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두벡 역시 지하 호수에서 신 운운하며 떠들어 댄 적이 있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워낙에 두서없이 지껄이는 바람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 후로 여러 가지 사건이 이어지는 바람에 두벡의 말을 진지하게 되새겨 볼 겨를도 없었다.

‘내 안의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면 내가 얼마쯤은 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저 상처가 빨리 낫는 것 말고도 확실히 나는 무언가 달라졌어. 그게 도대체 뭐지?’

이리저리 생각하던 마로는 갑자기 자신이 잊고 있던 처음의 질문을 떠올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아이지의 말에 너무 몰두하느라,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던 처음의 이유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로는 아이지에게 말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다니겠다는 이유가 뭐지?”

“그 대답은 벌써 했잖아. 네 옆에 있는 것이 즐거워서라고.”

‘아차, 그렇지.’

아이지는 흠칫하는 마로를 보며 귀엽다는 듯 깔깔 웃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옆에 있을 때 난 너무 마음이 편안해. 내가 말했지?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모든 사람은 나를 보면 끌리게 되어 있어. 물론 사람에 따라 그 정도나 표현 방식이 다르기도 하지. 어떤 이는 그저 부끄러워하거나 넋이 나가는데, 어떤 이는 그 징그러운 앙가레즈 녀석처럼 미친 짓을 하기도 해. 심지어 나를 몹시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더라고. 왜 이렇게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지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나, 살아온 경험에 따르는 것 같아.”

아이지는 서서히 웃던 것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하지만 모두 지긋지긋한 일이야. 모든 사람들이 나만 보면 눈이 벌게져서 덤벼드는 꼴  말이야. 지금처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몰라.”

별안간 아이지는 손가락으로 마로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넌 다른 사람들과 달라. 네가 가진 불멸의 힘이 나의 매력으로 너의 감정을 홀려도 금세 회복시켜 놓으니까. 아마 그 힘은 나의 매력 역시 죽음에 이르는 원인으로 보는 모양이지? 하긴 그럴 만도 해. 예전에 어떤 노인네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벌게지며 숨을 몰아쉬더니, 결국 나가떨어지더라고. 하하.”

마로는 어이가 없었다.

‘결국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따라다니겠다는 이유란 말이야?’

아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슬슬 갈 준비를 해야겠지. 이봐, 난 이제 너를 베르가마로 데려다 줄 마차를 구해올 거야. 어차피 이 주변은 오늘 첫 이슬을 맞을 때까지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계로 보호될 테니까 안전해. 그러니까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어.”

아이지는 마로를 남겨두고 홀로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마로는 불안함을 느꼈다. 동시에 마로는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혼자 있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얼간이가 되다니.’

마로는 홀로 앉아서 이 여름의 시작부터 자신에게 일어났던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했다. 순서와 연관을 정리하려고 하였지만, 생각할수록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고, 머리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마로는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마차의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해를 볼 수 없어진 이후로 시간관념이 흐려지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아이지가 떠나고 그다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하, 뭐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지?”

아이지는 마차뿐만 아니라, 마부까지 데리고 왔다. 말을 더듬거리는 마부의 상태로 미루어 정상적인 거래로 데리고 온 것은 아닌 듯 했지만, 아이지의 목소리는 쾌활하기만 했다.

“어서 마차에 타.”

달리 방법이 없는 마로는 순순이 마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마차 안에는 갈아입을 옷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이것들을 모두 어떻게 구한 거야?”

아이지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글쎄, 감출 정도로 대단한 비법은 아닌데, 이야기 해주어도 네가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아. 넌 생각보다 비위가 약한 것 같던데.”

마로는 입을 다물고 뒤로 등을 기대었다. 어느덧 마차가 출발하려는지 출렁거리고 있었다.

