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는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올린 소설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다 좋은데 연애씬이 너무 허접하다.>>

 다른 댓글도 많이 달려 있었다.

 <<저건 여자가 아니라 넷카마 아니냐?>>

 올라온 비평글도 대동소이했다. 미르는 한 다섯 줄 정도 읽다가 스크롤을 내렸다. 자신의
단점을 확인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
는 단점을 고칠 수가 없는 것도, 또 그런데도 그 단점을 끊임없이 지적받는 것도 미르에게
는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평글 마지막 부분 한 줄을 읽은 미르는 마우스를 뽑아서 벽
에다 집어던졌다. 찢어진 마우스 케이블에서 파지직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한줄요약 : 너 그러다 TS당한다>>

 “아오!”

 미르는 반바지와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담배 한 갑을 들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경비아저씨가 미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아파트 단지는 금연입니다.”

 미르는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금연···.”

 “그럼 담배 어디서 피라고? 엉? 집에서 피면 엄마한테 얻어터져, 베란다에서 피면 윗층에
서 물 뿌리고. 그래서 밖에 나왔다. 근데 단지가 금연이라고? 엉? 담배 어디서 필까? 엉?”

 미르는 경비에게 욕을 하며 따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20대 청년이 60줄은 됐을 법 한
사람에게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후려칠 듯 위협하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차고 노려
보았지만 나서서 미르를 꾸짖는 사람은 없었다. 울뚝불뚝한 근육과 시커멓게 탄 피부, 흑인
을 연상시키는 두툼한 입술이 풍기는 위압감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아···. 그래 나가서 피워준다. 됐냐? 엉?”

 미르는 얼굴을 들이대 경비를 내려다보며 말하고는 경비가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자 인상을
한 번 팍 쓰고는 단지 밖으로 걸어나갔다. 물론 담뱃불은 끄지 않은 채였다.


 단지 밖을 돌아다니다 뜬금없게도 인도를 떡하니 가로막고 솟아난 공중전화 박스를 보고
미르는 당황했다.

 “뭐야? 닥터후 덕후가 플래시몹 하나?”

 그는 중얼거렸다.

 “이랬는데 들어가 보니까 안에가 존-나게 넓고.”

 그는 키득거리며 공중전화 박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

 놀랐다. 정말로 안은 오라지게 넓었다. 다만 타디스와 다른 점은 그 내부가 같잖은 기계장
치가 아니라 유럽풍 인터레이와 뭐에 쓸지도 모를 온갖 이상한 물건들로 가득하다는 것이었
다. 미르의 생각에 아무래도 이곳은 가게인 것 같았다. 물건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는데
미르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손님이네?”

 미르는 깜짝 놀라 “헉!”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웬 백인 여자애가 서 있었다. 하얀 머리
카락에 뾰족한 까만색 모자를 쓰고 망토? 로브? 그런 걸 입은 노란 눈의 소녀였다.

 “아 깜짝이야. 너 뭐냐?”

 “흐음. 뭘 찾고 있는지가 뻔히 보이네요. 따라와요.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필요한 물건이
마침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할 줄 아는 건 숨쉬기 먹기 싸기 말고는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데 그래도 일반적인 숨먹싸보다는 낫군요. 똥오줌 말고도 똥 같은 소설은 쌀 줄 아는 것 같
으니까.”

 폭언을 들은 미르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당장에라도 한 대 쥐어패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소녀가 “따라와요.” 하고 말하고 뒤로 돌아 가게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게 한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던 소녀는 뒤를 돌아서 미르를 보
고는 왜 안 와요? 얼른 이리 와요! 하고 말하고는 다시 물건들을 뒤졌다.

 “아, 여기 있었네.”

 조그만 약병을 미르의 눈 앞에 들이대며 소녀가 말했다.

 “잘 들어요. 상품 설명은 한 번 뿐, 구입 기회도 한 번 뿐. 세계마녀협회가 추천하는 이 상
품!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풀릴 때, 문제가 뭔지 알면서도 고치기 힘들 때! 이거 한방이
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답니다. 이름하여 <슈퍼 에고고>!”

 소녀의 설명이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위대한 심리학자 정철수는 알고 있겠죠?”

 “누구야 그 새끼는.”

 “뭐야, 인간의 심리를 에고 이드 슈퍼에고로 분류한 심리학잔데, 몰라요?”

 “칼 융이잖아, 그건. 병신아.”

 “영어식으로 읽으면 정철수에요.”

 “찰스 즁이면 몰라도 그게 어떻게 정철수야. 미묘하게 조선냄새 나는 이름으로 바꾸지 마라.”

 미르의 말에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어라? 조선말로 하면 정철수가 되는 거 아니었어요?”

 “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거냐.”

 “뭐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요. 눈깔 확 뽑아버린다? 신채호 선생한테서 조선말 배웠
다구요? 유명한 사람 아니에요?”

