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8
1.棟梁(3)
나라의 본디 이름은 화서(華胥)였다. 그리고 저 천명국의 한님께서 새로이 내리신 이름은 서(瑞)라 한다. 옛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상서로이 빛나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도록 서의 궁궐은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다 한다.
<아름다운가…, 차라리 사치하다 이르는 것이 옳을 게다.>
세밀한 조각이 들어간 옥돌 바닥을 딛으며 태경은 그리 생각하였다.
금박 입힌 기둥이 늘어선 회랑을 홀로 걸으면 그는 언제나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하였다.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이었다. 순백의 값진 돌로 깎아 세운 난간이며 벽감을 따라 금은으로 아로새긴 문양에까지 시선이 닿을 제면 마음속 어딘가로부터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밀려오는 것이다. 하여,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시 멈추어 서곤 하는데 그리하면 발 디딘 궁이 흔들리는 것인지, 그 자신이 흔들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조차도 이제는 아득하였다.
만조백관이 부복한 가운데 일곱 문양 아로새긴 옷자락을 떨치며 선 날이 있었다. 흰 돌바닥 반듯한 대궐 정전 앞에서였다. 화사한 봄볕 떨어지던 날이라 기억하는데, 그날 내려 받아 지니게 된 것으로 죽책문(竹冊文)과 교명문(敎命文)과 세자인(世子印)의 세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아마도- 그날부터였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부왕께서 내려주지도 아니한 것인데 이 현기증까지도 받아 품어온 것은.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이 어지러움은 종종 태경을 송두리째 흔들고는 하였다. 그때마다 <이 내가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하고 수없이 속으로 되뇌이곤 하는데도 그것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어디까지 기울어 가는 것일까.
궁의 누각을 두른 백옥도 백성의 물들이지 못한 거친 옷감도 말로는 똑같이 희다 이르는 것인데 그 흰빛은 같지가 않다. 궁의 기둥을 칠한 금박도 가난한 백성의 짚더미 인 지붕도 말로는 똑같이 누르다 이르는 것인데 그 누른빛 역시 같지가 않다. 그렇게 오늘도 궁궐에서는 백옥 두르고 금박 입힌 화치한 누대가 올라가는데 그는 이 나라의 세자였다.
그것이 분하다 외치려는 태경을 늙은 신하가 만류하였다. 지금에 주상의 심기를 거슬러 어찌하려 하시느냐고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일러왔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기에 태경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왕은 더 이상 전처럼 영명하지 않았고 그는 이 나라의 불안한 세자였고 그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들려온 목소리에 태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현 표한경. 조금 차가우나 영민한 눈매를 한 소년으로 그의 배다른 아우 되는 이다.
「-아무것도.」
하며, 태경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표한경은 처음부터 답을 바라고 물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없이 태경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고 함께 걸어 동궁으로 향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태경이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표한경은 미리 말이 없어도 으레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서로 말한 적이 없건만 어느덧 그것은 정해진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정전에서 동궁까지 길다면 긴 거리를 그렇게 언제나 함께 걸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하였다. 둘 다 말수가 많지 않았으나 서로가 어느만큼 의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부역에 관한 상소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표한경이었다.
그는 아직 열 여섯으로 어린 나이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만큼 영리하였다. 태경은 씁쓸한 얼굴로 짧게 답했다.
「-기각되었다.」
그 말에 잠시 입을 닫았던 표한경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되었습니다.」
태경이 얼마만큼 착찹한 심정일지 알고 있건만 표한경으로서는 그 말이 최선이었다. 둘 사이에는 또다시 익숙한 침묵이 돌았다. 태경의 입가에서는 자조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우의 말은 옳지 않았으나 옳은 것이었다.
세자는 왕이 아니다.
-그렇게 태경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지껏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실을 그의 어린 아우는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잘 하시었다고….
왕이 윤허한 것을 세자가 소리 높여 반대할 수는 없다. 그리 하였다가는 단번에 벌떼처럼 일어난 삼사 관료의 탄핵이 뒤따를 것이다. 현 왕비의 세력이 득세한 지금의 조정에서 태경을 비호해 줄 수 있는 세력은 아주 미약하여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기에 태경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은 노쇠한 왕을 대신하도록 전권을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함정일 따름이다.