원래 칼레에서 베르가마까지는 하루나 이틀 남짓의 거리였다. 마로는 마차가 달리는 동안 시간을 죽일 겸 잠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멸의 삶을 얻은 이후로 좀처럼 잠을 자 본 일이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면 한참을 뒤척이다가 깜빡 자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예전처럼 밤 새 잠을 자는 것은 어려웠다. 아마 어떤 피곤도 금세 회복하는 까닭인 모양이었다.

결국 마차 안에 아무 말도 없기가 무료했던 아이지가 마로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넌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인간이야? 눈 꼬락서니나, 보석광산에 보내 진 것을 보면 심심하게 살았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마로는 차라리 대화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마 사리사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다시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일이었다.

마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이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렸다.

“하하, 역시 참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아니 그런데 뒷골목의 건달까지 했던 인간이 왜 그렇게 소심하고 고지식하지? 하긴 그러니까, 다른 녀석들에게 이용당했겠지만.”

마로는 이용당했다는 말을 듣자 귀가 번쩍 뜨였다.

“이용당했다니? 무슨 말이야.”

“너도 의심은 해보았을 것 아니야? 딱 들어보니 도미와 말라르디란 인간이 모두 한통속이구만.”

물론 마로 역시 바보는 아니기에 의심은 해보았다. 그들의 배신이란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배신의 동기를 이해할 수 없기에 자신의 추리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없어. 도대체 나한테 그런 짓을 해서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다는 거야?”

“네가 전해준 정보만으로는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이유가 될 만한 이야기는 수두룩하게 말해 줄 수 있어. 말라르디나 도미란 인간이 너를 싫어했을 수도 있고, 네가 물배달하던 구역을 도로 뺐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고, 네 이야기에 나오지 않은 누군가가 너를 짓밟아 달라고 그들에게 부탁을 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한데 뒤엉켰을 수도 있고. 이렇게 네가 파악할 수 있는 수준에서도 이유가 될 법한 것들은 쉽게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짜 이유는 네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상황에 숨어 있을 것 같아. 그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네 등을 치기 위해 서로 손을 잡았다는 것 뿐이야.”

마로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며 아이지는 비웃었다.

“그래서 내가 널 순진하다고,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거야. 원인을 모른다고, 동기를 알 수 없다고 분명한 결과까지 믿지 않는다는 것은 네가 평소에 그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거야. 비도덕적인 유혹이 없고서는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아직 너를 완전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너는 오히려 상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애초에 멀리하는 소심한 녀석이라고 봐. 다른 사람들은 얼핏 너를 냉정하고 무심한 인간으로 알겠지만, 오히려 네 속은 연약하고 물러 터졌지. 하지만 이 세상은 너와는 달라. 날카롭고 이기적이지. 아주 하찮은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어. 그건 당연한 일이야. 동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뒷골목에서 자랐다면서 어떻게 그런 것도 배우지 못했지? 하긴 외부의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줄곧 외곬수의 삶을 산다는 것이 너 같은 인간의 특징이긴 하지.”

‘내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신뢰했다고?’

그녀의 말을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마로는 달리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마로는 복잡해진 머리를 뒤로 뉘였다. 머릿 속에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마차는 하룻밤을 꼬박 달렸다. 그렇게 베르가마에 거의 다 도착하였을 때 쯤, 십여 명의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남루한 행색을 한 그들은 마부에게 손을 흔들어 마차를 세우더니 말했다.

“이렇게 우리들을 만난 것을 신의 은총으로 여기시오. 보아하니 베르가마로 가는 길인 것 같은데, 당장 돌아가는게 좋을거요. 지금 베르가마는 지옥이나 다름없으니까.”

어수룩한 마부가 뭐라고 대꾸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아이지는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고 마부의 등을 쿡 찔렀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봐.”

마부는 아이지의 지시에 따라 더듬더듬 질문을 했다. 사람들 중 가장 건장한 사내가 마부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 베르가마에는 적사병이 퍼지고 있다오. 적사병이 처음 발생한 빈민지구를 격리시켰기에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모양이지만. 덕분에 지금 배꼽거리를 중심으로 한 빈민지구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시체굴이 되어 가고 있을 거요. 우리도 베르가마에 들어서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가는 중이요.”

