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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죽은 방에는 짙은 고요가 깔렸다. 나는 칼을 두어 번 휘둘러 피를 털었다. 몸에 힘이 쭉 빠져서 헐떡헐떡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잘했어.”

문득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비쩍 마른 사나이가 문가에 서서 소녀를 안아들고 있었다. 그는 소매가 이상하게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흐흐 웃으며 대뜸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멋지군. 칼솜씨 잘 봤어."

남자가 친근한 투로 말했다. 빌어먹을, 이놈은 또 누굴까? 낯선 사나이는 당장 소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눈앞의 남자를 살갑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려놔!"

나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팔에 힘이 없어 칼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괴물에게 어떻게 마음껏 휘둘렀을까 싶을 정도로 칼이 길었다. 사나이는 아직도 천진한 눈으로 실실 웃고만 있었다. 그러나 저 눈 뒤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지 나는 몰랐다.

"어어, 진정하라고. 죽지는 않았어. 기절했을 뿐이야."

남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나는 칼을 세워 적대감을 똑똑히 드러냈다.

“허튼 짓 하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좋아, 좋아. 좋다고. 얌전히 행동하지.”

그는 소녀의 몸을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을 쫙 펴서 들고 스르르 뒤로 물러섰다.

“됐어?”

마치 내 말이라면 무조건 듣겠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의심이 갔다.

“아니. 아직 아니야. 손을 그대로 들고 벽 쪽으로 비켜서.”

낯선 사나이는 두말없이 내 말에 따랐다. 하지만 나는 더 주문을 했다.

“등을 벽에 딱 붙여.”
“까다롭구먼.”

하지만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역시 이번에도 말 그대로 따랐다. 나는 좀 안심하였다. 내심으로는 저 사나이가 별안간 덤벼들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었다. 여기서 벽까지 거리가 꽤 되니까 만일 그가 딴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반격할 자신이 있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한 발짝이라도 떼면 목이 날아갈 줄 아시오.”
“어이쿠, 무서워라.”

나는 킥킥 웃는 그를 쏘아보며 찬찬히 소녀에게 다가가 윗도리를 벗기었다. 등의 살이 길게 찢어져 울컥울컥 피가 흐르고 있었다. 줄줄 흐르는 피를 보자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소매를 찢어 상처를 꽉 싸매는 동안 남자는 잠자코 그냥 보고만 있었다. 하얀 천이 순식간에 피로 붉게 젖었다.

“다 끝났어?”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야. 거기서 꼼짝 말아요.”

처음으로 사나이의 눈이 불쾌한 빛이 되어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딱딱거리는 투로 불평을 했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어.”

나는 벌떡 일어서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닥쳐요. 말이 많아. 난 당신이 누군지도…….”

그때 별안간 사나이의 몸이 벼락같은 속도로 덮쳐 왔다. 나는 급히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전에 그의 손아귀가 칼을 잡은 손목을 콱 부여잡았다.
나는 힘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사나이의 손은 떨어지는 듯싶다가 빙글빙글 돌아 또 꽈악 붙잡는 것이었다. 다시 힘을 세게 주었지만 사나이의 손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써도 사나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사나이가 빙긋 웃었다.

“신기한가? 금나수(擒拏手)이라고 하는 것이야.”

그러더니 흐흐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진짜 신기한 걸 보여주겠어.”

무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사나이의 손바닥이 가슴에 턱 올려졌다. 이놈이 무엇을 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무서운 충격이 쿵 하고 몸을 뒤흔들었다. 몸속에서 꽝 하고 무언가 터지고 마치 등짝을 흠신 얻어맞은 느낌인 것이었다.
나는 그만 칼을 놓치고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바닥에 박고 말았다. 내가 꼴사나운 자세로 몸부림치는 동안 사나이는 여유롭게 슬슬 걸어와 떨어진 칼을 집었다. 잉잉 울리는 귓가에 사나이의 목소리가 아른아른 흘러들었다.

“통배권(通背拳)이야. 힘을 적게 썼으니 좀 쉬면 능히 일어날 거야.”

사나이의 말대로 바닥을 뒹굴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내가 죽일 듯 노려보는데 사나이는 어설픈 웃음으로 넘어가려 했다.

“눈에 힘 좀 풀지. 미안하군.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었어.”

