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2
무간도시(無間都市)
주제어 : 정전
#밤. 지석의 사무실
지석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컴퓨터 옆으로는 그가 작업한 문서가 가득 쌓여있고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와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고 있는 커피 잔이 보인다. 지석은 탕약을 마시듯이 커피를 들이키며 피곤하고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이 작업 중인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자신의 아내다.
-당신 오늘 또 야근이에요? 오늘이 당신 생일인 건 알고 있어요? 수빈이가 케이크 앞에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오늘만은 10시 전에 집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어요?
지석이 휴대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 지금 바쁘니까 전화 끊어! 아, 돌아가면 먹을 수 있게 식탁에다 밥이나 좀 차려놔. 당신이랑 애는 먼저 자도 돼.”
띡,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것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계속 일에 몰두하려는데 다시전화가 걸려온다.
짜증스런 듯이 휴대폰을 노려보는 지석.
전화를 받으며 대뜸 화부터 낸다.
“아, 자꾸 귀찮게 이럴 거야?!?! ……응? 아아! 미안! 미안… 은영이었구나.”
바로 자신의 정부(情婦)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던 것이다. 아내와 통화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지석은 피곤도 잊은 듯이 얼굴이 환해진다.
“응, 그래… 피곤하지… 응. 하하!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지석,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본다. 9시가 다 되간다.
“어, 그래… 10시 전엔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께. 집에도 늦는다고 말해놨어. 케이크 같은 건 사놓지 마. 유치하잖아, 애들도 아니고… 하하! 샴페인이나 미리 따놓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응. 그래. 하하! 그래, 알았어. 나도 사랑해.”
자기 휴대폰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하고 전화를 끊는 지석. 피곤한 듯이 기지개를 켜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선다.
책상 뒤로 붙어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들이 거대한 도시를 치장하고 있다. 새까만 강물을 가로지르는 대교 위로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나. 도시를 내려다보는 지석의 얼굴에 잠시 감회가 스친다.
오지석은 잘 나가는 외국계 대기업의 차장이다. 예쁜 딸과 아내가 있고, 애인도 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60층짜리 거대한 빌딩이었는데, 회사 내에서의 계급과 호봉이 높을수록 높은 층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20층 아래로는 말단 직원, 30층 위로는 차장급, 회장 및 임원들은 50층 이상 이런 식이다.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차장의 직위에까지 오른 오지석의 꿈은 지금처럼 고속승진을 계속 하여 남들보다 훨씬 빨리 50층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사는 이 도시의 꼭대기라 할 수 있는 60층 빌딩의 최고층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지석은 문득 경계하는 얼굴로 등을 돌린다. 그리곤 복도를 향해 나있는 반대편 유리창을 향해 걸어간다. 거기는 블라인드가 내려져있었다.
지석은 블라인드를 살짝 벌리고 그 틈으로 복도 쪽을 내다본다.
회사의 거의 모든 직원이 퇴근한 시간이라 불이 꺼진 복도는 캄캄했지만,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석의 사무실과 마주보고 있는 라차장의 사무실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복도를 향해 나있는 유리창을 통해, 그 안에서 아직도 열심히 작업 중인 라차장의 모습이 보인다.
“저 독종 같은 새끼…” 지석은 욕지기를 씹는다. 벌써 3주째다. 저 놈이 퇴근하기 전에는 자기도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은영과의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다.
라차장은 오지석의 라이벌이다. 그는 지석의 입사동기로서 지석과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유능함을 인정받아 회사의 36층에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배정받은, 오지석의 대학후배이기도 했다.
학연으로 이어져있었지만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보니 오지석과 라차장은 회사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충돌했다. 특히 오지석은 라이벌보다 더 좋은 기획안, 더 훌륭한 업무성과를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라차장을 감시하고 경계했다. 라차장이 사장으로부터 혼자 칭찬이라도 들으면 그날은 잠도 못자고 혼자 술로 밤을 지세울 정도로 오지석의 경쟁심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가 오지석과 라차장 두 사람에게 떨어진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을 진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제출받은 기획안을 회장과 임원들이 평가하여 더 잘 된 것을 쓰겠다는 것이다.
지석으로서는 천우신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프로젝트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부장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고, 눈엣가시 같았던 라차장과의 격차도 그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치 벌려놓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석은 그날부터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다. 안 그래도 야근이 잦았던 그가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지석의 라이벌인 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불이 꺼진다. 주변이 캄캄해지자 지석은 당황한 듯이 두리번거린다.
건물 밖으로 난 유리창을 바라보니, 어둠이 밀물처럼 도시 전체로 뻗어가고 있다.
지석은 혀를 찬다. 하필 이런 때 정전이라니. 책상 쪽으로 걸어가다 그만 탁자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닥친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다. 짜증이 더해간다.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집어 들어보지만 아무 것도 안 들린다. 정전이 맞나보다.
곧 원상복구 되겠지… 지석은 기다리기로 한다. 자기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사무실 문 밖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안 쓴다. 그대로 잠이 든다.
정전 1일 째
깨어보니 아침이다. 지석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아침 9시가 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지석은 신음처럼 뇌까리며 급하게 화장실로 향한다. 아침회의시간에 늦은 것이다. 한번도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 중요한 때에.
#개인화장실
간단하게라도 세면을 하려 했지만 수도꼭지에선 물이 안 나온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석의 얼굴이 굳는다. 별 수 없이 거울을 보고 대충 몸단장을 끝낸 다음 넥타이를 다시 매고 사무실로 돌아가 보고서류를 챙겨든다.
#어두운 복도
아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오지만, 회사 안이 너무 조용하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복도 위엔 지석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상함을 느낀 지석의 발길은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순간, 오늘이 휴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어제는 분명 목요일이었고 오늘은 4월 21일. 아무 날도 아니었다. 설령 휴일이었다 해도 야근이 많은 회사라 빌딩 안엔 명절에도 사람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휑뎅그렁한 복도에 불이라도 켜기 위해 자신이 직접 벽에 붙은 스위치를 딸칵거려 보지만, 전기는 여전히 안 들어온다. 복도의 양쪽으로 붙어있는 사무실을 하나하나 다 살펴봤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석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나?
#사내 엘리베이터
지석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번호판에도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정전이 되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여야 정상이다. 이런 고층빌딩엔 비상발전기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석은 신경질적으로 도어 버튼을 탁탁 치지만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나 밑을 가리키는 화살표나 불이 안 들어오긴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도 멈춘 것이 분명하다.
회의실은 4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석은 별 수 없이 비상계단을 뛰어올라간다.
#사내 로비
땀을 뻘뻘 흘리며 46층 로비에 도착했지만 텅 비어있는 건 그곳도 마찬가지다. 본래는 예쁜 여직원들이 생글생글 미소로 맞아주던 안내 데스크에도 사람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그 넒은 공간에 실내등이 꺼져있어 음침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환풍기도 안 돌아가는지 건물 안은 덥고 공기가 탁하다.
지석은 곧장 회의실로 가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보지만, 역시나 커다란 회의용 탁자 주변엔 아무도 없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석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아침회의 시간에 늦었다는 오점 하나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한숨 돌리는데, 아뿔싸! 그제야 자신이 사무실 문을 안 잠가놓고 왔다는 사실이 번갯불처럼 떠오른다. 사무실 안에는 특별히 돈이 될만한 귀중품 같은 건 없지만 그동안 자신이 죽을 똥 살 똥 작업해 놓은 모든 파일이며 문서들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게다가 라차장의 사무실이 바로 복도 맞은편이다.
지석은 올라올 때보다 3배는 빠른 속도로 쿵쾅쿵쾅!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지석의 사무실
그렇게 자신의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는데, 다행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침입한 흔적은 없다. 작업해놓은 문서들도 그대로 있다. 지석은 책상 모서리에 팔을 기댄 채 거친 숨을 진정시킨다. 그러다가, 어젯밤 자기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자신의 휴대폰에 시선이 머문다. 그것을 집어 드는 지석.
탁. 슬립을 열어보니 ‘통화지역이탈’이 뜨고 있다. 지석의 표정이 더욱 굳어진다. 단축번호 1번을 눌러 은영에게로 전화를 걸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안 걸린다. 혀를 차며 슬립을 닫아버리는 지석. 휴대폰을 품안에 넣고 사무실을 나간다.
#어두운 복도
지석은 자기 사무실 문을 잠그는데 열쇠를 3개나 쓰고 있었다. 원래 손잡이만 잠그도록 되어있는 문이었지만, 라차장이 자기 사무실 맞은편에 자리 잡게 되면서 지석 자신이 사비를 들여 도어록을 2개 더 달았다.
그렇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몸을 돌리는데 라차장의 사무실이 보인다. 복도로 나있는 창문을 통해 보니 사무실 안엔 라차장이 없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문서들. 화면이 꺼져있는 모니터, 그 주변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메모들.
지석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라차장은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정전 된 실내는 어두침침하기만 할 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지석은 가만히 라차장의 사무실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붙잡는다. 손목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리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은 잠겨있다.
지석, 맥 빠진 웃음을 뱉는다.
“라차장… 이 소심한 새끼…”
자리에 없는 경쟁자를 비웃으며 지석은 그 자리를 떠난다.
워낙 큰 건물이다 보니 빌딩에는 원래 5기의 엘리베이터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 모두를 다 둘러봤지만 엘리베이터는 모두 멈춰있었다.
지석은 결국 걸어서,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지하주차장 안.
