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마당 - 환상회랑 작품
글 수 59
사람들이 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다들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느라 정신없다. 그에 비해 난 한가하다. 대낮부터 식당에 앉아 유유히 사람들을 관찰할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무척이나 날 부러워했을 거다. 대체 어떤 신분이기에, 재산이 얼마나 많기에 저리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까? 라고. 유감스럽게도 난 부자가 아니며 고귀하지도 않다. 오히려 귀천을 따진다면 가장 천한 사람일 거다.
열 발자국 쯤 떨어진 골목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온다. 그를 보자마자 내가 기다리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매 번 모습을 달리하고 나타나지만 나는 그가 ‘그’임을 안다. 그는 내게 쪽지 하나를 전해주고 서둘러 가버린다. 내 손에 쥐어져있는 쪽지만 아니라면 그가 왔다갔는지 나조차 몰랐을 것이다.
- 3일 뒤 누하기르 숲 -
젠장, 이번엔 호수를 통과할 작정인가 보다. 만나는 장소는 숲이지만 누하기르 숲 근처에 로셰아 호수가 있다는 건 뮐 교국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호수. 괴물이 우글우글 거리며 들어간 사람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저주받은 호수. 사람들은 로셰아 호수라면 치를 떨며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뮐 교국에 퍼져있는 괴담의 절반은 로셰아 호수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로셰아 호수의 생물들이 호수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수에서 일정 범위 이상은 가려 하지 않으며, 먼저 호수에 접근하지 않는 한 공격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교단도 굳이 퇴치 작업을 나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호수는 긴 세월동안 무인지대가 되었다. 손을 대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에게 손대지 말라. 이 점에서 교단과 괴물들은 통했다.
물론 그곳을 지나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나도 몇 년 전 그곳을 통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가 살아난 건 순전히 운이다. 난 극심한 부상을 입어 몇 십일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났다. 당시 겪었던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우며 손발이 풀릴 지경이다. 다시 로셰아 호수에 가야한다니 오줌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맘 같아선 다 때려 치고 싶지만 배운 일이 이것뿐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이것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긴 조직의 윗대가리들도 바보는 아니니 어느 정도는 방법을 마련해 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맘이 편해졌다.
이틀 간 준비를 한 뒤 삼일 째 새벽 누하기르 숲으로 향했다. 조직의 특별한 표식이 군데군데 나 있어 어렵지 않게 집결 장소를 찾았다. 도착해서 보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난 낯익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어, 마르. 너도 이번 일을 맡게 됐나 보지?”
마르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이야. 장. 세 달만인가?”
“용케도 그걸 기억하고 있군.”
“하하, 내가 기억력 하나는 쓸 만하지.”
마르가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마르와 난 비슷한 시기에 조직에 들어갔고 나이도 같았다. 게다가 우연의 일치인지 한 조에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하다보면 몇 날 며칠이고 같이 낮밤을 보내게 된다. 그렇기에 한 번만 같이 일을 해도 제법 친근감을 갖게 되는데 마르와 난 열 번 가량 일을 함께 했다. 조직의 규칙 때문에 밖에서는 연락을 하지 못하지만 때때로 난 마르가 친형제 마냥 느껴졌다. 그건 마르도 마찬가지일 거다.
“저 친구는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인사를 나눈 뒤 방금 생겨난 의문을 얘기했다. 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처음 봐. 아마 신입인가 보지.”
나나 마르는 일을 한지 오래되었기에 조직 사람들 얼굴을 거의 다 알았다. 그래봐야 운반책들의 얼굴 정도지만.
“신입이라 오랜만이네.”
