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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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에서 태어난 환영들이, 뺏고 빼앗긴 산맥 위에 펼쳐졌다.
세계를 둘러싼 하늘은 우주의 찬란한 빛들로 가득 찼다. 빛들이 모여서 운하를 이뤘고, 성운과 행성이 운집한 자리에 붉고 푸른 골짜기가 파였다. 골짜기 곁을 지키는 달은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져, 지금은 밤의 수면 위로 드러난 백색의 현무암처럼 보였다.
종이 울 때 별들은 울었고 종이 안 울어도 별들은 울었는데, 천공의 귀퉁이에 못 박힌 밝은 십자성은 울지 않고 다만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 별을 바라봤다.
이천년 전의 하늘도 저러했을 것이다. 만 년 전의 하늘도…
달라진 것은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로부터의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땅 위에 세워진 인간의 왕국이 하나였던 시대에, 세계를 지배한 선지자들의 비의는 육지와 하늘 사이를 잇는 첨탑이었다.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별들마다 나라가 따로 있어 내세엔 모두가 왕 노릇하리라는 종말의 환상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별의 탄생이 신의 영역이듯이 세계의 탄생도 그러했는데,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알에서 태어난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세계는 몇 번인가 종말을 맞았다.
별이 나타나면 전조가 감돌았고 별이 사라지면 재앙이 시작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시대마다 구원을 찾아 그 별을 따라갔는데 아무리 걸어도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별을 향해 뻗은 길은 영원해서 신앙은 늘 종소리의 환영과도 같았다.
별의 죽음이 한 세계의 끝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세상이 끝나도 종족들은 살아남아 신세계의 일부를 이루었고 후손들에게 종말의 역사를 증언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종말은 인간들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그들은 사라진 여신을 되찾기 위해 서로의 땅을 유린했다.
여신은 별을 타고 내려와, 부활한 신들의 주검을 잠재웠다.
신들의 주검은 아센땅에서 일어나, 거대한 하늘의 용을 땅에 메다꽂았다. 그리고 세계를 불태웠다.
천룡은 인간의 선지자들이 일으킨 고대의 제국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육지와 바다로 통하는 모든 영토를 점령하기까지 제국은 피바람 속에 강성했는데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지자 그들은 별들의 세계마저 넘봤다.
이 모든 것들의 머리 위에 그 별이 떠있었다.
구원이 종말이 되고 종말이 구원이 되는 부조리한 섭리 아래, 땅은 하나였고 세계를 이루는 경계는 푸른 어둠이 번득이는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부조리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경계 저편의 환상은 바람과 함께 몰려와 별빛이 내려앉은 대지 위를 휩쓸었다.
경계를 넘어온 바람은 남쪽의 반도와 흩어진 섬들을 지나쳐 내륙의 광활한 평야와 펼쳐진 계곡들을 굽어보며 황량한 사막으로 진입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 용솟음치는 먼지들이 시야를 흐리는가 싶더니 다시 초원이 나타나고 야생마들이 무리지어 뛰어가는 대륙의 변방에는 거대한 산들이 버티고 서있었다. 산맥을 넘어 날아가는 것만으로도 겨울이 시작됐고 눈발이 휘날리는 흐린 하늘 아래 빙하와 눈 덮인 첨봉은 북산악의 끝까지 이어졌다. 북해 건너 눈보라에 둘러싸인 세계의 북쪽 끝은 바람조차 튕겨내는 신화의 땅이었다.
땅은 하나여도 영장은 하나가 아니었고, 종족의 수장들은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기를 원했는데 가장 숫자가 많은 인간들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은 다른 종족들을 변두리로 몰아붙인 뒤에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저희끼리 자주 전쟁을 치렀다.
고요의 숲의 처녀들은 신의 사자들이었고, 남자가 없어 번식을 못하는 대신 영원한 수명을 누렸다. 한 나무에서 태어난 그들은 모두가 자매였고 하나의 겨레를 이뤘는데 그들 중의 첫째는 하늘에 달이 두 개였던 시절부터 세상을 감시해왔다고 한다. 태고의 신화와 비밀을 간직한 그들은 만물의 천칭 위에 고고했고 진실한 신앙은 자기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다.
자연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기 위해 자주 인간과 부딪혔다. 태초의 야성을 몸과 마음에 간직한 그들은 부족전체가 전사요 사냥꾼이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씨족을 중시해 몸에 난 털의 색깔로 지파가 갈렸고 타지파의 땅을 통과해야할 일이 생기면 무장을 벗고 들소의 가죽을 몸에 두른 사절을 땅 주인에게 먼저 보냈다. 지파마다 스칸이 따로 있어 부족을 다스렸고, 원뿔형의 천막이 그들의 주거지였는데 철을 따라 사냥터를 찾아 옮겨 다니는 늑대들처럼 그들은 초원과 강을 넘나들었다. 테라스칸 바란 이후, 지파의 통일은 요원한 일이었고 여신에게 바쳐졌던 야수왕의 유물은 여신의 실종과 함께 사라졌다.
