해 봐. 뭐, 네가 귀찮다면 나로선 기꺼운 마음으로 대신해 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마로는 아이지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랜번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난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고, 이렇게 너에게 부탁을 하고 있잖아. 나도 누군가에게 덜미를 잡혀 조종당하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 잘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믿고 좀 도와줘. 약속은 꼭 지킬 테니.”
마로의 말을 듣고 묵묵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랜번은 갑자기 벽으로 뛰어오르더니 천정을 힘껏 밀어 올렸다. 그러자 이미 잠금이 풀려있던 천정이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륵 위로 젖혀졌다. 랜번이 벽에 매달린 채로 말했다.
“빨리 올라가라.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돌로 입구를 세 번 두드리고 잠시 후에 다시 두 번을 두드려. 그럼 내가 다시 문을 열어 주겠다.”
마로와 아이지는 벽에 생긴 작은 홈을 잡고 내딛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올라서자 발아래서 돌판이 다시 부드럽게 닫혔다.
아이지와 마로가 나온 곳은 벽돌로 만든 작은 통로였다. 몇 걸음 앞에는 아래로 향한 네모난 구멍이 보였는데, 햇볕이 비추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마로와 아이지는 그 구멍을 향해 기어갔다. 마침 구멍 아래에서 누군가 다급한 어조로 속삭이는 소리가 올라왔다.
“얘들아, 뭐하니? 어서 와. 부인께서는 오늘 아침을 황제 폐하와 정원에서 들게 되었단 말이야.”
아이지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내다보았다. 시녀 셋이 쑥덕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궁중 여인 특유의 가발에 붉은 술을 달은 것을 보니 황제의 여인에게 전속된 시녀들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지는 빙긋 웃으며 마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너 치마 입는 법 알아?”
어리둥절해진 마로가 되물을 틈도 없이 아이지는 구멍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지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제헨멘강의 하류의 수상촌에 이르자 코가 얼얼해질 정도의 지독한 악취가 느껴졌다. 수상촌의 사람들은 배꼽거리에서도 가장 빈곤한 이들로 한 뼘의 땅조차 얻을 길이 없어, 강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수상촌의 악취에는 아이지마저 인상을 지푸렸다.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하려고? 톨페지구나 황궁은 반대편으로 가야 하잖아?”
하지만, 마로는 아무 대꾸도 없이 생명력에 대한 감지를 최대한으로 돋우고 강 어귀를 걸을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지하호수에서 두벡이 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배꼽거리에서 제헨멘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수상촌이 나오지? 거기서 굇세 랜번을 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 않아도 네가 내 능력을 가져간 뒤라면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그에게 네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너를 황궁으로 데려 달라고 말해. 그럼 그가 ……’
마로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독특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수상촌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집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아이지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역시 굇세 랜번이라는 자가 불사자라는 이야기였군.’
마로는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 불사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집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더욱 지독한 악취가 풍겨왔다. 물 위에 뜬 집에는 쥐가 없어서, 마로로서도 주변 환경을 알 수가 없었다. 감지력으로 누군가 앞에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로는 아이지에게 물었다.
“이봐, 여기 있는 사람 보여?”
아이지는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방 가운데에 있는 것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이지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그래, 뭐가 보이긴 해.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허물어진 천장의 구멍에서 달빛이 들어와 방 가운데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 달빛 속에는 두껍고 더러운 담요더미를 두른 무언가가 앉아 있었다. 마로가 말했다.
“당신이 굇세 랜번이요?”
순간 악취 가득한 공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마로의 몸이 공중으로 번쩍 들려 올라갔다. 길고 검은 털로 뒤덮인 우악스러운 손이 마로의 목을 틀어쥐어서는 힘껏 들어 올린 것이었다.
‘뭐야?’
하지만, 마로에겐 상황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곧 마로의 목을 쥔 억센 손이 불끈 쥐어지며 목뼈를 으스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마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마로의 몸이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지자, 아이지는 입을 우물거리더니 둘러쓰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며 무언가를 퉤하고 뱉어내었다. 아이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외투에 닿는 순간 외투는 불길에 휩싸이더니 활활 타오르며 방안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 불길 앞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물러나더니 쉰 목소리로 나직하게 외쳤다.
“마법사로구나!”
수상촌의 가옥에는 모든 방의 바닥 마다 배설을 하기 위해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정체 불명의 검은 덩어리는 그 구멍으로 몸을 내던지더니, 제헨만 강의 더러운 물을 온 몸에 흠뻑 적시고는 다시 방으로 뛰어올라왔다. 그리고는 구석에 몸을 도사리고는 아이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지는 나직하게 웃었다.
