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
노래 소리가 들린다. A.아드가 눈을 떴을 때 바닥에서 솟아 나온 만드라고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반은 조소, 반은 비명인 노래를 부르며 그의 주변을 돌았다. 오래 묵은 듯한 굵은 만드라고라 하나가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 양초에 몸을 기댔다. 사람처럼 팔짱을 꼈고, 안면에는 이뿌리를 잔뜩 드러낸 웃음이 있었다.
"안녕하시오, 마법사 양반."
A. 아드는 벌떡 일어나 손등으로 있는 힘껏 만드라고라를 후려쳤다. 묵직한 감촉과 함께 만드라고라는 테이블에서 떨어져내려 한쪽 구석에 쳐박혔다. 만드라고라는 비명을 질렀으며, 그것을 본 다른 만드라고라들이 맹렬히 웃었다. A.아드는 소음에 얼굴을 찡그렸으나 죽지는 않았다. 만드라고라에게는 뽑힐 때 있었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비명 속에도 웃음이 섞여있었다.
"히히. 히히. 뭐야, R.A.아드. 전혀 죽질 않는군. 히히. 죽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히히. 아닌가?"
쳐박힌 얼굴을 들어내며 만드라고라가 말했다. 그의 말을 또 다른 만드라고라가 받았다. 그의 머리 윗부분은 누가 베어 문 것처럼 허전했다.
"나의 꿈은 위대한 군주들에게 착취당했어.(히히!)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히이히히히-! 영웅이라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아닌가, R.A.아아아아아드? 이 세계의 부조리를. 히히히! 네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념해. 히히히. 부조리의 역사는 이 세계의 역사야. 한 인간의 지식이. 히히. 변화는커녕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히히히히!"
"아니면 뭘까? 히히히. 실존주의자처럼 절망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 히히히. 아닐까?"
"매저키스트로군." 히히히히. 그 순간 모든 만드라고라가 다 함께 웃었다.
"백작이 너를 보고 있어. 히히."
"정말이야. 너를 잡지 않는 이유는, 히히히. 너희가 가당찮은 꿈만 꾸어서. 히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야. 히호-! 죽여! 더 많이 죽여! 더럽다고 생각되는 놈들을 더 많이! 너희가 보기에 정말로 죽어 마땅한 지배계급의 극점은. 히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테니까!"
"민초들이 너희의 싸구려 꿈을 알아 줄 거라고 생각해?"
"히히히.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 앞에 나서보라지. 돌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게다. 히히. 사회주의? 아나키즘? 진정한 민주주의? 이제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 히히히. 그들에게 약간의 절망만 불어넣어 주면. 히히히.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죽이고, 그 뒤에 보상처럼 사탕 몇 개만 던져준다면. 히히히히.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따지고 보면 맞는 말 아니야? 히히히. 히히히히. 그렇지 않아? 현실을 모르는 R.A.아드?"
"진보를 믿나? 진보를 믿느냔 말이야."
"아아, 알고있어. 인텔리겐챠들은 언제나 진보의 도상을 독점하고 싶어하지. 그 놀라운 권력욕이라니. 히히히."
"왜 그러지? 짜라투스트라처럼 권력욕을 긍정하기라도 할건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하고 있다고 변명이라도 할건가? 오오. 이런. 우리도 매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어. 새로운 고문방법, 새로운 지배법, 새로운 선동방법. 이히히히."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지 마. 힛히히. 권력을 원한다면, 백작의 밑으로 기어 들어가. 이인자라서 불만인가? 그곳에서도, 너는 다른 인텔리겐챠들의 아래잖아. 히히히. 어차피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면. 이기고 있는 쪽이 좋지 않겠어?"