세계의 그늘 뒤엔 생물의 피를 탐하고 사는 밤의 혈족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사두베인이라고 불렀다. 햇빛을 싫어해 땅 밑의 어둠 속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물려받은 혈통에 따라 힘과 능력이 천차만별이었기에 몇 개의 가문이 종족을 통솔했지만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생혈에 대한 갈망은 그들 본능에 속한 문제였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은 시바(Shiva)와 쥬다(Judah)로 나뉘었는데 양쪽 간에 전쟁이 일어나 시바의 여왕이 승리한 뒤로는 강제로 인간을 잡아먹고 사는 사두베인들이 없어졌다. 타인의 피를 취함으로서 그 지식과 능력의 습득까지 가능한 그들의 특성상 전쟁에서 승리한 시바의 여왕은 무소불위의 힘을 얻었고 스스로 칭암의 여신이 되었다. 아무도 그녀를 죽일 수 없다고 여겼지만, 제국의 무장 크레슬린 반과의 대결에서 패해 그녀는 참수 당했다.
땅의 완전한 정복은 인간의 숙원이었다. 그들은 밭을 일궈 농작물을 먹고 살았는데 경작할 땅이 넉넉해도 남의 땅에 눈독을 들였다. 땅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였고 전쟁의 역사였다. 무(武)의 경쟁이 일어나 쇠는 단단해졌고 검법은 날로 번창했으며, 반도와 산하와 평야에 세워진 성곽들은 해마다 높고 두터워졌다. 성주들을 아울러 왕이 세워졌고 왕이 왕을 쳐서 제국이 일어났는데 황제의 이름이 국가의 이름이었고 국가의 이름이 곧 대지의 이름이었다. 마법이 칼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여신이 다녀간 후에는 인간의 신앙심이 깊어져 땅위에 성전이 세워지고 왕들이 그 앞에 경배했는데 왕은 기사라 신의 가르침이 군사의 규범 속에 끼어들었고 기사도가 세워지고 영웅이 만들어지고 민중이 그를 따르면 다시 새로운 왕국이 출현했다. 세계의 격변은 흔한 일이어서 국명과 지명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고 여신의 별이 없어도 피난민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짓뭉개진 성운이 산산조각 난 별들의 파편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세계가 시대 속에 숨 쉬는지 시대가 세계에 속한 것인지 모든 것을 지켜봤을 별들의 하늘은 말이 없었고, 한 세계가 태어나고 한 세계가 끝장나는 소소한 일들이 우주의 저 너머엔 끝없이 널려있었다. 별의 나고 죽음이 비극이 될 수 없는 이 비극 앞에서 세계의 운명은 무참했고 별들의 운행이 차고 느리게 계속 되는 수천 년 동안 대지의 변화는 쏜살같았다.
…시대는 다시 그 별을 맞이했다.
노인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대륙 라크로니시가 신을 잃은 그날로부터 천년…
여신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던 재앙왕 카인과 천년왕국의 건국자 알슈미트는 전쟁 중 사망하였고, 한때 전장을 누비던 그들의 휘장도 사토 속에 파묻혔지만 전란의 바람이 멈춘 시대는 없었다.
....여신이 바란 것은 평화였지만 신을 잃은 인간은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옛날 카인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스스로를 잊혀진 고대왕국 벤루의 정통계승자라 주장했다. 그들은 남이나 동에서 일어나 북이나 서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숲과 산과 황야의 종족들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군마가 일으킨 흙먼지의 환영 속에 인간의 날들은 날마다 새로웠고 날마다 강성했다. 나라의 경계는 세계를 나누는 기준이었고 세계의 기준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바뀌었는데 고대로부터 수많은 나라가 있어 왕들이 징치했고 왕들은 자신이 종족의 수장이 되길 원했다. 세계를 지배한 고대의 추억이 왕들의 미래를 이끌었고 경계와 경계가 부딪히면 세계는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세계 위에 자리 잡은 나라들은 번창하거나 생존했고 성끼리 연합하여 세계를 공격하거나 세계에 저항했는데, 전쟁이 없어도 상인들은 도시를 넘나들었고 굶주린 피난민과 도적 떼를 피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다. 용병은 상비군이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의 핵심병력이었는데 흔히 죄를 짓고 고향을 떠난 자들이 모여든 것이어서 사회로부터 괄시를 받았고 일이 없는 날에는 무장한 강도가 되었다. 인간들은 민족이 달라도 길드(Guild)를 결성하고 직업들이 모여 조합을 이뤘는데 길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에 본거지를 두고 고용과 파견을 수행했다. 도시는 국가의 기본이었고 화폐가 도시를 움직였는데 성이 세워진 도시마다 시장에 인파가 북적거렸고 물건과 노예들을 사고팔았다.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쇠붙이 값이 뛰었고 용병들은 돈을 많이 주는 성주에게 붙었는데, 성주는 피난민들을 약탈해 군자금을 충당했다.