대리청정 중이라 작은 왕과 같은 세자라 하여도 왕과 중신들의 비호가 없으면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그들은 태경이 언제까지나 허수아비 노릇만 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정의와 혈기로 떨쳐 일어나 <이 조정은 잘못되었다.> 하고 외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릴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음험한 기대와는 달리 태경은 이 상황을 아주 직시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 지리한 대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태경의 생기를 빼앗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아야 한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곧은 성품에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태경은 그리해야만 했다. 그가 사라진 연후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질 나라를 생각한다면 지금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다만, 형님께서 옥좌에 오르실 때 까지 과연 이 나라가 버틸지를 모르겠습니다.」
마음 속을 들여다 본 것만 같은 아우의 말에 태경은 흠칫하였다. 그 말 끝에 표한경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 끓어오르는 속을 가진 것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는가. 하며 태경은 다만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태경보다 훨씬 입지가 약한, 그러나 그 마음만은 더 뜨거울지 모르는 이 영리한 아이의 마음 속에 쌓인 더께가 얼마나 될 것인가. -태경은 그것에 늘 마음이 쓰였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가 이미 알기로 표한경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으므로.
둘은 말없이 걸었다. 표한경이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은 꺼낸 것은 길지도 짧지도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예후가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입니다.」
「-그래.」
태경은 속으로 <결국 하려는 말이 그것이었느냐-.> 하고 한숨을 뱉었으나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짧게 답하였다. 그러나 표한경은 녹록치 않았다.
「헤아리고 계셨습니까.」
「……그래.」
조금 머뭇거리며 태경은 답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일이었다.
「예후는 군사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표한경은 단정적으로 말을 맺었다.
예후라면 비원의 화치한 누대를 올리는 데 부역할 군사 따위를 내어 줄 리가 없다. 하여, 태경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리 단정짓는 말을 듣는 것은 속이 쓰렸다.
전 예후가 세상을 떴다. 그 아들인 유진성은 새로운 예후로 주상의 인준을 받기 위하여 정주로 왔었는데 그것이 이십여일 전의 일이다. 시기는 막 한여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곧 가을이고 추수철이 될 것이라 부역하는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새로이 예후 될 이에게 하명한 바, 충정을 보이면 인준을 내릴 터이니 부역할 병사를 내어놓아라 일렀던 왕은 실로 어리석었다.
「내란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표한경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태경은 아직 믿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진성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헛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도 태경은 그렇게 말하였고 그 자신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다고 스스로 느꼈다.표한경은 태경의 그런 쓰린 속내를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아직 어렸으므로 부러 반론하지 않을 정도로 속이 깊지는 못 하였다.
「사람을 믿으십니까.」
자신보다 냉정한 아우의 말에 태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성이 어떤 성품인지 태경은 잘 알고 있었다. 주후의 후계자는 어린 시절 일정 기간동안 정주에 머무르는데 그 시간동안 그와 진성은 뜻이 맞아 마치 친형제처럼 정을 쌓은 사이였다. 표한경 역시 주로 태경 곁에 머물러 왔으므로 진성과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한데도 쉽게 믿지 말라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태경이 생각하기에 진성은 그런 표한경과 꼭 닮아 있었다. 올곧고 냉정하며 놀라울 정도로 사리에 밝은 이였다. 그 가슴은 뜨거우나 그것으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할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이 변하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날 하명받은 진성이 그길로 돌아갔었다 하면 그도 어쩌면 냉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예주로 돌아가기 전에 진성은 태경을 찾아왔었다.
보기에 민망할 지경으로 사치하여 꾸민 접견실에서였다. 태경은 스스로 진성을 바로 볼 낯이 없다 여겼다. 사람을 모두 물리고 진정 오랜만에 둘만이 마주하였는데도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로 진성은 입을 열었는데-,
<-현태경. 이것은 너의 나라인가.>
하고 물어왔으나 그 어조는 질문도 아니었고 질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극히 담담하게,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듯 하는 말이었으며 그 눈은 원망도 격동도 담지 않아 고요하였다. 그 모든 것이 지극히 그가 아는 진성다웠다. 그러했기에, 그 자신만이 몸을 보전키 위해 변해버렸다 생각한 태경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성은 여전히 고요하고 냉정하며 충을 알고 의를 아는 이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이번에 그가 선택할 길이 무엇일는지 태경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부역할 군사를 끝내 보내오지 아니한다면 정주의 조정은 틀림없이 그를 규탄할 것인데 태경에게는 오랜 친우를 비호해 줄 힘이 없다. 총명하며 냉정한 아우는 지금 반란을 맞을 준비를 하라 이른다.