요즘 들어 국경 지역 경계가 강화되다 보니 일을 못하고 있다. 명목은 요사스런 괴물들이 신성 대산맥을 감히 침범하기 못하게 하고 이단자를 처단해서 믿음을 한결 공고히 하기 위함이지만 실상이 다르다는 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한 조치이다. 교단에서 불법 이민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뮐 교국에는 남부지방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제법 살고 있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볼 때 뮐 교국은 꿈속에서 그리던 이상향이었다. 부드러운 꽃향기가 흐드러지게 퍼져 있는 가운데 신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곳. 바라는 건 모든 게 다 이루어지며 온갖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곳. 어떤 이들은 뮐 교국을 싫어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선망한다. 이 땅에 천국이 있다면 뮐 교국이 천국 그 자체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국가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때 뮐 교국은 국가를 이루고 문화를 꽃피웠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괴물들에게 도륙당할 때도 뮐 교국은 당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맞섰다. 뮐 교국 사람은 남부 지방 사람보다 키도 컸으며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
이러하니 남부 지방 사람들이 뮐 교국에 가 살고 싶어 하고, 뮐 교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직까지도 괴물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남부 지방의 어지러운 정세도 불법 이민을 한결 부추겼다. 그나슈페트란 국가가 남부에 생겨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뮐 교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국력이어서 국가를 보존하기도 바빴다.
조직은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었다. 뮐 교국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뮐 교국에 살게 해주었다. 뮐 교국으로 가고자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대단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직은 대단히 바빴다. 하루에 40~50명 정도를 산맥 너머로 빼돌리곤 했다. 허나 요즘엔 교단의 강력해진 단속 때문에 입맛만 다시고 있는 형편이다. 나도 세 달 전 일을 한 뒤 쭉 손을 놓고 있었다. 돈이 궁한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 떠났고 조직도 그들을 붙잡을 여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규모가 줄었다. 인원이 줄어 아쉬웠던 참에 신입이 들어왔다니 반가웠다.
“이름이 뭐요?”
난 신입에게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옆에 있던 마르가 대신 말했다.
“소용없어. 내가 몇 번 말을 걸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
“과묵한 성격인가?”
“어쩌면........”
마르가 소리를 낮추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림자일지도 모르지.”
“그림자라.......”
불법 이민 온 자들은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살 수 없다. 정체가 드러나는 즉시 신성 대산맥 아래 남부 지방으로 내쫓기거나 차디찬 북서부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결국 그들은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뮐 교국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그들은 그림자라 불린다. 그들은 낙원을 찾아 왔지만 그들에게 낙원은 없었다.
“네 얘기가 맞는 것 같아.”
난 마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림자들은 뮐 교국의 말에 익숙하지 않기에 입을 여는 순간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그 때문에 그들은 웬만해선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쳇, 적어도 우리 앞에선 과묵할 필요가 없는데.”
마르가 빈정거렸다.
“버릇인가 보지. 괜히 마구 떠벌렸다가 잡혀가는 것보단 낫잖아.”
딱히 맘에 들진 않지만 신입을 옹호해주었다. 신입의 행동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두 명이 더 나타났다. 몽과 라그나프였다. 몽은 나나 마르보다 열 살쯤 많았고 라그나프는 일곱 살이 많았다.
“같이 오신 건가요?”
내가 몽에게 물었다.
“아니, 요 앞에서 만났어.”
“그랬군요.”
“오래 기다렸나?"
"아뇨. 방금 왔습니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그럼 시작하지.”
몽이 말했다. 이번에도 몽이 조장인가 보다.
“벌써요? 다섯 명 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보통 한 번 일을 할 때 열다섯 명에서 스물 명 정도로 조를 짜기 마련이다. 헌데 오늘은 다섯 명 뿐이었다.
“이게 다야. 다들 연락이 잘 안 돼.”
하긴 로셰아 호수는 ‘신의 힘’을 지닌 이들도 꺼리는 곳이다.
“젠장, 겨우 다섯 가지고 뭘 하자는 건지.”
라그나프가 불만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으로선 이게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야.”
“그럼 다른 날로 미루면 되지 않습니까?”
“현재 조직 사정이 좋지 않아. 일을 못하다보니 자금도 말라가고 조직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어. 행간에선 우리 조직이 망해버렸단 소문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실제로 그렇게 될 거고. 그러니 한 번쯤 일을 제대로 해내서 조직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조직의 뛰어난 능력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어. 이번 일은 조직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야.”
몽은 술술 내뱉었다. 미리 준비라도 한 마냥.
“할 수 없군.”
라그나프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조직이 망할지 모른다니 그로서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근데 방법은 있수? 로셰아 호수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나도 그 점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마르도 흥미가 동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몽을 바라봤다. 단지 신입만이 별 관심 없어했다.
