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깜박 잊고 있었는데 나라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리엔의 칼솜씨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리엔은 벽면을 빠른 속도로 밟아 올라가더니 훌쩍 제비돌기를 해서 단숨에 베헤모스의 머리까지 다다랐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는 순간 베헤모스는 온 몸에서 연기를 확 뿜어냈고 그 바람에 이리엔의 칼은 머리 대신 어깻죽지를 베고 말았다.

“크— 아— 아— 악—!”

베헤모스의 어깨에서 불과 연기가 펑펑 뿜어져 나왔다. 이리엔은 몸부림치는 베헤모스의 팔을 피해서 무사히 착지했지만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단 한번뿐인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너—!”

무시무시한 노호를 뱉은 베헤모스는 두 주먹을 말아 쥐고는 꽝 내리쳤다. 이리엔은 간신히 피했고 베헤모스의 주먹은 땅바닥을 치게 되었는데 어찌나 그 힘이 강력한지 땅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갈라져 버렸다. 저걸 맞으면 이리엔의 몸은 박살이 날 것이 뻔했다.

“키이이— 가소롭구나—!”

베헤모스의 주먹질이 연달아 퍼부어졌다. 거대한 불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울리며 구덩이가 파였다. 거대한 덩치를 하고서도 얼마나 빠른지 이리엔이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것이 신기하였다.

"크흐으으— 결코 살려 보내지 않겠다—!"

이리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베헤모스는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다가오는데 사방이 돌무더기로 막혔으니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번 기회를 놓치자 도리어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이리엔은 각오를 한 듯 칼을 세우고 베헤모스를 쏘아보았다.

“비켜. 아가씨.”

별안간 이리엔의 몸을 밀치고 나라기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지금까지도 나라기의 발은 엄청나게 빨랐지만 이번에는 진짜 눈 깜짝할 사이 베헤모스의 지척에 가 있었다. 나라기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가티노올을 베헤모스의 가슴에다 찌르며 그 특유의 빈들대는 투로 속삭였다.

“니미 씨발이다. 새끼야.”

나라기의 칼이 째지는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꽈꽝! 나라기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동그라졌고 베헤모스도 불똥을 뻥뻥 튀기며 쓰러졌다. 나라기는 이번에야말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쓰러진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베헤모스도 으르릉거리는 신음만 내뱉으며 팔다리 버둥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가티노올이라는 명검이 부서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술이니만큼 지옥의 불길도 잠시나마 뚫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나라기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최강의 기술일 것이다. 나는 목청껏 고함을 쳤다.

"이리엔! 지금이야! 베헤모스의 목을 쳐!"

넋을 놓고 있던 이리엔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뛰었다. 그녀는 칼을 쳐들고 베헤모스의 몸뚱어리를 훌쩍 뛰어넘어 목을 휘둘러 쳤다.

"크— 하— 아— 아—!"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베헤모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리엔의 칼날을 손으로 잡아챘다. 칼날을 쥔 주먹이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 연기가 풀풀 났지만 베헤모스는 칼을 놓지 않았고 이리엔도 칼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베헤모스의 번쩍번쩍 불타는 눈동자가 이리엔을 쏘아보았다. 나는 숨어있던 벽에서 뛰쳐나왔다.

"이리엔! 칼을 놔! 도망쳐!"

그러나 이리엔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여전히 칼자루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말을 더듬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이 칼은 목숨보다 소중해."

베헤모스의 다른 주먹이 이리엔을 강타했다. 이리엔의 몸은 거의 바닥에 처박히다시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칼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끝내 베헤모스가 칼을 놓아버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천한 여자의 몸으로—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크흐아악—!"

나라기가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에 워낙 큰 상처를 입었는지 베헤모스도 거동이 불편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 하나를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키키키— 영원히 지옥불에서 괴로워해라—!"

베헤모스는 몸을 굽혀 이리엔을 내려다보았다. 무쇠도 단숨에 녹이는 지옥의 불길이 이리엔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아직 불길이 멀찍이 있는데도 이리엔의 하얀 살갗이 순식간에 벌겋게 익는 것이 보였다. 베헤모스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속삭였다.

"지옥에 가는 건 바로 너다."

나는 칼을 높이 쳐들어 베헤모스의 목을 쳤다. 베헤모스가 미처 뒤돌아보기도 전에 칼날이 목을 베고 지나갔고 머리가 몸통에서 뚝 떨어졌다. 강대한 힘을 가진 마법사 왕은 나를 있으나마나한 벌레로 취급했을 테지만, 나 역시 악마를 죽일 수 있는 칼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기야 베헤모스는 내가 그런 칼을 가졌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베헤모스는 내가 뒤에서 몰래 다가가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리엔은 칼을 쳐들고 살금살금 다가오는 나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고 말이다. 그야말로 둘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완벽한 일격이었다고나 할까.
땅에 떨어진 베헤모스의 머리통을 발로 뻥 찼다. 힘을 잃은 머리는 너무나 쉽게 부서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통쾌하구나! 나는 좀 전까지 벌벌 떨었던 주제에 낄낄 웃고 말았다. 악마의 머리통을 발로 차버린 인간이 온세상 영웅전설을 다 뒤져봐도 몇이나 되겠냔 말이다.

"안녕, 베헤모스."

즐거운 인사까지 더했으니 베헤모스도 죽음이 쓸쓸하진 않았을 것이다. 머리를 잃은 베헤모스의 몸뚱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비틀비틀 몸을 흔들었다. 팔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잠시 후 잘린 목에서 뻘건 불줄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불줄기는 쭉쭉 올라가 밤하늘 구름마저 빨갛게 물들였다. 남은 몸뚱이는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다가 새카맣게 타들어 바람에 쌩 날려가 버렸다. 하룻밤새 온동네가 박살난 난장판이 무색하게 여기 유령왕이 있었다는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니지. 저놈은 지옥에서 왔으니 더는 머물 곳도 없으려나?"

멋지게 말하려 했는데 그만 실패했다. 하기야 어설픈 영웅 흉내는 내가 할 짓이 아니다. 아까 베헤모스의 목을 제대로 내리친 것만 해도 재수가 무척 좋았다고 봐야 한다.
멋쩍어진 나는 뒤통수를 슬슬 긁다가 이리엔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리엔은 별 놈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잠잠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나 멋있어?"

이리엔도 웃었다.
대답 대신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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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끝났습니다.
재미 좀 있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