시대를 규정짓는 것은 역사가 하는 일이었고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나라들이었는데 나라가 사라져도 역사는 살아남아 다른 나라로 전해졌고 나라가 나라를 떠받들어 인간의 날들은 새로움 속에 늘 고대(古代)를 덧입었다.
마법의 시대가 끝나자 두 왕이 싸웠고 왕들은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갔는데,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왕들의 성물(聖物)은 후대로 전해져 새로운 왕국의 근간이 되었고 왕국의 주인은 넓고 비옥한 땅을 차지했는데 동으로는 하켄이었고 서쪽은 아르테니스였다. 왕들의 싸움을 지지하지 않은 최후의 선지자는 삼형제가 세운 추운 산맥의 나라에 자신의 성물을 전해주고 남반도와 가까운 곳에 대성전을 세웠는데, 북쪽은 리니스프리아였고 남쪽에는 신성왕국 프록시켄이었다.
네 나라가 아우르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은 반도와 섬 주변과 경계의 곳곳에 흩어져 자존했다. 황야가 펼쳐진 변방과 더운 밀림,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에는 이민족이 들끓었고 이민족을 막기 위해 약소도시국가들끼리 동맹을 맺고 연합이 성립됐다.
하켄은 티날리곤의 계승자였고 호렙산에 현신한 카인왕의 혼령에게 태양의 신검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나라들을 호령하여 땅의 동쪽을 점령하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신검의 적수인 신검은 천년 째 침묵했고 아르고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황제의 대군은 승승장구하여 세계의 통일이 목전이었다. 그러나 화룡을 건드린 대가로 황제는 자신의 신복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카인왕의 유물은 또 다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제국은 퇴각했다. 화룡은 복수를 다짐하며 긴 잠에 빠져들었다. 150년 뒤 제국이 다시 서쪽을 도모했을 때 브록켄은 없었고 아르고는 눈을 떴는데 그 주인은 아르테니스의 국왕이었다.
대륙동란과 화룡의 복수, 그리고 별의 출현으로 세계는 들썩였는데 하늘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어서 땅이 종말로 치달아도 달빛은 푸르렀고 청동종이 울려도 별들은 요동치 않았다. 세계가 누구의 것인지는 신만이 알고 있었고 신이 없어도 세계는 굳건했는데, 프록시켄의 성왕은 대성전의 삼각탑 꼭대기에서 절기와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제를 올렸고 탑 아래 정렬한 수만의 신민들이 아기를 안거나 예물을 든 채 신의 계시를 기다렸다.
세계는 달과 별의 고요 속에 안심했고, 고옹… 하는 종소리는 그 별에까지 닿았는데 왕들이 죽어서 간다는 하늘의 왕국이 그곳에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청동종의 울음소리는 죽은 왕들의 인도자인지 노인은 알 수 없었다.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
별에게 말을 거는, 자신의 목소리가 노인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는 황량한 산 정상에 우뚝 서있었다. 그곳에서 별들의 하늘은 가까웠다. 바람이 불어 장삼이 펄럭였다. 두건 아래 외짝 눈이 달 같은 정적을 담고 있었다.
그날 밤, 세 명의 손님이 노인의 뒤에 자리 잡은 캄캄한 동굴로부터 걸어 나와 한 사람씩 그를 만났다.
첫 번째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아들은 부러진 대검을 들고 그의 뒤에 섰다. 예기치 못한 만남인 듯 아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노인은 하나 뿐인 눈으로 아들을 돌아봤다. 노인의 잠잠한 낯빛은 어떠한 의문도 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
“쿠마는…… 당신의 제자는 죽었소. 그리고 그녀도…”
아들은 울분을 참고 있는 듯했다. 피와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아들이 물었다.
“……환상(Fantasy)이 뭡니까?”
“………”
“대답하십시오! 환상이 뭡니까?!?”
노인은 입을 열었다. 어둠에 가린 외짝 눈에서 조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봐라, 슈나이더…… 무엇이 들리나?”
먼 곳의 종소리가 하늘에서 다가왔다. 돌아가는 종소리의 자락 끝에, 노인이 다시 말했다.
“그것은 저 종소리와 같은 것이다, 슈나이더… 분명 존재하지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환상은 실존을 벗은 현실이다. 슈나이더… 세계는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아들이 물었다.
“창조가 뭡니까? 당신도 신을 믿는 겁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신은 환상이다, 슈나이더… 이 세계를 설계하고 만들어낸 존재가 있다 해도 그는 우리에게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환상이 환상을 낳지 못하고 실체가 환상을 낳는 것인데 때로는 환상이 실체를 낳기도 한다. 창조란… 그렇게 역설적이다, 슈나이더…”
“………”
“창조는 세계의 조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그대로, 세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품고 있다, 슈나이더… 변화는 이야기다. 창조는 그 시작과 끝을 만드는 일이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까? 당신은 나를 이용했소…”
아들이 그를 노려봤다. 눈물이 솟구칠 것 같은, 핏발 선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다, 노인이 대답했다.
“별을 쟁취해라, 슈나이더…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별의 아래에 바람이 불었다. 땅에서 일어난 눈발이 어둠을 때렸다.