 신채호라면 카를 구스타프 융을 그딴 식으로 읽을 수도 있었다. 영어 단어 ‘neighbor’를
‘너이구구보르’라고 읽던 사람이니까. 소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신 참 답이 없는 새끼네요. 신채호 선생님 말도 안 듣고. 아, 됐어요. 설명 아직 한참
많이 남았어요. 정철수가 에고 이드 슈퍼에고를 각기 표층의식, 동물적인 본능 그리고 우주
적인 의식으로 분류한 건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알긴 뭘 알아··· 어? 아나보네? 의외네요.
아무튼 정철수 선생은 주역이라는 냄새나는 중국 돼지새끼들의 책을 파면서 생각했죠. 그는
주역의 이론으로 얻어낸 점괘가 놀랍도록 잘 들어맞고 심지어는 점을 친 사람의 심층의식을
아주아주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데에 착안했어요. 점을 치는 과정에서 간섭이라곤 아무 생각
없이 죽시를 가르는 것 뿐인데 언제나 내 물음과 점괘의 대답 사이의 놀라운 일치는 무엇인
가? 그는 여러 차례의 실험 끝에 이러한 결론을 내렸죠. 점을 치는 순간에 점괘가 슈퍼에고
차원의 답을 내려 준다! 우리 세계마녀협회는 슈퍼에고의 연구를 시작했죠. 멍청한 과학자
종자들이 비과학적이라면서 정철수를 까는 동안, 우리 세계마녀협회는 슈퍼에고의 기능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어요!”

 “이승기가 부릅니다.”

 “그리고 메탈리카도 불렀죠."

 "메탈리카?“

 그녀가 로브 품에서 아이팟 터치 4세대를 꺼내 조물락조물락 하더니 음악을 재생시켰다.
아이팟의 내장스피커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So Fucking Whaaaaaaat."

 "아오, 이년이!“

 미르는 소녀에게 휘두르려고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소녀가 그런 미르를 보고 말했다.

 “바로 그거에요. 그 성격!”

 “뭐 임마?”

 “당신의 고민이 뭔지 나는 알 수 있어요. 쓰는 글이 평가가 안 좋죠? 특히 연애 장면이나,
여자의 심리 묘사라거나. 대체 여자의 마음이 어떤지 이해가 안 되죠?”

 미르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냐?”

 주먹은 내린 채였다.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미르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당신의 고민은 이 <슈퍼 에고고>가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슈퍼에고는 모든 답을 알고 있
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슈퍼에고와 대화할 방법을 모르는 것일 뿐. <슈퍼 에고고>를 마시면
그 방법을 알게 될 거에요. 그러면 당신의 고민도 해결! 고민 해결 특효약, <슈퍼 에고고>
의 가격은 와 싸다, 단돈 천원!”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미르의 손에 약병을 쥐어줬다. 그리고 미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미르의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는 천원짜리 한 장을 빼 갔다.

 “어이? 뭐야?”

 “뭐긴 뭐에요, 물건값이죠. 고민을 해결하는 데 겨우 천 원이면 싼 값 아닌가요? 뭐 해요?
얼른 마셔 봐요. 당신 고민도 말끔히 해결 돼 버릴 테니까.”

 미르는 황당했지만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똥을 밟고 고민이 해결된다면 사실
이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소녀를 붙잡고 따지고 싸우는 것 보다는. 미르는 “정말 고민이 해결된단 말이지?” 하고 중
얼거리고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당연하죠! 그렇게 의심이 많은 걸 보니 알겠네요. 당신
은 유치원 때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으면서 버스기사 아저씨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 나
쁜 어린이인 게 틀림없어요!” 하고 말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르는 약병 안에 든 액체
를 마셨다.

 “음. 찝찝해라. 그 ‘슈퍼에고와 대화하는 방법’이라는 거는 언제 알게 되는 거냐?”

 “무슨 소리에요? <슈퍼 에고고>를 무시하지 마요. 당신은 벌써 대답을 들었어요.”

 “뭐? 무슨 소리야? ···윽! 쿨럭. 쿨럭. 으으···.”

 미르는 갑자기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미르의 시커먼, 마치 흑인같던 피부색이 점
점 밝아졌다. 그리고 덩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리고 덩치가 줄어들고, 피부색이 희게 변
해갈수록 미르의 검은 머리가 점점 더 새까매지며 길어졌다. 꼭 몸의 크기와 검은색이 머리
카락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

 소녀의 허리보다 굵던 팔뚝이 점점 줄어들고, 다리도 가늘어졌다. 미르의 입을 가리고 있
던 솥뚜껑만한 손바닥과 천하장사 소세지만큼 굵은 손가락이 작고 귀엽게 변해갔다. 덩치도
줄어들어 고깔모자를 쓴 소녀보다 세 배는 되어 보이던 덩치가 이제는 소녀보다 조금 더 큰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가슴과 엉덩이 크기는 많이 줄어들지 않았다. 얼굴도 점점 작아지더
니 마침내 작아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완전히 가려질 정도로 작고 예쁜 얼굴이 되었다.

 기침이 멈추자 높이가 2미터나 되던 시커먼 피부의 험상궂게 생긴 사내 미르는 너무 커서
어깨를 다 드러내며 헐렁거리는 흰 티 한 장 만을 입은 여자가 되었다. 입고 있던 반바지와
속옷은 작아진 허리와 엉덩이 사이즈 때문에 바닥까지 흘러내린 뒤였다.

