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하늘이 열린 날이 있었다.
그 날 천인(天人) 시태상께서 하늘 뜻 받들어 세웠으므로 수밀은 대천명국(大天命國)이라 이른다.
유구히 크고 아름다운 이 나라의 도읍은 청류대간의 남향 ―사람의 경계로는 중앙 북방의 아사달이다. 이 땅의 옛 이름은 신시(神市), 오늘에 이르러 진경(眞京) 또는 옥경(玉京)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오천년을 이어 온 대천명국 수밀이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하늘의 나라임을 뜻한다.




―개천(開天) 5052年 계하(季夏).

여름 막바지의 투명한 햇살이 넘치도록 쏟아지는 날이었다. 근래에 들어 계속 그러했듯이 가을 다가오는 하늘은 높고도 푸르렀다. 그 새파란 하늘 덕분이다. 그러잖아도 성하 거리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진월루의 지붕들은 이날 말 그대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백자로 구워 얹은 기와 하나하나가 아슴푸레한 하늘 빛을 담아 흰구름인 듯 연푸른 안개인 듯 선계와도 같은 광경을 자아내었기 때문이다.

아사달의 성하거리에 처음 들어선 사람들은 누구나 인간세상의 것 같지 않은 이 한 무리의 건축물에 한번 놀라고, 곧이어 이 건물들이 제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이 운영하는 요정(料亭)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또 한번 크게 놀란다. 그러면 이 거리의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선녀님이 거하시는 낙원이라오. 참 아름답지 않소.

수밀의 시초부터 현재까지 지상에 거하시는 아름다운 백색의 선녀. ―그것은 하늘의 나라라 불리우는 수밀의 도읍 아사달 땅에서 사람들의 삶 곁에 닿아 남은 몇개의 전설 중 하나다. 여하튼 아사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술과 가장 고상한 음악을 파는 진월루의 주인은 분명 고아한 백의를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성하 거리에서 올려다 보이는 진월루 후원의 높은 누대에 그 흰 옷자락을 날리우며 나타나고 또한 홀연히 사라지기도 하는 모습이 세인의 눈에 자주 비치므로 그늬의 존재는 모르는 이가 없다. 객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흔치 않으나 어쩌다 인연 닿아 그 모습 가까이 접한 이들이 입으로 전하는 그늬의 용모는 그야말로 인간의 여인이 아니라 한다. 그 먼발치 모습과 소문이 입과 입을 거치며 그늬를 아사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사달의 옛 이름 신시에 걸맞는 선녀로 칭하게 되었는데 사람의 땅이라기에는 아직 신이(神異)가 많은 아사달에서 그 진위여부를 다투어 논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늬가 정말로 선녀인가 아니면 단순히 전설을 훔쳐 두른 작부인가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진월루는 선녀의 궁궐이라 칭하기에 하나 부족함 없이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특히나 밤이면 달빛으로 들뜨고 낮이면 하늘 빛을 담아 빛나는 화치한 백자기와 지붕들은 아사달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이 빼어나게 휘황찬란한 지붕들이 영 마뜩잖게만 보이는 사내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유난스럽단 말입니다.」

향초 무성한 물가에서 현원은 불만스러운 어투로 그렇게 내뱉었다. 팔다리를 대충 펼치고 바닥에 누운 채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눈 바로 위에 차양을 만들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쓸데없이 눈 부셔요.」

현원이 올려다보는 쪽에는 조금 떨어져서 나지막한 정자가 하나 물가에 닿아 있었다. 일견 수더분하고 단정해 보이는 형태로 지었지만 자세히 보면 붓꽃 문양으로 정교하게 투각 된 난간이 더없는 세련미의 극치를 보이는 정자였다. 사각으로 맞배를 지은 지붕은 이 진월루의 모든 건물이 그렇듯이 역시 순백의 백자기와다. 사실, 아무리 단순한 지붕을 얹었더라도 위를 덮은 것이 백자기 기와라면 그것만으로 이미 그 건물은 단순하다고 말하기에 어폐가 생겨버린다. 그저 사치라고 하기에도 지나친 호사였다. 그 안에 들어앉은 이 진월루의 여주인은 자신의 취향에 대한 반론에 굳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여상한 눈으로 난간 너머 피어오르는 수련을 감상하며 그저 한마디 말했을 뿐이다.