노인은 아들을 왔던 길로 돌려보냈다.
미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들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운명이 뭡니까?”
노인이 말했다.
“시작과 끝.”
아들에 이어 두 번째로 노인을 찾아온 사람은 그의 숙적이었다. 그의 한쪽 눈을 가져간 장본인.
동굴을 빠져나온 라오니스인 사내는 한 소년을 등에 업고 있었다. 둘 다 피투성이였고 특히 소년의 부상이 심해보였다. 소년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사내가 노인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또 뵙게 되는 군요, 비토…”
“살아있었군, 반…”
노인 역시 두건 속에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노인의 외짝 눈은 흉악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소년을 안전한 곳에 눕혀놓은 후에, 사내는 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섰다.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사내는 한가롭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하늘로 시선이 향했다. 그 별이 있어 낯선 하늘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조금 전, 미궁 안에서 세 명의 제국인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크레슬린인 것 같더군요.”
“………”
“당신이 그들을 보냈습니까? 그래서 내가 엉뚱한 시대로 튀어나오게 된 겁니까?”
두건 속에서, 노인은 조용히 웃었다.
“나라고 해서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건 아니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를 굳이 내 옆에 서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나? …반.”
사내는 웃다가,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검은 입을 벌린 동굴은 그대로 있었다. 그 또한 이질적인 광경이다.
“하르마디온이 출구를 봉인하지 않는 군요. 한번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것도 당신이 예상 못한 일입니까?”
노인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여기서 나를 죽일 텐가?”
사내는 팔짱을 끼더니 바람 속에 한숨을 불어넣었다.
“글쎄요. 분명 당신이 필요한 시대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군요.”
노인은 말해주었다.
“…자네가 화룡을 처치했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아는 시대가 맞군….”
“이제 나를 죽일 텐가?”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모르지…. 자네라면, 어쩌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둘 사이엔 황량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사내가 소년 곁으로 되돌아가자 노인의 눈길이 그를 따라갔다. 소년의 몸이 더 식기 전에, 사내는 소년을 안아들었다. 허리 위로 붕대 투성이인 소년은 죽은 것처럼 이리저리 늘어졌다. 소년을 품에 안은 채 그는 노인을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비토.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노인은 입을 닫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리더니 동굴로 걸어갔다.
노인은 시선으로 그를 배웅했다. 살기가 걷힌, 쓸쓸한 눈빛이었다.
사내와 소년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나타났다. 그 밤에, 노인과 대면한 마지막 손님은 만물보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백색의 지팡이를 손에 쥔 그녀가 동굴로부터 걸어 나오자 황금의 머리칼들이 밤바람에 흩어졌다. 깨끗한 코트와 치마로 몸을 감쌌고 허리에 감긴 가죽허리띠엔 붉은 칼이 걸려있었다.
노인은 단전 앞에 차분히 손을 모은 채, 동굴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하늘의 반을 가린 보름달이 그 어떤 신화의 존재인양 노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노인을 발견한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환한 달빛을 등진 노인의 시커먼 그림자가 진심으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에 들린 일각수의 눈매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졌다.
그의 앞에 서서, 여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그렇군….”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보고 싶었노라고,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길 원했노라고 눈빛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헤어진 연인들처럼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을 도와주듯, 고옹… 종이 울렸다. 여자의 눈길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누가 죽었나 봐요.”
“그녀를 따라왔니?”
여자가 다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뇨.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금방 숲을 나왔어요. 하지만 그게 당신은 아니었어요….”
노인은 잔잔히 웃었다. 여자가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건가요? 여기는 내가 의도한 시간대가 아닌 것 같군요.”
“…먼저 찾아온 사람도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이 빠져나온 동굴로 고개를 돌렸다.
“웜홀(Warm hole)이 닫히지 않네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그녀는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노인은 평온해보였다. 두건에 거의 가린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여자는 갑자기 표정이 얼어붙었다.
“설마…… 그녀와 만났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일도 없었겠지….”
노인은 여자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려주었다.
“그런데, 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그의 안에 있었고 여자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초연한 태도가 그녀에게 그것을 확신시켰다. 여자의 푸른 눈빛이 속눈썹과 함께 떨렸다.
“성공했군요….”
동정인지 절망인지, 여자는 그렇게 신음했다. 노인의 표정은 변함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가혹한 슬픔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막겠어요….”
노인은 그녀를 내버려둘 뿐,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숙명이리라. 첫 번째 반목은 일만 년쯤. 기억하지 않아도, 그 별의 관조 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게 됐다.
여자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희고 가는 손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 메인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하고 있군요…….”
뒤에 이어진 말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의 두건 속에 입 맞췄다. 종소리가 멈춘 하늘에 십자성이 빛살을 뿌리고 있었다.
-계속-
종소리에서 태어난 환영들이, 뺏고 빼앗긴 산맥 위에 펼쳐졌다.