만드라고라들이 R.A.아드의 몸을 기어올랐다. A.아드는 그중 하나를 집어 목을 부러트렸다. 만드라고라의 몸 안에서 희미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달콤하기도, 쓰기도 한 냄새는 묘하게 사람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양초 냄새에 섞여 구역질이 나, A.아드는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통로는 내려올 때보다 훨씬 좁은 것처럼 느껴져 필사적으로 앞을 헤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향기를 맡은 뒤부터 다리가 풀리고, 시야가 요동쳤다. 만드라고라들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은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멤돌았다. 지면으로 다가가면서 쓰레기 더미의 악취가 그를 덮쳤다. 썩은 사과, 개가 먹다 버린 고기 조각들, 남 모르게 썩고 있는 인간의 살점 냄새까지 한번에 뒤섞여 다가와, 이런 비참한 곳에 둥지를 튼 인텔리겐챠에 대한 혐오감이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구역질을 참으며 지상에 올랐을 때,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당당히 군림하는 하나의 실루엣이 보였다. 노인은 단아하고도 절개있게 - 그의 애마인 듯한 흑마 위에서 - 자애로움과 경애심 가득한 눈을 가지고 R.A.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보자마자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쓰레기 더미의 악취는 점점 진동함에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미소를 머금고, 적의 없이 R.A.아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푸른 초원을 보고 싶냐고 물었다. 원한다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다고. 꼭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는 악수를 청했다. 황송하게도, 내밀어진 그 손은 트고 부르튼 자국으로 성하지 않아 더욱 더 성스러워 보였다. 자진하여 그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고싶을 정도였다. A.아드는 망설였으나 노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는 한없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미천한 자들에게도 손을 내미는 것이다! R.A.아드가 그의 오른 손을, 악수를 위하여 들었을 때 - 갑자기 근원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그 소리는 망치처럼 A.아드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악수를 하려던 손이 쳐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눈으로, 노인의 성스러운 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것은 놓치고싶지 않을 만큼 유혹적인 장면이었다.
"사태 자체로." 다시 소리가 들려오고 노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괜찮느냐며 A.아드에게로 다가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의 얼굴이 지극히 선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은 R.A.아드에게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어떤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A.아드 스스로가 그것을 주문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린 것이다. 그는 노인의 도움을 뿌리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결코 태양빛 가득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붉은 달을 태양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노인은 단지 붉은 달을 등뒤에 놓았을 뿐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그를 조명했을 때, 그에게서 보였던 성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여전히 아름답기는 했었는데 - 그것은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오히려 구역질이 나게 했다.
그는 눈을 떴다. 인텔리겐챠의 아지트였다. 책상 위에는 양초가 반쯤 탄 채로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했었는지 허리가 몹시 아팠다. A.아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번개처럼 검빛이 밀고 들어와 그의 턱 밑에 겨누어졌다.
"움직이지 말아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에, 그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오른 쪽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의 턱 밑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하프 엘프다. A.아드가 그것을 알아낸 순간에 그녀가 A.아드의 어깨를 틀어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프 엘프의 손아귀 힘은 엄청나서, 마치 못이 어깨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런 힘과는 다르게 고상하지도 천하지도 않은 반-인간적 외모는,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갑옷과 어울려 그을린 백화나무를 연상케 했다.
그녀는 검의 폼멜 부분을 들어 A.아드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눈앞이 번쩍하며, 그의 몸은 걸레처럼 방구석에 쳐박혔다. 기사는 다가와 A.아드의 가슴 한 가운데를 오른발로 힘차게 찍었다. 그가 저항하지 못하고 꺽꺽거리는데 그녀가 몸을 기울여 그에게 말했다.
"칭찬부터 해드리지요. 대단하군요. 나는, 백작의 영지에서 이렇게 편히 자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내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잘 수 있다니. 심지어는 백작 자신마저도 - 편히 잘 수 없는 상황에."
"당신은 누구요?" R.A.아드가 고통 속에서 기운을 쥐어 짜내어 물었다.
"루체트 몬드리히." 그녀가 말했다. "백작을 섬기는 기사예요." 그리고서 그녀는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질문을 하는 것은 내 쪽이에요. 당신은 그냥 대답만 충실하게 하면 돼요. 알겠어요?" A.아드는 찢어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인텔리겐챠는 아니군요. 상아탑에서 오셨나요?"
".....그렇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루체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멱살을 틀어쥐고 A.아드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에게서는 나와 같은 냄새가 나고 있거든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요정의 뼈가 가진 냄새가. 하지만 당신은 엘프가 아니죠."
"요정의 뼈?"