「뭐가 불만이더냐. ―꼬마야.」

현원은 대답 대신 괴이한 신음성만 흘렸다. 그는 원숙한 사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랐지만 여하튼 이태 전에 이미 나이 스물을 넘긴 당당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어른이 되고싶어했고 지금 스스로가 어른이라고 굳게 믿는 현원은 한참만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낭랑. 낭랑께서 이 풍진세상을 너무 오래 살아오신 나머지 이제 기억이 혼란하신 건 알겠는데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열 여섯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요?」

「―그래. 역시 아가라고 불러야 할까.」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그렇게 덧붙이는 여인은, 외양이 호호백발의 노파는 물론 아니었다. 대강 절반 쯤 그러모아 올린 머리타래가 밤하늘처럼 칠흑으로 검고 그 안에 초생달 모양의 백금 머리장식이 환하니 밝다. 그리하여 별칭이 은월낭랑(銀月娘娘). 그늬의 본디 이름을 아는 이는 아마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현원은 긴 한숨만 후우 몰아쉬었다.

「…계속 거기에 멈춰 계신 건 낭랑 홀로이시고, 저희는 계속 흘러만 간단 말입니다.」

중얼거림처럼 흘러나온 현원의 목소리를 들은 듯 만 듯 은월낭랑은 답이 없었다.
태양이 정오를 지나며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각이었다. 제 시간을 맞아 만개한 백수련이 수면을 온통 뒤덮고 향내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여름 끝자락의 햇살은 아직도 제법 따가웠다. 현원은 누운 채 두어 바퀴를 데굴데굴 굴러서 바로 옆의 버드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진월루 내정 어디에나 그렇듯 바닥은 향기로운 풀과 꽃이 가득했다. 현원은 그 안에 자리를 잡고는 대충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낭랑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현원이 눈은 감았으되 잠들지는 않은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네놈이 오늘따라 거스르는 소리를 자주 한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현원은 눈을 감은 채로 씨익 웃으며 바로 되받아쳤다.

「아가니까, 이렇게 가끔 이유도 없이 칭얼대는 겁니다.」

「얌전한 아기가 사랑받는 법이다.」

「저야 뭐 날때부터 후레자식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저놈의 되바라진 입을 어이할꼬.」

짐짓 혀를 차며 낭랑이 돌아보았을 때 현원은 어느 새 일어나 앉아서 낭랑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뭘 하나 갖다꽂아서 막으면 되지요. 이왕이면 젖병보다는 술병 쪽이 좋겠습니다!」

언제나 허리춤 즈음에 묶여있던 끈 달린 술병이 그 손에 있었다. 지금 가볍게 손가락을 걸어 돌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깨끗이 비운 모양이다. 은월낭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흘려버린 피 대신 술을 채우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 될 일. 그러나 그렇게 말했다가는 끝없는 한탄과 중얼거림을 들어야 할 것이므로 은월낭랑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곧이어 제법 애처로운 신음소리가 귓등에 와 닿았으므로 낭랑은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단 것 조르는 어린애와 다를 게 무어냐.」

「저는 단 것 따위 조르지 않으니까 확실히 애가 아니지요.」

곧장 대답은 하지만 논점에서는 분명히 어긋나 있다. 낭랑이 쯧쯧 혀를 차는데 아랑곳없이 현원은 말을 이었다.

「젠장! 날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하늘은 쨍한데 새는 울고 꽃은 피고 그늘은 선선한데다가 낮잠을 자려고 해도 졸리지도 않고! 그러니 이런 날은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지요. 솔직히 어제 제가 ‘우연히’ 넘어져서 칼맞은 건 별로 억울하지 않은데, 미친 칼이 이렇게나 널린 시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호연가주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야기에 맥락은 전혀 잡혀있지 않았다. 사실 듣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은월낭랑이니 앞뒤 없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낭랑은 모든 것을 알았다. 그것은 술사들 중 일부가 뒤엉킨 과거나 불안정한 미래 중 한 조각을 훔쳐보아 알게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전지(全知)였고 그 사실을 현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현원은 낭랑께 고하지 않았다. 어떤 연유로 칼부림을 만났고 어찌하여 몸을 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묻지도 않는다. 지난 밤 만난 미친 칼날이 무엇을 노린 것인가, 그 배후는 어떤 것이며 그가 지금 화를 내야하는 상대는 정확히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안주해야만 온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것들은 누구나 불나방인 양 무작정 그 선을 넘으려 드는 법이다. 그러나 현원은 은월낭랑을 ‘아는’ 인간이면서도 전지에 대한 욕심은 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제법 기특한 면이 있는 인간의 아이였다. 지금 중얼거리는 것도 지난 밤부터 누르고 덮어 온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것일 뿐 답을 구하기 위해 묻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낭랑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결국 한세상 살아가려면 술이라는 부분에서는 한마디 할 수 밖에 없었으나.  

