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6
5.
여인의 몸은 마치 자석과도 같이 서로 갖다 대자 마자 금세 엉겨 붙었다. 하지만 마로만큼 회복력이 빠르지는 못한 탓에 이음새는 쉽게 아물지 못해 흉측하게 벌려졌고, 여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마로가 초조하게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의 문 건너편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렸다. 그것은 앙가레즈가 나갔다가 돌아올 때 잠긴 문을 여는 소리였다.
‘이런 젠장. 어쩌지?’
마로는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여인을 들어서는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도 온통 피범벅이었기에 아무 일도 없는 체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마로가 뒤따라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자마자 문이 열렸다.
앙가레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급해지더니 방에는 앙가레즈의 끔찍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는 마로는 가슴을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제 알아차렸구나.’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간 거야!”
새장 안에는 핏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벽에 걸어놓았던 칼 하나가 그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앙가레즈는 새장 속의 칼을 꺼내어 들고는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앙가레즈가 침대 근처의 핏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핏자국은 무엇에 이끌린 듯 침대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앙가레즈는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고는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감지력을 통해 앙가레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마로는 그가 침대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지? 나를 발견할 때 까지 그냥 기다릴까? 아니야, 어차피 이 안을 들여다 볼거야. 내가 먼저 뛰쳐 나갈까?’
이런 생각으로 고민하는 마로는 자신의 얼굴 근처에 앙가레즈의 발소리가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들키게 되면 눈이 안 보이는 내가 불리하다. 저자는 분명히 침대 밑도 들여다 볼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먼저 얽혀서 싸우는 것이 낫다.’
마로는 고함을 지르며 침대에서 뛰쳐나오더니 앙가레즈의 다리를 껴안고 앞으로 넘어졌다. 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뒤엉킨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멀었다고는 해도 배꼽거리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던 마로였다. 지금처럼 서로 바짝 붙어 드잡이질을 할 때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불리함이 되지는 않았다. 위에서 찍어누르는 데 성공한 마로는 앙가레즈의 등 뒤로 돌아가 목과 팔을 꺾어 누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앙가레즈는 팔을 교묘하게 뒤틀더니 겨드랑이 아래로 고개를 집어 넣으며 뱅글 옆으로 굴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되어 도리어 앙가레즈가 마로의 위로 올라가서 등으로 마로를 압박하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앙가레즈의 재주는 그 뿐이 아니었다. 오른쪽 어깨로 마로의 오른 어깨를 힘껏 내리 누르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마로의 오른 팔목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흔들었다. 그러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마로의 오른쪽 어깨가 빠지고 말았다.
마로는 통증도 통증이거니와 예상치 못한 앙가레즈의 격투 실력에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앙가레즈는 옆으로 굴러 일어나 앉더니 무릎으로 마로의 남은 팔과 목덜미를 힘껏 짓눌렀다. 마로는 버둥거렸지만, 꼼짝 달싹 할 수 없었다.
앙가레즈는 헐떡이더니 마로의 귀를 살폈다. 그리고는 마로에게 연거푸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레를 빼내었지? 아니, 무엇보다 그녀는 어디 있나? 살아있나?”
하지만 마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빠졌던 어깨가 어느새 제자리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마로는 고함을 지르며 회복된 팔로 앙가레즈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주먹은 정확하게 갈비뼈 끝을 가격하였다. 빠진 어깨로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마로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은 앙가레즈는 숨 막히는 통증으로 옆으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앙가레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구르는 힘 그대로 벌떡 일어서며 마로를 향해 힘껏 칼을 내리쳤다. 새장에서 꺼낼 때 여인이 칼에 걸어 놓았던 마법은 사라졌지만, 앙가레즈의 팔 힘이 묵직한 칼의 무게에 더하여 졌으므로, 마로의 앞 가슴은 뼈가 으스러지며 쪼개어지며 피를 내뿜었다. 마로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로의 상처는 급격하게 아물었다. 바닥을 구르던 마로가 다시 일어설 때에는 더 이상 피가 쏟아지지 않고 있었다. 앙가레즈는 그 광경을 보고는 놀라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도대체 뭐냐? 악마인가?”