배꼽거리라는 말에 마로는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아이지는 마로를 다시 잡아 앉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가봐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맞는 말이었다. 베르가마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실을 납득하자마자 마로의 벌컥거리던 심장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마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이것도 모든 것을 순식간에 회복시킨다는 그 힘의 영향인가?’

밖에서는 다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떠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마부가 슬그머니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저도 이만해서 가보면 안 될까요? 어차피 베르가마도 거의 다 온 셈이니…….”

아이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사병으로나 내 손으로나 어차피 죽기는 매한가지라 이거야? 글쎄, 난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분명 둘 중의 하나는 네가 후회할만한 선택일 거야.”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그 뜻은 재미있기는커녕 섬뜩했다. 아이지의 협박에 마부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입만 뻐끔댈 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마로가 나섰다.

“이봐, 베르가마까지 얼마나 남았지?”

덜덜 떨리는 턱 덕분에 마부가 대답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어, 얼마 아, 안 남았습니다. 거, 걸어서도 한, 두 시간이면 도, 도착할 겁니다.”

마로의 뜻을 알아챈 아이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 마부를 보낸 후에 우리가 직접 마차를 몰고 가자고?”

“아니, 저치가 도시 경계까지만 데려다 주면 거기서부턴 걸어 갈거야.”

“난 도시 안에서도 마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사람들 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 ”

“그럼 천으로 감싸던지. 내가 지금부터 가려는 곳은 빈민가야. 아까 그 사내의 말에 따르면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모양인데, 그런 상황에서 마차를 타고 들어설 수는 없잖아.”

아이지는 눈썹을 찡긋 위로 치켜 올리더니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하. 제법 논리 정연하게 말할 줄도 아네.”

아이지는 마부의 등을 가볍게 찌르며 말했다.

“이봐, 너도 들었지? 나랑 헤어지고 싶으면 빨리 도시 경계까지 가는 것이 좋을 거야.”

마부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더니 냉큼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 급한 태도에서 아이지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에 따라 아이지의 매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더니 마부가 바로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얼마 안 되어 마차는 도시의 경계에 도착하였다. 아이지는 마로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서는 안절부절못하는 마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정답게 말했다.

“자, 이제 가 봐도 좋아. 아 그리고 내가 널 의심할 것이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에 가서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

마부는 아이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마차를 돌려 돌아갔다. 그저 아이지 앞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한 그는 아이지가 어깨를 두드릴 때 그녀의 손아래 있던 검은색 독충 한 마리가 옷깃으로 스며들어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허둥지둥 말을 달려 도망치는 마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지는 베르가마의 성을 보며 말했다.

“자, 그럼 어떻게 들어갈 작정이지?”

무심결에 아이지의 말에 대답하려던 마로는 무언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아이지와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지만,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도움을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 같았다.

“이봐. 아이지라고 했지?”

아이지는 마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즐거운 듯 활짝 웃으면서도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낮추었다.

“맞아. 하지만, 앞으론 내 이름을 부르지 마. 특히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마로는 자기가 하려던 말도 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복잡한 문제라서 말하기 힘들어. 그냥 내 이름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럼 나에겐 왜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

“나에겐 네가 이 세상에서 진심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마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마로의 표정을 본 아이지가 키득거리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이해하려고 들지마. 나랑 계속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내 이름을 함부로 말해선 안 돼. 혹시나 누군가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나와 말하려 할 때는 마음속으로만 이름을 말해.”

마로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그럼 너는 내 마음 속도 들여다 볼 수 있단 말이야?”

아이지는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왜 그렇게 놀라?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했던 나에 대한 욕 때문에 그래?”