세계를 둘러싼 하늘은 우주의 찬란한 빛들로 가득 찼다. 빛들이 모여서 운하를 이뤘고, 성운과 행성이 운집한 자리에 붉고 푸른 골짜기가 파였다. 골짜기 곁을 지키는 달은 밤이 깊을수록 또렷해져, 지금은 밤의 수면 위로 드러난 백색의 현무암처럼 보였다.
종이 울 때 별들은 울었고 종이 안 울어도 별들은 울었는데, 천공의 귀퉁이에 못 박힌 밝은 십자성은 울지 않고 다만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 별을 바라봤다.
이천년 전의 하늘도 저러했을 것이다. 만 년 전의 하늘도…
달라진 것은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로부터의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땅 위에 세워진 인간의 왕국이 하나였던 시대에, 세계를 지배한 선지자들의 비의는 육지와 하늘 사이를 잇는 첨탑이었다.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별들마다 나라가 따로 있어 내세엔 모두가 왕 노릇하리라는 종말의 환상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별의 탄생이 신의 영역이듯이 세계의 탄생도 그러했는데,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알에서 태어난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 세계는 몇 번인가 종말을 맞았다.
별이 나타나면 전조가 감돌았고 별이 사라지면 재앙이 시작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시대마다 구원을 찾아 그 별을 따라갔는데 아무리 걸어도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별을 향해 뻗은 길은 영원해서 신앙은 늘 종소리의 환영과도 같았다.
별의 죽음이 한 세계의 끝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세상이 끝나도 종족들은 살아남아 신세계의 일부를 이루었고 후손들에게 종말의 역사를 증언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종말은 인간들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그들은 사라진 여신을 되찾기 위해 서로의 땅을 유린했다.
여신은 별을 타고 내려와, 부활한 신들의 주검을 잠재웠다.
신들의 주검은 아센땅에서 일어나, 거대한 하늘의 용을 땅에 메다꽂았다. 그리고 세계를 불태웠다.
천룡은 인간의 선지자들이 일으킨 고대의 제국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육지와 바다로 통하는 모든 영토를 점령하기까지 제국은 피바람 속에 강성했는데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지자 그들은 별들의 세계마저 넘봤다.
이 모든 것들의 머리 위에 그 별이 떠있었다.
구원이 종말이 되고 종말이 구원이 되는 부조리한 섭리 아래, 땅은 하나였고 세계를 이루는 경계는 푸른 어둠이 번득이는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부조리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경계 저편의 환상은 바람과 함께 몰려와 별빛이 내려앉은 대지 위를 휩쓸었다.
경계를 넘어온 바람은 남쪽의 반도와 흩어진 섬들을 지나쳐 내륙의 광활한 평야와 펼쳐진 계곡들을 굽어보며 황량한 사막으로 진입했는데 뜨거운 태양 아래 용솟음치는 먼지들이 시야를 흐리는가 싶더니 다시 초원이 나타나고 야생마들이 무리지어 뛰어가는 대륙의 변방에는 거대한 산들이 버티고 서있었다. 산맥을 넘어 날아가는 것만으로도 겨울이 시작됐고 눈발이 휘날리는 흐린 하늘 아래 빙하와 눈 덮인 첨봉은 북산악의 끝까지 이어졌다. 북해 건너 눈보라에 둘러싸인 세계의 북쪽 끝은 바람조차 튕겨내는 신화의 땅이었다.
땅은 하나여도 영장은 하나가 아니었고, 종족의 수장들은 서로의 땅을 침범하지 않기를 원했는데 가장 숫자가 많은 인간들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들은 다른 종족들을 변두리로 몰아붙인 뒤에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저희끼리 자주 전쟁을 치렀다.
고요의 숲의 처녀들은 신의 사자들이었고, 남자가 없어 번식을 못하는 대신 영원한 수명을 누렸다. 한 나무에서 태어난 그들은 모두가 자매였고 하나의 겨레를 이뤘는데 그들 중의 첫째는 하늘에 달이 두 개였던 시절부터 세상을 감시해왔다고 한다. 태고의 신화와 비밀을 간직한 그들은 만물의 천칭 위에 고고했고 진실한 신앙은 자기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었다.
자연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기 위해 자주 인간과 부딪혔다. 태초의 야성을 몸과 마음에 간직한 그들은 부족전체가 전사요 사냥꾼이라 군대가 따로 없었다. 씨족을 중시해 몸에 난 털의 색깔로 지파가 갈렸고 타지파의 땅을 통과해야할 일이 생기면 무장을 벗고 들소의 가죽을 몸에 두른 사절을 땅 주인에게 먼저 보냈다. 지파마다 스칸이 따로 있어 부족을 다스렸고, 원뿔형의 천막이 그들의 주거지였는데 철을 따라 사냥터를 찾아 옮겨 다니는 늑대들처럼 그들은 초원과 강을 넘나들었다. 테라스칸 바란 이후, 지파의 통일은 요원한 일이었고 여신에게 바쳐졌던 야수왕의 유물은 여신의 실종과 함께 사라졌다.