"상아탑(Elfenbein-turm)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근원도 없는 곳에서 불쑥 솟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들이 거주하는 그 탑은 당신들이 우습게 보는 그 정치가들이 엘프들의 시체를 쌓아 만든 탑이에요. 역사란 신화를 학살한 공간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죠. 당신들은 그곳에서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마냥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고 있지만 실은 박제된 내 조상의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녀는 직업적인 느낌으로 복부에 주먹을 두 방 더 먹였다.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R.A.아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토하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역한 냄새가 방안을 채웠다.
"고마운 줄 아세요. 당신이 인텔리겐챠였다면 당장 목이 떨어졌을 거예요. 백작은 항상 내게 말했죠. 상아탑에서 손님이 오신다면 최대한 '정중히' 모시라고. 당신이 반동분자들과 접촉한 것은 알고 있어요. (아니라면, 이런 곳에 있지도 않았겠지요.) 당신은 이 지방의 내란 관련법을 무시했지만 죽음은 면했어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정중히 모신 것이죠."
"그들이 그만큼 나쁜 짓을 했습니까?" A.아드는 쿨럭거리며 힘겹게 물었다.
"여러 건의 살인과 방화, 요인 테러, 기관 테러, 마약 밀매. 더 이상의 죄과가 필요한가요?"
"남은 인원은 세 명이고, 초라한 아지트들 사이로 쫓기기만 하는 이들이 그런 짓을 그렇게나 많이 저지를 수 있습니까?"
"맞아요, 할 수 없어요." 루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A.아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원하던 대답이 이것 아닌가요?"
"....그것이 부당한 누명임을 안다면 어째서 그것이 그들의 죄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루체트가 깔깔깔 웃었다. "민중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 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가요? 나도 처음부터 백작의 밑에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나 역시 한때는 인텔리겐챠였으며 해방신학을 열렬히 받아들이던 성기사이기도 했죠. 당신은 마치 인텔리겐챠들에 대하여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배반자보다도 더 잘 알 수가 있을까요?"
"확실히 그렇군요." 하고 R.A.아드는 말했다. "당신은 왜 그들의 길에서 떨어져 나온 겁니까?"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체트가 발로 그를 걷어찼다. A.아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느다란 신음이 입술 사이를 흘렀다.
"말하지 않았나요? 질문을 하는 것은 내 쪽입니다." 그녀는 잠시 차이를 두고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잘 수 있는 거죠?"
"무슨 의미입니까?" R.A.아드는 그가 꾸었던 꿈을 떠올리며 물었다.
"백작은 꿈을 지배해요. 그는 그의 영지의 공기 속에 특정 뇌수분비물에 반응하는 씨앗을 퍼트려놓았어요. 씨앗은 숨 쉴 때마다 코로 들어가, 자는 사람의 꿈에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심어놓아요.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 점차 피곤과 공포에 눌리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루체트는 경쾌하게 책상을 두어 번 두들겼다.
"백작의 지배란 그런 것이에요. 그는 근대의 무지한 독재자들처럼, 어설프게 군대와 민족주의를 사용하여 반항심을 자극하지 않아요. 언론과 심리학, 그리고 우시아가 그의 지배의 핵심이죠. 백작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타락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작 역시 그가 지배하는 민중들과 똑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에요. 이 세계는 그의 세계예요. 타인에게 악몽을 강제하고자 한다면, 자기자신부터 악몽에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이 세계의 중추가 스스로에게 지우는 십자가인 겁니다." 루체트는 주먹을 힘차게 올렸다 책상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가구의 모서리 부분이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그런데 예외가 발생했어요." 그녀는 R.A.아드를 노려보았다. A.아드는 배를 잡고 끙끙거리느라 그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할 수 없었다. 루체트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주겠어요? 무엇이 당신에게 깊은 잠을 선사했나요?"
"몰라요."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아마 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다 하여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 같다. 어쨌건 지금은 고통이 머리를, 복부를 사정없이 울려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몸과 생각이 한데 뭉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몸이 언제 다시 이어질지 모르는 가해에 두려워 떨어댔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의연하게 공포에 대적하는 실존적 인간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것은 자아의 껍질처럼 자폐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천년을 훨씬 넘어서까지 이성에 의해 지워지지 않은 동물의 본성은 그에게 고슴도치처럼 웅크릴 힘만 주었다.
"생각해내는 것이 좋을 거예요."