등산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지석은 자신의 승용차 앞에서 헉헉대고 있다. 36층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는, 빌딩을 걸어 내려오면서 층마다 들려 혹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뒤에야 지석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지금 이 빌딩 안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다.
대체 무슨 일이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석은 자신의 차로 들어간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8차선 도로 위
차를 타고 빌딩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는 지석.
그런데 쭉 뻗은 8차선 도로는 텅텅 비어있다. 차를 움직이면서 차창을 통해 좌우를 살펴봐도 자기가 모는 자동차 말고 움직이는 것이라곤 전혀 눈에 띠지 않는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지나다니는 똥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쇼윈도 안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생명 없는 마네킹이 반갑게 여겨질 지경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호등에도 불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도시가 정전 중이더라도 신호등에 불이 안 들어올리는 없다. 지석은 전기기술자도 아니고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정전이라고 신호등이 나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따로 특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모든 신호등이 꺼져있는 것이다.
이게 정말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잠든 사이 전쟁이라도 난 건가? 핵폭탄이라도 떨어지기로 했나? 그래서 다들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간 건가? 여기가 아직 꿈속인가…
지석은 달리는 차 안에서, 생전 듣지도 않던 라디오를 켠다. 그러나 어떤 주파수를 틀어 봐도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방송은 나오고 있지 않다. 지석, “씨발, 이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욕을 씹는다.
#은영의 아파트
잠시 후, 지석은 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바로 지석의 정부인 은영이 사는 집이 있는 곳이다.
차를 주차해 두고 은영의 아파트로 올라갔는데, 문이 활짝 열려있다.
지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은영의 집은 불이 꺼져 캄캄하다.
“자기, 나왔어.” 하고 은영을 불러보지만 집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에 딸린 주방의 식탁 위에 샴페인과 두 잔의 술잔이 보인다. 어젯밤 내내 눈이 빠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은영을 생각하니 지석은 미안함과 함께 잠시 행복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식탁으로 다가간 지석은 샴페인이 비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두 개의 술잔에는 마시다 만 것처럼 술이 조금씩 남아있다. 그 중 하나에는 은영의 것이 분명한 붉은 립스틱 자국도 보였다.
은영은 어젯밤 누구와 함께 술을 마신 걸까?
지석의 인상이 굳어진다.
“은영아!”
애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벅저벅 빠르게 침실로 걸어가는 지석.
벌컥- 하고 방문을 열자 베게와 이불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더블침대가 나타난다. 누가 그 위에서 레슬링이라도 한 것처럼 침대 위는 엉망진창인 상태다. 방안은 텅 비어있다.
지석은 더더욱 인상을 구긴다.
그때, 딩동- 하고 뒤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지석. 곧장 그 집의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철컥! 문을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앞엔 큼직한 꽃다발과 사진 한 장이 놓여있다. 그것을 주워드는 지석. 누가 이걸 놓고 간 걸까? 아파트 계단 쪽을 바라봤지만 거기는 아무도 온 적 없다는 듯이 적막하기만 하다.
지석은 사진을 본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다.
두 남녀가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었다. 한눈에 봐도 두 사람은 부부 아니면 애인사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둘 다 지석이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지석의 애인인 은영과 그의 라이벌 라차장이다.
갑작스런 충격에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마는 지석.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미친 사람처럼 아파트 계단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 거기에 붙어있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이 분노에 찬 눈으로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위에서 샅샅이 살펴봐도 이 사진과 꽃다발을 배달한 사람의 흔적 따윈 찾을 수 없다.
지석은 방금 배달되어 온 꽃다발을 계단 난간에 탁탁 내리친다. 꽃들이 뭉개지며 산산조각 난 꽃잎들이 난간 주변에 흩어진다. 그걸로 성이 안 차는지 지석은 꽃다발을 땅에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기까지 한다.
꽃다발과 함께 주운 두 사람의 사진도 찢어버리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지석은 자신을 추스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자기 품안에 넣는다.
그리고 거기를 빠져나간다.
#대낮. 시가지
지석은 차를 몰고 이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불편한 그의 심기를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그의 차는 최고속도로 거칠게 달리고 있다. 하지만 속도위반으로 그의 차를 붙잡을 경찰들은 지금 없다. 그렇기는커녕 그 큰 도로를 달리는 차라곤 지석의 승용차 한대뿐이다. 신호등도 멈춘 상태니 지금 그의 앞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석의 집. 거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석.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집에 들어섰는데 역시 아무도 없다. 아내와 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막 뿐.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거실 벽에 붙어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딸칵거려보지만 불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부엌으로 가서 도시가스 벨브를 열고 가스레인지의 회전식 스위치를 돌려봤지만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점화기에 스파크만 일어날 뿐 가스불은 붙지 않는다.
이거 설마 밤이 되도 이러려나… 한숨짓는 지석의 눈에 식탁 위의 케이크가 들어온다. 지석의 나이만큼 꽂혀있는 초들은 불을 붙인 적이 없어 깨끗하다. 케이크가 올려진 식탁을 둘러싸고 세 개의 의자가 단란하게 놓여있다. 그 중 하나에는 지석이 언젠가 딸의 생일선물로 사준 커다란 곰 인형이 앉아있다.
문득 딸이 보고 싶어진 지석은 딸의 방으로 간다.
#지석의 집. 딸의 방
방안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딸의 모습은 없었다. 작은 침대 위 한복판에 작은 MP3가 올려져있다. 지석은 딸의 침대에 걸터앉아 MP3를 만지작거린다. 이것도 자기가 딸한테 선물로 사준 것이다.
MP3에서는 음악이 아닌 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무 버튼이나 눌렀더니 라디오 기능이 작동했나 보다.
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 비슷한 게 들린다. 지석은 MP3를 자기 귀에 대고,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하지만 잡음이 너무 심해 그의 소리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지석은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보던 중, 라디오에서 어느 순간 한 남자의 분명한 소리를 듣는다.
-오지석씨! …지직
-오지석씨, 내 말 들립니까? …지지직
지석의 눈이 커진다. 지금 분명 오지석이라고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지석은 혼란스런 얼굴로 MP3를 만지작거리지만 아무리 주파수를 맞춰도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정전 2일 째
#지석의 회사 앞.
다음 날도 지석은 변함없이 회사로 출근했다. 물이 나오지 않아 씻지를 못해서 얼굴이 부스스하다. 지석은 자기 회사 앞에 차를 세우고 60층짜리 거대한 빌딩을 올려다본다. 도시는 여전히 적막하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 1층만 둘러봤지만 불이 꺼진 건물 안은 음침한 기운만 감돈다. 엘리베이터도 계속 운행이 정지된 상태다. 이래서는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기도 힘들다.
지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건물을 빠져나온다.
#도심 한 복판
지석은 미친 듯이 차를 몬다. 속력을 얼마나 냈는지 열 받은 자동차 엔진 소리가 짐승처럼 날카롭다. 코너를 돌 때마다 차바퀴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신호등은 모두 꺼져있다. 이 넓은 도로를 달리는 차는 지금 지석의 승용차 한대뿐이다.
차를 타고 도시를 다 둘러봤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석은 차에서 내려 집집마다 샅샅이 훑었다. 문이 잠겨져있지 않은 집은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어요?” 하고 사람을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소용 없었다.
지석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까지 그 짓을 계속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도시엔 나 말고 아무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왜?
지치고 허탈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있던 지석. 문득 어제 은영의 집에 갔을 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배달되어 온 꽃다발과 사진이 생각난다.
그 사진을 품에서 꺼내드는 지석.
그것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딘가로 향한다.
눈빛이 날카롭다.
#저녁. 라차장의 집
지석이 자신의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바로 라차장의 저택이었다.
지석은 자신의 차 조수석 서랍 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낸다. 거기에 은영과 라차장이 함께 찍은 사진을 넣고 침을 묻혀 봉한다. 그런 다음 펜을 꺼내 봉투 겉면에다가 크게 쓴다.
‘라창식 차장 부인 앞’
지석은 그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라차장의 저택 대문 앞으로 재빨리 뛰어간다. 봉투를 그 집 우편함에 집어넣고 다시 자기 차로 돌아온다. 차를 몰고 곧장 그곳을 뜬다.
#밤. 지석의 승용차 안.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석은 휘파람을 불며 운전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다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지석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한손으로 자기 배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다.
#밤. 지석의 집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깜깜하다. 지석은 촛불을 들고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텅 빈 공간 속엔 랩에 싸진 스테이크용 쇠고기 한 덩이만 달랑 올려져있다. 그것을 꺼내 촛불로 비춰보니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안 돼있다. 냄새를 맡아보니 약간 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석은 아까운 표정을 짓지만 별 수 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밥통을 열어봐도 밥이 없다. 지석은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물도 여전히 안 나온다. 지석 짜증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며 주방에서 나온다.
지석은 그날도 쫄쫄 굶은 채 잠이 들었다.
정전 3일 째
#아침. 지석이 차를 몰고 달리고 있다.
지석은 해가 뜨자마자 근처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편의점 안은 그의 집 냉장고 속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지석은 편의점을 빠져나와 다시 차를 몰고 이번엔 대형 할인마트로 갔다. 그러나 물과 식료품을 구할 수 없는 건 거기도 마찬가지다. 옷이나, 컴퓨터 같은 가전제품들은 그대로 있었다. 오직 먹을 것만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할인마트를 빠져나와 다른 백화점을 들어가 봐도 똑같았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백화점 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세면대 수도관 밑에 얼굴을 대고 입을 벌린 채 벨브를 열어봤지만 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온다.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지석은 화를 내며 화장실을 뛰쳐나간다.