세계의 그늘 뒤엔 생물의 피를 탐하고 사는 밤의 혈족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사두베인이라고 불렀다. 햇빛을 싫어해 땅 밑의 어둠 속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물려받은 혈통에 따라 힘과 능력이 천차만별이었기에 몇 개의 가문이 종족을 통솔했지만 왕국을 다스리는 여왕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생혈에 대한 갈망은 그들 본능에 속한 문제였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은 시바(Shiva)와 쥬다(Judah)로 나뉘었는데 양쪽 간에 전쟁이 일어나 시바의 여왕이 승리한 뒤로는 강제로 인간을 잡아먹고 사는 사두베인들이 없어졌다. 타인의 피를 취함으로서 그 지식과 능력의 습득까지 가능한 그들의 특성상 전쟁에서 승리한 시바의 여왕은 무소불위의 힘을 얻었고 스스로 칭암의 여신이 되었다. 아무도 그녀를 죽일 수 없다고 여겼지만, 제국의 무장 크레슬린 반과의 대결에서 패해 그녀는 참수 당했다.
땅의 완전한 정복은 인간의 숙원이었다. 그들은 밭을 일궈 농작물을 먹고 살았는데 경작할 땅이 넉넉해도 남의 땅에 눈독을 들였다. 땅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였고 전쟁의 역사였다. 무(武)의 경쟁이 일어나 쇠는 단단해졌고 검법은 날로 번창했으며, 반도와 산하와 평야에 세워진 성곽들은 해마다 높고 두터워졌다. 성주들을 아울러 왕이 세워졌고 왕이 왕을 쳐서 제국이 일어났는데 황제의 이름이 국가의 이름이었고 국가의 이름이 곧 대지의 이름이었다. 마법이 칼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여신이 다녀간 후에는 인간의 신앙심이 깊어져 땅위에 성전이 세워지고 왕들이 그 앞에 경배했는데 왕은 기사라 신의 가르침이 군사의 규범 속에 끼어들었고 기사도가 세워지고 영웅이 만들어지고 민중이 그를 따르면 다시 새로운 왕국이 출현했다. 세계의 격변은 흔한 일이어서 국명과 지명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고 여신의 별이 없어도 피난민들은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짓뭉개진 성운이 산산조각 난 별들의 파편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세계가 시대 속에 숨 쉬는지 시대가 세계에 속한 것인지 모든 것을 지켜봤을 별들의 하늘은 말이 없었고, 한 세계가 태어나고 한 세계가 끝장나는 소소한 일들이 우주의 저 너머엔 끝없이 널려있었다. 별의 나고 죽음이 비극이 될 수 없는 이 비극 앞에서 세계의 운명은 무참했고 별들의 운행이 차고 느리게 계속 되는 수천 년 동안 대지의 변화는 쏜살같았다.
…시대는 다시 그 별을 맞이했다.
노인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대륙 라크로니시가 신을 잃은 그날로부터 천년…
여신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던 재앙왕 카인과 천년왕국의 건국자 알슈미트는 전쟁 중 사망하였고, 한때 전장을 누비던 그들의 휘장도 사토 속에 파묻혔지만 전란의 바람이 멈춘 시대는 없었다.
....여신이 바란 것은 평화였지만 신을 잃은 인간은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 옛날 카인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스스로를 잊혀진 고대왕국 벤루의 정통계승자라 주장했다. 그들은 남이나 동에서 일어나 북이나 서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숲과 산과 황야의 종족들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군마가 일으킨 흙먼지의 환영 속에 인간의 날들은 날마다 새로웠고 날마다 강성했다. 나라의 경계는 세계를 나누는 기준이었고 세계의 기준은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바뀌었는데 고대로부터 수많은 나라가 있어 왕들이 징치했고 왕들은 자신이 종족의 수장이 되길 원했다. 세계를 지배한 고대의 추억이 왕들의 미래를 이끌었고 경계와 경계가 부딪히면 세계는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세계 위에 자리 잡은 나라들은 번창하거나 생존했고 성끼리 연합하여 세계를 공격하거나 세계에 저항했는데, 전쟁이 없어도 상인들은 도시를 넘나들었고 굶주린 피난민과 도적 떼를 피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다. 용병은 상비군이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의 핵심병력이었는데 흔히 죄를 짓고 고향을 떠난 자들이 모여든 것이어서 사회로부터 괄시를 받았고 일이 없는 날에는 무장한 강도가 되었다. 인간들은 민족이 달라도 길드(Guild)를 결성하고 직업들이 모여 조합을 이뤘는데 길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시에 본거지를 두고 고용과 파견을 수행했다. 도시는 국가의 기본이었고 화폐가 도시를 움직였는데 성이 세워진 도시마다 시장에 인파가 북적거렸고 물건과 노예들을 사고팔았다.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쇠붙이 값이 뛰었고 용병들은 돈을 많이 주는 성주에게 붙었는데, 성주는 피난민들을 약탈해 군자금을 충당했다.