 “오늘도 저희 가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상품, <슈퍼 에고고>를 구입하신
분들께는 여성용 속옷과 예쁜 여성복을 사은품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미르의 기침이 멈추고 숨을 고르자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미르가 걸치고
있던 흰 티가 갈기갈기 찢어지더니 사라지고, 미르의 알몸이 드러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트
렁크와 반바지도 흰 티와 마찬가지로 찢어진 뒤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훤칠한 키에 날씬
한 팔다리와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 그러니까 미르가 자신의 알몸을 한 번 흘끗 내려다보고
는 소녀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소녀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레이스 팬티와 브라가 미르에게 입혀졌다. 또다시 소
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미르는 이미 굽이 높은 롱부츠와 하늘거리는 분홍색 쉬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예뻐요. 아, 나도 가게 문 닫고 쇼핑이나 하러 갈까? ···왜 그래요? 여자의
마음을 묘사하려고 해도 잘 모르겠는 게 고민이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고민에 대한 슈퍼에
고의 답은 ‘여자가 돼서 여자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 아무 문제 없지 않나요?”

 “이, 이게 뭐야?! 원래대로 돌려놔!”

 미르의 절규에도 소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마이페이스로 말했다.

 “아하, 환불 받으시려구요? 어디 보자, 단순 변심으로 인한 <슈퍼 에고고>의 환불 기간
은···. 구입일로부터 1초! 그러니까 언제까지냐면, 지났네요.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소녀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미르는 가게에서 쫓겨났다. 미르는 다시 가게 안
으로 들어가서 소녀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전화박스는 뾰로롱 뾰로롱 하는 소리와 함께 깜빡
이면서 바람을 일으키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의 눈에는 아무도 없는 인도만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조그만 약병을 봤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던 연두색의 액체는 이미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 이제 어쩌지?!”

 미르는 절규했다. 당연히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미르는 졸지에 여자가 됐다. 미르는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냥 소
설을 끄적거리면서 여자의 심리 묘사라든가 하는 부분을 좀 더 잘 쓰고 싶은 것 뿐이었지
여자가 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혼자 살았던 데다가 연락하는 지
인 같은 것도 얼마 없었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박살났다거나 하는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여
자가 됐다는 것 자체가 미르에게는 고역이었다. 공공화장실을 헷갈려 남자화장실로 들어가
이상한 시선을 받는 건 가벼운 축에 속했다. 미르를 쳐다보는 남자들의 끈적끈적한 시선이
라거나 만원 대중교통에서 미르와 부대끼는 남자가 야릇한 표정이 되어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생리의 아픔과 불편함까지 겪으니 미르는 제정신을 유
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여자가 되고 다행인 점이라면 하나 정도가 있었다.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
다는 것 정도? 당연히 무슨무슨 방이나 룸싸롱이나 원조교제나 하는 일거리는 아니었다. 꽤
잘 팔리는 인터넷 쇼핑몰의 홍보담당이 길거리에서 본 미르를 피팅모델로 스카웃했다. 생활
비가 거의 바닥났던 미르는 고민 끝에 승낙했다. 여자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꺼림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일도 몇 주 정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미르는 마지막으로 카메라
에 대고 포즈를 지어 보였다. 플래쉬가 여러 번 터지고 나서 사진사가 말했다.

 “좋아요, 미르 씨. 수고하셨습니다! 이따 회식 자리에서 봬요.”

 “네, 수고하셨어요.”

 미르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반말을 쓰던 미르였지만 그건
흑형을 연상시키는 2미터의 근육질 남자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위압감과 힘
덕분이었다. 여자가 되고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미르의 말투는 공손해져 있었다. 열기를
뿜어대는 조명을 잔뜩 켜 놓은 스튜디오는 너무 더웠다. 미르는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쓱 닦고는 좀 씻어야겠네, 하고 중얼거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이제는 자신의 알몸을 보면서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 미르였다.

 “아, 미르씨. 촬영 다 끝나셨나 봐요?”

 “아, 네.”

 미르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빙글이라는 예명을 가진 디자이너에게 같이 인사했다. 이래저래
말이 잘 통하고 생각 외로 관심사도 비슷해 가벼운 술자리도 몇 번 가져 보는 등 꽤 친한
사이인 직장 동료였다. 다만 가끔 업무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막상 미르는 관심도 별
로 없는 유명 여성복 브랜드의 이름을 자꾸 늘어놓고 하는 게 조금 거슬렸다. 몇 번 사석에
서 그런 얘기를 꺼내길래 말은 안 했지만 대놓고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은 뒤로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디 가세요?”

 미르가 대답했다.

 “샤워 좀 하고 옷 갈아입으려구요. 땀 때문에 끈적거리네요.”

 미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빙글이는 그 모습을 보고 하핫, 하고 웃고는
수고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미르는 회식 자리에서 보자는 말로 작별 인사를 갈음했다. 하지
만 빙글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 저 오늘은 참석 못 할 것 같아요. 좀···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어, 그래요? 아쉽네. 내일 봬요.”

 “네. 내일 봬요, 미르 씨.”



 미르는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회사 건물 앞에는 열 명
남짓한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사장이니 부장이니 과장이니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디자이
너, 사진작가, 모델이 전부였다. 회사 회식이라기보다는 협력사원 회식이었다. 미르는 그들
사이에 끼어 회식 자리로 이동했다.