「풍류를 잃은 술은 그저 독이지. 홧김에 들이부으라고 술이 있는게 아니다.」

낭랑의 말에 현원은 즉시 입을 닫았으나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고는 도로 털썩 누워버린다.

「그냥……, 좀… 심심해서 이러지요오……」

금방 뱉어놓은 말들 속에 담겼던 울화와 달리 목소리가 늘어지고 있었다. 현원은 다시 뒹굴뒹굴 굴러서 물가로 다가가 자그맣게 피어난 풀꽃을 툭툭 건드리거나 가끔 연잎을 밀치며 수면으로 오르는 잉어를 바라보거나 했다. 황금같은 하오의 시간은 그야말로 느릿하니 흐르고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될 즈음 현원은 한번만 더 졸라볼까 말까 생각하면서 은월낭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을때의 낭랑은 마치 세상 속에서 홀로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현원은 은월낭랑이 세상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낭랑의 실체가 결코 없지 않으며 바로 <이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이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냥 그러한 것이었다.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듯이 낭랑의 몇 가닥 빠져나온 귀밑머리와 길게 끌리는 옷자락이 미세하게 흔들리고만 있었다.
현원이 뭐라고 다시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낭랑이었다.

「그리도 마뜩잖으면, 당장 가서 그 호연가주놈을 베어버리지 않고.」

여상한 목소리였지만 세상사에 대한 은월낭랑의 평소 태도에 빗대었을 때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그 때문에 잠시 놀란 눈으로 낭랑을 보던 현원은 곧 그늬 얼굴에 떠오른 표정의 의미를 깨닫고 말았다.

「에에― 그런 식으로 저 사는 데 훈수 두기입니까. 구름 위에 두둥실 한 선녀시면서 격에 안 맞게……」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현원은 낭랑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은월낭랑이 참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있는 것 쯤은 마주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뒷통수가 다 뜨끔한 느낌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아도 그게 병신같은 생각이라는 건 제가 제일 잘 안단 말입니다. 호연가주를 쓱싹 해봤자 파사한 쪽만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겠지요. 솔직히― 파사한주까지 베어버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렇다고 제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더 시험해 보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죄다 쓸데없는 노릇이고…… 저는 좋은 술 먹고 낮잠 즐기면서 강산이 변하는 걸 열 번은 더 볼 때까지 잘 살 거니까.」

그렇게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고 현원은 눈 앞의 나무 둥치에 시선을 박은 채 고뇌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은월낭랑은 현원더러 어찌 말은 그렇게 잘 하면서 분란이라는 분란에는 굳이 다 끼어들어 피를 보고 다니는 것이냐고 딱 집어 지분거리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낭랑의 기척에 현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 속 그런 식으로 들여다보시는 거 아닙니다. 무심하신 낭랑과는 달리 인간이란게 참 나약해서…… 부끄러워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은월낭랑은 옥구슬 소리로 웃었다.

「네놈은 참 재미있는 녀석이다.」

웃음 끝에 툭 던지듯 하는 그 말은 현원을 알고부터 낭랑의 입버릇이었다. 딱히 무어라 대답할 이유도 없고 하여 그대로 나무둥치에 시선을 떨구고 있던 현원은 잠시 후 세상의 경계가 이지러지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낭랑 쪽을 돌아보았다.

낭랑은 난간에 걸쳐두었던 한 팔을 들어 못 안의 수련 꽃송이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부지도 언령도 없었으나 경계가 열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고 그것은 은월낭랑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진월루 내원에서 뒹굴며 보내는 현원에게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었으나 그도 술사인 관계로 아무런 기척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마다 어쩔 수 없이 움칠 놀라곤 한다. 잠시 한숨을 내쉰 후 현원은 그 흔치않은 광경을 감상했다.  