예주후 유진성이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이건만 예주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보름 하고도 이레다. 그날 정주를 떠나온지가……
진성은 새삼스럽게 그런 사실을 떠올리고 미간을 조금 지푸렸다. 하늘 때문일 것이다. 문득 올려다 보았을 제 하늘은 경계(境界)도 없이 그저 무연히 푸르렀으나, 인간이 정하였기로 분명 수밀의 하늘이었으니.
늙은 왕이 명하옵신 바와는 정 반대의 진군. 혹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과도 정 반대인 진군.
그리고…, 나의 왕 역시 결코 바라지 않을.
절대로 밟아서는 아니 될 땅. 침범해서는 아니 될 천명국의 하늘.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쓴웃음을 짓던 진성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어깨에 지고서도 가야만 하는 길.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 결론은 쓸쓸하였으되 허무하지는 않았다. 마음 추스르는 일은 이미 익숙하였으므로 그는 곧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히 웃음 띤 얼굴을 하였다.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구석 피 묻고 불에 그을렸던 성내는 이제 정리되고 있었다. 백열하는 해가 막 천정에 걸리었다가 서방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공격을 시작한 것은 새벽, 동녘이 밝아 올 무렵이었다.
작전이랄 것도 없이 단순한 방진을 세운 예주의 군대는 곧바로 정안현 외성의 성문으로 향하였다. 돌격 명령이 아니었기에 진군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삼천명분의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고도 정연하였다. 정안성은 미명에 잠긴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고요한 새벽이었다.
성문으로 다가서는 군열 선두에는 단을 높이 쌓아올린 병차들이 앞섰다. 병차의 희고 푸른 휘장이 새벽 어스름 속에서 바람으로 녹아들었다. 회청색을 띤 바람은 병차(兵車)위에 선 자들의 소맷자락을 세차게 뒤흔들며 지나갔다. 그러나 휘청이는 것은 옷자락 뿐 그들의 자세는 의연하였다.
대기가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마주한 성가퀴에 최초의 붉은 빛이 어리고 그것이 순간 더 짙은 음영을 불러 드리웠을 때, 지효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마지막 하늘을 받드는 자의 몸짓으로.
동작이 달리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 순간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기엔 충분하였다.
떠오른 흰 소매가 바람결에 고요히 부풀어올랐다. 동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출 속에서 그것은 금적색으로 펼쳐지는 날개인 양 하였다.
진성은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맡겨진 삼천여의 목숨들을 보았다. 또한 나아가야 할 길을 응시하였다. 진격의 때를 재어야 할 시간이었다.
새 하늘을 볼 수 있었으므로 마침내 낡은 하늘을 부수려 했던 그들 ―시율허의 술사들이 온 힘을 다하여 길을 열고 있었다.
태초의 이름은 가장 높이 치솟아 흔들리는 땅이며 굳어 부서지는 대기, 희고 붉게 타오르는 물이며 또한 칠흑빛으로 녹아 가라앉곤 하는 불이다.
―혹은, 혼돈이라 한다.
그것은 기원과 의지와 대가에 의하여 시간을 거스르고 세상으로 불러올려지곤 하였다. 강력히, 때로 파괴적으로. 시율허의 정명한 혈족, 시원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이어 온 술사 지효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환영같은 태초가 그 눈앞에 흔들리고 있었다.
금세의 모든 법칙이 어긋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창천이 불꽃을 빚어내는 것 또한 순간이었다.
가열찬 파괴가 날짐승의 모습을 입고 있었다. 그 눈은 백열부터 암흑까지의 모든 빛을 담아 더는 빛나지도 않는 혼란스러운 금색이었다. 온통 타오르는 깃털이 푸르고 붉고 희고 또한 검었다. 태초의 법칙이 낳아 허공으로부터 떨어진 불의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나붓이, 파괴의 날개가 성문을 덮었다. 차고 푸르른 새벽은 그 자리에서 비명도 없이 소멸하고 있었다.