그러자 마로 대신 웃음기를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앙가레즈의 귓등 뒤에서 대답하였다.
“아니, 악마는 네 뒤에 있는 걸.”
앙가레즈는 소스라치며 뒤로 돌아섰다. 새장 속에 있던 여인이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앙가레즈가 반가움에 여인에게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길고 뾰족한 여인의 손톱이 앙가레즈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여인이 새장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배양해 두었던 손톱 속의 혈독이 앙가레즈의 피와 만나자 순식간에 용해되었다. 핏물 속으로 녹아든 독은 혈관 속의 세찬 흐름을 타고 앙가레즈의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컥컥대며 서 있던 앙가레즈는 얼마 있지 않아 팔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인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때? 몸이 저릿저릿하지? 이제 조금 더 있으면 몹시 가려워질 거야. 그러면 너는 온몸을 긁을 수밖에 없어. 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내가 제일 즐기는 장면 중에 하나지. 하하하”
몹시도 즐겁게 웃던 여인은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더니 넘어지지 않게 기둥을 짚고 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여인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하지만 여인의 초췌한 그 표정이 한편으로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기이한 아름다움을 보며 앙가레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있었군. 다행이오. 난 그대가 혹시 저 녀석에게 죽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오.”
앙가레즈의 말을 듣자 여인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나를 걱정한다고? 벌레만도 못한 네 녀석 따위가 감히 나를 걱정해?”
여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앙가레즈를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앙가레즈는 피하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여인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마시오.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소. 아니, 나를 새장 속에 가두고 그대가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도 좋소. 제발 떠나지만 말아 주시오. 그저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만 있어 주시오.”
하지만 여인은 역겹다는 듯 앙가레즈에게 침을 뱉고는 거칠게 발을 빼었다. 독이 퍼져 손발에 힘이 빠진 앙가레즈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울먹이는 소리로 여인에게 사정할 뿐이었다.
여인은 침대에서 이불보를 걷어내더니 그 날씬한 몸에 휘감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몸이 가려지자 여인은 앙가레즈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마로에게 다가가서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많이 아팠지? 자, 이제 우리 같이 이 더러운 곳에서 나가자.”
갑작스레 다정하게 구는 여인의 태도에 마로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앙가레즈가 고함을 지르며 꿈틀거리며 기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요? 그, 그 따위 녀석에게, 내, 내가 보는 앞에서…….”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외치던 앙가레즈는 얼굴이 벌개지더니 별안간 온몸의 옷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너무 거칠게 움직여 손톱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앙가레즈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옷을 찢어내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온 몸을 긁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피부가 벗겨지며 피가 솟기 시작했다. 벌겋게 드러난 진피 위에도 손톱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가자 핏줄기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앙가레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앙가레즈는 멈출 줄을 몰랐다.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오히려 여인은 즐겁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마로의 손을 잡고는 방밖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 가지 마시오! 크으으윽!”
앙가레즈는 고통스럽게 뒹굴며 울부짖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마로조차 몸서리 칠 정도로 앙가레즈의 울음소리가 처참하게 울려퍼졌지만,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의 문을 닫아 걸었다.
여인의 손에 이끌려 나간 마로는 방밖에 나서서는 결국 한 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여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뻔한 사실을 진지하게 묻는 재주가 있구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여기서 나가야지.”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지키는 자들이 꽤나 많은 것 같던데?”
“흥,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그깟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갑자기 여인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침묵하는 자의 왕은 생명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 이봐, 지금 이 건물에 몇 명이나 있어?”
침묵하는 자의 왕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자신을, 정확히는 불멸의 힘을 가진 이를 말한다는 것쯤은 마로로서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마로는 감지력을 돋워 사방을 살폈다.
“글쎄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해도 대충 스무 명 가량 되는 것 같은데…….”
마로는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오히려 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벌레 따위야 모였건 따로 흩어졌건, 어차피 밟으면 한 번에 다 죽기는 매한가지야.”
여인은 다음 방으로 가는 문 앞에서 멈추어 서서 마로에게 물었다.