“헤헤, 도대체 이게 뭐야?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네.”
아이지가 보는 것은 팔이 세 개 달린 기묘한 생물이었다. 온 몸에는 검은 털이 보기 흉하게 숭숭 나 있었고, 커다란 나무통 같은 몸통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짧은 대신에 세 개의 팔은 무릎까지 내려 올 정도로 길었다. 얼굴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노란색의 작은 눈에 날카로운 덧니가 무질서하게 비어져 나온 입을 가지고 있었고, 콧마루는 아예 없어서 콧구멍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넌 누구냐?”
괴물의 입에선 듣기 거북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때 마로가 탁한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났다. 괴물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마로를 바라보더니 놀란 듯 웅얼거렸다.
“너, 넌…….”
무언가를 말할 것 같던 괴물은 입을 다물더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했다. 마로는 부러졌던 목이 제대로 회복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을 휘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이 굇세 랜번이 맞는 것 같군.”
그제야 괴물은 몸을 세우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내가 바로 굇세 랜번이야. 저 마법사 여자는 네 일행인가? 맞다면 불 좀 치우라고 해.”
마로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아이지는 불에 타던 외투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굇세 랜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인간이야, 아니야?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기형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지의 말에 랜번이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둘의 대화에 어리둥절해진 마로가 물었다.
“인간이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랜번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나, 난 어느 미친 녀석이 여러 사람들의 조각으로 만든 존재야. 내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르겠어. 난 그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곳에 묶여 있었어.”
마로가 여전히 무슨 사정인지 알아 차리지 못하자 아이지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자는 무척 인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단 말이야. 팔은 세 개인데다가, 얼굴은 일찌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해. 난 무엇보다 저 노란 색의 눈이…….”
그 때 갑자기 랜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이지에게 덤벼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아이지에게서 몇 걸음 앞에서 발이 뒤엉키며 고꾸라졌다. 아이지는 빙글빙글 웃으며 바닥에 엎어진 랜번을 향해 말했다.
“아까 보니까 상당히 재빠르더라고. 그래서 미리 손을 좀 써두었지.”
랜번은 흐느끼듯 소리 질렀다.
“나도 내가 원해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이 아니야! 너 같은 미친 마법사 때문에 나는 이런 모습으로 죽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아이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마법사의 마법으로는 너를 그런 모습으로 만들 수 없어. 나도 이래저래 아는 것이 많은 편인데, 사람들의 신체를 산 채로 이어붙일 수 있는 마법사는 없어.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마법이 아니라, 신의 능력이야. 팔다리가 잘리고 몸통이 조각나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힘 말이지. 아마 침묵하는 자의 왕 중 누군가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마로 한 번 말해봐. 이 자는 불사자이지?”
마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아이지의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넌 여러 사람들을 불사자로 만든 후에 각각 신체의 일부를 잘라낸 후 이어붙인 생명체일거야. 하아, 그것 참 기발한 발상이로군. 여러 불사자들의 자투리를 이어 붙여 하나의 생명을 더 만들어 내다니.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걸까? 신체적 균형을 맞추거나, 치유력을 통제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나도 언제고 꼭 한 번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탐구해보고 싶을 정도야. 이런 기막힌 기획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너를 만든 자는 불멸의 권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마법과 기타 학문에도 두루 소양이 깊은 인간일텐데. 그럴만한 인간이 누가 있을까? 이정도 인물이라면 내가 알 법도 한데.”
아이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랜번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게 누구야? 누구냐고!”
아이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뭐 알았다고 해도 이제 와서는 별로 의미도 없잖아? 지금의 네게 중요한 것은 너를 만들었던 자는 이미 죽어 사라졌고, 현재의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 아까 네가 목을 부러뜨렸던 이 남자, 마로 온지라는 사실이야.”
랜번은 마로 온지를 향하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라는 것은 나도 아까 알아챘어. 너는 내 죽음을 갖고 있겠지? 자, 어서 내 비참한 삶을 끝내줘.”
마로는 랜번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러자 그와 이어진 죽음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죽음을 앗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마로는 그 죽음을 다시 랜번을 향해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아차렸다.
“알았어. 네게 죽음을 되돌려 줄께. 대신…….”
“대신? 대신 뭐!”
“대신, 한 가지 일을 좀 해줘.”
“뭐야? 그게 뭐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께. 하지만, 이건 알아둬. 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난 이 근방을 떠날 수가 없어.”