“물론 있지.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야. 우리는 로셰아 호수 외곽을 따라간다.”
“하아.......”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온다. 여길 집결지로 삼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설마 했다.
“외곽으로 가면 괴물이 습격해올 시엔 괴물들의 거주지 밖으로 금방 달아날 수 있고, 순찰 나온 군사들에게 들켜도 외곽선 안으로 들어가면 쫓아오지 못한다.”
반대로 군사들에게 붙잡힐 수도 괴물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 한쪽을 피하면 다른 하나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요컨대 위험이 두 배였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거의 절망적인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곧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없다. 주요 통로는 교단이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그리로 가는 건 자살 행위다.”
호수 외곽선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듯 싶었으나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나만 잡혀들어 가도록 손을 쓸 테니 너무 걱정마라. 아직은 교단에 연줄이 남아있으니까. 대신 이번 일만 성공하면 보수는 평소의 세 배가 지급된다. 명심하고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대답하고 길을 나섰다. 세 시간쯤 걷자 교단에서 세운 경계판이 보였다. 경계판은 호수를 감싸듯이 호수 전체에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로셰아 호수니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
짧은 경계문구지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호수 주변엔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온갖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인세의 황량함을 느끼게 했다. 길이 없었기에 풀을 헤치며 나아가야했다. 덕분에 움직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한편으로는 밖에서 누군가 보더라도 쉽사리 우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긴장한 채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언제 어디서 괴물의 습격을 받을지 몰랐다. 비록 호수 외곽이기는 했지만 분명 괴물들의 영역이었다. 지금 당장 잡아먹히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도 별 다른 괴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다들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말은 안했지만 호수 외곽이라서 괴물이 나타나질 않는 거려니 짐작하는 듯 했다. 허나 몇 년 전 호수를 지나와 본 적이 있는 나로선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잊었나 보다. 단지 호수에 오면 안 된다는 것만 기억했다.
“잠깐 쉬었다 갈까?”
몽이 얘기를 꺼내자 다들 반가워하는 기색이다. 거친 숲에 길을 만들며 오는 일은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말은 안했지만 다들 지친 게 틀림없다. 체력 좋은 라그나프도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고 좋게 봐줘야 보통 밖에 안 되는 마르는 아까부터 헉헉대고 있다. 단지 신입만이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숲 한가운데서 쉬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씩 쉬면서 가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다들 뻗어버릴 게 뻔했다.
바닥에 앉자마자 마르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걸 몇 알 꺼내 입에 넣었다. 용개 나무 열매를 말린 뒤 갈아서 뭉친 것이었다. 맛이 달면서도 피로 회복에 좋았다. 마르는 나와 몽, 라그나프에게도 한 개씩 주고는 신입에게도 말을 건넸다.
“너도 먹을래?”
그새 아까 꽁했던 건 다 잊었나 보다. 금방 금방 까먹는 게 마르의 장점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신입은 웬일인지 용개환을 받아 유심히 보더니 입에 넣었다.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게 맛이 있나 보다.
요즘 도시에만 있다 보니 조금은 자연과 멀어진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사람 손이 묻지 않은 풍경을 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나 자신도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이랄까. 괴물만 없었더라면 이런 데서 사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잡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갑자기 ‘휘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은근히 날카로운 게 바람소리와는 달랐다. 한 번만 들었다면 착각이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또 다시 ‘휘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다. 다들 바짝 긴장하여 표정이 굳어졌다. 초조하여 손바닥에 땀이 찼고 입술이 말랐다. 마르는 옆에서 어깨를 떨었다. 그때 다시금 ‘휘이’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보다 크고 뚜렷하고 날카로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뛰어!”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자 어딘가 숨어있던 괴물이 나타나 우리를 뒤쫓았다.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여기저기 나 있는 수풀이 얼굴을 베었지만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뒤돌아 볼 틈도 없었다. 내 뒤를 무언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뒤돌아보게 됨으로써 생기게 되는 찰나조차도 용납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궁금해도 참아야했다. 아니 이미 겁에 질려 뒤돌아볼 용기마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괴물의 발소리는 뚜렷하고 거칠었다. 보진 않았지만 괴물은 분명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더 빨리 뛰었다. 없던 힘까지 끌어내 뛰었다. 난 대열의 중간에 있었다. 내 뒤에는 마르와 신입, 둘이나 더 있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죽임을 당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기왕이면 마르보다는 신입이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 들었다.