수련이 가득 피어난 수면 위에 푸르스름한 안개같은 것이 잠깐 뭉치더니 은린같은 빛무리를 뿌리며 어린 계집아이로 화한다. 그 모습은 대낮의 선명한 햇살 속에서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는 풀어내린 진초록빛 머리칼에 한송이 커다란 수련꽃을 얹고 흰 치마저고리와 물색 덧옷을 입고 있었다. 짙푸른 바탕에 물결이 수놓아진 비단신으로 사뿐히 수면을 밟아 낭랑 앞에 선 아이는 생긋이 웃으며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인사를 올린다.  
거기에 휘파람을 불어대려다가 실패해서 이상한 바람소리만 내놓은 현원은 늘 그렇듯이 머쓱한 것을 무마하고자 떠들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참 괴팍한 취미이십니다. 대체 뿌리박은 걸 굳이 일으켜서 심부름을 보내는 건 뭐랍니까. 팔다리 움직이는게 그렇게 싫으시면 차라리 호호백발에 노파 얼굴을 하고 계시던가요. 그러시는 모습을 볼 때 마다 할일이 없는 나머지 별 하찮은 일에도 시종들을 부리는 게 자기 존재감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명가댁 어린 아가씨 같아서 보기 민망하단 말입니다.」

낭랑은 현원의 말은 무시한 채 아이에게 나직하게 무어라 말 하고 손을 들어 진월루 본관 쪽을 가리켰다. 아이는 다시 나붓이 목례를 하고 사뿐사뿐 걸어나갔다.

「―하여간 낭랑같은 선인(仙人)이 성하거리 술집 주인이나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아직도 아사달은 신시(神市)라고 하는 거지요.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인데 무슨 책임감 같은 거 안 느끼십니까?」

「그러는 네놈같은 녀석이 술사라고 하니 다들 수밀 땅에는 술사가 구르고 채이는 줄로 아는게다.」

받아치는 낭랑의 말에 현원은 그냥 빙그레 웃어버렸다. 낭랑이 다음 말을 꺼내기 직전 까지는 말이다.

「그나저나 네 휘파람은 늘지를 않는구나.」

「으으음-!」

대단히 어른스럽지 못하다. 좀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되는 것이었나. 하고 현원은 악을 썼고, 그러기에는 네놈 혓바닥이 정도 이상으로 고약하지 않았더냐. 하고 낭랑이 응수했다. 티격태격 말이 오가지만 결국 지고 또 져서 앓는 소리는 내는 쪽은 항상 현원이다.  

「도무지 이길 수가 없어요! 비결이 대체 뭡니까?」

「연륜이니라.」

「그래서 어린 놈 깔아뭉개면 재미있습니까.」

「그마저 없다면 내가 너를 거두었겠느냐.」

「끄으으으으음― 」

수련꽃 시동이 돌아온 것이 그 즈음이었다. 아이가 사뿐사뿐 걸어 연잎에 받쳐 든 서신을 낭랑께 받들어 올렸을 때 낭랑은 고개를 저으며 현원을 가리켰다. 아이는 조금 갸웃 하더니 현원을 한 번 돌아보고는 서신을 한 손에 옮겨들었다. (그때 연잎쟁반 같은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던졌다.

「어, 어이―!」

단순히 두세번 접힌 종이조각이던 서신이 큼지막한 꽃송이로 변하여 사뿐 떠올랐다가 팔랑팔랑 떨어지는 모양은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게 시커먼 남자 머리 위에 내려앉으면 꽤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낭랑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긴 했지만 아주 대놓고 웃었고 현원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수련꽃 시동은 까르르 웃으며 연못을 향해 구르듯이 달렸다. 수면에 닿자마자 치맛자락부터 스르르 안개처럼 녹아들어가고 다시 수련 한 떨기가 되어버렸는데 거기다가 뭐라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굉장히 억울한 표정으로 낭랑을 돌아보는 현원의 머리에서 툭 떨어져 구른 꽃송이가 원래의 서신으로 변하여 좌악 펼쳐졌다.