그예 성문이 화염에 휩싸였고 이어 눈 녹듯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현성 내에서도 이변을 깨달았는지 몇몇 사람 그림자가 성가퀴를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반 수 이상을 그대로 거조(巨鳥)가 남긴 불길이 삼켜버렸다. 발이 느린 죄로 조금 늦었던 몇몇은 생경한 광경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 일어난 때 아닌 눈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그것이 앞서 달리던 자들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숯덩이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흩어진 흰 잿가루가 남은 열풍에 실려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성문을 삼키고 사람을 삼킨 불은 흐르듯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남은 것은 열기 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남은 자들은 앞다투어 성내로 도망했다. 그들을 탓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열린 길을 따라 예주군은 거침없이 수밀의 성토를 밟았고 그러므로 최초로 창칼이 부딪힌 곳은 이미 정안현의 성곽 안이었다. 뒤늦게 달려 나온 현성 수비병들은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로 썩은 짚더미처럼 쓰러져 갔다.
시율허의 술사들이 정명한 마지막 천족(天族)의 이름으로 하늘의 군사를 불렀으므로 그때 그 전장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날개달린 것들이 모조리 모여든 듯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였다. 깃 달린 나래들이 수없이 바람을 갈랐다. 날짐승들은 크고 강인했으며 그 부리와 발톱이 창칼처럼 날카로웠다. 화살과 칼날 대신 수많은 부리와 발톱이 사람의 목줄기를 찢고 눈알을 파내었다. 피 흘린 이는 비단 쇠붙이를 쥔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앞서 한 시율허의 술사가 말한 바 있었다. 거짓 하늘의 산 것을 모두 죽여 없애리라고.
한없이 피가 흘렀다. 하늘이 날개달린 짐승들로 완전히 뒤덮였기로 해가 떠올라도 밝지 않았다. 한님의 땅 변두리의 백성들은 그날 멸망을 보고 있었다.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자들에게도 몸을 돌려 도망하는 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짐승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유혈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예주후 진성의 군사들에게 그 싸움은 전투라기보다는 단순한 진군에 가까웠다. 수밀의 모든 성도가 그러하듯이 정안현성에도 남문으로부터 중심까지 똑바로 뚫린 대로가 있었고 예주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갈 뿐이었다. 시가전에 으레 뒤따르는 혼란 따위는 생기지도 않았다. 몸을 지키기 위하여 쇠붙이를 휘두를 필요조차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날짐승의 분노가 그들에게는 철벽의 방패였으며 그로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경이로운 시선들이 선두에 선 일단의 사람들에게로 향하였다.
희고 푸른 장막의 병차 위에서 그들은 더 높은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의 긴 옷자락들이 바람을 받아 날개처럼 퍼덕거렸다. 그들이 소맷자락을 한번 떨칠 때마다 수십의 부지(符紙) 조각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곧 모양을 바꾸어 벼락이 되거나 맹금이 되었고 어김없이 그들 적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맹금의 날개가 크고도 당당하였다. 청백의 날카로운 빛은 시리도록 맑았다. 반복되는 기적 속에서는 살육의 참혹마저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주의 병사들은 진정 하늘의 수호가 그들의 머리위에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진군 중의 저항은 허무할 정도로 미약했고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십여명의 술사들과 함께 수천의 날짐승을 앞세우고 삼천의 예주군은 다만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침내 대로가 끝나고 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마지막 저항을 마주하였다. 선두에 선 자는 푸른 전포를 갖추어 입고 말에 오른 정안현승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그는 감히 천명국을 짓밟은 반도들을 준엄히 꾸짖었다. 그러나 뒤에 선 백여명 남짓의 병사들은 반 수 이상이 이미 피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최초의 돌격이 이루어졌다.
진격 명령을 내린 진성은 부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직접 앞으로 나섰다. 용맹히 돌격해 온 정안현승은 기백만은 가상하였으나 처음부터 칼에 익숙한 자가 아니었다. 그 목을 떨구는 데에는 일각의 지체도 필요하지 않았다. 승패는 이미 결정지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현승의 목이 떨어져 굴렀을 때 천명국 정안현의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물어도 답할 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등을 돌려 도망하려 하였다. 뒤따르는 삼천의 날붙이가 그들의 등을 휩쓸었다. 모든 참혹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진격의 명령을 두 번 내리기 전에 마지막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낙성은 오전 중의 일이었다.
나라의 본디 이름은 화서(華胥)였다. 그리고 저 천명국의 한님께서 새로이 내리신 이름은 서(瑞)라 한다. 옛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상서로이 빛나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도록 서의 궁궐은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다 한다.