“이 문 뒤에는 몇 명이나 있지?”
“글쎄 다음 방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최대한 일곱 명 정도 있는 것 같은데?”
“딱 적당하군.”
여인은 기척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는지 문의 자물쇠들을 철컥 철컥 풀어 제쳤다. 마지막에는 문을 발로 차며 요란스럽게 열어젖히기까지 하였다.
마로와 여인이 들어서고 있는 방은 이 저택에 들어왔던 첫날 마로가 목욕을 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방구석에 있는 욕조에는 세 명의 하녀가 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의 사병들은 복도로 향하는 문 앞에서 놀란 눈으로 마로와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밀 방의 문이 안에서 열릴 때는 병사들의 주인인 앙가레즈가 보여야 했다. 하지만 열린 문에는 앙가레즈 대신, 여자와 눈먼 하인이 하나 서 있었다. 사병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무기를 겨누며 다가왔다.
“뭐냐? 너희들은?”
사병들은 근래 앙가레즈가 비밀방에 숨어 지낸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안에 여인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비밀방 새장에 여인을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앙가레즈의 저택에서도 일부 몇 명밖에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왔던 사병들은 여인을 보더니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기도 하였다.
“어, 어떻게 거기서 나오는 거, 거지?”
이미 그들의 말투나 표정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숫보기가 닳고 닳은 창녀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꼴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을 본 여인은 짜증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와서 잘 들어봐라. 어떻게 여기서 나왔는지 알려줄 테니.”
하지만 병사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껴 선뜻 다가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무기를 든 자들이 엉덩이를 뒤로 빼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여인은 갑자기 자신의 혀를 질끈 깨물었다. 입안에 피가 솟자 여인은 크게 한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병사들을 향해 불어내었다.
여인의 입김에는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그 입김을 맡은 병사들은 처음에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고는 휘청거리며 벌렁 넘어지기 시작했다.
네 명의 병사가 모두 쓰러지자 여인은 병사들이 떨어뜨린 창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태연하게 병사들의 배에 창을 찔러 넣었다. 온 몸이 마비된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여인은 이윽고 욕조 근처에서 숨죽이고 서 있는 하녀들에게 눈을 돌렸다. 여인이 요염하게 손가락을 빨며 휘적휘적 다가가자, 가뜩이나 공포에 질려 있던 하녀들은 경련하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하녀들을 바라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손을 빼어서 욕조에 담그고는 이리저리 휘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은 하녀인 모양이로구나. 이 물은 뭐하는 거지?”
하녀들은 감히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들오들 팔다리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일거야. 이 물은 뭐하는 거지?”
여인의 말에 하녀 하나가 냉큼 나서며 대답했다.
“그, 그 물은 주인님의 방에서 일하는 매, 맹인들이 씻을 물입니다.”
“시원하고 향기도 그럴듯하군. 그런데 정말 깨끗한지는 모르겠네? 이 물은 깨끗하니?”
“네, 깨, 깨끗합니다.”
“그래? 그럼 마셔봐.”
“네?”
“마셔 보라고.”
하녀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선뜻 마시지 못하였다. 그런 하녀들을 보던 여인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
“한 번 말해서는 좀처럼 듣지 않는군. 지금부터 둘 중에 이 물을 적게 마시는 년은 눈알을 뽑아 주겠다.”
여인의 섬뜩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들은 정신없이 욕조의 물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 애처로운 광경을 본 여인은 무엇이 좋은지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세상에. 목욕물을 마시는 멍청이도 있었네?”
마로는 무슨 광경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대화로 미루어 어찌된 상황인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여기서 나가야 할 것 아냐? 하녀들을 괴롭힐 틈이 어딨어?”
여인은 화를 내는 마로를 보더니 즐거운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니? 넌 내가 이 하녀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
“하하, 이제보니 너 꽤나 착하구나. 알았어. 알았어. 네 말대로 할께.”
여인은 아직도 물을 퍼 먹고 있는 하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그만 먹어라. 목욕물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열심히 퍼 먹니? 그나저나 너희들은 운이 좋구나. 내 맘이 바뀌기 전에 얼른 나가 봐라. 아, 나가기 전에 여기 계신 어르신께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잊지 말고.”