<와라. 안 오면 찾으러 간다.>

앞 뒤 죄다 잘라먹고 딱 한 줄. 질 좋은 비단지 위에 적힌 문장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굵직하고 힘 있게 눌러 쓴 글씨만은 일품이다. 현원은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진주빛이 감도는 종이 가운데에는 가는 끈매듭으로 엮인 패수장식 하나가 문진처럼 놓였는데 엄지손톱 두개 정도 크기의 작은 청석 패에 구름과 바위, 호랑이가 정교하게 투각되어 있었다. 글씨만 봐도 누군지는 뻔히 아는데 굳이 그것을 동봉한 이유는 통행증으로 쓰라는 뜻일게다.
  잠시 찡그린 얼굴로 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현원은 탁 소리나게 종이를 접어 밀치고는 멍하니 누워서 한참동안이나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무시해봤자 옆에 놓인 서신이 사라질 리는 없다. 현원은 결국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잡으러 오기 전에 가보는 게 낫겠지요?」

「부르지 않아도 신나서 뛰어가던 녀석이 오늘은 어인 일인고.」

「심심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죽고싶지는 않으니까요.」

「대장군이 너를 죽인다더냐.」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 것도 농담이랍시고 현원은 해사하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은월낭랑이 그 순간 전혀 웃지 않았다는 것을 현원은 알지 못했다. 한참동안 투덜거리던 그는 결국 일어나 앉았고 머리와 어깨에 붙은 풀잎들을 대강 털어내고는 허리춤 뒤에 꽂아놓았던 막대 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형태로 보아 목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물건이었으나 길이는 한자 반에서 두자 사이로 보통 장검보다 짤막하다. 표면은 옻칠이라도 한 것처럼 검은 광택이 돌았고 아마도 원래는 흠 하나 없이 매끈했을 것이다.
현원은 우울한 얼굴로 여기저기 심하게 흠집 난 목검의 검신을 쓰다듬었다.

「이거 더 버텨주려나……」

날 폭의 거의 삼분지 일 가량까지 패인 칼자국은 지난 밤 격렬했던 싸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애석해하는 현원에게 은월낭랑이 쯧쯧 혀를 찼다.

「네놈은 몸뚱이보다 그게 더 중하더냐.」

「물론이지요. 제 뱃가죽이야 시간 지나면 알아서 붙겠지만 이건 고쳐야 되잖습니까.」

「……얼빠진 녀석.」

현원은 낭랑께서 뭐라고 하건 아랑곳없이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목검을 다시 허리춤 뒤에 꽂고 옷자락을 털고 서신을 그대로 구겨서 청석패수와 함께 품에 챙겨넣었다. 옆의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던 넉넉한 검은색 장포까지 걸치고 돌아서는 그에게 낭랑이 말했다.

「가느냐.」

「예에- 다녀오겠습니다.」

「대장군에게 위험한 병정놀이는 적당히 하라고 전하거라.」

「아마 평소처럼 그냥 대련 요청일건데요.」

「그저 네가 칼받이가 되는 것이겠지.」

「아하하― 뭐 그렇긴 하지만, 오늘도 살아돌아오겠습니다!」

한참을 갈까 말까 망설일 정도의 부상이 있는 주제에 그리 시원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낭랑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예 있는게 어떠하냐. 대장군에게 답신은 전해주마.」

「어라? 여기 계신 마음씨 고우신 누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아무래도 제가 알던 은월낭랑은 아니신데……아하하.」

「딴청 부리지 말거라. 성치도 않은 녀석이 어딜 가서 널부러져 폐를 끼치려고.」

「와아아― 낭랑! 지금 그게 바로 노파심이란 겁니다. 나이 먹으면 원래 자잘한 걱정이 는다지요. 낭랑께서는 연세도 있으시니만큼 이제는 그런 걸 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고―」

현원은 염려하는 말을 죄 농담으로 만들고 말 기세였다. 은월낭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고 그 모습에 잠시 입을 닫았던 현원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먼산을 보고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가서 물어 볼 것도 있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적당히 조금 맞아주고 아파죽겠다고 엄살떨어서 술 얻어먹을 작정입니다. 어차피 여기서 계속 뒹굴어봤자 낭랑께서 술 더 주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현원은 낭랑이 무어라 하기 전에 도망치듯이 달려나갔다. 문이 있는 방향 따위는 아랑곳없이 담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는 그 뒷모습을 보고 낭랑은 오늘 하루에 몇 번 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마뜩찮은 녀석이었다. 꽃담 근처의 향초 무더기 즈음에서 발이 묶여 고꾸라지도록 해 볼까 하고 잠시 생각하던 낭랑은 곧 그만두었다.

―제 발로 걸어가겠다는데 내 어찌 하겠느냐.

은월낭랑은 옛 기억 속의 누군가를 향하여 중얼거렸다. 그 사이 현원은 가볍게 담을 넘어 성하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손 닿을 필요 없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