얼마쯤 뛰었는지 모르겠다. 점차 괴물의 발소리가 멀어져갔고 내가 뒤돌아봤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무사했다. 다들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라그나프가 말했다. 그의 눈은 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괴물이 드글거리는 데를 계속 가로지를 작정이야?”
“.......”
몽은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계획과 실제 마주친 현실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론상으로야 괴물을 만나면 숲 경계선 밖으로 달아나 버리면 되지만 직접 괴물을 보자 달아나기 바빴다. 한 줌의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살기 위해 뛰었다. 운 좋게 모두들 살아나긴 했지만 계속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알겠어?”
몽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모르겠지. 나도 모르니까.”
방향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저 뛰었다. 미지의 괴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결국 우리는 호수 중심인지 외곽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그나마 날이 밝아오고 있단 게 다행이랄까. 몽은 고심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계속 간다. 우린 제법 많이 왔어. 아마 대 여섯 시간만 가면 호수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돌아가는 것보단 앞으로 가는 게 빨라.”
“방항은?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주변을 둘러봐봐. 식생이 달라졌어. 여기 있는 미로동은 늪지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지. 호수가 가깝다는 증거야. 땅도 아까보다 질척거리지. 호수는 서쪽에 있으니 반대 방향은 동쪽이겠지. 우리는 동쪽으로 쭉 가다 남쪽으로 틀면 돼.”
“쳇.”
라그나프는 납득했는지 체념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후,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죠?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마르가 중얼거렸다.
“혹시 그거 제대로 본 사람 있나요? 전 도망가느라 정신없어서.”
마르는 날 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마르는 차례차례 몽, 라그나프를 보았으나 그들도 고개를 흔들긴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마르는 신입을 보았는데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마르가 시선을 거둔 순간 신입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무언가를 본 게 틀림없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진정되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묘하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배꼽까지 자라난 풀이 줄지어 서 있는 들판. 끝이 보이지 않는 풀숲 너머에는 깊은 호수가 있다. 발목만 담가도 빠져나올 수 없는, 빛조차 다가가길 꺼려하는 심연이 있다. 몽의 추측을 듣고 안 게 아니다. 몽이 호수가 근처에 있단 말을 하기 전부터 난 알았다. 단지 기억해내지 못했을 뿐이다. 언젠가 난 이곳에 와 본 적 있다. 착각이나 기시감 따위가 아니다.
그건 분명 9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호수를 지났을 때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여기를 왜 지나갔으며, 여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지만 떠오르는 게 좀처럼 없었다. 점차 난 초조해졌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다.
난 일어나서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생각해내야 했다. 내가 잊고 있는 기억이 굉장히 중대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다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주변을 관찰하다보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상념에 빠져 계속 걸었다. 깨닫고 보니 일행과 꽤 떨어져 있었다. 일행을 향해 돌아가려다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때도 일행들과 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때와 다른 점은 그때는 나 말곤 모두 죽은 사람이었다는 거다.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해.”
난 소리쳤다. 다들 내 말을 이해 못했는지 주저했다. 난 다시 한 번 외쳤다.
“뛰어! 빨리! 여긴 훨씬 위험한 곳이야.”
이만하면 알아들었으리라 싶어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를 쫓아오던 괴물이 이유도 없이 추적을 멈춘 까닭을 생각해봤어야 했다. 눈앞의 먹이를 순순히 보내줄 맹수가 있을까.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한 그리할 동물은 없을 거다. 우리는 소나기를 피하려다 폭풍우를 만날 꼴이었다.
이곳엔 내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형의 목숨을 앗아간 그 놈이 있다. 그때 내 곁에는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나까지 열 셋이었다. 허나 살아난 건 오직 나뿐이다. 난 그들이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틈을 타 달아났다. 그리고 이 날 이때까지 그때의 기억을 모조리 잊고 살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잊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젠장, 너무 많이 잊었다. 조금만 덜 묻어뒀더라면 이딴 곳엔 오지 않았을 거다.