루체트는 검을 칼집 속에 넣고 가드 부분을 칼집의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녀는 그것을 공중에 대고 몇 번 휘둘러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으나 튼튼하게 고정된 칼집은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루체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R.A.아드에게 휘둘렀다. 살을 뚫고 뼈까지 전해지는 충격을 되도록 덜 맞으려 몸을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그녀의 검은 사방을 두들겨댔다.
"이제는 좀 생각이 나겠어요?"
"아니, 몰라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고 있군요." 그녀는 검을 바닥에 던지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계의 질서란 모든 이에게 한치의 어김없이 작동하지 않으면 안돼요. 중력이 그렇듯이. 위반자가 그가 가진 지식을 전파해서 더 많은 이들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파괴될 거예요.
당신들은 거기에 진보의 이름을 달겠지요. 기술의 진보, 인간 정신문명의 진보.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라이트 형제가 대지의 필연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른 뒤, 하늘의 인간들은 폭격이라고 하는 대량학살법을 고안해냈지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어떤가요? 그것이 인류에 선사한 가장 큰 성과는 핵무기 아니었던가요?
상아탑 속에서 학문이라는 변명으로 탄생된 모든 진보는 가장 거대한 정치적 선동물이 되어 인류를 더한 부조리 속으로 몰아넣었어요."
“우리는 그렇지 않아. 철학은....."R.A.아드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그래요. 잊고있었군요. 모든 지배계층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겠지요. 철학이 그 모든 진보를 어그러트리고 자연법칙을 뒤틀어 인간을 대지에 회귀하게 했으니. 철학자인가요?"
R.A.아드는 면죄부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지요. 합리론이야말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어 인류를 진보로 이끈 가해자이면서 - 정작 합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슬그머니 빠져, 비합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은 피해자인 것 마냥 행세하는 학문도." 루체트가 A.아드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손을 내밀 때 그는 한 순간 움찔했으나, 루체트는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단지 힘있게 그를 일으켜 세워 부축했을 뿐이었다.
"가시지요. 백작이 기다리고 있어요." A.아드는 덜덜 떨면서도 그녀의 말에 따라 걸음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보며 루체트는 소리내지 않고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시오, 마법사 양반."
A. 아드는 벌떡 일어나 손등으로 있는 힘껏 만드라고라를 후려쳤다. 묵직한 감촉과 함께 만드라고라는 테이블에서 떨어져내려 한쪽 구석에 쳐박혔다. 만드라고라는 비명을 질렀으며, 그것을 본 다른 만드라고라들이 맹렬히 웃었다. A.아드는 소음에 얼굴을 찡그렸으나 죽지는 않았다. 만드라고라에게는 뽑힐 때 있었던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비명 속에도 웃음이 섞여있었다.
"히히. 히히. 뭐야, R.A.아드. 전혀 죽질 않는군. 히히. 죽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히히. 아닌가?"
쳐박힌 얼굴을 들어내며 만드라고라가 말했다. 그의 말을 또 다른 만드라고라가 받았다. 그의 머리 윗부분은 누가 베어 문 것처럼 허전했다.
"나의 꿈은 위대한 군주들에게 착취당했어.(히히!)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히이히히히-! 영웅이라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아닌가, R.A.아아아아아드? 이 세계의 부조리를. 히히히! 네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념해. 히히히. 부조리의 역사는 이 세계의 역사야. 한 인간의 지식이. 히히. 변화는커녕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히히히히!"
"아니면 뭘까? 히히히. 실존주의자처럼 절망하는 일에 쾌감을 느끼는 것이. 히히히. 아닐까?"
"매저키스트로군." 히히히히. 그 순간 모든 만드라고라가 다 함께 웃었다.
"백작이 너를 보고 있어. 히히."
"정말이야. 너를 잡지 않는 이유는, 히히히. 너희가 가당찮은 꿈만 꾸어서. 히히.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야. 히호-! 죽여! 더 많이 죽여! 더럽다고 생각되는 놈들을 더 많이! 너희가 보기에 정말로 죽어 마땅한 지배계급의 극점은. 히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테니까!"
"민초들이 너희의 싸구려 꿈을 알아 줄 거라고 생각해?"