<아름다운가…, 차라리 사치하다 이르는 것이 옳을 게다.>
세밀한 조각이 들어간 옥돌 바닥을 딛으며 태경은 그리 생각하였다.
금박 입힌 기둥이 늘어선 회랑을 홀로 걸으면 그는 언제나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하였다.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이었다. 순백의 값진 돌로 깎아 세운 난간이며 벽감을 따라 금은으로 아로새긴 문양에까지 시선이 닿을 제면 마음속 어딘가로부터는 혼란스러운 기분이 밀려오는 것이다. 하여,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시 멈추어 서곤 하는데 그리하면 발 디딘 궁이 흔들리는 것인지, 그 자신이 흔들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조차도 이제는 아득하였다.
만조백관이 부복한 가운데 일곱 문양 아로새긴 옷자락을 떨치며 선 날이 있었다. 흰 돌바닥 반듯한 대궐 정전 앞에서였다. 화사한 봄볕 떨어지던 날이라 기억하는데, 그날 내려 받아 지니게 된 것으로 죽책문(竹冊文)과 교명문(敎命文)과 세자인(世子印)의 세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아마도- 그날부터였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부왕께서 내려주지도 아니한 것인데 이 현기증까지도 받아 품어온 것은.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이 어지러움은 종종 태경을 송두리째 흔들고는 하였다. 그때마다 <이 내가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하고 수없이 속으로 되뇌이곤 하는데도 그것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어디까지 기울어 가는 것일까.
궁의 누각을 두른 백옥도 백성의 물들이지 못한 거친 옷감도 말로는 똑같이 희다 이르는 것인데 그 흰빛은 같지가 않다. 궁의 기둥을 칠한 금박도 가난한 백성의 짚더미 인 지붕도 말로는 똑같이 누르다 이르는 것인데 그 누른빛 역시 같지가 않다. 그렇게 오늘도 궁궐에서는 백옥 두르고 금박 입힌 화치한 누대가 올라가는데 그는 이 나라의 세자였다.
그것이 분하다 외치려는 태경을 늙은 신하가 만류하였다. 지금에 주상의 심기를 거슬러 어찌하려 하시느냐고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일러왔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진심 어린 염려가 담겨 있었기에 태경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왕은 더 이상 전처럼 영명하지 않았고 그는 이 나라의 불안한 세자였고 그것은 그러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들려온 목소리에 태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현 표한경. 조금 차가우나 영민한 눈매를 한 소년으로 그의 배다른 아우 되는 이다.
「-아무것도.」
하며, 태경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표한경은 처음부터 답을 바라고 물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말없이 태경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고 함께 걸어 동궁으로 향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태경이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표한경은 미리 말이 없어도 으레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서로 말한 적이 없건만 어느덧 그것은 정해진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정전에서 동궁까지 길다면 긴 거리를 그렇게 언제나 함께 걸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거나 하였다. 둘 다 말수가 많지 않았으나 서로가 어느만큼 의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부역에 관한 상소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표한경이었다.
그는 아직 열 여섯으로 어린 나이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만큼 영리하였다. 태경은 씁쓸한 얼굴로 짧게 답했다.
「-기각되었다.」
그 말에 잠시 입을 닫았던 표한경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되었습니다.」
태경이 얼마만큼 착찹한 심정일지 알고 있건만 표한경으로서는 그 말이 최선이었다. 둘 사이에는 또다시 익숙한 침묵이 돌았다. 태경의 입가에서는 자조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우의 말은 옳지 않았으나 옳은 것이었다.
세자는 왕이 아니다.
-그렇게 태경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지껏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실을 그의 어린 아우는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잘 하시었다고….
왕이 윤허한 것을 세자가 소리 높여 반대할 수는 없다. 그리 하였다가는 단번에 벌떼처럼 일어난 삼사 관료의 탄핵이 뒤따를 것이다. 현 왕비의 세력이 득세한 지금의 조정에서 태경을 비호해 줄 수 있는 세력은 아주 미약하여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기에 태경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은 노쇠한 왕을 대신하도록 전권을 맡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함정일 따름이다.