----
열 발자국 쯤 떨어진 골목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온다. 그를 보자마자 내가 기다리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매 번 모습을 달리하고 나타나지만 나는 그가 ‘그’임을 안다. 그는 내게 쪽지 하나를 전해주고 서둘러 가버린다. 내 손에 쥐어져있는 쪽지만 아니라면 그가 왔다갔는지 나조차 몰랐을 것이다.
- 3일 뒤 누하기르 숲 -
젠장, 이번엔 호수를 통과할 작정인가 보다. 만나는 장소는 숲이지만 누하기르 숲 근처에 로셰아 호수가 있다는 건 뮐 교국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호수. 괴물이 우글우글 거리며 들어간 사람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저주받은 호수. 사람들은 로셰아 호수라면 치를 떨며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뮐 교국에 퍼져있는 괴담의 절반은 로셰아 호수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로셰아 호수의 생물들이 호수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수에서 일정 범위 이상은 가려 하지 않으며, 먼저 호수에 접근하지 않는 한 공격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교단도 굳이 퇴치 작업을 나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호수는 긴 세월동안 무인지대가 되었다. 손을 대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에게 손대지 말라. 이 점에서 교단과 괴물들은 통했다.
물론 그곳을 지나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나도 몇 년 전 그곳을 통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가 살아난 건 순전히 운이다. 난 극심한 부상을 입어 몇 십일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살아났다. 당시 겪었던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우며 손발이 풀릴 지경이다. 다시 로셰아 호수에 가야한다니 오줌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맘 같아선 다 때려 치고 싶지만 배운 일이 이것뿐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이것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긴 조직의 윗대가리들도 바보는 아니니 어느 정도는 방법을 마련해 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맘이 편해졌다.
이틀 간 준비를 한 뒤 삼일 째 새벽 누하기르 숲으로 향했다. 조직의 특별한 표식이 군데군데 나 있어 어렵지 않게 집결 장소를 찾았다. 도착해서 보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난 낯익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어, 마르. 너도 이번 일을 맡게 됐나 보지?”
마르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이야. 장. 세 달만인가?”
“용케도 그걸 기억하고 있군.”
“하하, 내가 기억력 하나는 쓸 만하지.”
마르가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마르와 난 비슷한 시기에 조직에 들어갔고 나이도 같았다. 게다가 우연의 일치인지 한 조에 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하다보면 몇 날 며칠이고 같이 낮밤을 보내게 된다. 그렇기에 한 번만 같이 일을 해도 제법 친근감을 갖게 되는데 마르와 난 열 번 가량 일을 함께 했다. 조직의 규칙 때문에 밖에서는 연락을 하지 못하지만 때때로 난 마르가 친형제 마냥 느껴졌다. 그건 마르도 마찬가지일 거다.
“저 친구는 누구지? 못 보던 얼굴인데.”
인사를 나눈 뒤 방금 생겨난 의문을 얘기했다. 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처음 봐. 아마 신입인가 보지.”
나나 마르는 일을 한지 오래되었기에 조직 사람들 얼굴을 거의 다 알았다. 그래봐야 운반책들의 얼굴 정도지만.
“신입이라 오랜만이네.”
요즘 들어 국경 지역 경계가 강화되다 보니 일을 못하고 있다. 명목은 요사스런 괴물들이 신성 대산맥을 감히 침범하기 못하게 하고 이단자를 처단해서 믿음을 한결 공고히 하기 위함이지만 실상이 다르다는 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한 조치이다. 교단에서 불법 이민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뮐 교국에는 남부지방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제법 살고 있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볼 때 뮐 교국은 꿈속에서 그리던 이상향이었다. 부드러운 꽃향기가 흐드러지게 퍼져 있는 가운데 신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곳. 바라는 건 모든 게 다 이루어지며 온갖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곳. 어떤 이들은 뮐 교국을 싫어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지만 대게는 선망한다. 이 땅에 천국이 있다면 뮐 교국이 천국 그 자체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국가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때 뮐 교국은 국가를 이루고 문화를 꽃피웠다. 남부 지방 사람들이 괴물들에게 도륙당할 때도 뮐 교국은 당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맞섰다. 뮐 교국 사람은 남부 지방 사람보다 키도 컸으며 ‘신의 힘’을 쓸 수 있었다.