정곡을 찔린 마로는 얼굴이 벌게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얼굴을 본 아이지는 그 어느 때보다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하하하! 저 얼굴 좀 봐. 너 정말 내 욕 많이 한 모양이구나. 걱정 마. 거짓말이었어. 난 ‘초조한 감시 속의 이방인’이지, ‘판단을 잃은 눈’이 아니야. 네 마음을 알 리가 없지. 앞으로도 마음속으로 내 욕 실컷 해도 괜찮아. 가끔 나에게 직접 이야기해도 좋고.”

하지만 마로의 벌게진 얼굴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마로가 가진 불멸의 힘도 작용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원래 배꼽거리에 있을 때만 해도, 두 눈이 멀쩡할 때까지만 해도 마로는 어디 가서도 남에게 놀림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법이 없었다. 주먹을 받으면 발길질로 되돌려주고, 자신에 대한 흠구덕을 들으면 냉소어린 무시로 대응하였다. 교만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당당했고 비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잃은 이후로 마로는 변하였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워낙에 자존심이 강하던 그였던지라, 오히려 그 영향이 더욱 크게 나타났던 것이다. 마로 자신도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마로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색하게 입을 놀렸다.

“그럼 내가 너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꼭 이름을 불러야 해? 그냥 나를 보고 말하면 당연히 난 네가 나에게 말한다고 알아차릴텐데.”

마로는 고개를 저었다.

“이봐, 난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항상 이야기를 할 때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아주 멀리에서 불러오는 기분이야. 그런 내가 눈짓과 몸동작으로 네 주의를 끄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

“하긴 그도 그렇겠네. 그럼 네가 나에게 적당한 별명을 하나 지어줘.”

별명이란 말을 듣자 대뜸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전에 들었던 ‘마녀’라는 말이 떠올렸다. 사실 그 말만큼 아이지에게 잘 어울리는 말도 없는 듯싶었다.

‘그런 말로 불러도 될까?’

눈치 빠른 아이지는 마로가 무언가를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너 지금 뭐 하나 생각했지?”

다른 말로 둘러대려던 마로는 문득 자기가 왜 매번 아이지에게 쩔쩔매야 하는가 생각했다. 눈이 멀기 전,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응, 네가 전에 말했던 무슨 나무의 마녀가 떠오르는군.”

마로는 평소의 아이지의 행동으로 미루어 이런 말을 해도 유쾌하게 웃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지의 반응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이지는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싫어. 그런 말로 나를 부르지 마.”

마로는 갑자기 침울해진 아이지의 반응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건 네가 먼저 말한 별명이잖아.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부른다며?”

“그건 사람들이 나를 모르기 때문에 부르는 이름일 뿐이야. 나의 신비와 지식에 눈이 멀어 나를 진심으로 대할 수 없는 그들이 나를 무어라고 부르던 나는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너는 달라.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진심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 네가 나를 마녀라고 부른다는 것은 기분 나빠.”

마로는 평소 마녀란 말에 어울릴 만큼 잔인하고 괴팍한 행동만 일삼던 그녀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기가 막혔지만, 갑자기 우울해진 그녀 앞에서 더 이상 마녀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당황한 마로는 급작스럽게 아이지의 새로운 이름을 머릿속에서 조작한 후에 황급히 말했다.

“그럼 그렇게 안 부르면 되지, 뭘 그까짓 걸로 침울해 하곤 그래? 그럼 ‘이아’는 어때?”

“이아? 그건 뭔데?”

“그냥 네 성과 이름을 대강 합쳐 부른 거야.”

아이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거 좋네.”

마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잠시 후 마로는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내가 왜 저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이것도 저 여자가 가진 그 신의 매력이란 것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어차피 난 저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해. 저 여자의 기분을 나쁘게 해서 좋을 것은 없다.’

마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냈다.

“이봐, 아이지, 아니 이아.”

“왜?”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계속 따라다니겠다는 생각인가?”

“그래. 저번에 말했잖아.”

