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틀 무렵 마로는 문을 열고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다시 끌려나갔다. 거칠게 끌려나가는 바람에 간신히 아물었던 상처의 딱지가 찢어지며 다시 피가 흘렀지만, 병사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마로는 또다시 예전의 그 공터에 내던져졌다.

다행히 아직 공기가 선선한 때라서 첫 심문 때처럼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첫 재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삼엄한 긴장감이 마당 전체에 서려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병사들이 둘러 싸고 있었고 단은 더욱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로는 첫 재판을 주관했던 관리가 어느새 마당으로 내려서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그 관리 뿐이 아니었다. 마당의 모든 인원이 어느 한 곳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올라가 보니 연단 위에 화려한 황색 옷을 입은 이가 화려한 의자에 앉아 당당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옆에서 날아온 몽둥이가 마로의 얼굴을 강타했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마로의 머리 위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나직하게 속삭여왔다.

“이 비천한 녀석이 어디서 함부로 폐하를 바로 보는거냐?”

통증으로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에서도 마로는 생각했다.

‘폐하? 그럼 저 자가 황제란 말이야? 아니 황제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지?’

시암 제국의 황제는 한 달에 한 번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듣는다는 의미로 금청에 방문하여 직접 재판을 살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허울좋은 겉치레가 되어 사냥 가기 전 잠시 들렀다가 떠나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지만, 아직도 그 전통은 남아있었다.

마로는 핏물을 머금은 채로 다시 일으켜 세워 졌다. 방금 전 병사의 협박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로에게는 더 이상 고개를 들 기력이 없었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연단 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심문하던 관리의 목소리였다.

“마로 온지, 너는 아직도 제 12지구 샘터 관리관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부인하는가?”

마로는 고개를 떨군 상태였지만, 오히려 이를 악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저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마로 온지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사령은 증인을 대령하도록 하라.”

몽둥이에 맞은 통증이 아직도 턱에 남아있었지만, 증인이라는 말에는 마로도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증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마로는 고통마저 잠시 잊고 말았다.

어설프게 정장을 차려입은 도미는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더니 한쪽 구석에 머리를 조아리고 섰다. 관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바니아 도미라고 합니다.”

“너는 마로 온지를 아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한 때 저와 함께 일하던 자였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는가?”

“물을 대신 길어주고 돈을 받습니다.”

“저 자는 제 12지구 샘터 관리관에게 뇌물을 주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에 대해서 네가 아는 바가 있다면 소상하게 아뢰어라.”

도미는 이마의 땀을 훔치더니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셨다.

“네 사실 저 자는 지금은 저와 일하지 않습니다. 한 때 같이 일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사는 아이가 불쌍하기도 했고, 한 편으는 재주가 많고 영리해서 제가 먼저 같이 일하자고 했죠. 그런데, 갈수록 저 아이는 욕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저 배달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샘의 물을 떠서 사람들에게 팔자는 것이었습니다. 샘터는 황제 폐하께서 백성들에게 내리신 것인데, 이를 개인이 판다는 것은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함께 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워져서 저 아이를 우리 조합에서 내보냈습니다.”

지독한 거짓말에 너무 놀란 마로는 고함을 지르며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 건 말도 안되는…….”

순간 다시 몽둥이가 떨어졌다. 관자놀이를 맞은 마로는 구역질과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움츠렸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에서도 마로는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도미가 왜 나를 모함하지?’

“마로 온지,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입을 열면 지금의 혐의에 방해죄를 더할 것이다. 증인은 계속 이야기하라."

“…… 저 아이는 조합을 나간 뒤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물판매를 시작하였습니다. 주민들을 힘으로 협박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오신 샘터 관리관님께서 이런 범죄를 눈치채고 저 자의 일당 중 한 명을 잡아갔습니다. 그러자 저 자는 관리관님께 뇌물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가?”

“저 자는 뇌물을 마련할 돈을 나에게 꾸어갔습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판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제 12지구 관리관 에셜 로무는 대답하라. 지금 도미라는 자가 한 말이 맞는가?”

그 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아직까지도 콧잔등이 벌겋게 되어 있는 샘터 관리관이었다.

“예, 모두 맞습니다. 게다가 저 자는 잡으려는 저와 병사들에게 폭행하고 도망쳤습니다.”

“심사관 부디카 무쵸는 대답하라. 저 자의 물판매와 양민 폭행사실에 대한 증거가 있느냐?”

“네, 저는 제 12지구 주민 50명을 상대로 저자의 강제 물판매에 대한 증언을 수집해 왔습니다. 이미 조서의 말미에 첨부하여 놓았습니다.”