대리청정 중이라 작은 왕과 같은 세자라 하여도 왕과 중신들의 비호가 없으면 허수아비가 될 뿐이다. 그들은 태경이 언제까지나 허수아비 노릇만 하고 있을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정의와 혈기로 떨쳐 일어나 <이 조정은 잘못되었다.> 하고 외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릴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음험한 기대와는 달리 태경은 이 상황을 아주 직시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 지리한 대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태경의 생기를 빼앗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아야 한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곧은 성품에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태경은 그리해야만 했다. 그가 사라진 연후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질 나라를 생각한다면 지금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다만, 형님께서 옥좌에 오르실 때 까지 과연 이 나라가 버틸지를 모르겠습니다.」
마음 속을 들여다 본 것만 같은 아우의 말에 태경은 흠칫하였다. 그 말 끝에 표한경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다. 끓어오르는 속을 가진 것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는가. 하며 태경은 다만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태경보다 훨씬 입지가 약한, 그러나 그 마음만은 더 뜨거울지 모르는 이 영리한 아이의 마음 속에 쌓인 더께가 얼마나 될 것인가. -태경은 그것에 늘 마음이 쓰였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가 이미 알기로 표한경은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으므로.
둘은 말없이 걸었다. 표한경이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은 꺼낸 것은 길지도 짧지도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예후가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입니다.」
「-그래.」
태경은 속으로 <결국 하려는 말이 그것이었느냐-.> 하고 한숨을 뱉었으나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짧게 답하였다. 그러나 표한경은 녹록치 않았다.
「헤아리고 계셨습니까.」
「……그래.」
조금 머뭇거리며 태경은 답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일이었다.
「예후는 군사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표한경은 단정적으로 말을 맺었다.
예후라면 비원의 화치한 누대를 올리는 데 부역할 군사 따위를 내어 줄 리가 없다. 하여, 태경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리 단정짓는 말을 듣는 것은 속이 쓰렸다.
전 예후가 세상을 떴다. 그 아들인 유진성은 새로운 예후로 주상의 인준을 받기 위하여 정주로 왔었는데 그것이 이십여일 전의 일이다. 시기는 막 한여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곧 가을이고 추수철이 될 것이라 부역하는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새로이 예후 될 이에게 하명한 바, 충정을 보이면 인준을 내릴 터이니 부역할 병사를 내어놓아라 일렀던 왕은 실로 어리석었다.
「내란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표한경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태경은 아직 믿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진성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헛된 믿음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도 태경은 그렇게 말하였고 그 자신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다고 스스로 느꼈다.표한경은 태경의 그런 쓰린 속내를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아직 어렸으므로 부러 반론하지 않을 정도로 속이 깊지는 못 하였다.
「사람을 믿으십니까.」
자신보다 냉정한 아우의 말에 태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진성이 어떤 성품인지 태경은 잘 알고 있었다. 주후의 후계자는 어린 시절 일정 기간동안 정주에 머무르는데 그 시간동안 그와 진성은 뜻이 맞아 마치 친형제처럼 정을 쌓은 사이였다. 표한경 역시 주로 태경 곁에 머물러 왔으므로 진성과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한데도 쉽게 믿지 말라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태경이 생각하기에 진성은 그런 표한경과 꼭 닮아 있었다. 올곧고 냉정하며 놀라울 정도로 사리에 밝은 이였다. 그 가슴은 뜨거우나 그것으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할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이 변하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날 하명받은 진성이 그길로 돌아갔었다 하면 그도 어쩌면 냉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예주로 돌아가기 전에 진성은 태경을 찾아왔었다.
보기에 민망할 지경으로 사치하여 꾸민 접견실에서였다. 태경은 스스로 진성을 바로 볼 낯이 없다 여겼다. 사람을 모두 물리고 진정 오랜만에 둘만이 마주하였는데도 한참이나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로 진성은 입을 열었는데-,
<-현태경. 이것은 너의 나라인가.>
하고 물어왔으나 그 어조는 질문도 아니었고 질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극히 담담하게, 스스로에게 답을 구하듯 하는 말이었으며 그 눈은 원망도 격동도 담지 않아 고요하였다. 그 모든 것이 지극히 그가 아는 진성다웠다. 그러했기에, 그 자신만이 몸을 보전키 위해 변해버렸다 생각한 태경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성은 여전히 고요하고 냉정하며 충을 알고 의를 아는 이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이번에 그가 선택할 길이 무엇일는지 태경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부역할 군사를 끝내 보내오지 아니한다면 정주의 조정은 틀림없이 그를 규탄할 것인데 태경에게는 오랜 친우를 비호해 줄 힘이 없다. 총명하며 냉정한 아우는 지금 반란을 맞을 준비를 하라 이른다.