 사진작가, 디자이너, 모델들이라고 해서 한국인이 아닌 건 아니었다. 회식은 건배의 연속이
었다. 건배(乾杯), 건배. 술잔이 연거푸 말라붙었다. 상사가 술 돌리면 부하는 마시는 강압적
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민주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술을 거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덩치
큰 남자이던 때에도 덩치에 비해 술이 약하던 미르는 여자가 된 지금은 술이 처참하게 약했
다. 소주 세 잔 정도를 마시고 나니 미르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했다. 미르는 속으
로 생각했다. ‘빙글이랑 회식자리에 같이 오면 빙글이가 막아줘서 좀 덜 마실 수 있었는데.’
미르는 다섯 번째의 건배를 외치며 술잔을 비웠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
리를 술상에 박고 천장으로 쓰러졌다.

 “미르 씨 쓰러졌네?”

 “미르 씨가 술이 이렇게 약했나?”

 “전에 회식할 때는 좀 오래 버티는 것 같더니?”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빙글이 씨가 미르 씨 봐 주고 그랬었잖아요. 설마 주량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는데.”

 “아, 그랬지. 참. 솔직히 미르 씨 술 너무 약하네. 누가 미르 씨 좀 데려다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집에 데려다 준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몇 번 그러게요. 데려
다 줘야 하는데. 어떡하지? 같은 소리를 하다가 결국 그들은 미르를 한쪽 구석에 눕히고 술
자리가 끝나면 데려다 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시 건배를 외쳤다.

 술상에 쌓인 술병이 열 병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회식 자리에 빙글이가 나타났다. 사람
들이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빙글이 씨, 일 있어서 오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군가 묻자 빙글이가 대답했다.

 “아, 별 거 아닌 일이었어요. 생각보다 빨리 끝내기도 했고. 미르 씨는 지금 어때요?”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 한쪽 구석에 기대있는 미르를 가리켰다.

 “한 다섯 잔 정도 마시더니 뻗었더라고. 이리 와, 빙글이 씨. 여기 앉아. 자리 좀 만들어
주자고.”

 빙글이가 대답했다.

 “아, 아뇨. 전 미르 씨 좀 데려다 주고 올게요.”

 일동의 눈이 일순간 음흉해졌다. 하나둘씩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역시, 역시. 빙글이 씨, 잘 돼 가요?”

 “빙글이 씨 눈 너무 높다니까.

 “근데 빙글이 씨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난 미르 씨가 눈 더 높은 것 같아.”

 “힘 내세요. 킥킥.”

 “술 취한 틈 노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해요, 정정당당하게.”

 빙글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미르를 안아들었다. 일동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말했다.
휘이-! 공주님 안기네! 업으면 더 편할 건데. 혼자서 어떻게 사람을 업어. 다른 사람이 미르
씨한테 손 대는 꼴 보기 싫다 이거지. 빙글이는 웃으며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만 놀리세요. 전 그럼 미르 씨 데려다 주러 가겠습니다.”



 회식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빙글이는 정말로 정정당당하게 미르를 집에다 데려다 준 뒤
회식 자리에 연락해 회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시간이 늦어 그냥 집에 들어갔다. 미르는 그
말을 전해 듣고는 빙글이가 정말 구제 못할 숫기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절호의 기
회를 걷어차다니. 그래서 미르는 빙글이와 더 친해졌다.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끌린다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안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날 미르는 쇼핑몰 사장과 싸웠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그날 밤이 미르에게는 도무지
익숙해 질 수가 없는데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심하게 아프고 양도 많아서 힘든 생리, 그것도
둘쨋날이었기 때문에 미르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 회사에 삼
십 분 정도 지각했다. 그걸 두고 사장이 조금 일찍 다니라고 충고하자 미르는 “그···, 생리
통이 심해서 그랬어요. 조심하겠습니다.” 하고 사과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끝날 일이
었다. 하지만 미르는 사장이 한 말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말았다.

 “쯧쯧.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니까. 생리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뭐에요? 여자는 안 돼” 야! 내가 여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가 된 줄 알아? 당장 사과해,
새끼야!”

 미르는 억울했다. 미르는 말 그대로 여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가 된 게 아니었다. 애초에
여자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별 이상한 일 때문에 여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사장
에게 그런 말까지 들으니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미르는 사장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여자가 되고 싶었는줄 아냐고! 그래, 넌 남자라서 좋겠다, 개새끼야! 너, 생리 안 해
봐서 모르지? 밤에 얼마나 아프고 흘러내릴까봐 잠도 제대로 못자는지 모르지? 나 어제 새
벽까지 끙끙대면서, 그런데 흘러내릴까봐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면서 겨우 네 시간
잤어! 그것도 모르면서, 뭐? 생리가 벼슬인 줄 아나? 여자는 안 돼? 내가 여자가 되고 싶어
서 된 거냐고? 어? 말 해 봐, 새끼야아!”

 미르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장도 놀란 표정을 지우고 같이 화를 내
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어디서 잘 했다고 큰소리야? 다른 여자들 다 하는 생리가 뭐가 그렇게 유별나
서 지각을 삼십 분 씩이나 해 놓고서는 일찍 다니라고 하니까 혼자 욕질이야? 욕질이. 회사
그만 다니고 싶어? 엉?!”

 “그래, 생리해서 존나게 미안하다 새끼야! 짤리고 싶냐고? 그래, 짤리고 싶다! 이딴 회사
안 다니고 만다! 그래, 때려 칠게! 때려 치면 되냐? 흑··· 흑···!”