하녀들은 겁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로 마로에게 인사를 하더니 허겁지겁 방에서 뛰쳐 나갔다. 하녀들이 나가자 여인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바꾸어 마로에게 속삭였다.
“이봐, 지금부터 저 하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잘 살펴 봐. 분명 저 하녀들은 이 건물에 있는 하인과 병사들에게 갈 거야.”
마로는 여인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지 모르면서도 일단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과연 하녀들은 여인의 말대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났어?”
“아니 아직, 거의 가까이 접근하긴 했어. 아, 그래.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합친 것 같다.”
“그래? 그럼 그 기운들까지 잘 살피라고.”
마로는 여인의 말대로 하녀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기운에 계속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한데 모여 있던 여남은 개의 기운이 별안간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
마로가 어리둥절해 하자 여인은 무언가 떠오른 바가 있는지 흡족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왜 그래?”
“하녀를 비롯한 사람의 기운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있어. 어디로 숨고 있나?”
여인은 마침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넌 그 힘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이봐, 네 감지력은 바위 뒤에 숨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아주 멀리 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네 감지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럼 그들이 갑자기 빠르게 이동하여 이곳을 벗어났다는 것인가?”
“하하, 넌 꽤나 창의적인 녀석이로구나. 생명의 기운이 스러진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텐데. 하하.”
그제야 마로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는 놀라 외쳤다.
“뭐야? 너 도대체 아까 그 하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들이 욕조의 물을 마시기 전에 손으로 독을 좀 타두었지. 이 독은 보든의 분수라고 하는 건데, 참 재미있는 거야. 중독된 직후에는 별 이상이 없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별안간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분수와 같이 피를 내뿜으면서 죽거든. 게다가 그 피에는 여전히 독이 남아 있어서, 곁에 있다가 그 핏물을 뒤집어쓴 이도 땀구멍으로 독을 흡수하여 같은 증상으로 죽게 되지. 이 독의 특성을 모르는 멍청이들만 잔뜩 모인 곳이라면 한 번 손을 써서 몇 천 명, 몇 만 명도 죽일 수 있는 재미있는 물건이야. 물론 이건 그저 이론적인 이야기지. 사람들이야 옆에서 누군가 피를 뿜으며 죽으면 설령 그것이 독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도망가기에 급급하니까. 이 독으로 가장 많이 죽인 자가 바로 독을 만든 장본인인 보든이란 마법사인데, 왕의 대관식에서 한 번에 150명 가까이 죽였다지 아마? 나로서는 20명 정도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여인은 하녀들을 풀어주는 척 하면서 괴상한 독의 효과로 건물의 다른 사람들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였다. 마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는 여인을 보며 아연해지고 말았다. 문득 아까 앙가레즈의 비밀 방에서 느꼈던 여인의 기이한 능력이 떠올랐다. 이런 치명적인 독을 몸에 품고, 불가사의하다 못해 섬뜩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 괴물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넌 대체 누구야?”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 나직하게 킥킥 거리더니 대답했다.
“좀 정확하게 물어 줄래? 내 이름을 알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내 정체를 알고 싶은 거야?”
“장난치지 말고 대답해.”
“하하, 장난은 아니었는데. 까짓것 둘 다 이야기 해 주지.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긴 하지만, 어쨌든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보통 백향목의 마녀라고 부르지. 뭐 다른 별명도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어처구니없고 하잘 것 없어서 잊어버리고 말았어. 물론 그들도 내 진짜 이름은 모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겠지. 내가 가르쳐 준 적이 없거든. 사실 지금 세상에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더니 마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손이었지만, 마로는 자신이 불사의 몸이라는 것도 잊고 두려움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여인은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너에겐 가르쳐 줄께. 잊지마. 내 이름은 이븐 아이지야.”