#강변
잠시 후, 지석은 차를 타고 강변에 도착한다. 허겁지겁 차에서 내린 지석은 초췌한 몰골로 강물을 향해 달려간다. 그대로 강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표정은 절박해보이지만, 강물을 떠서 마시려는 순간 그는 멈칫한다.
강이 너무 더러운 것이다. 그의 두 손에 고인 물 속에 새까만 이물질들이 덩어리져서 떠다니는 게 보인다. 지석의 안색이 더욱 굳어진다. 이건 도저히 마실 수 없다.
정전이 되면서 강을 정화시키던 시스템도 멈춘 게 아닐까. 아니면, 누가 강에 독극물이라도 풀었나. 어쩌면 도시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 건너편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지석 깜짝 놀라 땅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건너편에 서있는 사람이 자신의 정부인 은영이라는 사실에 더욱 경악하고 만다.
“아니, 은영… 은영아!”
큰 소리로 은영을 불러보는 지석. 하지만 은영은 지석의 존재를 못 알아차린 것 같다.
“은영아! 은영아!”
그녀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지석은 다시 크게 소리 지르며 그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기까지 하지만 은영은 계속 강바람이나 쐬고 있다.
아무래도 저기로 건너가야 할 모양이다. 지석이 차로 향하려는데, 한 남자가 은영의 뒤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지석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그쪽을 쳐다본다.
“아니? 저 자식이…”
그 남자는 바로 라차장이었다. 라차장이 은영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 은영 그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는다. 지석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저 연놈들을 그냥…”
그는 미친 듯이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건다. 그대로 차를 몰고 교각 쪽으로 향한다. 얼마나 속력을 낸 건지 모르겠다. 다리를 건너 두 사람이 있던 지점으로 단숨에 도착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그새 사라지고 없다.
지석은 차를 타고 그 주변을 샅샅이 살펴본다. 하지만 이 도시에 자기 말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계속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럼 내가 귀신이라도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운전대를 자기 머리로 쾅쾅 들이박으며 괴로워하는 지석.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흉포한 낯빛으로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간다.
#은영의 아파트
지석은 은영의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곳을 다 때려 부순다. 가구를 넘어뜨리고 TV를 박살내고 자기와 다정히 찍은 사진을 구둣발로 짓밟는다.
그러다 한 장의 서류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의 집문서다.
지석은 사실 지금의 아내와 이혼하고 은영과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위자료를 물지 않기 위해 적당한 꼬투리를 잡을 수 없어 계속 시간만 끌고 있던 중, 사랑의 증거를 보여 달라는 은영의 떼씀을 못 이겨, 원래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던 가족들이 사는 집을 은영 앞으로 넘겨주고 만다.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인 것이다.
지석은 이미 은영의 것이 된 자신의 집문서를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지석의 집
집으로 돌아온 지석은 갈증과 허기에 지쳐 녹초가 되어 있다. 그대로 거실 소파에 쓰러지는데, 주방 식탁 위에 차려진 케이크가 그제야 다시 눈에 들어온다. 벌떡 몸을 일으켜 식탁으로 달려가는 지석.
그 위에 꽂힌 초들을 대충 뽑아내버리고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덥석 집어먹는다. 그러다 목이 막히는지 콜록거린다. 지석은 싱크대 서랍에서 랩을 꺼낸다.
전기와 수도와 모든 것이 끊긴 이 삭막한 도시에서 지금 그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가족들이 남겨둔 자신의 생일 케이크밖에 없다. 겨우 이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잘 갈무리 해두려는 것이다.
먹다 남은 케이크를 랩에 주워 담던 지석은 케이크 상자 밑에 접혀있던 예쁜 카드를 발견한다.
지석, 카드를 펼쳐본다. 그것은 딸이 손수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아빠가 우리 아빠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 케이크 아빠 드리려고 내가 엄마랑 만든 거예요.
꿀 먹은 벙어리 같은 얼굴이 된 지석. 딸이 남긴 카드에 눈을 박은 채 잠깐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 손아귀에 힘이 풀렸는지, 바보같이 케이크가 담긴 랩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랩에서 흘러나온 빵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깜짝 놀란 지석. 바닥에 몸을 숙여 그것을 허겁지겁 다시 주워 담는다. 꼭 혼이 나간 사람 같다.
딸이 만든 케이크였다… 우리 딸이… 그 어린 것이……
“………”
지석. 주방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 내어 운다.
정전 4일 째
씻지도 못하는데다가 물과 음식도 며칠 동안 입에 대지 못한 지석의 몰골은 장난이 아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붙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지석은 딸의 MP3를 자꾸 만지작거린다. 그것으로 라디오를 들어보려 하지만 어떤 주파수를 맞춰도 들리는 방송은 없다.
지석,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식탁에 던져두고 밖으로 나간다.
자신의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보니 연료가 다 떨어져가는 것을 알리는 기름등이 켜진다. 오늘은 차를 몰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보려고 했던 지석의 얼굴에 낭패가 낀다. 자신이 아는 주유소 몇 군데를 돌아보지만 여전히 사람은 안 보이고, 직접 주유를 하려고 해도 기름통에선 기름이 한 방울도 안 나온다.
지석은 차에 기름 채우는 걸 포기하고 자기 회사로 간다. 벌써 4일이나 일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몇 주 동안 죽도록 작업한 자신의 분신들이 잘 있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지석의 회사
지석의 사무실은 36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정지 상태. 지석은 정말 단단히 각오를 하고 빌딩의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2시간의 사투 끝에 36층에 도착한 지석은 복도 끝에 주저앉는다. 눈앞이 핑핑 도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정신을 추스른다. 불 꺼진 복도는 대낮인데도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지석.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지석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지석의 사무실
사무실 안으로 뛰어든 지석. 자기가 작업해놓은 문서들이 깨끗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 잠긴 문을 열고 그의 사무실로 침입해 문서들은 물론 컴퓨터까지 분해 해체해 하드디스크를 떼어가 버렸다. 그 안엔 지석이 이 회사에 와서 이뤄놓은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누구야! 대체 누가…”
흥분한 지석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바닥에 사진 한 장이 떨어져있다. 그것을 주워드는 지석.
“………”
그 사진은 바로 이틀 전 자신이 라차장의 집 우편함에 직접 넣어둔 은영과 라차장의 사진이었다.
“라차장, 이 개새끼…”
지석의 얼굴에 화염이 들끓는 것 같다. 지석은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다.
#라차장의 집
빌딩을 뛰어내려온 지석은 차를 몰고 곧장 라차장의 집으로 찾아간다. 뒷좌석에서 골프채를 꺼내 한 손에 들고 경쟁자의 집으로 향하는 지석의 두 눈엔 불똥이 튀고 있다.
대문이 열려있어 지석은 라차장의 집 안으로 쉽게 들어선다. 그리고 곧 경악할 만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집의 정원에서 불에 타고 있는 자신의 작업문서와 하드디스크를 보게 된 것이다.
지석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불을 탁탁 밟아 꺼트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서들은 재로 변해있었고 하드디스크도 검게 타서 완전히 망가진 상태다.
지석, 치를 떨며 라차장의 저택을 노려본다. 골프채를 들고 그 집의 현관으로 들어선다.
#라차장의 집. 1층 거실
지석이 거실로 들어가 보니, 라차장은 편안히 소파에 앉아 클래식 음악이나 듣고 있었다. 지석은 골프채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발소리를 죽여 라차장의 뒤로 몰래 다가간다.
지석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서자, 라차장 갑자기 입을 연다.
“날 죽일 용기나 있습니까? 선배?”
격분한 지석이 골프채를 휘두른다.
라차장,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지만 지석의 난동은 멈추지 않는다. 온 힘을 실은 골프채가 바닥에 쓰러진 경쟁자를 철저하게 짓밟는다. 지석의 얼굴이며 벽에 붉은 피가 튄다.
그렇게 한참을 고기를 다지듯 라차장을 박살내버린 지석.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라차장은 이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시신으로 바뀐 뒤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지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곳에서 도망친다.
#지석의 차 안.
차에 올라탄 지석은 온 몸이 피투성이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피가 아닌 방금 자신이 살해한 라차장의 혈흔이었다.
허겁지겁 키를 꽂고 돌렸는데 시동이 안 걸린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경고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지석은 자신의 차에서 나온다.
지석은 라차장의 피를 뒤집어 쓴 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도심 한복판을 혼자 달려간다. 다행히 그의 집은 거기서 별로 멀지 않았다. 지석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표정이다.
#지석의 집. 주방.
집에 들어가기 무섭게 주방 싱크대로 뛰어가 수돗물을 틀었지만 물은 안 나온다. 몸에 묻은 피를 씻을 수가 없다. 울 것처럼 욕을 씹어대는 지석.
그 순간, 그가 아침에 식탁 위로 던져놓은 딸의 MP3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지직… 여보? 여보! 내가 보여요? 지직…
그것은 바로 아내의 목소리였다.
헉! 하고 놀란 지석은 후다닥 식탁 위로 달려든다. MP3를 붙잡더니 거기다 대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여, 여보? 여보! 당신 거기 어디야?”
지석은 기다려보지만 라디오는 한동안 잠잠하다.
“……여보! 제발 대답 좀 해봐! 흐흐흑!”
지석,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다시 소리가 흘러나온다.