 회사 사람들이 미르와 사장에게 달라붙어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 중에서 빙글이는
사장 쪽으로 갔다. 미르는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충격을 받았다. 흐느끼느라
숨이 차서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어지러워서 다른 소리들이 뭉개져서 들리는 와중에도
빙글이가 하는 말만은 귀에 또렷이 들어왔다. 사장님, 참으세요. 여자들 생리할 때 예민해지
는 거 아시잖아요. 어제 잠도 못 잤다는데 피곤기 까지 했을 테니 어떻겠요. 사장님이 참으
세요. 미르 씨는 제가 얘기 해 둘게요.

 사장은 빙글이의 말을 들으며 씩씩거리더니 사장실로 들어갔다. 빙글이는 사장을 사장실에
들여보내고 울음을 참으려고 훌쩍이다가 목 놓아 울고, 사람들이 달래면 소리를 죽여 흐느
끼다가 다시 엉엉 통곡하고를 반복하며 한 켠에 앉아있는 미르에게로 다가갔다. 미르를 위
로해 주던 여직원들이 빙글이가 오는 걸 보곤 주변으로 비켜 서기 시작했다.

 “미르 씨, 그만 우세요. 울면 힘드실 텐데.”

 미르는 그 말을 듣고서는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눈물도 조금 덜 나오기 시작했
고 호흡도 점점 진정됐다. 흑 흑 하며 어깨를 들썩거리긴 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미
르는 고개를 들고 빙글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르를 보고 빙글이가 말했다.

 “미르 씨, 너무 심했어요. 아무리 피곤하고 신경 날카롭고 해도 사장님한테 그러는 건 아
니잖아요? 사장님한테는 일단 제가 말 해 뒀으니까, 나중에 같이 가서 사과하러 가요. 그리
고···.”

 빙글이의 말은 역효과였다. 미르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울면서 빙글이를 때리
기 시작했다.

 “흑··· 꺼져! 내가 너, 너한테 그, 흐끅! 그딴 소리나 듣고, 흑! 싶은 줄 알아? 내가 뭘 잘못
해서, 흑! 사, 사장새끼한테··· 흑! 가서 사과해야 돼?! 내가 뭐, 흑! 뭘 잘못해서어어! 흑! 으
아아아앙!”

 비켜서 있던 다른 여직원들이 다시 미르를 감싸고는 위로하기 시작했다. 빙글이를 쳐다보
는 주위의 눈은 싸늘했다. 그 중 하나가 빙글이에게 말했다.

 “어쩜 미르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네? 아, 아니, 제가 뭘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당장 나가요!”



 미르는 그 날 총무과장에게 불려갔다. 혼났다거나 징계를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총무
과장도 비록 폐경기가 지난 나이이긴 했지만 여자였고, 그래서 미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
었다. 과장은 미르에게 특별휴가를 하루 줬다. 우느라 눈이 아직 부어있는 미르는 아무 말
않고 과장이 하는 말을 들었다. 과장은 미르를 위로하며 사표 문제는 최대한 노력해 볼 테
니 안심하고 하루동안 푹 쉬라고 말 했다. 디자이너인 빙글이 일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미르는 회사를 나서서 자주 가는 칵테일 바로 향했다. 빙글이와 자주 가서 둘이서 술을 마
시던, 손님이 적어서 갈 때면 언제나 미르와 빙글이, 바텐더 세 사람 뿐이던 바였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왠지 거길 가면 바텐더가 자신을 맞이해 줄 것 같았다. 지하 계
단을 내려가니 미르가 생각한 것처럼 바의 문은 열려 있었다.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저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 뿐이었지만 미르는 문을 열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여자
바텐더가 미르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정우 씨, 나 술 좀 먹고 싶어요.”

 “술은 웬 술이에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거기다 술도 약하면서? 무슨 일 있는 거죠?”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밖으로 나갔다. 바텐더는 가까이 다가가서 미르의 얼굴
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에요? 눈이 퉁퉁 부었네! 어떻게 된 거에요? 아, 내 정신 좀 봐. 이리 앉아요.
일단 뭣 좀 내줄게.”

 바텐더는 미르를 의자에 앉혔다. 미르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텐더는
초코 시럽과 우유로 코코아를 급조해서 미르에게 내놓았다. 미르는 앞에 놓인 코코아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다 대려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흑, 빙글이, 그 개새끼가···.”

 미르는 울면서 빙글이를 욕하기 시작했다. 날 보고 나쁘대요.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무조건 나 보고 사과하라고···. 전부 다 사장이 잘못한 건데. 나쁜 놈. 둘쨋날이 얼마나 힘든
데. 바텐더는 미르를 다독이며 미르를 따라 빙글이를 욕했다. 미르가 내뱉는 말을 조합한
바텐더는 상황을 이해했다. 미르가 진정되자 바텐더는 코코아 한 잔을 새로 미르에게 내밀
었다.

 “코코아 다 식었네요. 따뜻한 게 좋죠. 아, 찜질팩 드릴까요? 진통제하고?”

 “네···. 고마워요. 진통제는 됐어요.”