여인의 몸은 마치 자석과도 같이 서로 갖다 대자 마자 금세 엉겨 붙었다. 하지만 마로만큼 회복력이 빠르지는 못한 탓에 이음새는 쉽게 아물지 못해 흉측하게 벌려졌고, 여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마로가 초조하게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의 문 건너편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렸다. 그것은 앙가레즈가 나갔다가 돌아올 때 잠긴 문을 여는 소리였다.
‘이런 젠장. 어쩌지?’
마로는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여인을 들어서는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도 온통 피범벅이었기에 아무 일도 없는 체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마로가 뒤따라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자마자 문이 열렸다.
앙가레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급해지더니 방에는 앙가레즈의 끔찍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는 마로는 가슴을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제 알아차렸구나.’
“어떻게 된 거야! 어디 간 거야!”
새장 안에는 핏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벽에 걸어놓았던 칼 하나가 그 안에서 잠겨 있었다. 앙가레즈는 새장 속의 칼을 꺼내어 들고는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며 방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앙가레즈가 침대 근처의 핏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핏자국은 무엇에 이끌린 듯 침대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앙가레즈는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고는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감지력을 통해 앙가레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마로는 그가 침대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지? 나를 발견할 때 까지 그냥 기다릴까? 아니야, 어차피 이 안을 들여다 볼거야. 내가 먼저 뛰쳐 나갈까?’
이런 생각으로 고민하는 마로는 자신의 얼굴 근처에 앙가레즈의 발소리가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들키게 되면 눈이 안 보이는 내가 불리하다. 저자는 분명히 침대 밑도 들여다 볼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먼저 얽혀서 싸우는 것이 낫다.’
마로는 고함을 지르며 침대에서 뛰쳐나오더니 앙가레즈의 다리를 껴안고 앞으로 넘어졌다. 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뒤엉킨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멀었다고는 해도 배꼽거리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던 마로였다. 지금처럼 서로 바짝 붙어 드잡이질을 할 때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불리함이 되지는 않았다. 위에서 찍어누르는 데 성공한 마로는 앙가레즈의 등 뒤로 돌아가 목과 팔을 꺾어 누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앙가레즈는 팔을 교묘하게 뒤틀더니 겨드랑이 아래로 고개를 집어 넣으며 뱅글 옆으로 굴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세가 역전되어 도리어 앙가레즈가 마로의 위로 올라가서 등으로 마로를 압박하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앙가레즈의 재주는 그 뿐이 아니었다. 오른쪽 어깨로 마로의 오른 어깨를 힘껏 내리 누르면서 동시에 왼손으로 마로의 오른 팔목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흔들었다. 그러자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마로의 오른쪽 어깨가 빠지고 말았다.
마로는 통증도 통증이거니와 예상치 못한 앙가레즈의 격투 실력에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앙가레즈는 옆으로 굴러 일어나 앉더니 무릎으로 마로의 남은 팔과 목덜미를 힘껏 짓눌렀다. 마로는 버둥거렸지만, 꼼짝 달싹 할 수 없었다.
앙가레즈는 헐떡이더니 마로의 귀를 살폈다. 그리고는 마로에게 연거푸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레를 빼내었지? 아니, 무엇보다 그녀는 어디 있나? 살아있나?”
하지만 마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빠졌던 어깨가 어느새 제자리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마로는 고함을 지르며 회복된 팔로 앙가레즈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주먹은 정확하게 갈비뼈 끝을 가격하였다. 빠진 어깨로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마로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은 앙가레즈는 숨 막히는 통증으로 옆으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앙가레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구르는 힘 그대로 벌떡 일어서며 마로를 향해 힘껏 칼을 내리쳤다. 새장에서 꺼낼 때 여인이 칼에 걸어 놓았던 마법은 사라졌지만, 앙가레즈의 팔 힘이 묵직한 칼의 무게에 더하여 졌으므로, 마로의 앞 가슴은 뼈가 으스러지며 쪼개어지며 피를 내뿜었다. 마로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로의 상처는 급격하게 아물었다. 바닥을 구르던 마로가 다시 일어설 때에는 더 이상 피가 쏟아지지 않고 있었다. 앙가레즈는 그 광경을 보고는 놀라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도대체 뭐냐? 악마인가?”