마로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아이지가 재미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하하, 정말 대단하군. 정신 제약까지 걸어놓았단 말이야? 치밀하고 꼼꼼한 솜씨야.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을까? 뇌를 조작한 것인가? 아니 뇌 조작은 우리 가문만 아는 것인데……. 그럼 최면인가?”
마로는 손을 들어 아이지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랜번에게 말을 건넸다.
“베르가마의 지하 통로에서 나를 안내해 줘.”
지하 통로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랜번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넌 두벡이 보내서 왔구나! 그가 먼저 약속을 지켰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래 난 두벡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어. 하지만, 두벡은 죽었어. 대신 내가 두벡에게 불멸의 힘을 물려받았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 두벡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었다고?”
갑자기 랜번은 바닥을 후려쳤다. 그러자 나무 조각이 부서지며 바닥에 구멍이 났다.
“이 사기꾼! 항상 침묵하는 자들의 왕을 찾아주겠다고 말해놓고는……. 정작 본인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이었다니.”
랜번은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더니, 마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나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은 아니겠지? 너마저 나를 속인다면, 속인다면…….”
랜번은 협박하는 투로 말하다가 점차 처량하게 어조를 바꾸었다.
“이봐, 난 이 음울한 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는지 몰라. 도구로 살기 위한 내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하나의 열쇠일 뿐인 나로서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괴로워. 무엇보다 이 비참한 삶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계속 견뎌야 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워.”
마로는 랜번의 말에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 대강의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 마. 난 꼭 약속을 지킬 테니까.”
마로의 말투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왠지 랜번은 그 안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교한 감언이설로 자신을 꼬이던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말투였다. 랜번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 나를 따라와!”
랜번은 배설통로를 열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처럼 물에 몸을 담구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처럼 집 아래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위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
앞이 보이지 않는 마로를 대신하여 아이지가 말했다.
“이봐! 여기 이 친구는 눈이 멀었고, 나는 너처럼 두꺼운 팔뚝을 가지지 못했다고!”
랜번은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서더니 오른쪽 어깨에 돋아난 세 번째 팔로 아이지와 마로를 동시에 끌어 앉았다. 그의 길고 강력한 팔은 거뜬히 두 명을 안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팔을 이용해 집 밑에 매달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랜번은 그다지 멀리가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있던 오두막 근방의 어느 웅덩이에 내려앉아서는 마로와 아이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이 웅덩이 안에 들어서면 안 돼.”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웅덩이였지만, 랜번은 단숨에 그 안으로 몸을 웅크리고 파고 들었다. 랜번이 불사자가 아니라면 그의 생존을 걱정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자 돌연 웅덩이 속에서 무언가 쿨럭이더니 빠른 속도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몇 초 후에는 더러운 진창을 뒤집어 쓴 랜번만이 웅덩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이봐 빨리 내려와!”
랜번은 바닥에 쌓인 진흙을 손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꽤 넓은 공간이었지만 랜번의 강력한 팔 힘에 삽시간에 진흙이 치워지고 넓적한 돌판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드러났다. 랜번은 옆으로 내려 선 마로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베르가마가 시암 제국의 수도로 다시 세워지기 전부터 있던 통로야. 나도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
뒤늦게 바닥으로 내려온 아이지가 돌판을 보며 탄성을 지르더니 랜번의 말을 받았다.
“정말 베르가마 지하에 길이 있었네? 원래 베르가마는 시암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대륙 교단과는 교리를 달리하는 이단자들이 많이 살던 도시였어. 나도 이단자들이 박해를 피해 땅에 굴을 파고 몰래 예배를 드리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지금에 와서야 알았네?”
랜번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통로는 베르가마의 지하 곳곳에 연결되어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나며 무너진 곳도 아주 없진 않겠지만, 워낙에 튼튼하게 만들었던 통로라 거의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베르가마를 세운 이들이 이 지하 통로의 입구들에 문을 만들어서 열쇠가 없이는 드나들 수 없게 했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
랜번은 바닥에 바싹 엎드리더니 세 개의 팔을 힘껏 펼쳤다. 손가락마저 힘껏 벌리고는 돌판의 여기저기를 빠르게 만지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나자 돌판에 세 개의 구멍이 생겼다. 랜번은 각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허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서 거대한 석판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하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드러났다. 랜번은 그 통로를 보면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그 열쇠가 바로 나니까.”
랜번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횃불이나 등은 있나?”