“그럼 확실히 해두었으면 좋겠군. 알다시피 나는 앞을 볼 수가 없어. 아직 풋내기 장님이라, 지팡이를 짚거나, 발끝을 디뎌 길가림을 할 줄도 몰라. 난 원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질색인 사람이었지만, 이젠 그 전처럼 오기와 배짱으로 홀로 버텨내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을 잘 알아. 어쩔 수 없이 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해. 그래도 자존심이 아직 남아서 슬슬 눈치 살피며 은근슬쩍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바라는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아. 도움을 받으려거든 차라리 직접 부탁을 해서 떳떳하게 승락을 받는 것이 옳을 것 같아.”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난 아버지를 찾아야 해.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너는 가만히 보니 무척 대단한 능력을 지닌 것 같아. 이봐, 나를 도와줄 수 있어?”

별안간 아이지는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푸하하, 너를 도와줄 수 있냐고?”

전에도 마로가 사정을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종종 터뜨리던 웃음 소리였다. 이럴 때면 마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쓱하게 듣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이지의 말에서는 쓸모 있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기도 했다.

“전에도 말했듯 보든의 유산 중에서 가장 핵심인 것은 바로 너 ‘침묵하는 자의 왕’이야. 불멸이야 말로, 모든 신성을 담는 그릇이 되는 셈이니까. 보아하니 넌 네 힘을 그저 상처나 아물게 하고, 목숨이나 연장해 주는 마법 따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죽음을 관장하는 불멸의 힘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야. 이 세상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손에 틀어질 수 있는 막대한 권력이야. 신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능력이란 말이야.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가 뭐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은 거야.

시인이자 예언자인 레르케는 보든의 신성을 이어받은 자들을 이렇게 말했어. ‘침묵하는 자의 왕’, ‘초조한 감시 속의 이방인’, ‘판단을 잃은 눈’ 등등. 물론 미학적으로 뛰어난 표현이 아니지. 그 간절한 소망에도 레르케는 뛰어난 시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표현은 각 신성의 특성을 꽤나 그럴듯하게 설명한 셈이긴 해.

레르케가 왜 불멸의 힘을 가진 이를 ‘침묵하는 자의 왕’이라고 했는지 알아? 사실 모든 인간은 네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어. 너는 죽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에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바라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지.

진정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아니고서야, 넌 누구에게도 부탁을 할 필요가 없어. 그저 넌 모든 생물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담보로 삼고 있기에 그들에게 일방적인 요구와 지시를 하면 될 뿐이야. 모르긴 몰라도 넌 역대 침묵하는 자들의 왕 중에서 가장 어수룩한 존재일거야. 자기 능력이 어떤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능력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로 불멸의 힘을 이어받았으니. 참…….”

아이지가 하는 말에는 마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간혹 섞여 있었지만, 그 뜻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와 동의는 별개의 것이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지 않아. 난 아직 예전처럼 생각하고 예전처럼 행동하고 싶어. 비록 내가 뒷골목의 건달이긴 했어도, 나름대로 이치를 따질 줄은 알았어. 나라의 법을 어긴 적은 있어도, 최소한 내가 몸담은 사회의 도리와 상식은 지키고 살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마로는 은근한 분노까지 느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으로 자기 힘을 뽐내려는 인간들을 제일 싫어해. 그런 인간들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

하지만 아이지는 흥분한 마로의 말에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우습기 짝이 없네. 네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네가 혼자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뭐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건 어차피 상대는 너의 능력을 두려워할 텐데. 뭐 어쨌든 좋아. 전에도 말했지만, 난 어차피 네 곁에 계속 있을 작정이니까. 그런 쓸데없는 가식을 내세우지 않아도,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손을 빌려 줄거야. 자, 이제 됐지?”

아이지는 기지개를 켜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 나의 주인 나리. 내 죽음을 갖고 있는 주인 나리. 제가 도울 것은 없습니까?”

마로는 그런 아이지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배꼽거리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줘.”

아이지는 키득거렸다.

“너무 쉬운 일이군요? 저를 따라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