 바텐더는 테이블 밑을 뒤적거리더니 부대 하나를 꺼내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 미르는 코
코아를 홀짝였다. 진짜 코코아가 아니라 칵테일을 만들 때 쓰는 초코 시럽으로 만든 모조품
이었지만 따뜻하고 달콤한 것이 들어가자 기분이 조금씩 풀어졌다. 전자렌지에서 팅 하는
소리가 들리자 바텐더는 찜질팩을 꺼내 미르에게 건넸다. 미르는 팩을 받아 아랫배에 갖다
댔다. 하지만 아직 빙글이에 대한 화가 풀리지는 않았는지 미르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빙글
이의 욕이 쏟아져 나왔다. 바텐더는 미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미르가 코코아를 다
먹고도 말을 하지 않자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미르 씨, 여자는 여자구나.”

 바텐더의 말에 미르는 당황했다.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렇게 남자같이 털털하게 보이고 그러더니 말이에요. 남자 마음도 하나도 모르고. 미르
씨 성격이 이렇게 귀여운 줄을 몰랐네?”

 바텐더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바텐더의 설명이 이어졌다.

 “미르 씨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죠, 남자하고 여자는 사고방식이 정~말 많이 달라요. 왜
그런 책도 있잖아요?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라고. 아예 종 자체가 다르다고까
지 말을 하는 거죠.”

 미르가 바텐더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화성이 남자고 금성이 여자에요. 그 책은 나도 읽어 봤어요.”

 “아, 그래요? 그럼 그 책 내용도 아시겠네요?”

 미르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너넨 서로 평생 이해 못 해, 이것들아.’”

 바텐더가 미르의 말을 듣고 웃었다. 바텐더의 말이 이어졌다.

 “뭐, 그런 거죠. 남자는 여자를 이해 못하고, 여자는 남자를 이해 못하고. 그런데 이해는
못 하더라도···. 제가 직업상 사람들하고 얘기를 할 일이 많잖아요?”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뭐, 손님은 없지만···. 그만큼 깊은 대화를 했다고 해 둘게요. 헤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요. 무슨 뜻이냐니까요?”

 “참 성격도 급하네. 여러 사람들하고 꽤 깊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말이죠, 저는 남자들
심리 솔직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어요. 그런데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알 것 같더라
구요. 남자들은요, 뭐랄까, 서열에 민감해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얼마나 소중하게 생
각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권력의 서열 같은 거요. 아마 빙글이 씨가 미르 씨한테 먼저 안
오고 사장님한테 간 건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리고 옳고 그름을 중시해요. 남자들이
그래서 옳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하게 생각하죠.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위로를 하는
자리에서까지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위로해 줄 거라면 따뜻하게 감싸고 공감해
주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그래도 그건 니가 잘못한 거야.’ 하는 소리를 하냐구요.”

 미르는 그제서야 자신이 사장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고 있을 때 빙글이가 사장 쪽으로
갔을 때 충격을 받았는지 흐릿하게나마 감이 잡혔다. 그리고 어째서 빙글이가 자신에게 와
서 자신을 위로할 때 그렇게 서럽게 울게 됐는지도 짐작이 갈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뭔가
하나가 부족한 것 같았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 아니, 퍼즐처
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물건에 비유하기는 어색했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것 같다고 해
야 옳을 것 같았다.

 “헤에···.”

 미르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텐더가 미르를 불렀다.

 “그런데, 미르 씨.”

 “네, 네?”

 바텐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미르에게 말했다.

 “안 그런 척 하더니···.”

 “네? 뭐가요?”

 바텐더가 미르와 눈을 맞추고 미르를 쳐다봤다. 삼십 초 정도? 그동안 미르를 바라보던 바
텐더는 피식 웃고는 손가락으로 미르의 코를 짚었다.

 “어휴. 아직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 같네.”

 “뭐, 뭐가 말이에요?”

 당황한 미르를 향해 바텐더가 말했다.

 “미르 씨, 내 말, 생각하지 말고 바로 대답해 줘야 돼요?”

 “네?”

 “그렇게 할 거에요, 말 거에요?”

 바텐더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미르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 그럴게요.”

 미르는 바텐더가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하며 바텐더의 말을 기다렸다. 바텐더가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질문을 꺼내자 미르는 주저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바텐더는 이렇게
물었다.

 “미르 씨, 빙글이 씨 사랑하죠?”

 이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을 깨달은 미르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
을 몰랐다. 얼굴을 붉히고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바텐더를 바라보는 미르에게 바텐더는 그
럼 그렇다는 듯 말했다.

 “에구구, 이 아가씨야. 어떻게 자기가 누구 좋아하는 지도 모르나요? 애인사이처럼 사흘이
멀다 하고 나란히 아무도 없는 으슥한 지하실 한 쪽 구석으로···.”

 “정우 씨!”

 미르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바텐더가 움찔 하고 놀랐다.

 “아, 깜짝이야. 근데 그렇게 소리 크게 내도 괜찮아요? 안 샜어요?”

 미르는 잠시 무슨 소리 하는 건가 하다가 바텐더의 뜻을 알고 빨개진 얼굴을 더욱 붉혔다.
미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그,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얘기 마저요.”

 “뭐, 별 거 아닌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 자주, 그렇게 기쁜 표정으로 와서는 그렇게
즐겁게 한참동안, 술도 별로 안 마셨으면서 그렇게 넋이 나가도록 몇 시간이고 서로 쳐다보
면서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에요. 둘 다 상대방이 자길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거기다가 심지
어 한 쪽은 자기가 누굴 좋아하는 지도 모르고.”