-선생님! 선생님, 오셨군요. 이 사람 방금 눈을 깜빡였어요. 지직…
-어디 봅시다. 지지직…
지석 울음을 멈추고 라디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와 한 남자의 목소리가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내가 얼굴을 만지니까 눈동자가 움직였다고요.
-……오지석씨. 내 말 들립니까? 내 말 들리면 눈을 깜빡여보세요.
지석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다. 아내가 대체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건가?
-……부인, 유감이지만 남편 분 상태는 똑같습니다. 뇌사에 빠졌더라도 자율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기면 눈을 깜빡인다든지 몸의 특정부위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현상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정말 너무 하시군요. 우리 남편 아직 안 죽었어요. 시체라느니 하는 말은 삼가주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남편 분은 의학적으로 봤을 땐 숨만 붙어있을 뿐 이미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호흡도 산소호흡기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고요.
-그럼 저 눈빛은요? 저 눈 좀 보라고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잖아요. 어제는 딸이 와서 아빠를 부르니까 눈물이 흘러내리는 거 의사선생님도 보시지 않았어요.
-……물론, 뇌사에 빠져 의식이 꺼졌더라도 오지석씨의 자아는 잠재의식 어디엔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자아가 지금 우리의 목소리도 듣고 있는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정전이 된 도시에 혼자 갇혀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이 꺼져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무의식 속을 영원히 헤매고 있을 겁니다. 저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만,…… 무엇이 정말로 남편 분을 위한 일인지…… 부인께서도 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지석이 식탁 밑에 주저앉는다.
라디오에선 다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물에 젖은, 힘없는 목소리다.
-나가주세요…… 남편과 둘이 있고 싶어요……
끼익, 쾅. 문 열고 닫히는 소리.
-여보……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에 지석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고 있는 아내의 온기가 이 차가운 무의식 속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여보…… 그렇게 일에만 매달리시더니…… 우리 딸 수빈이가 당신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알아요?
지석, 그것이 아내의 손이라도 된 듯 라디오를 붙잡고 윽윽… 소리 내어 운다.
-……그래도 난 당신이 살아있기라도 해줘서 고마워요. 라차장님한테도…… 정말 고마워해야겠어요.
지석, 갑자기 눈물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다. 라디오에서 아내가 계속 말한다.
-당신……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다 뇌졸중으로 그렇게 쓰러졌을 때 라차장님이 당신을 살렸어요. 그때 라차장님도 당신처럼 야근 중이었는데 뒤늦게 생일 축하하러 갔다가 당신이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고 해요. 그때 그분이 그렇게 빨리 응급처치도 하고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의사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지석,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집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라차장의 집
잠시 후, 지석은 라차장의 집으로 돌아온다.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라차장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훅하고 끼쳐온다. 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까 낮에 자신이 때려죽인 라차장에게로 다가갔다.
라차장은 그 자신이 만든 피웅덩이 속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있었다.
지석, 라차장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돌아 눕힌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기에 죽어있는 시체는 라차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골프채에 짓뭉개져 엉망으로 죽어있는 시신은 바로 오지석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석,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난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러더니 다시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오지석의 집
집으로 돌아온 지석은 그때부터 계속 라디오만 끌어안고 지냈다.
라디오에선 간간히 소리가 흘러나오긴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무전기가 아니다.
“나 안 죽었어!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누가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줘요!”
울부짖어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전 7일 째
그렇게 아껴먹었지만 딸이 만들어준 케이크가 다 없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목이 말라서 케이크가 더 남아있다 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는데 어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지석은 혼자 소파에 누워 꿍꿍 앓는다. 그러던 중 다시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아내와 은영의 목소리였다. 뇌사 상태에 빠진 자신을 은영이 찾아온 것이다.
지석은 잔뜩 긴장해 라디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얘긴 나가서 해요. 남편이 아파서 누워 있잖아요. 어서 이리 나와요.
-이거 놔요! 지석씨 있는 앞에서 똑바로 따져보자고요. …여기 집문서 보이죠? 이게 지금 누구 이름으로 돼있죠? 누구 이름으로 돼있는지 똑똑히 보라고요!
지석은 경악한다.
아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그랬을 리가 없어요! 남편이 깨어나면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당장 집을 비우라니, 그럼 나랑 수빈이는 어디 가서 살라는 말인가요?
-그걸 내가 왜 신경 써야 돼? 게다가 당신 남편은 이미 죽었다잖아. 산송장 붙잡고 언제까지 시간 끌 셈이야? 모레까지 내 집에서 안 나가면 법대로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쾅!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린다.
지석은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라디오, 아니 자신의 무의식 너머 현실에 있는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흑, 흑흑…… 엉엉……
아내의 우는 소리에 지석도 따라 울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끌어안고 지석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흑흑…”
정전 10일 째
#도심. 한 낮
오늘은 지석이 뇌졸중으로 자기 사무실에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진지 10일 째가 되는 날이다.
“으아아아아!”
아무도 없는 도심 한복판을 지석이 미친 사람처럼 소릴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지만 한손엔 여전히 라디오가 들려있다.
“으아아아! 일어나! 눈을 떠! 눈을 뜨라구! 이 개자식아!”
지석은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며 텅 빈 도심 위를 다시 맨발로 달린다.
“으아아아아아!”
그렇게 앞도 보지 않고 달리다가 전봇대와 충돌한다. 억! 소릴 지르며 아스팔트 위에 쓰러지는 지석. 들고 있던 라디오를 땅에 떨어트린다.
허기와 갈증에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금방 무리를 해서인지 그는 이제 혼자 일어설 힘도 없는 것 같다. 바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딸의 MP3를 주우려고 손을 뻗어봤지만 배멀미를 하는 것처럼 눈앞이 오락가락한다.
그때, MP3에서 다시 소리가 들린다. 지석의 눈빛이 힘을 되찾는다. 자신의 담당의사라는 작자의 목소리였다.
-이름 오지석… 나이 35세…
-회사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음. 수술 치료 시도했으나 소용없음. 비가역적 혼수상태로 결론.
-자가 호흡 없음. 동공 반응 없음. 뇌사로 판정.
“아니야! 아니라고!”
지석은 땅에 떨어진 라디오에 대고 소리 지른다.
-……동의하십니까? 부인?
의사가 지석의 아내에게 묻는다.
지석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아내가 대답한다.
-…………네.
“아, 아니……”
지석, 지옥을 마주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땅에 꿇어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여기…… 장기기증 동의서에 사인하시죠.
“그만 해! 그만 하라고 이 개자식아!”
지석, 절규하다 마침 근처에 떨어져있던 돌을 주워 라디오를 박살내버린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
라차장을 골프채로 죽였듯이, 그렇게 한참을 짱돌로 이미 박살난 라디오를 내리치다가 지석은 진이 빠진 듯 울음을 터뜨린다.
“흐흐흐흑!”
산산조각 난 라디오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병든 사람마냥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지석. 어딘가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지석의 회사
지석의 발길이 멈춘 곳은 바로 자신이 다니던 회사였다.
60층이 넘는 건물을 지친 눈으로 올려다보는 지석. 그 끝은 천국에 닿을 듯이 아스라하기만 하다. 그런데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주위가 어두워지며 순식간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지석은 흠뻑 젖은 채 회사 입구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상향이 있는 곳, 자신이 꿈을 묻어둔 이 빌딩의 꼭대기에 마지막으로 서보고 싶은 것이다.
60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폐 속에 물이라도 차는 것처럼 그의 호흡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근근이 지탱해주던 산소호흡기가 몸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지석은 폐렴환자처럼 타이어에 공기 빠지는 소릴 내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끝끝내 빌딩의 꼭대기에 당도하고 만다.
지석은 기어서 빌딩의 꼭대기 층에 들어간다. 크고 웅장한 로비가 펼쳐져있고 저 앞에 그보다 더 화려한 문이 보인다. 바로 회장실이다.
죽음의 그늘이 짙어진 지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지석은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 문에 붙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그것을 민다.
문이 열렸다.
지석의 동공이 커진다.
그 안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회색 시멘트 바닥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던 지석, 바닥에 꿇어앉은 채 갑자기 뜻 모를 웃음을 터뜨린다.
“킥, 큭큭… 큭큭큭큭…”
그는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마치 절규 같은 웃음소리이다.
주위가 캄캄해진다.
죽음이라는 진정한 어둠이 정전된 도시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어둠뿐인 공간에 메아리치던 한 광인의 웃음소리마저 불꽃처럼 사그러든다.
<무간도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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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발전소 준결승에 사용할 글입니다.
나조차도 소설인지 시나리오인지 구분 못할 이상한 글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3시까지 방송국에다 원고를 넘겨야하는데 방금 작업이 끝나서 여기다 먼저 올립니다.
매번 죄송하지만, 읽어보시고 적절한 조언 부탁 드리고요,
특히, 반전이 예측 가능한지
'정전'이라는 주제어와 내용이 잘 부합되는지
구성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지
캐릭터가 살아있는지
제목이 어울리는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공지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일 끝나는 대로 바람의 인도자는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쉬었죠? 죄송합니다....
짜증이 나실만도 한데 늘 변함없는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충고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무쪼록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주제어 : 정전
#밤. 지석의 사무실
지석은 사무실에 혼자 앉아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컴퓨터 옆으로는 그가 작업한 문서가 가득 쌓여있고 꽁초가 수북한 재떨이와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고 있는 커피 잔이 보인다. 지석은 탕약을 마시듯이 커피를 들이키며 피곤하고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이 작업 중인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자신의 아내다.