이러하니 남부 지방 사람들이 뮐 교국에 가 살고 싶어 하고, 뮐 교국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직까지도 괴물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남부 지방의 어지러운 정세도 불법 이민을 한결 부추겼다. 그나슈페트란 국가가 남부에 생겨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뮐 교국에 비하면 형편없는 국력이어서 국가를 보존하기도 바빴다.
조직은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었다. 뮐 교국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뮐 교국에 살게 해주었다. 뮐 교국으로 가고자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대단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직은 대단히 바빴다. 하루에 40~50명 정도를 산맥 너머로 빼돌리곤 했다. 허나 요즘엔 교단의 강력해진 단속 때문에 입맛만 다시고 있는 형편이다. 나도 세 달 전 일을 한 뒤 쭉 손을 놓고 있었다. 돈이 궁한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 떠났고 조직도 그들을 붙잡을 여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규모가 줄었다. 인원이 줄어 아쉬웠던 참에 신입이 들어왔다니 반가웠다.
“이름이 뭐요?”
난 신입에게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옆에 있던 마르가 대신 말했다.
“소용없어. 내가 몇 번 말을 걸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
“과묵한 성격인가?”
“어쩌면........”
마르가 소리를 낮추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림자일지도 모르지.”
“그림자라.......”
불법 이민 온 자들은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놓고 살 수 없다. 정체가 드러나는 즉시 신성 대산맥 아래 남부 지방으로 내쫓기거나 차디찬 북서부 지방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결국 그들은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뮐 교국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그들은 그림자라 불린다. 그들은 낙원을 찾아 왔지만 그들에게 낙원은 없었다.
“네 얘기가 맞는 것 같아.”
난 마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림자들은 뮐 교국의 말에 익숙하지 않기에 입을 여는 순간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그 때문에 그들은 웬만해선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쳇, 적어도 우리 앞에선 과묵할 필요가 없는데.”
마르가 빈정거렸다.
“버릇인가 보지. 괜히 마구 떠벌렸다가 잡혀가는 것보단 낫잖아.”
딱히 맘에 들진 않지만 신입을 옹호해주었다. 신입의 행동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두 명이 더 나타났다. 몽과 라그나프였다. 몽은 나나 마르보다 열 살쯤 많았고 라그나프는 일곱 살이 많았다.
“같이 오신 건가요?”
내가 몽에게 물었다.
“아니, 요 앞에서 만났어.”
“그랬군요.”
“오래 기다렸나?"
"아뇨. 방금 왔습니다.”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그럼 시작하지.”
몽이 말했다. 이번에도 몽이 조장인가 보다.
“벌써요? 다섯 명 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보통 한 번 일을 할 때 열다섯 명에서 스물 명 정도로 조를 짜기 마련이다. 헌데 오늘은 다섯 명 뿐이었다.
“이게 다야. 다들 연락이 잘 안 돼.”
하긴 로셰아 호수는 ‘신의 힘’을 지닌 이들도 꺼리는 곳이다.
“젠장, 겨우 다섯 가지고 뭘 하자는 건지.”
라그나프가 불만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으로선 이게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야.”
“그럼 다른 날로 미루면 되지 않습니까?”
“현재 조직 사정이 좋지 않아. 일을 못하다보니 자금도 말라가고 조직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어. 행간에선 우리 조직이 망해버렸단 소문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실제로 그렇게 될 거고. 그러니 한 번쯤 일을 제대로 해내서 조직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조직의 뛰어난 능력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어. 이번 일은 조직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야.”
몽은 술술 내뱉었다. 미리 준비라도 한 마냥.
“할 수 없군.”
라그나프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조직이 망할지 모른다니 그로서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근데 방법은 있수? 로셰아 호수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나도 그 점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마르도 흥미가 동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몽을 바라봤다. 단지 신입만이 별 관심 없어했다.
“물론 있지.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야. 우리는 로셰아 호수 외곽을 따라간다.”
“하아.......”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온다. 여길 집결지로 삼았을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설마설마 했다.