그러자 마로 대신 웃음기를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앙가레즈의 귓등 뒤에서 대답하였다.
“아니, 악마는 네 뒤에 있는 걸.”
앙가레즈는 소스라치며 뒤로 돌아섰다. 새장 속에 있던 여인이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앙가레즈가 반가움에 여인에게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길고 뾰족한 여인의 손톱이 앙가레즈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다.
여인이 새장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배양해 두었던 손톱 속의 혈독이 앙가레즈의 피와 만나자 순식간에 용해되었다. 핏물 속으로 녹아든 독은 혈관 속의 세찬 흐름을 타고 앙가레즈의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으로 컥컥대며 서 있던 앙가레즈는 얼마 있지 않아 팔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여인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때? 몸이 저릿저릿하지? 이제 조금 더 있으면 몹시 가려워질 거야. 그러면 너는 온몸을 긁을 수밖에 없어. 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내가 제일 즐기는 장면 중에 하나지. 하하하”
몹시도 즐겁게 웃던 여인은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더니 넘어지지 않게 기둥을 짚고 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듯 여인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하지만 여인의 초췌한 그 표정이 한편으로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기이한 아름다움을 보며 앙가레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있었군. 다행이오. 난 그대가 혹시 저 녀석에게 죽은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오.”
앙가레즈의 말을 듣자 여인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나를 걱정한다고? 벌레만도 못한 네 녀석 따위가 감히 나를 걱정해?”
여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앙가레즈를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앙가레즈는 피하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여인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열정적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마시오.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소. 아니, 나를 새장 속에 가두고 그대가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도 좋소. 제발 떠나지만 말아 주시오. 그저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만 있어 주시오.”
하지만 여인은 역겹다는 듯 앙가레즈에게 침을 뱉고는 거칠게 발을 빼었다. 독이 퍼져 손발에 힘이 빠진 앙가레즈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울먹이는 소리로 여인에게 사정할 뿐이었다.
여인은 침대에서 이불보를 걷어내더니 그 날씬한 몸에 휘감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몸이 가려지자 여인은 앙가레즈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마로에게 다가가서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많이 아팠지? 자, 이제 우리 같이 이 더러운 곳에서 나가자.”
갑작스레 다정하게 구는 여인의 태도에 마로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앙가레즈가 고함을 지르며 꿈틀거리며 기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요? 그, 그 따위 녀석에게, 내, 내가 보는 앞에서…….”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외치던 앙가레즈는 얼굴이 벌개지더니 별안간 온몸의 옷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너무 거칠게 움직여 손톱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앙가레즈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옷을 찢어내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온 몸을 긁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피부가 벗겨지며 피가 솟기 시작했다. 벌겋게 드러난 진피 위에도 손톱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가자 핏줄기가 솟구쳤다. 순식간에 앙가레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앙가레즈는 멈출 줄을 몰랐다.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오히려 여인은 즐겁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마로의 손을 잡고는 방밖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 가지 마시오! 크으으윽!”
앙가레즈는 고통스럽게 뒹굴며 울부짖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마로조차 몸서리 칠 정도로 앙가레즈의 울음소리가 처참하게 울려퍼졌지만,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의 문을 닫아 걸었다.
여인의 손에 이끌려 나간 마로는 방밖에 나서서는 결국 한 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여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뻔한 사실을 진지하게 묻는 재주가 있구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여기서 나가야지.”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지키는 자들이 꽤나 많은 것 같던데?”
“흥,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그깟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갑자기 여인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침묵하는 자의 왕은 생명체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 이봐, 지금 이 건물에 몇 명이나 있어?”
침묵하는 자의 왕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자신을, 정확히는 불멸의 힘을 가진 이를 말한다는 것쯤은 마로로서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마로는 감지력을 돋워 사방을 살폈다.
“글쎄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해도 대충 스무 명 가량 되는 것 같은데…….”
마로는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오히려 여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벌레 따위야 모였건 따로 흩어졌건, 어차피 밟으면 한 번에 다 죽기는 매한가지야.”
여인은 다음 방으로 가는 문 앞에서 멈추어 서서 마로에게 물었다.