-당신 오늘 또 야근이에요? 오늘이 당신 생일인 건 알고 있어요? 수빈이가 케이크 앞에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오늘만은 10시 전에 집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어요?
지석이 휴대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 지금 바쁘니까 전화 끊어! 아, 돌아가면 먹을 수 있게 식탁에다 밥이나 좀 차려놔. 당신이랑 애는 먼저 자도 돼.”
띡,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것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계속 일에 몰두하려는데 다시전화가 걸려온다.
짜증스런 듯이 휴대폰을 노려보는 지석.
전화를 받으며 대뜸 화부터 낸다.
“아, 자꾸 귀찮게 이럴 거야?!?! ……응? 아아! 미안! 미안… 은영이었구나.”
바로 자신의 정부(情婦)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던 것이다. 아내와 통화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지석은 피곤도 잊은 듯이 얼굴이 환해진다.
“응, 그래… 피곤하지… 응. 하하!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지석,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본다. 9시가 다 되간다.
“어, 그래… 10시 전엔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께. 집에도 늦는다고 말해놨어. 케이크 같은 건 사놓지 마. 유치하잖아, 애들도 아니고… 하하! 샴페인이나 미리 따놓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응. 그래. 하하! 그래, 알았어. 나도 사랑해.”
자기 휴대폰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하고 전화를 끊는 지석. 피곤한 듯이 기지개를 켜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선다.
책상 뒤로 붙어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들이 거대한 도시를 치장하고 있다. 새까만 강물을 가로지르는 대교 위로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나. 도시를 내려다보는 지석의 얼굴에 잠시 감회가 스친다.
오지석은 잘 나가는 외국계 대기업의 차장이다. 예쁜 딸과 아내가 있고, 애인도 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60층짜리 거대한 빌딩이었는데, 회사 내에서의 계급과 호봉이 높을수록 높은 층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20층 아래로는 말단 직원, 30층 위로는 차장급, 회장 및 임원들은 50층 이상 이런 식이다.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차장의 직위에까지 오른 오지석의 꿈은 지금처럼 고속승진을 계속 하여 남들보다 훨씬 빨리 50층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이 사는 이 도시의 꼭대기라 할 수 있는 60층 빌딩의 최고층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지석은 문득 경계하는 얼굴로 등을 돌린다. 그리곤 복도를 향해 나있는 반대편 유리창을 향해 걸어간다. 거기는 블라인드가 내려져있었다.
지석은 블라인드를 살짝 벌리고 그 틈으로 복도 쪽을 내다본다.
회사의 거의 모든 직원이 퇴근한 시간이라 불이 꺼진 복도는 캄캄했지만,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석의 사무실과 마주보고 있는 라차장의 사무실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복도를 향해 나있는 유리창을 통해, 그 안에서 아직도 열심히 작업 중인 라차장의 모습이 보인다.
“저 독종 같은 새끼…” 지석은 욕지기를 씹는다. 벌써 3주째다. 저 놈이 퇴근하기 전에는 자기도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은영과의 약속은 지키기 힘들 것 같다.
라차장은 오지석의 라이벌이다. 그는 지석의 입사동기로서 지석과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유능함을 인정받아 회사의 36층에 자신의 개인 사무실을 배정받은, 오지석의 대학후배이기도 했다.
학연으로 이어져있었지만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보니 오지석과 라차장은 회사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충돌했다. 특히 오지석은 라이벌보다 더 좋은 기획안, 더 훌륭한 업무성과를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라차장을 감시하고 경계했다. 라차장이 사장으로부터 혼자 칭찬이라도 들으면 그날은 잠도 못자고 혼자 술로 밤을 지세울 정도로 오지석의 경쟁심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가 오지석과 라차장 두 사람에게 떨어진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을 진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제출받은 기획안을 회장과 임원들이 평가하여 더 잘 된 것을 쓰겠다는 것이다.
지석으로서는 천우신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프로젝트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부장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고, 눈엣가시 같았던 라차장과의 격차도 그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치 벌려놓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석은 그날부터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다. 안 그래도 야근이 잦았던 그가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지석의 라이벌인 라차장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불이 꺼진다. 주변이 캄캄해지자 지석은 당황한 듯이 두리번거린다.
건물 밖으로 난 유리창을 바라보니, 어둠이 밀물처럼 도시 전체로 뻗어가고 있다.
지석은 혀를 찬다. 하필 이런 때 정전이라니. 책상 쪽으로 걸어가다 그만 탁자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닥친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다. 짜증이 더해간다.
책상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집어 들어보지만 아무 것도 안 들린다. 정전이 맞나보다.
곧 원상복구 되겠지… 지석은 기다리기로 한다. 자기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사무실 문 밖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안 쓴다. 그대로 잠이 든다.
정전 1일 째
깨어보니 아침이다. 지석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아침 9시가 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지석은 신음처럼 뇌까리며 급하게 화장실로 향한다. 아침회의시간에 늦은 것이다. 한번도 없는 일이었다. 특히 이 중요한 때에.
#개인화장실
간단하게라도 세면을 하려 했지만 수도꼭지에선 물이 안 나온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지석의 얼굴이 굳는다. 별 수 없이 거울을 보고 대충 몸단장을 끝낸 다음 넥타이를 다시 매고 사무실로 돌아가 보고서류를 챙겨든다.
#어두운 복도
아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오지만, 회사 안이 너무 조용하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복도 위엔 지석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상함을 느낀 지석의 발길은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순간, 오늘이 휴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지만 어제는 분명 목요일이었고 오늘은 4월 21일. 아무 날도 아니었다. 설령 휴일이었다 해도 야근이 많은 회사라 빌딩 안엔 명절에도 사람이 북적거릴 정도였다.
휑뎅그렁한 복도에 불이라도 켜기 위해 자신이 직접 벽에 붙은 스위치를 딸칵거려 보지만, 전기는 여전히 안 들어온다. 복도의 양쪽으로 붙어있는 사무실을 하나하나 다 살펴봤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석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나?
#사내 엘리베이터
지석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번호판에도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정전이 되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여야 정상이다. 이런 고층빌딩엔 비상발전기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석은 신경질적으로 도어 버튼을 탁탁 치지만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나 밑을 가리키는 화살표나 불이 안 들어오긴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도 멈춘 것이 분명하다.
회의실은 4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석은 별 수 없이 비상계단을 뛰어올라간다.
#사내 로비
땀을 뻘뻘 흘리며 46층 로비에 도착했지만 텅 비어있는 건 그곳도 마찬가지다. 본래는 예쁜 여직원들이 생글생글 미소로 맞아주던 안내 데스크에도 사람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그 넒은 공간에 실내등이 꺼져있어 음침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환풍기도 안 돌아가는지 건물 안은 덥고 공기가 탁하다.
지석은 곧장 회의실로 가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보지만, 역시나 커다란 회의용 탁자 주변엔 아무도 없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석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아침회의 시간에 늦었다는 오점 하나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한숨 돌리는데, 아뿔싸! 그제야 자신이 사무실 문을 안 잠가놓고 왔다는 사실이 번갯불처럼 떠오른다. 사무실 안에는 특별히 돈이 될만한 귀중품 같은 건 없지만 그동안 자신이 죽을 똥 살 똥 작업해 놓은 모든 파일이며 문서들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게다가 라차장의 사무실이 바로 복도 맞은편이다.
지석은 올라올 때보다 3배는 빠른 속도로 쿵쾅쿵쾅!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지석의 사무실
그렇게 자신의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는데, 다행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침입한 흔적은 없다. 작업해놓은 문서들도 그대로 있다. 지석은 책상 모서리에 팔을 기댄 채 거친 숨을 진정시킨다. 그러다가, 어젯밤 자기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자신의 휴대폰에 시선이 머문다. 그것을 집어 드는 지석.
탁. 슬립을 열어보니 ‘통화지역이탈’이 뜨고 있다. 지석의 표정이 더욱 굳어진다. 단축번호 1번을 눌러 은영에게로 전화를 걸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안 걸린다. 혀를 차며 슬립을 닫아버리는 지석. 휴대폰을 품안에 넣고 사무실을 나간다.
#어두운 복도
지석은 자기 사무실 문을 잠그는데 열쇠를 3개나 쓰고 있었다. 원래 손잡이만 잠그도록 되어있는 문이었지만, 라차장이 자기 사무실 맞은편에 자리 잡게 되면서 지석 자신이 사비를 들여 도어록을 2개 더 달았다.
그렇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몸을 돌리는데 라차장의 사무실이 보인다. 복도로 나있는 창문을 통해 보니 사무실 안엔 라차장이 없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문서들. 화면이 꺼져있는 모니터, 그 주변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메모들.
지석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라차장은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지만 정전 된 실내는 어두침침하기만 할 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지석은 가만히 라차장의 사무실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붙잡는다. 손목에 힘을 주고 손잡이를 돌리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은 잠겨있다.
지석, 맥 빠진 웃음을 뱉는다.
“라차장… 이 소심한 새끼…”
자리에 없는 경쟁자를 비웃으며 지석은 그 자리를 떠난다.
워낙 큰 건물이다 보니 빌딩에는 원래 5기의 엘리베이터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 모두를 다 둘러봤지만 엘리베이터는 모두 멈춰있었다.
지석은 결국 걸어서,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지하주차장 안.
등산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지석은 자신의 승용차 앞에서 헉헉대고 있다. 36층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는, 빌딩을 걸어 내려오면서 층마다 들려 혹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뒤에야 지석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지금 이 빌딩 안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다.