사나이가 사과했지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자기를 신나게 두들겨 팬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이럴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는 마치 친구에게 건네듯 칼을 돌려주었고 나는 거의 낚아채듯 받았다.

“좀 전에 말했지만 일분일초를 다투는 일이니까 빨리 하겠어. 이 마을이 굉장히 위험한 마법으로 그득하다는 것은 이쯤이면 너도 눈치를 챘겠지.”
“저 노래 말이에요?”
“맞아. 똑똑해.”

사실 소녀에게서 들어서 안 것이지만 난 잠자코 있었다.

“어떤 노래에는 말이야, 아주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
“이 노래처럼.”
“그래. 예사 마법이 아니지. 나도 손도 제대로 못 써보고 속절없이 당했으니까. 이 마을에는 아주 사악한 마법사가 있어. 머나먼 시대에 살았던 마법사 왕이지. 왕은 한때 고귀했으나 악마의 저주가 몸을 지배해 버렸어. 그놈의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놈이 발만 들여도 온 들판의 풀이 다 말라죽을 지경이라고 하지. 엄청 오래 전부터 살아와서 이제는 잊혀진 마법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놈은 지옥의 유령왕이야!”

이쯤 되니 나도 꽤 놀랐다. 첫째, 이 사나이는 칼을 든 나를 맨손으로 제압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당했다니 무서운 마법이었다. 둘째, 마법사 왕과 싸우지 않고서는 마을을 빠져나가기 어렵다. 셋째, 이 사나이도 우리 둘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당신이?”
“응. 정말 완벽하게 당했지. 방심하다가 한 방 크게 먹은 셈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였지.”

그제야 퍼뜩 이 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가 이 마을에 왔을 때 광장 형틀에 칭칭 묶여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지.

“탈출했군요.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나요?”
“있었지. 네 명. 머리를 부수어 놨으니 이제는 내 그림자도 뒤쫓지 못할걸.”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우리와 무얼 어쩌자는 것이지요?”

사나이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가 너희를 구하러 온 것이지.”

사나이는 진지한 눈으로 말했으나 나는 어이가 없어 하! 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 마법에 당해 꼼짝을 못하던 사람이 누굴 구하겠다는 것인지. 내가 좀 무안하게 했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것처럼 낄낄낄 웃었다.

“이런 꼴이니 네가 미심쩍어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걱정 마. 노래에 당한 일은 내가 아무런 방어를 못해서야. 마법을 알고 났으니 더 이상은 거칠 것이 없지.”
“하지만.”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지.”

나는 소녀의 숨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숨은 고르게 쉬고 있으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사나이의 말대로 그냥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좋아요.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말해봐.”
“왜 우릴 돕는 것이죠? 당신 혼자 마을을 빠져나가는 편이 훨씬 쉬운데.”

이번에는 사나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넌 말야, 말이 정말 많군.”
“낯선 사람에게 우리 목숨을 맡기라고요?”
“나 없이 마법사와 싸울 자신이 있어? 살고 싶지 않아?”

사나이는 손가락을 들어 구석에 쓰러진 괴물을 가리켜 보였다.

“너는 고작 괴물 한 마리 죽이고도 빌빌대는 놈이지. 저 괴물은 마법사 왕의 아주 작은 마법에 지나지 않아. 놈이 네 칼애 맞을 거 같아? 내 장담하지. 내가 없으면 너는 여기서 목숨을 잃어.”  

들으니 다 옳은 말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사나이는 손을 들어 더 말을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자기 등으로 손을 뻗어 옷에서 칼을 쓰윽 꺼내는 것이었다.
워낙에 헐렁한 옷이라 칼이 통째로 숨겨져 있었는데도 몰랐다. 칼은 그의 허리춤에 얌전히 자리하게 되었다. 사나이는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칼집을 툭 치며 말했다.

“나는 검객이야. 칼이 있다면 난 천하무적이지. 마법사는 내가 베겠어.”

그러더니 시원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가득한 손이었다. 내 손가락을 부러뜨릴 셈인지 악수를 하는 힘이 굉장하였다. 아까 두들겨 맞은 일도 있고 나도 질 수 없다 싶어 힘을 꾹 주니 사나이는 금세 킬킬 웃으며 힘을 뺐다.

“내 이름은 나라기야. 동방에서 온 검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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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손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