아이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런 것은 없어.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얘는 눈이 멀었고, 나는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아이지는 칼로 손가락 끝을 베어 피를 내더니 왼쪽 눈 주위에 어지러운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본 랜번이 혐오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법이로군.”
“그래, 마법이야.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너야 말로 어쩌려고 그래? 너도 이런 마법 하나 걸어줄까?”
“흥, 마법은 자연의 이치를 왜곡시키는 사악한 거야. 난 그 따위는 필요 없어.”
“하하, 자연의 이치를 왜곡하며 태어난 장본인이 그렇게 섭섭한 소리를.”
“그래서 내가 죽으려는 거야. 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하하, 넌 지금 네 말이 꽤나 지혜로워 보인다고 여기겠지. 하지만, 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아무런 검토도 없이 받아들인 후, 그걸 바탕으로 세상을 착각하는 거야. 태곳적부터 있어온 도덕률이라는 것은 없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모습 따위도 없고. 그냥 모든 것들이 지금 이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살아갈 뿐이야.”
랜번은 더 이상 아이지와 말하기 싫다는 듯 뒤돌아서더니 통로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지하통로에는 쥐가 없기에 아이지가 마로의 손을 끌고 들어가야 했다. 랜번이 벽의 어딘가를 더듬자, 통로의 입구가 다시 닫혔다. 어둠 속에서 랜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벡은 이 길을 통해서 황궁에 잠입하려고 했어. 너희들은 어디로 갈거야?”
마로가 대답했다.
“두벡의 말에 따르면 이 길 중 하나가 황궁의 내전으로 통한다고 하던데 맞아?”
“내전뿐만 아니야. 지금도 온전한지는 모르겠지만 후원이나, 심지어 황제의 식당까지도 통하는 길이 있어.”
랜번의 말을 들은 아이지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황궁의 후원이라고? 하하. 이 길이 알려지면 황제의 미인들과 바람피우려는 사람들도 생기겠는데?”
아이지의 말을 듣자 마로의 머릿속에 사리사가 떠올랐다.
‘사리사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혹시 그 날 이후로 나를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아닐까?’
“황궁의 후원으로 가자.”
마로의 결정에 아이지가 의외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정말 황제의 첩들과 바람이라도 피우려고?”
“아니, 말라르디가 바로 그곳에 있어. 그는 후원의 시종장이야.”
랜번이 특유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와. 이 통로는 워낙 오래 되어서 너희들이 가려는 곳까지 길이 제대로 뚫려있는지 알 수가 없어.”
베르가마의 지하 통로는 미로와도 같았다. 랜번이 없었다면 이곳에 들어섰다고 해도, 길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간혹 무너진 곳이 있기도 했지만, 랜번은 모든 길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기에, 우회하여 통과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갑자기 아이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봐, 좀 쉬었다 가자. 너무 힘들어.”
침묵하는 자들의 왕은 회복력이 뛰어나서 상처를 입더라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찰과상이나 절상 같은 경우 즉각적으로 치료되었고, 뼈가 부서지거나 신체가 절단된 경우에나 조금 시간이 걸렸다. 독의 경우에도 지속력이 있는 독이 아니고서야, 즉시 해독할 수 있었다. 이런 막강한 항상성은 체력에도 영향을 미쳐 피로조차 즉시 해소하였다.
하지만, 침묵하는 자들의 왕에게 죽음으로써 종속된 불사자는 그와는 달랐다. 그들의 회복력은 훨씬 약해서 상처의 치료도 더딜 뿐 아니라, 격렬한 활동을 하게 되면 체력이 소진되기도 하였다. 원래 아이지는 가냘픈 체격에 체력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므로, 랜번의 빠른 걸음을 따라 앞을 못 보는 마로까지 끌고 다니려니 금방 지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지의 말에 랜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 왔는데 쉬긴 뭘 쉬어. 바로 앞이 황궁이야.”
정말 그러했다. 몇 걸음 더 걷자 어둠 속을 보던 아이지의 눈 앞이 깜깜해 졌다. 황궁의 마법 해제 결계 때문에 눈에 걸어 놓았던 마법이 소멸된 것이었다. 아이지는 발을 구르며 나직하게 욕을 했다.
“이런, 젠장. 두고 봐. 내가 언제고 마법 해제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낼 테니까. 이봐! 괴물, 그렇게 막무가내로 내달리지 말고 좀 멈춰봐. 이젠 나도 앞을 볼 수 없다고.”
랜번이 비웃으며 뒤돌아보았다.
“흥, 아까는 마법이 만능인 것처럼 우쭐대지 않았나?”