 “그럴 리가 없어요!”

 미르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미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남자다. 나는 남자라고. 내가 남
자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빙글이가 좋은 놈이긴 하지만···. 그리고 미르는
고개를 휙 휙 휘저었다. 바텐더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럼, 빙글이 씨가 왜 미르 씨가 사장님이랑 싸울 때 사장님한테 먼저 갔던 게 그렇게 화
가 났던 걸까요? 빙글이 씨가 미르 씨 위로하러 왔을 때 한 말이 서러웠던 이유는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미르 씨와 싸운 사람을 먼저 위로해 준다고 그렇게 화가 날까요? 모르
는 사람이 슬퍼하는 미르 씨를 보고 미르 씨의 잘못을 이야기하면, 물론 기분이야 나빴겠지
만 그때처럼 배신감을 느끼진 못했을 걸요? 미르 씨가 그만큼 빙글이 씨를 소중한 사람이라
고 스스로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거죠.: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고 키득거렸다. 미르의 마음 속에 남은 한 줌 의심이 미르에게 확인
을 요구했다. 미르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빙글이를 사랑하나? 미르는 빙글이와 보냈
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회식 자리에서 미르가 술을 마시는 걸 막아 주는 빙글이.
둘이서 취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빙글이, 칵테일 바 팡갤로니아에서 이야기할 때의 빙글
이, 자신을 데려다 줄 때의 빙글이, 그리고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오늘 아침에 사장을 먼저
위로하던 빙글이와 자신을 어설프게 위로하던 빙글이까지. 모든 게 명확해졌다. 미르는 생
각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나는 그렇게 화가 나고, 슬프고, 서러웠던 거였구나. 안개가
말끔히 걷힌 느낌이었다. 미르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심장이 터질 것같
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래요···? 그, 그럼··· 혹시···.”

 미르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바텐더는 조용히 미르가 말을 다 끝내기를 기다렸다.

 “그럼, 빙글이 씨도, 혹시··· 나를···. ···조, 좋아하나요···?”

 “글쎄요? 그건 모르죠?”

 “엑? 그런 게 어딨어요?”

 미르는 바텐더에게 따지듯 물었다. 바텐더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건 직접 물어보셔야죠. 그게 예의잖아요? 미르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미
르 씨 보고 ‘야, 누구누구가 그러는데 니가 나 좋아한다며? 진짜냐?’ 그러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네. 정우 씨 말이 맞네요. 직접 확인 해 봐야겠어요.”

 미르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단축번호를 누르거나 전화번호 검색을 하거나 하고 싶
지는 않았다. 미르는 빙글이의 핸드폰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입으로 자신이 누르는 번호
를 조그맣게 소리내 말하면서. 신호가 울리고 빙글이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가 빙글이의
말을 전했다.

 “네, 미르 씨. 좀 괜찮으세요?”

 미르는 빙글이의 목소리를 듣자 신기하게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웃음을 참으
려 노력하며 미르가 말했다.

 “빙글이 씨.”

 “네?”

 “지금 당장, 여기로 오세요. 할 말 있어요. 칵테일 바 팡갤로니아에요.”

 “네? 저기, 아직 업무시간인데···.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괜찮으세요? 술 드셔도?”

 미르는 빙글이의 말에 자꾸 찢어지려는 입을 손으로 막고 말했다.

 “월차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그거 쓰면 되잖아요? 그리고, 술 안 먹으니까 걱정 마세요.”

 빙글이가 미르의 말을 듣고 말했다.

 “네, 지금 당장 갈게요. 정말 술 안 드신 거죠?”

 “그렇다니까요. 얼른 와요. 늦으면 안 돼요? 정말로 중요한 일이니까.”

 “네, 그럴게요. 그런데, 저···.”

 전화기 너머에서 빙글이가 머뭇거렸다.

 “음? 왜요?”

 “그··· 아까 전의 일, 다른 여직원들한테 한 소리 들었어요. 그러니까···.”

 빙글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미르가 화난 목소리로 빙글이의 말을 끊었다. 물론 조금도
화가 나 있지는 않았다.

 “그만!”

 미르의 외침에 빙글이의 말이 끊겼다. 미르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 말은, 여기 와서 내 얼굴 직접 보면서 해 줘요.”

 “···네. 금방 갈게요.”

 “네. 금방 와요. ···아참, 월차 쓰겠다고 팀장님 찾아가서 시간 잡아먹지 말고, 옆 동료한테
월차 쓴다고 말하고 그냥 나와 버려요. 나중에 진짜로 그렇게 했는지 확인할 거에요? 꼭이
에요?”

 “네, 미르 씨. 이따 봐요.”

 “···네. 빙글이 씨. 이따 봐요.”

 미르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빙글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반대로 빙글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미르는 전화를 끊고 나
서 한동안 전화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텐더가 조그맣게 흠, 흠 하고 헛기침
을 하자 그제서야 미르는 바텐더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미르는 잠시 핸드폰을 저글링을
하듯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바텐더에게 말했다.

 “저기··· 고마워요. 정우 씨. 그··· 저도 몰랐던 제 진심, 알 수 있게 해 줘서요.”

 “후후. 다행이네요.”

 바텐더는 잔잔하게 웃음짓고는 미르에게 말했다.