"히히히.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 앞에 나서보라지. 돌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일게다. 히히. 사회주의? 아나키즘? 진정한 민주주의? 이제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 히히히. 그들에게 약간의 절망만 불어넣어 주면. 히히히.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죽이고, 그 뒤에 보상처럼 사탕 몇 개만 던져준다면. 히히히히.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 이것이 현실이다. 라고-. 따지고 보면 맞는 말 아니야? 히히히. 히히히히. 그렇지 않아? 현실을 모르는 R.A.아드?"
"진보를 믿나? 진보를 믿느냔 말이야."
"아아, 알고있어. 인텔리겐챠들은 언제나 진보의 도상을 독점하고 싶어하지. 그 놀라운 권력욕이라니. 히히히."
"왜 그러지? 짜라투스트라처럼 권력욕을 긍정하기라도 할건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 하고 있다고 변명이라도 할건가? 오오. 이런. 우리도 매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어. 새로운 고문방법, 새로운 지배법, 새로운 선동방법. 이히히히."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지 마. 힛히히. 권력을 원한다면, 백작의 밑으로 기어 들어가. 이인자라서 불만인가? 그곳에서도, 너는 다른 인텔리겐챠들의 아래잖아. 히히히. 어차피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다면. 이기고 있는 쪽이 좋지 않겠어?"
만드라고라들이 R.A.아드의 몸을 기어올랐다. A.아드는 그중 하나를 집어 목을 부러트렸다. 만드라고라의 몸 안에서 희미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달콤하기도, 쓰기도 한 냄새는 묘하게 사람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양초 냄새에 섞여 구역질이 나, A.아드는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통로는 내려올 때보다 훨씬 좁은 것처럼 느껴져 필사적으로 앞을 헤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향기를 맡은 뒤부터 다리가 풀리고, 시야가 요동쳤다. 만드라고라들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은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멤돌았다. 지면으로 다가가면서 쓰레기 더미의 악취가 그를 덮쳤다. 썩은 사과, 개가 먹다 버린 고기 조각들, 남 모르게 썩고 있는 인간의 살점 냄새까지 한번에 뒤섞여 다가와, 이런 비참한 곳에 둥지를 튼 인텔리겐챠에 대한 혐오감이 자연스럽게 식도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구역질을 참으며 지상에 올랐을 때,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으며 당당히 군림하는 하나의 실루엣이 보였다. 노인은 단아하고도 절개있게 - 그의 애마인 듯한 흑마 위에서 - 자애로움과 경애심 가득한 눈을 가지고 R.A.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보자마자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쓰레기 더미의 악취는 점점 진동함에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미소를 머금고, 적의 없이 R.A.아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푸른 초원을 보고 싶냐고 물었다. 원한다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다고. 꼭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그는 악수를 청했다. 황송하게도, 내밀어진 그 손은 트고 부르튼 자국으로 성하지 않아 더욱 더 성스러워 보였다. 자진하여 그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고싶을 정도였다. A.아드는 망설였으나 노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는 한없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미천한 자들에게도 손을 내미는 것이다! R.A.아드가 그의 오른 손을, 악수를 위하여 들었을 때 - 갑자기 근원도 모르는 어떤 곳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려왔다.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 그 소리는 망치처럼 A.아드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의 몸이 비틀거리며, 악수를 하려던 손이 쳐졌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눈으로, 노인의 성스러운 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것은 놓치고싶지 않을 만큼 유혹적인 장면이었다.
"사태 자체로." 다시 소리가 들려오고 노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괜찮느냐며 A.아드에게로 다가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의 얼굴이 지극히 선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은 R.A.아드에게 감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어떤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A.아드 스스로가 그것을 주문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린 것이다. 그는 노인의 도움을 뿌리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결코 태양빛 가득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붉은 달을 태양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노인은 단지 붉은 달을 등뒤에 놓았을 뿐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그를 조명했을 때, 그에게서 보였던 성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여전히 아름답기는 했었는데 - 그것은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오히려 구역질이 나게 했다.
그는 눈을 떴다. 인텔리겐챠의 아지트였다. 책상 위에는 양초가 반쯤 탄 채로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했었는지 허리가 몹시 아팠다. A.아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번개처럼 검빛이 밀고 들어와 그의 턱 밑에 겨누어졌다.
