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빼려고 했지만 이제는 몸이 전처럼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굴려 다시 날아오는 촉수를 피했을 뿐이다. 촉수가 철썩 떨어지자 벽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작은 나뭇조각들이 내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날 죽이지 못해 화가 났는지 괴물이 씩씩 소리를 냈다. 이 커다란 괴물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바로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아까 거리에서 만난 꼬마아이였다. 꼬마아이가 준 꽃다발은 무언가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 큼직한 꽃에 있던 얼룩이 저 괴물의 머리에도 있는 것이었다.

"제기랄! 감쪽같이 속았어!"

또다시 붕붕 소리가 귀를 찢었다. 벽이 박살나는 것을 보니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몸을 굴렸지만 이번에는 날아오는 도중에 촉수가 휘어지더니 그 끝자락이 배를 후렸다.
바람개비처럼 핑핑 몸이 도는데 그 순간만큼은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하였다. 나는 온전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무너졌는데 속이 아프게 치밀어 숨을 뱉었더니 피가 같이 나왔다.
나는 꺽꺽 숨을 뱉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코에서는 피가,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 괴물은 칵 소리를 지르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이 우르르르 흔들렸다.

"씨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살피었다. 어깨까지 드러날 정도로 옷이 찢어지고 살이 시커멓게 죽었다. 조금만 몸을 틀어도 심한 아픔이 느껴져 괴물이 오는 걸 보면서도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못하였다.
벽을 부수는 힘으로 내 몸을 내리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도망가려고 해보았지만 너무 아파서 잘 되지 않아 바닥을 기어 구석으로 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돌아보자 괴물이 나를 조롱이라도 하는지 촉수를 빙글빙글 움직이고 있는데 그걸 보니 이가 딱딱 부딪치고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괴물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에 깍깍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뛰는 가슴을 누르며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몸부림치는 괴물과 방안을 붕붕 날아다니는 불덩이가 보였다. 이윽고 불덩이가 꽝 터지며 좁은 방을 훤하게 밝혔다.
그 불빛 너머에서 그녀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

그녀의 날카로운 눈.
그 갈색 눈동자에서 파란 불길이 이는 듯싶었다. 본래 딱딱했던 얼굴이지만 지금은 마치 얼음처럼 차가우니 보는 내가 다 가슴이 오싹하였다. 그녀가 칼을 휘두르며 방으로 뛰어들자 새파란 빛이 번쩍였다.
이상하리만치 소녀의 그림자가 쑥쑥 커졌다. 몸보다 훨씬 덩치가 커진 그림자는 곧 괴물의 몸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괴물의 몸뚱이에서 그림자로 덮힌 부분이 스르르 얼어붙는 것이었다. 지금은 여름인데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더듬더듬 말이 새었다.

"이, 이럴 수가?"

괴물을 몸을 오그리며 슬금슬금 내빼다가 불쑥 캑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 갈고리 같은 이빨이 다 보이고 침이 튀는데 뚝뚝 방울져 떨어지자 나무로 만든 바닥이 연기를 내며 녹았다.
소녀에게 두 갈래 촉수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날아들었다.
괴물의 무서운 힘을 아는 나는 무심코 비명을 올렸지만 소녀는 오히려 괴물에게 뛰어들었다. 그녀의 칼은 바람처럼 빨라 눈 깜짝하는 사이에 촉수가 썩둑썩둑 잘려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녀는 괴물의 옆구리 살을 가르고 스르르 빠져나왔다.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괴물이 촉수를 또 휘둘렀으나 소녀는 빠른 발로 모두 피해버려서 헛된 몸부림이 되고 말았다. 무력한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의 칼부림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몸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칼이 되어 베는 듯싶었다. 몸이 얼마나 날쌘지 괴물은 헛손질만 할 뿐이었고 괴물의 몸뚱어리에는 상처가 늘어만 갔다.
이윽고 괴물이 몸부림만 치고 움직이지 않자 소녀도 발을 멈추었는데 손가락을 쳐들자 벼락이 번쩍번쩍 쏘아졌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아까 일도 그렇고 도저히 평범한 인간은 할 수 없는 일, 하나밖에는 설명이 안 되었다.

"마법이다!"

내 눈앞에는 마법사가 서 있는 것이었다.
벼락이 꽂히자 괴물의 살점이 치지지직 시커멓게 타는데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괴물은 칵칵 소리를 내지르면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소녀가 칼을 흔들어 괴물을 위협하면서 곁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뭘 꾸물대. 빨리 가!”