대체 무슨 일이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석은 자신의 차로 들어간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8차선 도로 위
차를 타고 빌딩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는 지석.
그런데 쭉 뻗은 8차선 도로는 텅텅 비어있다. 차를 움직이면서 차창을 통해 좌우를 살펴봐도 자기가 모는 자동차 말고 움직이는 것이라곤 전혀 눈에 띠지 않는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지나다니는 똥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쇼윈도 안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생명 없는 마네킹이 반갑게 여겨질 지경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신호등에도 불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도시가 정전 중이더라도 신호등에 불이 안 들어올리는 없다. 지석은 전기기술자도 아니고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정전이라고 신호등이 나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따로 특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모든 신호등이 꺼져있는 것이다.
이게 정말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잠든 사이 전쟁이라도 난 건가? 핵폭탄이라도 떨어지기로 했나? 그래서 다들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간 건가? 여기가 아직 꿈속인가…
지석은 달리는 차 안에서, 생전 듣지도 않던 라디오를 켠다. 그러나 어떤 주파수를 틀어 봐도 지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방송은 나오고 있지 않다. 지석, “씨발, 이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욕을 씹는다.
#은영의 아파트
잠시 후, 지석은 한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바로 지석의 정부인 은영이 사는 집이 있는 곳이다.
차를 주차해 두고 은영의 아파트로 올라갔는데, 문이 활짝 열려있다.
지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회사가 그랬던 것처럼 은영의 집은 불이 꺼져 캄캄하다.
“자기, 나왔어.” 하고 은영을 불러보지만 집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자 거실에 딸린 주방의 식탁 위에 샴페인과 두 잔의 술잔이 보인다. 어젯밤 내내 눈이 빠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은영을 생각하니 지석은 미안함과 함께 잠시 행복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식탁으로 다가간 지석은 샴페인이 비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두 개의 술잔에는 마시다 만 것처럼 술이 조금씩 남아있다. 그 중 하나에는 은영의 것이 분명한 붉은 립스틱 자국도 보였다.
은영은 어젯밤 누구와 함께 술을 마신 걸까?
지석의 인상이 굳어진다.
“은영아!”
애인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벅저벅 빠르게 침실로 걸어가는 지석.
벌컥- 하고 방문을 열자 베게와 이불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더블침대가 나타난다. 누가 그 위에서 레슬링이라도 한 것처럼 침대 위는 엉망진창인 상태다. 방안은 텅 비어있다.
지석은 더더욱 인상을 구긴다.
그때, 딩동- 하고 뒤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지석. 곧장 그 집의 현관문으로 걸어간다.
철컥! 문을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 앞엔 큼직한 꽃다발과 사진 한 장이 놓여있다. 그것을 주워드는 지석. 누가 이걸 놓고 간 걸까? 아파트 계단 쪽을 바라봤지만 거기는 아무도 온 적 없다는 듯이 적막하기만 하다.
지석은 사진을 본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다.
두 남녀가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었다. 한눈에 봐도 두 사람은 부부 아니면 애인사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둘 다 지석이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지석의 애인인 은영과 그의 라이벌 라차장이다.
갑작스런 충격에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마는 지석.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미친 사람처럼 아파트 계단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 거기에 붙어있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이 분노에 찬 눈으로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위에서 샅샅이 살펴봐도 이 사진과 꽃다발을 배달한 사람의 흔적 따윈 찾을 수 없다.
지석은 방금 배달되어 온 꽃다발을 계단 난간에 탁탁 내리친다. 꽃들이 뭉개지며 산산조각 난 꽃잎들이 난간 주변에 흩어진다. 그걸로 성이 안 차는지 지석은 꽃다발을 땅에 던지고 구둣발로 짓밟기까지 한다.
꽃다발과 함께 주운 두 사람의 사진도 찢어버리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지석은 자신을 추스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자기 품안에 넣는다.
그리고 거기를 빠져나간다.
#대낮. 시가지
지석은 차를 몰고 이제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불편한 그의 심기를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그의 차는 최고속도로 거칠게 달리고 있다. 하지만 속도위반으로 그의 차를 붙잡을 경찰들은 지금 없다. 그렇기는커녕 그 큰 도로를 달리는 차라곤 지석의 승용차 한대뿐이다. 신호등도 멈춘 상태니 지금 그의 앞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석의 집. 거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지석.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얼굴로 집에 들어섰는데 역시 아무도 없다. 아내와 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막 뿐.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거실 벽에 붙어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딸칵거려보지만 불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부엌으로 가서 도시가스 벨브를 열고 가스레인지의 회전식 스위치를 돌려봤지만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점화기에 스파크만 일어날 뿐 가스불은 붙지 않는다.
이거 설마 밤이 되도 이러려나… 한숨짓는 지석의 눈에 식탁 위의 케이크가 들어온다. 지석의 나이만큼 꽂혀있는 초들은 불을 붙인 적이 없어 깨끗하다. 케이크가 올려진 식탁을 둘러싸고 세 개의 의자가 단란하게 놓여있다. 그 중 하나에는 지석이 언젠가 딸의 생일선물로 사준 커다란 곰 인형이 앉아있다.
문득 딸이 보고 싶어진 지석은 딸의 방으로 간다.
#지석의 집. 딸의 방
방안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딸의 모습은 없었다. 작은 침대 위 한복판에 작은 MP3가 올려져있다. 지석은 딸의 침대에 걸터앉아 MP3를 만지작거린다. 이것도 자기가 딸한테 선물로 사준 것이다.
MP3에서는 음악이 아닌 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무 버튼이나 눌렀더니 라디오 기능이 작동했나 보다.
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 비슷한 게 들린다. 지석은 MP3를 자기 귀에 대고,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하지만 잡음이 너무 심해 그의 소리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지석은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보던 중, 라디오에서 어느 순간 한 남자의 분명한 소리를 듣는다.
-오지석씨! …지직
-오지석씨, 내 말 들립니까? …지지직
지석의 눈이 커진다. 지금 분명 오지석이라고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지석은 혼란스런 얼굴로 MP3를 만지작거리지만 아무리 주파수를 맞춰도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정전 2일 째
#지석의 회사 앞.
다음 날도 지석은 변함없이 회사로 출근했다. 물이 나오지 않아 씻지를 못해서 얼굴이 부스스하다. 지석은 자기 회사 앞에 차를 세우고 60층짜리 거대한 빌딩을 올려다본다. 도시는 여전히 적막하다.
회사 안으로 들어가 1층만 둘러봤지만 불이 꺼진 건물 안은 음침한 기운만 감돈다. 엘리베이터도 계속 운행이 정지된 상태다. 이래서는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가기도 힘들다.
지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건물을 빠져나온다.
#도심 한 복판
지석은 미친 듯이 차를 몬다. 속력을 얼마나 냈는지 열 받은 자동차 엔진 소리가 짐승처럼 날카롭다. 코너를 돌 때마다 차바퀴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신호등은 모두 꺼져있다. 이 넓은 도로를 달리는 차는 지금 지석의 승용차 한대뿐이다.
차를 타고 도시를 다 둘러봤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석은 차에서 내려 집집마다 샅샅이 훑었다. 문이 잠겨져있지 않은 집은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어요?” 하고 사람을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 소용 없었다.
지석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까지 그 짓을 계속 했다. 그리고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도시엔 나 말고 아무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왜?
지치고 허탈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있던 지석. 문득 어제 은영의 집에 갔을 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배달되어 온 꽃다발과 사진이 생각난다.
그 사진을 품에서 꺼내드는 지석.
그것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딘가로 향한다.
눈빛이 날카롭다.
#저녁. 라차장의 집
지석이 자신의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바로 라차장의 저택이었다.
지석은 자신의 차 조수석 서랍 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낸다. 거기에 은영과 라차장이 함께 찍은 사진을 넣고 침을 묻혀 봉한다. 그런 다음 펜을 꺼내 봉투 겉면에다가 크게 쓴다.
‘라창식 차장 부인 앞’
지석은 그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라차장의 저택 대문 앞으로 재빨리 뛰어간다. 봉투를 그 집 우편함에 집어넣고 다시 자기 차로 돌아온다. 차를 몰고 곧장 그곳을 뜬다.
#밤. 지석의 승용차 안.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석은 휘파람을 불며 운전을 하고 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다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지석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한손으로 자기 배를 매만진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아무 것도 안 먹었다.
#밤. 지석의 집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깜깜하다. 지석은 촛불을 들고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텅 빈 공간 속엔 랩에 싸진 스테이크용 쇠고기 한 덩이만 달랑 올려져있다. 그것을 꺼내 촛불로 비춰보니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안 돼있다. 냄새를 맡아보니 약간 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지석은 아까운 표정을 짓지만 별 수 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밥통을 열어봐도 밥이 없다. 지석은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물도 여전히 안 나온다. 지석 짜증스런 얼굴로 한숨을 쉬며 주방에서 나온다.
지석은 그날도 쫄쫄 굶은 채 잠이 들었다.
정전 3일 째
#아침. 지석이 차를 몰고 달리고 있다.
지석은 해가 뜨자마자 근처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편의점 안은 그의 집 냉장고 속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지석은 편의점을 빠져나와 다시 차를 몰고 이번엔 대형 할인마트로 갔다. 그러나 물과 식료품을 구할 수 없는 건 거기도 마찬가지다. 옷이나, 컴퓨터 같은 가전제품들은 그대로 있었다. 오직 먹을 것만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할인마트를 빠져나와 다른 백화점을 들어가 봐도 똑같았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백화점 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세면대 수도관 밑에 얼굴을 대고 입을 벌린 채 벨브를 열어봤지만 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온다. 목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지석은 화를 내며 화장실을 뛰쳐나간다.