“이 문 뒤에는 몇 명이나 있지?”
“글쎄 다음 방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최대한 일곱 명 정도 있는 것 같은데?”
“딱 적당하군.”
여인은 기척을 죽이려는 생각이 없는지 문의 자물쇠들을 철컥 철컥 풀어 제쳤다. 마지막에는 문을 발로 차며 요란스럽게 열어젖히기까지 하였다.
마로와 여인이 들어서고 있는 방은 이 저택에 들어왔던 첫날 마로가 목욕을 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방구석에 있는 욕조에는 세 명의 하녀가 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의 사병들은 복도로 향하는 문 앞에서 놀란 눈으로 마로와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밀 방의 문이 안에서 열릴 때는 병사들의 주인인 앙가레즈가 보여야 했다. 하지만 열린 문에는 앙가레즈 대신, 여자와 눈먼 하인이 하나 서 있었다. 사병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무기를 겨누며 다가왔다.
“뭐냐? 너희들은?”
사병들은 근래 앙가레즈가 비밀방에 숨어 지낸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안에 여인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비밀방 새장에 여인을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앙가레즈의 저택에서도 일부 몇 명밖에 없었다.
눈썹을 찌푸린 험상궂은 얼굴로 다가왔던 사병들은 여인을 보더니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기도 하였다.
“어, 어떻게 거기서 나오는 거, 거지?”
이미 그들의 말투나 표정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숫보기가 닳고 닳은 창녀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꼴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을 본 여인은 짜증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리 가까이 와서 잘 들어봐라. 어떻게 여기서 나왔는지 알려줄 테니.”
하지만 병사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껴 선뜻 다가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무기를 든 자들이 엉덩이를 뒤로 빼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여인은 갑자기 자신의 혀를 질끈 깨물었다. 입안에 피가 솟자 여인은 크게 한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병사들을 향해 불어내었다.
여인의 입김에는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그 입김을 맡은 병사들은 처음에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고는 휘청거리며 벌렁 넘어지기 시작했다.
네 명의 병사가 모두 쓰러지자 여인은 병사들이 떨어뜨린 창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태연하게 병사들의 배에 창을 찔러 넣었다. 온 몸이 마비된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여인은 이윽고 욕조 근처에서 숨죽이고 서 있는 하녀들에게 눈을 돌렸다. 여인이 요염하게 손가락을 빨며 휘적휘적 다가가자, 가뜩이나 공포에 질려 있던 하녀들은 경련하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하녀들을 바라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손을 빼어서 욕조에 담그고는 이리저리 휘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희들은 하녀인 모양이로구나. 이 물은 뭐하는 거지?”
하녀들은 감히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들오들 팔다리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여인은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일거야. 이 물은 뭐하는 거지?”
여인의 말에 하녀 하나가 냉큼 나서며 대답했다.
“그, 그 물은 주인님의 방에서 일하는 매, 맹인들이 씻을 물입니다.”
“시원하고 향기도 그럴듯하군. 그런데 정말 깨끗한지는 모르겠네? 이 물은 깨끗하니?”
“네, 깨, 깨끗합니다.”
“그래? 그럼 마셔봐.”
“네?”
“마셔 보라고.”
하녀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선뜻 마시지 못하였다. 그런 하녀들을 보던 여인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
“한 번 말해서는 좀처럼 듣지 않는군. 지금부터 둘 중에 이 물을 적게 마시는 년은 눈알을 뽑아 주겠다.”
여인의 섬뜩한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들은 정신없이 욕조의 물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 애처로운 광경을 본 여인은 무엇이 좋은지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세상에. 목욕물을 마시는 멍청이도 있었네?”
마로는 무슨 광경인지 볼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대화로 미루어 어찌된 상황인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여기서 나가야 할 것 아냐? 하녀들을 괴롭힐 틈이 어딨어?”
여인은 화를 내는 마로를 보더니 즐거운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니? 넌 내가 이 하녀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
“하하, 이제보니 너 꽤나 착하구나. 알았어. 알았어. 네 말대로 할께.”