나는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칼도 갑옷도 배낭도 그대로 다 있음을 확인하고 슬금슬금 소녀의 뒤로 물러났다. 괴물은 흐흐 소리만 낼 뿐이고 소녀도 칼을 슬슬 흔들기만 하였다. 다시 말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갑옷을 입고 칼을 허리에 찼다. 소녀가 슬쩍슬쩍 뒷걸음치면서 내게 딱딱거렸다.

“너 다음부터는 몸에서 칼을 떼놓지 마. 죽기 싫으면 말이야.”

퉁명스러웠으나 옳은 말이라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한번 힐끗 보더니 팔꿈치로 가슴을 슬쩍 밀었다. 문이 가까우니 여기서 먼저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내가 뒷걸음을 치자 괴물이 나지막하게 으르르 소리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지만 소녀가 다시 칼을 쳐들자 잠잠해졌다.
그러나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내가 다섯 발짝도 다 떼기 전에 괴물이 늘어져 있던 촉수들을 죄다 끌어다 모으고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도 칼은 빼들고 있었으나 촉수가 무척이나 빠르고 수도 많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

그때 소녀가 소리를 지르면서 또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다. 어찌나 빠른 칼인지 귓가에 잉잉 바람소리만 들릴 뿐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촉수를 썩둑썩둑 잘도 베어낸 그녀는 왼손으로 이상한 손짓을 하고는 발을 쾅 굴렀는데 그녀의 발치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확 뿜어져 괴물의 몸뚱이를 태웠다.
불길은 무척이나 거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의 살을 숯덩이로 만들었다. 괴물은 깍깍깍 비명을 지르며 몸을 마구 뒤틀었지만 끝내는 힘을 잃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매캐한 연기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죽었나? 죽었어? 죽었네?”

무언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보니까 후들거리던 다리도 어느새 점잖아져 있었다. 소녀는 응 하며 대꾸하고는 칼에 묻은 피를 툭툭 떨어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대다가 겨우 그녀의 솜씨를 칭찬했다.

“야, 너 대단하다.”
“무엇이?”
“칼 솜씨 말이야. 무진장 빠르던데.”
“멀었어.”

아, 그래요. 그녀가 뚝 잘라 말하는 바람에 더는 말을 잇기 힘들었다. 나는 속으로 그녀의 험담을 좀 지분거렸는데 문득 얼굴을 들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제풀에 깜짝 놀랐다. 저 눈을 가만히 마주보고 있으면 꼭 내 속마음이 다 비치는 것만 같은 까닭이었다.

“서둘러.”
“어어, 알았어.”

확실히 타죽은 괴물을 옆에 두고 미적거릴 때는 아니었다. 나는 씨익 한번 웃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앞에 무언가가 휙 지나가더니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어.”

나는 잠시간 어리둥절했으나 곧 벌어진 일을 똑바로 알 수 있었다. 괴물이 소녀를 쳐 날려버렸다. 그녀는 나 때문에 뒤에서 오는 괴물의 일격을 눈치 채지 못했고 그만 무방비 상태로 당하고 만 것이었다.
소녀는 배를 맞아 바닥에 쓰러져서는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있었다. 쓰러질 때 벽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피를 흘리는데 몸을 몇 번 뒤척이다 덜컥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었고 눈이 감겨 있었다.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죽었어?"

불쑥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저 까마득하게 오랜 기억의 편린들이 아프게 쌕쌕 지나가며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주 가끔씩 찾아오던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에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귓가에 스치었고 높은 탑과 붉은 낙조가 눈에 보였다. 누가 부는 것인지 피르르 피르르…… 아득하니 갈피리 소리도 들리는 듯싶었다. 어디서 언제 들었는지 무척이나 그리운 소리였다.
기억들은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나는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고 또한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가 한 자락도 잡지 못하였다. 환상 같은 기억이 쓸려나간 자리에는 어느새 낯선 내가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높이 소리를 치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칼을 세워 방어하고 오른발을 써서 몸을 틀어 단숨에 괴물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익숙한 칼처럼 칼자루가 손가락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칼을 높이 치켜드는 바로 그 때에 어쩐지 칼이 흐흐 웃는 소리가 들린 듯싶었다.
괴물의 얼굴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갈랐다. 칼이 살을 베어갈 때 검붉은 피와 함께 우우우 하고 울음소리가 터졌다.
칼이 빠져나오자마자 높이 쳐들어 괴물의 머리를 세 번 연속해서 강하게 내리쳤다. 첫 번째 일격에 머릿살이 쩍 갈라져 피가 주르르 흐르고 두 번째 일격에 하도 몸부림을 치는 통에 아가리에서 침이 마구 튀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일격에 괴물의 머리뼈가 부서지고 피가 콱 쏟아져 몸을 함빡 적셨다. 괴물의 외마디 비명이 푸르르 꺼지는 듯이 귓가를 메아리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