"움직이지 말아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에, 그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오른 쪽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의 턱 밑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하프 엘프다. A.아드가 그것을 알아낸 순간에 그녀가 A.아드의 어깨를 틀어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프 엘프의 손아귀 힘은 엄청나서, 마치 못이 어깨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런 힘과는 다르게 고상하지도 천하지도 않은 반-인간적 외모는,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갑옷과 어울려 그을린 백화나무를 연상케 했다.
그녀는 검의 폼멜 부분을 들어 A.아드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눈앞이 번쩍하며, 그의 몸은 걸레처럼 방구석에 쳐박혔다. 기사는 다가와 A.아드의 가슴 한 가운데를 오른발로 힘차게 찍었다. 그가 저항하지 못하고 꺽꺽거리는데 그녀가 몸을 기울여 그에게 말했다.
"칭찬부터 해드리지요. 대단하군요. 나는, 백작의 영지에서 이렇게 편히 자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내가 가까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잘 수 있다니. 심지어는 백작 자신마저도 - 편히 잘 수 없는 상황에."
"당신은 누구요?" R.A.아드가 고통 속에서 기운을 쥐어 짜내어 물었다.
"루체트 몬드리히." 그녀가 말했다. "백작을 섬기는 기사예요." 그리고서 그녀는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질문을 하는 것은 내 쪽이에요. 당신은 그냥 대답만 충실하게 하면 돼요. 알겠어요?" A.아드는 찢어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인텔리겐챠는 아니군요. 상아탑에서 오셨나요?"
".....그렇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루체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멱살을 틀어쥐고 A.아드를 일으켜 세웠다. "당신에게서는 나와 같은 냄새가 나고 있거든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요정의 뼈가 가진 냄새가. 하지만 당신은 엘프가 아니죠."
"요정의 뼈?"
"상아탑(Elfenbein-turm)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것이 근원도 없는 곳에서 불쑥 솟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들이 거주하는 그 탑은 당신들이 우습게 보는 그 정치가들이 엘프들의 시체를 쌓아 만든 탑이에요. 역사란 신화를 학살한 공간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죠. 당신들은 그곳에서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마냥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고 있지만 실은 박제된 내 조상의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녀는 직업적인 느낌으로 복부에 주먹을 두 방 더 먹였다.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R.A.아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토하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역한 냄새가 방안을 채웠다.
"고마운 줄 아세요. 당신이 인텔리겐챠였다면 당장 목이 떨어졌을 거예요. 백작은 항상 내게 말했죠. 상아탑에서 손님이 오신다면 최대한 '정중히' 모시라고. 당신이 반동분자들과 접촉한 것은 알고 있어요. (아니라면, 이런 곳에 있지도 않았겠지요.) 당신은 이 지방의 내란 관련법을 무시했지만 죽음은 면했어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정중히 모신 것이죠."
"그들이 그만큼 나쁜 짓을 했습니까?" A.아드는 쿨럭거리며 힘겹게 물었다.
"여러 건의 살인과 방화, 요인 테러, 기관 테러, 마약 밀매. 더 이상의 죄과가 필요한가요?"
"남은 인원은 세 명이고, 초라한 아지트들 사이로 쫓기기만 하는 이들이 그런 짓을 그렇게나 많이 저지를 수 있습니까?"
"맞아요, 할 수 없어요." 루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A.아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원하던 대답이 이것 아닌가요?"
"....그것이 부당한 누명임을 안다면 어째서 그것이 그들의 죄가 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루체트가 깔깔깔 웃었다. "민중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 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가요? 나도 처음부터 백작의 밑에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나 역시 한때는 인텔리겐챠였으며 해방신학을 열렬히 받아들이던 성기사이기도 했죠. 당신은 마치 인텔리겐챠들에 대하여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배반자보다도 더 잘 알 수가 있을까요?"
"확실히 그렇군요." 하고 R.A.아드는 말했다. "당신은 왜 그들의 길에서 떨어져 나온 겁니까?"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체트가 발로 그를 걷어찼다. A.아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느다란 신음이 입술 사이를 흘렀다.
"말하지 않았나요? 질문을 하는 것은 내 쪽입니다." 그녀는 잠시 차이를 두고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잘 수 있는 거죠?"