 “이제 여자의 마음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미르는 바텐더의 말에 깜짝 놀랐다. 미르는 어떻게 그걸 아냐고, 만약 이게 유도심문이었
으면 취조측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바텐더는 손가락을 한 번 딱 하고
튕겼다. 바텐더의 모습은 미르에게 물약, <슈퍼 에고고>를 팔았던 가게의 고깔모자를 쓴 백
인 소녀로 변했다.

 “후후. 찾아가는 서비스, 세계마녀협회랍니다. 석 달이나 지났는데도 도무지 답을 못 찾길
래 좀 도와주려고 온 거에요. 제가 도와주러 오고도 아홉 달이나 걸릴 줄은 몰랐네요. 사실
오늘까지 답을 못 깨달았으면 그냥 원래대로 돌려주려고 했는데.”

 미르는 소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제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
다.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해도, 미르가 생각하기에 그건 ‘원래대로’가 아닌 것 같았다. 지
금의 미르에게는 지금의 미르의 모습이 ‘원래대로’였다. 미르가 그렇게 말하자 소녀가 웃으
며 말했다.

 “그래요. 맞아요. 그런 고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거죠. 그게 바로 슈퍼에고의 궁극적인
답이에요. 축하드려요. 답을 찾으신 걸.”

 소녀는 테이블 밖으로 걸어나오며 미르에게 말했다.

 “자, 당신만을 위해 만들었던 이 곳도 이제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됐네요. 후아! 아홉 달이나
연구가 밀려버렸네에~. 앞으론 쇼핑이고 까페고 없겠구나아~.”

 미르는 소녀를 바라보고는 킥킥 하고 웃었다. 소녀가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미르에게 말했다.

 “흐음. 나 이제 바빠요?”

 “알았어요. 있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나가야죠. 손가락 튕겨서 내보내지 마요. 내가 걸어
서 나갈 테니까.”

 “네. 이번에야말로 안녕이네요. 다시는 볼 일 없겠네요! 으아아! 해방이다!”

 “고마워요, 뭐, 지난 1년동안 고생도 좀 많이 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소녀는 말 없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치마 자락을 양 손으로 살짝 들추고 무릎을 굽히며 고
개를 숙였다. 미르도 소녀의 동작을 따라했다. 윗옷 자락을 양 손으로 살짝 들추고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하지 않았다. 미르는 밖을 향했
다. 미르가 칵테일 바의 문을 나선 뒤 다시 문을 닫자 안에서 작년 이맘때쯤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지금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 보면 거기는 미르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 안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지만, 곧
미르가 치러야 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르는 빙글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땀에 젖은 빙글이가 헉헉거리며 달
려왔다.

 “아, 미르 씨.”

 “어서 와요, 빙글이 씨.”

 “허억. 허억. 네. 미르 씨, 아까 일 정말로-”

 “나중에요. 내가 먼저 할 말 있어요.”

 빙글이가 숨을 고르는 동안 미르는 기다렸다. 빙글이가 기운을 차리자 미르는 빙글이에게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빙글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미르와 빙글이는 서로를 껴안았다. 빙글
이가 땀에 젖어 땀내를 풍기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한여름의 한낮이라 날씨가 매우 덥다는
것도 둘의 포옹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미르는 자신이 올린 소설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작가님, 정말 너무너무 잘 썼어요! 정말 재밌게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미르는 다른 댓글도 확인했다.

 <<아 무슨;; 님 소설 남캐들은 전부 다 게이임?;;>>

 미르는 이번에는 비평글을 확인했다. 취향을 많이 탈 내용이라는 평가였다. 연애 장면은
밀고 당기는 맛이 있고 여성 캐릭터의 감정 표현도 섬세하지만 남성 캐릭터의 성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내용이었다. 미르는 스크롤을 내렸다. 미르는 마지막 한 줄을 보고는 웃음
을 지었다.

 <<한줄요약 : 그러니까 남캐를 TS 시켜라>>

 미르는 컴퓨터를 끄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뒤에서 미르를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평가가 어때요?”

 “뭐, 늘 그렇죠. 여자애들은 좋다고 난리고, 남자애들은 게이냄새 난다고 난리고요.”

 미르는 등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에 키스하는 빙글이에게 기댔다. 자신이 쓴
소설에 올라온 댓글이나 비평글을 확인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 캐릭터가 비현실적이
라는 단점을 고치니 이제는 남성 캐릭터가 비현실적이라니. 이래서야 여자 심리를 이해하게
된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미르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볼 땐 미르 씨 소설 정말 재밌던데 말이에요. 어떻게 미르 씨 글을 보고 재미없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지 이해가 안 가요.”

 빙글이가 던진 실없는 아부에 미르는 뒤돌아 앉아 등받이에 팔을 얹고 씩 웃었다.

 “후후. 듣기 좋은 거짓말도 할 줄 알고, 빙글이 씨 많이 착해졌네요?”

 “그럼요. 누구 애인인데요. 당연히 착하죠.”

 빙글이는 능글맞게 웃었다. 미르는 빙글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말했다.

 “후후. 착해요. 그러니까 상을 줄게요.”

 미르가 빙글이와 진한 키스를 나눴다. 미르와 빙글이는 서로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
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미르는 내일 출근 시간이 조금 걱정됐지만, 그런 건 미르와 빙글
이에게 있어서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