#강변
잠시 후, 지석은 차를 타고 강변에 도착한다. 허겁지겁 차에서 내린 지석은 초췌한 몰골로 강물을 향해 달려간다. 그대로 강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표정은 절박해보이지만, 강물을 떠서 마시려는 순간 그는 멈칫한다.
강이 너무 더러운 것이다. 그의 두 손에 고인 물 속에 새까만 이물질들이 덩어리져서 떠다니는 게 보인다. 지석의 안색이 더욱 굳어진다. 이건 도저히 마실 수 없다.
정전이 되면서 강을 정화시키던 시스템도 멈춘 게 아닐까. 아니면, 누가 강에 독극물이라도 풀었나. 어쩌면 도시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 건너편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지석 깜짝 놀라 땅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건너편에 서있는 사람이 자신의 정부인 은영이라는 사실에 더욱 경악하고 만다.
“아니, 은영… 은영아!”
큰 소리로 은영을 불러보는 지석. 하지만 은영은 지석의 존재를 못 알아차린 것 같다.
“은영아! 은영아!”
그녀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지석은 다시 크게 소리 지르며 그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기까지 하지만 은영은 계속 강바람이나 쐬고 있다.
아무래도 저기로 건너가야 할 모양이다. 지석이 차로 향하려는데, 한 남자가 은영의 뒤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지석은 눈을 부릅뜨고 다시 그쪽을 쳐다본다.
“아니? 저 자식이…”
그 남자는 바로 라차장이었다. 라차장이 은영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 은영 그의 품안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는다. 지석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저 연놈들을 그냥…”
그는 미친 듯이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건다. 그대로 차를 몰고 교각 쪽으로 향한다. 얼마나 속력을 낸 건지 모르겠다. 다리를 건너 두 사람이 있던 지점으로 단숨에 도착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그새 사라지고 없다.
지석은 차를 타고 그 주변을 샅샅이 살펴본다. 하지만 이 도시에 자기 말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계속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럼 내가 귀신이라도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운전대를 자기 머리로 쾅쾅 들이박으며 괴로워하는 지석.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흉포한 낯빛으로 어딘가로 차를 몰고 간다.
#은영의 아파트
지석은 은영의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곳을 다 때려 부순다. 가구를 넘어뜨리고 TV를 박살내고 자기와 다정히 찍은 사진을 구둣발로 짓밟는다.
그러다 한 장의 서류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의 집문서다.
지석은 사실 지금의 아내와 이혼하고 은영과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위자료를 물지 않기 위해 적당한 꼬투리를 잡을 수 없어 계속 시간만 끌고 있던 중, 사랑의 증거를 보여 달라는 은영의 떼씀을 못 이겨, 원래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던 가족들이 사는 집을 은영 앞으로 넘겨주고 만다.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인 것이다.
지석은 이미 은영의 것이 된 자신의 집문서를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지석의 집
집으로 돌아온 지석은 갈증과 허기에 지쳐 녹초가 되어 있다. 그대로 거실 소파에 쓰러지는데, 주방 식탁 위에 차려진 케이크가 그제야 다시 눈에 들어온다. 벌떡 몸을 일으켜 식탁으로 달려가는 지석.
그 위에 꽂힌 초들을 대충 뽑아내버리고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덥석 집어먹는다. 그러다 목이 막히는지 콜록거린다. 지석은 싱크대 서랍에서 랩을 꺼낸다.
전기와 수도와 모든 것이 끊긴 이 삭막한 도시에서 지금 그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가족들이 남겨둔 자신의 생일 케이크밖에 없다. 겨우 이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잘 갈무리 해두려는 것이다.
먹다 남은 케이크를 랩에 주워 담던 지석은 케이크 상자 밑에 접혀있던 예쁜 카드를 발견한다.
지석, 카드를 펼쳐본다. 그것은 딸이 손수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아빠가 우리 아빠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 케이크 아빠 드리려고 내가 엄마랑 만든 거예요.
꿀 먹은 벙어리 같은 얼굴이 된 지석. 딸이 남긴 카드에 눈을 박은 채 잠깐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다 손아귀에 힘이 풀렸는지, 바보같이 케이크가 담긴 랩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랩에서 흘러나온 빵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깜짝 놀란 지석. 바닥에 몸을 숙여 그것을 허겁지겁 다시 주워 담는다. 꼭 혼이 나간 사람 같다.
딸이 만든 케이크였다… 우리 딸이… 그 어린 것이……
“………”
지석. 주방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 내어 운다.
정전 4일 째
씻지도 못하는데다가 물과 음식도 며칠 동안 입에 대지 못한 지석의 몰골은 장난이 아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붙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고 지석은 딸의 MP3를 자꾸 만지작거린다. 그것으로 라디오를 들어보려 하지만 어떤 주파수를 맞춰도 들리는 방송은 없다.
지석,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식탁에 던져두고 밖으로 나간다.
자신의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보니 연료가 다 떨어져가는 것을 알리는 기름등이 켜진다. 오늘은 차를 몰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보려고 했던 지석의 얼굴에 낭패가 낀다. 자신이 아는 주유소 몇 군데를 돌아보지만 여전히 사람은 안 보이고, 직접 주유를 하려고 해도 기름통에선 기름이 한 방울도 안 나온다.
지석은 차에 기름 채우는 걸 포기하고 자기 회사로 간다. 벌써 4일이나 일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몇 주 동안 죽도록 작업한 자신의 분신들이 잘 있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지석의 회사
지석의 사무실은 36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정지 상태. 지석은 정말 단단히 각오를 하고 빌딩의 비상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2시간의 사투 끝에 36층에 도착한 지석은 복도 끝에 주저앉는다. 눈앞이 핑핑 도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정신을 추스른다. 불 꺼진 복도는 대낮인데도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린 지석. 사무실 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지석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간다.
#지석의 사무실
사무실 안으로 뛰어든 지석. 자기가 작업해놓은 문서들이 깨끗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 잠긴 문을 열고 그의 사무실로 침입해 문서들은 물론 컴퓨터까지 분해 해체해 하드디스크를 떼어가 버렸다. 그 안엔 지석이 이 회사에 와서 이뤄놓은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누구야! 대체 누가…”
흥분한 지석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바닥에 사진 한 장이 떨어져있다. 그것을 주워드는 지석.
“………”
그 사진은 바로 이틀 전 자신이 라차장의 집 우편함에 직접 넣어둔 은영과 라차장의 사진이었다.
“라차장, 이 개새끼…”
지석의 얼굴에 화염이 들끓는 것 같다. 지석은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다.
#라차장의 집
빌딩을 뛰어내려온 지석은 차를 몰고 곧장 라차장의 집으로 찾아간다. 뒷좌석에서 골프채를 꺼내 한 손에 들고 경쟁자의 집으로 향하는 지석의 두 눈엔 불똥이 튀고 있다.
대문이 열려있어 지석은 라차장의 집 안으로 쉽게 들어선다. 그리고 곧 경악할 만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집의 정원에서 불에 타고 있는 자신의 작업문서와 하드디스크를 보게 된 것이다.
지석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불을 탁탁 밟아 꺼트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서들은 재로 변해있었고 하드디스크도 검게 타서 완전히 망가진 상태다.
지석, 치를 떨며 라차장의 저택을 노려본다. 골프채를 들고 그 집의 현관으로 들어선다.
#라차장의 집. 1층 거실
지석이 거실로 들어가 보니, 라차장은 편안히 소파에 앉아 클래식 음악이나 듣고 있었다. 지석은 골프채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발소리를 죽여 라차장의 뒤로 몰래 다가간다.
지석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서자, 라차장 갑자기 입을 연다.
“날 죽일 용기나 있습니까? 선배?”
격분한 지석이 골프채를 휘두른다.
라차장,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지만 지석의 난동은 멈추지 않는다. 온 힘을 실은 골프채가 바닥에 쓰러진 경쟁자를 철저하게 짓밟는다. 지석의 얼굴이며 벽에 붉은 피가 튄다.
그렇게 한참을 고기를 다지듯 라차장을 박살내버린 지석.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라차장은 이미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시신으로 바뀐 뒤였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지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곳에서 도망친다.
#지석의 차 안.
차에 올라탄 지석은 온 몸이 피투성이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피가 아닌 방금 자신이 살해한 라차장의 혈흔이었다.
허겁지겁 키를 꽂고 돌렸는데 시동이 안 걸린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경고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지석은 자신의 차에서 나온다.
지석은 라차장의 피를 뒤집어 쓴 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도심 한복판을 혼자 달려간다. 다행히 그의 집은 거기서 별로 멀지 않았다. 지석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표정이다.
#지석의 집. 주방.
집에 들어가기 무섭게 주방 싱크대로 뛰어가 수돗물을 틀었지만 물은 안 나온다. 몸에 묻은 피를 씻을 수가 없다. 울 것처럼 욕을 씹어대는 지석.
그 순간, 그가 아침에 식탁 위로 던져놓은 딸의 MP3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지직… 여보? 여보! 내가 보여요? 지직…
그것은 바로 아내의 목소리였다.
헉! 하고 놀란 지석은 후다닥 식탁 위로 달려든다. MP3를 붙잡더니 거기다 대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여, 여보? 여보! 당신 거기 어디야?”