판관은 조서에 첨부된 주민의 증언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 호패의 번호와 증언이 함께 적혀 있었다. 증언을 대충 훑어 본 판관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허허, 실로 대담한 녀석이로구나! 황제 폐하가 백성에게 내린 시설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폐하의 대리인에게 감히 손찌검을 하다니! 하지만 저 자의 가장 큰 죄는 황제 폐하의 가장 신성한 권한 중에 하나인 사법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순순이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여 여러 백성에게 쏟아져야 할 행정력을 쓸데없이 낭비시켰을 뿐 아니라, 무엄하게도 황제 폐하를 기만하였다는 것이다.”

판관은 서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서기는 집행장을 작성하라! 죄인 마로 온지는 첫째로 황제 폐하를 기만하였으며, 둘째로 공공 시설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하였고, 셋째로는 황제의 대리인인 관리를 폭행하였으며, 넷째로 관리의 공무를 방해하였고, 다섯째로 양민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협박하였다.”

서기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이미 초안을 마련해 둔 문서에 빈 곳을 채워 넣었다. 평소 같으면 황제의 대리인인 판관의 손에서 마무리 짓겠지만, 오늘은 명색으로나마 황제가 직접 관장하는 재판인지라, 처리가 끝난 문서는 손을 타고 옮겨져 황제의 앞에 놓여졌다.

황제는 심드렁한 눈으로 슬쩍 문서를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는 이런 소소한 재판의 결과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귀찮은 의무따위는 빨리 끝내고 사리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싶을 뿐이었다.

황제의 승인을 얻은 판관은 집행장을 들고 외쳤다.

“죄인 마로 온지는 그 죄가 여럿이고, 죄질이 악독하며, 끝까지 개심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바, 본관은 황제가 내려주신 권한을 빌어 참수형을 내리도록 한다. 사령은 집행 날짜와 장소를 물색하도록 하라.”

판관은 집행장에 직접 형을 적어 넣은 뒤 도장을 힘껏 내리 눌렀다. 최종 판결을 들은 마로는 정신이 멍해졌다. 말을 하려 했지만, 턱이 떨려 더듬거릴 뿐이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뇌, 뇌물을 준 것은 사,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사, 사형을 당할 정도의 자,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 자, 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마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마, 말라르디 아저씨를 불러…….”

하지만 마로의 이야기는 병사들의 구타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마로가 흙먼지 속에서 얻어맞고 있는 동안 오늘의 일과 중 가장 귀찮은 시간을 마친 황제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재판장에서 나온 황제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금청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더운데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소?”

시원한 얼음차를 마시고 있던 사리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재판이 빨리 끝나지 않아서 말이오.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인 것을 무얼 하러 증거를 대고 증인을 세워야 하는 건지. 쯧쯧”

황제는 혀를 차다가 사리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만, 그대도 잠깐 12지구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대도 그 당시 물장수들에게 물을 강매당한 적이 있었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리사는 물장수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황제는 전에 없이 큰 관심을 보이는 사리사를 보며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아니, 오늘 재판이 말이야. 샘터의 물을 돈을 받고 팔다가 잡힌 녀석에 대한 것이지 뭐요. 그 녀석이 활동하던 곳이 12지구라기에 물어본 것이요.”

사리사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죄인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글쎄, 그런 것은 기억이 나질 않는군. 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해서 말이오. 그런데 웬일로 그대가 이렇듯 관심을 보이는 것이요? 원래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오?”

“아닙니다.”

‘설마 마로는 아니겠지. 그 아이는 이미 조합이란 곳도 그만두었잖아.’

사리사는 그쯤해서 입을 다물려고 하였으나 자꾸 마음이 불안하여 한 마디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죄인은 무슨 벌을 받게 됩니까?”

“원래는 그저 뇌물공여죄일 뿐이었는데, 자꾸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다보니 숨겨진 죄까지 밝혀지고, 황제를 기만한 죄까지 더해져서 참수형을 받더군. 어리석은 녀석이지.”

사리사는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제 역시 그녀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눈치챘다.

“아니, 어디가 불편하오? 이런. 숙녀 앞에서 내가 너무 끔찍한 말을 한 모양이군.”

“별 것 아닙니다. 그저 머리가 좀 어지러울 뿐입니다.”

“허허, 이래서야 사냥을 갈 수 있겠소? 황궁으로 돌아갑시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폐하께서 걱정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군. 아까부터 이런 흉한 재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나, 그 결과를 듣고 안색이 흐려지는 것이나, 평소와는 다른 듯 한데. 도대체 무슨 일이오?”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리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만?”

“다만, 제가 궁에 들어오기 전 잘 알고 지내던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바로 12지구에서 물배달을 하였습니다. 갑자기 물장수 중 한 명이 참수형을 당한다고 하니, 그 아이 생각이 나서 마음이 조금 불안해 진 모양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데?”

“평민으로 이름은 마로 온지라고 합니다.”