“외곽으로 가면 괴물이 습격해올 시엔 괴물들의 거주지 밖으로 금방 달아날 수 있고, 순찰 나온 군사들에게 들켜도 외곽선 안으로 들어가면 쫓아오지 못한다.”
반대로 군사들에게 붙잡힐 수도 괴물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 한쪽을 피하면 다른 하나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요컨대 위험이 두 배였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거의 절망적인 목소리로 나는 물었다. 곧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없다. 주요 통로는 교단이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그리로 가는 건 자살 행위다.”
호수 외곽선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듯 싶었으나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악의 경우 나만 잡혀들어 가도록 손을 쓸 테니 너무 걱정마라. 아직은 교단에 연줄이 남아있으니까. 대신 이번 일만 성공하면 보수는 평소의 세 배가 지급된다. 명심하고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대답하고 길을 나섰다. 세 시간쯤 걷자 교단에서 세운 경계판이 보였다. 경계판은 호수를 감싸듯이 호수 전체에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로셰아 호수니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
짧은 경계문구지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호수 주변엔 사람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온갖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인세의 황량함을 느끼게 했다. 길이 없었기에 풀을 헤치며 나아가야했다. 덕분에 움직이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한편으로는 밖에서 누군가 보더라도 쉽사리 우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긴장한 채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언제 어디서 괴물의 습격을 받을지 몰랐다. 비록 호수 외곽이기는 했지만 분명 괴물들의 영역이었다. 지금 당장 잡아먹히더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도 별 다른 괴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자 다들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말은 안했지만 호수 외곽이라서 괴물이 나타나질 않는 거려니 짐작하는 듯 했다. 허나 몇 년 전 호수를 지나와 본 적이 있는 나로선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잊었나 보다. 단지 호수에 오면 안 된다는 것만 기억했다.
“잠깐 쉬었다 갈까?”
몽이 얘기를 꺼내자 다들 반가워하는 기색이다. 거친 숲에 길을 만들며 오는 일은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말은 안했지만 다들 지친 게 틀림없다. 체력 좋은 라그나프도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고 좋게 봐줘야 보통 밖에 안 되는 마르는 아까부터 헉헉대고 있다. 단지 신입만이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숲 한가운데서 쉬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씩 쉬면서 가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다들 뻗어버릴 게 뻔했다.
바닥에 앉자마자 마르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걸 몇 알 꺼내 입에 넣었다. 용개 나무 열매를 말린 뒤 갈아서 뭉친 것이었다. 맛이 달면서도 피로 회복에 좋았다. 마르는 나와 몽, 라그나프에게도 한 개씩 주고는 신입에게도 말을 건넸다.
“너도 먹을래?”
그새 아까 꽁했던 건 다 잊었나 보다. 금방 금방 까먹는 게 마르의 장점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신입은 웬일인지 용개환을 받아 유심히 보더니 입에 넣었다.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게 맛이 있나 보다.
요즘 도시에만 있다 보니 조금은 자연과 멀어진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사람 손이 묻지 않은 풍경을 보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나 자신도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이랄까. 괴물만 없었더라면 이런 데서 사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잡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갑자기 ‘휘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은근히 날카로운 게 바람소리와는 달랐다. 한 번만 들었다면 착각이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또 다시 ‘휘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다. 다들 바짝 긴장하여 표정이 굳어졌다. 초조하여 손바닥에 땀이 찼고 입술이 말랐다. 마르는 옆에서 어깨를 떨었다. 그때 다시금 ‘휘이’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보다 크고 뚜렷하고 날카로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뛰어!”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자 어딘가 숨어있던 괴물이 나타나 우리를 뒤쫓았다. 나는 뛰고 또 뛰었다. 여기저기 나 있는 수풀이 얼굴을 베었지만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뒤돌아 볼 틈도 없었다. 내 뒤를 무언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뒤돌아보게 됨으로써 생기게 되는 찰나조차도 용납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궁금해도 참아야했다. 아니 이미 겁에 질려 뒤돌아볼 용기마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괴물의 발소리는 뚜렷하고 거칠었다. 보진 않았지만 괴물은 분명히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더 빨리 뛰었다. 없던 힘까지 끌어내 뛰었다. 난 대열의 중간에 있었다. 내 뒤에는 마르와 신입, 둘이나 더 있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죽임을 당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기왕이면 마르보다는 신입이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 들었다.