아이지 역시 지지 않고 받아쳤다.
“하하, 나에겐 이 결계조차 어쩔 수 없는 한 수가 남아 있다고. 네가 내 얼굴을 본 다음에도 그렇게 빈정댈 수 있을지 궁금하군.”
그 때 마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해. 랜번, 그냥 조금만 천천히 가면 돼. 내 감지력으로 너를 따라 갈 수 있으니까.”
랜번은 아이지가 들으라는 듯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지친 아이지가 다시 쉬자는 말을 하려는데, 랜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왔어. 바로 우리 머리 위가 황궁의 후원이야.”
랜번은 입구를 열려는지, 훌쩍 뛰어오르더니 박쥐처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 때 마로가 나직하게 외쳤다.
“잠깐, 기다려봐. 위에 사람이 있어.”
어두운 통로 안에서 마로는 랜번을 따라잡기 위해서 생명력에 대한 감지를 최대한으로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랜번이 열려는 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랜번은 마로의 말을 무시하고는 몸을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했다. 천장과 벽을 딛고 뛰면서 세 개의 팔을 재빠르게 놀리는 모습은 날렵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랜번이 마로의 앞에 내려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모든 입구는 외부의 시선으로 부터 가려져 있어. 주변에 사람이 있더라도 입구를 볼 수는 없을 거야. 입구가 있는 곳에서 나갈 때만 조심하면 돼. 그건 네가 할 일이야. 난 이 통로에서 나갈 수 없어. 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이제 내 죽음을 돌려줘.”
마로가 말했다.
“아니, 우린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해. 우리가 황궁의 정문을 걸어서 나올 수는 없을 거 아냐? 여기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줘.”
갑자기 랜번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뭐야? 약속했잖아! 결국 너도 똑같은 녀석이구나!.”
“이봐, 진정해! 난 널 속일 마음은 없어. 아까 난 분명히 너에게 지하통로의 안내를 부탁했어. 황궁까지만 보내달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이야. 난 그저 내 볼일이 끝날 때 까지 이 통로가 필요하고. 황궁은 내가 가야할 곳 중에 한 곳일 뿐이야. 정치가나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이 통로와 너는 긴요하겠지만,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 없어. 내 일이 끝나면 약속대로 너에게 죽음을 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마로의 말을 들은 랜번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너를 어떻게 믿지?”
계속되는 랜번의 의심에 마로 역시 짜증이 나고 말았다.
“이봐! 난 두벡에게 너를 조종할 수 있는 단어를 들었던 말이야!”
마로의 말을 들은 랜번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이지가 통쾌하다는 듯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 말이 있었어? 그거 재미있겠는데? 마로 한 번 그 말을 말해 봐. 뭐, 네가 귀찮다면 나로선 기꺼운 마음으로 대신해 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마로는 아이지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랜번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난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지 않고, 이렇게 너에게 부탁을 하고 있잖아. 나도 누군가에게 덜미를 잡혀 조종당하는 것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 잘 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믿고 좀 도와줘. 약속은 꼭 지킬 테니.”
마로의 말을 듣고 묵묵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랜번은 갑자기 벽으로 뛰어오르더니 천정을 힘껏 밀어 올렸다. 그러자 이미 잠금이 풀려있던 천정이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륵 위로 젖혀졌다. 랜번이 벽에 매달린 채로 말했다.
“빨리 올라가라.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돌로 입구를 세 번 두드리고 잠시 후에 다시 두 번을 두드려. 그럼 내가 다시 문을 열어 주겠다.”
마로와 아이지는 벽에 생긴 작은 홈을 잡고 내딛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올라서자 발아래서 돌판이 다시 부드럽게 닫혔다.
아이지와 마로가 나온 곳은 벽돌로 만든 작은 통로였다. 몇 걸음 앞에는 아래로 향한 네모난 구멍이 보였는데, 햇볕이 비추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마로와 아이지는 그 구멍을 향해 기어갔다. 마침 구멍 아래에서 누군가 다급한 어조로 속삭이는 소리가 올라왔다.
“얘들아, 뭐하니? 어서 와. 부인께서는 오늘 아침을 황제 폐하와 정원에서 들게 되었단 말이야.”
아이지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내다보았다. 시녀 셋이 쑥덕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궁중 여인 특유의 가발에 붉은 술을 달은 것을 보니 황제의 여인에게 전속된 시녀들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지는 빙긋 웃으며 마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너 치마 입는 법 알아?”
어리둥절해진 마로가 되물을 틈도 없이 아이지는 구멍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지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