예주후 유진성이 돌아간 지 오늘로 보름이건만 예주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보름 하고도 이레다. 그날 정주를 떠나온지가……
진성은 새삼스럽게 그런 사실을 떠올리고 미간을 조금 지푸렸다. 하늘 때문일 것이다. 문득 올려다 보았을 제 하늘은 경계(境界)도 없이 그저 무연히 푸르렀으나, 인간이 정하였기로 분명 수밀의 하늘이었으니.
늙은 왕이 명하옵신 바와는 정 반대의 진군. 혹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과도 정 반대인 진군.
그리고…, 나의 왕 역시 결코 바라지 않을.
절대로 밟아서는 아니 될 땅. 침범해서는 아니 될 천명국의 하늘.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쓴웃음을 짓던 진성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어깨에 지고서도 가야만 하는 길.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 결론은 쓸쓸하였으되 허무하지는 않았다. 마음 추스르는 일은 이미 익숙하였으므로 그는 곧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히 웃음 띤 얼굴을 하였다.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구석 피 묻고 불에 그을렸던 성내는 이제 정리되고 있었다. 백열하는 해가 막 천정에 걸리었다가 서방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공격을 시작한 것은 새벽, 동녘이 밝아 올 무렵이었다.
작전이랄 것도 없이 단순한 방진을 세운 예주의 군대는 곧바로 정안현 외성의 성문으로 향하였다. 돌격 명령이 아니었기에 진군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삼천명분의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고도 정연하였다. 정안성은 미명에 잠긴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고요한 새벽이었다.
성문으로 다가서는 군열 선두에는 단을 높이 쌓아올린 병차들이 앞섰다. 병차의 희고 푸른 휘장이 새벽 어스름 속에서 바람으로 녹아들었다. 회청색을 띤 바람은 병차(兵車)위에 선 자들의 소맷자락을 세차게 뒤흔들며 지나갔다. 그러나 휘청이는 것은 옷자락 뿐 그들의 자세는 의연하였다.
대기가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마주한 성가퀴에 최초의 붉은 빛이 어리고 그것이 순간 더 짙은 음영을 불러 드리웠을 때, 지효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마지막 하늘을 받드는 자의 몸짓으로.
동작이 달리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 순간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기엔 충분하였다.
떠오른 흰 소매가 바람결에 고요히 부풀어올랐다. 동녘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일출 속에서 그것은 금적색으로 펼쳐지는 날개인 양 하였다.
진성은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맡겨진 삼천여의 목숨들을 보았다. 또한 나아가야 할 길을 응시하였다. 진격의 때를 재어야 할 시간이었다.
새 하늘을 볼 수 있었으므로 마침내 낡은 하늘을 부수려 했던 그들 ―시율허의 술사들이 온 힘을 다하여 길을 열고 있었다.
태초의 이름은 가장 높이 치솟아 흔들리는 땅이며 굳어 부서지는 대기, 희고 붉게 타오르는 물이며 또한 칠흑빛으로 녹아 가라앉곤 하는 불이다.
―혹은, 혼돈이라 한다.
그것은 기원과 의지와 대가에 의하여 시간을 거스르고 세상으로 불러올려지곤 하였다. 강력히, 때로 파괴적으로. 시율허의 정명한 혈족, 시원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이어 온 술사 지효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환영같은 태초가 그 눈앞에 흔들리고 있었다.
금세의 모든 법칙이 어긋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창천이 불꽃을 빚어내는 것 또한 순간이었다.
가열찬 파괴가 날짐승의 모습을 입고 있었다. 그 눈은 백열부터 암흑까지의 모든 빛을 담아 더는 빛나지도 않는 혼란스러운 금색이었다. 온통 타오르는 깃털이 푸르고 붉고 희고 또한 검었다. 태초의 법칙이 낳아 허공으로부터 떨어진 불의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나붓이, 파괴의 날개가 성문을 덮었다. 차고 푸르른 새벽은 그 자리에서 비명도 없이 소멸하고 있었다.