"무슨 의미입니까?" R.A.아드는 그가 꾸었던 꿈을 떠올리며 물었다.
"백작은 꿈을 지배해요. 그는 그의 영지의 공기 속에 특정 뇌수분비물에 반응하는 씨앗을 퍼트려놓았어요. 씨앗은 숨 쉴 때마다 코로 들어가, 자는 사람의 꿈에 만드라고라의 비명을 심어놓아요.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 점차 피곤과 공포에 눌리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루체트는 경쾌하게 책상을 두어 번 두들겼다.
"백작의 지배란 그런 것이에요. 그는 근대의 무지한 독재자들처럼, 어설프게 군대와 민족주의를 사용하여 반항심을 자극하지 않아요. 언론과 심리학, 그리고 우시아가 그의 지배의 핵심이죠. 백작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타락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작 역시 그가 지배하는 민중들과 똑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에요. 이 세계는 그의 세계예요. 타인에게 악몽을 강제하고자 한다면, 자기자신부터 악몽에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이 세계의 중추가 스스로에게 지우는 십자가인 겁니다." 루체트는 주먹을 힘차게 올렸다 책상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가구의 모서리 부분이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그런데 예외가 발생했어요." 그녀는 R.A.아드를 노려보았다. A.아드는 배를 잡고 끙끙거리느라 그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할 수 없었다. 루체트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해주겠어요? 무엇이 당신에게 깊은 잠을 선사했나요?"
"몰라요."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아마 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다 하여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 같다. 어쨌건 지금은 고통이 머리를, 복부를 사정없이 울려대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몸과 생각이 한데 뭉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몸이 언제 다시 이어질지 모르는 가해에 두려워 떨어댔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의연하게 공포에 대적하는 실존적 인간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것은 자아의 껍질처럼 자폐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천년을 훨씬 넘어서까지 이성에 의해 지워지지 않은 동물의 본성은 그에게 고슴도치처럼 웅크릴 힘만 주었다.
"생각해내는 것이 좋을 거예요."
루체트는 검을 칼집 속에 넣고 가드 부분을 칼집의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녀는 그것을 공중에 대고 몇 번 휘둘러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으나 튼튼하게 고정된 칼집은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루체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R.A.아드에게 휘둘렀다. 살을 뚫고 뼈까지 전해지는 충격을 되도록 덜 맞으려 몸을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그녀의 검은 사방을 두들겨댔다.
"이제는 좀 생각이 나겠어요?"
"아니, 몰라요. 정말이에요."
"당신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고 있군요." 그녀는 검을 바닥에 던지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계의 질서란 모든 이에게 한치의 어김없이 작동하지 않으면 안돼요. 중력이 그렇듯이. 위반자가 그가 가진 지식을 전파해서 더 많은 이들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파괴될 거예요.
당신들은 거기에 진보의 이름을 달겠지요. 기술의 진보, 인간 정신문명의 진보.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라이트 형제가 대지의 필연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른 뒤, 하늘의 인간들은 폭격이라고 하는 대량학살법을 고안해냈지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어떤가요? 그것이 인류에 선사한 가장 큰 성과는 핵무기 아니었던가요?
상아탑 속에서 학문이라는 변명으로 탄생된 모든 진보는 가장 거대한 정치적 선동물이 되어 인류를 더한 부조리 속으로 몰아넣었어요."
“우리는 그렇지 않아. 철학은....."R.A.아드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그래요. 잊고있었군요. 모든 지배계층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겠지요. 철학이 그 모든 진보를 어그러트리고 자연법칙을 뒤틀어 인간을 대지에 회귀하게 했으니. 철학자인가요?"
R.A.아드는 면죄부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지요. 합리론이야말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어 인류를 진보로 이끈 가해자이면서 - 정작 합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슬그머니 빠져, 비합리를 주장하면서, 자신은 피해자인 것 마냥 행세하는 학문도." 루체트가 A.아드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손을 내밀 때 그는 한 순간 움찔했으나, 루체트는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단지 힘있게 그를 일으켜 세워 부축했을 뿐이었다.
"가시지요. 백작이 기다리고 있어요." A.아드는 덜덜 떨면서도 그녀의 말에 따라 걸음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보며 루체트는 소리내지 않고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