시대를 규정짓는 것은 역사가 하는 일이었고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나라들이었는데 나라가 사라져도 역사는 살아남아 다른 나라로 전해졌고 나라가 나라를 떠받들어 인간의 날들은 새로움 속에 늘 고대(古代)를 덧입었다.
마법의 시대가 끝나자 두 왕이 싸웠고 왕들은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갔는데,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왕들의 성물(聖物)은 후대로 전해져 새로운 왕국의 근간이 되었고 왕국의 주인은 넓고 비옥한 땅을 차지했는데 동으로는 하켄이었고 서쪽은 아르테니스였다. 왕들의 싸움을 지지하지 않은 최후의 선지자는 삼형제가 세운 추운 산맥의 나라에 자신의 성물을 전해주고 남반도와 가까운 곳에 대성전을 세웠는데, 북쪽은 리니스프리아였고 남쪽에는 신성왕국 프록시켄이었다.
네 나라가 아우르지 못한 나라와 민족들은 반도와 섬 주변과 경계의 곳곳에 흩어져 자존했다. 황야가 펼쳐진 변방과 더운 밀림,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에는 이민족이 들끓었고 이민족을 막기 위해 약소도시국가들끼리 동맹을 맺고 연합이 성립됐다.
하켄은 티날리곤의 계승자였고 호렙산에 현신한 카인왕의 혼령에게 태양의 신검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나라들을 호령하여 땅의 동쪽을 점령하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신검의 적수인 신검은 천년 째 침묵했고 아르고가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황제의 대군은 승승장구하여 세계의 통일이 목전이었다. 그러나 화룡을 건드린 대가로 황제는 자신의 신복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카인왕의 유물은 또 다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제국은 퇴각했다. 화룡은 복수를 다짐하며 긴 잠에 빠져들었다. 150년 뒤 제국이 다시 서쪽을 도모했을 때 브록켄은 없었고 아르고는 눈을 떴는데 그 주인은 아르테니스의 국왕이었다.
대륙동란과 화룡의 복수, 그리고 별의 출현으로 세계는 들썩였는데 하늘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어서 땅이 종말로 치달아도 달빛은 푸르렀고 청동종이 울려도 별들은 요동치 않았다. 세계가 누구의 것인지는 신만이 알고 있었고 신이 없어도 세계는 굳건했는데, 프록시켄의 성왕은 대성전의 삼각탑 꼭대기에서 절기와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제를 올렸고 탑 아래 정렬한 수만의 신민들이 아기를 안거나 예물을 든 채 신의 계시를 기다렸다.
세계는 달과 별의 고요 속에 안심했고, 고옹… 하는 종소리는 그 별에까지 닿았는데 왕들이 죽어서 간다는 하늘의 왕국이 그곳에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청동종의 울음소리는 죽은 왕들의 인도자인지 노인은 알 수 없었다.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그래서 세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
별에게 말을 거는, 자신의 목소리가 노인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는 황량한 산 정상에 우뚝 서있었다. 그곳에서 별들의 하늘은 가까웠다. 바람이 불어 장삼이 펄럭였다. 두건 아래 외짝 눈이 달 같은 정적을 담고 있었다.
그날 밤, 세 명의 손님이 노인의 뒤에 자리 잡은 캄캄한 동굴로부터 걸어 나와 한 사람씩 그를 만났다.
첫 번째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아들은 부러진 대검을 들고 그의 뒤에 섰다. 예기치 못한 만남인 듯 아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노인은 하나 뿐인 눈으로 아들을 돌아봤다. 노인의 잠잠한 낯빛은 어떠한 의문도 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
“쿠마는…… 당신의 제자는 죽었소. 그리고 그녀도…”
아들은 울분을 참고 있는 듯했다. 피와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아들이 물었다.
“……환상(Fantasy)이 뭡니까?”
“………”
“대답하십시오! 환상이 뭡니까?!?”
노인은 입을 열었다. 어둠에 가린 외짝 눈에서 조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봐라, 슈나이더…… 무엇이 들리나?”
먼 곳의 종소리가 하늘에서 다가왔다. 돌아가는 종소리의 자락 끝에, 노인이 다시 말했다.
“그것은 저 종소리와 같은 것이다, 슈나이더… 분명 존재하지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환상은 실존을 벗은 현실이다. 슈나이더… 세계는 그것으로 만들어졌다.”
아들이 물었다.
“창조가 뭡니까? 당신도 신을 믿는 겁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신은 환상이다, 슈나이더… 이 세계를 설계하고 만들어낸 존재가 있다 해도 그는 우리에게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환상이 환상을 낳지 못하고 실체가 환상을 낳는 것인데 때로는 환상이 실체를 낳기도 한다. 창조란… 그렇게 역설적이다, 슈나이더…”
“………”
“창조는 세계의 조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그대로, 세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품고 있다, 슈나이더… 변화는 이야기다. 창조는 그 시작과 끝을 만드는 일이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까? 당신은 나를 이용했소…”
아들이 그를 노려봤다. 눈물이 솟구칠 것 같은, 핏발 선 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다, 노인이 대답했다.