그예 성문이 화염에 휩싸였고 이어 눈 녹듯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현성 내에서도 이변을 깨달았는지 몇몇 사람 그림자가 성가퀴를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반 수 이상을 그대로 거조(巨鳥)가 남긴 불길이 삼켜버렸다. 발이 느린 죄로 조금 늦었던 몇몇은 생경한 광경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화염 속에서 일어난 때 아닌 눈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그것이 앞서 달리던 자들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숯덩이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 다만 흩어진 흰 잿가루가 남은 열풍에 실려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성문을 삼키고 사람을 삼킨 불은 흐르듯 허공 중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남은 것은 열기 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남은 자들은 앞다투어 성내로 도망했다. 그들을 탓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열린 길을 따라 예주군은 거침없이 수밀의 성토를 밟았고 그러므로 최초로 창칼이 부딪힌 곳은 이미 정안현의 성곽 안이었다. 뒤늦게 달려 나온 현성 수비병들은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한 채로 썩은 짚더미처럼 쓰러져 갔다.
시율허의 술사들이 정명한 마지막 천족(天族)의 이름으로 하늘의 군사를 불렀으므로 그때 그 전장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날개달린 것들이 모조리 모여든 듯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였다. 깃 달린 나래들이 수없이 바람을 갈랐다. 날짐승들은 크고 강인했으며 그 부리와 발톱이 창칼처럼 날카로웠다. 화살과 칼날 대신 수많은 부리와 발톱이 사람의 목줄기를 찢고 눈알을 파내었다. 피 흘린 이는 비단 쇠붙이를 쥔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앞서 한 시율허의 술사가 말한 바 있었다. 거짓 하늘의 산 것을 모두 죽여 없애리라고.
한없이 피가 흘렀다. 하늘이 날개달린 짐승들로 완전히 뒤덮였기로 해가 떠올라도 밝지 않았다. 한님의 땅 변두리의 백성들은 그날 멸망을 보고 있었다.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자들에게도 몸을 돌려 도망하는 자들에게도 어김없이 짐승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유혈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예주후 진성의 군사들에게 그 싸움은 전투라기보다는 단순한 진군에 가까웠다. 수밀의 모든 성도가 그러하듯이 정안현성에도 남문으로부터 중심까지 똑바로 뚫린 대로가 있었고 예주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갈 뿐이었다. 시가전에 으레 뒤따르는 혼란 따위는 생기지도 않았다. 몸을 지키기 위하여 쇠붙이를 휘두를 필요조차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날짐승의 분노가 그들에게는 철벽의 방패였으며 그로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경이로운 시선들이 선두에 선 일단의 사람들에게로 향하였다.
희고 푸른 장막의 병차 위에서 그들은 더 높은 하늘을 우러르고 있었다. 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모양의 긴 옷자락들이 바람을 받아 날개처럼 퍼덕거렸다. 그들이 소맷자락을 한번 떨칠 때마다 수십의 부지(符紙) 조각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곧 모양을 바꾸어 벼락이 되거나 맹금이 되었고 어김없이 그들 적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맹금의 날개가 크고도 당당하였다. 청백의 날카로운 빛은 시리도록 맑았다. 반복되는 기적 속에서는 살육의 참혹마저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주의 병사들은 진정 하늘의 수호가 그들의 머리위에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진군 중의 저항은 허무할 정도로 미약했고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십여명의 술사들과 함께 수천의 날짐승을 앞세우고 삼천의 예주군은 다만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침내 대로가 끝나고 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마지막 저항을 마주하였다. 선두에 선 자는 푸른 전포를 갖추어 입고 말에 오른 정안현승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그는 감히 천명국을 짓밟은 반도들을 준엄히 꾸짖었다. 그러나 뒤에 선 백여명 남짓의 병사들은 반 수 이상이 이미 피와 공포에 젖어 있었다. 최초의 돌격이 이루어졌다.
진격 명령을 내린 진성은 부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직접 앞으로 나섰다. 용맹히 돌격해 온 정안현승은 기백만은 가상하였으나 처음부터 칼에 익숙한 자가 아니었다. 그 목을 떨구는 데에는 일각의 지체도 필요하지 않았다. 승패는 이미 결정지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현승의 목이 떨어져 굴렀을 때 천명국 정안현의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물어도 답할 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등을 돌려 도망하려 하였다. 뒤따르는 삼천의 날붙이가 그들의 등을 휩쓸었다. 모든 참혹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진격의 명령을 두 번 내리기 전에 마지막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낙성은 오전 중의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