얼마쯤 뛰었는지 모르겠다. 점차 괴물의 발소리가 멀어져갔고 내가 뒤돌아봤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무사했다. 다들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라그나프가 말했다. 그의 눈은 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괴물이 드글거리는 데를 계속 가로지를 작정이야?”
“.......”
몽은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계획과 실제 마주친 현실의 차이가 너무 컸다. 이론상으로야 괴물을 만나면 숲 경계선 밖으로 달아나 버리면 되지만 직접 괴물을 보자 달아나기 바빴다. 한 줌의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살기 위해 뛰었다. 운 좋게 모두들 살아나긴 했지만 계속 운이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알겠어?”
몽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모르겠지. 나도 모르니까.”
방향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저 뛰었다. 미지의 괴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결국 우리는 호수 중심인지 외곽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그나마 날이 밝아오고 있단 게 다행이랄까. 몽은 고심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계속 간다. 우린 제법 많이 왔어. 아마 대 여섯 시간만 가면 호수를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돌아가는 것보단 앞으로 가는 게 빨라.”
“방항은?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주변을 둘러봐봐. 식생이 달라졌어. 여기 있는 미로동은 늪지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지. 호수가 가깝다는 증거야. 땅도 아까보다 질척거리지. 호수는 서쪽에 있으니 반대 방향은 동쪽이겠지. 우리는 동쪽으로 쭉 가다 남쪽으로 틀면 돼.”
“쳇.”
라그나프는 납득했는지 체념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후,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죠?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마르가 중얼거렸다.
“혹시 그거 제대로 본 사람 있나요? 전 도망가느라 정신없어서.”
마르는 날 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마르는 차례차례 몽, 라그나프를 보았으나 그들도 고개를 흔들긴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마르는 신입을 보았는데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마르가 시선을 거둔 순간 신입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무언가를 본 게 틀림없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진정되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묘하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배꼽까지 자라난 풀이 줄지어 서 있는 들판. 끝이 보이지 않는 풀숲 너머에는 깊은 호수가 있다. 발목만 담가도 빠져나올 수 없는, 빛조차 다가가길 꺼려하는 심연이 있다. 몽의 추측을 듣고 안 게 아니다. 몽이 호수가 근처에 있단 말을 하기 전부터 난 알았다. 단지 기억해내지 못했을 뿐이다. 언젠가 난 이곳에 와 본 적 있다. 착각이나 기시감 따위가 아니다.
그건 분명 9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호수를 지났을 때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여기를 왜 지나갔으며, 여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지만 떠오르는 게 좀처럼 없었다. 점차 난 초조해졌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다.
난 일어나서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생각해내야 했다. 내가 잊고 있는 기억이 굉장히 중대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다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주변을 관찰하다보면 무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상념에 빠져 계속 걸었다. 깨닫고 보니 일행과 꽤 떨어져 있었다. 일행을 향해 돌아가려다 불현듯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때도 일행들과 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그때와 다른 점은 그때는 나 말곤 모두 죽은 사람이었다는 거다.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해.”
난 소리쳤다. 다들 내 말을 이해 못했는지 주저했다. 난 다시 한 번 외쳤다.
“뛰어! 빨리! 여긴 훨씬 위험한 곳이야.”
이만하면 알아들었으리라 싶어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 따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를 쫓아오던 괴물이 이유도 없이 추적을 멈춘 까닭을 생각해봤어야 했다. 눈앞의 먹이를 순순히 보내줄 맹수가 있을까.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한 그리할 동물은 없을 거다. 우리는 소나기를 피하려다 폭풍우를 만날 꼴이었다.
이곳엔 내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형의 목숨을 앗아간 그 놈이 있다. 그때 내 곁에는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 나까지 열 셋이었다. 허나 살아난 건 오직 나뿐이다. 난 그들이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틈을 타 달아났다. 그리고 이 날 이때까지 그때의 기억을 모조리 잊고 살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잊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젠장, 너무 많이 잊었다. 조금만 덜 묻어뒀더라면 이딴 곳엔 오지 않았을 거다.
----