“별을 쟁취해라, 슈나이더…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별의 아래에 바람이 불었다. 땅에서 일어난 눈발이 어둠을 때렸다.
노인은 아들을 왔던 길로 돌려보냈다.
미궁으로 돌아가기 직전, 아들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운명이 뭡니까?”
노인이 말했다.
“시작과 끝.”
아들에 이어 두 번째로 노인을 찾아온 사람은 그의 숙적이었다. 그의 한쪽 눈을 가져간 장본인.
동굴을 빠져나온 라오니스인 사내는 한 소년을 등에 업고 있었다. 둘 다 피투성이였고 특히 소년의 부상이 심해보였다. 소년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사내가 노인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또 뵙게 되는 군요, 비토…”
“살아있었군, 반…”
노인 역시 두건 속에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노인의 외짝 눈은 흉악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소년을 안전한 곳에 눕혀놓은 후에, 사내는 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섰다.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사내는 한가롭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하늘로 시선이 향했다. 그 별이 있어 낯선 하늘이었다.
사내가 말했다.
“조금 전, 미궁 안에서 세 명의 제국인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크레슬린인 것 같더군요.”
“………”
“당신이 그들을 보냈습니까? 그래서 내가 엉뚱한 시대로 튀어나오게 된 겁니까?”
두건 속에서, 노인은 조용히 웃었다.
“나라고 해서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건 아니네.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를 굳이 내 옆에 서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나? …반.”
사내는 웃다가,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검은 입을 벌린 동굴은 그대로 있었다. 그 또한 이질적인 광경이다.
“하르마디온이 출구를 봉인하지 않는 군요. 한번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것도 당신이 예상 못한 일입니까?”
노인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여기서 나를 죽일 텐가?”
사내는 팔짱을 끼더니 바람 속에 한숨을 불어넣었다.
“글쎄요. 분명 당신이 필요한 시대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군요.”
노인은 말해주었다.
“…자네가 화룡을 처치했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아는 시대가 맞군….”
“이제 나를 죽일 텐가?”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모르지…. 자네라면, 어쩌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둘 사이엔 황량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사내가 소년 곁으로 되돌아가자 노인의 눈길이 그를 따라갔다. 소년의 몸이 더 식기 전에, 사내는 소년을 안아들었다. 허리 위로 붕대 투성이인 소년은 죽은 것처럼 이리저리 늘어졌다. 소년을 품에 안은 채 그는 노인을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비토.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노인은 입을 닫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리더니 동굴로 걸어갔다.
노인은 시선으로 그를 배웅했다. 살기가 걷힌, 쓸쓸한 눈빛이었다.
사내와 소년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나타났다. 그 밤에, 노인과 대면한 마지막 손님은 만물보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백색의 지팡이를 손에 쥔 그녀가 동굴로부터 걸어 나오자 황금의 머리칼들이 밤바람에 흩어졌다. 깨끗한 코트와 치마로 몸을 감쌌고 허리에 감긴 가죽허리띠엔 붉은 칼이 걸려있었다.
노인은 단전 앞에 차분히 손을 모은 채, 동굴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하늘의 반을 가린 보름달이 그 어떤 신화의 존재인양 노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노인을 발견한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환한 달빛을 등진 노인의 시커먼 그림자가 진심으로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는 그에게 다가갔다. 손에 들린 일각수의 눈매가 긴장으로 잔뜩 굳어졌다.
그의 앞에 서서, 여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그렇군….”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보고 싶었노라고,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길 원했노라고 눈빛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헤어진 연인들처럼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을 도와주듯, 고옹… 종이 울렸다. 여자의 눈길이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누가 죽었나 봐요.”
“그녀를 따라왔니?”
여자가 다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뇨.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금방 숲을 나왔어요. 하지만 그게 당신은 아니었어요….”
노인은 잔잔히 웃었다. 여자가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건가요? 여기는 내가 의도한 시간대가 아닌 것 같군요.”
“…먼저 찾아온 사람도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이 빠져나온 동굴로 고개를 돌렸다.
“웜홀(Warm hole)이 닫히지 않네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그녀는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지만 노인은 평온해보였다. 두건에 거의 가린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여자는 갑자기 표정이 얼어붙었다.
“설마…… 그녀와 만났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일도 없었겠지….”
노인은 여자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려주었다.
“그런데, 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그의 안에 있었고 여자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초연한 태도가 그녀에게 그것을 확신시켰다. 여자의 푸른 눈빛이 속눈썹과 함께 떨렸다.
“성공했군요….”
동정인지 절망인지, 여자는 그렇게 신음했다. 노인의 표정은 변함없었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가혹한 슬픔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막겠어요….”
노인은 그녀를 내버려둘 뿐,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숙명이리라. 첫 번째 반목은 일만 년쯤. 기억하지 않아도, 그 별의 관조 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게 됐다.
여자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의 희고 가는 손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 메인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하고 있군요…….”
뒤에 이어진 말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의 두건 속에 입 맞췄다. 종소리가 멈춘 하늘에 십자성이 빛살을 뿌리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