여인은 아직도 물을 퍼 먹고 있는 하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들아, 그만 먹어라. 목욕물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열심히 퍼 먹니? 그나저나 너희들은 운이 좋구나. 내 맘이 바뀌기 전에 얼른 나가 봐라. 아, 나가기 전에 여기 계신 어르신께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잊지 말고.”
하녀들은 겁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로 마로에게 인사를 하더니 허겁지겁 방에서 뛰쳐 나갔다. 하녀들이 나가자 여인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바꾸어 마로에게 속삭였다.
“이봐, 지금부터 저 하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잘 살펴 봐. 분명 저 하녀들은 이 건물에 있는 하인과 병사들에게 갈 거야.”
마로는 여인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지 모르면서도 일단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과연 하녀들은 여인의 말대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났어?”
“아니 아직, 거의 가까이 접근하긴 했어. 아, 그래.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합친 것 같다.”
“그래? 그럼 그 기운들까지 잘 살피라고.”
마로는 여인의 말대로 하녀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기운에 계속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한데 모여 있던 여남은 개의 기운이 별안간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
마로가 어리둥절해 하자 여인은 무언가 떠오른 바가 있는지 흡족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왜 그래?”
“하녀를 비롯한 사람의 기운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있어. 어디로 숨고 있나?”
여인은 마침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넌 그 힘을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이봐, 네 감지력은 바위 뒤에 숨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아주 멀리 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네 감지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럼 그들이 갑자기 빠르게 이동하여 이곳을 벗어났다는 것인가?”
“하하, 넌 꽤나 창의적인 녀석이로구나. 생명의 기운이 스러진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텐데. 하하.”
그제야 마로는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는 놀라 외쳤다.
“뭐야? 너 도대체 아까 그 하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들이 욕조의 물을 마시기 전에 손으로 독을 좀 타두었지. 이 독은 보든의 분수라고 하는 건데, 참 재미있는 거야. 중독된 직후에는 별 이상이 없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별안간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분수와 같이 피를 내뿜으면서 죽거든. 게다가 그 피에는 여전히 독이 남아 있어서, 곁에 있다가 그 핏물을 뒤집어쓴 이도 땀구멍으로 독을 흡수하여 같은 증상으로 죽게 되지. 이 독의 특성을 모르는 멍청이들만 잔뜩 모인 곳이라면 한 번 손을 써서 몇 천 명, 몇 만 명도 죽일 수 있는 재미있는 물건이야. 물론 이건 그저 이론적인 이야기지. 사람들이야 옆에서 누군가 피를 뿜으며 죽으면 설령 그것이 독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도망가기에 급급하니까. 이 독으로 가장 많이 죽인 자가 바로 독을 만든 장본인인 보든이란 마법사인데, 왕의 대관식에서 한 번에 150명 가까이 죽였다지 아마? 나로서는 20명 정도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여인은 하녀들을 풀어주는 척 하면서 괴상한 독의 효과로 건물의 다른 사람들도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였다. 마로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는 여인을 보며 아연해지고 말았다. 문득 아까 앙가레즈의 비밀 방에서 느꼈던 여인의 기이한 능력이 떠올랐다. 이런 치명적인 독을 몸에 품고, 불가사의하다 못해 섬뜩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 괴물과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넌 대체 누구야?”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 나직하게 킥킥 거리더니 대답했다.
“좀 정확하게 물어 줄래? 내 이름을 알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내 정체를 알고 싶은 거야?”
“장난치지 말고 대답해.”
“하하, 장난은 아니었는데. 까짓것 둘 다 이야기 해 주지. 이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긴 하지만, 어쨌든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보통 백향목의 마녀라고 부르지. 뭐 다른 별명도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모두 어처구니없고 하잘 것 없어서 잊어버리고 말았어. 물론 그들도 내 진짜 이름은 모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겠지. 내가 가르쳐 준 적이 없거든. 사실 지금 세상에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더니 마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손이었지만, 마로는 자신이 불사의 몸이라는 것도 잊고 두려움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여인은 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너에겐 가르쳐 줄께. 잊지마. 내 이름은 이븐 아이지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