마로 온지라는 말을 듣자 황제도 재판 도중 얼핏 들었던 죄수의 이름이 떠올랐다. 동시에  마로 온지라는 죄수가 사리사와 비슷한 또래였다는 것도 떠올랐다. 황제는 사리사의 초조한 눈빛을 보자 다른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사리사를 살핀 후에야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허허,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내가 워낙에 재판 같은 것을 지루해 하는 터라 별로 집중하여 듣질 않았소. 그대의 안색을 보아하니 꽤 친한 사이였던 모앙이군.”

“네, 그렇습니다. 우리 집에서 세를 살았던 적도 있고, 제가 12지구에서 살 때는 여러 가지로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허허, 그렇게 불안하다면 한 번 죄수의 신원을 알아보려오?”

황제가 슬쩍 떠 본 말에 사리사는 여지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정말 제가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황제의 마음속에 일기 시작한 의혹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허허, 되고 말고. 그게 뭐 어려울 것이 있나? 여기가 바로 금청인데. 이봐라. 누가 본청으로 가서 오늘 아침 참수형을 받았던 죄수가 누구인지 알아오너라.”

“아아, 폐하께서 이런 조그마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황제가 어떤 선물을 하여도 사리사로부터 이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는 감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전에 없이 존경심과 호의로 반짝이는 사리사의 두 눈에서 황제는 흐뭇함과 질투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나저나 만에 하나 오늘 내가 보았던 죄수가 그대가 아는 그 아이라면 어쩔 것이오?”

사리사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아이가 큰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래도 되겠소? 지금 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대가 몸져누울 것 같은데. 허허허”

사리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그 때 심부름을 갔던 시종이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오늘 아침 재판을 받은 죄수의 이름은 마로 온지라고 합니다.”

사리사의 얼굴이 황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창백하게 변하였다.

“허허, 그 이가 맞는 모양이로군. 거참. 곤란하게 되었구려.”

황제는 사리사가 혹여 자신에게 죄수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을지 잠시 살펴 보았지만, 사리사는 고개만 떨어뜨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황제는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대놓고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사리사의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 앞에서 난폭하게 굴거나 유치한 질투심을 드러내기는 싫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그녀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었다. 호탕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황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죄수를 참수형만은 면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소. 물론 나야 그대를 위해 다른 죄도 덜어주고 싶지만,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일로 백성을 다스리는 기반을 어지럽힐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하지만 그나마 죄를 덜 수 있는 방법을 있을 것 같소. 그 죄수의 가장 큰 죄가 황제를 기만한 것이라, 본래의 죄에 더하여 그런 극형을 받게 된 것이니, 내가 황제를 기만한 죄만이라도 용서하게 된다면 처벌은 훨씬 가벼워 질 것이오.”

사리사는 놀라 크게 떠진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같은 것을 위해 폐하가 그런 욕됨을 견디시다니요?”

황제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런 황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리사는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워낙 미련하여 폐하의 넓은 도량과 인자함을 지금껏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제 불손함을 탓하여 벌하신다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거니와 설혹 용서하여 다시 곁에 두시겠다면 앞으로 모심에 부족함이 없도록 제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항상 무덤덤하던 사리사로부터 눈물어린 감사를 듣자 유쾌해졌다. 그것은 애정이라기보다 성취감이나 승리감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고마워 하니 내가 오히려 민망하구료. 그깟 조그만 모욕이 그대의 아름다운 웃음만 하겠소? 이제야, 그대의 안색이 좀 나아진 듯하군. 내 약속은 꼭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허허, 이렇게 옆에 증인들이 있지 않소. 아니, 나중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온 김에 내리도록 해야겠군. 아무래도 복잡하고 중요한 사안이니 내가 직접 글로 써서 전달해야겠지? 여봐라, 쓸 것을 가져오도록 하라.”

시종들이 뛰어나가 필기도구를 가져오자 황제는 판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쓰기를 마친 황제는 편지를 사리사에게 내밀며 말했다.

“한 번 보시오. 이 정도면 그 아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오. 본래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처벌정도야 어쩔 수 없겠지만 대수롭지는 않을 것이오.”

사리사는 감히 편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것까지 제가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만 이곳을 떠나도록 합시다. 여봐라 이 편지를 오늘 아침 재판을 맡았던 판관에게 전하도록 하라.”

황제는 시종을 불러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리사와 함께 출구를 향해 걷던 황제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오며 급하게 말했다.

“이런. 편지에 수결을 하지 않았군. 이봐라, 편지를 다시 가져 오너라.”

시종이 다시 편지를 가져오자 황제는 편지를 펼쳐 그 안에 무언가 적어 넣기 시작했다. 황제의 활달하고 빠른 필체는 수결을 적어 넣는 듯 보이는 그 짧은 순간에도 편지의 행간에 몇 마디를 더 첨부할 수 있었다. 다시 편지를 접어 봉투에 담은 황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리사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