지석은 기다려보지만 라디오는 한동안 잠잠하다.
“……여보! 제발 대답 좀 해봐! 흐흐흑!”
지석, 마침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다시 소리가 흘러나온다.
-선생님! 선생님, 오셨군요. 이 사람 방금 눈을 깜빡였어요. 지직…
-어디 봅시다. 지지직…
지석 울음을 멈추고 라디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와 한 남자의 목소리가 거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내가 얼굴을 만지니까 눈동자가 움직였다고요.
-……오지석씨. 내 말 들립니까? 내 말 들리면 눈을 깜빡여보세요.
지석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다. 아내가 대체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건가?
-……부인, 유감이지만 남편 분 상태는 똑같습니다. 뇌사에 빠졌더라도 자율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기면 눈을 깜빡인다든지 몸의 특정부위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현상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정말 너무 하시군요. 우리 남편 아직 안 죽었어요. 시체라느니 하는 말은 삼가주세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남편 분은 의학적으로 봤을 땐 숨만 붙어있을 뿐 이미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호흡도 산소호흡기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고요.
-그럼 저 눈빛은요? 저 눈 좀 보라고요.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잖아요. 어제는 딸이 와서 아빠를 부르니까 눈물이 흘러내리는 거 의사선생님도 보시지 않았어요.
-……물론, 뇌사에 빠져 의식이 꺼졌더라도 오지석씨의 자아는 잠재의식 어디엔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자아가 지금 우리의 목소리도 듣고 있는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정전이 된 도시에 혼자 갇혀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불이 꺼져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무의식 속을 영원히 헤매고 있을 겁니다. 저는 심리학자는 아닙니다만,…… 무엇이 정말로 남편 분을 위한 일인지…… 부인께서도 잘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지석이 식탁 밑에 주저앉는다.
라디오에선 다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물에 젖은, 힘없는 목소리다.
-나가주세요…… 남편과 둘이 있고 싶어요……
끼익, 쾅. 문 열고 닫히는 소리.
-여보……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에 지석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고 있는 아내의 온기가 이 차가운 무의식 속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여보…… 그렇게 일에만 매달리시더니…… 우리 딸 수빈이가 당신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알아요?
지석, 그것이 아내의 손이라도 된 듯 라디오를 붙잡고 윽윽… 소리 내어 운다.
-……그래도 난 당신이 살아있기라도 해줘서 고마워요. 라차장님한테도…… 정말 고마워해야겠어요.
지석, 갑자기 눈물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다. 라디오에서 아내가 계속 말한다.
-당신……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하다 뇌졸중으로 그렇게 쓰러졌을 때 라차장님이 당신을 살렸어요. 그때 라차장님도 당신처럼 야근 중이었는데 뒤늦게 생일 축하하러 갔다가 당신이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고 해요. 그때 그분이 그렇게 빨리 응급처치도 하고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면 당신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의사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지석,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집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라차장의 집
잠시 후, 지석은 라차장의 집으로 돌아온다.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라차장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피비린내가 훅하고 끼쳐온다. 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까 낮에 자신이 때려죽인 라차장에게로 다가갔다.
라차장은 그 자신이 만든 피웅덩이 속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있었다.
지석, 라차장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돌아 눕힌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기에 죽어있는 시체는 라차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골프채에 짓뭉개져 엉망으로 죽어있는 시신은 바로 오지석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석,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난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러더니 다시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오지석의 집
집으로 돌아온 지석은 그때부터 계속 라디오만 끌어안고 지냈다.
라디오에선 간간히 소리가 흘러나오긴 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무전기가 아니다.
“나 안 죽었어! 나 아직 안 죽었다고! 누가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줘요!”
울부짖어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전 7일 째
그렇게 아껴먹었지만 딸이 만들어준 케이크가 다 없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목이 말라서 케이크가 더 남아있다 해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는데 어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지석은 혼자 소파에 누워 꿍꿍 앓는다. 그러던 중 다시 라디오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아내와 은영의 목소리였다. 뇌사 상태에 빠진 자신을 은영이 찾아온 것이다.
지석은 잔뜩 긴장해 라디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얘긴 나가서 해요. 남편이 아파서 누워 있잖아요. 어서 이리 나와요.
-이거 놔요! 지석씨 있는 앞에서 똑바로 따져보자고요. …여기 집문서 보이죠? 이게 지금 누구 이름으로 돼있죠? 누구 이름으로 돼있는지 똑똑히 보라고요!
지석은 경악한다.
아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그랬을 리가 없어요! 남편이 깨어나면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리고 당장 집을 비우라니, 그럼 나랑 수빈이는 어디 가서 살라는 말인가요?
-그걸 내가 왜 신경 써야 돼? 게다가 당신 남편은 이미 죽었다잖아. 산송장 붙잡고 언제까지 시간 끌 셈이야? 모레까지 내 집에서 안 나가면 법대로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쾅!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린다.
지석은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라디오, 아니 자신의 무의식 너머 현실에 있는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흑, 흑흑…… 엉엉……
아내의 우는 소리에 지석도 따라 울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끌어안고 지석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흑흑…”
정전 10일 째
#도심. 한 낮
오늘은 지석이 뇌졸중으로 자기 사무실에서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진지 10일 째가 되는 날이다.
“으아아아아!”
아무도 없는 도심 한복판을 지석이 미친 사람처럼 소릴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지만 한손엔 여전히 라디오가 들려있다.
“으아아아! 일어나! 눈을 떠! 눈을 뜨라구! 이 개자식아!”
지석은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며 텅 빈 도심 위를 다시 맨발로 달린다.
“으아아아아아!”
그렇게 앞도 보지 않고 달리다가 전봇대와 충돌한다. 억! 소릴 지르며 아스팔트 위에 쓰러지는 지석. 들고 있던 라디오를 땅에 떨어트린다.
허기와 갈증에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금방 무리를 해서인지 그는 이제 혼자 일어설 힘도 없는 것 같다. 바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딸의 MP3를 주우려고 손을 뻗어봤지만 배멀미를 하는 것처럼 눈앞이 오락가락한다.
그때, MP3에서 다시 소리가 들린다. 지석의 눈빛이 힘을 되찾는다. 자신의 담당의사라는 작자의 목소리였다.
-이름 오지석… 나이 35세…
-회사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음. 수술 치료 시도했으나 소용없음. 비가역적 혼수상태로 결론.
-자가 호흡 없음. 동공 반응 없음. 뇌사로 판정.
“아니야! 아니라고!”
지석은 땅에 떨어진 라디오에 대고 소리 지른다.
-……동의하십니까? 부인?
의사가 지석의 아내에게 묻는다.
지석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아내가 대답한다.
-…………네.
“아, 아니……”
지석, 지옥을 마주 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땅에 꿇어앉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여기…… 장기기증 동의서에 사인하시죠.
“그만 해! 그만 하라고 이 개자식아!”
지석, 절규하다 마침 근처에 떨어져있던 돌을 주워 라디오를 박살내버린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
라차장을 골프채로 죽였듯이, 그렇게 한참을 짱돌로 이미 박살난 라디오를 내리치다가 지석은 진이 빠진 듯 울음을 터뜨린다.
“흐흐흐흑!”
산산조각 난 라디오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병든 사람마냥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지석. 어딘가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지석의 회사
지석의 발길이 멈춘 곳은 바로 자신이 다니던 회사였다.
60층이 넘는 건물을 지친 눈으로 올려다보는 지석. 그 끝은 천국에 닿을 듯이 아스라하기만 하다. 그런데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주위가 어두워지며 순식간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지석은 흠뻑 젖은 채 회사 입구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상향이 있는 곳, 자신이 꿈을 묻어둔 이 빌딩의 꼭대기에 마지막으로 서보고 싶은 것이다.
60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폐 속에 물이라도 차는 것처럼 그의 호흡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근근이 지탱해주던 산소호흡기가 몸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지석은 폐렴환자처럼 타이어에 공기 빠지는 소릴 내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끝끝내 빌딩의 꼭대기에 당도하고 만다.
지석은 기어서 빌딩의 꼭대기 층에 들어간다. 크고 웅장한 로비가 펼쳐져있고 저 앞에 그보다 더 화려한 문이 보인다. 바로 회장실이다.
죽음의 그늘이 짙어진 지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지석은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 문에 붙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그것을 민다.
문이 열렸다.
지석의 동공이 커진다.
그 안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회색 시멘트 바닥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던 지석, 바닥에 꿇어앉은 채 갑자기 뜻 모를 웃음을 터뜨린다.
“킥, 큭큭… 큭큭큭큭…”
그는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마치 절규 같은 웃음소리이다.
주위가 캄캄해진다.
죽음이라는 진정한 어둠이 정전된 도시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어둠뿐인 공간에 메아리치던 한 광인의 웃음소리마저 불꽃처럼 사그러든다.
<무간도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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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발전소 준결승에 사용할 글입니다.
나조차도 소설인지 시나리오인지 구분 못할 이상한 글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3시까지 방송국에다 원고를 넘겨야하는데 방금 작업이 끝나서 여기다 먼저 올립니다.
매번 죄송하지만, 읽어보시고 적절한 조언 부탁 드리고요,
특히, 반전이 예측 가능한지
'정전'이라는 주제어와 내용이 잘 부합되는지
구성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지
캐릭터가 살아있는지
제목이 어울리는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공지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일 끝나는 대로 바람의 인도자는 연재를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 쉬었죠? 죄송합니다....
짜증이 나실만도 한데 늘 변함없는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충고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무쪼록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